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충격과 공포는 당연히 다저 스타디움에 국한되지 않았다.
첫 타석만 하더라도 얌전하더니, 기어코 출루를 해내고, 시원스러운 질주를 선보이며, 오늘 역시 득점을 올렸으니까. 그 특이하기 그지없는 타격으로 말이다.
[#A’s]
[Suck 뛸 때마다 불안해 죽겠는데, 막상 속은 후련하단 말이야.]
└너도? 뭔가, 저러다 넘어지면 X될 거 같아서 걱정되면서도, 묘하게 재밌어.
└오늘은 같은나라 선배라고 점잖은 척하나 했더니, 역시! Suck이 그럴 리가 없지!
└염려되긴 해도, 난 오히려 Suck다워서 더 좋아. 위험이고 나발이고 일단 뛰는 게 Suck한텐 잘 어울리지.
애슬레틱스 팬들은 당연하게도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이며, 흥겹게 웃었으나.
[#Dodgers]
[Go 쟤 미친놈이냐? 사이코 아니야?]
└성적만 봐도 미친놈이긴 하지.
└좋은 의미로 미친놈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냥 그레인키 같은 부류였어.
└내가 잘은 모르지만, Korea도 스포츠에서 선후배 많이 따지지 않아? 근데 선배한테 저 지랄이네.
└야야, 쟤 작년 수상이랑 성적을 봐라. 저런 애한테 선배가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냐?
└Ryu 오늘 느낌 좋았는데, Suck 때문에 망쳤네.
당연하게도 다저스는 그저 황당함 밖에 없었다. 막상 직접 당하고 나니, 생각보다 훨씬 기분이 더러웠으니까.
차라리 평범하게 안타를 쳤다면 오히려 차분하게 받아들였을 거다.
투수타석이 공짜라고는 해도, 종종 안타나 홈런이 나오기도 하니까.
하지만 요상스러운 타격자세로 요상한 번트를 대더니, 수상할 정도로 빠른 주력을 뽐내며 베이스를 훔치는 모습은 황당함을 넘어, 정신적인 충격마저 들게끔 했다.
더군다나 피해자인 류영진이 직전까지 훌륭한 피칭을 선보였기에 더욱더 그렇고.
이렇듯 미국 내에서도 충격적인 반응이 잇따랐지만, 당연하게도 한국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선배에 대한 존중을 저버린 고유석? 기습번트 안타 이후 득점까지!>
└고유석 미친놈이네ㅋㅋ 쓰리번트 댈 줄은 상상도 못했음ㅋㅋㅋ
└유썩은 언제나 상상 그 이상을 보여줌ㅋ
└류영진 얼굴 봄? 하도 어이가 없어서, 오히려 웃더라ㅋㅋㅋ
└빠르긴 진짜 X나 빠르던데.
└저거 관절 괜찮음?
└당연히 안 괜찮지. 저 덩치에 저렇게 뛰면 무릎, 발목, 그냥 죄다 갈림. 그러니까 유썩이 미친놈인 거고.
<류영진의 복귀전을 망쳐버린 고유석, 이것이 한국인의 정?>
└유썩)선배 족까
└메쟈는 역시 다르네. 선배고 나발이고 ㅈㄴ 열심히 뛰는 거 보소
└좀 싸가지 없지 않음? 아니, 다른 투수면 몰라도 류영진한테 저러네.
└ㅇㅈ 고유석 좀 비호감인 듯
└지랄났네 선배라고 대우하면 그게 이상한 거임
└할 수 있으니까, 한 거지. 그럼 뭐 승부조작이라도 함?
└아무리 그래도 선배 예우는 해야지. 버릇없게 저게 뭐하는 짓임?
└류영진 간만에 등판해서 잘 던지고 있는데, 거기다 똥물을 끼얹네.
<6회 초, 고유석 1득점. 오직 팀을 위해서 달렸다!>
└이건 솔직히 고유석이 좀···
└프로 경기인데 이게 당연한···
미국이 충격과 공포였다면, 한국은 혼돈과 파괴였다. 설마설마하는 반응이야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말로 고유석이 류영진의 등에 칼을 꽂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으니까.
