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210화 (210/316)

210화

‘신기하네.’

류영진은 마운드를 바라보며, 신기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저스 타자들은 쓸려나가고 있었다.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애초에 저 녀석, 저 투수를 상대로, 쓸리지 않고 버텨낸 팀 자체가 거의 없으니까.

아예 없을 수도 있고.

“스트라이크 아웃!”

청아하게 울리는 삼진콜.

“You Suck!”

그것을 받쳐주듯 오클랜드의 원정 팬들의 구호 역시 함께 울렸다. 이번 경기 내내 그랬지.

벌써 몇 번이나 울린 목소리에 동료 중 몇몇은 치가 떨린다는 듯이 몸을 떨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아웃!”

4회 말 역시도 종료.

내려가는 투수를 보니, 투수, 고유석 역시 은근히 그에게 시선을 날려 보냈다.

그것을 보니 왠지 조금 웃음이 나왔다. 정말 중요한 시기인데, 같은 나라 후배와 장난을 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으니까.

‘생각보다 귀엽던데.’

역사상 최고의 시즌을 보냈던 투수. 단 1년 만에 명예의 전당이 50%는 확정된 괴물.

그 밖에도 수많은 수식어가 존재하는, 현시점에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정상’.

비유하자면 같은 팀 동료인 커쇼보다도 더한 괴물일 텐데,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은 조금 미묘했었다.

경기 전, 서로 워밍업을 하며 마주봤을 때는 뭐랄까, 그런 동화나 신화 속의 괴물이 아니라.

한국에서 저보다 어린 후배를 만나면 흔하게 볼 수 있는 눈빛이었으니까. 동경이나, 신기함 말이다.

마치 자신이 미국 생활을 끝내고 한국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코리안 특급, 박찬원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Ryu, 가자.”

“그래, 이제 다시 내 차례네.”

신인왕과 사이 영 상, 그리고 MVP를 비롯해, 각종 수상과 기록을 쓸어 담은 투수가 나를 그렇게 본다는 게 신기하고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렇기에 어깨가 무거웠다.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는 후배가 너무 부담스러워서 생긴 문제겠지.

‘민수형 말이 맞았네.’

종종 연락할 때, 민수 형, 추민수 선배는 고유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는 했다.

분명 자랑스러운 후배인데, 직접 마주하면 부담스럽다고. 사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몸담고 있는 팀을 몰아붙이니까.

오늘도 그 말 그대로였다.

4이닝까지 안타도, 출루도, 그 어떠한 것도 허용하지 않으며, 다저스를 몰아붙이고 있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부끄러운 선배가 될 수 있나. 나도 악으로 던져야지.’

자신 역시 오클랜드를 몰아붙이고 있다는 것 정도. 그렇기에 다른 동료들이 쉽게 다가오지 못하는 것이고.

다시금 이닝이 돌아왔을 때.

포수 오스틴 반스 외에는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다저 스타디움의 분위기 역시 오히려 조금 더 조용해진 것 역시 같은 이유였다.

흥겨운 축제 같던 분위기였는데, 이제 팬들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은근한 기대감을, 그리고 간절함을 품고서.

박살나는 다저스의 자존심을 챙겨주고 있는 것이, 부상 이후 자리를 못 잡던 투수라니.

조금은 아이러니한 이야기지.

그렇기에 야구가 재밌는 것이고.

‘오클랜드, 듣던 것보다 훨씬 강하단 말이지.’

마운드에 오르니, 자신을 바라보는 상대타자들. 솔직하게 말해서, 오클랜드의 타선은 상상이상이었다.

타선의 박력 만큼은 메이저리그 내에서도 최고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괜히 우승에 도전하는 팀이 아니라는 거겠지.

그렇기에 지금까지는 수월했지만, 솔직히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 안을 걷는 느낌이었다.

5회 초.

5-6-7번 타자로 타순이 이어지는데, 하위타순인데도 그 위력이 제법 준수하지.

가장 먼저 5번타자 맷 올슨.

재작년에 데뷔해서,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기회를 받아, 아마도 올해 첫 풀타임 시즌을 치룰 신인인데. 파워가 굉장하다.

