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213화 (213/316)

213화

“스트라이크 아웃!”

2회 초 역시 첫 타자는 삼진으로 잡혔다.

맷 데이비슨, 작년 26홈런을 쳤던 우타자인데, 몸쪽으로 바짝 붙여서 서클 체인지업 V2를 보여주니까, 큼직하게 헛치더라.

곧이어 5번 니키 델모니코는 3루수 땅볼로, 그리고 6번 웰링턴 카스티요는 우익수 플라이로 물러났다. 그것으로 2회 초 역시 삼자범퇴로 종료.

“세이프!”

그나마, 3회 초, 이닝 선두타자로 나온 7번, 욜머 산체스가 좌중간에 떨어지는 안타를 치고, 1루에 안착하며 생각보다 빨리 퍼펙트를 깨트렸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그 정도로는 팀을 구원할 수가 없었다. 곧바로 8,9번 팀 앤더슨과 애덤 엥겔이 나란히 범타를 기록한 뒤. 다시 돌아온 1번타자 요안 몬카다가 또다시 삼진으로 물러났으니까.

그렇게 3회까지 종료되면서, 3이닝 1피안타 4탈삼진을 기록했는데. 이 정도면 준수하기는 한데, 나는 좀 아쉬웠다.

“맨날 3이닝 퍼펙트를 밥 먹듯이 해서 그런가, 안타 하나 끼어 있으니까, 뭔가 기분이 이상하네.”

3이닝 퍼펙트, 최소한 한 타순이 돌기 전까지는 출루를 안 내주는 게 기본값이었잖아?

그런데 안타 하나를 맞으니, 뭔가 좀 그렇네. 물론 홈런도 아니고, 고작 안타 하나 맞아놓고 이러면 다른 투수들이 X신처럼 보겠지만.

“Suck 너한테는 그렇겠지. 사실 나도 네가 안타 맞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니까? 아, 얘도 사람이긴 하구나, 싶어서.”

그래도 투수 마음은 포수가 안다고, 조시 페글리는 이해해주네.

하긴, 내가 어색한 만큼, 다른 동료들 입장에서도 내가 맞는 모습이 좀 어색하기는 하겠지.

“그래도 좀 쉽기는 하네요.”

“화이트삭스 애들도 정상은 아니니까. Suck 너도 오늘 폼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물론 그런 티끌 같은 어색함을 제외하면, 경기 자체는 수월했다. 딱 예상대로지.

나도 별로 준수한 폼은 아닌데, 화이트삭스가 그보다 더 망가져 있었거든.

‘거기다, 오늘 컨디션이 평범하더라도, 좋은 흐름은 계속 이어지고 있으니까.’

개막전 이후로 일종의 사이클이 돌아가고 있었다. 리듬이라고 해야 하나?

뭐랄까, 자세히 설명하자면, 개막전부터 지금까지, 내 스스로 내가 실점하는 장면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애초에 실점을 예상하고 마운드에 오르는 투수는 없지만, 아예 안 맞을 것 같은 느낌이지. 심지어 컨디션이 별로 좋지 못한 날인데도.

화이트삭스 타자들이 약한 것도 있지만, 이건 순전히 내 기세지.

“점수 좀 내라 쓰레기들아! 왜 Suck 경기에서만 이러냐고!”

“며칠 전에 다저스 개털던 것처럼 팍팍 좀 내!”

다만 우리 팀 타자들도 상대 선발투수에게 막히고 있어서, 아직 0대0이라는 게 좀 아쉽군.

“스트라이크 아웃!”

브루스와 더불어, 크리스티안 옐리치도 오늘 휴식이라 안 나왔는데, 그래서 그런지, 나랑은 다르게, 우리 타선은 흐름을 잘 타지 못하고 있었다.

화이트삭스의 선발투수, 레이날도 로페즈가 오늘 느낌이 좋은 것도 있고.

16년에 데뷔해서 따지고 보면 나보다 선배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올해가 첫 풀타임 데뷔 시즌인 선수인데.