특유의 우스꽝스러운 타격으로 결국 출루해버린 모습에 그저 즐겁다는 반응이 많았지만.
선배에 대한 존중과 예우를 저버렸다는 반응 역시 적지 않았고, 그에 대한 갑론을박으로 토론이 열리기도 했다.
기사들 역시 노골적으로 저격하거나, 비호하는 등의 반응을 보였고 말이다.
어떤 의미에선 유례가 없는 일이었으니까. 한국인 선발투수가 서로 메이저리그에서 맞대결을 펼치는 것도.
그 경기에서 후배인 투수가 투수타석에 올라, 안타를 쳐내는 것도 말이다.
차라리 투수와 타자였다면, 안타나 홈런이 나오더라도, 제 할 일을 한 것이기에, 오히려 반응이 덜했겠지만, 둘 다 투수였기에, 굳이 그래야만 했느냐는 비난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류뚱 아이싱]
-교체되나 보네, 6이닝 1실점이면 괜찮은 듯?
└ㅇㅇ 디백스전 털렸던 것도 많이 복구했음
└혐유석이 X발 지랄한 거 때문에 교체당하네. 더 길게 가는 것도 가능했는데.
└그게 왜 고유석 때문임?
└애초에 재활 복귀한 지 얼마 안 된 선수인데다, 갑자기 등판한 거라서 원래도 6이닝만 던졌을걸?
이후 류영진이 6회 초를 잘 마무리한 뒤, 아이싱에 들어가자, 고유석으로 인한 실점 탓에 교체되는 것이라며 분노하는 반응도 적지는 않았고.
그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곧 잦아들었다.
류영진과는 별개로, 고유석의 피칭이 시작되었으니까.
-스트라이크 아웃!
마치 장난은 이제 끝이라는 것처럼, 아주 타이트하게, 빡빡한 속도로 타선을 몰아붙이는 모습은 방금 전, 신나게 그라운드를 누비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마치 그건 그저 약간의 장난일 뿐, 당연히 본업은 이것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으니 말이다.
-아웃! 다시금 순식간에 이닝을 지워버린 고유석! 5회 말부터 속도를 올렸는데, 점점 더 빨라지네요.
-고유석 선수의 트레이드 마크죠, 정말이지 대단한 체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경기 중반부터 저렇게 동작을 가속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고유석을 칭찬하던 사람도, 욕하던 사람도, 그저 즐기던 사람도, 심지어 기사를 쓰던 기자들도 그저 그의 피칭에 빠져들었다.
닥치고 이거나 보라는 것처럼, 대단히 파괴적인 피칭이 소나기처럼 퍼부었으니까.
충격의 반응 속에서 시작되었던 6회 말은 차근차근, 하지만 빠르게 삭제되어갔다.
양 팀의 균형을 지탱했던 노히터와 퍼펙트가 깨졌고, 무실점마저도 깨지면서. 싸늘했던 투수전의 분위기는 이미 산산조각이 나, 사라져버렸지만,
그 대신 떠오른 것은 뜨거운 난타전이나, 타선이 뒤늦은 폭발이 아닌.
-스트라이크 아웃!
그저 절대자 한 명의 군림이었다.
다저 스타디움 마운드에 떠올랐던 두 개의 태양 중 하나가 먼저 저버렸는데도. 남은 하나는 그저 꼿꼿하게 남아, 경기장을, 그라운드를 불태웠으니까.
6회 말이 순식간에 삭제된 뒤, 고유석 역시 다시 마운드로 돌아갔지만, 그는 아이싱을 하지 않았다.
그저 점퍼를 목 끝까지 올려 입으며 그라운드를 지켜봤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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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그냥 헛웃음이 나왔다.
경기의 감각이 빠져나가고, 차분해진 마음으로 덕아웃 벤치에 앉아 피칭을 보니.
또 느낌이 달랐으니까.
단순히 마음가짐의 차이가 아니라, 피칭 자체가 달라지기도 했고.
“스트라이크 아웃!”
7회 말에도 이어진 피칭.
자신이 교체된 이후, 7회 초, 애슬레틱스는 1득점을 더 추가하며, 승기를 잡았고.
