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222화 (222/316)

222화

‘대체 누구야? 더럽게 궁금하네.’

시애틀에 도착한 직후부터, 호기심은 점점 더 자라나, 나를 좀 먹었다.

숨겨진 약쟁이가 내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니, 궁금해서 못 참겠네.

‘카일 시거? 솔직히 슈퍼스타급은 아니고. 그럼 최근 성적이 좋은 미치 해니거인가? 아니야, 얘도 슈퍼스타라기에는 조금···’

1차전이 진행됐을 때. 나는 마치 탐정처럼 매리너스 선수들의 면면을 확인했다.

이 중에서 나한테 피해를 끼치고 있는 히든 약쟁이가 하나 숨어 있다는 건데···

차라리 듣지 말 걸 그랬어. 이러다가 경기에도 영향을 끼칠 것 같은데?

“Suck 너 왜 그래? 무슨 취조 중인 형사처럼 눈을 부라리네.”

“매리너스가 도발이라도 했나?”

“항상 능글거리던 애가 저렇게 눈을 치켜뜨니까, 좀 사납게 생겼네.”

그런 내 모습이 겉으로도 이상해 보였던 건지, 동료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지만. 나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아직 확정적인 일도 아니고, 소문에 불과한데, 괜히 입을 열었다가 분위기 이상하게 만들면 좀 그렇잖아?

브라이언의 말처럼 입조심 해야지. 애먼 사람 잡을 수도 있으니까.

“별일 아니야.”

“별일 아닌 게 아닌데? 뭔데 그래, 나만 알고 있을게. 나한테만 말해줘.”

“있어요, 그런 게. 경기에나 집중하슈.”

특히 제드 라우리.

뭔가 낌새라도 느낀 듯, 은근슬쩍 살살 꼬시고 있는데, 이 양반이 제일 위험하다.

SNS 중독자라서, 내가 입이 근질거리는 것처럼, 이 양반도 손가락이 근질거릴 테니까.

만약에 본인 SNS에 올렸다가 문제가 커지면··· 난 감당 못해. 감당할 자신 없어.

그렇기에 입을 꾹 닫은 채 하나하나 매리너스 선수들을 확인하다가, 정말로 마지막 인물들에게 시선이 향했다.

‘매리너스에서 슈퍼스타라고 한다면···’

시애틀 매리너스.

이 구단에서 현재 슈퍼스타라고 할만한 선수는 사실 그렇게 많지 않다.

애초에 여기도 그렇게 인기팀은 아니니까. 한창 잘나가던 시절을 제외하면 말이야.

기껏해야 다섯 정도.

하나는 넬슨 크루즈인데.

얜 아닐 거다. 브라이언의 말투를 보아, 기존에 걸렸던 사람을 이야기하는 눈치는 아니었으니까.

디고든도 잘 쳐주면 스타급이기는 한데, 얘도 이미 걸렸던 놈이니 제외하고.

그렇다면 셋이 남는데, 이 셋 전부 다 만약 도핑이 터진다면, 그 파급력이 엄청날 거다.

‘스즈키 이치로, 로빈슨 카노, 펠릭스 에르난데스 정도.’

면면이 화려하지?

일단 가장 먼저 명예의 전당 첫 턴 입성이 확정된 레전드 타자 한 명.

그다음으로 역대 순위에 오를 만한 최고수준 2루수이자, 10년 2억 4천만 달러의 대형 계약을 한 타자 한명.

마지막으로 시애틀의 왕(King)이자, 명전은 부족해 보이나, 구단 영구결번은 확실한 투수 한명까지.

셋 다, 야구선수로서 존경이 들 정도의 인물들이니 말이야.

‘만약 이 중에서 범인이 있다면···’

셋 중 누가 터지든 엄청난 태풍이 될 거라는 건 확실했다. 핵폭탄이 되겠지.

그렇기에 감히 그들의 이름을 먼저 떠올리지 않은 거고.

‘그냥 루머일 수도 있겠지. 그렇게 믿고 싶고.’

어쩌면 생각보다 슈퍼스타가 아닐지도 모르지. 원래 소문에는 과장이 좀 섞이는 법이니까.

혹은 내가 잘못 생각한 걸 수도 있고. 슈퍼스타급이라고 할 만한 넬슨 크루즈가 또 걸렸다거나 뭐 그런 거.

