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매리너스의 앞날을 걱정한 것 치곤, 당장 내가 먼저 위기를 맞이했다.
“베이스 온 볼!”
6회 말, 살짝 제구가 흔들린 건지, 이닝 선두타자부터 볼넷을 내주고.
“아웃!”
뒤이어 1번타자 디고든은 다시금 삼진을 먹여주며 아주 잘 잡았지만.
“세이프!”
오늘 내내 약쟁이들 사이에 끼어, 같이 침묵했던 진 세구라가 큼직한 장타를 날려 보냈으니까.
1루주자가 그대로 3루까지 달리면서 주자 2,3루. 어쩌면 이번 시즌 들어서, 내가 맞은 최악의 위기였다.
‘이래서 방심하면 안된다니까. 마지막까지 집중을 빡 유지해야지.’
물론 방심이라는 말로 모든 걸 다 설명한다면, 열심히 맞서 싸운 상대타자들이 기분 나쁠 수도 있겠지.
허나, 어쨌든 약쟁이들도 잘 잡고, 경기 자체도 잘 풀려서, 정신이 조금 해이해진 것이 영향을 끼치긴 했으리라.
다시 타석에 올라오는 로빈슨 카노. 앞서, 두 번째 타석에서 잔뜩 겁에 질린 모습을 보여줬던 것과 다르게.
이번 기회를 맞이한 그는 꽤나 예리하게 눈동자가 번뜩였다.
‘하긴, 약쟁이라고 해도, 2루수 포지션에 한해서는 톱클래스이니···’
그 대단한 업적을 무엇의 힘으로 쌓았든지 간에, 정상을 한 번이라도 찍어본 선수와 그렇지 않은 선수는 다르다.
로빈슨 카노의 경우 꽤나 오랫동안 포지션 내에서는 최고를 유지했던 타자이니, 더욱더 그렇고.
‘거기다가 이젠 베테랑이니까. 본인 스스로 너무 흔들리고 있다는 것도 잘 알겠지.’
저런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면 타격감에 영향을 끼쳐, 슬럼프가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도 잘 알 거고 말이야.
그러니 정신 단단히 잡고, 한 차례 분위기 전환을 노려보겠다는 건데···
‘이제 52.1이닝 연속인가? 무실점이.’
솔직하게 말하면, 잘 기억하고 있다. 이닝 하나, 아웃 하나, 아주 철저하게 세고 있지.
언론에서 엄청나게 떠들뿐더러, 나도 은근히 욕심이 나거든.
애초에 내가 기록에 욕심 없는 사람이었으면, 작년에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삼진을 잡았겠어? 특히 막판에.
이제 6회 말 원아웃이니.
이번 이닝 잘 마치고, 미리 약속했던 7회까지 잘 처리하면, 딱 54이닝이 되겠지. 작년 내 기록을 넘어서는 건데.
안타, 아니, 외야 플라이볼이나 코스가 애매한 내야 땅볼 하나만 나와도 기록은 끝이다.
‘기록이 끝나는 건 괜찮아, X나게 아쉽겠지만, 원래 기록이란 게 그런 거니까.’
허나,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야.
“스트라이크!”
약쟁이한테 끝나고 싶지는 않아.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진짜 내 스스로 너무 화가 날 것 같거든.
아마 두고두고 기억이 나겠지. 이 X발놈의 약쟁이 새끼들이 내 기록을 망쳤다면서.
이를 악물고 초구를 던졌다.
이젠 범타도 절대 허용해서 안 됐으니까. 무조건 삼진, 그게 최우선이지.
우리 야수들이 기깔나게 잡아줄 수도 있지만, 인플레이 상황에 기댈 수야 있나.
바빕신을 믿느니, 차라리 내 젖먹딘 힘을 믿고 악 소리 내면서 던지는 게 낫지.
“볼.”
초구는 서클 체인지업.
2구는 바깥쪽 슬라이더를 던졌는데, 로빈슨 카노는 가만히 지켜만 봤다. 이쪽도 날이 제대로 섰네.
