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다저스 팬들은 고유석에게 익숙했다. 야구팬이라면 작년 내내 들어봤던 이름이니까.
거기다 서로 리그가 다르기는 하나, 어쨌든 같은 캘리포니아 주에서 나온 슈퍼스타이기에 더욱더 익숙할 수밖에 없다.
[#dodgers]
[Go가 1차전에 등판한다고 하던데. 걔가 진짜 그렇게 잘하나? 구속은 평범하더만.]
└작년 성적 보고와. 미친놈이더라.
└ERA 0.50 393K, 이거면 설명 끝이지. 무슨 데드볼 시대에서나 볼 법하네.
└WAR이 무슨··· 남들 10년 치를 1년 만에 쌓았네.
└다른 거 다 떠나서 난 좀 마음에 들더라. 자이언츠한테 퍼펙트 했잖아. X신들은 그게 딱 어울리지.
└애너하임이면서 LA 같다붙이는 놈들도 대차게 깨졌던데? 올해 개막전부터.
└솔직히 우리 팀 선수였으면 유니폼 한 10장쯤 가지고 있었을 거야.
└구속은 느리지만, 피칭도 시원시원하잖아? 투수는 저래야지.
그리고 의외로 호감도 역시 제법 높은 축에 속했다. 일단 현시점에서 정점에 오른 투수라는 것도 크거니와.
[#Dodgers]
[오클랜드니까, 아마 연장 계약은 못할 텐데. FA로 우리가 데려오면 딱이겠네.]
└좋긴 하지. 걔 FA 나올 때쯤이면 커쇼 은퇴하거나, 하기 직전일 텐데. 에이스 세대 교체하기 딱 좋겠지.
└난 다른 거 다 빼놓고 자이언츠한테 퍼펙트 하는 거 보고 반했어.
└Park도 우리 팀에서 잘했고 Ryu는··· 뭐, 초반엔 잘했으니까. Suck도 다저스 오면 잘하겠지.
└솔직히 걔도 우리 팀 말고는 딱히 갈 곳 없지 않나? 지금 성적 유지하면서 FA 된다 치면, 몸값이 상상을 초월할 텐데.
└선택지가 얼마 없기는 하지. Korean들은 우리 팀에 애정이 크다고 하니까, 그중에서도 우리가 가장 가능성이 높고.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소속 선수라는 특수성도 존재했으니까.
오클랜드에 천년만년 남지는 않을 테니, 고유석이 언젠가 자신들의 품안에 안길지도 모른다는 것은 사실 빅마켓 팀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본 상상이었고. 그건 다저스 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 지금 당장 퍼포먼스만 놓고 봤을 때, 일단 영입할 수만 있다면 두 팔 벌려 기쁘게 환영해야 할 선수잖은가?
거기에 비교적 LA 다저스의 경우 Korea 출신 선수들에게 익숙하고, 한국에서도 다저스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좋으니. 가능성이 가장 높다며 벌써부터 김칫국을 드링킹하는 이들도 많았고 말이다.
[#dodgers]
[이참에 한 번 제대로 봐두는 것도 좋겠네. 언젠가 우리 새끼가 될지도 모르는데. 미리 눈도장을 찍어야지.]
└야유 같은 건 웬만하면 자제하자. 나쁜 이미지가 박힐 수도 있잖아.
└미래에 다저스의 에이스가 될지 모르는 선수한테, 괜히 안 좋은 이상을 남길 필요는 없긴 해.
└다른 거 다 떠나서, 그냥 피칭 자체가 좀 기대된다. 저런 선수를 살면서 몇 번이나 보겠어? 이번 기회에 직접 봐야지.
그렇기에 고유석의 다저스전 등판은 의외로 다저스 팬들에겐 즐겁게 받아들여졌고.
좋은 인상을 남겨주자는 의미에서 호의로서 그를 환영하자는 의견도 적지는 않았으나.
[#Angels]
[다저스 애들 뭘 모르네. Suck 새끼한테 직접 당하면 뒷목 잡고 쓰러질 텐데.]
└아무것도 모르니까, 환영하는 거지. 쟤랑 몇 번 만나면 그때부터 눈 돌아가는 거야.
