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쓰읍, 뭐 경기가 이러냐?”
“그래도, 마음에는 드네. Suck도 잘잡고, 상대도 뭐, 삼진 잘 잡으니까. 시원시원해서 좋잖아?”
“하긴, 속도감이 있어서 좋기는 하네.”
의외로 레이더스는 질긴 투수전이 마음에 들었다.
애초에 고유석이 화끈하게 삼진을 잡는 모습에 홀려, 야구의 길로 입문했던 이들이기에.
일단 양쪽 다 화끈하게 삼진을 잡고 있으니, 그들의 입맛에 맞았으니까.
미식축구였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호리호리한 몸으로 잘도 따라오는 크리스 세일이 신기하기도 했고.
물론 혹시나 먼저 고유석이 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기는 했지만, 그런 상상을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뭐, 어차피 끝까지 가면 Suck이 이길 테니까.”
“그럼 오늘도 그거 하는 건가?”
“모르지, 걔가 언제까지 버티느냐에 따라서 다를 테니까.”
“최소한 지지는 않겠지.”
오클랜드에서 고유석은 불패의 상징이었다. 그가 등판한 모든 경기에서 승리한 것은 나니나.
어찌 됐든 처참하게 패배한 기억도 없었으니까. 늘 상대 투수를 압도하는 것이 고유석이기도 하고.
그렇기에 투수전이 마음에 들면서도, 결국에 끝까지 가면, 승자는 고유석이리라는 생각을 레이더스만이 아니라, 모든 애슬레틱스 팬들이 내심 공유하고 있었지만···
“어?”
균형은 깨졌다.
그것도 이쪽에서 먼저.
제법 힘이 실려 둥실 떠오른 타구는 내야를 훌쩍 넘어가더니, 좌익수의 앞에서 떨어졌다.
어쩌면 해당 코스 이외의 모든 야수들이 최선을 다해 뛰었지만, 그 누구도 캐치하지 못했고.
그나마 좌익수 채드 핀더가 재빨리 타구를 낚아채 송구했지만.
“세이프!”
당연하게도 한참은 늦었다.
타자는 이미 1루 베이스를 밟은 지 오래였으니까.
그 순간, 투수전의 냉기보다 훨씬 더 가혹하고 적막한,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밤처럼 살을 에는 추위가 콜리시엄에 내려앉았다.
겨울을 지나, 봄을 거쳐, 이젠 여름을 향해 달려갈 시기의 캘리포니아가 아닌, 한창 혹한이 계속되는 알래스카처럼.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평소라면 타자를 아낌없이 극찬(?) 했을 레이더스조차, 금붕어처럼 뻐끔거리기만 할뿐.
감히 소리를 내지 못했다.
이건,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으니까. 다른 것도 아닌 콜리시엄에서, Go가, 상대보다 먼저 퍼펙트가 깨져버리는, 그래서 뒤처지게 되는 것은 말이다.
“뭐- 뭐야··· 아니, 왜···”
“지금, 이거 맞아? 이거 맞냐고. 내가 지금 꿈꾸는 건 아니지?”
“Fuuuuuuuuuuuck!”
“Suck이 먼저 맞았다고? 상대보다 먼저?”
곧 잔잔했던 태풍의 눈을 지나면서, 폭풍처럼 충격이 닥쳐왔다.
몇몇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껌뻑이기도 했고, 뒷목을 잡는 사람도 있었다.
고유석의 퍼펙트가 깨진 것이다. 상대보다 먼저. 그것으로 양팀에 드리웠던, 타자들을 압박했던 분위기는 이제, 애슬레틱스만의 것이 됐다.
“그렇지! 이거지!”
“나이스샷! 진짜 X나게 나이스다! 샌디! X발 X나게 잘했어!”
레드삭스의 덕아웃은 축제였다. 선수들은 난간에 걸쳐, 안타를 쳐낸 샌디 레온을 격찬했고.
지금까지 억눌린 감정을 표출하듯, 당당하게 어깨를 펴기도 했다. 물론, 곧이어 닥쳐온 울분에 가려졌지만 말이다.
“이런 개색-”
“X발! 이게 무슨 짓이야! 뒤지고 싶어!”
“그걸- 그걸 왜 못 잡아! 다리가 부러져도 잡아야지!”