1회 말과 2회 말에 안타를 내주기는 했지만, 실점은 꿋꿋하게 억제하고 있었다.

“베이스 온 볼!”

“아웃!”

3회 말 역시, 볼넷 하나를 내준 걸 제외하면 잘 틀어막았고.

콜리시엄이 이게 문제야.

투수구장이라 나는 참 좋기는 한데, 상대 투수도 잘하면, 마찬가지로 우리 타격이 막혀버리니까.

“다들 분발 좀 하십쇼.”

“이상하게 Suck 네 경기만 되면 힘이 안 난다니까. 너 때문이야.”

“네가 너무 잘하니까, 간절함이 없어서 그래. 좀 적당히 못해라.”

그대로 3회 말의 공격 역시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끝나면서.

화가 난 듯한 팬들의 모습에 주의를 주니, 타자들은 오히려 내 탓을 했다, 맞아 죽으려고.

그 말 그대로 레이더스 앞에서 해보슈. 어떤 반응이 나올지, 나도 궁금하네. 아마 사지를 찢어버리려고 할걸?

‘사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다만 어느 정도는 타당한 말이기는 하다. 뭘 해도 내가 마운드에 있는 동안에는 리드를 빼앗길 걱정이 없으니.

타자들 입장에서도 크게 무리하거나, 의욕을 낼 필요가 없긴 하지. 그래, 내 탓이다, 내 탓이야.

‘내 탓이니까, 나도 그냥 평소처럼 해야지.’

다시 돌아온 차례.

4회 초 마운드에 오르는 걸음은 그리 부담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한 타순을 돌면서, 화이트삭스 타선을 관찰했고, 별다른 위험 거리가 없다는 걸 파악했으니까.

‘대충 분류하자면, 죄다 걱정이 없다고 봐야 하나?’

매덕스의 분류법에 따르면, 타선 전체가 크게 신경쓸 것 없이 편하게 잡아도 되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아비사일 가르시아, 작년은 역시 플루크였나?’

그나마 중심타자이자, 화이트삭스의 ‘강한 2번’이라고 할 수 있는 아비사일 가르시아가 타석에 올라오긴 했는데.

작년 홈런 18개를 까고, 타율 3할 3푼에 OPS 8할 8푼을 기록하며, 준수한 A급 성적을 찍었지만.

아까 전, 1회 초의 첫 타석에서는 그다지 위협적인 느낌은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오늘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성적도 그리 준수한 편은 아니니, 작년을 플루크라고 생각해야겠지.

‘팀 분위기 자체가 묘하게 힘이 빠져 있기도 하고.’

리빌딩을 달리는 팀은 대부분 이런 편이지. 구단이 승리를 크게 바라지 않으니, 선수들도 의욕이 넘치지는 않는다고 해야 하나?

메이저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찍고 싶다면, 어떤 의미에선 이런 팀들이 제일 중요하다.

스탯 올려주는 고마운 친구들이니까. 얘들을 얼만큼 잘 잡느냐에 따라 연봉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겠지.

“스트라이크!”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연봉 올릴 준비가 돼 있었다. 몸쪽으로 낮게 깔아던진 포심.

타자의 배트가 헛돌았다.

‘87마일이라.’

좀 제대로 던진 것 같은데, 최고구속에는 못 미치네. 지난 경기에선 그냥 휙 던져도 찍었는데 말이야. 이게 보통이긴 하지.

애초에 별로 대단치 않은 구속이라고 해도, 최고구속을 밥 먹듯이 찍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니까.

“스트라이크!”

“볼!”

“스트라이크 아웃!”

가볍게 몰아친 뒤, 4구째 쓰리핑거 체인지업을 가만히 쳐다만 보면서 삼진아웃.

타자는 아쉬운 한숨만 뱉으며 무기력하게 타석에서 물러났다.

‘이쪽은 그나마 위험한 수준인가?’

그다음 타자는 3번, 호세 아브레유, 올라올 때부터 느낌이 다르다 싶더니. 곧바로 안타를 치며 출루했다.