그대로 7회 말에서, 후배, 고유석의 재빠른 피칭은 그 승기에 콘크리트를 부었다.
‘저게 본 모습이네.’
지금까지는 서로 재밌게 논 것 같았는데, 이제 제3자로서, 그저 LA 다저스에 소속된 한 명의 선수로서 바라본 고유석의 모습은 완전히 달랐다.
그래, 저게 진짜였다. 본업을 하는 모습은 저렇다는 거겠지.
배신감에 찌들어, 타석에서 조금 많이 웃긴 타격폼을 뽐내던 모습도 그가 가진 것 중 하나겠지만. 진짜는 저거겠지.
“아웃!”
평소 가깝게 지내던 야시엘 푸이그 역시 잔뜩 배트가 밀리며, 먹힌 타구만 만들면서 물러났다.
오늘은 3번타자로 나왔는데, 아주 깨끗하지. 제대로 타격다운 타격도 못 해봤으니까.
“Ryu, 네 후배 너무 X같아. 네가 뭐라고 좀 해봐. Korea에선 Ryu 네가 최고잖아?”
그에 대한 박탈감인지, 자신에게 다가와 투덜거리기도 했지만,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정권 교체 된지가 언젠데, 그리고 뭐라고 하기엔 후배가 너무 거물이라서.”
코리안 몬스터로서, 코리안 특급으로부터 전해져온 대권을 자신이 이어받긴 했지만. 그 정권은 작년에 교체됐으니까.
“아메리칸 리그 새끼들은 저런 녀석을 어떻게 상대하나 몰라. 나였으면 NL로 트레이드 시켜달라고 난리 부렸을 텐데.”
“그래, 너라면 그랬겠지.”
“푸이그, 방금 선발등판한 투수한테 뭐하는 거야? 귀찮게 하지 말고 나와.”
한참이나 투덜거리던 푸이그는 투수코치의 주의를 받은 뒤에야 깨달은 건지, 미안하다며 손을 흔들고는 물러섰다.
“세이프!”
이후 그나마 4번타자, 엔리케 에르난데스가 안타를 쳐내며, 다시금 삼자범퇴를 당하는 것만큼은 면했지만.
“아웃!”
곧이어 맷 켐프가 내야뜬공으로 물러나며, 기회로 이어지진 못했다. 7이닝이 끝난 뒤에도 여전한 투수의 모습.
그것에 타자들은 기가 질린 듯 혀를 내두르고는 했고, 몇몇 투수들도 전율을 느꼈다.
같은 투수이기에 더욱더 와닿았으니까. 작년, 메이저리그를 휩쓸었던 폭풍의 눈이. 류영진 자신 역시 마찬가지고.
‘조금 더 던질 걸 그랬나? 코치나 감독님한테 부탁해서.’
교체되고, 아이싱까지 받으면서, 이미 집중력이나 경기력, 피칭 감각 따위는 흩어진지 오래였지만, 왠지 조금 더 공을 던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6이닝. 선발투수로서 적당히 이닝을 채웠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오늘은 왠지 조금 아쉽게만 느껴졌으니까.
이 조금 남은 미련은 다음 경기를 위해서 아껴둬야겠지. 물론 경기 뒤의 해후로 조금 풀기도 해야 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진짜 치냐. 작정하고 달리기까지 하고.’
솔직히 조금 속이 쓰리긴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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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스럽게도, 우리 스콧 에머슨께서는 사적인 감정에 휘둘려 일을 처리하는 분이 아니셨다.
오늘 내 상태가 좋고, 충분히 쉬었다는 걸 감안하여, 강제로 끌어내리거나 하지 않았으니까.
그를 달래기 위해서, 세 번째 타석에서 일부러 아주 얌전하게 삼진 먹고 돌아가기도 했고.
‘사실 류영진 선배한테 번트 댄 것 때문에, 투수가 단단히 주의하고 있어서, 어차피 힘들었겠지만.’
아무튼 약속이 파기됐는데도, 긴 이닝 자체는 여전히 보장받은 셈이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었다.
나도 마음 같아선 완봉도 하고 싶은데, 8회 말이 딱 한계일 것 같아.
