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1차전은 패배했다.
중후반까지는 팽팽한 경기가 이어졌지만, 6회에 레드삭스가 몰아치면서 리드를 잡더니, 그대로 승기를 굳혔지.
잘 이어가던 경기가 뒷심에 밀린 것이니, 조금은 아쉬울 수도 있겠지만, 의외로 우리 팬들은 패배를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애초에 우리 팬들이 좀 쿨해서 지는 건 뭐라고 안 하거든. 다만 못하는 것 같으면 바로 욕 박지만. 거기다가···
‘나도 나오니까.’
바로 다음 경기에 내가 등판해서, 마음이 더 너그러운 것도 있지.
정오쯤 됐을 무렵.
부슬부슬 잠에서 깨어난 뒤, 곧바로 컨디션을 체크했다.
화장실 거울 앞에서 투구폼도 체크해보고, 몇 차례 어깨도 돌려보고, 뭐 그런 거지.
자다가 일어나서 갑자기 뭔 뻘짓이냐 싶겠지만, 의외로 이게 정확도가 굉장히 높은 방법이다.
아직 잠기운이 남아 정신이 몽롱해서, 모든 행동을 의식하지 않고, 본능적으로 취하기에, 더 발가벗고 확인할 수가 있거든.
‘투구폼은 문제없네. 가동 범위도 잘 나오고. 머리도··· 맑아.’
일단은 오케이다.
수면도 정자세로 잘 취한 건지, 어딘가 뻐근한 곳도 없고, 투구폼도 자연스럽게 잘 나오고, 어깨의 가동 범위도 잘 나오고.
더 정확한 건, 대니얼과 함께 스트레칭과 워밍업을 하면서 알아봐야 하겠지만. 일단 기본 상태 자체는 좋았다. 그것도 상당히.
‘당연히 좋아야지, 오늘 같은 날은 특히나 더 좋아야 하고.’
사실, 이번 레드삭스전은 딱히 별생각 없었는데, 어제 크리스 세일이랑 눈이 마주친 뒤부터 이상하게 불이 붙더라고.
나도 투수이고, 에이스라는 자리가 익숙해져서 그런지, 내 스스로에 대한 프라이드도 좀 있는 편인데.
누군가 내 집 안방에서 내 목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 내 안의 자그마한 스위치를 딸깍하고 올려버린 거겠지.
‘그냥 넘길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안 되지.’
감정에 휘둘리는 것이니, 별로 좋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참거나, 무시하는 것이 답은 아니다.
투수는 예민한 동물이라서, 그렇게 감정이 올라왔을 때, 그걸 억지로 눌러버리면, 결국 다른 쪽으로 탈이 나기 마련이거든.
‘지금 이어지고 있는 좋은 흐름이 그대로 곤두박질칠 지도 모르지.’
특히나 흐름, 리듬, 감각처럼 추상적이고 세심한 영역들은 그대로 페이스가 망가져버릴 지도 모르고.
그러니 어쩔 수 있나.
빡세게 잘하는 수밖에.
애초에 잘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말이야.
“Go, 일어나셨습니까?”
“네, 내려갈까요?”
“예, 바로 내려오십시오.”
잠시 거울 속 내 얼굴을 살핀 뒤, 대니얼이 부르는 목소리에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고놈 참 잘생겼단 말이야.
떡대도 딱 좋은 게, 야구 참 잘하게 생겼어.
‘그림은 죽여주겠네.’
나도 등빨이 좋은 편이고, 크리스 세일도 약간 얇긴 해도 일단 키는 엄청나게 크니.
한 마운드를 공유하면, 꽤나 그럴듯한 장면이 그려지겠지. 은근히 우릴 부추기고 있는 미디어에서 바라는 모습 말이야.
물론 얼굴은 내가 더 잘생겼고, 실력도 내가 더 좋다. 구속은··· 말하기 싫고.
야구는 구속으로 하는 게 아니야. 슬로우볼이든 파이어볼이든 타자만 잘 잡으면 되는 거지.