└에인절스 너네도 X발 X도 모르잖아. 우리가 진짜 X같지.
└레인저스 팬이냐? 너네는··· 인정한다.
└내가 레인저스면 진작에 총 쐈어.
└레이더스인지 뭔지, Suck 경기에 맨날 나오는 오클랜드 놈들 이번에도 출동해라. NL X신리그 기강 좀 잡자.
└암, 레이더스한테 You Suck 한번 듣고 나면 머리가 어질어질하지.
당연하게도 고유석에게 이미 익숙한 이들은 그런 다저스의 따뜻한 분위기를 비웃었다.
직접 겪는 순간, 상상처럼 하하호호 훈훈한 분위기가 아니리라는 것은 그들이 제일 잘 알았으니까.
[#A’s]
[다저슨지 뭔지, LA X새끼들이 벌써부터 Suck이 자기네 선수인 것처럼 굴던데. X같네.]
└레이더스지? 너네가 나설 시간이다. 오클랜드의 힘을 보여주고 와.
└솔직히 너네 좀 쪽팔렸는데, 이번만큼은 응원한다. 부르주아 새끼들한테 오클랜드의 정신을 단단히 보여줘.
물론 애슬레틱스 팬들 역시 기분이 별로 좋지는 않았고 말이다.
자신들과 고유석이 영원토록 함께할 수 없다는 거야, 대충 창문 열고 오클랜드 전경만 둘러봐도 잘 아는 사실이지만.
그걸 직접적으로 꼬집는 건 조금 다른 문제였으니까.
그렇게 각자 다른 상상 속에서 경기는 다가왔고, 고유석이 LA 다저스의 홈, 다저 스타디움에 입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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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랄한 다저스 놈들의 간계는 단순히 내 슈퍼소닉을 저지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날 귀찮게 하려고 했던 거야.
“Suck, 니 휴대폰 터지려고 하는데? 너 어디서 돈이라도 빌렸어? 전화가 끊이질 않네.”
“몰라 X발. 저러다 배터리 다 닳으면 알아서 꺼지겠지.”
내 다저스 등판 예고에 이어서, 류영진 선배의 등판까지 확정된 뒤. 휴대폰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나마 진동으로 해둬서 다행이지··· 벨소리로 해뒀으면 내 고막이 먼저 터졌겠네.’
대체 어디서 그렇게 연락이 오는 건지, 아주 온갖 곳에서 전화가 빗발쳤거든.
모든 일은 브라이언을 통해 처리하고 있기에, 그쪽으로도 연락이 많이 갔다고 하는데.
인터뷰나 뭐 그런 것들을 죄다 커트하니, 내 휴대폰으로도 전화가 오더라고. 대체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기자나 언론사일 가능성이 높은 모르는 번호도 있고, 기억을 더듬으면 생각나는 옛날 지인들도 있었다.
부모님은 내 사정을 대충 예감한 듯 다행히 메시지만 남겼지.
다저스 놈들, 경기 전부터 내 진땀을 빼려고 했군. 어림도 없지.
물론 농담이다, 다저스가 이런 걸 계획했을 리가 없잖아.
‘이럴 수밖에 없긴 하지.’
나야 뭐 말할 것도 없고.
류영진 선배 역시 최근에는 부상으로 고생하시긴 했지만, 어쨌든 여전히 추민수 선배와 더불어 대표적인 한국인 메이저리거이니 이런 반응이 나오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거다.
팀에서도 상황을 파악한 듯, 몰려들 한국쪽 기자들을 예상하며, 경기 전에 인터뷰 시간을 마련해 주겠다는 제안도 했지만, 내가 거절했다.
원래 퍼붓는 비는 피해야 하는 법. 내가 스스로 이슈를 만들어서 여론을 움직이는 때라면 모를까.
지금은 굳이 입을 열어서 좋을 게 없었다.
‘괜히 인터뷰 하다, 말꼬투리 잡히면, 선배를 무시하는 고유석, 존중이 없는 고유석, 류영진은 쉽다 등등. 온갖 말이 다 나오겠지.’