지금은 체력이 거뜬하지만, 점점 훅 빠지는 게 느껴졌으니까. 딱 예상대로지. 빠른 인터벌은 4이닝이 리미트구만.
“점수 좀 내라 쓰레기들아. 이러다가 나 내려간 다음에 역전이라도 당하면 진짜 저주할 거니까.”
“우리도 노력하고 있으니까, 그만 좀 쪼아.”
그래도 8이닝쯤 던지면, 나도 충분히 만족스럽지만, 아무리 그래도 승수도 챙겨야 그림이 예쁘지.
한국인 선발투수가 두 명이 나왔는데, 둘 다 승수를 못 올리는 건 좀 그렇잖아.
그런 의미에서, 8회 초가 끝나, 이제 진짜 마지막인데도 여전히 고작 2득점에 머무른 타자들을 질책하자, 다들 눈을 피하거나, 변명하기 바빴다.
아니, 심지어 2점도 아니지.
그중 1점은 내가 득점을 올린 거니까, 오늘 경기에서 순수하게 타자놈들이 낸 건 고작 1점이다.
이런 미천한 것들.
투수인 내가 친히 천한 빠따질까지 하며 점수를 냈는데도 자기들도 1점으로 그치다니.
통탄할 일이로다.
‘그나마 불펜이 믿음직해서 다행이네.’
그래도 막판에 역전 당하거나 하면서, 승리를 날렸던 작년과 달리, 올해는 불펜이 믿을만 하기에, 말은 그렇게 해도 큰 걱정은 없었다.
‘다저스 타자들도 맛이 갔고 말이야. 폭탄이 오늘 터지지는 않았네.’
정규시즌 개막 이후 감이 별로 안 좋아보였던 다저스 타선도 여전히 제정신을 못 차리고 있기도 했고 말이야.
그렇기에 부담 없이 마지막 이닝을 맞이했다.
“신경 쓰이는 타자는 없지?”
“어, 딱히? 특별히 감을 잡았다거나, 느낌이 좋아 보이는 타자는 없어.”
“그래, 그러면 후딱 끝내고 내려가자. 괜히 끌지 말고. 슬슬 좀 힘이 딸린다.”
“이야~ Suck 네가 힘이 딸린다니. 엄청 놀라운 일이네.”
내 앓는 소리에 브루스는 대단히 놀라운 말을 들은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댔다.
묘하게 꼴 보기 싫네.
괜히 밉상이라서 어깨를 조금 더 강하게 두들겨주니, 그제야 입을 꾹 닫았다. 입술을 쭉 내밀긴 했지만.
‘마지막 이닝이니, 빡세게 던지다 내려가자.’
“Suck! 완봉하는 거지?”
“오늘도 완봉 가자!”
“작년은 노히터랑 퍼펙트 포함해서 육봉이었으니까, 올해는 팔봉, 아니, 십이봉까지 고자!”
팬들은 마운드에 오르는 나를 보며 큰일 날 소리를 했다. 사람 죽일 일 있나.
무슨 데드볼 시대도 아니고, 한 시즌에 12봉을 어떻게 해. 그 정도면 산맥 수준이네.
‘다저스 팬들은··· 음, 제대로 빡쳤군.’
반대로 홈팬들은 부글부글 끓는 것이 겉으로도 드러났다. 처음에는 반갑게 반겨줬는데, 이젠 날 싫어하게 됐어.
여전히 레인저스보다야 그 증오가 덜하긴 하지만, 원래 저렇게 시작하는 법이지.
내가 자기네 타자들을 발라버린 것도 있겠지만, 아마도 열심히 뛰어서 꼴받게 한 게 더 클 거다.
이렇게 또 하나의 적을 늘려버렸군. 팬들은 저런데, 직접 당하신 피해자분은 어떠신가?
‘생각보다 표정이 좋으시네. 다행이네. 미움 받기는 싫었는데.’
흘끔 다저스 덕아웃을 훑어, 한쪽에 앉아 있던 류영진 선배를 보니, 표정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다행이야, 솔직히 걱정했거든. 욱하는 마음에 저지르긴 했는데, 투수 입장에선 진짜 화나는 일이잖아?