‘암, 아암! 그렇고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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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는 평소보다 두둑하게 했다. 전날부터 대니얼에게 긴 이닝을 던질 것이라고 통보했기에, 체력 소모를 감안해서 그가 식단을 짜줬지.
이거야 첫 끼에 불과하고, 본격적으로 경기가 시작되면, 아마도 주전부리도 계속 먹을 거다.
‘이렇게 열심히 먹어대도, 완봉 한번 하고 나면, 살이 쭉쭉 빠진단 말이야.’
보통 완봉 한 번 한 뒤에 몸무게를 재보면, 한 2~3파운드쯤 빠지고는 한다.
내가 이번 오프시즌에서 5파운드 정도를 벌크업했는데, 완봉 두 번하면 그런 노력이 사라져버리는 셈이지.
물론 이마저도 다른 투수들보다는 나은 수준이라고 하더라. 심하면 한 경기 만에 5파운드 이상이 빠지는 선수도 있다고 하니까.
“다르게 말하면, Go가 신체에 큰 무리를 주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죠.”
“그런가요?”
“예, 소모하는 용량이 적기에, 남들보다 덜 빠지는 건데, 그만큼 안전하다는 뜻이니까요. 물론 타고난 신체적 능력도 있겠지만.”
“그 타고난 신체능력이 오늘도 제대로 발휘가 됐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콜리시엄으로 향했고, 운전대는 내가 잡았다.
브라이언이 돌아갔거든.
나도 어느 정도 새로운 집에 익숙해졌고, 주변 지리에도 적응했기에, 더는 그가 픽업해줄 필요가 없었으니까.
‘거기다 할 일이 많기도 하고.’
이제 갓 2년차라서, 구단과는 딱히 비즈니스가 없지만, 다른 비즈니스가 넘쳐나니 말이야.
내가 스폰서 계약을 죄다 단기 계약으로 했었잖아? 이번 시즌도 내가 시작부터 빡세게 달리고 있으니, 다들 몸이 닳았다고 하더라고.
“작년보다 더하겠죠?”
“그렇겠죠, 위험부담이 사라졌으니까요. 또 작년처럼 제안을 다 받으시면, 돈으로 수영할 수도 있을 겁니다.”
“어우, 작년처럼 할 생각은 없어요. 오프시즌 동안 바빠서 죽는 줄 알았는데. 그 고생을 또 할 수야 없죠.”
“배움이 빠르시니, 다행이네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작년처럼 눈이 뒤집혀서 죄다 사인해버릴 생각은 없다.
오프시즌에 고생 좀 했었잖아? 이번엔 계약금의 단위도 다를 테니, 적당히 보고 골라서 잡아야지.
그렇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도착한 콜리시엄. 우범지대의 한 가운데에 있는 만큼, 주변 풍경이 참 삭막한 곳인데. 오늘은 다르다.
아니, 내 등판일은 늘 다르지.
항상 사람의 파도가 몰아치거든.
“오늘도 엄청나군요.”
“제 인기가 이 정도죠.”
말했잖아, 디폴트가 3만이라고. 그게 최소지. 오늘 주변 풍경을 봐선, 3만 5천으로 높여도 되겠어.
“You Suck!”
“Suck이 레드삭스를 난도질해서 RedSucks로 만들 것이라는 걸 믿습니까?”
“믿습니다!”
“Suck이 오늘 삼진을 15개 이상 기록하리라는 것도 믿습니까?”
“믿습니다!”
“Hell Yeah! 믿고말고! 그래야 Suck이지! 탈삼진 15개도 못하는 놈은 Suck이 아니야!”
“그게 맞지, 너 천재네! 그런 건 Suck이 아니야!”
그래, 이것도 보통이지.
레이더스는 오늘도 전투력이 상당해 보였다. 레드썩스라니. 내 이름을 막 그런 식으로 사용하지 말아 줄래요? 기분이 좀 나쁘거든요?