웅성거리는 경기장.
좌익수 채드 핀더는 송구 이후 그대로 땅바닥에 시선을 고정했다.
지금, 이 순간 나라를 팔아치운 것 이상의 대역죄인이었으니까.
애초에 그냥 깔끔한 안타 코스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의 범위 내에서 일어난 일이니. 어쩔 수가 없지.
충격과 공포, 그리고 분노가 쓰나미처럼 그라운드를 휩쓸었을 때.
“스트라이크!”
그 모든 소란을 뚫고, 주심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고유석은 그저 덤덤한 표정으로 피칭을 이어갔다.
심지어 타자조차 어수선한 분위기와 관중들의 흉흉한 눈빛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는데도.
“스트라이크!”
그는 그저 공을 던졌다.
“스트라이크 아웃!”
다른 이들이 느꼈을 충격과 상관없이,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그 무던한 모습에 오히려 홈팬들이 허탈하게 웃었다.
“저게 사람이야 로봇이야.”
“내가 Suck을 사랑하기는 하는데, 가끔 보면 나도 무섭다니까.”
“퍼펙트가 깨진 건데, 아무렇지도 않나? 그냥 공만 던지네.”
“어째,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은데, 우리가 더 난리부리는 것 같네.”
“저게 맞기는 하지. 아직 경기 끝난 것도 아니고, 퍼펙트야 우리도 깨버리면 되는 거니까.”
그 침착한 모습에 달아올랐던 분위기는 오히려 쉽게 꺼트려졌다. 그래, 아직 경기가 끝난 건 아니다.
그저 예상했던 그림이 망가지면서, 급격하게 충격이 닥쳐왔을 뿐.
“스트라이크 아웃!”
레드삭스가 털리고 있다는 건 변치 않았다. 그에 자존심을 회복했던 레드삭스 타자들 역시 다시 어금니를 꽉 물었고 말이다.
“스트라이크!”
그저 평소처럼 점점 더 속도만 높이며, 타자들을 몰아치는 모습에 몇몇은 오히려 질린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몇몇은 깨달았다.
잔잔한 겉모습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화가 단단히 났는데?”
“그런가? 딱히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얼굴도 차분하잖아? 침착하고.”
“그러니까. 감정이 없잖아. Suck이 그런 타입이 아닌데도 그렇다는 건. 반대로 화가 제대로 났다는 뜻이지.”
고유석은 투수치고는 포커페이스가 잘 없는 타입이다. 실없이 웃기도 하고, 기쁘면 대놓고 웃고.
마운드 위에서도 자기 감정을 충실하게 표현하는 사람이지. 간혹 타자들을 낚을 때를 제외하면 말이다.
당장 저번 다저스전에서, 5회까지 이어갔던 퍼펙트가 깨졌을 때도 얼굴을 잔뜩 구겼으니까.
그런 사람이 오히려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건, 아무렇지 않은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극렬한 감정을 억지로 억누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을 그저···
“아웃!”
공에 담아 던졌을 뿐.
경기의 균형을 지탱했던 더블 퍼펙트는 깨졌지만,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는 여전했다.
아니, 오히려 얇은 얼음막이 거미줄처럼 갈라졌기에, 더욱더 아슬아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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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ck. 내가-”
“내 실수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마. 아, 쪽팔려. 무키 베츠나 J.D. 마르티네즈였으면 차라리 낫지···”
날 위로하려던 건지, 브루스가 입을 열었지만, 가뿐하게 막아버렸다.
아마 자기 잘못이라느니, 자기가 제대로 관찰했어야 한다느니 하려고 했을 텐데. 그건 오히려 위로가 되지 못한다.
막말로 얘 잘못이 어딨어.
피칭은 전부 내 마음대로 하는데, 얘 역할이 뭐가 있다고.
그냥 내가 맞은 거지.
샌디 레온.
그리 공격력이 좋지 않은 타자이고, 오늘 타격감도 별로 좋지 않았기에, 쉽게 잡으려고 했더니, 바로 맞아버렸네.
전적으로 내 책임이지.
‘경기가 후반으로 가면서 정신이 헤이해진 거야.’
양쪽 다 퍼펙트가 유지되고 있었으니. 타자들도 더욱더 빡세게 집중하고 있었는데. 그것까지 감안했어야지.