“세이프!”

올해 첫 장타인가?

좌익수로 나온, 채드 핀더를 살짝 넘기면서, 2루타를 허용했는데. 올해 첫 장타일 거다.

‘지금 내가 좀 심하게 미친놈이긴 하네.’

매 경기 홈런 맞았던 놈이, 메이저리그에서 네 번째 등판 만에 첫 장타를 허용하다니. 새삼스럽게 내 자신의 광기를 실감했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기회에 화이트삭스의 얼굴에 화색이 돈 반면.

“실점은 안 돼!”

“X발 Suck이 먼저 실점하는 꼴은 죽어도 못 봐!”

“채드 X신아! 그건 잡아야지!”

팬들은 아주 분노를 토해냈다. 실점한 것도 아니고, 고작 2루타 하나 맞았는데 말이야. 이것도 약간은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 있겠지.

점수도 못 냈는데, 먼저 실점까지 해버린다면, 자신들이 욕 먹겠다고 생각한 건지.

흘끔 주변을 둘러보니, 야수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었는데.

“스트라이크 아웃!”

잠시 그들을 달래줬다.

진정들 하슈, 진정해.

나 아직 멀쩡하다고.

2루타 하나 가지고 너무 호들갑을 떠시네.

곧바로 4번타자 맷 데이비스를 제물로 바치며,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그러자 순식간에 잠잠해지는 분위기. 역시 흥분을 가라앉힐 때는 삼진이 최고지.

물론 흥분을 올릴 때도 삼진이 최고고. 원래 삼진이 최고야.

세이버메트릭스에서도 타자는 홈런, 투수는 삼진을 최고로 치잖아? 그다음이 내야뜬공이고.

“아웃!”

바로 이것처럼.

몸쪽으로 바짝 붙인 투심에 니키 델모니코가 배트를 휘둘렀지만, 살짝 빗맞으면서 타구가 떴다.

그대로 포수, 조시 페글리의 글러브에 안착하면서 쓰리아웃. 호들갑 떨던 것에 비하면, 간결하게 마무리 됐네.

그것으로 4회 초 역시 종료.

4이닝 2피안타 6탈삼진이라.

역시 오늘은 적당히 무난하구만.

####

“다음 이닝에 바로 가속하는 거지?”

4회 말의 공격도 무난하게 망하고(?) 있을 때, 조시 페글리가 슬쩍 물어왔다. 인터벌 가속 타이밍을 묻는 건데.

투구 속도가 빨라지면, 그 템포에 맞춰서 받아야 하는 포수도 힘들어지는 만큼,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려는 거겠지.

그는 아마도 5회를 기점으로 잡는 것 같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6회부터 가죠.”

“6회부터? 너무 늦지 않아?”

6회, 평소보다 많이 느린 타이밍에 조시 페글리는 조금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7이닝 던진다 치면 5회부터 가속하는 게 보통이고, 올해는 4회부터 가속해도 거뜬한데. 이번엔 2이닝만 치고 빠지는 거지.

“혹시 8이닝 던지려고? 코치가 허락 안 할 텐데. 그래서 지금까지 완급조절 한 거야?”

그렇기에 조시 페글리는 혹시 내가 더 긴 이닝을 예상하는 건가 싶었는지, 코치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대니얼이나, 스콧 에머슨의 말처럼, 나는 괜히 무리할 생각이 아니었다. 여행의 피로가 남아 있는데. 굳이 길게 던질 이유는 없지.

“오늘은 뭐, 그렇게까지 무리할 필요가 없고, 상대도 딱 알맞으니까, 적절하게 체력을 관리하려고요.”

별건 아니고, 확실히 흐름을 타기는 탄 것 같더라고. 별다른 수고를 곁들이지 않았는데도, 경기가 쉽게쉽게 이어지는 걸 보면.

이대로 쭉 이어갈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흐름이 끊기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절하게 제어하는 것도 중요하지. 잘 나갈 때 신 내서 무리하다, 체력이 떨어져서 또 고생할 수도 있으니까.’