30홈런 정도는 너끈히 때릴 수 있다는 평이 지배적이니까. 그렇기에 클린업 트리오의 말석에 있는 것이고.

‘하지만, 다행히 오늘은 그리 감이 좋아 보이지는 않아.’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오늘 경기에선 그리 인상적이지는 않다는 것 정도.

앞선 타석에서도 삼진으로 잡은 바가 있으니까.

“아웃!”

이번 역시 체인지업으로 타이밍을 망가뜨리며, 가벼운 땅볼을 만들어냈다.

1루로 얼마 걸어가기도 전에 아웃. 일단 큰 산 하나를 넘은 것이기에 가볍게 숨을 고르며 다음 타자를 봤다.

6번타자 제드 라우리.

나이가 많은 베테랑이지만, 여전히 감이 살아있는 타자다. 노련한 경험과 준수한 실력으로 무장한 까다로운 타자이나.

“스트라이크 아웃!”

오늘 감이 좋은 건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삼진을 끌어냈다.

“Ryu Suck!”

그러자 큼직하게 울리는 목소리. 장난스럽게 외치기 시작했던 전보다는 조금 잦아들었다.

그래, 노히터가 이어지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양쪽 모두 다. 이쪽은 1회에 내줬던 볼넷 하나뿐이고. 상대 쪽은 그것조차 없지.

그것이 다저스를 지탱하고 있었다. 퍼펙트를 당할지언정, 우리 투수도 노히터 중이라는 것 말이다.

그로 인해 열기로 가득했던 다저 스타디움에, 투수전의 냉기가 감돌았지만.

“아- 씁··· 이걸 치네.”

먼저 살얼음판이 깨진 건, 다저스였다. 5회 초 투아웃. 아웃 카운트 하나만을 남겨뒀을 때. 안타가 나왔으니까.

마크 칸하.

7번타자에게 안타를 맞았다.

“아아아···”

“X발 누가 소리 냈어! Ryu가 그것 때문에 집중을 못했잖아!”

그것으로 노히터는 종료.

아쉬운 탄식이 흘렀고, 스스로도 괜히 입 안이 텁텁해졌다.

‘후배 앞에서 멋진 척 해보고 싶었더니. 쯧.’

허나 미련을 오래 품지는 않았다. 노히터야 사실 기대도 안 했던 것이고, 괜히 붙들고 있어봤자 좋을 것도 없으니까.

그렇기에 팽팽했던 균형이 먼저 흔들렸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아웃!”

그저 다시 우뚝 섰을 뿐.

오늘은 중요한 경기다.

향후 구단에서의 입지, FA, 스스로의 페이스, 등 많은 것들이 걸려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것들 때문에 잘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그저···

‘이제 다시 네 차례야.’

피칭 자체가 즐거웠을 뿐.

덕아웃 바깥으로 나와, 배트를 붕붕 돌리던 고유석은 그의 코앞에서 딱 끝난 이닝이 아쉬운 듯 혀를 날름거렸다.

‘아무래도 충격이 컸나 보네.’

최강의 투수를 상대로 안타를 쳐보고 싶다는 생각에, 성실히 타석에 임했던 건데.

그게 녀석에게는 배신으로 기억된 것 같았다. 그렇기에 이제부턴 저쪽도 작정한 것 같고.

‘조심해야겠네, 장난이 아니던데.’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퍼졌던 타격 영상을 떠올리니, 저절로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지만, 약간의 긴장감도 있었다. 타격은 몰라도 다리는 진지하게 자신이 본 타자들 중 최고였으니까.

솔직하게 말하면··· ‘그런’ 타격의 희생양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

아쉽게 됐군.

딱 내 앞에서 끝나네.

브루스 이 무능한 자식.

출루를 못하다니. 역시 넌 그냥 내 공이나 잘 받아라.

‘오늘 진짜 폼이 좋으시긴 한데 말이야.’

사실 브루스가 못한 것과는 별개로, 류영진 선배의 폼 자체가 진짜로 좋긴 좋았다.

갑작스럽게 등판한 거라, 준비도 약간은 모자랐을 텐데 말이야.

