226화
1년 365일 중, 오클랜드가 가장 안전한 날이 언제일까? 사실 도시 내 우범지대의 경우 1년 중 안전한 날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지만. 개중에서 그나마 안전한 날을 꼽는다면, 아마 오늘이지 싶다.
가장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열 손가락 안에는 꼽히는, 오클랜드 전체가 아주 친절한 보기 드문 날이겠지. 모두의 신경이 한 곳에 쏠려 있었으니까.
“국경일 수준인데요?”
“그보다 더하죠, 최소한 애슬레틱스 팬들에게는.”
“또 늦은 밤에 엄청 시끄럽겠네요,”
“그렇겠죠, 오늘 Go가 잘한다면, 타이어가 미끄러지는 소리가 한참 동안 유지될 테니까요.”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더라도 마찬가지겠죠.”
“그거야 당연한 일이고요.”
아마 오늘도 사이드쇼가 엄청나게 열릴 거다. 사이드쇼가 뭐냐고?
오클랜드의 명물이지.
폭주족들이 야밤에 빙글빙글 드리프트 하는 거다. 사람이나 차를 치지 않도록, 아슬아슬하게 원을 그리면서.
종종 내가 잘하거나, 어떤 기록을 만드는 날이면 그런 축제(?)가 열리기도 하지.
종종 괴상한 코스튬을 하고, 왠지 모르게 애슬레틱스의 유니폼을 그 위에 껴입은 사람들이 출몰하기도 하고 말이야.
‘레이더스도 전투력 만땅이겠네.’
아마도 그렇겠지.
기록도 걸려 있고, 상대도 딱 욕 박기 좋은(?) 애스트로스고, 거기다 홈경기고.
콜리시엄 근처에 바글거릴 거다. 잔뜩 흥분해서. 이상한 노래 같은 걸 만들어서 자기들끼리 부르고 있을 수도 있고.
‘관중석에는 사람이 가득하겠지.’
구단에서도 행사를 열었다.
오늘 티켓 값도 할인이고, 간식거리 같은 것들도 할인이고, 그러니 관중석이야 이번에도 가득하겠지.
또 뭐라더라? 구단 레전드들의 기록이나 우승 트로프도 전시한다고 했던가?
누가보면 월드시리즈 우승 행사인 줄 알 거야. 무슨 5월에 정규시즌 경기에서 이러냐고 의문스러워하겠지.
‘내 사인 유니폼은··· 좋은 아이디어가 아닌데 그걸 못 알아먹는단 말이지.’
친필은 아니고, 프린팅한 내 사인이 멋들어지게 휘갈겨져 있는 유니폼과 모자, 글러브도 용품샵에서 일종의 한정판매 하지만, 그쪽은 아마 시원찮을 거다.
내가 직접 사인펜 들고 사인해주겠다고 해도 이미 많다면서 거절하는 사람들이 태반인데, 잘 팔릴 리가 있나.
아무튼 그렇듯 오클랜드에는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이 악명 높은 범죄도시를 잠깐 동안진정시킬 정도로 성대한 축제가.
단순히 구단뿐만이 아니라, 개인 단위, 동네 단위로 축하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스폰서들도 박차를 가하고 있지.’
단기간 계약으로, 슬슬 종료 시기가 다가오고 있는 스폰서들 역시, 최대한 마지막까지 내 인기를 뽑아먹기 위해, 아주 제대로 액셀을 밟았다.
“Suck이다!”
“Suck 차 맞지?”
“You Suck! You Suck!”
콜리시엄으로 향하니, 아니나 다를까, 그 주변 수 킬로 안쪽에서부터 사람의 행렬이 쭉 늘어서 있었다.
레이더스도 엄청나게 많고, 다들 아주 전투적인 무장을 하고서 나타났군. 워페인팅인가? 얼굴을 숯검댕이로 덮었군. 바바리안이 따로 없어.
한 가지 궁금한 건, 내 차까지 알아보면서, 어째서 내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사람이 없느냐는 거였다.
내가 요즘에는 별로 신경질을 안 내는 편인데, 이젠 슬슬 좀 걱정이 되거든. 저 사람들, 어쩌면 진짜로 내 이름이 유석이 아니라, 유썩인걸로 아는 거 아니야?
“제 이름 발음이 어려워요? 아닐 텐데?”
“발음 자체는 그리 어렵지는 않지만, 비슷하고 강렬한 단어들이 따로 있으니까요.”
