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자, 4구, 헛스윙! 류영진! 4번타자, 크리스 데이비스를 삼진으로 잡아냅니다!
-아~ 오늘 류영진 선수도 공이 아주 좋죠? 지금 체인지업이었는데, 제대로 속았네요.
-흔히 고유석 선수의 체인지업이 리그 최고로 평가받는데, 류영진 선수 역시 명품의 체인지업을 자랑하죠.
첫 시작점을 지나, 다저 스타디움에서의 경기가 계속해서 이어졌을 때. 지구 반대편의 분위기는 어쩌면 현지보다도 더욱더 달아올랐다.
중계진 역시 웃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텐션을 높였고 말이다.
한국인 메이저리거가 각각 팀의 선발투수로서 맞대결을 벌이는 모습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최소한 한국에 한해서만큼은 웬만한 포스트시즌 경기보다 더 중요했으니까.
그렇기에 경기 전부터 이어졌던 관심은 당연히 본게임에서도 불이 붙을 수밖에 없었고.
[빠중)류뚱 2회 초 삼자범퇴ㅅㅅㅅㅅ]
-삼진도 하나 더 잡았는데, 오늘 느낌 좋은 듯?
└ㅇㅇ 폼 좋아 보임
└딱 퀄스만 해도 좋겠다.
└난 조금 욕심 더 내서 6이닝 2실점 했으면 좋겠음
거기다 시즌 첫 등판에서 아쉬운 성적을 기록하며, 팬들의 걱정을 받던 류영진의 기세가 좋은 것도 흥겨운 분위기에 한몫했다.
비록 충격적인 시즌을 보내며, 최고의 스타가 된 고유석이긴 하나, 류영진을 응원하는 목소리 역시 적지 않았으니까.
[킹유석 입장]
-류 다음 썩이라니. 혹시 이게 그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야스인가?
└아ㅋㅋㅋ 킹유석이랑 류뚱이 선발 맞대결 벌이는 거 보는 게 야스가 아니면 뭐가 야스임zzz
└선생님, 이건 야스가 아니라, ‘야구’입니다. 야스는 서로 마음이 맞은 남녀가 침대 위에서···
└닥쳐 ㅅㅂ새끼야
그런 류영진의 호투에 이어, 곧바로 고유석이 마운드에 오르는 모습은 경기를 지켜보던 수많은 팬들이 부르르 떨게(?) 만들었다.
인터리그 매치업이야 이미 예정되어 있었으니, 혹시나 하는 상상이야 했었지만. 큰 기대는 없었다.
약간 일정이 어긋날 것이라는 예측이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혹시나 하는 상상이 실현돼, 마치 두 선수가 서로 교체를 하듯 번갈아서 마운드에 오르고 있으니.
당연하게도 팬들 입장에서는 바지가 흥건해지는 것을 참지 못할 수밖에.
-스트라이크 아웃! 엔리케 에르난데스를 4구째 삼진으로 잡아내는 고유석! 위닝샷은 너클 커브였습니다.
-작년 올스타전에서 깜짝 등장했던 구종인데, 이젠 리그 최고로 꼽히는 서클 체인지업과 함께 당당히 주력구가 되었습니다.
-상대하는 타자 입장에서 저렇게 날아오는 공은 솔직히 어떻게 할 수가 없죠.
그리고 고유석의 기세 역시 날카롭기도 했고 말이다.
개막전부터 거칠게 내뿜던 기세를 오늘 경기에서도 역시 당당히 선보이는 고유석의 모습은 딱 사람들이 기대했던 모습이었다.
4번타자, 엔리케 에르난데스를 삼진으로 잡은 순간.
-You Suck!
-하하, 오늘도 여지없이 구호가 들려오는 군요. 흔히 레이더스라고 부르죠?
-예, 고유석 선수의 열성팬으로 유명한 팬덤인데. 고유석 선수의 모든 등판 경기에서 저렇게 열정적인 응원을 보여주곤 합니다.
-원래는 미식축구 팀인 오클랜드 레이더스의 팬들이었는데, 고유석 선수의 매력에 홀린 것으로도 유명하죠.
큼직하게 울리는 레이더스의 챈트 역시 기대했던 그대로였고 말이다.
[레이더스성님들 오늘도 오셨네zzz]
-고유석 최면어플이라도 있음? 무슨 광신도 수준ㅋㅋㅋ
└킹갓제네럴엠퍼러유석의 매력이 최면 수준이라는 뜻이지~
└항상 궁금했던 건데, 저거 욕하는 거임, 아니면 고유썩 이름 부르는 거임?