애초에 오늘은 가볍게 던져서는 안 되는 날인데, 내가 잘못한 거지.
그렇기에 화가 났다.
퍼펙트가 깨진 것도 화가 나고. 그걸 깨트린 게 나 자신이라는 것에도 화가 나고.
‘그나마 다행이지. 파워가 강력한 타자가 아니라는 게.’
힘으로 밀어서, 단타로 끝났지만, 만약 무키 베츠나, J.D. 마르티네즈처럼 한방이 있는 타자였다면, 단순히 안타로 끝나지는 않았을 거다.
타이밍이 제대로 맞았으니, 쭉 날아가서 담장을 넘어가버렸을 지도 모르지.
물론 그런 타자들에겐 기를 쓰고 전력투구를 하는 편이긴 하지만.
‘느낌이 있었던 것 같은데, 퍼펙트는 아니었던 건가?’
그렇게 퍼펙트는 깨졌다.
오늘 느낌이 좋았는데 말이야. 뭐가 됐든 뭔가 하나가 나올 것 같았지. 그런데 그게 퍼펙트는 아니었나봐.
이렇게 끝나버리네.
“다들 정신 바짝차려. Suck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우리도 한방 치면 되는 거야. 에이스가 이렇게 잘 던져주고 있는데. 그런 거라도 해야지!”
내가 허탈하게 앉아 있을 때, 타자들은 반대로 의지를 끌어올렸다.
쪽팔리겠지. 자기들보다 레드삭스가 먼저 퍼펙트에서 탈출했으니까.
에이스가 이 정도로 잘 던지고 있는데, 점수를 내기는커녕 안타 하나 못 쳐서, 먼저 굴욕을 당하게 한 것이 미안하기도 할 거고.
그래서인지, 타자들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며 내 시선을 피하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큰 유념은 없다.
‘크리스 세일이 잘하는 거지. 타자들이 못 한다기보다는. 아니지, 둘 다인가?’
그냥 크리스 세일이 X나게 잘하고 있다. 그게 전부지. 투수가 저렇게 던지면, 타자들 원망하는 것도 좀 그렇기는 해.
“스트라이크 아웃!”
곧이어 시작된 6회 말.
크리스 세일은 다시금 씩씩하게 던졌다. 기쁜 기색도 없이, 그냥 묵묵하게.
“아웃!”
97마일.
이제 경기 후반인데도 구속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지. 저런 투수를 상대로 안타를 치기란 쉽지 않다.
“Go, 혹시···”
“안 내려갈 거예요. 체력 아직 남아돌거든요.”
“그래, 그렇겠지. 너무 신경 쓰지 마. 타자들이 한방 쳐줄 테니까. 피칭에만 집중해.”
“그래야죠.”
내가 멍하니 크리스 세일을 보고 있으니 조금 걱정스러웠던 건지, 살포시 다가온 스콧 에머슨이 위로했지만.
그의 생각과 다르게, 난 별다른 유감은 없었다. 물론 화는 X나게 나는데. 어쩔 수가 없잖아? 한편으로는 조금 색다르기도 했고.
‘이제 내가 언더독이네. 쫓아가는 입장이 됐어.’
내 퍼펙트가 먼저 깨져버렸으니, 이젠 크리스 세일이 앞서나간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는 그런 생각따윈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어쨌든 상황 자체는 그렇게 되버렸지. 내가 먼저 맞았으니까.
웬만하면 내가 경기를 끌어가는 편이었는데, 이번엔 쫓는 입장이 되니 조금 신기하구만.
‘작년 브레이브스전과는 조금 다르지.’
그나마 내가 투수 싸움에서 밀린 건, 작년 전반기 막바지에 사이클이 안 좋았을 때. 브레이브스와 인터리그 매치업으로 만나, 맞붙었을 때다.
그때 상대 선발투수가 엄청나게 잘했었지. 나는 반대로 약간 밀리는 추세였고.
하지만 그때와 비슷한 듯 조금 다르다, 그땐 내 스스로도 컨디션이 안 좋았기에, 오히려 분위기에 탑승해서 묻어가는 게 목표였으니까. 상대를 따라가는 게 아니었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도 컨디션이 엄청 좋은 편이라, 미친개처럼 쫓아갈 생각이었으니까.