덕아웃 한쪽에 앉아, 샅샅이 매리너스를 확인했지만, 더욱더 찝찝해지기만 할뿐, 실체는 잡히지 않았다.

“스트라이크 아웃!”

그사이 1차전은 종료.

선발투수로 등판한 킹 펠릭스가 6이닝 3실점의 퀄리티 스타트를 기록하며 내려간 뒤.

뒷문을 잘 틀어막은 매리너스가 승리를 가져갔다.

####

다음날, 2차전은 승리로 막을 내렸다. 수월한 지구경쟁을 위해선 잡아야 하는 상대인데, 2패를 하지 않아서 다행이지.

그리고 내 차례인 3차전의 날이 밝았을 때,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브라이언이 약쟁이의 이름을 얘기해준 건 아니고, 어쩌면 예정된 수순이었지.

“특별고문이라··· 이러면 거의 은퇴지?”

“공식 발표는 아니지만, 은퇴나 다름없기는 하지.”

“25인 로스터에서도 빠졌다고 하던데, 이러면 뭐, 확실하지.”

“이치로가 은퇴하기는 하네. 진짜 좋아했던 선수인데, 뭔가 잘 실감이 안 난다.”

“3천 89안타. 나는 앞으로 한 20년쯤 더 뛰어도 힘들겠네.”

스즈키 이치로가 매리너스 특별고문으로 보직이 이동되었다는 소식이었고. 이것이 뜻하는 바는 딱 하나다.

은퇴지, 은퇴.

전날, 2차전에서 좌익수로 나와, 득점과 볼넷을 올렸는데, 그게 마지막이었구만.

‘기분이 미묘하네.’

스즈키 이치로의 은퇴.

그건 어쩌면 한 시대의 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메이저리그만 따졌을 때, 01년에 데뷔했으니, 대충 17년쯤 커리어를 보낸 건데.

생각해보면 한 세대가 딱 자라나는 시간이잖아? 청년 시절 이치로의 데뷔를 봤던 사람들이 모두 나이 지긋한 가장이 되었을 거고.

‘야구 내적으로 봐도, 의미가 좀 남다르지.’

어떻게 보면, 일본식 스몰야구의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플라이볼 혁명으로 그런 스몰야구가 완벽하게 문을 닫는 시기에, 때마침 그도 은퇴하는 거니까.

영향력이 상당한 선수이고, 슈퍼스타인 만큼, 언론은 물론, 경기를 앞둔 동료들도 혀를 내두르거나, 무언가 추억에 잠긴 사람 같은 눈빛을 했는데.

‘시기가 참···’

나는 그보다도 조금 더 기분이 복잡했다.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으니까.

명예로운 은퇴를 위해서, 논란이 터지기 전에 매리너스가 먼저 행동한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이래서 말을 가려들어야 해.

괜히 호기심 때문에 오만 사람들 다 의심하고 있네.

이게 지식의 저주인가?

“이치로가 은퇴를 한다니··· 믿기지가 않네. Suck 너도 그렇지?”

그런 복잡한 내 심경도 모르고, 브루스는 그저 신기한 듯 고래를 젓다가, 내 표정이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건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Suck 너 어제부터 왜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어? 집안 사정이야?”

“아니, 별거 아니야. 네 말처럼 이치로가 은퇴를 한다니, 좀 신기하긴 하네.”

“아~ 너도 이치로 좋아했나봐? 하긴, 같은 아시안이니까, 감정이 남다르긴 하겠네.”

“그 정도는 아니고. 이치로도 이치로지만, 경기에나 집중해라. 오늘 내 공 받아줄 포수가 딴 곳에 신경 팔린 거 별로 안 좋아한다.”

“알았어, 알았어, 숨 좀 쉬고 살자. 넌 너무 빡빡해.”

조잘거리는 브루스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내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등판 앞두고 이런 잡생각에 휩싸이는 건, 별로 프로다운 모습은 아니었으니까.

‘아니겠지, 이치로는. 그런 종류의 선수는 아니니까.’

그렇게 믿으며, 왠지 조금 침울해진 기분을 억지로 끌어 올렸다.

약쟁이가 누구든지 간에, 일단 나부터 잘해야지. 언제나 그게 가장 중요하고.

“오늘 컨디션은 조금 어떻습니까?”