그리고 누구 마음대로 탈삼진 15개야. 물론 그 정도 마음가짐이긴 한데, 자기들끼리 못 박고 있네. 저러다가 내가 못하면 실망할 거 아니야?
늘어난 관중처럼, 레이더스도 작년보다 규모가 더 커졌다.
아마도 오클랜드 레이더스, 그러니까 NFL쪽 팬들이 조금 더 넘어온 거겠지.
“Go, 저는 조금 더 차에서 머물다가, 뒤따라서 갈게요. 같이 가다간 저도 휘말릴 것 같아서···”
“충분히 이해합니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아니지, 내가 더 늦을 수도 있겠네.”
대니얼은 늘 현명하단 말이야. 상황파악이 빠르군.
문단속 잘하라는 의미에서 그에게 차 키를 넘겨준 뒤, 차에서 내리자, 자기들끼리 부흥회 같은 걸 하고 있던 레이더스의 모가지가 내 쪽으로 확 꺾였다.
와, 무슨 공포영화냐?
바지에 지릴 뻔했네.
“오오! Suck이다!”
“Suck이 부름에 응답했다!”
“Suck! 오늘도 잘할 거지? 그치? 그게 당연한 거지?”
“저번 경기는 좀 아쉬웠어. 콜리시엄인데 삼진이 고작 열 개가 뭐야? 한 스무 개는 잡아야지!”
“저 삼진 스무 개 잡아 본 적 한 번도 없는데요.”
“그러니까, 오늘 하라고.”
“예예, 암요, 그렇겠죠. 사인은··· 예, 말 안 해도 압니다. 다들 있으셔서 필요가 없으시겠죠. 그럼 오늘도 수고들 하십쇼.”
“Suck 너도 수고해라.”
“레드삭스 죽여버려!”
“크리스 세일인지 뭔지, 걔 어제 보니까, 눈빛이 발칙하던데. 제대로 눌러버려.”
저 사람들은 대체 왜 내 사인도 안 받을 거면서 통로에 있는 걸까. 얼굴이나 보려고?
항상 궁금했었는데, 이번에도 겉모습에 질려서 감히 물어보지 못했다.
내가 쫄보인 게 아니야. 얼굴 한번 봐봐. 저게 어떻게 야구팬이고, 관중이야. 콜리시엄에 공연하러 온 데스메탈 밴드지.
홈에서는 특히나 빡세게 풀세팅하는 편인데, 그래서 그런가,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되네.
“Suck이 20삼진 잡겠대!”
“크하핳핳, 그 정도는 당연하지!”
“레드삭스 새끼들, 어제는 이십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였다 이거야!”
지들 마음대로 확정 짓고 못까지 땅땅 박아대는데. 난··· 모르겠다. 그냥 공이나 던지자.
아무튼 오늘도 험악한 콜리시엄이었지만, 관중수나, 레이더스의 전투력과는 별개로. 점점 콜리시엄 주변도 바뀌고 있었다.
듣기로 치안도 좋아진다고 하던가? 사람이 많이 몰리는 만큼, 경찰도 더 많아져서.
‘그래서 그런가, 어린애들도 은근 많아졌단 말이야.’
자식이랑 같이 오기엔 좀 뭐한 곳이라서 그런지, 종종 보이기는 해도, 그리 많지는 않았는데.
이번 시즌은 홈경기에서 제법 자주 꼬마들을 볼 수 있었다. 가족 단위의 관중도 많았고.
“Suck! 캐치볼 해주세요, 캐치볼!”
“해줄게, 그런데 혹시 사인은 필요 없니?”
“그런 건 됐어요.”
물론 얘들도 내 사인은 됐다더라. 물어보니까, 아빠가 이미 자기 것까지 사인볼, 사인 유니폼을 죄다 받아왔었대.
내가 사인을 너무 남발하기는 했어. 오클랜드 전역에 내 사인이 넘쳐나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인터넷 기사로 봤었는데, 인터넷 경매 사이트나 쇼핑 사이트에서 내 사인볼이 제일 싸다고 하더라. 희소성이 없는 거지.