‘이게 훨씬 재밌긴 하지. 쫓기는 것보다는 쫓는 쪽이 되는 게.’
원래 소독차 뒤꽁무니 보고 따라가는 게 아주 즐거운 일이잖아? 나도 어렸을 때 자주 했었지.
어쩌면 그 덕에 약 연기를 많이 먹어서 지금 튼튼한 걸지도 모르고.
“아웃!”
다행히 이번 소독차(?) 역시 쫓아가는 맛이 있었다. 매정하게 액셀을 밟고 있었으니까.
6회가 끝났고.
나란히 이어졌던 퍼펙트는 이제 하나만 남았지만, 결과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결국 끝까지 달려야 한다는 것도 변하지 않았고. 다만···
“스트라이크 아웃!”
전보다 조금 더 악을 쓰고 던진다는 게 좀 달라지긴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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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경기에서 레드삭스와 애슬레틱스, 양팀의 열여덟 명의 타자는 모두 죄인이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죄인이지. 최소한 크리스 데이비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투수전이라는 단어 자체가, 결국은 타자들이 제 몫을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자신도 마찬가지고.
7회는 지금까지처럼 끝났다.
양쪽 다 삼자범퇴로 막았지.
Suck은 삼진 두 개 잡았고. 크리스 세일도 마찬가지로 두 개를 잡았다.
‘죄질로 따진다면, 지금은 둘 중에서 우리가 더 나쁘겠지.’
그러니 죄인들 중에서도 애슬레틱스가 가장 나쁜놈들이다. 우린 퍼펙트가 깨졌는데, 저쪽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으니까. 모두 다 타자의 죄지.
우리가 먼저 상대를 제압하지 못하여, 에이스가 그런 꼴을 당하게 한 것이니까.
안타를 맞은 건 투수이니,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그와 동료들 중에서 그런 사람은 없었다.
어쨌든 퍼펙트를 당하고 있는 건 타자들이니까.
“안타 좀 쳐라 X발놈들아!”
“야이 쓰레기들아! 공이라도 잘 잡아! 알았어?”
그렇기에 타자가 아닌 야수로서하는 수비에서도 모두 다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특히 6회 이후로, 채드 핀더는 무엇이든 잡을 기세로 눈을 이글거렸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애초에 크리스 데이비스 자신에겐 그런 기회조차 없었다. 지명타자이기에, 그의 방법은 오직 타격뿐이니까.
“아웃!”
“지치지도 않나?”
“나였으면 솔직히 힘이 쭉 빠졌을 거야.”
“X나게 잘하고 있는데, 타자들이 이러면, 투수 입장에서 진짜 X같기는 하지.”
그나마 다행인 건, Suck이 그들에게 끝까지 기회를 주고 있다는 것이겠지.
8회 초에도 다시 마운드에 올라, 꿋꿋하게 레드삭스를 잡고 있었으니까.
크리스 데이비스 그와 마찬가지로 덕아웃에 남은 다른 투수들이 혀를 내두를 만큼, 여전히 강력한 공을 뽐내면서.
타순이 다시금 한 바퀴가 돌았고, 이전 이닝에선 안타도 하나 얻어맞았지만.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지치지도 않았고.
이제 경기의 막바지에 접어들었는데도, 오히려 더욱더 거세게 타오르기만 했다. 지치지 않는 철인처럼.
5번타자 에두아르도 누네즈는 오늘 내내 보았던 삼진으로 물러났고, 6번타자 라파엘 데버스는 무너진 자세로 땅몰만 기록했다.
‘점점 더 힘이 실리네.’
덕아웃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큼, Suck은 경기가 끝으로 갈수록 강력하게 공을 뿌렸다.
한 구, 한 구를 마치 대포알처럼, 사정없이 뚫어버렸으니까. 그것이 묘한 압박감을 주기도 했고.
“쪽팔린다, 쪽팔려. 팀 에이스가 저러고 있는데, 난 지금 뭐하는 거야.”