“파울!”
순간적으로 릴리스 포인트를 바꿔서 던진 3구, 쓰리핑거 체인지업.
포심이라고 여긴 건지, 배트가 조금 이르게 나왔지만, 마지막 순간 간신히 제어하여, 가까스로 오프 스피드를 쳐냈다.
“볼.”
“그게 왜 볼이야!”
“우우우우우! 사기다!”
“사기치지 마 이 닭대가리야! 눈알에 문제 있냐? 내가 갈아 끼워 줘? 확 뽑아 줄까?”
4구는 다시 바깥쪽.
낮게 크로스파이어처럼 날아간 포심이 아슬아슬하게 걸친 것 같았는데, 주심은 볼을 선언했다.
‘브루스가 긴장했어.’
우리 팬들, 레이더스는 주심을 욕하면서 아주 저주를 퍼부었지만, 사실 볼이 맞다.
브루스가 살짝 포구에 실수했거든. 원래 뛰어나진 않더라도 실수하는 녀석이 아닌데, 아무래도 긴장했나 봐.
나랑 파트너라더니, 어느 새부터 운명의 공동체라도 된 것처럼 내 기록을 자기 것처럼 여기는 녀석이니까.
무실점이 깨질지도 모르는 순간의 압박감에 살짝 실수가 나온 거겠지.
본인도 그걸 깨달은 건지, 포수 마스크 사이로 보이는 얼굴이 사색이 됐지만, 나는 질책하지 않았다.
꽉꽉 조여서 포수를 조련하는 편이지만, 이럴 때도 조여버리면 그대로 무너질 테니까.
‘지금까지 잘 해주기도 했고.’
말 잘 듣고, 공 잘 받아줬잖아. 열심히 하는 녀석인데, 이거 하나 정도는 나도 이해를 해줘야지.
‘커브 던질까?’
투 앤 투.
아직은 내게 유리한 카운트.
하지만 뜻밖의 볼로 기세가 넘어갔다. 잠깐 머뭇거리는 사이 로빈슨 카노도 호흡을 이미 회복했고.
선택지 하나가 떠올랐다.
슬로우 커브 말이야.
모 아니면 도라서 딱 좋지.
안타를 맞든, 헛스윙이 나오든, 무조건 둘 중 하나니까.
‘아니, 오히려 저런 경험 많은 타자들을 상대로는 위험하다. 쓰리핑거 커트하던 것도 마음에 걸리고.’
허나 고개를 저었다.
비밀병기이기는 한데.
위험이 커도 너무 커. 정타가 나올 확률이 너무 높거든.
쓰리핑거 체인지업을 기술적으로 커트해냈던 것만 봐도 날이 제대로 선 것 같은데.
특히 약쟁이라고 해도, 경력이 깊고 노련한 타자인 만큼 어쩌면 염두에 두고 있을지도 몰랐다.
은근히 알려지고 있었거든.
여전히 시크릿 웨폰이지만.
종종 중요한 순간에 던져서 적중률이 훌륭했던 나머지, 어느 정도 분석이 되고 있지.
특히나 20삼진 경기에서 마지막 위닝 샷이었기에,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잖아?
‘한창 주목받은게 아직 한 달도 지나지 않았으니, 지금은 묵혀둘 시기야.’
그러니 커브는 패스.
나도 잠깐 호흡을 가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한 뒤, 결정을 내렸다.
브루스는 조금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이내 언제나처럼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금 왼팔을 장전하며, 배터박스를 보자, 로빈슨 칸도 나를 보고 있었다.
약간의 불쾌감이 느껴지는군.
눈이 마주쳐서 그런 건 아니야. 눈빛이 수상했거든.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내가 그랬던 것처럼, 저 양반도 나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멋대로 생각하는 걸 수도 있는데, 그렇게 느껴져.
돼지의 눈에는 돼지로, 부처의 눈에는 부처로 보인다더니, 좀 어이가 없네.
물론 내가 먼저 저런 눈으로 경멸하듯이 보기는 했는데, 아무튼 기분은 나쁘네. 오히려 고맙기도 하고.