‘노아야 미안하다. 등록금은 힘들겠구나.’
내가 그때 준 사인볼, 아무래도 대학 등록금까지는 힘들 것 같아. 내가 사인을 너무 많이 해버렸거든.
이번 꼬맹이 또한 그 희소성 없는 사인을 가지고 있는 건지, 아주 정색하고 사인을 거절했다.
그래서 어깨도 풀 겸, 바라는 대로 캐치볼을 해줬는데, 제법이군.
“나이스볼, 너 나중에 투수해라. 제구가 죽여주네. 제구가 나보다 낫다야.”
“그쵸? 제가 나중에 메이저리그 데뷔하면 Suck보다 더 잘할 거예요!”
이 발칙한 꼬맹이 같으니. 야망 한번 크네. 오늘 콜리시엄에서 내 목을 노리는 게, 크리스 세일만이 아니었어.
‘나보다 더 잘할 거라니, 글쎄, 쉽지 않을 텐데.’
나중에 피눈물을 흘리게 될 거야. 내가 생각해도 내가 좀 미친놈처럼 잘하고 있거든.
“죄송합니다, 오늘 등판하시는데 괜히 귀찮게···”
“괜찮아요, 제가 그리 예민한 성격은 아니라서. 아드님이 저보다 더 잘할 거라는데, 열심히 키우시고, 인생의 쓴맛을 보여주십시오. 야구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도록.”
“···예.”
안절부절 못하는 아이의 부모님을 진정시킨 뒤, 이내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캐치볼 했던 공에 사인을 휘갈겼다.
“필요 없다니까요. 왜 마음대로 제 공에 사인을 하고 그래요.”
“그래도 받아. 오늘은 좀 특별한 날이거든.”
어딜 책임 없이 쾌락만 즐기려고. 나랑 캐치볼을 했으면 응당 사인볼도 받아가야지.
요즘 들어 나한테 사인받으려는 사람이 없어서 한동안 못했는데, 간만에 펜을 놀리니 기분이 몹시 좋군.
제 공에 마음대로 이름을 적으니, 아이는 입을 쭉 내밀었지만, 안절부절 못했던 부모는 내 말의 뜻을 깨달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치, 특별한 날이지.
저~기서 여전히 20삼진이니, Kill이니, RedSucks니 뭐니 소리치고 있는 레이더스가 바라는 대로, 칼춤을 좀 출 생각이니까.
캐치볼 하면서 느꼈거든. 오늘 내 컨디션이 확실하게 좋다는 걸.
진짜 최대한 노력했지.
자연스럽게 공에 실리는 힘을 어떻게든 덜어내려고. 애가 받기엔 너무 무거울 테니까.
내 목을 따려면, 최소한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걸 단단히 보여줘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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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JD 마르티네즈가 나오네요. 어제처럼 안 나왔으면 최고였을 텐데.”
오늘 경기에선 전날 출장하지 않았던 J.D. 마르티네즈가 출장할 거라고 한다.
이쪽도 진짜 빡센 타자인데, 아쉽게 됐어. 그냥 이번 시리즈 내내 나오지 말 것이지.
‘하루 쉬었으니, 체력은 만땅이겠고, 타격감이야, 말할 것도 없겠네.’
17경기 출장해서 타율 .338에 출루율 .365 장타율이 .618이네. OPS 10할은 아쉽게 못했군, 십할.
저번 시즌에 45홈런을 깠던가? 작년 다저스에게 4연타석 홈런도 날렸던 것도 기억난다. 하이라이트 영상으로 봤었지.
파워도 강력하고, 타율도 3할대인 만큼, 컨택도 준수하기에, 올해 초반부터 기세가 상당한 무키 베츠와 더불어, 가장 요주의 인물이지.
“저쪽도 같은 생각일 거야. Go 네가 안 나오면 최고일 거라고.”
“하긴, 그건 그렇겠네요.”