시간 맞춰 경기장으로 향하니, 언제나 그렇듯 대니얼이 반겨줬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나 보네.

평소처럼 내 컨디션부터 체크한 그였지만, 어쩐지 표정이 그리 밝아 보이지는 않았다.

아마 그도 브라이언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었겠지. 그도 당사자 중 하나가 됐으니까.

어쩌면 그냥 내 생각이 복잡하니, 다른 사람 표정도 그렇게 보이는 걸 수도 있고.

“뭐,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아요.”

컨디션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원정이 겹쳐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아니면 생각이 복잡해서 폼이 안 올라온 걸 수도 있고, 아무도 모르지.

“그런 것 치고는 힘이 넘치는군요. 마인드컨트롤 하세요. 민감한 문제에 엮이게 된 건 분명 화가 나는 일이지만. 지금 당장에 집중하셔야죠.”

“그래야죠.”

후자였나 보네.

대니얼이 괜한 말을 할 리는 없고, 몸 상태가 나쁘지 않나보군. 다행이야.

이렇게 기분이 복잡할 때, 신체적으로도 사이클이 내려갔다면, 꽤나 힘겨운 하루를 보내야 했을 테니까.

‘다르게 말하면, 정신적으로 잘 가다듬으면, 폼이 좋은 날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잡념을 완전히 털어내지는 못했지만, 최대한 온전히 경기에 집중했다. 괜한 호기심이나, 궁금증, 매리너스를 향했던 의심도 떨쳐내고.

그렇게 오직 워밍업에만 집중하니, 확실히 폼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이래서 멘탈이 중요하단 말이야.

‘그래, 누가 약쟁이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지. 난 내 할 일만 잘하면 되니까.’

난 약쟁이가 싫다.

그냥 기본적으로 싫어.

그런 약쟁이에게 얻어맞는 건 내 스스로 굉장히 화가 나는 일이고 말이야.

매리너스에 숨어 있다는 히든 약쟁이가 누군지는 모른다. 두 경기 내내 열심히 관찰했는데, 영~ 감이 안 잡히더라고.

어쩌면 정말로 킹 펠릭스일 수도 있고, 은퇴의 길에 들어선 이치로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오늘 내가 상대할 매리너스 타선에 끼어 있을 수도 있지.

그러니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오늘 타선에 끼어 있다면, 누군지 고민하면서 끙끙 앓는 것 보다는···

‘그냥 매리너스 타자들 죄다 때려잡는 게 최선이지. 죄다 족치다 보면 그중에서 한 명 있겠지.’

숨어 있는 약쟁이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초가삼간을 다 태우다 보면, 결국 빈대도 같이 잡히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매리너스를 죄다 때려잡다 보면, 약쟁이도 같이 잡힌다, 이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니 힘이 무럭무럭 샘솟았다. 그래, 이게 맞는 거지.

같이 얻어맞는 매리너스는 무슨 죄냐고 묻는다면, 연대책임이다. 그러게 누가 약쟁이랑 같은 팀 하래? 어?

심지어 셋이잖아?

기존에 걸렸던 놈들이 아니라고 한다면, 무려 약쟁이 세 명이 한 팀에 공존하고 있는 건데.

‘약쟁이가 셋? 한 팀에? 이거이거 완전히 뿌리부터 글러먹은 팀이구만.’

이참에 확실하게 조져놓는 게 메이저리그의 안녕과 미래를 위해서라도 더 옳은 일이겠지.

물론 약물 가지고 남을 뭐라고 하기에는 우리 팀도 전과가 화려하기는 한데, 아무튼 그렇다.

“이젠 힘이 너무 들어가네요. 무슨 생각 하시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온전하게 워밍업에만 집중하세요.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마시고요.”

“옙, 죄송합니다.”

언제나 중도를 지키는 게 힘들구만. 워밍업을 막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머리가 복잡해서 축 늘어졌는데.

이젠 의욕이 너무 넘쳐서 힘이 과하게 실리네. 자꾸 이상하게 어긋나는 정신을 제어하며, 최대한 몸을 달아 올렸다.

####

“알잖아? 우리 보스가 선수들에겐 천사인거. 화가 단단히 났어.”

-보스가 아니라, 브라이언 네가 화가 난 거겠지. 아무튼 무슨 뜻인지는 알겠네. 그러니까, 한 발자국 물러서 있어라?