“체인지업이 예술이더라. Suck 니 체인지업에 당하는 타자들 기분을 알겠어.”

“얘가 더하지. 얜 그런 체인지업이 세 개잖아. 미친놈이야.”

“무능한 타자놈들 주제에 어딜 입을 놀려. 수비나 하거라, 미천한 것들아. 사실 수비도 내가 다 하지만.”

주력구인 체인지업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내 체인지업들은 대체로 삼진을 잡는 편이지만, 저쪽은 범타를 잘 만들더라고.

아마 미묘하게 타이밍에서 차이가 나는 거겠지.

어쨌든 아쉽게도 타석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그거야 바로 다음 이닝에 있을 테고, 다시 내 차례가 왔으니, 일다 피칭부터 잘해야지.

‘일단 저쪽 노히터는 깨졌는데···’

노히터와 퍼펙트.

서로 이어오던 싸늘한 균형이 방금 전에 깨졌다. 그래서 질식할 것만 같았던 무거운 분위기도 가셨고.

다저스 팬들은 아쉬운 한숨을 뱉으면서도, 은근히 타자들을 독촉했는데. 타자들도 그런 관중들의 기대를 잘 아는 것 같았다.

‘작정하고 나오겠네.’

자기네들 노히터가 깨졌으니, 나한테도 흙을 뿌려야 직성이 풀리겠지.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가자, 타자들 조지러.”

다저스의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내 알 바 아니지만.

5회 말, 그라운드로 나가니, ‘우리 Ryu가 노히터 깨졌으니, 너도 깨져야 해!’라고 외치는 듯한 다저스 팬들의 시선과 ‘넌 계속 할 거지?’라고 기대하는 우리 레이더스의 시선이 함께 날아왔다.

다저스의 눈동자가 압도적으로 많기는 한데, 뭐, 저런 악에 받친 시선이야 이젠 너무 익숙해서 말이야.

그래봤자 레인저스보다는 훨씬 덜하기도 하고. 그쪽은 진지하게 저주를 퍼붓는데. 그거랑 비교하면 다저스는 훨씬 신사적이지.

“스트라이크!”

난 그리 신사가 아니지만.

이번 이닝 첫 타자는 다시 엔리케 헤르난데스. 키케 에르난데스라고도 하지.

그는 비장한 얼굴로 타석에 올랐고, 헛스윙에도 여전히 의지가 투철해 보였지만···

‘죄송합니다만, 이제 2페이즈가 시작이라서요. 다음에 다시 오십시오.’

상대 타자의 감정과 상관없이, 난 이미 스위치를 올렸다. 슬슬 올려야겠더라고.

“스트라이크!”

2구는 몸쪽으로 낮은 포심.

무릎 높이로 훅 들어온 패스트볼에 타자의 양 다리가 약간 흔들거렸다.

릴리스 포인트를 바꿔, 깊게 넣어서 던져서 그런지, 더 가깝게 느껴진 거겠지.

“파울!”

“파울!”

이미 자세가 무너졌는데도 타자는 연달아 커트하며, 어떻게든 승부를 질질 끌려고 했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5구째 던진 서클 체인지업에 여지없이 배트가 헛돌았다.

생각보다 조금 더 길게 끌렸지만 어쨌든 삼진 아웃.

“You Suck!”

역시나 울리는 목소리.

레이더스가 이래서 좋아.

퍼펙트고 나발이고 아주 시끄럽구만. 다저스는 눈치보고 목소리가 작아지던데.

다른 투수들은 모르겠지만, 최소한 나는 시끄러운 쪽이 오히려 더 좋다. 내가 잘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이정표 같으니까.

“아웃!”

뒤이어 5번타자 맷 켐프가 제법 큼직한 타구를 때려냈지만, 외야 플라이로 끝났다.

그래도 타이밍을 잃지 않고, 제대로 스윙했네. 조심해야겠어.

마지막은 6번 타자 코디 벨린저. 여전히 나른한 눈빛을 한 녀석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묵직한 발걸음으로 타석에 올라섰다.

제대로 준비가 된 모습.