어쩌겠어, 여권 만들고, 계약하고, 선수 등록할 때, 무식해가지고 이상한 표기로 적은 내 잘못이지.
물론 제대로 표기했더라도, 마음대로 유썩유썩 거렸을 가능성이 100%지만 말이야.
“써-억! 오늘 잘 던져요!”
“그래, 너도 경기 잘 봐라.”
“써-억! 기록 달성하는 거 맞죠? 오늘 그거 보려고 아빠랑 같이 온 건데.”
“물론이지, 애초에 그러려고 오늘 나오는 거야. 기록은 홈에서 해야지.”
차에서 내리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이번엔 그래도 풍년이었다.
간만에 사인들 좀 받아가는군. 한동안 사인을 못 해봐서 조금 섭섭했었는데, 오늘은 손목을 제법 놀렸어.
어린애들은 은근히 부모의 눈치를 보며, 굳이 나를 써-억이라고 불렀다.
부모님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욕설을 뱉을 수 있는 게 아주 매력적으로 느껴졌겠지. 내 이름인 척 말이야.
이해한다. 나도 저 나이 땐 저랬어. 욕 비슷한 것만 하나 뱉어도 아주 자지러졌지. 왠지 웃기기도 하고 흡족하기도 하고.
‘다들 상상도 못하고 있네.’
이토록 몰려든 사람들은 아마 모르고 있을 거다. 한동안은 오늘의 기억을 추억 삼아 되새김질하면서, 외부의 풍랑을 버텨야 한다는 걸.
그렇기에 의무감도 들었다.
이토록 몰려든 사람들, 그리고 여기에는 없더라도, 내 경기를 지켜보고 있을 팬들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줘야 했다.
그래야지만, 곧 다가올 거센 비바람에 쓰러지거나, 도망치지 않고, 오늘의 기억에 기대어 꿋꿋하게 버텨줄 테니까.
다행스럽게도.
“Go, 컨디션은 좀 어때?”
“좋아요.”
준비는 잘 갖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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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알고 있겠지만, 오늘 경기에 걸려 있는 건 두 가지다.
하나는 연속 이닝 무실점 기록으로, 현재까지 54이닝이니, 작년의 53.1이닝의 기록을 넘어, 역대 4위에 해당하지.
3위는 55.2이닝으로 무려 월터 존슨, 말할 것도 없이 역대 최고의 투수로 꼽히는 분이시고.
2위는 58이닝으로 돈 드라이스데일도 다저스의 레전드 중 한 명이지. 더욱더 놀라운 건, 이 기록을 하는 도중, 무려 여섯 경기 연속으로 완봉을 했다는 거고.
여기까지만 하더라도 역대급 기록이고, 사실, 내 기록이 4,5위에 나란히 노미네이트 되어 있으니, 이미 X나게 대단한 셈이지만.
당연하게도 오늘 내가 노리고, 구단이 바라고, 팬들이 염원하는 건 2위가 아니다.
‘오렐 허샤이저, 그를 넘어야지.’
1위 기록, 59이닝. 오렐 허샤이저가 같은 구단 선배 레전드인 돈 드라이스데일을 넘어, 정상에 찬란하게 꽂아 넣은 기록.
내 기억이 맞다면 이 양반도 도중에 5경기 연속 완봉을 했을 거다. 진짜 미친 사람들이야.
그러고도 어깨가 남아나는 게 신기하다니까. 진짜 강철로 만든 것도 아닐 텐데.
솔직하게 말해서, 지금 내 기록이 그 정도의 임팩트는 아닐 거다.
나도 완봉 두 개가 있기는 한데, 솔직히 다섯 경기나 여섯 경기 연속 완봉은 좀 심하게 괴물이지.
아무튼 가장 집중적으로 조명되고 있는 건 당연히 이 기록이고, 오늘 6이닝 무실점만 하더라도 일단은 신기록이다.
‘그리고 500탈삼진. 사실 이쪽도 충분히 미치긴 했지.’
그다음으로 걸린 건 탈삼진.
당연히 신기록은 아니다.
통산 탈삼진 신기록은 놀란 라이언인데, 5714개거든. 택도 없네.
그냥 역대급 페이스라는 거지. 현대 야구에서 데뷔 직후 이토록 빠르게 500탈삼진을 올리는 선수가 없다나 뭐라나.
‘주목도 덜하고, 난이도도 훨씬 쉽기는 하지.’
이쪽은 더 간단하다. 딱 4개 남았거든. 작년에 393개, 올해 103개로 496개니까. 2이닝이면 떡을 치고도 남지.
