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223화 (223/316)

223화

“쟤 왜 저래?”

“몰라, 어제랑 그제, 덕아웃에서도 표정 안 좋더니.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우리 혹시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작정하고 던지는데?”

매리너스 선수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그들의 상대투수가 조금 이상했으니까.

“스트라이크 아웃!”

뭐, 잘하는 거야 당연하다.

타자들을 쥐잡듯이 잡는 거야 원래 그런 녀석이니 이상할 것도 없지만. 문제는 표정이었다.

공을 던지는 얼굴에는 미묘하게 짜증과 실망 같은 감정이 뒤섞여 있었으니까.

마치 그들, 매리너스가 무슨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왠지 좀 기분 나쁘네.”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존중하는 것도 아니고. 저건 뭐야 대체?”

그 짜증 섞인 피칭이 3이닝 내내 이어졌고, 안타 하나를 제외하면 당연하게도 털렸다.

그것이 매리너스의 신경을 미묘하게 긁었고, 특히나 그중에서 한 사람에겐 더욱더 예민하게 느껴졌다.

“로비, 왜 그래?”

“아니, 별거 아니야. 쟤 진짜 잘하긴 잘하네.”

“X같은 거지. 저런 애가 하필 같은 지구라는 게.”

“그러게.”

넬슨 크루즈의 말에 대충 대답한 로빈슨 카노였지만, 왠지 모를 찝찝함이 어쩌면 경기 시작 때부터 그를 사로잡았다.

어쩌면 최근 신경이 예민해져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그의 ‘비밀’이 밖으로 새어 나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저 투수.

“아웃!”

깔끔하게 3회 말을 지워버린 Go는 그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표정을 지었다. 그의 타석에서 말이다.

뭐랄까, 그래, 실망. 실망하 표정이었지. 정말로 당신이 그럴 줄은 몰랐다는 것처럼.

아마 그 비밀이 널리 알려진다면, 수많은 이들이 저런 표정을 짓겠지. 그걸 미리 보는 걸지도 모르고.

‘···보라스 소속이었던가?’

단순히 과민하게 받아들이는 건 아니다. 저 녀석이 소속된 에이전시가 마음에 걸렸으니까.

“경기는 쯧, 애매하네.”

“최대한 애슬레틱스를 잡아야 하는데···”

“아직 시즌 초반이니까. 계속 따라가다 보면 잡히겠지.”

“그래도 애스트로스도 개털렸던데.”

“걔들은 확실하게 망해야지. 그래야 우리도 편해져.”

수비를 하러 나가는 동안에도, 수비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심지어 다시금 실점이 올라간 뒤, 4대0으로 점수차가 늘어난 순간까지도.

로빈슨 카노는 의심을, 정확하게는 공포를 지울 수가 없었다. 과거의 인연, 악연으로 끝나버린 관계가 계속해서 떠올랐으니까.

스캇 보라스. 한때는 그의 친구였지만, 그가 JAY-Z와 손을 잡고 해고한 뒤부터는 조금은 미묘한 사이가 된 옛 동료.

정확하게는 그가 설립한 에이전시의 고객이었다. 저 정도의 슈퍼스타면, 회사의 간판이라고 할 수 있지.

그렇기에 조금은 이상한 Go의 모습이 더욱더 신경에 거슬렸다.

그가 아는 보라스는 확실한 남자이고, 정말이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한 느낌을 줬던 사람이니까.

그러니··· 아마도 짐작은 하고 있었겠지. 자신이 무엇에 손을 대고 있는지, 그가 남몰래 숨기고 있는 비밀이 무엇인지.

그렇기에 어쩌면 보라스가 저 녀석에게 속삭이지 않았을까? 오늘 상대팀에는··· 부정행위자가 있으니 조심하라고. 찝찝한 녀석의 표정에 그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니, 아니. 너무 나갔군. 스캇이 그런 사람은 아니야. 소문 때문에 예민해졌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로빈슨 카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너무 과대망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래, 스캇 보라스와의 관계는 이미 틀어저버린지 오래지만, 그렇다고 하여, 과거 고객의 정보를 허투루 떠벌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선수들에게 천사라고 불리는 것이고. 그냥··· 다른 사정이 있겠지.

무언가 짜증나는 개인 사정이라거나, 집안일이라거나 그런 것들.

미국 내에 있는 모든 파파라치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고 있는 여자친구와의 문제라거나.

“로비, 이번 타석은 하나 날리자.”

“그래야지, 넬슨 너랑 나랑 같이 백투백하면 최고겠네.”

“최고지. 아마 나란히 신문 일 면에 걸릴 걸? 작년에 쟤한테 홈런 친 놈들 죄다 그랬으니까.”