“어차피 아닌데, 나중에 서로 부끄러울 필요는 없잖아? 그쪽도 민망해지고.”

브라이언은 바쁘게 움직였다.

고유석과 만난 이후, 처음으로 스캇 보라스, 그의 보스와 의견이 일치했다.

최고의 상품이자, 현재 회사의 간판스타를 지키는 것.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일단 회사 차원에서 대대적인 법적 조치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직 일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도, 미리 장전하고 있는 셈이지.

‘뭉친다면, 쉽지는 않겠지. 승리하더라도, 피해가 클 테고. 그러니 어떻게든 갈라야지.’

언론은 본인들의 자유에 민감하다, 평소에는 반목하더라도, 특수한 상황에선 함께 뭉치는 경향이 짙지.

만약 보라스 코퍼레이션에서 대대적인 소송에 들어간다면, 단단히 뭉치려고 들 텐데.

언론 특유의 여론전으로 선수에게 이상한 프레임이 만들어질 수도 있으니. 차라리 그전에 미리 분할하여, 최대한 아군을 끌어들이는 편이 옳았다.

-그렇기는 한데, Go는 터치하지 말고, 다른 쪽을 물라니. 그렇게 따지면, 이쪽은 확실한 거 맞아?

“확실해. 팩트체크 됐어. 아마 곧 터질 거야. 길어야 2주 정도 사이에.”

-뭐, 이쪽도 꽤나 덩어리가 크기는 하네. 만만찮기 않겠는데?

“그렇겠지, 그저그런 선수가 아니니까.”

혹은 그 대신 다른 쪽을 먹잇감으로 바치거나.

평소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언론사들에서 합의를 받아냈다. Go가 아닌, 도핑 소문이 돌고 있는 다른 슈퍼스타에게 집중하겠다는 합의를.

확보한 자료도 어느 정도 넘겨줬지.

Go를 지키는 대신, 다른 이를 고깃덩이로 만들겠다는 것이지만, 딱히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억울한 Go와 달리 그는 확실했으니까. 확실한 약쟁이지.

Go에게 전해줄 때만 하더라도, 아직은 소문 정도였지만, 이젠 실체가 잡혔다. 사무국에서도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하고.

‘보스 역시 마찬가지지. 나와는 조금 다른 이유도 있지만.’

그를 제물로 바치는 건 회사 내부에서도 찬성했다. 스캇 보라스마저도.

당장의 간판인 Go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나. 도핑이 걸린 선수와의 관계가 나쁜 것도 이유 중 하나지.

거액의 FA 계약을 앞두고 기존의 에이전트였던 스캇 보라스가 해고됐었지.

본인의 과도한 요구를 생각하지 못한 채, 기존 구단과의 원활한 연장계약을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어쩌면 스캇 보라스,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악마라는 그 이미지 때문이라고 생각한 걸지도 모르고.

사실 그런 경우가 은근히 많았다. 에이전트야 늘 해고 당하는 게 일이라고는 하지만.

브라이언 그의 보스인 스캇 보라스는 특히나 구단들과의 관계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기에, 그것을 의식한 선수들이 연장계약을 앞두고 해고하는 경우가 제법 많았으니까.

‘그러니, 본보기로 딱이지.’

그렇기에 이번에 Go를 보호하며, 선수를 확실하게 지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과 더불어. 혹시라도 독립을 꿈꾸는 이들에게 보여줄 본보기로 삼기에도 좋았다.

제아무리 선수들에겐 천사라고 해도, 만약 둥지를 저버린다면,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는 본보기 말이다.

‘이쪽을 향한 경고이기도 하고.’

물론 그 경고는 Go와 브라이언 자신에게도 지칭되겠지.

그를 데리고 독립할 거라면, 이 정도의 전쟁은 각오하라는 경고 말이다.

그것이 조금 섬뜩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은 뒷배였기에, 든든한 것도 사실이었다.

-오케이, 우리도 그쪽이랑 척지기는 싫으니까. Go는 터치 안 할게. 걱정하지 마. 괜히 루머 같은 걸로 슈퍼스타와 관계가 틀어지는 건, 우리도 사절이니까.

“옳은 선택이야.”