그것이 왠지 조금 꺼림칙하게 느껴져서 슬쩍 브루스를 보니, 같은 생각인지 녀석도 조심하라는 듯 사인을 보냈다.

“스트라이크!”

그럼에도 과감하게 몸쪽으로 하나 넣어 봤지만, 타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공을 차분하게 고르는 것처럼.

“볼!”

그것이 수상해서 일부러 하나를 빼봤는데도 여전한 태도. 허나 날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대로 3구째.

인터벌 속도를 유지하며, 바깥쪽으로 낮게 박히는 너클 커브를 조준해서 던진 순간.

“이예에에에에에에!”

툭 가져다 댄 스윙이 공을 맞혀냈다. 음, 보아하니 구종을 노린 것 같지는 않고, 바깥쪽만 죽어라 기다렸던 것 같구만.

굉음이 터져나오는 경기장.

2루수의 머리를 살짝 넘기며 툭하고 떨어진 타구는 당연하게도 안타였다.

앞서 류영진 선배와 마찬가지로 5회 투아웃에 나도 얼음판이 깨져버린 거고.

‘역시 퍼펙트는 좀 힘들었나보네.’

어쩔 수가 없는 거지.

진짜 퍼펙트하는 날은, 제드 라우리가 저걸 잡았을 테니까. 아니면 타자가 뭘 노리든지, 그냥 삼진으로 조졌던가.

오늘도 날이 아닌가 보구만.

저쪽은 노히터가, 나는 퍼펙트가 깨졌으니, 서로 비슷한 입장이 되어버린 셈이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내가 앞선다.

“스트라이크 아웃!”

“You Suck!”

You Suck은 우리 쪽이 더 많이 했다는 것. Ryu Suck이랑은 다르지. 그리고···

‘빠따도 내가 더 나을 예정이고.’

퍼펙트가 깨진 것은 아쉽지만, 마지막, 7번타자 로건 포사이드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이닝을 끝마쳤고. 그것으로 배신을 징벌할 시간이 왔다.

####

“후우···”

아까 전, 아쉽게 내 앞에서 끊겼던 공격에 잠시 내려놓았던 배트를 다시금 조심스럽게 정비했다.

애인을 어루만지듯, 아주 부드러운 손길로. 오늘도 잘 부탁하자. 넌 그냥 공을 어떻게든 맞히기만 해. 나머진 나랑 두 다리가 할 테니까.

“쟨 투수가 왜 타격 준비하는 거에 더 공을 들여?”

“퍼펙트 중일 때는 정작 긴장 하나도 안 하더니, 타격하기 전에는 더 긴장하네.”

그런 내 모습을 동료들은 미친놈처럼 봤지만, 그마저도 스콧 에머슨보다는 나았다.

내가 류영진 선배에게 배신감을 느꼈듯이, 그 역시 나를 향한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었으니까.

“Go, 제발 그러지 마라. 지금이라도 부탁한다. 우리 서로 이야기 잘 됐었잖아? 갑자기 왜 지랄이냐고.”

“남자에겐 때때로 위험한 걸 알면서도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는 법이지요. 지금이 바로 그 일입니다.”

“개소리하지 말고!”

“Go, 위험할 지도 모르니까, 보호장비부터 일단-”

“괜찮습니다. 아시다 시피, 상대 투수, Ryu는 제구가 좋은 투수라서, 데드볼의 위험은 별로 없을 거예요.”

이번에도 타격코치가 바리바리 싸들고 온 온갖 종류의 보호장비 역시, 필수적인 것을 제외하곤 가볍게 거절한 뒤.

다시 상대 투수가 마운드로 올라온 그라운드로 나아갔다.

그래, 상대 투수다.

지금만큼은 선배님이 아니야.

그러니까, 너도 요동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 내 안의 유교드래곤.

난 선배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게 아니라, 한 팀의 선수로서 적 투수에게 맞서는 거니까.

유교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 역시 일종의 ‘충’이라고 할 수 있지. 그래, 맞아, 개소리야.

구단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지극히 내 사적인 감정에 의거해서 행동하는 거니까.

충이고 나발이고 없지.

‘왠지 가슴이 좀 벅차네.’