“그래, 그렇겠지. 내가 먼저 날릴 테니까, 넬슨 너도 뒤따라서 멋들어진 크루즈 미사일 하나 날려봐.”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타석에 나갈 준비를 했다. 2회에 카일 시거가 쳐냈던 안타 하나 덕분에 타순은 좋다.

2-3-4번으로 이어지니.

매리너스의 정예가 딱 나오는 거니까. 더 나아가, 5번타자이자, 최근 기세가 심상치 않은 미치 해니거까지 이어진다면 가장 좋을 테고.

그렇기에 넬슨 크루즈와 대화를 나누며, 찝찝했던 감정을 한 차례 털어냈다. 일단은 경기에 집중해야 했으니까.

‘신기한 녀석이야.’

대기타석으로 나가, 몇 차례 스윙을 가다듬으며 마운드를 흘끔 훔쳐봤다.

다시 올라온 그 녀석.

Go를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수많은 이들이 똑같은 생각을 했으리라.

여러모로 ‘이레귤러’ 같은 녀석이니까. 아웃라이어라고 표현해도 좋을 테고.

실제로 세비어매트리션들은 그를 최악의 아웃라이어로 지칭하며, 몇몇 통계나 수치에서 그의 성적은 빼버릴 정도지.

단순히 느린 구속, 경이로운 구위와 변화구의 조화로 이루어낸 역사적인 성적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냥 딱 봐도 정상적인 타입은 아니지. 평범한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가능한 거지?’

가장 신기한 건, 그 모든 특이점이 미묘하게 밸런스를 이루어, 잘 어우러지고 있다는 거겠지.

비록 투수는 아니지만, 메이저리그의 선수로서 이래저래 들은 말이 많기에, 지금 저 녀석이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너무 잘 안다.

말도 안 되는 수준이야, 저건.

그야말로 복권보다 더할 정도의 기적이 중첩된 수준이니까. 그렇기에 한편으로는 조금,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어쩌면, Go도···’

“스트라이크!”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우렁찬 주심의 목소리가 그를 일깨웠다.

멍하니 피칭을 바라보다, 우렁찬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움찔한 로빈슨 카노는 다시금 고개를 저으며 잡념을 털어냈지만, 의심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앞서 들었던 의심과는 조금 다른 의심이지. 어쩌면 저 녀석도 동류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었으니까.

솔직히 그게 아니라면, 도저히 믿기지 않는 선수이기는 하니까.

‘어쩌면··· 소문이 지칭하는 게 내가 아니라, 저 녀석일지도.’

그래서인지 왠지 모를 ‘희망’이 생기기도 했고. 이번에 새어나간 비밀이 내가 아니라, 저쪽이 아닐까, 하는 희망이.

물론 저 정도의 슈퍼스타가 터지면, 태풍이 몰아칠 테니, 사무국에서도 대대적인 조사에 착수할 것이기에 어느 쪽이든 로빈슨 카노 자신의 비극은 예정되어 있었다.

“아웃!”

진 세구라는 외야 플라이로 물러났다. 제법 잘 쳤던 것 같은데, 아깝게 수비 시프트에 걸렸지. 그러니 이제 그의 차례다.

로빈슨 카노는 잠시 숨을 가다듬으며 다시 배터박스에 올랐고, 이번에도 미묘한 눈빛이 그를 반겨줬다.

‘왜 그런 식으로 쳐다보는 거냐고.’

그는 어금니를 씹었다.

멀찍이, 마운드의 위에서 자신을 내려보는 투수의 눈동자, 그 눈동자가, 날카롭게 벼려진 단검처럼 그의 가슴에 꽂혔다.

아까 전, 첬 번째 타석에서 엿보았던 것이 ‘실망’이라면, 이제는 조금 ‘한심’하다는 듯 그를 보고 있었다. 마치 모든 걸 안다는 것처럼.

화려한 커리어.

차세대 뉴욕의 연인이 될 수도 있었던 영광과 인기. 그런 그를 바라보는 투수들의 긴장한 얼굴.

그 아름다움 속에 이미 오래전부터 흠뻑 취했던 로빈슨 카노에게 그런 눈빛은 불쾌하게만 느껴졌다.

어차피 모두가 하고 있다는 변명으로 잠시 스스로를 속이며, 애써 무시했던 진실을 마주한 것만 같았으니까.

‘너라고 다를 것 같아?’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그저 입안에서 씹어 삼킬 뿐 차마 뱉지는 못했다. 그는 바보가 아니었으니까.