이게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니라는 걸, 이미 작년에 배웠다. 올스타전 앞두고, 전반기 막바지에 진짜 고생했잖아.

공이 좋다고 막 던지다가, 컨디션이 휙 떨어져서 올스타전 앞두고 똥꼬쇼로 막았지.

다행히 계획대로 잘 진행된 덕분에 오히려 준수하게 막기는 했는데, 그런 것도 한두 번이지.

사이클이 좋다고 너무 급격하게 치솟다간, 내려갈 때는 롤로코스터를 타기 십상이니. 적절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거기다가, 올해는 작년처럼 시즌 막바지에 널널하지도 않을 테니까.’

작년이야 일찌감치 포스트시즌을 포기해서, 5일 휴식을 확실하게 보장받았기에.

오히려 시즌 막판에는 널널하게, 잘 쉬었고, 그 덕분에 마지막까지도 강력한 흐름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올해는 아니겠지.

대놓고 포스트시즌, 그것도 월드시리즈를 노리는 상황이니까, 시즌도 더 길뿐더러, 더 치열할 테니까.

그러니 오늘 같은 날, 적절하게 제어해서, 체력 소모를 방지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거지.

“오~ Suck 너 이제 좀 경험이 느껴진다? 경기가 아니라, 시즌을 보고 완급조절을 하시겠다?”

“이젠 2년차니까요. 풀타임도 경험해본 2년차. 딱 7이닝만 던질 거예요.”

그 말에 새삼 성장했다는 듯 피식 웃은 조시 페글리였지만, 우리 대화를 듣던 스콧 에머슨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날렸다.

“누구 마음대로 7이닝이야? 6이닝 7이닝 중에서 판단한다니까.”

“에이, 오늘 적당히 살살 하고 있는데, 이닝이라도 인심 좀 쓰세요.”

거, 내가 그쪽 배려해서 살살하고 있는 건데, 그 정도는 보장해주셔야지.

아니면 또 급발진해? 또 막 달려? 사람이 어떻게 자기 생각만 해? 배려하는 내 입장도 고려해야지!

은근슬쩍 7이닝으로 못 박은 게 들키긴 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자제하려는 내 노력을 알아준 건지, 스콧 에머슨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래도 고유석인데, 7이닝 정도는 해야지. 그래야 내 면이 살잖아?

‘슬슬 타자들이 타이밍 잡을 때가 되기는 했는데, 이제부터 릴리스 포인트 좀 많이 섞어야겠네.’

폼이 좋은 편이 아니라고 해도, 화이트삭스를 상대로 7이닝 정도는 손쉽게 막을 수 있기도 하고. 7이닝 10탈삼진 무실점이 기본이라니까?

“세이프!”

곧이어 5회 초.

선두타자로 나온 웰링턴 카스티요에게 시작부터 안타를 내주면서, 조금 면을 구기긴 했지만, 그 정도는 괜찮다.

‘흐름이 이어질 정도는 아니야.’

박살난 화이트삭스 타선은 그런 간간히 터지는 안타 정도로 되살아나기엔 힘들 테니까.

“스트라이크!”

당장 7번타자, 욜머 산체스만 보더라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약간 당황한 것 같기도 하고.

‘릴리스 포인트 때문은 아니고. 내가 가속을 안 해서 그런 건가?’

릴리스 포인트야 저쪽도 이미 알고 있을 테니, 그거 가지고 놀랄 것 같지는 않은데.

타자가 당황한 걸 보면, 아무래도 저쪽도 내가 이번 이닝부터 템포를 높일 거라고 상정한 것 같다.

그렇지 않고, 계속 무난하게 던지고 있으니, 조금 당혹스럽게 느껴진 거겠지.

‘분노도 느껴지고.’

배터박스의 타자는 물론, 흘끔 확인하니, 덕아웃의 다른 선수들도 마치 우릴 무시하는 거냐면서 노려보기도 하는데,

벤치에 있는 사람들이야 상관없지만.

“스트라이크!”