‘상대팀 상태를 보니, 더 안심되기도 하고.’
“애스트로스, 맛이 갔지?”
“어, 오늘은 경기장 들어올 때부터 다리를 후들거리더라. 네가 무섭나봐.”
“그렇겠지.”
작년, 당당하게 메이저리그를 호령했던 디펜딩 챔피언은 쫄보가 됐다.
맞서 싸워서 승리하고, 당당하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후퇴하고 포기하는 것을 배워버렸거든. 그 첫 번째가 나고.
워밍업 하면서 눈이 마주친 애스트로스 선수들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열심히 내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물론 악을 쓰듯 노려보는 선수들도 있었지만, 그들 역시 약간의 껄끄러움을 감추지 못했지.
팀 분위기가 그렇게 잡혀버린 거야, 선수단의 정신이.
“경기 초반에는 삼진부터 좀 타이트하게 잡자.”
“시작부터 달리려고?”
“어차피 길게 안 갈 거니까. 그리고 비교적 쉬운 것부터 먼저 해치우자고.”
“오케이, 타자들은 알아서 잘 관찰할 게, 그냥 쾅쾅 던지기만 해.”
“오냐, 이제 좀 말이 통하네.”
평소에는 빡세게 던진다고 하면 징징거리기 바빴던 녀석이, 제법 성장했어.
“그리고 타격은 기대하지 말고. 지난 경기 하이라이트 보니까, 게릿 콜 미쳤더라. 디백스를 때려잡던데?”
“···난 포수니까, 포수 일에만 집중해야지. 타격은 다른 야수놈들에게 맡기고.”
“그렇지, 그래야지. 아주 현명하군.”
다만 타격으로는 성장하지 않았으니, 그쪽으로는 그리 만족스러운 성과를 내지는 못하겠지.
오늘 내가 애스트로스 타자들을 죽일 거라면, 그만큼 우리 팀도 많이 얻어맞을 거다.
상대 투수가 좀 빡세거든.
게릿 콜,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15년에 잠깐 확 올라온 걸 빼면, 그냥저냥 무난했던 투수인데, 올해는 기세가 날카롭다.
일곱 경기 등판해서 ERA 1.42에 삼진도 77개나 잡았지, 심지어 바로 직전 경기인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전에선 9이닝 무실점 16K로 완봉까지 해버렸고.
‘사람들이 왜 나를 의심하는지 알겠어.’
그를 보니, 왜들 그렇게 날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인지 알 것 같았다.
나도 갑자기 누가 잘하면 X나 수상해 보이는데,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때는 오죽하겠어.
그야말로 리그 탑급의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으니, 작년 내가 겪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파인타르에 대한 의혹도 나오고 있던데, 저쪽도 고생이 많겠구만.
“너랑 나는 상대 타자들만 잘 잡으면 돼. 나머지는 다른 놈들에게 맡기자고.”
물론 나랑은 관계없는 일이다. 그가 우리 타선을 털든 말든, 나도 저쪽 집에 불 지르면 되는 거지. 그게 가장 쉽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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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경기에서 가장 좋은 게 있다면, 그 누구에게도 더럽혀지지 않고, 깨끗한 마운드 위에 내 발자국을 가장 처음 찍는 거다.
이게 또 기분이 죽여주지.
새하얀 도화지 위에 첫 번째 선을 쫙 긋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왠지 모르게 설레기도 하고, 두근거리기도 하고, 이 첫 발자국이 과연 어디로 나아갈까, 궁금하기도 하고. 아주 복잡미묘하지.
‘잘 보이네. 낮 경기가 이래서 좋다니까.’
오늘은 평소처럼 저녁이 아니라, 정오에 경기가 시작돼서, 해가 아주 쨍쨍한데,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꾸욱 찍어누른 발자국이 아주 잘 보였다.
그래, 이 맛이지.
‘안 그래? 너도 마찬가지일 거 같은데.’
마찬가지로 오늘 처음으로 배터박스로 입장한 조지 스프링어에게 물었지만, 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거, 서운하게 너무 노려보시네.
누가 보면 내가 니들한테 잘못한 줄 알겠다. 니들이 먼저 헛짓거리 했다가 욕먹고, 그러다가 나한테 개털렸으면서, 누구한테 원망이야?
아마도 그는 지금 팀이 흔들리는 원인을 나에게서 찾은 것 같은데.
“스트라이크!”
정답이다.
그치, 내 덕분이지.