“오늘 폼이 좋은데? 느낌이 나쁘지 않아.”
“코치가 봐도 그래요?”
“어, 난 누구처럼 거짓말 하는 사람이 아니야. 항상 정확하게 바라보지.”
“그 누구가 저는 아니겠죠?”
“글쎄, 보통 찔리는 사람이 범인이지.”
거 약속 한번 깬 것 가지고 너무 그러시네. 사람이 어떻게 매번 척척 다 지키고 살아? 가끔은 어쩔 수 없는 사정도 있는 법이지.
어쨌든 강력한 타자가 제법 많은 레드삭스이지만, 우습게도, 화이트삭스 때보다 오히려 마음은 더 편안했다. 여유로웠지.
대니얼의 옆에서 지켜보던 스콧 에머슨도 알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으니까.
서서히 워밍업을 하니, 제대로 올라오는 게 느껴졌지.
“오늘은 길게 갑니다?”
“그래야지. 나도 이런 날에 빡빡하게 굴 만큼 깐깐한 사람은 아니야. 네 마음껏 던져.”
그 덕분에 허락도 받았구만.
평소에도 이렇게 시원하면 얼마나 좋아? 맨날 깐깐한 아줌마처럼 사사건건 내 앞을-
“무슨 생각하는지 표정에서 다 드러나니까, 하지마라.”
“옙. 죄송합니다.”
사람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을 보아, 그냥 본인이 현역으로 복귀하면, 역사에 길이 남을 명투수가 될 텐데. 왜 코치하나 몰라.
아무튼 그렇게 코치의 허락까지 받았으니, 남은 건 최대한 어깨를 달아 올려서, 마운드에서 퍼붓는 것뿐.
“씁-”
워밍업을 마친 뒤, 루틴에 따라, 불펜 피칭을 시작했고, 그날 불펜에서 나이스볼은 없었다.
펑-하고 가죽이 터지는 소리와, 불펜포수의 아찔한 신음이 흘렀을 뿐. 그거면 설명 끝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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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마운드에 오르자, 언제나처럼 먼저 기다리고 있던 브루스가 반겨줬다.
오늘은 얘가 파트너지.
저번에 간만에 호흡을 맞췄던 조시 페글리도 좋지만, 역시 제일 익숙한 놈이라서 그런가, 얘가 제일 낫긴 해.
“Suck 너 오늘 폼이 장난이 아니라면서? 불펜포수 때려잡는 소리가 바깥까지 들리던데.”
브루스는 은근한 표정으로, 나직하게 물었는데, 이거이거 아주 욕심이 가득하네.
“니가 무슨 소머즈냐? 관중 꽉 차서 소란스러운데, 그걸 듣게.”
“에이, 비유지, 비유. 그래서, 나 이번에 롤렉스 하나 더 받나?”
이거 봐. 얼마나 욕심 많은 놈이야? 조시 페글리도 롤렉스에 대한 욕심을 드러내긴 했었지만.
얘는 이미 몇 개나 받은 놈이 또 욕심을 내네. 무슨 골룸도 아니고, 마이 프레셔스라고 외칠 기세야.
“롤렉스 말고 공이나 잘 받아 새꺄. 레드삭스 타선 빡센데, 경기에 집중할 생각을 해야지.”
“알았어, 알았어. 공이나 열심히 받을게.”
포수라는 놈이 말이야.
어디서 잿밥부터 관심을 가져?
가볍게 쏘아보니, 알아서 고개를 숙였다. 그렇지, 그래야지. 아주 교육이 잘 됐어. 마음에 들어.
그대로 브루스가 내려간 뒤, 홀로 마운드에 남았지만, 정말로 혼자는 아니었다.
“Suck!”
“휘이이이이이익!”
“Kill Redsox!”
“It’s Suck Time!”
이게 어떻게 혼자야.
더럽게 시끄러운데. 어우 듣기 좋아. 이게 야구장이지.
안 그러냐?