넌 나한테 집중해야지.

어딜 화를 내고 있어.

똥고에 힘 빡 줘도 모자랄 판에. 나는 여유롭게 던져도 되지만, 그쪽은 심혈을 기울여서 타격해야지.

그런 의미를 담아, 2구째에 하이 패스트볼을 찍어 던지자, 헛스윙이 나왔다.

그제야 타자는 정신이 든 건지, 다시금 호흡을 가다듬으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이미 늦었어 이 친구야.

바깥쪽 슬라이더. 꺾이는 무브먼트에 너클 커브를 예측한 것 같았지만, 공은 떨어지지 않고, 계속 꺾이기만 했다.

그것으로 헛스윙 삼진.

그다음 다시 8번타자 팀 앤더슨이 올라왔는데.

“스트라이크!”

“볼!”

원 앤 원 상황에서 그를 흘끔흘끔 관찰하던, 조시 페글리가 이번엔 먼저 사인을 보내왔다.

웬만하면 자기주장이 없는 사람이라, 그가 사인을 보낸 게 신기해서 확인하니, 투심을 요구하고 있는데.

‘뭔가 느낌이라도 받은 건가?’

브루스와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무언가 느낌이 오면 사인을 내라고 했었기에, 이번이 그건가 싶어서 일단은 따라줬다.

몸쪽으로 높은 투심 패스트볼.매덕스에게 제법 쓸만해 졌다고 인정받은 만큼, 묵직하게 쭉 날아가는 공에.

‘오. 쳤네.’

타자는 냅다 배트를 휘둘렀다. 높은 코스를 노리고 있었던 건가? 내가 은근히 즐겨서 던지니까.

허나 투심에 밀린 배트로 인해, 틱- 하는 소리를 내며 타구는 바닥을 때렸고, 그대로 유격수 방향으로 굴러갔다.

주자는 1루. 별로 주력이 좋지 않은 선수고, 타자도 그리 빠른 편은 아니니, 상황은 하나뿐이지.

“아웃!”

“아웃!”

순식간에 더블 플레이.

병상타 코스에 죽어라 달렸던 팀 앤더슨은 1루 베이스의 앞에서 아웃을 당한 뒤, 스스로가 원망스러운 듯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래, 자책해야지.’

어떤 의미에선, 이번 이닝이 화이트삭스의 마지막 기회였으니까.

“나이스 리드. 딱 포착했네요. 칠 것 같았어요?”

“왠지 노리는 것 같더라고. 다행히 결과가 좋았네. 다음 이닝부터 빡세게 갈 거지?”

“네, 딱히 위험한 타자도 안 보이니까, 컨트롤 살짝 내려놓고 좀 세게 가려고 하는데, 괜찮겠어요?”

“···하아, 간만에 호흡 맞추는데, 더럽게 힘들겠네. 일단은 열심히 받아볼게.”

이제 경기의 후반에 접어드는 만큼, 마지막 급행열차가 출발할 예정이니까.

제구를 조금 버려도 괜찮겠어. 별다른 위험이 없어 보이니, 그냥 찍어서 잡자고.

####

“위원님은 화장실 안 가셔도 되겠어요?”

“네, 물을 안 마셔서, 아직 괜찮습니다. 다녀오시려고요?”

“어우, 저는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지, 터지겠네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괜찮던데, 반응도 좋겠어요.”

“하하, 그랬으면 좋겠네요.”

공수교대가 되며, 경기에 약간의 휴식이 주어졌을 때, 중계방송 역시 광고 시간에 들어서며, 휴식을 가졌다.

그 사이 중계진 역시 참았던 화장실을 다녀오거나, 목을 축이거나, 아니면 열심히 혹사했던 목을 쉬거나 했지만.

해설자는 그대로 자리에 앉아, 조금은 몽롱한 눈빛을 했다.

‘고유석···’

그의 머릿속에는 한창 오늘 경기를 불태우고 있는 고유석이 있었다.

정말 대단한 투수지.