‘덕분에···’
그대로 휘두른 왼팔.
채찍처럼 손목을 낭창하게 휘감으며 왼손 안의 공을 던졌다.
‘힘이 넘치네.’
이를 앙다문 탓인지 살짝 턱이 아려왔지만, 그보다는 손가락의 통증이 더 컸다. 내일도 퉁퉁 붓겠어.
한가운데로 날아가는 공.
패스트볼처럼 빠르게 날아오는 공에 로빈슨 카노는 일단 의심했다.
내가 가진 구종이 워낙 많고, 그중에는 평범한 포심 패스트볼처럼 보이는 공들도 많으니까.
변형 패스트볼들도 있고.
날아오다 갑자기 꺾이거나 떨어지는 서클 체인지업, 그리고 오프 스피드로서의 역할을 아주 잘 수행하는, 앞서 커트한 쓰리핑거 체인지업까지.
거기다가 코스도 도박수가 넘치니, 섣불리 선택을 내릴 수가 없었겠지.
눈조차 깜빡일 수 없는 아주 짧은 시간, 고민을 마친 그는 뱉를 냈다.
‘최고구속에 맞췄네.’
그의 스윙은 89마일, 내 최고 구속에 타이밍이 맞춰져 있었다. 척하면 척이지.
한복판에 던져서, 변화구인 척 자기를 낚으려고 하는 거라고 판단한 것 같은데.
‘너무 멀리 가셨네.’
다들 나를 무슨 흑마술사니, 독심술사니 하면서, 엄청난 심리전을 자랑하는 사람으로 오해하지만, 난 사실 그렇게 깊은 심리전이나 수싸움 안 해. 아주 단순하지.
피칭 하면서 느낀 건데, 괜히 생각을 깊이 해봤자 거기에 내 스스로 말리기만 하지, 결국 가장 옳은 선택은 처음, 직관적으로 떠오른 거더라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스트라이크 아웃!”
그냥 패스트볼인 척 오프스피드를 던졌고, 앞서 커트해냈던 것과는 달리, 로빈슨 카노는 두 번째 쓰리핑거 체인지업에는 헛스윙했다.
그래, 너무 멀리 간 거지. 너무 멀리 가버렸어, 다시 돌아올 수 없을 만큼, 너무나도 먼 곳으로.
“아웃!”
그다음, 넬슨 크루즈는 비교적 손쉽게 잡았다. 위험하기는 이쪽이 더 위험한데, 2구만에 투심 빗맞히고 얌전히 아웃 당해주더라.
‘모든 타석을 삼진으로 잡아버리고 싶었는데···’
약쟁이 상대로 전타석 삼진이라는 목표는 아쉽게도 실패했지만, 뭐, 잘 막았으니 된 거지.
그렇게 이번 시즌, 가장 위험했던 위기는 아슬아슬하게 넘어갔고, 그다음은 없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세이프!”
“아웃!”
“아웃!”
삼진 하나, 그리고 병살타 하나로, 7회 말은 직전 이닝보다 훨씬 수월하게 막을 내렸으니까.
7이닝 13탈삼진. 그리고 4피안타 1볼넷. 연속 무실점 이닝을 54이닝까지 늘리면서, 내 일곱 번째 등판이 막을 내렸다.
그 뒤에는 경기가 우리의 승리로 끝나면서, 승수를 올리며, 7연승에도 성공했고 말이야.
경기 자체는 그렇게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수월하게 끝났지만···
‘이제부터 좀 바빠지겠지. 할 일도 많고, 견딜 일도 많아질 테니까.’
이 잔잔함은 그저 비바람이 닥치기 전, 폭풍전야에 불과했다. 나에게도, 로빈슨 카노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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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다시 간만에 홈이네. 별로 좋은 집도 아닌데, 이상하게 원정 갔다가 돌아오면 스위트룸보다 더 좋다니까~”
“뭐, 일단 심적으로 훨씬 편하니까.”
“경기장은 원정이 훨씬 더 낫지만 말이야.”