그냥 잘 던진 뒤에 입을 여는 게 낫지, 지금 당장은 굳이 그래봤자 좋을 게 없어.
그렇기에 애써 빗발치는 연락과 관심을 무시한 채, 최대한 폼만 끌어올렸다.
“고유석 선수! 스포츠···”
“한국에서 왔습니다. 류영진 선수와 맞대결을 펼치게 되셨는데···”
“역대 최고의 한국인 투수라는 평이 지배적인데, 후배의 입장에서 선배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는···”
그리고 드디어 운명의 시간이 되었을 때. 다저 스타디움에 도착한 순간, 아니나 다를까, 바글박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기자들은 일단 사진부터 찍거나, 마이크부터 들이밀거나 하며 날 간절히 원했고. 자칫 귀찮을 뻔한 상황이었으나.
다행히 지원군이 있었다.
“뭐야? 왜 Suck을 귀찮게 하고 있어?”
“꺼져, 꺼져! 다들 안 꺼져? 곧 등판하는데. 귀찮게 하고 지랄이야.”
“Suck이 삼진 잘 잡으려면 편안한 마음으로 던져야 한다고!”
“Suck! 오늘도 삼진 많이 잡아라! 난 LA가 X나게 싫으니까!”
레이더스, 참 든든하단 말이야. 오늘도 여지없이 나타난 그들은 일단 생김새로 주변 분위기를 압도하며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굿잡.”
그에 조금 감동해서 쓰윽 따봉을 날려주니 코를 쓱 닦으며 흡족하게 웃는군. 아주 좋아. 이래야 내 팬이지.
레이더스 덕분에 잠깐 소강상태가 됐을 때, 나는 곧바로 무소의 뿔처럼 뚫고 클럽하우스로 입장했다.
“어우, 나까지 같이 깔려 죽겠네. Suck 니가 슈퍼스타는 슈퍼스타인가봐.”
“이야, 진짜 코리아의 King인데? 다들 장난이 아니네.”
“어? Suck은 오클랜드의 King이 아니었던가?”
“몰라, 동군연합인가보지.”
먼저 도착한 동료들은 새삼 내 인기에 감탄한 듯 개소리를 해대며 반겨줬고 말이다.
역시나 예상했던 것처럼 시작하기도 전부터 굉장히 소란스러운 경기였지만, 다행스럽게도 크게 영향을 받지는 않아다.
“오늘 폼은 좀 어때?”
“좋아, 엄청.”
라커룸에서 환복하고 있으니, 오늘도 당연히 호흡을 맞추게 된 브루스가 슬쩍 다가와 물었는데.
그저 순수한 진심을 담아서 자신감 있게 답변했는데도 별로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 뭐야, 슈퍼소닉인지 뭔지 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지?”
“아니야 새끼야. 내가 하물며 같은 나라 선배가 선발투수로 나왔는데 그 지랄을 하겠냐.”
이 코치의 쁘락치 새끼.
아주 제대로 물이 들었군.
슈퍼소닉은 반쯤 포기했다.
내가 계속 생각해봤는데.
아무리 그래도 좀 그렇더라고.
물론···
‘선발투수 내려가고 코쟁이가 올라오면 그땐 또 얘기가 다르지.’
어디까지나 다저스 선발투수가 유지되는 동안에만 말이다. 설마 완투까지 하시겠어?
오늘 길게 던지다 보면, 한번쯤은 기회가 올 수도 있겠지. 그걸 노리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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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복한 뒤, 먼저 훈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대니얼과 합류했는데, 그는 어쩐지 녹초가 되어 있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일찍 도착하니, 기자들이 저를 알아보더라고요. Go의 트레이너라면서. 그 덕에 좀 시달렸습니다.”
“어우, 고생이 많으셨겠네.”
정작 나보다 대니얼이 더 고생했구만. 나는 그나마 레이더스라는 든든한 호위무사라도 있었는데. 그보다 먼저 온 대니얼은 아니니까.
이른 시간부터 대기타고 있었을 기자들이 그를 괴롭혔을 생각을 하니, 괜히 내가 다 미안하네.