동경했던 사람에게 미움받는 건 아닐까, 조금은 마음이 불편했는데, 오히려 눈이 마주치니 빙긋 웃기까지 했다.
‘오케이, 경기 끝나고 밥 한끼 합시다, 선배님.’
이심전심이지.
원래 투수끼리는 눈빛만 봐도 알아. 서로 무슨 생각 중인지.
그렇기에 나도 살짝 고개를 끄덕였지만, 곧바로 다시 집중력을 올렸다.
선배와의 식사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전에···
“스트라이크!”
일단 경기부터 싹 끝내야지.
다 조져버리긴 했지만, 원래 마지막까지 깔끔해야 더 그림이 예쁜 법이니까.
6번타자 코디 벨린저.
퍼펙트를 깨버린 X새끼지만, 큰 유감은 없다. 어차피 오늘은 안 될 날이었으니까.
하지만 유감이 크지 않다 뿐이지, 아예 없는 건 아니지. 그런 의미에서 이번 타석에서는···
“스트라이크!”
얌전히 You Suck이 되거라.
그런 의지를 담아 던진 2구.
슬라이더에 크게 헛치며 코디 벨린저의 자세가 무너졌다.
점점 빨라지며, 이젠 정점에 이른 속도감에 무너진 것도 있지만, 공의 위력 역시 좋았지.
어차피 마지막 이닝이기에, 이를 악물고 던졌으니까.
그리고 마지막 3구.
‘자, 다시 휘둘러.’
높은 코스의 공이 날아오자, 코디 벨린저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하이 패스트볼인지, 아니면 그것으로 둔갑하여 스윙을 훔쳐갈 브레이킹볼인지 애매했으니까.
아주 잠깐의 시간 동안 생각한 뒤 판단을 내린 그는 입술을 꽉 꺠물며 휘둘렀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쓰리핑거 체인지업이었답니다. 찍기에 실패하셨군요.
“You Suck!”
보상으로 유썩을 드리겠습니다. 거절은 거절하니, 마음껏 드시고 가주십시오. 서비스입니다.
‘목이 안 쉬나?’
가만 보면 레이더스의 목청이 참 신기하단 말이야. 어떻게 멀쩡할 수가 있지? 경기 시작부터 쭉 외치는데도 쇳소리가 안 나는 걸 보면. 죄다 성악이라도 배운 건가? 발성이 제대로 잡혀 있는데?
어쩌면 가수를 해야 할 재능인데, 길을 잘못 들어서 내 열성팬을 하는 걸지도 모르겠어.
“세이프!”
“야이! 초 치지 마!”
“X발 그걸 왜 쳐!”
“삼진이나 당해 X신아!”
“우우우우우!”
저거 봐, 텐션도 쭉 유지되잖아? 스타의 재목이라니까.
로건 포사이드가 안타를 치고 나가니, 곧바로 욕설을 퍼붓는데, 정말 대단하다니까.
홈팬들 눈치 따윈 보지도 않는 저 뻔뻔함 역시 슈퍼스타의 자질 중 하나이니, 아무나 한명 붙잡고 키우면, 제2의 마이클 잭슨이 나올지도.
‘아, 자꾸 개소리가 꼬리에 꼬리를 무네. 힘들어서 그런가?’
사람은 언제나 정신에 자기만의 목줄을 가지고 있다. 체력이 빠져서, 정신력이 떨어질수록 그게 헐거워지는 거지.
간혹 심적으로 지쳤을 때, 망언을 하거나, 하지 말아야 될 말을 하는 것도 그런 이유고.
지금의 나도 마찬가지- 아, 하지 말자면서, 계속하네.
‘집중하자, 집중. 막판에 홈런 맞을 거야?’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는데.
아무래도 열심히 뛰어서 빠진 체력 때문인 것 같다.
억지로 집중력을 끌어올리며, 올라온 타자를 확인하자, 그는 조금 기대감에 차 있었다.
겉으로도 지금 내 상태가 드러나는 모양이지. 흔들리는 것 같으니 한 대 후려치려고?