다음 타자이자, 오늘 경기 유일한 안타의 주인공, 샌디 레온을 맞아, 조금 수비시프트가 펼쳐지며, 그라운드가 진형을 갖췄을 때, 크리스 데이비스는 문득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익숙한 목소리였기에 아마도 그라운드에 나가 있는 동료일 텐데, 너무나도 공감되는 말이기에, 자그마한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그도 같은 생각이었으니까.
‘쪽팔리지, 쪽팔리고 말고.’
정말이지, 더럽게 쪽팔리는 일이지. 투수 한 명에게 꽁꽁 묶여서, 에이스의 역투를 빛내주지 못하고 있다니···
‘반성 정도론 모자라지. 이젠 정말로 결과를 내야 한다.’
물론 말로만, 생각으로만, 마음으로만 해선 아무런 소용이 없다. 반성은 오직 타석에서 해야겠지.
“마이!”
샌디 레온이 이번에도 앞선 타석과 비슷한 방향으로 타구를 보냈지만, 둥실 뜬 공을 좌익수 채드 핀더가 손쉽게 따라가 이번에는 쉽게 잡아냈다.
“진작 그렇게 잡지···”
“솔직히 아까 전 타구는 잡는 게 이상하긴 했잖아?”
“그냥 아쉬워서 그러지, 아쉬워서.”
몇몇 관중은 그것을 보며 투덜거리기도 했다. 아까 전, 안타를 맞았을 때도 저랬으면 오죽 좋았을까.
사실 워낙 좋은 코스였기에, 좌익수의 잘못은 아니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쓰리아웃. 다시 공수교대. 채드 핀더를 의식한 듯, 고맙다는 듯 슬쩍 엄지를 날리는 Suck을 보며, 크리스 데이비스는 배트를 매만졌다.
‘···이제 내 차례네.’
타순은 4번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크리스 데이비스 자신은 4번타자지.
‘다음 기회는 없다.’
이번이 마지막 타석이다.
설사 연장까지 경기가 이어져, 그의 타석이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마운드의 투수는 크리스 세일이 아닐 테니까.
그렇기에 크리스 데이비스는 스스로 벼랑 끝으로 들어갔다. 사자를 잡으려면, 응당 그래야 할 테니까.
‘힘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았겠지. 아니, 않았어.’
반대쪽 덕아웃에서 점퍼를 입고서, 그와 마찬가지로 Suck의 피칭을 지켜보던 투수는 다시 그라운드로 걸아나왔다.
그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Suck이 그렇듯, 저쪽 역시 절대로 힘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걸. 오히려 더욱더 강해졌겠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렇지 않는다면, 에이스에게 압도된 레드삭스처럼, 자신도 같은 꼴이 될 것 같았으니까.
살짝 비릿한 맛이 새어나올 때까지 꾹 씹으니, 그제야 정신이 또렷하게 들었다.
“크리스, 한방 날려줘요. 원조 크리스의 힘을 보여주자고요. 오늘 작은 크리스는 영~ 아닌 것 같으니까.”
그가 과하게 긴장했다는 걸 느낀 건지, 덕아웃으로 돌아온 Suck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입으로는 한방 날리라고 하지만, 실제 뜻은 너무 부담가지지 말라는 뜻이지. 아마도.
“9회에도 오를 거지?”
“점퍼 입는 거 보면 모르세요? 뭐, 허락만 된다면, 그 이상도 거뜬해요.”
너스레를 떠는 모습에 피식 웃은 크리스 데이비스는 그에게 부탁했다.
“9회까지만 나와. 그 이상은 진짜로 쪽팔릴 것 같거든. 그러니까, Suck 너도 딱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있어.”
마음이 잡혔고, 10이닝을 이야기하는 장난스러운 말에서 느껴진 진심에 확신도 들었다.
‘콜리시엄의 주인공은, 한 명이면 충분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
“아···”
타구가 날아간다. 멀리, 높이.
어쩌면, 아까 전 내가 직접 맞았던 안타보다, 지금의 것이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
내 것이 아닌데도, 내가 맞은 것이 아닌데도, 자연스럽게 탄성이 나올 정도로.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비상하던 공이기에, 그 궤적도, 위치도, 목적지도 정확하게 보였다.
본인도 나랑 같은 마음인지, 잠깐 동안 타구를 눈에 담던 크리스 데이비스는 이내 크리스 세일에게 고개 숙여 사과한 뒤, 살포시 배트를 내려놓고 베이스를 돌았다.