“그것도 정답이고.”
길고 길었던 원정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은 굉장히 활기차다. 언제나 그렇지.
우리 홈이 그리 호락호락한 동네는 아니라고 해도, 결국 사람은 내 집이 제일 좋거든.
특히나 가족들과 함께 사는 선수들에겐 이루 말할 수 없는 안정감이 들 테고 말이야.
“어우, 와이프 볼 생각 하니까, 벌써부터 기가 빨리네. 원정만 내내 하면 안 되나?”
“그러게 그냥 눈 딱감고 먼저 사과하라니까? 결혼 생활 오래 해놓고 왜 그렇게 아마추어처럼 굴어?”
“아무리 그래도, 앉아서 싸는 건 절대로 용납 못해! 그건 내 자존심이라고! 거 좀 주변에 튀면 어때?”
물론 원정이 더 행복한 사람들도 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아무튼 그렇지.
“난 돌아가면 일단 장부터 봐야겠어. 한동안 쭉 원정이라고, 아무것도 안 사뒀거든.”
“그런 건 미리미리 해둬야지. 넌 메이저리거라는 녀석이 왜 그렇게 준비성이 없어?”
“Yes, Mom, 자기 전에 양치질도 하고, 세수도 하고, 바른 어린이로 살게요. 그치만 저는 누구랑 달리 가난한 야구선수라, 살뜰하게 챙겨주는 트레이너가 없는걸요.”
아직 싱글인 사람들은 알아서 밥이 꼬박꼬박 나오고 밀머니도 주는 호텔 생활을 마치고, 다시 홀로 사는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걸 막막하게 여겼는데.
텅 비었을 냉장고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는 브루스에 가볍게 질책했지만, 사실 나도 그 마음이야 잘 이해한다.
마이너 시절 때 집에서 꼬박꼬박 반찬이니 뭐니 보내주는데도 차려먹는 게 진짜 힘들었지. 장 보는 건 완투보다 더 고된 일이고.
뭐, 콜업 이후로 개인 트레이너까지 딱 붙어서 함께 살고 있기에, 그런 고생 없었지만 말이다.
“게으른 나는 그렇다 치고. Suck 너는 돌아가면 뭐 할 거야? 아니다, 할 일 없겠네. 너 오클랜드 안에 산다며? 산책도 못하겠네.”
선수들 사이에서 내 집은 일종의 유명세를 가졌다. 다들 오클랜드 선수지만, 정말로 오클랜드 내에서 사는 건 나 하나뿐이거든.
사실 선수들뿐만이 아니라, 주변 이웃들은 내 집을 거의 랜드마크처럼 여기고 있지. 아주 신기한 일이라면서.
솔직히 부촌이라서 그렇게 위험하지도 않고, 은근히 살만한데, 다들 엄살이 심하다니까.
“돈도 많은 놈이 왜 거기 살아. 강 건너 샌프란시스코나, 프리몬트나, 아니면 실리콘밸리 어디든 좋은 곳이 그렇게나 많은데.”
“난 오클랜드 시민들의 친절한 이웃이니까. 그러니 오클랜드 안에 살아야지. 적응하기도 했고.”
“무슨 스파이더맨이냐? 미안하지만, 오클랜드는 뉴욕이 아니거든? 고담에 훨씬 가깝지.”
이건 팩트다.
그치, 고담이지, 고담.
이만한 마경도 흔치 않으니까. 다만 영화나 만화와 달리,
박쥐남자나, 그 조수는 없지만 말이야. 이야, 이렇게 생각하니 진짜 X나게 암울하네.
“아무튼, 그래서 돌아가면 할 일 있어? 같이 식사나 하자. 솔직히 우리가 같이 호흡 맞춘 게 얼만데, 어떻게 아직 같이 식사도 안 할 수가 있어? 혹시 너 나 싫어해?”
“그럼 X나게 싫어하지. 그런데, 냉장고 텅텅 비었다며?”
“외식하자고. 프리몬트에 좋은 식당 아는데, 내가 살게. 명색이 메이저리거인데, 그 정도도 없을까.”