단단히 준비하고, 작정하고서 타석에 오를 걸 생각하니, 괜히 흥분되는군. 아주 재밌어.

내가 모르는 투수보다는, 기왕이면 익숙한 사람에게 타격하는 것이 더 즐거운 일이긴 하겠지.

이닝이 시작되고, 타석에 오르니, 상대 투수는 가볍게 눈인사를 했지만, 나는 그저 타격폼을 취했다.

그러자 기묘하게 변하는 표정. 화난 건가? 어?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니, 그쪽이 먼저 시작하셨잖아요.

순간 당황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역시 좀스러운 사람은 아니었는지, 딱히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뭐랄까··· 웃는데?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는 듯한 느낌이 확 오는군.

입꼬리가 비바람이 치는 바다처럼 넘실거리기도 했고.

‘이젠 내가 화가 나네.’

어? 화나네?

아니, 먼저 신사협정일 파기해놓고, 날 비웃기까지 해? 아무리 동경했던 사람이라도 이건 아니지.

내가 얼마나 진심인데.

알아, 나도. 내 타격폼이 조금··· 많이 이상하다는 거. 이 덩치에 어울리는 폼이 아니라는 것도 너무 잘 안다.

예전엔 몰랐는데, 작년에 이렇게 빠따질 한 다음 하이라이트 영상 보니까, 진짜 X같이 구리긴 하더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대놓고 비웃다니. 분노에 더욱더 배트를 쥔 손에 힘을 끌어올렸다

사실 이래봤자, 근본부터 틀려먹어서 타구의 질이 좋아진다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내 의지를 드러낸 거지.

그리고 시작된 타석.

“스트라이크!”

날아온 초구를 향해 배트를 휘둘렀지만, 아쉽게도 닿지 않았다. 살짝 어긋났네. 딱 좋았는데.

내 진지한 타격에 상대 투수 역시 이제야 내가 진심이라는 걸 깨달은 듯 표정이 달라졌다. 아주 엄격하고 근엄해졌지.

내가 바라는 건 절대로 안 된다는 것처럼. 허나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다.

“볼!”

왠지 브레이킹볼이 올 것 같아서, 가만히 참았는데, 예상처럼 변화구로 낮은 커브가 들어왔다.

저쪽도 진심이군.

투수타석에 변화구라니.

물론 나도 배신감에 찌들어서 작정하고 던지기는 했으니, 서로 도찐개찐이긴 하지만.

내가 한 구를 걸러내자, 조금 놀란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파울!”

곧이어 3구를 아슬아슬하게 쳐내자 더욱더 짙어졌고.

“너, 제정신이냐? 아니, 피칭에나 집중하지 그래?”

“꺼져, 난 이쪽으로도 진심이니까.”

“미친놈이라더니, 그레인키 같은 유형이었구만. 세상이 말세야.”

포수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굴었지만, 난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이제 투 스트라이크 원 볼.

포수에게 대차게 받아치기는 했는데, 솔직하게 말하면 X나게 쫄렸다.

이렇게까지 해놓고 삼진 당하면 내 스스로 너무 쪽팔릴 것 같은데···

아니, 좀 그렇잖아.

작정하고 타격해놓고, 정작 꼴사납게 물러나면, 얼마나 비웃겠어.

‘···솔직히, 칠 수 있나? 작정하고 제대로 던지면.’

아니, 없다.

파울을 치긴 했지만, 그건 운이 좋았어. 내가 요상하게 잘 맞히기는 하지만, 오늘 저쪽도 폼이 좋아서, 공이 너무 좋아. 제대로 보지도 못했거든.

그러니 진지하게 승부를 벌인다면, 내가 공을 맞출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허무하게 당하고 싶지도 않고.

‘그러면 남은 방법은···’

도박뿐이지.

재빠르게 눈동자만 굴려서 포수와 투수를 확인했다. 당황한 것 같기는 해도, 약간은 재밌다는 반응이네.

예상 못하고 있군. 나쁘지 않아. 하긴, 나라도 예측 못하지.

‘간다.’