대니얼은 굉장히 피곤한 눈치였지만, 그럼에도 트레이너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타이머 재겠습니다. 어제 수면은 충분이 하셨나요?”
“네, 메시지랑 전화가 계속 와서 무음으로 해뒀었는데, 그래도 알람이 울리기는 하더라고요.”
“다행이네요. 몸은 어떻습니까?”
“좋아요, 엄청. 시즌 중간에 푹 쉬는 호사를 누렸는데, 당연히 좋아야죠.”
프로의식이 투철한 사람이야. 이러니 내가 안 믿고 배겨?
그렇게 서서히 몸을 달아 올리며 컨디션을 점검했고, 당연하게도 폼은 제대로 올라왔다.
준비 시간이 넉넉했으니, 컨디션이 안 좋으면 그게 이상하지. 체력도 남아돌고.
“혹시나 해서 다시 주의하는데, 웬만하면 스프린트는 자제하세요. 작년보다-”
“예예, 무게가 더 늘어서 관절에 더 위험할 수도 있다고요? 조심할게요.”
“잘 아시니 다행이네요. 그런데 끝까지 안 한다는 말은 안 하시네요.”
들켰군.
같이 살아서 그런가, 이 사람 날 너무 잘 알아. 어물쩍 넘기려는 걸 정확히 캐치했어.
“정 타격을 하고 싶으시거든 홈런이라도 날리셔서, 걸어서 베이스 도세요.”
“그냥 하지 말라는 뜻이죠?”
“이것도 잘 아시니 다행이군요.”
그렇게 대니얼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폼을 올렸을 때, 뜻밖의 사람과 조우하기도 했다.
“···실물로 보니까, 느낌이 이상하네.”
“예? 제가 아직 한국어를 몰라서.”
“아뇨, 아무것도. 그냥 좀 기분이 묘해서요.”
류영진.
그 역시 몸을 푸는 건지, 가볍게 러닝을 하고 있었는데, 어쩌다가 눈이 마주쳤다.
그쪽도 날 본 것 같고.
추민수 선배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추민수 선배 역시 존경하는 선배이긴 한데. 이쪽은 투수니까.
‘존경이라기보다는··· 동경에 가깝지.’
존경과 동경.
비슷한 말이지만, 약간은 다르지. 존경이 대단한 사람을 높이 올려다보는 것이라면.
동경은 그런 사람을 한없이 닮고 싶은 마음이니까.
나에게 류영진이라는 선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렉 매덕스와도 약간은 다른 감정이지.
머나먼 이상향 같은 그렉 매덕스보다는, 데뷔 때부터 한국 프로야구를 휩쓸었던 괴물이 더 가깝긴 하잖아?
특히나 내가 미국으로 건너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이저리그에 입성하며, 어린시절 추억이었던 코리안 특급처럼, 코리안 몬스터로 이름을 날렸기에 더욱더 그렇고.
그렇게 동경했던 선수와 한 마운드를 공유한다는 건, 꽤나 특별한 감정이 들게 했다.
뭐랄까···
“가죠, 아직 달아오르려면 한참 남았네.”
“인사라도 하시죠? 텍사스와는 달리, 뭐라고 할 사람도 없을 텐데.”
“그건 경기가 끝난 뒤에 할 일이지, 지금 할 일이 아니에요.”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솔직히 만약 그랬다면 조금 실망했을 텐데, 제가 이래서 Go를 좋아합니다.”
더 잘하고 싶어졌다.
잘해야 하는 건 어떤 경기나 당연하긴 한데. 그보다도 더 잘하고 싶어졌다.
사심 없이, 언제나 올곧은 마음과 정신으로 피칭을 해야 하는 것이 투수지만. 난 야구 기계가 아니잖아? 어쩔 수가 없지. 감정이 생길 수밖에.
그것이 그저 좋은 방향으로 불어준다면, 감사히 여겨야 하는 거고.
‘기자들이 봤으면 선배한테 먼저 인사도 안 한다고 싸가지 없다고 했으려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선배에 대한 예의가 없는, 고유석의 오만함이라면서 말이야.