아, 그치. 내가 너무 마이너 시절 수준으로 생각했네. 얘도 나보다 훨씬 못 번다 뿐이지, 메이저리거인데 말이야.
메이저리거는 공식적으로 고액연봉자로 분류된다. 갓 데뷔한 신인조차 말이야.
당장 최저 연봉이 56만인가 6만 달러인데, 세금을 왕창 떼서 반만 남아도 25만 달러니, 그냥 부자다.
외식이라고 해봤자, 없는 돈 쪼개서 타코벨이나 간신히 사 먹고 헤헤거리는 마이너랑은 차원이 다르지.
그렇기에 흔쾌히 식사를 사주겠다며 소리친 브루스였지만, 이번에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진짜로 다른 일이 있거든.
“미안하지만, 한동안은 조심해야 해서, 외식은 좀 그렇네.”
“조심? 무슨 조심? 뭐, 종교적인 거야? 라마단?”
“라마단은 무슨, 쉬는 동안 병원가야 하거든. 웬만하면 가려먹어야지. 그냥 대니얼이 짜준 대로 안전하게 먹으려고. 그러니까, 식사는 다음에 하자, 대신 그땐 내가 살게.”
브라이언이 조언해주더라고.
도핑 검사 전에는 웬만하면 먹는 것도 가려서 먹으라고.
‘테러라고 했던가? 그의 표현대로면.’
그는 테러라고 표현했다.
만약 바깥에서 외식한다면, 혹시라도 앙심을 품거나, 아니면 다른 것을 노린 사람들이 금지 약물이나 위생적으로 조금 위험한 것을 음식에 섞을 수도 있다고 말이야.
과대망상일 수도 있지만, 그는 꽤나 진지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일이 작정하고 나를 노렸잖아? 대니얼까지 엮어버릴 정도로.
그쪽에서 단순히 의혹을 만드는 수준을 넘어, 정말로 악독한 마음을 먹고 그런 짓을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거지.
그러니 그냥 웬만하면 깨끗하게, 평소처럼 대니얼이 차려주는 대로 식단에 맞춰 식사하는 것이 나은 거고.
그런 의미로 말을 한 건데···
“뭐? 병원? Suck 네가 병원을 왜 가?”
화들짝 놀란 브루스의 우렁찬 목소리에, 왁자지껄했던 기내가 한순간 조용해졌다.
“···”
“뭐?”
“누가 병원을 가?”
“방금 Suck이라고 했지?”
“Suck이··· 병원을? 왜?”
그리고 마치 영화처럼, 저마다 이야기를 나누던 선수, 코치, 직원 모두 다 나를 봤다.
대단히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감독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스콧 에머슨은 몸을 덜덜 떨면서 나를 봤고 말이다.
“쉿! 왜 그렇게 호들갑이야? 그냥 간단한 검사야, 검사. 별일 아니야.”
“그니까, 검사는 왜?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어? 부상이야?”
야이 개색기야. 좀 조용히 말하라고. 애써 분위기 수습하려고 했더니, 일을 더 키워버리네.
흘끔 다시금 기내를 살피니, 분위기는 방금 전보다 훨씬 더 혼돈에 휩싸였다.
“Suck이 부상이라고?”
“어··· X발? Suck이 부상? Oh God.”
“X발 우리 X되는 거 아니야?”
“Suck이 왜 부상이야? 쟤 철인 아니었어? 이러면 안 되는 건데···.”
“혹시 누구 좋은 의사 아는 사람 있어? 맹인을 눈뜨게 한다거나, 앉은뱅이를 걷게 한다거나.”
“나 그 사람 알아. 그 양반 물 위도 걷지 않아? 이름이 아마 지저스였던 거 같은데.”
“X나 심각한 일인데 농담 하지마. Suck이 빠지면 진짜 X되는 거라고.”
“우리가 헛된 꿈을 꾼 거야. 그럼 그렇지. 애슬레틱스가 우승이라니, X발 팀이 잘 나가니까, 에이스가 부상으로 나가네.”