└둘 다임. 이중적인 의미ㅇㅇ
└태극기 들고 오클랜드 가면 레이더스 형님들이 환영해줌?
└목마 태워줌ㅇㅇ
└응원 분위기 보면 고유석 경기 직관 ㅈㄴ 가고 싶은데 오클랜드인게 문제네
매 경기마다 얼굴을 비추는 만큼, 한국에서도 레이더스는 유명한 팬덤이었다.
애초에 한번 보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코스튬을 한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들이 내뿜는 광적인 열기는 묘한 뿌듯함을 주기도 했다. 한국이 메이저리거가 현지에서 저토록 광신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것을 실감시켜 줬으니까.
위험하기 그지없는 오클랜드 여행을 상상하는 사람들도 생겨날 정도로.
그렇게 인터넷과 현지, 한국, 모두가 축제와 같은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2회 말 역시 빠르게 지워졌다.
-스트라이크 아웃! 맷 켐프까지 삼진으로 잡아냅니다!
-이번에도 위닝샷은 하이 패스트볼이었군요.
-구속은 느린 편이지만, 구위가 대단하기로 유명한데, 고유석 선수가 즐겨 사용하는 패턴입니다.
-높이 뜬 타구 중견수가~~ 잡았습니다. 쓰리아웃! 또다시 삼자범퇴! 오늘도 여전한 호투를 이어가고 있는 고유석입니다!
-고유석 선수에게 삼자범퇴는 이젠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됐습니다.
맷 켐프와 코디 벨린저가 삼진과 외야플라이로 물러나며, 2회 말 역시 삼자범퇴로 막을 내리자.
경기를 지켜보던 팬들과 시청자, 그리고 네티즌들 역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부디 지금의 분위기가 쭉 이어지길 바라면서.
[류,썩 오늘 둘 다 괜찮네]
-썩이야 원래도 잘하는데. 류뚱도 계속 잘했으면 좋겠다
└이번 경기가 진짜 중요함. 시즌 첫 경기 말아먹었는데, 여기서 또 개판나면···
└류뚱 이번 시즌 끝나고 FA지?
└ㅇㅇ 그래서 올해 잘해야 됨. FA 한탕 해야지.
그렇게 3회에 접어든 경기.
고유석이야 더 말할 것도 없지만, 류영진은 올해를 끝으로 FA를 맞이하기에, 더욱더 중요한 시즌이었기에.
팬들은 부디 계속 호투를 이어가길 바라며, 새로 올라오는 류영진을 지켜봤지만, 몇몇은 조금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고유석 정신병 발동 가냐?]
-투수타석 올 텐데, 고유석 류영진한테도 지랄하려나? 은근히 즐기던데.
└빠따?
└ㅇㅇ 보니까 되게 좋아하더만. 오늘도 그러는 거 아님?
└가능성 없진 않지.
└선배한테 그 지랄하면 진지하게 미친놈 아니냐?
└구단에서도 반대하는 눈치고, 필리스 전에서도 초반엔 얌전했으니까, 그냥 넘어갈 듯
경기가 3회에 접어들면서.
투수타석이 다가왔으니까.
[류뚱이랑 유썩이랑 빠따는 누가 더 낳음?
-피칭도 피칭인데 이쪽도 은근 궁금하네. 이제 투수타석 오잖아?
└낳긴 뭘 낳아.
└빠따력은 솔직히 류가 더 나음. 썩은 빠따라기보다는 주루지ㅇㅇ
└고유석이 삼단 분리 타법 보여주면 류영진 얼탱이 나갈 듯ㅋㅋㅋ
└메쟈에서 그런 흉한 걸 볼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ㅋㅋ
└고유석이 류영진한테 번트 대고, 도루까지 하면 게시판 터짐?
└한국 인터넷 자체가 터짐
└꼰대들한테 개쌍욕 먹을 듯 선배한테 뭐하는 짓거리냐고.
두 선수 모두 타격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었기에, 팬들은 은근히 기대감을 품었다.
특히 투수의 정신을 요상하게 흔드는 것으로 유명한 특유의 타격과 주루 플레이를 가진 고유석이 이번에도 그것을 보여줄지 궁금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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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어, 이만하면 멀쩡하겠네.”
“이게요? 이게 멀쩡해요? 갑갑해서 죽을 것 같은데··· 그냥 포수장비 차고 나가라고 하시죠?”
“할 수만 있다면, 그것도 좋긴 하겠지.”
공수교대가 끝나고, 새로운 이닝이 시작되기 전, 난 스콧 에머슨과 타격 코치에게 붙잡혔다.