괜히 말꼬리 잡혀서 그런 소리가 나오게 하는 게 싫기에 구단이 제안했던 인터뷰도 거절했던 건데. 자가실현적 예언이 돼버렸구만.
‘그래도, 저쪽은 마음을 알아주니까,’
다만 류영진 선배는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씨익 웃으며 마찬가지로 본인 역시 위밍업에 집중했다.
마치 내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잘 알겠다는 것처럼. 우리끼리 통했으면 된 거지.
####
1회 초. 우리 공격이 끝났다. 상대 선발투수는 볼넷 하나만을 내주며 첫 공격을 수월하게 저지했고, 턴은 나한테로 넘어왔다.
“수고해, Go, 폼 좋다고 해서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스콧 에머슨의 말을 끝으로.
불펜의 문이 열렸다.
언제나 흥분되는 순간이지.
[Go You-Suck – No.79]
터덜터덜 걸어 나가며, 내 얼굴과 정보가 기입된 전광판을 올려봤을 때.
이미 시작한 경기의 열기가 무더운 날의 열풍처럼 확 밀려들었다.
“You Suck!”
“Suuuuuuuck!”
“Ryu가 삼진 하나 잡았으니까, Suck 너는 넌 삼진 세 개 잡아! 네가 Best Korean이니까.”
그래, 이 소리가 빠지면 안 되지. 관중석을 안 봐도 뻔하다. 레이더스가 많겠지, 엄청나게. 소리가 다르니까.
같은 캘리포니아 주라서 비교적 원정 거리도 가까우니, 더 몰려오기 쉽기도 하고.
사실 경기장에 오면서 이미 엄청난 숫자를 확인하기도 했지만.
‘다저 스타디움, 크긴 진짜 크네.’
다저 스타디움.
다저스의 홈구장.
어쩌면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메이저리그 구장이 아닐까?
아니지, 내가 데뷔한 이후로는 콜리시엄도 많이 보긴 했겠네.
웅장하기로 유명한 경기장인데, 확실히 다르긴 하구만.
몇 없는 좌우대칭 구장이기도 한데, 마찬가지로 좌우대칭인 낡은 콜리시엄이랑 비교하면, 다저스가 화내겠어.
‘거기다 투수 친화적인 구장이니까, 참 좋기는 해.’
그런 다저 스타디움에 내가 왔다. 비록 어릴 적 꿈꿨던 것처럼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있지는 않았지만 말이야.
‘모르지, 언젠가는 진짜로 입을지도.’
앞으로도 내가 계속 잘한다면, 내 몸값을 감당할 만한 팀이 몇 없는데, 그중 하나가 다저스니까 말이야.
허나 지금은 아니지.
약간은 감상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걸음을 내딛고, 앞서 던진 투수의 발자국이 남은 마운드에 오른 순간 잡념은 깨끗하게 사라졌다.
“Suck, 준비는 됐어?”
“됐지, 한참 전에. 잘 잡아라. 좀 쎄게 던질 거니까.”
“겁은 상대 타자들한테 줘. 나한테 주지 말고. 괜히 무섭잖아. 아무튼 오늘은 어떻게 갈 거야?”
“잘 가야지. 그거 말고 더 있어? 타자들 확인 잘해. 타이밍 잡았다 싶으면 바로 사인 보내고. 릴리스 포인트 꼬아버릴 테니까.”
“롸져댓. 그럼 수고해라.”
“너도.”
브루스와 짧은 대화를 나눈 뒤, 홀로 남은 마운드. 이때가 제일 좋지. 아무런 부담감 없이, 그저 경기에 대한 기대감으로 벅차오르는 순간이니까.
마운드 위에서 마지막 감각을 가다듬자, 시선이 느껴졌다. 다저스 타자들이 지켜보는 거겠지.
이미 한 차례 시범경기에서 맛을 봤던 투수이긴 하나, 정규시즌에서의 나는 그들에게 굉장히 생소할 테니까.
과연 시범경기 때와 얼마나 다를까, 궁금하기도 할 거고.
모든 준비를 마친 뒤. 본격적으로 1회 말이 시작됐을 때. 다저스에게 보여줬다. 그들이 그토록 궁금해했던, 오늘의 내 공을.