격노, 참을 수 없는 격노가 쓰나미처럼 닥쳐왔지만, 그런 분노조차 떨리는 다리를 감추지는 못했다.

까마득한 후배에게, 애송이에게 우습게 보였다는 분노보다, 공포가 훨씬 더 컸으니까.

“스트라이크!”

초구가 날아왔다.

포심 패스트볼.

생각에 잠겨,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앞서 진 세구라에게 던졌던 것보다 미묘하게 더 묵직하게 느껴졌다.

‘89마일.’

구속도 최고를 찍었고.

우습지도 않은 구속, 허나 심장을 노리고 쏘아 보낸 투창처럼 날카로웠다.

“스트라이크!”

2구, 비슷한 코스로 날아오는 공에 배트가 나갔지만, 깨달은 순간 느릿해지는 속도에 그저 허공을 갈랐다.

쓰리핑거 체인지업.

이것도 대단히 까다로워졌지.

원래는 서클 체인지업들을 받쳐주는 정도였는데 말이다.

“파울!”

3구는 간신히 스쳤다.

슬라이더였는데, 무브먼트가 대단한 포심이 아닌데도, 배트가 울렸다. 짜릿하게 타고 올라올 정도로. 작정하고 던진 거다. 이를 꽉 깨물고.

기시감이 느껴졌다.

오늘 또다른 누군가에게도 이렇게 던지는 것 같았는데, 그게 누구였을까?

멍청하게 생각할 시간은 없다. 그런 걸 두고 보는 투수가 아니니까.

노련하게 타석에서 빠져나와 잠시의 시간을 벌어들인 뒤, 재빠르게 다시 균형을 찾았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높이 날아온, 마치 머리를 맞출 것처럼 날아온 공에 저도 모르게 피하고 말았다.

덤덤하게 지켜볼 수도 있었는데, 기세에서 밀린 거겠지.

공은 역동적으로 변화하며, 스트라이크존 안으로 야속하게 들어갔다.

‘너클 커브···’

잠깐 동안 멍하니 타석에 남았다. 조금, 조금, 머리가 얼얼했으니까.

그런 로빈슨 카노를 깨운 건, 이번에도 목소리였다.

“You Suck!”

‘넌 구리다’라고 말하는 목소리 말이다. 유명한 짓거리지. 유명한 사람들이고. 숱하게 듣기도 했다. 하지만···

‘Fuck···’

앞서 그를 격동시킨 투수의 표정처럼, 오늘은 유독 날카롭게 꽂혔다.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너무 신경쓰지 마.”

“···그렇겠지. 백투백은 못하게 됐네, 미안하다.”

“나라도 하나 치지 뭐. 오히려 혼자 주인공이 돼서 더 좋네!”

넬슨 크루즈에게 위로를 받으며 다시 덕아웃에 돌아가 벤치에 앉아, 멍하니 그라운드를 지켜봤다.

그냥, 눈앞이 조금 흐렸다.

화려했던 장막이 서서히 걷혀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스트라이크!”

그러다가 문득 들어온 승부.

투수는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넬슨 크루즈 역시 거세게 몰아붙였다.

누가 봐도 노골적이지.

다른 타자들을 상대할 때와 확연하게 달랐으니까.

작정하고 전력투구하고 있는데, 이번에도 기시감이 느껴졌다.

“중심타선은 확실하게 잡네.”

“원래 그렇지 않나?”

“저거 봐봐. 또 최고구속이잖아. 오늘 최고구속은 로비랑 넬슨 타석에서만 나오지 않았나?”

“뭐, 이 둘이 제일 위협적이긴 하지.”

그래, 그랬지.

아까 전, 자신의 타석에서 이를 앙다물고 던지던 투수, 그에게서 느껴졌던 기시감.

그건 넬슨 크루즈의 타석이었다. 더 나아간다면, 디고든에게도 비슷한 느낌으로 던졌고. 조금 덜하기는 하지만.

그리고 자신에게도 그랬는데. 이 셋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다른 선수들과 대체 뭐가 다른 걸까?

‘···’

정답은 불쑥 떠올랐다.

그래, 하나뿐이지.

전혀 다른 이 셋의 공통점은.

다른 게 있다면, 저 둘은 이미 밝혀졌고, 그는 아니라는 것 정도.

‘진짜로, 알고 있나보네.’

대체 언제부터, 누구에게. 어떻게, 그런 질문은 필요 없었다.

그저, 장막이 완벽하게 걷혔고. 이젠 비밀이 드러날 시간이라는 것이 중요했을 뿐.

화려하고 영광스럽게 빛났던, 더러운 제국의 끝이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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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확신이 생겼다.

그래, 로빈슨 카노는 약쟁이다.