‘눈깔에 힘이 상당한데? 크리스 세일이 시키든? 나 X나게 두들겨 패달라고?’
평소처럼 시끄러운 콜리시엄에 만족스럽게 웃으며, 마찬가지로 준비를 끝낸 레드삭스를 훑으니, 그들도 나를 보고 있었다.
크리스 세일이 오더라도 내린 건지, 두 눈에 아주 날 갈아 마시겠다는 생각이 그득그득하군.
물론 자신감도 있겠지.
미친 성적을 찍고 있잖아. 위닝 멘털리티가 단단하게 잡혔겠지. 이기는 게 습관이 됐을 거고.
그러니 리그 최고의 투수든, 역대 최고의 임팩트든, 그 누구도 법접할 수 없는 야구의 신··· 이건 솔직히 너무 갔네. 아무튼 그런 거든지 간에.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어?
그냥 두들겨 패고 이기겠다는 생각뿐이겠지.
‘특히나 너는 더 그럴 거고.’
타자가 올라왔다.
오늘의 선두타자지.
무키 베츠. 모든 게 완벽하다는 평가를 듣고 있는 타자지.
현재까지 나만큼이나 미친 성적을 찍고 있기도 하고. 이쪽이랑 비교하면, J.D. 마르티네즈의 현재까지 성적은 아주 귀여운 수준이지.
17경기 나와서.
77타석 64타수 25안타 6홈런 10볼넷 1고의사구 그리고 2힛바이피치로.
타율 .391에 출루율이 .481 장타율이 무려 .797이다. OPS는 1.277이나 되고 말이야.
‘이야~ 개또라인데?’
진지하게 지금까지 성적만 놓고 보면, 작년의 내 퍼포먼스랑 비슷한 수준이다.
그만큼 더 말할 것도 없이 타격감이 올라온 상황이라는 건데. 저런 타자 입장에서 투수가 뭔 상관이겠어?
그냥 자기 스탯 올려주는 한 마리의 먹잇감으로만 보이는 거지. 상대가 누구든 간에.
‘적어도 지금은, 트라웃을 상대하는 것처럼 여겨야겠지.’
나한테 최악의 상대는 트라웃이다. 언제나 그렇지.
그러니 그처럼 생각하겠다는 건 무키 베츠를 무시하는 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을 가정하겠다는 뜻이니까.
“플레이볼!”
‘근데 말이야 그런 트라웃도···’
그렇기에 최선을 다해서 던진다. 온 힘을 다해. 너만큼은 내가 무조건 전력투구로만 조질 거라는 의지를 담아서.
몸의 모든 힘을 왼팔로 당겨왔고, 그걸 다시 어깨를 통해 재조립 과정을 거쳐, 팔꿈치로, 팔꿈치에서 손목으로. 손목에서 손가락으로 쏘아 보냈다.
손톱이 빠질 것처럼 아려온다. 과도한 힘이 실렸다는 뜻이겠지.
미리미리 손톱강화제를 듬뿍 발라둬서 다행이네. 아니었으면 그대로 손톱이 찌그러지거나, 깨졌을 테니까.
평소에 전력투구를 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닌데. 그만큼···
‘개막전에 완봉당한 거 아냐? 그래도 안타 하나치긴 했지만.’
“스트라이크!”
오늘 나도 힘이 넘친다는 뜻이지.
대포알처럼 쏜 초구, 포심 패스트볼이 타자의 몸쪽을 파고든다. 딱 허리 높이의 공.
키가 작아서 스트라이크존이 짧을 테니, 딱 적절한 높이로 던진 공을 향해 무키 베츠가 크게 휘둘러졌지만, 닿지 않았다.
‘오늘 내가 그때보더 더 좋거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정규시즌 개막 이후, 현재까지 최고점은 오늘이다.
‘89마일, 기를 쓰고 90마일이 안 되네. 너무한 거 아니냐?’
저번 화이트삭스전에선 잘 찍히지 않아썬 최고구속도 쉽게 찍히는 구만. 여전히 89마일인 게 좀 띠껍긴 하지만.