거친 파도의 앞에서 애스트로스라는 배의 선원들이 꿈꿨던 단 하나의 희망마저 짓밟아버린 게 나니까. 그리고 그건···
“스트라이크!”
오늘도 마찬가지고.
조지 스프링어, 성적 자체는 여전히 좋다. 3할에 아슬아슬하게 못 미치는 타율에, OPS도 8할 6푼 정도니까.
사실 팀 성적과는 별개로 애스트로스 타자들은 여전히 스탯이 좋아, 대부분 그렇지.
애초에 그런 실력을 갖췄으니, 작년에 우승했겠지. 아무리 헛짓거리가 있었다고 해도 말이야.
허나, 그런 여전히 준수한 실력은.
“파울!”
오늘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니들이 스스로 포기했잖아?
그러니 달게 받아들여야지.
조지 스프링어는 가까스로 3구, 투심 패스트볼을 쳐냈지만, 묘하게 타이밍이 늦었다. 전체적으로 그렇지.
분명 눈알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걸 보면, 정신은 따라오고 있는데, 이건 몸이 제 말을 안 듣는 거다.
굳은 거지. 아무리 정신이 또렷하다고 해도, 몸이 굳어버린 거야. 그들이 나를 어쩔 수 없는 포식자로 인정한 순간부터, 이미 예정된 일이고.
‘일단 하나 잡고 시작하자.’
그렇기에 나로선 마음이 편했다. 톰슨가젤 무리 사이를 뛰어다니는 사자처럼.
“스트라이크 아웃!”
어느 놈 목을 물어버릴지, 그저 행복한 고민만 하면 되니까. 그런 의미에서 가장 먼저 모가지가 꺾인 건 조지 스프링어였고 말이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얘가 첫 타자잖아? 그러니까 첫 빠다로 조지는 거지.
어차피 다 조질 건데, 그중에서 순서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만.
‘자, 이제 우리 드워프 대왕께서 나오셨군.’
그다음 2번타자는 호세 알투베. 뭐, 대부분 이렇지. 별다르게 특이한 타순은 아니다.
“어이! 땅딸보! 삼진 잘 처먹어라, 알았지?”
“지난 경기처럼만 해! 아주 좋더라!”
지난 경기에서, 흔들리던 팀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비장한 각오를 했던 그는 놀랍게도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어쩌면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나한테 한방 날려서, 흔들리다 못해 무너지기 시작한 팀을 보수공사 하겠다는 거지.
‘대단한 선수이기는 하네.’
본인도 제법 충격이 컸을 텐데도 쉽게 꺾이질 않는 걸 보면, 괜히 저 작은 신체 사이즈로 메이저리그를 호령하는 게 아니야.
그것에 혀를 내둘렀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스트라이크!”
그래서 어쩌라고.
정신은 인정할 만한데.
너 어차피 제정신일 때도 나한테 개털리지 않았냐?
물론 애스트로스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타자는 맞지만, 뭐, 그렇다고 해서 가장 위험한 타자인 트라웃이나, 아니면 지난번에 맞붙었을 때 트라웃 수준의 위협감이 들었던 무키 베츠 같은 수준의 느낌은 없었다.
당연히 작년, 호세 알투베 본인과 비교하더라도 조금은 무게감이 덜했고 말이다.
“볼.”
그저 적당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정도면 충분하지.
‘찍어서 잡자, 그래도 혹시 모르니, 괜히 끌었다가 귀찮아질라.’
“파울!”
3구 몸쪽으로 쭉 날아온 포심을 그는 쳐냈지만, 묵직한 손맛에 살짝 손이 아리는 듯 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애써 감춘다고 감춘 것 같지만, 내 눈은 못 속이지.
‘확실히 파워도 작년보다는 조금 덜한 것 같고.’
정타를 맞는다면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최악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러니···
“아웃!”
마음 편하게 잡아야지. 아무리 생각해도 공을 담장너머로는 못 넘길 것 같으니 말이야.
다시금 포심 패스트볼.
높게, 어깨 정도 높이로 날아간 공에 그는 배트를 휘둘렀지만, 타이밍이 제법 잘 맞았는데도 배트가 밀렸다.
알투베의 힘이 떨어진 것도 있겠지만, 오늘 내 공이 좋은 것도 크겠지.
내가 원래 태양열로 돌아가거든. 평소처럼 저녁 경기가 아니라, 간만에 낮 경기라서 그런가, 공이 쭉쭉 잘 가네.
“스트라이크 아웃!”