“갔네.”
갔다, 저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지.
날려 보낸 타자도. 얻어맞은 투수도. 구경하던 나까지도.
살얼음이 드디어 깨졌다. 그것도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서. 오직 투수만 가득했던 경기에서, 홈런이 나왔으니까.
조금은 우스운 일이지.
투수놀음인줄 알았는데, 결국 끝내는 건 타자였으니까. 원래 야구가 이런 거긴 해.
투수가 아무리 잘해도, 경기를 결정짓는 건 결국 타자의 몫이잖아?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Krush Damm!”
“호오오오오오오옴 러어어언!”
“크리스! 크리스 이 이쁜 새끼!”
“X발 이거지! 이래야 크리스지! 네가 진짜 크리스다! 역시 애송이는 비교가 안 돼!”
환호성은 한 박자, 아니, 세 박자는 느리게 터져 나왔다.
내가 안타를 맞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으니까.
팬들에게 내가 절대자이듯, 오늘 경기에서 크리스 세일 역시 그렇게 느껴졌을 텐데.
그가 얻어맞는 모습은, 그것도 담장을 넘어가는 모습은, 쉽게 상상하긴 힘들지.
그렇기에 조금은 느리게 기쁨이 터져 나왔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웅장했다. 경기 내내 꾹 참아왔던 한방을 터트렸으니까.
“크리스 이 미친-”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캡틴! 이게 캡틴이시다! 앞으로 대장으로 모시겠습니다!”
마찬가지로 동료들도 발광했고.
오랜 방랑 끝에 끝내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기쁨에 압도되어 괴성을 지를 정도로.
다들 마음고생이 심했구만.
모두가 일어난 와중에도 홀로 자리에 앉은 나는, 동료들에게 붙들려 들어오는 크리스와 눈을 맞췄다.
‘그래, 9회까지만 하자.’
10회 초에 오르려면, 스콧 에머슨을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혼자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겠어.
잔뜩 호통칠 대니얼을 달래줄 방법도 생각할 필요가 없고. 9회까지일 테니까.
이 정도면 충분하지.
9회에 오르지 못할 사람이 있는 걸 감안하면 말이야.
‘···대단하네.’
슬쩍 고개 돌려 마운드를 봤을 때,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뛰쳐나가려던 투수코치를 막은 크리스 세일은 여전히 꼿꼿하게 마운드를 지키고 있었으니까. 모두가 어수선한 와중에도 말이다.
오늘 경기를 함께 이끌어갔던 피칭 또한···
“스트라이크 아웃!”
여전히 강력했고.
퍼펙트가 깨졌고, 무실점도 깨졌으며, 홈런을 맞았는데도, 그는 여전히 기세를 유지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애초부터 그런 건 관심도 없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런 투수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우는 나도 똑같이 하는 것뿐이지.
“아웃!”
8회 말은 종료됐다.
8이닝 15탈삼진 1실점 1자책점 1피안타 1피홈런. 현재까지 크리스 세일의 성적이고.
내가 할 일은 이번 경기와 더불어, 거기에 마침표를 찍는 거였다.
####
9회는 고요하다.
곧 경기가 끝날 것이고, 그때가 되면 충분히 소리칠 수 있기에 관중들도 굳이 소리를 높이지 않고.
경기의 마지막인 만큼, 최대한 집중력이 올라왔을 시기라서, 선수들도 한없이 조용하지.
그중에서도 가장 조용한 건 당연히 마운드고.
“후우···”
심장박동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을 감지한 듯, 세차게 두근거렸지.
어쩌면 한계까지 치달은 끝에, 지쳐서 비명을 지르는 걸 수도 있고.
심장만 그런 건 아니다.
온몸이 다 그러고 있으니까.
오늘 하루도 열심히 싸워준 내 몸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지만···
‘조금만 더 달려보자.’
미안하게도 아직 끝이 아니다. 끝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지.
만약 이번에 실점해서 다시 동점이 된다면, 레이스도 끝나지 않을 거다.
흘끔 상대팀 덕아웃을 훑으니, 크리스 세일이 여전히 자리에 남아, 점퍼를 입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그대로 쭉 이어진다면, 나는 10회에도 마운드에 오를 거야. 그러니까···
“스트라이크!”