준비는 끝났다. 다시 배트를 꽈악 틀어잡은 뒤, 공을 기다렸다, 언제라도 스윙을 낼 것처럼.

그러자 날아온 4구.

살짝 높게 찍어서 던졌는데, 난 스윙을 하지 않았다.

힘껏 잡은 자세를 풀고, 잽싸게 동작을 바꿔 배트를 일자로 눕혔을 뿐. 그래, 번트지.

“이런 미친-”

투 스트라이크에서 번트.

파울이 되는 순간 삼진이다.

번트를 댄 타구가 파울라인을 나갈지, 아닐 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기에, 웬만하면 안 하지.

하지만 나는 어쩔 수가 없다.

어차피 강공으로 가도 삼진일 확률이 높은데, 그보다는 그냥 기습 번트 대고 하늘에 맡기는 게 더 낫지.

‘됐다!’

가볍게 3루 방향으로 굴러가는 타구. 저게 어디까지 굴러갈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현재까지는 페어다.

거기다 그라운드도 당혹감에 몸부림치고 있었기에, 대처가 늦었을 때, 나는 즉각적으로 1루를 향해 달렸다.

“이런 씹-”

포수의 욕설. 그리고 투수의 어이가 없어 보이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는데도. 별다른 콜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 말은 곧···

“세이프!”

타구가 페어라는 뜻이지.

뒤늦게 송구가 날아들었지만, 내 발이 그보다 세 발자국은 더 앞섰다.

“미친 새끼···”

“Go, 왜 그러는 거야 대체.”

안타치고 나가면 대부분 이런 반응이지. 1루수는 욕하고, 주루코치는 절규하고.

“Hell Yeah!”

“이게 우리 Suck이다!”

“엉엉, 쟤가 우리 에이스에요! 너무 멋져!”

“Suck은··· 신이야!”

레이더스는 Hell Yeah.

“야이 X발새끼야!”

“You Son of-”

홈팀 팬은 해변의 아들.

당연한 래퍼토리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 이내 대단하다는 듯 엄지를 추켜세우는 상대 투수, 아니, 류영진 선배의 얼굴을 보니, 속이 후련해졌다.

선배는 사람 잘못 건드린 겁니다. 아시겠어요? 얌전히 참으려고 했더니, 기어코 슈퍼소닉을 꺼내게 만드는군.

그러니 내 잘못이 아니다.

다 류영진 선배 때문이야.

선배가 날 먼저 도발했잖아.

난 오늘 얌전하려고 했어.

그러니까, 금방이라도 날 찢어 죽일 것처럼 보지 마세요, 코치. 선수가 안타쳤으면 축하를 해줘야지, 너무하네.

‘덕아웃 들어가면 한소리 제대로 듣겠구만.’

막상 하고 나니까 속은 시원한데, 훗날이 두렵네. 계속 이대로 1루에서 있고 싶다. 여기 조용하고 좋은데.

그렇게 생각했지만, 나는 다시 홈으로 돌아가야 했다.

1번타자 마커스 시미언의 진루타 이후, 2번타자 맷 채프먼이 큼직한 안타를 쳐냈으니까.

“제발 뛰지 좀 마아아! 이 미친놈아!”

난 스콧 에머슨의 절규 속에서 나는 다시금 질주를 선보이며 홈으로 들어왔고 말이야.

“이런 쓰레기야!”

“같은 나라 선배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진짜 X나게 빠르네!”

내가 득점까지 올리면서, 류영진 선배에게도 칼을 꽂았지만, 코치한테도 비수를 꽂아버렸네.

“이제부터는 그냥 피칭에만 집중할게요. 약속해요.”

덕아웃으로 돌아온 뒤, 그를 달래기 위해, 진심을 담아 약속했지만.

“Suck 네가 하는 말은 이제 단 하나도 안 믿을 거니까, 알아서 해.”

앞선 약속 파기와 이번의 질주로 그의 마음속에서 난 양치기 소년이 되어버린 건지, 스콧 에머슨의 눈에는 오직 불신만이 가득했다.

“그럼, 계속 뛰죠, 뭐. 스콧이 절 못 믿겠다는데. 그러면 저도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게요.”

“이런 개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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