한때는 그 역시 같은 투수였기에 더욱더 와닿을 수밖에 없는 선수였다. 흥행을 이끄는 선수였으니까.

‘꿈보다 더한 일이야.’

투수라면 누구나 메이저리그 무대에서 퍼펙트게임을 하는 상상을 해보고. 300삼진을 생각하며, 사이 영 상을 꿈꾼다.

헌데 작년 고유석은 그런 꿈마저도 아득히 상회하는 업적을 세웠다.

사이 영에 MVP와 신인왕을 곁들였고. 300탈삼진에는 93개가 더 해졌으며. 퍼펙트게임은 두 번이나 했으니까. 한 시즌 만에.

‘운이 좋았어, 첫 해설 데뷔가 고유석 경기라니.’

그런 선수의 중계를 할 수 있다는 건, 캐스터나 해설자로선 꽤나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나 운동선수 출신인데도, 말주변이 조금 딸리는 그에게는 더욱더 그렇고.

일단 잘하는 거야 당연하니, 무조건 칭찬, 극찬, 찬사, 환호성, 그것만 해도 80%는 먹고 들어가는 것이니까.

다만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해설자의 눈으로 본격적으로 바라본 고유석의 모습이 색다르기도 했고 말이다.

‘중계방송이야 몇 번 본 적 있긴 하지만, 느낌이 다르네.’

지금까지 몇 경기를 보기는 했다. 워낙 유명한 선수고, 야구인이라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선수였으니까.

거기다, 메이저리그 중계 쪽 해설자를 준비하고 있기도 했기에,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시청할 수밖에 없기도 하고.

개막전, 레인저스전, 다저스전 등. 지난 경기들에서 고유석은 마치 메이저리그 위에 군림하는 절대자처럼, 답답하고 강렬한 압박감을 내뿜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고개가 끄덕여졌지. 그가 현역시절 겪어온, 소위 말하는 에이스들은 딱 저런 느낌이었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느낌이 다르단 말이야.’

그런데 오늘은 아니다.

제대로 집중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던 지난 경기들과는 다르게, 오늘은 마운드 위에서도 특유의 여유나 가벼움이 느껴졌다.

당장 피칭에서도 빡세게 팡팡 던지는 느낌이 아니라, 무난하게 휙휙 던지는 느낌이지.

“아, 안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위원님.”

“아닙니다, 딱 정확하게 오셨습니다. 바로 가시죠.”

“그나저나 고유석 오늘 폼이 별로 안 좋나보네.”

“그런가요? 대단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하, 제가 작년 내내 고유석 경기를 중계해서 아는데, 오늘은 적당히 평범한 수준이에요. 공 던지는 것만 봐도 알죠.”

다시 중계가 시작되기 직전, 후다닥 달려온 캐스터는 그렇게 표현했다. 오늘은 그냥저냥 컨디션이 평범한 거라고.

누가 봐도 폼이 올라왔던 지난 경기들과 비교하면 확연한 차이가 있었기에.

해설자 역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무난하게 평범한 수준이란 말이지.’

특별히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딱 중간 정도. 그 정도라는 뜻인데···

“스트라이크 아웃! 고유석! 또다시 삼진입니다! 아~ 오늘도 아주 좋죠?”

“네, 지금 너클 커브였는데, 좌타자 입장에서 저런 공은 마구나 다름없습니다. 분명 몸쪽으로 들어왔는데, 바깥쪽으로 나가버리니까요.”

“예, 서클 체인지업과 더불어서 고유석 선수 최고의 결정구로 꼽히죠. 그나저나, 슬슬 속도가 빨라지죠?”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늦기는 했습니다만, 예, 이제 시작인 것 같습니다.”

6회 초. 다시 시작된 피칭에서 화이트삭스는 이번에도 쓸려나갔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아니, 더 빨리 삭제됐지.

고유석이 본격적으로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으니까.

평소보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그 위력은 여전했다. 마치 액셀을 밟는 것처럼 순식간에 빨라지는 투구동작에 타자들은 전혀 따라가지 못했다.