규정 내에서 타자가 찰 수 있는 모든 보호대로 몸이 둘둘 말렸지.
‘아니, 보호대가 아니라, 개한테 씌우는 입마개 수준인데?’
이런 식으로 내 타격을 막으시는구만. 너무하네. 왜? 아예 포승줄로 양 팔이랑 다리를 묶어버리지?
불퉁한 표정으로 투덜거렸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스콧 에머슨은 더욱더 눈을 부릅떴으니까.
“절대 아무것도 하지마. 절대로! 절대로! 또 개짓거리 하면, 오늘은 5이닝도 전에 교체해버릴 거야!”
음, 인질이 제법 쎄군.
5이닝 전에 교체라니.
그런 협박까지 할 정도로 코치는 내 타격을 막고 있었는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억지로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알았어. 최대한 피칭에만 집중할 게요. 대신 오늘은 리미트 없는 겁니다?”
“그래, 무릎이나 발목이 돌아가는 것보다야 차라리 그게 낫지.”
결국에는 내 확답을 받아낸 스콧 에머슨은 그제야 한시름 덜은 듯 흡족하게 웃으며 멀어지자, 8번타자라서, 이번 이닝 선두타자로 나가기 위해 준비하던 브루스가 슬그머니 다가와 속삭였다.
“Suck 너 어차피 타격할 생각 없지 않았어? 같은 나라 선배라서.”
“쉿. 닥치고 있어, 이 쁘락치야.”
그래, 사실 나도 웬만하면 타격을 자제할 생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예쁜 모양새가 안 나오더라고.
진지하게 타격했다가 만약에 결과가 안 나오면, 그건 그거대로 X신 같고, 선배의 노련함에 밀린 고유석 같은 소리를 듣겠지만. 잘해도 문제잖아.
작년 메츠랑 필리스전처럼 막 뛰어다녀서 베이스도 훔치고, 득점도 하고, 타점도 낸다면. 얼마나 그림이 이상해?
그래서 내심 어느 정도는 포기한 상태였는데, 이거이거, 알아서 입질이 와버렸구만. 덕분에 긴 이닝을 보장받아 버렸어.
그걸 알아차린 브루스에게 살짝 엄중한 표정을 지으며,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니, 녀석도 그 이상 말하지 않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참 새로운 경험이기는 하네.’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이닝, 브루스를 먼저 내보낸 뒤, 덕아웃 바깥에서 내 차례를 기다렸는데, 뭐랄까, 조금 다른 의미로 기분이 이상했다.
류영진을 상대로 내가 상대타자로서 타석에 오르다니. 이건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니까. 이런 일이 다 있네.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진짜 별일이 다 있다니까?
심지어 다음 이닝에는 내가 투수로, 류영진 선배가 타자로 나올 텐데, 그때도 좀 기분이 이상하겠어.
“스트라이크 아웃!”
묘한 감정에 생각에 잠긴 사이, 브루스는 삼진으로 물러났다. 굿잡.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내가 뭘 어쨌다고? 수고했다. 포수나 잘하자.”
“그래, 그래야지··· 난 포수니까.”
그래, 넌 포수다.
포수는 타격을 못 해도, 포수 일만 잘하면 반, 아니, 70%는 먹고 가는 거니까, 풀 죽지 마라.
대충 브루스를 위로(?)해준 뒤, 타석에 오르자, 괜시리 헛웃음이 나왔다. 진짜 적응 안 되네.
상대투수, 류영진 선배 역시 그건 마찬가지인 건지, 왠지 모르게 표정이 누그러졌다.
‘오늘 폼이 좋긴 하던데.’
느슨하게 배트를 잡으니,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들어온 초구는 느슨하지 않았다.
“스트라이크!”
날 못 믿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공 자체가 좋네. 물론 난 타자가 아니라서, 쥐뿔도 모르긴 하지만.
이 정도면 진지하게 해도 맞추기는 좀 어렵겠어. 뭐, 어떻게든 굴리기만 하면, 1루 베이스 밟을 자신은 있지만.
‘지금 분위기가 조금 더 길어질지도 모르겠네.’
그나마 큰 크리스랑 작은 크리스가 한 방이 있으니, 타이밍만 잘 잡으면 또 모르겠지만.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아웃.”
기세가 쉽게 떨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얌전히 서 있으니, 공이 순식간에 지나갔고, 주심은 조금 나직한 목소리로 삼진을 선언했다.
그대로 다시 뒤돌아 덕아웃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니, 스콧 에머슨은 아주아주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는데.
“You Suck!”
응? 뭐야?
갑자기 You Suck? 나한테?