“스트라이크!”
어림도 없지!
기대감을 품은 타자의 얼굴을 보니, 저절로 마음이 잡혔다.
난 성격이 더러워서, 다른 사람이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너무 싫더라. 특히나···
“스트라이크!”
타자가 내 앞에서 희망 같은 걸 품고 있는 건 참을 수가 없고.
2구는 서클 체인지업.
여전히 강렬한 역회전을 보이는 V2에 타자, 오스틴 반스의 얼굴에 피어올랐던 기대감이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얘도 포수인데.
그쪽도 그냥 브루스처럼 포수 일에나 집중하슈.
“스트라이크 아웃!”
포수는 그것만 해도 반은 먹고 가는 거니까, 이번 삼진을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다시금 삼진 아웃.
이번 경기 삼진이 몇 개였더라? 오늘도 좀 잡긴 한 것 같은데, 다른데 정신이 팔려서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네.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래도 괜찮다.
“스트라이크!”
일단 이닝 끝내고 덕아웃으로 내려가서 확인하면 되니까.
9번타자, 투수타석이다.
로스 스트리플링.
원래는 선발투수이나, 현재는 중간계투로 뛰고 있는데. 그냥 끝까지 맡길 생각인지, 대타가 나오지 않았다.
내 입장에선 떙큐지.
‘이쪽도 비장하네. 그러다가 치겠어?’
투수잖아. 말해서 뭐해.
그래도 본인은 나에게 제법 감명(?)을 받은 건지, 아주 열심히 스윙했지만.
“스트라이크!”
그 정도론 역부족이다.
내가 지금 힘이 좀 빠지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투수 정도는 잡을 수 있거든.
마지막 3구. 같은 투수에게 그러는 것이 좀 그렇긴 해도, 이번 경기 마지막 공이기에 제대로 찍어서 던졌다.
“스트라이크 아웃!”
그래도 변화구 없이 패스트볼만 던졌으니까, 그러면 된 거지. 역시나 헛스윙 삼진.
힘껏 돌았지만, 배트와 공의 거리는 과장 좀 보태서, 오클랜드와 LA 사이의 거리보다도 훨씬 더 멀었다.
이야~ 저 정도면 태평양도 들어가겠는데? 타격연습을 소홀히 했나보구만.
“You Suck!”
그것으로 KKK. 이닝이 끝났다. 중간에 안타 하나 맞아서, 연속은 아니지만. 그래도 KKK는 KKK지.
그것을 끝으로 오늘 내 피칭도 끝났고, 마운드에서 터덜터덜 내려가니, 옅은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X같은 새끼! 에인절스 놈들이 왜 널 싫어하는지 너무 잘 알겠어!”
“수고했고, 이제 꺼져! 영영 돌아오지 마! 다저스 유니폼 입는 게 아니라면!”
걸쭉한 욕설도 뒤따라 들려왔고 말이다.
‘멋진 곳이네.’
나한테 많이 화가 났더니, 인정할 건 인정 하는구만. 하긴, 오늘 내가 X나게 잘하긴 했으니까.
어쩌면 인터리그 매치업이라, 계속 만날 놈이 아니기에, 쿨하게 반응하는 걸 수도 있고.
그 이유야 어떻든 간에, 레인저스 원정 때랑은 달리, 이번엔 홈팬들 눈치 안 봐도 되겠어.
‘알링턴은 몇 번이나 가봤는데, 정작 밥은 LA에서 먼저 먹겠네.’
그것으로 경기 종료.
덕아웃으로 돌아가서 확인하니까, 삼진은 16개나 잡았더라. 8이닝 16K 무실점인 거지.
“하아, 다음은 제발 뛰지 좀 마.”
지친 것을 제외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화가 좀 풀린 건지, 스콧 에머슨은 지친 목소리로 그렇게 부탁했지만.
솔직히 본업을 저렇게 잘하는데, 부업으로 소소한 재미 정도는 챙길 수 있는 거 아니야?
“Go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뻔히 보이니까,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마라. 나 지금 많이 참고 있는 거야. 팀의 에이스라는 녀석이 어쩌자고-”
“옙, 주의하겠습니다.”