위력이 저 정도면 괜찮지.
“예에에에에에!”
“이게 Suck이지! 시작부터 화끈하게 달리네!”
“89마일? 890마일이 아니라?”
스트라이크 하나 가지고 다들 너무 호들갑이네. 물론 무키 베츠가 느낀 충격도 그와 비슷하겠지만.
타격감이 정점에 이른 타자의 눈동자가 조금 아주 조금 흔들렸다. 그의 예상보다 배트와 공이 더 멀었겠지.
허나 그럼에도 오히려 더욱더 짓궂은 표정으로 자세를 잡았다. 역시 자신감이 대단해.
“파울!”
2구는 파울.
이번엔 바깥쪽으로 낮게 적절하게 조절해서 다시 포심을 던졌는데, 배트가 다시금 나왔다.
공만큼이나 묵직한 한방.
파울라인은 이미 넘어갔지만, 타구는 한참은 더 날아갔다.
파워가 대단하긴 하네.
‘요즘은 작고 매운 고추가 많아졌단 말이야.’
키가 되게 작은데 말이야.
요즘 들어 저런 녀석들이 많아졌어. 키가 작아서 스트라이크존은 더럽게 좁은데. 정작 컨택도 잘하고 파워도 출중한 놈들 말이야.
우리 팀도 하나 있지.
맷 채프먼, 얘도 좀 작은 편인데 파워풀하거든. 물론 무키 베츠보단 살짝 더 크다.
‘듣던 대로 반응 속도가 상당하네. 즉각적으로 배트가 나오는구만.’
컨택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코스와 구종을 확인하자마자, 잠깐의 시간소모도 없이, 곧바로 스윙이 나왔다.
‘두고두고 위험하긴 하겠어.’
아마 오늘 경기 내내 날 귀찮게 하겠지. 선구안도 좋아서, 공도 잘 골라내니까.
아니지, 반대로 눈이 좋기에, 릴리스 포인트를 바꿔대면 더 쉽게 흔들릴지도.
“스트라이크 아웃!”
일단 지금은 삼진으로 잡았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처음부터 안타는 잘 안 맞는 편이라서 말이야.
3구째, 높게 날아온 공에 무키 베츠의 배트가 나왔지만, 서클 체인지업은 유유히 배트를 피해 역회전했다.
그것으로 K.
“스트라이크 아웃!”
그다음 2번타자, 앤드류 베닌테디를 다시 3구째 너클 커브로 잡으면서, KK.
그리고 마지막 3번타자, 헨리 라미레즈 또한-
“스트라이크 아웃!”
크게 배트가 헛돌았다. KKK지. 참고로 이쪽도 삼구삼진이었으니···
‘무결점 이닝인가?’
9구3삼진이네.
순식간에 끝나버린 1회 초.
“17개 남았다!”
“이 기세면 금방 채우겠네!”
“20개까지 가즈아아아아!”
“You Suck! You Suck!”
17개 더!를 외치며, 광분해 날뛰는 분위기 속에서, 다시금 불펜의 문이 열렸다.
아마도 봤겠지.
구단이 가난해서, 콜리시엄이 낡아빠지긴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불펜에 티비 정도는 있거든.
그러니 불펜에서 내 피칭을 봤을 거다. 지금 걸어 나오는 투수도. 보통 경기 시작하면, 중계를 틀어놓으니까.
‘어떻게, 자신은 좀 있으신가?’
그에게 물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의미 없는 질문이었으니까.
크리스 세일은 그저 마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양옆의 시야를 가린 경주마처럼. 그거면 끝이지. 저쪽도 집중 제대로네.
‘타자들 죽어나겠어.’
“고생해라, 저기도 작정한 것 같은데.”
“난 어차피 포기했어. Suck 내가 생각해본 건데, 난 아무래도 타자로 출세하긴 그른 것 같아. 포수나 열심히 해야지.”
“그래, 현명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