한때 역대를 논할 최고의 2루수로 꼽혔던 위대한 선수는 약쟁이다. 그의 업적, 기록, 성적도 모두 약이다.

왜냐고? 스스로 찔리기 시작했거든. 내 눈빛, 표정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

아무런 거리낄 게 없었다면, 그냥 우습게 무시하거나, 대충 불쾌하게만 여기고 말았을 텐데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까지 확실하게 잡아야지. 지금까지처럼 깔끔하게.’

현재까지, 디고든 2삼진. 로빈슨 카노 2삼진. 넬슨 크루즈 2삼진이 기록됐다.

이만하면 아주 완벽하지.

약쟁이만 골라서 잡았어.

암, 이래야 하고 말고.

‘사실, 작정하고 던졌으니, 당연하긴 해.’

물론 오직 그들에게만 전력투구했기에 결과가 좋은 거야 당연하지만, 단순히 약쟁이라고 차별하는 건 아니다.

위험하잖아, 일단은.

로빈슨 카노의 경우 원래도 수준급 타자인데, 약빨 파워까지 감안해야 하고. 넬슨 크루즈야 뭐, 더 말할 것도 없고.

디고든은 타자로선 그리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나, 루상에 나가면 짜증나는 타입이니까, 확실하게 잡아야지.

물론 솔직하게 말하면 약간은 사심이 담겨 있기는 한데, 사심이 전부인 건 아니다.

“Suck, 오늘은 몇 이닝까지 갈 거야?”

“글쎄, 완봉까진 좀 힘들 것 같고··· 7~8이닝 정도로 끝내자.”

“이젠 나랑 상의도 없이 막 마음대로 정하네? 그냥 Go 네가 코치하지 그래?”

“에이, 제가 언제 그랬다고. 그냥저냥 그게 바램이다, 이뜻이죠. 몇 이닝까지 할까요?”

“7이닝 정도로 하자.”

“오케이, 그럼 8이닝으로 갑시··· 7이닝만 하죠. 어우, 요즘 우리 불펜이 좋던데. 믿고 맡겨야죠.”

“그래, 그 정도만 던져, 오늘은. 최근에 너무 타이트하게 달렸으니까.”

청개구리 심보가 도져서 8이닝을 외쳤더니, 스콧 에머슨의 표정이 절에 있는 사천왕상처럼 변하길래 잽싸게 말을 바꿨다.

어우, 이젠 장난도 못 치겠네. 요즘 들어서 코치가 화가 많아졌어.

“코치님 말 들었지? 다음 이닝부터 바로 시동 걸자.”

“씁, 오늘 너무 빡세게 던져서 손 아픈데··· 알았어, 닥치고 받을 게.”

코치가 떠난 뒤 브루스에게 통보하니, 투덜거리던 녀석은 내 눈빛에 고개를 조아렸다.

먹이사슬 체계가 잘 잡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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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단순히 스콧 에머슨의 패기에 겁먹고 눌린 건 아니다. 나도 어느 정도는 동의했으니까.

‘너무 가쁘게 달리고 있기는 하지. 그것도 시즌 초반부터.’

오늘 경기를 제외하더라도.

6경기 동안 무려 47이닝을 먹었다. 이 정도면 거의 경기 당 7~8이닝 정도는 기본으로 먹은 셈이지.

당장 완투완봉만 두 번하면서, 이봉을 달성했고 말이다. 사실 작년에도 이만큼 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정상적인 페이스는 아니지.

괜히 혹사 같은 말이 나오는 게 아니야. 그리고···

‘괜히 의혹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닌 것 같으니, 솔직히 YAK을 의심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나도 그랬을 거야.

내가 마이너에 있을 때, 어떤 투수가 갑자기 등장해서 이렇게 해버리면, ‘저놈 저거 약 먹은 거 아니야?’라고.

‘나중을 위해서라도 한번 숨을 고르고, 곡선을 완만하게 만들 필요가 있어.’

“세이프!”

물론 쪼끔 아쉽기는 하다.

5회 말. 선두타자 미치 해니거에게 큼직한 2루타를 맞기는 했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이후 오늘 첫 안타를 쳐냈던 카일 시거를 삼진으로 잡았으면서 느낀 건데, 오늘 폼이 생각보다 좋아 보이거든.

완투는 몰라도, 8이닝까지는 충분하게 찍을 수 정도지.

위밍업 전만 하더라도 축 가라앉아서 컨디션을 걱정했었는데 말이야.

그만큼 내가 약쟁이 토벌에 열을 올렸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분에 가라앉았던 몸이 또 기분 덕분에 다시 올라온 거니까.