어, 아닌가 봐.
어우, 아직 화가 덜 풀리셨네. 한동안은 얌전히 몸을 사려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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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끝난 뒤, 류영진 선배와 간략하게 만남을 가졌다. 통로에서 번호를 교환했지.
쿨하시더라. 솔직히 나였으면 자기한테 번트대고 득점까지 한 ‘투수’를 마주보면 장이 꼬일 텐데. 대인이야, 대인.
“여기 괜찮아, 외식할 때 한식 먹고 싶으면 종종 오는 곳이거든.”
심지어 식사까지 대접해주다니. 한인타운 외곽에 있는 한식당으로 향했는데, 덩치가 산만한 동양인들이 나타나니.
다들 수군거리기 바빴다.
알아보는 사람들도 있었고.
“저거 Go 아니야?”
“맞는 거 같은데?”
“오늘 진짜 더럽게 잘하던데. 다음에 볼 땐 좀 살살했으면 좋겠어.”
“옆에는 Ryu 아니야?”
“LA에 저 덩치 가진 동양인이 지금 Go랑 Ryu 밖에 더 있겠어?”
뭔가 좀 신기하네.
사실 오클랜드에서 저녁경기 치르고 나면, 바로 집에 가야 하거든. 괜히 돌아다니다 강도 만나기 딱 좋으니까.
LA는 그보다 치안이 훨씬 좋은지, 아니면 한인타운 쪽이 그런 건지는 몰라도, 꽤나 늦은 밤인데도 제법 사람이 많았다.
“인기스타가 다르긴 달라? LA라서 내 홈그라운드인데도 유석이 널 먼저 알아보네.”
“제가 좀 그렇죠. 식사는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제가 후배인데 선배를 대접해드려야죠.”
왠지 가슴이 찔려서 그렇게 말했지만, 류영진 선배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 홈인데, 내가 사야지. 후배한테 빌붙는 선배만큼 꼴사나운 게 없어. 그리고 오늘 경기에서 하던 짓 보면, 선배 예우가 없는 것 같던데?”
“큽-”
아, 사레 들렸어. 폐부를 확 찌르시네. 쿨하신 줄 알았더니, 내심 가슴에 남긴 하셨나봐.
“농담이야, 농담. 경기 중인데, 당연히 그래야자. 내가 먼저 작정하고 스윙하기도 했고.”
다행히 농담이었나봐.
“진짜 빠르던데. 중견수 살짝 넘긴 타구에 막 홈으로 쇄도하기도 하고. 엄청나더라.”
농담··· 맞죠?
선배 만나서 밥 한끼 얻어먹는 건데, 왠지 좀 가시방석이네. 음, 바닥에 압정이라도 깔려 있나?
왠지 조금 감정이 담긴 말에 그저 멋쩍게 웃었고, 때마침 나온 식사가 다행히 구원해줬다.
“술?”
“아뇨, 술은 원래 못해요. 이상하게 맛이 없더라고요.”
“아, 그래. 민수 선배도 그렇게 말하시더라. 그게 좋은 거지.”
식사까지 모두 마친 뒤, 선배는 슬쩍 물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좋은 자세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경기 때처럼 피식 웃으며 물었다.
“타자들은 잘 잡던 녀석이, 왜 이렇게 겁먹고 있어. 나보다 덩치도 더 크면서.”
“그냥 뭐, 좀, 신기하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감정이 이상하다니까.
동경했던 사람을 만나서 같이 경기 치르고 밥까지 한 끼 먹는 것도 이상한데.
그런 사람한테 내가 경기 도중에 몹쓸 짓(?)을 하기까지 했으니까. 물론 빌미는 선배가 주셨지만.
“경기 때처럼 당당하게 해. 그게 더 잘 어울려. 오늘 엄청 잘하더만.”
“제가 좀 잘하긴 하죠. 선배도 피칭 멋졌어요. 같이 노히터하고 퍼펙트했으면 최고였을 텐데.”
“나도 좀 잘하긴 하지. 만약에 그랬으면, 한국 터졌겠네.”