더 혹사당하기 싫으면, 마지막까지 확실하게 쥐어짜라.
내 몸에게 그런 되지도 않는 협박을 날리며, 차근차근 공을 던졌다. 8번타자 재키 브래들리 주니어.
오늘 별로 좋지 못했던 주니어는 무너저버린 에이스에 어쩌면 우리 팀 친구들과 비슷한 눈을 했다.
굉장한 죄책감을 느끼며, 어떻게든 날 쓰러뜨리려고 악다구니를 쓰고 있지.
“스트라이크!”
그러면서도, 여전히 날아오는 공에 겁에 질리기도 했고. 헛스윙, 급하게 배트가 나왔다.
‘침착함을 잃은 건가? 이상하게 배트가 쉽게 나오네.’
어떻게든 삼진만 면하려는 것처럼 말이야. 아마 압박감에 중심을 잃은 거겠지.
누누이 말하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배트가 헤픈 타자들을 잡는 건 굉장히 쉬운 일이다.
다시 삼진아웃. 오늘 몇 개더라? 체력이 슬슬 꺾이기 시작하면서, 오직 피칭에만 집중하고 있었기에, 그 외의 것들은 좀 가물가물하네.
모르긴 몰라도 X나게 많이 잡았겠지. 오늘 들은 스트라이크 아웃 소리가 노이로제처럼 귓가에 울리는 걸 보면 말이야. 대충 그렇게 생각하자.
“대타!”
곧이어 다음, 9번타자.
레드삭스에서 대타가 나왔다.
원래는 린즈웨이, 대만 선수였는데, 새로운 녀석이 나왔네.
블레이크 스와이트하트.
이름 참 독특한데···
“볼!”
“파울!”
“스트라이크!”
“파울!”
“볼!”
그는 꽤나 집념을 가지고 타석에 임했다. 나한테 적응하지도 못했을 텐데, 인내심을 가지고 진득하게 타격해서 그런지, 조금 귀찮네.
‘어떻게든 출루만 하겠다는 건가?’
어쩌면 레드삭스는 한방을 노리는 걸지도 모르겠다. 타순이 1번타자까지 이어지는데. 무키 베츠잖아?
정상급 컨택에 파워도 대단한 타자니, 일발역전 투런을 노릴 수도 있겠지. 나도 좀 지치긴 했으니까.
‘그건 안 되지. 1점 내줘서 10회에 등판하는 건 괜찮아도. 9회 말에 지는 건 못 참아.’
어림도 없지!
1점, 그 이상은 레드삭스에게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
1실점까지는 그다음(?)을 기약할 수 있지만, 2점은 아니니까.
“스트라이크 아웃!”
그렇기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와중에도 전력투구를 던져내며, 쓰리핑거 체인지업으로 삼진을 잡아냈다.
이제 마지막 타자. 아니, 마지막이길 바라는 타자.
‘제발 좀 끝내자. 너도 솔직히 힘들잖아?’
무키 베츠.
그에게 간절히 부탁해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오늘 나한테 내내 털렸으니···
그래도 괜찮아.
나도 비밀병기 하나쯤은 있거든. 아주 죽여주는 놈이지.
어차피 기대도 안 했어.
‘먼저 몸쪽으로 하나.’
“파울!”
몸쪽 깊은 패스트볼.
곧바로 배트가 나왔다.
끝없이 날아가는 타구.
큼직한 코스에 심장이 철렁인 건지, 몇몇 관중들이 비명을 지르다, 이내 다시 입을 닫았다.
커터 던지기 잘했네.
포심이었으면 정타 맞고 진짜로 10회에 올랐어야 하겠어.
다행히 파울이구만.
“파울!”
“파울!”
“파울!”
그 뒤로도 파울은 이어졌다.
릴리스 포인트를 바꿔대고, 죽을 것 같아도 속도를 유지하며 계속 던졌는데.
무키 베츠는 끈질기게 커트하고, 지켜보며 승부를 끌었다.
‘타이밍이 점점 맞아간다.’
느껴졌다. 더욱더 정확해지는 것이. 당장 파울 타구들만 보더라도, 선 안쪽으로 슬금슬금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이번이 네 번째 타석인 만큼, 적응할 수밖에 없긴 하지. 새로운 릴리스 포인트가 만능은 아니니까.