그래, 아주 개판이군.
특히 몸을 떨어대던 스콧 에머슨은 이젠 완전히 혼절해서 타격코치에게 부축받고 있고 말이야.
워워 다들 진정하슈.
그런 거 아니야.
왜들 그렇게 충격을 받았어?
“혹시 어깨가 아픈 거야? 아니면 팔꿈치? 데드암이나 토미존 서저리는 아니지? 아니면 손가락이 부러졌어? 그래, 어제 좀 너무 힘들게 던지더라. 문제가 생긴 거야!”
그리고 넌 제발 좀 닥쳐라.
계속 문제가 악화 되잖아.
네 말 때문에 코치들 뒷목 잡은 거 안 보여? 스콧 에머슨은 눈알까지 돌아간 것 같은데··· 저거 괜찮나?
‘의사는 나보다 저쪽이 더 필요하겠는데?’
그렇게 오클랜드로 날아가는 기내는, 난잡한 락밴드 콘서트장처럼, 대단히 소란스럽게 변했다.
그래도 새삼 기분은 좋네.
내가 이 팀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이번 기회에 정말 잘 알게 됐어.
다들 나를 이렇게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내가 부상이라는 발에 충격과 공포에 질려버릴 정도로.
그간 잘 살아온 것 같고, 팀 내에서 인정받고 있었던 것 같아서, 왠지 조금 뿌듯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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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열렬하게 설명해야만 했다. 다만 바깥으로 새어 나가, 의혹이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전부터 이상한 소문이 나올 수도 있으니, 어느 정도 애둘러 표현했지만 말이다.
“그냥 건강검진 수준이고, 별일 아닌데, 브루스가 오버한 거야. 얘가 멍청한 거 하루 이틀이야?”
“아, 하긴···”
“브루스, 너 때문에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그럼 그렇지. 얘가 부상일 리가 있나. 아마 비브라늄으로 만들어졌을걸?”
“그치, 강철보다 더하지. 어우, 괜히 식겁했네. Suck, 너 없으면 우승이고 나발이고 다 끝이니까, 조심해.”
“그래, 한번 검사받기는 해야겠더라. 네가 먹는 이닝이 많아도 너무 많긴 하잖아? 여유 있을 때 확인하는 게 좋긴 하겠지.”
브루스를 멍청이로 매도하니, 대부분은 대충 알아들었는데, 당연하게도 돌아가는 사정을 아는 베테랑들이나, 코치들은 달랐다.
“Go, 정말로 문제는 없는 거 맞지?”
메이저리거가 시즌 중에 검사를 받는다라, 그리 흔한 일은 안지.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짐작은 할 걸?
민감한 문제라 다들 넘어가 주는 척 하는 거지.
특히나 눈을 뒤집고 혼절하기도 했던 스콧 에머슨은 굉장히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물었고 말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위에서 내려올 거예요. 일단은 구단 측에도 미리 알려줘야 하니까.”
“무슨 이야긴지 알겠어. 너무 마음쓰지 마. 잘나가는 선수에겐 의례적으로 따라오는 것들이니까, 알지?”
“알죠, 너무 잘 알죠.”
그는 혹시라도 내가 그런 의혹들에 흔들리거나, 무너져버리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것 같았는데, 그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그저 웃어넘겼다.
물론 짜증은 나지.
작년에는 파인타르 가지고 지랄하더니,올해는 더 나아가서 도핑으로 지랄해보겠다는 건데. 짜증이 안 나고 배겨?
‘그러니 당당하게 나가야지. 작년 파인타르 건처럼 좋은 예도 있으니까.’
허나 그론 의혹의 앞에서 단순히 숨어들거나, 화만 내서는 안 된다. 당당해야지.
당장 여기 구단의 레전드‘일뻔’했던 빅맥, 마크 맥과이어 봐봐.
약도 약이지만, 청문회에서 비겁하게 굴었다고, 더욱더 까였잖아. 남자답지 못하다면서. 단순히 미국만의 문화는 아니다.