그다음 타자, 율리 구리엘은 그냥 삼진으로 잡았다. 떨어지는 서클 체인지업에 아주 멋진 헛스윙을 보여주더라.
“You Suck!”
“레이시스트 컷!”
“겨우 2개? KKK는 해야지! 오늘 같은 날이면! 거기다 홈인데! Suck 아직 부족하다!”
“그래, 최소한 12개는 더 잡아!”
분위기는 적당히 달아올랐다.
누구 말마따나 KKK였다면 경기 시작부터 펑 터졌겠지만, 첫 술에 배부를 수가 있나.
어차피 잡을 놈들 쌔고 쌨는데, 편안~하게 골라서 먹으면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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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폼 좋네. 아니, 저게 기본인가?”
“제대로 작정한 것 같지?”
“어, 이 악물고 던지더라.”
“하아, 왜 하필 우리가 만나서···”
이제 고작 1회가 지나갔는데도, 애스트로스의 덕아웃에선 한숨이나 한탄 같은 것들이 흔해졌다.
그들의 선발투수, 게릿 콜이 마찬가지로 애슬레틱스 타선을 삼자범퇴로 잘 잡았는데도 말이다.
게릿 콜은 자신의 경기에서 벌써부터 의욕을 잃은 듯한 타자들이 짜증 나면서도, 마냥 그들을 질책할 수만은 없었다.
자신이라도 막막했을 테니까.
역대급 기록이 걸린 순간.
그것의 제물로 바쳐진 처지이니,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물론 애스트로스 역시 나름의 준비를 하기는 했다. 애석하게도 카를로스 코레아라는 핵심 타자가 나오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타자들 역시 없는 힘을 모아, 최대한 맞서 싸우자고 이야기하며,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훈련했었지.
특히 작년의 트라웃처럼 그의 기록을 홈런 한방으로 망가뜨리자며 소리치기도 했고.
허나 1회 초가 시작된 순간, 그런 기세는 놀랍도록 사라졌다. 그나마 작년 홈런을 날린 전적으로 기대받았던 조지 스프링어도 마찬가지였고.
“약이라도 걸려서 한 80경기쯤 출장 정지 받으면, 그래도 시즌 할 만할 것 같은데.”
“그러면 최고겠지.”
“80경기가 아니라, 162경기는 돼야지.”
그렇게 집중이 흐트러지자, 2회 초, 다시 녀석이 마운드에 올랐을 땐, 삿된 망상이 선수들 머리에 떠오르기도 했다.
워낙 괴물 같은 녀석이고, 자신들이 끌어내릴 수가 없다는 확신이 드는 놈이었기에.
그냥 다른 요인으로 훨훨 멀리 날아가길 바라고 있지. 예를 들어 도핑으로 인한 출장 정지라던가.
“누굴까? 그 도핑.”
“몰라, 뭐, 한두 명도 아니고.”
“Suck 쟤면 진짜 소원이 없겠네.”
“최소한 우리 팀은 아니니까, 그나마 다행이지.”
며칠 전부터 스멀스멀 피어올랐던, 대단한 슈퍼스타급 선수가 도핑에 걸렸다는 소문은 이젠 대부분의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알고 있었다.
애초에 얼마 되지 않는 집단인 만큼, 소문이 퍼져나가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으니까. 어쩌면 그 소문의 주인공도 알고 있겠지.
두려움에 떨고 있을 거고.
팀의 스타급 선수가 한순간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많은 구단들이 덜덜 떨거나, 자신들의 동료 혹은 적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지만.
이미 멸망의 과정을 걷고 있는 휴스턴에는 그나마 그런 분위기는 없었다.
서로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는 선수들이기에, 누군가 도핑을 했다면 분명 훨씬 이전에 알았을 테니까.
“스트라이크 아웃!”
사실 동료의 삼진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며 별 관심이 없는 것만 보더라도, 이젠 딱히 그런 유대감이 있는 것도 잘 모르겠지만.
그렇기에 남의 일을 이야기하듯 투덜거리던 선수 중 꽤나 많은 이들이 간절하게 바랐다.
부디 그 대단하다던 슈퍼스타가 저 녀석이기를, 지금 마운드 위에서 미친 듯이 던지는 저놈이기를.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래서 저 녀석이 아주 오랫동안 나오지 못한다면, 애스트로스의 앞날이 훨씬 더 밝아질 테니까.
물론 그렇게 깊이 바라면서도, 오히려 그들이기에 그것이 그저 망상임을 알고 있었다.
“아니겠지, Suck 쟤는.”