“파울!”
“볼!”
“볼!”
어차피 그가 마지막일 테니, 나도 조급하게 마음먹지는 않았다. 7구까지 이어진 승부.
“파울!”
8구, 회심의 너클 커브까지 파울. 하지만 운이 좋았다.
이건 페어에 가까웠으니까. 이젠 확실하게 타이밍을 잡았네. 나도 마찬가지고.
‘이제 끝내자.’
가볍게 숨을 가다듬는다.
빠른 인터벌을 유지할 여력은 이미 한참 전에 사라졌지만, 억지로 유지했다. 그게 중요하니까.
타자 역시 마지막을 느낀 듯 자세를 가다듬으며 공을 기다렸고, 내 왼팔이 휘둘러진 순간, 그의 눈이 반짝였다.
‘몰렸다.’
지친 걸까? 살짝 손에서 빠진 공이 한가운데로 몰렸고, 순간 가슴이 철렁였지만-
‘뭐, 어차피 코스는 상관없지.’
사실 코스가 그렇게 중요한 구종은 아니기에, 딱히 별다른 충격은 없었다.
상하좌우, 중앙과 상관없이, 오직 타자에게 먹음직스럽게 보이기만 되지. 그래서 배트가 나오면···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헛스윙이 될 테니까.
커브, 얘도 더 강력해졌지.
인터벌이 빠른 상황에서, 새로운 릴리스 포인트로 던지면, 뭔가, 타이밍이 요상하게 꼬이더라고.
다만 다른 구종들에 비해, 타점이 너무 차이가 나기에, 자주 쓰지는 못하겠지만.
‘네 타석이나 상대한 타자한테 마지막 위닝샷으로 던지기는 딱 좋지.’
배트는 헛돌았고, 무키 베츠는 후회했지만, 끝난 경기는 돌아오지 않는다.
숨이 벅차서, 이대로 그냥 주저앉을까 싶기도 했지만, 그러면 별말이 다 나오겠지.
부상이라느니 그런 거.
괜히 귀찮아지기는 싫기에, 꿋꿋하게 서 있었지만, 달려드는 동료들에 어차피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You Suuuuuuuck!”
“Suck 이 미친 놈- 진짜로 해버려?”
“이 개또라이 새끼! 막판에 KKK를-”
다들 달려와서 경악하는데. 내가 하긴 뭘해. 뭐, ‘매덕스’라도 했나? 삼진을 많이 잡은 덕분에 투구수를 아끼기는 했는데···
뜻 모를 동료들의 말과, 왠지 무언가가 이뤄진 듯한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전광판에 시선이 향한 순간 깨달았다.
[Go You-Suck 20K!]
‘스무 개나 잡았어?’
오늘 느꼈던 기운의 정체를.
뭔가 기록이 나올 것 같기는 했는데, 난 그게 퍼펙트인 줄 알았더니, 다른 거였네.
미친놈처럼 잡느라고 신경 못 쓰고 있었는데, 저렇게 많이 잡았었어.
‘어쩐지, 막판에 기를 쓰고 삼진을 피하려고 하더니.’
레드삭스의 반응도 이제야 이해가 됐다. 기록이 걸려 있었구만. 왠지 좀 이상하더라.
“던지지-”
“들어! 들어!”
“다칠 수 있으니까, 그냥 들기만 해!”
몽롱하게 있다가, 붙들려서 하늘 높이 떠올랐다. 헹가래는 아니고, 그냥 들어 올렸지. 우뚝 선 트로피처럼. 오스카상 같네.
그렇게 높이 떠올랐을 때, 문득 침울한 레드삭스의 덕아웃이 보였다.
조금이라도 빨리 콜리시엄을 벗어나려는 듯, 바쁘게 짐을 챙기고 있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크리스 세일과 눈이 마주쳤다. 지켜보긴 했어도, 눈을 맞추진 못했지. 둘 다 경기에 집중했으니까.
‘후련해 보이네.’
잠깐동안 서로를 마주보다, 크리스 세일이 먼저 시원스럽게 웃으며 박수를 쳤고. 나도 말없이 따봉을 날렸다. 후련했던 경기를 함께한 동지를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