여기가 특히나 마초이즘이 은근히 강력한 곳이기는 해도, 결국 모든 문제의 앞에서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건, 미국이 아닌 어디에서든지 중요하니까.
‘확실하게 잘라내야지. 깔끔하고, 완벽하게.’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브라이언의 착잡한 말이었다.
내가 설사 깨끗한 검사지를 보여주고, 아무런 증거가 나오지 않더라도, 10% 정도는 앞으로 쭉 나를 의심하고, 욕할 거라고 했었지.
도핑 검사를 회피하는 방법이야 제법 많고, 그것을 해주는 게 디자이너의 역할이니까.
‘자기 듣고 싶은 대로 듣고, 생각하고 싶은 대로 듣는 사람도 언제나 있는 법이니까.’
허나 솔직히 그 정도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 귀찮게 느껴지고, 머릿속의 이처럼 주기적으로 신경에 거슬리겠지만, 그 정도야 데뷔 이후부터 쭉 있었으니까.
그러니 억울하고 천불이 나더라도, 괜히 뭉그적거리는 게 아니라, 어차피 날 욕할 10%를 제외한, 나머지 90%라도 확실하게 확보해야겠지.
‘최소한 듣고 싶은 대로 떠들어주는 언론만 입 닥치게 해도, 훨씬 덜 거슬리기는 할 거고.’
그에 대한 준비는 보라스 코퍼레이션에서 착실하게 하고 있다. 이래서 대형 에이전시가 좋아. 여러 상황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을 갖췄으니까.
개인 에이전트와 나 혼자였다면, 솔직히 이 정도의 준비는 힘들었겠지.
‘그러니 준비해줘야지, 열심히 뛰고 있을 사람들한테 쥐여줄 총알을.’
문득 왼팔을 내려봤다.
피칭은 온몸이 함께 하는 것이지만, 그중에서도 내 노력이 가장 많이 담긴 건, 결국 이거겠지.
열심히 벌크업도 하고, 몸도 제대로 만들면서 마이너 때와 비교하면 훨씬 단단하게 근육이 잡혀져 있었다.
약으로 만들어졌다기엔 너무 예쁘고 고생이 보이는데 말이야. 내가 쉽게 던진다고 해서, 정말로 쉽게 하는 것처럼 느껴지나봐. 사실은 더럽게 힘들게 만들어졌는데 말이야.
다들 그걸 모른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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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는 오클랜드에 도착한 즉시 이뤄졌다. 간단하지, 검사관 앞에서 오줌 누고, 확실하기 위해 피도 좀 뽑고. 머리카락이나 털도 좀 넘겨주고.
그 밖에도 호르몬처럼 약물 징후도 확실하게 검사하기 위해, 겨울에 했던 것처럼 쫙 신체검사도 받고. 그런 거지.
그거야 그냥 평범하게 검사하는 것이니 상관없지만···
“···좀 안 보시면 안 돼요?”
“죄송하지만, 간혹 바꿔치기하는 경우가 있어서 말입니다. 철저한 검사를 바라셨으니, 그에 따라야죠.”
아무리 생각해도 같은 남성이 나를 훤히 보고 있는 건 도무지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네.
도핑 검사관은 둘로 이뤄진다. 혹시 모를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한 명은 주변을 경계하고, 다른 한 명은 나를 샅샅이 관찰하지.
만약의 바꿔치기를 방지하기 위해, 하의는 물론 상의도 벗고 있는데, 이것 참··· 그림이 좀 그렇네.
‘2리터 페트병을 통째로 마셨는데, 왜 이렇게 안 나오냐.’
볼일을 볼 때 남의 시선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느낀 적이 없어서 그런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다들 그러잖아, 도핑 검사할 때 오줌이 안 나와서 죽겠다고, 차라리 피 뽑는 게 낫지, 오줌이 제일 힘들다고.
난 솔직히 이해가 안 됐거든?