혹시 장난치는 건가?
이상하다 싶어서 관중석을 훑어, 레이더스를 바라보자, 그들은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하··· 저쪽이었구만.’
그런 반응에 다시 다른 곳을 훑으니,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다저스 팬들이 보였는데. 나랑 눈이 마주치니 다시금 소리쳤다.
“Ryu Suuuuuuck!”
“Ryu Suck!”
그래, 이 양반들이었어.
묘하게 평소와 발음과 발성이 다르다 싶더니, 유썩이 아니라 류썩이었군.
고개를 돌려 흘끔 마운드를 확인하니, 류영진 선배 역시 피식 웃고 있었다.
‘재밌어 보였나보네. 하긴, 당하는 입장에서 꼴 받는 것만 빼면 제법 흥겹기는 하지.’
아무래도 내가 삼진 잡을 때마다 레이더스가 You Suck이라고 하는 게 재밌어 보였나봐.
그래서 나한테 되돌려주려고 한 것 같은데, 좋아, 그 도전, 기꺼이 받아들이지. 내가 오는 도전을 거부하는 사람이 아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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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이크 아웃!”
“You Suck!”
“Hell Yeah! 이게 진짜 유썩이지!”
3회 말.
다시 마운드에 올라, 타자를 거칠게 몰아붙이며 삼진을 올리자, 이번엔 조금 익숙한 목소리의 유썩이 들렸다.
역시, 짝퉁이랑 다르군.
이게 정품이지. 발성부터 다르잖아? 유썩은 목으로 내는 게 아니라,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진심을 담아 토해내는 게 정통이다.
다저스 팬들의 흉내와는 차원이 다르지. 자기들의 것을 빼앗겼다는 생각에 레이더스가 더욱더 크게 소리치기도 했고.
‘타자는 좀 억울하겠네.’
7번타자 로건 포사이드는 괜히 휘말려서 직통으로 들었네. 뭐, 어차피 삼진당하면 무조건 듣기는 하지만.
약간의 경쟁심이 더해지긴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분위기 자체는 오히려 조금 더 흥겨워졌다.
양 팀 팬들 간의 은근한 자존심 싸움이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내 재미도 재미지만, 팬들 기도 살려줘야지.’
그게 진짜 에이스의 역할이니까. 그렇기에 씨익 웃으며 다음으로 올라온 타자를 반겨줬다.
오스틴 반스.
수비력이 뛰어난 백업 포수로서, 작년 꽤나 준수한 타격을 선보이며, 다저스 팬들의 기대를 산 선수인데, 그리 위험한 타입은 아니다.
‘그리 어렵지는 않지.’
초구는 바깥쪽 포심 패스트볼. 최대한 집중력을 유지해서 마지막까지 정확하게 조준했다.
“스트라이크!”
그러자 가만히 지켜보면서 스트라이크. 딱 걸쳤네. 오스틴 반스는 괜히 주심을 봤지만, 그는 끄떡도 안 했다.
딱 집어넣었는데. 뭘 보고 그러나. 나한테 집중해야지?
“스트라이크!”
괜히 미련을 가지다, 타이밍을 놓친 오스틴 반스는 이번에도 배트를 내지 못했다. 다시 포심 패스트볼. 오늘 포심이 좀 괜찮네.
‘88마일이라. 힘을 별로 안 들여도 구속이 잘 나오는구만.’
컨디션이 좋긴 하니까.
공에도 힘이 잘 실리네.
그것으로 투 스트라이크.
목 끝까지 다가온 삼진에 방금 전 조롱을 당했던 동료가 떠오른 듯 오스틴 반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침착하게 호흡을 고르며, 최대한 본인 페이스를 잡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솔직하게 말하면···
“스트라이크 아웃!”
그가 아무리 집중하더라도 대세에 큰 지장을 주지는 못 한다.
‘스윙의 가동 범위가 잘 안 나오는 것 같은데, 장타는 걱정 안 해도 되겠네.’
계속해서 삼진 아웃.
흘끔 관중석을 보니, 마치 기를 모으듯 꾸욱 목소리를 눌러 담은 레이더스가 목청을 터트렸다.
자존심 싸움에서지지 않겠다는 것처럼. 사실, 한 줌 밖에 안 되는 레이더스와 경기장을 가득 채운 다저스이니,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지만.
“Youuuuu Suck!”
“You The Fucking Suuuuuuuuuuck!”
우리 쪽 다윗의 전투력이 죽여주지. 어우, 누가 보면 우리가 홈팀인 줄 알겠네. 무슨 사자후도 아니고··· 쩌렁쩌렁 울리네, 울려.