대부분 지금처럼 못 마땅하더라도, 일단은 내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게 한 명의 적을 더 지우고, 아군으로 포섭했을 때,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는 회사에서 브라이언은 시계를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 Go도 만났겠군.’

슬슬 경기가 시작될 무렵.

아마도 Go 역시 만났을 거다.

어쩌면 이 모든 논란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타락한 슈퍼스타를.

####

1회 초, 첫 회는 깔끔하게 막혔다. 아쉽네, 몸을 더 달아 올릴 수도 있었는데.

‘뭐, 그래도 적당하게 올라오기는 했으니까.’

최대한 집중해서 워밍업을 하고, 불펜피칭한 덕분인지, 미묘했던 폼은 빠르게 올라왔다. 목표가 딱 정해져서 그런 거겠지.

매리너스 타자들을 죄다 때려잡고 보자는 아주 심플하면서도 확실한 목표 말이야.

“오늘도 무리하지 말고, 편하게 잘 던져.”

“옙, 걱정하지 마십쇼.”

스콧 에머슨의 배웅을 뒤로하고 걸어 나온 그라운드. 관중은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1만 정도인가? 좀 적응이 안 되네.

우리 팀도 내 등판 때면 항상 관중이 몰려들기에, 웬만하면 사람이 바글거리는 경기장에서 등판하는데.

“You Suck!”

“Suuuuuuck!”

“Hell Yeah! Suck Time이다!”

오늘은 어쩐지 원정 온 레이더스가 더 많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관중이 적었기에, 괜히 어색했다.

그나마 저 양반들이 일당백으로 소리쳐줘서, 시끄럽기는 하네.

“Suck 오늘은 당연히 길게 갈 거지?”

마운드에 오르니, 미리 기다리고 있던 브루스가 그렇게 말했다.

내 이닝이 퐁당퐁당이잖아?

길~게 8,9이닝 던지고.

그다음은 7이닝 정도로 짧게(?) 던지고. 그거의 반복이지.

저번 휴스턴 전에서 7이닝 정도 던졌으니, 그런 사이클 대로면 오늘은 8이닝 내지는 완투의 날인데.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오늘은 아니다.

“이닝은 됐고, 그냥 X나 빡세게 던질 거니까, 이 악물고 잡아라.”

“···그건 뭐 선전포고냐? 왜 나한테 그래. 표정이 이상하더니, 내가 혹시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

이닝보다는 아주 강력하게 때려잡는 것, 그 정도만 집중할 생각이었으니까.

단순히 매리너스를 개패듯이 패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다. 위험하잖아.

‘약쟁이가 누구인지 모르니, 어디서 약물 파워가 터질지 모르지.’

즉 만약 정말로 타선에 약쟁이가 있다면, 모든 타자가 다 위험하다는 뜻이다.

누가 갑자기 뜬금없는 똥파워를 뽐내며, 홈런 날릴지를 모르는 거니까.

그러니 한 바퀴 돌아서, 대략적인 파악을 하기 전까지는 나도 만약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겠지.

그런 의미에서 말했더니, 브루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림도 없지! 공이나 잘 받아라.

“내려가, 홈 플레이트로.”

“하아, 또 손바닥 퉁퉁 붓겠네.”

축 늘어진 브루스를 내려보낸 뒤, 마지막 마운드 피칭까지 마치고 숨을 가다듬고 서자. 1회 말. 오늘의 첫 타자가 올라왔다.

‘시작부터 기분이 더럽네.’

첫 타자의 얼굴을 본 순간 괜한 짜증이 솟았다. 약쟁이를 선두타자로 보다니, 거참 X같구만.

디바리스 스트레인지-고든.

흔히 디 고든이라고 불리는 선수인데, 얄쌍하고 여리여리한 몸과 달리, 약쟁이다.

원래는 농구를 했지만, 키가 안 커서 야구로 급선회 한 녀석인데, 메이저리그 유명선수 출신인 아버지의 인맥빨로 쇼케이스를 열고 프로에 입문했지.

‘나 같으면 아빠 보기 미안해서라도 약 같은 건 손에도 안 대겠다.’

결과적으로 도핑에 걸리면서 그렇게 물심양면 도와준 아버지의 얼굴에도 먹칠하게 된 셈이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어릴 적부터 야구를 한 게 아니라, 기본기가 딸려서 그런지, 리드오프치고는 선구안이 별로 좋은 타입은 아니다.