그래도 서로 도란도란 칭찬을 주고받으니, 분위기는 좀 풀렸다. 역시 배에 뭐가 좀 들어가야 서로 마음이 열린단 말이야.
간만에 빡빡한 식단에 맞춘 식사가 아니라, 진짜 밥 같은 밥을 먹어서 더 좋기도 하고.
“뭐, 조금은 예상치 못한 일이 있기도 했지만, 오늘 진짜 좋았어. 같은 나라 선발투수랑 붙어본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좀 기분이 이상하더라.”
그렇게 말하는 류영진 선배 역시 조금은 멋쩍게 웃었다. 하긴, 지금 메이저리그에 있는 한국인 선발투수가 나랑 선배 밖에 더 있어?
선배 입장에서도 굉장히 신기한 경기이기는 하겠지. 나야 뭐 말할 것도 없고.
“다음에도 일정이 맞으면 좋겠네, 그땐 너희 홈이지?”
“네, 콜리시엄 보면 놀라실 거예요.”
대단하지, 콜리시엄.
다저 스타디움이랑 비교하면 더 대단하게 느껴지고. 물론 반어법이다.
선배도 잘 안다는 듯 피식피식 웃었고, 그렇게 식사가 끝난 뒤에도 잠깐 대화를 나눈 뒤, 너무 늦기 전에 이별을 가졌다.
“택시 잡지 말고, 같이 가자. 내가 데려다줄게. 마침 술도 안 마셨으니까.”
“그래주시면야 저야 감사하죠.”
마지막 애프터 서비스까지 확실하시구만. 그렇게 우리 숙소까지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문득 옆을 보니, 여전히 좀 이상하긴 했다.
내가 류영진 차를 얻어타고 간다니. 5년, 아니, 2년전만 하더라도 상상도 못 할 일이지.
진짜 많이 바뀌긴 했어. 내 처지가. 왠지 모르게 센치해지는 감정이 괜히 창밖을 바라보니, 선배 역시 내 감정을 잘 안다는 듯 슬며시 웃었다.
“조심해서 가고, 푹 잘 쉬어. 오늘 열심히 했으니까.”
“그래야죠, 그래도 선배 덕분에 밥이라도 든든하게 먹어서 다행이네요.”
그렇게 축제가 끝난 뒤,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 됐을 때. 호텔 앞에 내려준 선배는 그렇게 말하다, 이내 슬며시 부탁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잘해라. 나도 잘해야 하고. 우리가 등에 짊어진 게 생각보다 많거든.”
혹시나 후배에게 부담을 주는 건 아닐까, 걱정하는 표정이었는데, 무슨 뜻인지는 잘 안다.
많지, 등에 짊어진 것들.
어떤 의미에선, 한국 야구의 투수를 대표하게 돼버렸으니까.
당장 나만 해도, 내 덕분에 모교에 스카우트가 넘쳐난다고 하고.
일종의 표본이 되는 셈이지.
메이저리그에서 한국 투수들을 바라볼 때, 우리를 참고하는 거니까. 우릴 보면서 기대감을 가지는 거고.
흔한 일이다. 애초에 다 그렇지. 메이저리그에서 도미니카나 푸에르토리코 출신 유망주들이 기대받는 이유도, 앞선 세대의 선수들이 잘했기에 그런 거고.
마찬가지로 나도 선구자가 있었기에, 스카우트를 만나, 미국에 날아온 거지.
이제는 내가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게 조금은 부담스럽지만···
“당연히 잘해야죠. 전 무조건 잘할 거예요. 한 50살까지.”
“상상만 해도 행복하네. 50살까지 메이저리그에 있으면.”
어차피 잘하는 건 당연하다.
그게 프로선수니까. 무조건 잘해야지.
그것을 끝으로 나는 호텔로, 류영진 선배는 집으로 향했고,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엘리베이터에 오른 순간 문득 실감이 났다.
동경했던 사람의 말처럼, ‘나도 이제 누군가를 동경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동경을 받는 입장이 되었구나.’라고.
“잘해야지, 앞으로도 계속.”
오늘의 축제는 끝났지만, 휴식 시간은 없었다. 그저 다음 축제를 준비하고, 계속해서 정진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