그것을 보며 해설자는 생각했다. 저게 평범한 거라고?

아니, 같은 메이저리거인데, 저렇게 여유롭게 상대해도, 쉽게 타자들을 잡는다고?

같은 투수이기에, 메이저리그라는 곳이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알 알기에, 오늘의 모습은 더욱더 황당하게 받아들여졌다.

“세이프!”

그래, 확실히 안타를 좀 맞기는 했다. 꾸준하게 안타는 허용하는 걸 보면, 지난 경기들보다는 덜하기는 하다는 거겠지.

그런데도 아무런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영상 속, 마운드 위의 투수에게도, 그를 바라보는 다른 선수들에게도, 심지어 옆에 있는 캐스터에게서도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 삼진 하나와 외야플라이 하나, 가볍게 휙 던진 공으로, 가뿐하게 위기‘였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지워버렸다.

그것으로 다시금 이닝 종료.

“마지막 공은 투심이었죠?”

“예, 그렉 매덕스에게 직접 사사 받은 공으로 유명한데, 확실히 올해는 더욱더 위력이 나오고 있습니다.”

“고유석 선수의 경우 구종을 쉽게 장착한다는 평이 많은데, 같은 투수 출신으로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하하, 그냥 부러운 선수죠. 지금 다저스에서 뛰고 있는 류영진 선수도 구종 습득 능력이 대단한데, 그런 선수들을 옆에서 지켜보면, 어떻게 저렇게 쉬울까? 하고 부러워할 수밖에 없죠.”

그렇게 공격을 저지하고 돌아오는 고유석을 캐스터는 익숙한 듯 여기며, 감상을 물었다.

정확하게는 고유석을 칭송하라는 뜻이지. 애초에 중계방송의 목적이 그것이기도 하고.

객관적인 분석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얼만큼 잘하고, 얼만큼 대단한지에 더 초점을 둬야 했으니까.

그에 무난하게 답변하며, 합격적음 넘은 해설자였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멍했다.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고유석! 7회 초 역시! 삼진 하나를 곁들이면서, 순식간에 마무리 짓습니다. 7이닝 10탈삼진 무실점! 오늘 역시 완벽한 피칭을 선보이는 고유석입니다!”

곧이어 7회 역시 지워졌다.

이번에는 올시즌 첫 볼넷을 내주긴 했지만, 역시 그걸로 끝이었지.

“오늘도 역시나 무실점! 31이닝 연속 무실점을 이어가며, 다시금 전설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제 교체가 될 것 같은 분위기였기에, 캐스터는 아직 경기가 남았는데도, 마치 마지막인 것처럼 마무리 멘트를 쳤지만.

해설자는 경기를 곱씹었다.

어쩌면 오늘 직접 본 피칭으로 체감이 됐으니까. 고유석이라는 괴물의 체급이.

‘이 정도였다고?’

지금까지는 그저 최고라는 단어에 걸맞은 압박감을 내뿜었기에, 역시 다르구나, 하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저런 선수이기에, 메이저리그라는 무대를 정복했구나, 싶었지.

‘이게 진짜라는 거겠지.’

헌데 오늘은 아니다.

적당히 무난한 컨디션.

조금 여유롭게, 그리 타이트하게 몰아붙이지 않는 피칭.

특별히 폼이 좋다거나, 공이 잘 긁힌다거나, 아니면 마음을 먹었다거나 하지 않더라도···

‘화이트삭스 정도는 쉽게 요리할 수 있다는 뜻이겠지. 체급 자체가 다르니까.’

마치 어린아이가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듯이. 큰 목표 없이 가볍게 휙 던지더라도 메이저리그 팀 하나 정도는 쉽게 처리할 수 있다는 뜻이겠지. 그 정도의 체급이라는 뜻이고. 지금의 고유석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괴물이네요, 괴물.”

지금까지 보았던 위압감이 없었기에, 마치 안개가 걷혀, 겉으로 드러난 산봉우리처럼, 고유석이라는 투수의 실체가 제대로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