‘타율과 얼마 차이가 안 나지.’

당장 약물이 적발되기 전, 가장 잘 나갔던 2015년만 보더라도, 안타는 205개를 쳤는데, 볼넷은 고작 25개 정도에 머물렀지.

뭐, 결국은 그 준수한 타격 능력도 약빨로 드러난 셈이지만.

그래도 작년 3할 타율을 기록하며, 201개의 안타를 기록했던 만큼, 무시할 수는 없는 타자이나.

“스트라이크!”

어디 약쟁이 새끼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어?

부리부리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디고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최선을 다해 공을 던졌다.

바깥쪽에서부터 쭉 들어온 서클 체인지업. 선구안이 별로 좋은 타입이 아니라는 게 사실인지, 그는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얜 그나마 위험부담이 적어. 약쟁이들 중에서는.’

기본적인 하드웨어 자체가 얇은 편이라 힘이 좋은 타입은 아니다. 그러니 크게 부담가질 필요가 없는 타자지.

약빨로도 극복하지 못한 건지, 커리어 내내 5홈런을 넘긴 적이 없을 정도니까.

장타율도 앞서 언급한 2015년에 딱 한번 4할을 넘겨봤고. 그냥 똑딱이지.

“파울!”

그것을 증명하듯.

이번엔 몸쪽으로 들어온 포심에 제법 정확하게 타이밍을 맞춰서 스윙을 냈지만, 배트가 심하게 밀렸다.

적절하게 파워가 준수한 타자였다면, 타이밍이 얼추 맞았으니, 장타를 노려볼만도 했겠지.

“파울!”

그래도 확실히 200안타를 두 번이나 기록한 타자답게, 컨택 자체는 뛰어난지, 3구째, 제대로 던진 너클 커브를 중간에 맞춰내기도 했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그 정도로는 힘들다.

몸쪽으로 파고들다, 낮게 떨어지는 서클 체인지업을 헛치며 스트라이크 아웃. 일단 첫 번째 약쟁이는 잘 처리됐다.

그다음은 2번타자 진 세구라.

이쪽은···

‘약간은 의심스럽기는 하지.’

데뷔 이후, 밀워키 브루어스 시절만 하더라도 평범하게 못하는 성적을 올렸던 타자다.

그런데 16년 애리조나 디백스로 넘어간 이후 대폭발하더니, 작년에도 그보다는 못하나 적절히 준수한 성적을 기록, 올해도 그 기세를 이어오고 있지.

단순히 포텐이 터진 것일 가능성이 높고, 솔직히 슈퍼스타급은 아니기에, 강력한 후보 수준은 아니지만.

‘일단 그래도 디 고든 보다는 조금 더 위협적이야.’

약쟁이든 아니든지 간에 앞선 타자보단 약간은 더 조심해야 하는 타자다.

거포 수준은 아닌데, 그래도 적당한 파워는 갖췄으니까. 컨택도 좋은 편이고.

“볼.”

초구는 볼.

바깥쪽으로 던진 너클 커브를 가만히 지켜보기는 했다. 그래, 선구안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지.

‘괜히 길게 끌다가 감 잡으면 귀찮은 타입이야. 뒤의 타자들이 만만치 않기도 하고. 빠르게 잡자.’

그렇게 마음먹고 던진 2구.

“스트라이크!”

쭉 들어온 투심 패스트볼을 이번에도 타자는 지켜만 봤다. 그렇게 원 앤 원.

‘배트가 나올 것 같은데···’

뭔가를 노리는 듯한 표정.

혹시 기다리고 계신게···

‘이건가?’

과감한 몸쪽 코스.

그러자 처음으로 타자의 눈이 반짝였다. 침착하게 기다렸던 이전과 달리 냅다 나온 배트. 몸쪽 포심을 노리고 나온 거였구만.

일찌감치 정답 정해두고 그것만 죽어라 기다렸던 거였어.

“아웃!”

허나 미안하지만 커터다.

배트 안쪽으로 파고드는 무브먼트에 타격 지점이 살짝 틀어졌고. 퉁-하는 맥없는 소리를 낸 공은 데굴데굴 유격수, 마커스 시미언의 발밑으로 굴러갔다.

가볍게 잡아 그대로 송구하여 1루에서 아웃.