미국 오기 전에, 병역 신체검사 받았을 때도, 나이 비슷한 꼬추들이랑 화장실에 바글바글거리면서도 잘 나왔는데. 오줌 그거 뭐, 그냥 싸면 되지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근데 막상 겪으니 진짜 X나게 안 나온다. 내 스스로 신체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싶을 정도로. 그러면 안 되는데, 아직 미혼이고, 애도 없는데.
“죄송합니다, 계속 보는 것도 고역이실 텐데···”
“괜찮으니, 마음 편하게 먹으세요. 이게 제 일이니까요. 한 시간도 넘게 걸리는 사람도 있으니, 너무 염려치 마세요.”
“예, 그렇겠죠.”
아주 프로페셔널 하시군.
하긴, 도핑 검사관으로 일하면서, 얼마나 많은 그것(?)을 봤겠어. 나도 그저 스쳐지나가는 것 중 하나겠지.
“그나저나, 신기하네요.”
“예? 뭐가요? 혹시 좀 이상해요?”
저를 보시면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좀 이상하게 들리거든요? 뭐가 신기하다는 건데요?
혹시, 좋은 뜻인가? 평가까지 해주나?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는 한데···
“아뇨아뇨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먼저 도핑 검사를 요청하는 경우는 드물거든요.”
“그런가요?”
“흔한 일은 아니죠, 검사를 ‘받는’ 게 아니라, ‘하는’ 건요. 대부분은 타의로 하는 게 보통이죠.”
음, 내가 너무 지레짐작했네.
내가 쓰레기였어, 그런 분이 아닌데 말이야.
아무래도 긴장감을 풀어주려고 한 건지, 그는 나직하게 이야기했다.
“스스로에게 그 정도의 확신과 믿음을 가진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자기 자신인데도, 혹시나 하는 거겠죠.”
그렇겠지. 솔직하게 말해서, 나도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라면, 굳이 나서서 도핑 검사를 받고 싶지는 않거든.
스스로 찔리지 않다고 해도, 괜히 이상한 말도 나올지도 모르고, 왠지 조금 꺼려지기도 하고 그렇잖아?
‘자신에 대한 믿음이라···’
걸어온 길을 돌아봤다.
그래, 믿음이야 확실하지.
믿음 하나로 여기까지 온 거니까. 나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감히 미국에 도전하지도, 험난했던 시기에 마이너리그에서 견디지도, 그리고 여기까지 올라오지도 못했겠지.
그의 말처럼, 먼저 나서서 흔쾌히 도핑 검사를 받을 생각도 ㅎ지 않았을 테고.
나는 나를 믿었다. 그것도 아주 확실하게.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렇겠지.
왠지 모르게 마음이 조금 편해졌고, 다행히, 정말로 다행스럽게도 기능 고장(?)이 아닌 그저 심리적인 문제였던 건지, 편해지자마자 막혔던 댐이 터졌다.
“예, 아무런 이상 행동 없으셨고, 본인 소변이라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검사결과가 나오면, 댁과 에이전시, 그리고 이메일로도 발송될 테니, 기다리시면 됩니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조심스럽게 병을 받아든 그는 잘 보관하여 챙겼고, 이내 절차를 이야기한 뒤, 헤어지기 전, 씨익 웃으며 슬쩍 엄지를 추켜보였다.
저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앞서 했던 대화처럼 내 스스로의 믿음에 향해 그가 치하해주는 건지. 아니면 내 그곳을 향해 추켜세우는 건지 말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내 개인적으로는 후자였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야구에 대한 믿음은 어차피 쭉 유지될 테니까. 남들의 반응이나, 평가와 상관없이.’
그것으로 도핑 검사 종료.
모든 검사가 나오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릴 거다. 아마, 의혹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직전이거나, 직후거나. 대충 그즈음이겠지.
언제든 큰 상관은 없다.
약실에 총알이 장전되어 있다는 것만으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든든했으니까. 이래서 미국인들이 총을 사나봐.
‘남은 건 기다렸다가, 곧바로 받아치는 것뿐이구만.’
9회 말 투아웃에서의 일발 역전 홈런. 그것을 위한 준비는 완전하게 갖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