“쟤가 약은 무슨, 지 잘난 맛에 사는 놈일 텐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새낀 무조건 아니야.”
“차라리 부상으로 날아가는 걸 빌고 말지, 쟤가 약을? 어림도 없어.”
자신들을 향해 쏘아 보냈던 경멸어린 시선을 숱하게 느꼈기에, 더욱더 잘 알았다.
쟨 절대로 그럴 놈이 아니다. 만약 본인도 조금이나마 찔리는 것이 있다면, 그토록 순수하게 애스트로스를 매도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물론 약쟁이들이 자신에겐 관대하고, 남에겐 엄격한 것이 드문 일이 아니라고는 하나, 최소한 애스트로스가 느끼는 고유석은 그랬다.
“500탈삼진은··· 막기엔 이미 글렀지?”
“그거야 이미 각오한 거잖아. 그래도 엄청난 기록까지는 아니니까.”
“500탈삼진 좀 내줘도 레인저스보단 낫지. 단일 시즌 최다 탈삼진 당하는 것 보다야 500탈삼진이 훨씬 그림이 좋잖아?”
그렇기에 더욱더 한숨만 나오고 있었고, 탈삼진이야 이미 예정된 일이다. 고작 4개를 추가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저 괴물 같은 녀석이.
4개가 아니라, 14개, 24개의 탈삼진도 잡고 남을 놈이지.
이미 3개나 올렸고 말이다.
그렇기에 그것의 제물이 되는 것 정도야 이미 각오한 일이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오렐 허샤이저? 돈 드라이스데일? 월터 존스? 그런 이름들을 앞서는 기록을, 우리가 만들어준다고? 우리가?
“X발···”
잠깐의 망상으로 잠시 잊고 있던 그 참담한 기록이 떠오르자, 몇몇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구기며 욕설을 토해냈다. 그와 동시에 주심의 우렁찬 목소리도 함께 울렸고.
“아웃!”
4번타자, 알렉스 브레그먼에 이어, 마윈 곤잘레스까지 금방 타석에서 물러났다.
비록 삼진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새로운 기록이 만들어졌지.
전광판 가득 채워진 글자, 55.2이닝, 월터 존슨과 함께 공동 3위라는 걸 널리널리 알리는 글자에 휴스턴 선수들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씹었다.
한숨이 나오기도 했고.
그래, 역대 공동 3위지.
자신들이 저 녀석을, 무려 월터 존슨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만들어준 것이다.
“어떻게든 막아야 해.”
“1회 초에, 타선 좋을 때 저지했어야 하는 건데···”
“진짜 왜 하필 오늘 등판해가지고··· 쉴 거면 차라리 더 확실하게 쉬어서 양키스전에나 등판할 것이지···”
굴욕이라고 해야 할까? 그보다는 절망이라고 해야겠지.
굴욕을 느낄 정도로 저 녀석의 앞에서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타자는, 최소한 이젠 애스트로스 내에는 없으니까.
사실 애스트로스가 희망을 건 것은 경기 초반, 그것도 극초반이었다.
다시금 처참하게 털리며, 완전히 기세가 사그라지기 전, 뜬금포 한방이나, 잘 맞은 안타 두어개 정도가 가장 베스트였지.
그게 그나마 현실성이 높기도 했고, 녀석이 흐름을 타고, 거기에 자신들이 휘말리면, 결과는 저번과 똑같을 테니까.
그렇기에 누구라도 한방을 쳐주기를 깊이 바랐었지만. 그런 행운은 나오지 않았다.
“스트라이크 아웃!”
사실 이 무대의 주인공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 그저 당연히 흘러가는 수순이겠지.
2회 초, 마지막 6번타자 조시 레딕은 떨어지는 너클 커브를 따라가지 못한 채,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포수 글러브 안으로 쏙 들어간 공. 누가 봐도 스트라이크였지. 거의 한가운데였으니까.
“You Suck!”
“Hell Yeah!”
“500탈삼진 축하한다! Suck!”
“4이닝 더! 딱 4이닝만 더 지금처럼 하자!”
나직한 탄식이 여기저기서 흘렀지만, 이내 홈팬들이 내지르는 괴성이 묻혀 한숨 소리는 사라졌다.
통산 500탈삼진.
그리고 56이닝 연속 무실점. 단독 3위로 올라선 기록. 그것이 달성되면서, 애스트로스의 1차 방어선은 붕괴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2차 방어선 같은 건 없었다. 애스트로스에게 그 정도의 여력은 남아있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