“삼진 먹으라고오오오~”

“되지도 않는 x신 스윙하지 말고, 그냥 삼진이나 쳐 당해라!”

홈 팬들이 적어서 그런가, 유독 쩌렁쩌렁 울리는 레이더스의 조롱을 뒤로한 채, 타자는 물러섰다.

그리고 3번타자.

터덜터덜 걸어 올라오는 걸음은 묘하게 무거웠다. 무게감이 느껴진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고민이 있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네. 마치 안 좋은 일이 있는 사람처럼.’

어쩌면, 이번 시리즈 내내 매리너스를 관찰하던 내 모습이 딱 저랬을지도 모르지.

깊은 생각에 잠겨서, 혼자 표정을 구기고 있는 거 말이야.

경기가 한창 진행되는 중이고, 심지어 본인의 타석인데도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고민에 빠진 타자.

그것을 보니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진짜로 그쪽이었어? 그 슈퍼스타급이라던 약쟁이가?’

너구나. 내가 초가삼간 다 태워서 잡으려고 했던, 나한테까지 똥물을 튀긴 빈대가.

누군지 모르니까, 그냥 매리너스 죄다 때려잡으려고 했더니, 예상보다 훨씬 빨리 만났네.

‘실망이네, 진심으로.’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대단한 선수잖아?

역사에 손꼽힐 만한 2루수이고, 누적 스탯을 잘 채우면 명예의 전당도 가능성이 있는 선수니까.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로, 이미지가 좋은 선수이기도 하고.

‘파급력이 크기는 하겠어.’

그런 ‘로빈슨 카노’가 도핑에 걸린다면, 진짜 엄청난 일이기는 하네.

이치로한테 미안하구만.

괜히 의심했어. 어쩔 수가 없잖아, 너무 타이밍이 공교로웠으니까.

‘둘 다 양키스를 거쳤는데···’

그러고 보면 참 신기해.

이치로도 양키스를 거쳤는데. 이쪽은 양키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이니까.

내 기억이 맞으면, 시기도 겹친다. 한 2년 정도 같이 양키스에서 뛰었을걸?

둘 다 대단한 선수들이고, 엄청난 임팩트를 보였으며, 명예로운 커리어를 보내며.

양키스를 거쳐, 다시 매리너스에서 만났으니, 아마도 제법 친밀할 텐데.

‘말년은 전혀 다르겠네.’

이 두 사람의 마지막은 아마도 꽤 다를 것 같았다. 친정팀으로 돌아와, 경기를 치르다 특별고문으로 보직 이동하고 명예롭게 은퇴를 준비하는, 아마도 모두의 박수 속에 쿠퍼스타운에 입성할 이치로와 달리.

“스트라이크!”

이쪽은 내 예감처럼 약쟁이가 맞다면, 앞으로 모든 커리어가 부정당할 테니까. 물론 딱 한번 걸린 거니, 또 다를 수도 있지만.

“스트라이크!”

확실한 건 만약 이 느낌이 진실로 밝혀진다면, 그의 남은 커리어가 어떻게 흘러가든지, 거기에 존경 같은 건 없겠지.

“스트라이크 아웃!”

만날 때마다 나한테 삼진 먹을 각오도 해야 할 거고.

삼구삼진. 이닝 종료.

약쟁이와 약쟁이(진)에게만 딱 삼진을 잡았으니, 이것 참, 정확하게 골라서 잡았네.

“로빈슨 카노 주의해라.”

“그래? 별 느낌이 없던데.”

“그래도 조심해.”

“알았어, 근데 로빈슨 카노도 그렇지만, 당장 다음이닝 선두타자가 제일 위험하지 않아?”

“다음 이닝 선두타자? 그걸 왜 벌써 이야기- 아, 그렇지, X발거. 제일 위험하지.”

1회 말이 삼자범퇴니.

2회 말 선두타자는 4번타자인데, 넬슨 크루즈다. 매리너스에서 제일 위험한 타자이기는 하지.

도통 약빨이 대체 언제까지 유지되는 건지, 여전히 대단한 파워를 자랑하며, 크루즈 미사일을 뻥뻥 이륙시키고 있으니까.

아니 이 시부랄놈의 팀은 뭔 놈의 약쟁이들이 왜 이렇게 빽빽하게 배치돼 있어? 상대하는 사람 기분 X같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