그 엄청난 목소리에 조금 기가 질린 건지, 몇몇 다저스 팬들이 고개를 젓기도 했다.
정품의 맛이 어떠냐? 죽이지?
그런 반응에 클클거렸을 때, 타석에는 새로운 타자가 올라왔다. 이제 9번인데. 뭐, 누군지 뻔하지?
‘진짜로 기분이 이상하다니까.’
타석에 류영진. 마운드에 나라니. 방금 전 서로 반대였을 때도 뭔가 좀 이상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네.
한편으로는 두근거리기도 했다. 동경했던 ‘투수’를 삼진으로 잡아볼 기회가 몇 번이나 있겠어?
‘자, 선배님도 신사적으로 합시다. 타격 잘하시는 거야 아는데, 저도 양보했잖아요?’
앞서 내 타석에서 이미 신사협정을 맺어뒀기에 위험은 덜하지. 그렇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초구를 던졌는데···
“파울!”
냅다 휘두르시네.
배신감이 망치처럼 뒤통수를 후려쳤다. 단순히 장난친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이건 작정하고 휘두른 거야.
힘에 밀려서 터무니없는 파울이 되기는 했지만, 결과가 나쁜 거지, 의도는 뻔했다.
‘아니··· 어떻게 이런···’
배신감에 몸이 절로 떨렸다.
나는 선배를 배려하는(?) 의미에서 얌전히 서 있다가 내려갔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요? 예?
그런 의미를 담아 바라봤지만, 류영진 선배는 그저 아까 전처럼 옅은 미소만 띠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2구를 던졌다. 부디 그저 장난이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스트라이크!”
역시나 이번에도 제대로 된 풀스윙이 나왔다. 비록 이전처럼 타구를 맞추지는 못했지만, 힘이 확실하게 실렸다는 건 알 수 있지.
‘선배의 뜻, 아주 잘 알겠습니다.’
신사협정은 결렬됐다.
그래, 전쟁터에서 그런 걸 바라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였어. 내가 너무 순진했군. 아니, 프로답지 못했던 거야.
그래도 다행이네.
선배가 먼저 하셨으니. 나한테도 명분이 생겼으니까.
“스트라이크 아웃!”
일단 삼진으로 잡았다.
먼저 배신하셨으니, 괘씸죄로 설렁설렁 하지 않고, 다른 타자를 대하듯 철저하게 잡았지.
“You Suck!”
정말이지 가슴이 아프군요. 동경했던 사람에게 먼저 배신을 당하다니. 이거 듣고 반성하십시오.
내 마음을 대변하듯(?) 류영진 선배에게도 우렁차게 유썩을 먹여준 레이더스에 홈팬들 역시 몸이 닳은 듯 움찔거렸다.
그들도 You Suck, 아니, Ryu Suck이 마렵다는 표정인데, 레이더스한테 안 좋은 물이 들기 시작했구만. 이래서 친구를 잘 만나야 해.
“Suck 너 표정이 왜 그래? 무슨 큰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아니, 선배에게 아주 좋은 가르침을 배웠거든. 그래서 그래.”
“가르침? Ryu 말이야? 타석에서 별말 안 하던데.”
“있어, 그런 게.”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와, 벤치로 향했다. 앉아서 쉬는 것 말고도 다른 목적이 있었으니까.
“타르 어딨냐. 배트에 바르는 파인타르.”
“저기 있네, 근데 그건 갑자기 왜?”
“필요해서. 손에다 바르는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라.”
이미 타격을 포기했기에, 깨끗했던 배트에 미끄럼 방지용 파인타르를 치덕치덕 발랐다.
마치 경기 전에 손톱을 다듬었던 것처럼, 타격을 준비하기 위해서.
“Go, 혹시 지금 네가 뭐하는 건지 좀 물어도 될까?”
“준비하는 중이죠.”
“그러니까, 내 말은 Go 네가 배트를 왜 준비하느냐고, 우리 약속한 거 아니었어?”
내게 목줄을 채우면서 한결 마음이 편안해 보였던 스콧 에머슨은 덜덜 떨리는 눈동자로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배운 것을 그에게도 가르쳐주기 위해서.
“약속은 언제든지 깨질 수가 있는 것이죠. 방금 전, 그걸 배우고 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까 전, 저와 코치 사이에 있었던 약속도 파기입니다. 물론 약속받은 긴 이닝은 그대로 유지될 예정이니, 코치께선 구경이나 하십시오.
“이 개자식아!”
스콧 에머슨은 결국 참지 못한 건지, 우렁차게 욕설을 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