‘그러니 자제해야지.’

흥분에 열기가 올라 폼이 올라온 건데, 이럴 때 무리해버리면, 나중에 리바운드가 크거든. 적절하게 제어해야지.

안 그래도 지금 사이클이 아슬아슬하게 이어지고 있는데, 리바운드가 닥쳐서 한번에 같이 꼬라박으면 낭패니까.

“아웃!”

7번타자, 라이온 힐리가 아웃으로 물러났다. 작년까지 우리 팀이었는데, 메인딜에 밀려서 묻혔지만, 오프시즌에 트레이드로 매리너스에 넘어갔었지.

파워가 제법 준수한 친구인데, 냅다 초구부터 당겼지만, 어림도 없었다. 빗맞은 타구가 내야 높이 떠오르면서 아웃.

‘오늘 커터가 꽤 괜찮네.’

내 패스트볼 3인방 중에서 가장 딸리는 녀석인데, 오늘은 제법 효과가 쏠쏠하군.

“파울!”

“스트라이크!”

물론 커터가 좋은 날은 나머지도 더 좋기에, 딱히 주목받을 정도는 아니지만 말이다.

포심과 서클 체인지업으로 투 스트라이크. 속도감을 이겨내지 못한 타자가 휘청거렸다.

체력도 사실 좀 남아돌지.

경기 시작 전, 브루스에게 통보했던 것과 달리, 적절하게 페이스를 조절했으니까.

히든 약쟁이가 빨리 밝혀졌잖아? 나머지 죄다 의심하고 조심하려고 했는데, 첫 회, 첫 이닝만에 드러나서 일이 쉬워졌지.

로빈슨 카노와 넬슨 크루즈에게만 집중적으로 전력피칭하고 나머지는 적당히 잡아서 그런지, 완급조절도 잘 됐다.

원래 완봉하기 좋은 날이 딱 이렇게 체력 관리 잘 되고, 공 좋은 날인데, 아쉽지만 참아야지.

“스트~~~라잌 아웃!”

대신 삼진이나 잡자.

8번타자, 포수 마이크 주니노는 높게 날아든 하이 패스트볼에 배트가 저절로 나왔다.

정석 중의 정석이지, 포심-체인지업-포심은.

물론 정석이라고 해도 저마다 가진 실력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지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나는 실력이 좋으니 결과도 좋은 셈이지.

아마도 오늘 10번째 삼진일 거다. 오늘도 두 자릿수는 쉽게 찍었구만.

‘그러고 보니, 통산 500삼진이 어쩌구 하던데, 이제 몇 개 남았지?’

지난 애스트로스전까지 딱 90개를 잡았으니, 작년 393개랑 합치면, 483인데. 오늘 열 개 잡았으니까, 이제 일곱 개 남은 건가?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내는 투수들이 보통 통산 500삼진을 풀타임 소화 기준 빠르면 3~4년 정도에 잡는 걸 감안하면. 진짜 미친 페이스긴 하네.

‘오늘은 7이닝까지니까, 이미 불가능이고, 웬만하면 최대한 빨리 찍어야지.’

이미 더럽게 빠른 주제에 뭘 더 빠르게 하냐고 말하고 싶겠지만, 어쩔 수가 없다.

본격적으로 의혹이나 논란 같은 게 터지기 시작하면, 순수하게 축하받지 못할 테고, 금방 이슈에서 밀려날 테니, 기왕이면 그전에 찍어놓고 축하받아야 그림이 예쁘잖아?

‘약쟁이 새끼 때문에 나까지 피해보네.’

마운드에서 내려가며 범인(진)일 로빈슨 카노를 씹었다.

나를 향한 의혹도 저 양반으로 인한 소문에서부터 시작된 거잖아?

슈퍼스타급이 도핑에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거기에 나까지 휘말린 거니까.

거참, 더럽게 피해를 주시는구만. 물론 가장 피를 보는 건, 그에게 매년 2400만 달러를 줘야 하는 매리너스겠지만.

‘피가 거꾸로 솟겠네, 매리너스는. 아니지, 별로 신경 안 쓸 수도 있겠어. 이미 밝혀진 넬슨 크루즈하고도 거액 계약했으니까, 디고든도 트레이드로 넙죽 받아왔고.’

옛날에는 수비로 일내더니. 이제는 아주 약으로 일내는 구만, 약으로 일내. 일을 낼 거면 야구로 일을 내야지, 약으로 일내면 어떡해, 아무리 발음이 비슷해도 그렇지.

아주 피눈물을 흘리겠구만.

그렇게 곧 충격적일 소식을 받아들 매리너스를 향해 혀를 끌끌 차며,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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