“스트라이크!”
어때? 마음에 들어?
바깥쪽으로 찍힌 포심 패스트볼. 리드오프로서 한 구 지켜보려고 했던 건지, 1번타자 크리스 테일러는 가만히 지켜봤다.
딱히 감정의 동요는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네. 저도 모르게 배트를 더 바짝 틀어쥐었으니까.
조금 당황하기는 했겠지.
시범경기에서 개 털렸는데, 오늘은 그때보다 훨씬 더 묵직한 공이 날아왔잖아?
물론 다저스도 다를 거다.
시범경기는 그저 시범경기에 불과할 테니까. 최근 기세가 좋지 않다고 해도, 저력이 있는 팀이기도 하고.
하지만 상관없다.
“아웃!”
나 역시 다저스를 때려잡을 저력은 충분히 있었으니까.
2구 만에 내야 뜬공으로 아웃.
한복판으로 대놓고 들어온 커터를 비껴치며, 오늘 내 첫 타자가 물러났다.
곧바로 2번타자 코리 시거.
리그 최고 수준의 공격력을 가진 포수이나. 현재까지 타율이 1할대에 머무르며, 시즌 초반 다저스의 침체에 한몫했지.
‘단단히 집중했네.’
타석으로 올라온 그는 투수인 내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보고 있었다. 집중을 확실하게 했다는 소리지.
지금 같은 타격감이 계속 이어지면, 슬럼프가 될 수도 있으니, 어떻게든 자기 스윙에 집중해서 침묵을 깨트리겠다는 뜻이리라.
그것이 대단하면서도,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타자가 제대로 집중했다는 것도 거슬리기는 한데.
“볼!”
내가 마운드에 있는데, 나한테 집중해야지, 안 그래?
몸쪽 포심.
여기까진 평소랑 똑같았지만, 조금 더 바짝 붙어서 날아갔다. 빠진 건 아니고, 이번엔 그냥 위협구야.
90마일도 안 되는 공 가지고 무슨 놈의 위협구인가 싶겠지만, 코리 시거는 저도 모르게 턱을 뒤로 당겼다.
떠오르는 듯한 착시효과 때문에 헤드샷이라고 착각했겠지.
그제야 그는 나를 봤다. 조금 눈썹을 씰룩이기도 했고. 미세하게 흔들린 평정심.
그것을 다시 다스리려는 듯, 침착하게 타석에서 물러나 마음을 추스른 뒤 배터박스로 들어왔지만.
“스트라이크!”
나는 그런 여유 따윈 줄 생각 없다. 어디서 감히 차분해지려고 해? 눈이 팽팽 돌아야지.
2구째 대놓고 한가운데로 던졌는데, 브레이킹볼로 생각한 듯 그는 꾹 참았지만, 공은 그냥 들어갔다.
이번에도 포심이었거든.
그러자 다시금 흔들렸다.
위협구의 다음은 마치 놀리는 것처럼 한가운데에 박히는 포심이었으니까.
실투일 수도 있겠으나, 내 제구가 철저하다는 거야 아주 유명한 사실이니. 아무리 부처라고 해도 타자로선 좀 빡이 돌아야 정상이지.
‘오케이, 뇌관은 건드렸네.’
내가 못돼처먹은 쓰레기라서 괜히 타자를 빡치게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인정하는 거야.
침착하게 차분하게, 자기 페이스를 찾으면 까다로운 타자니까, 계속 쥐고 흔들어야지.
“스트라이크!”
그런 의미에서 3구.
이번에도 스트라이크존 안으로 유유히 공은 날아갔고, 코리 시거는 배트를 휘둘렀으나, 조금 늦었다. 또 포심이었거든.
이제부턴 대가리가 터지기 시작하는 거지. 포심만 세 번을 던졌고, 투 스트라이크 원 볼이니, 이제 결정구만 남았는데.
나한테 그 결정구라는 놈이 너무 많잖아?
같은 패스트볼 종류는 뺀다고 쳐도, 서클 두 개, 쓰리핑거. 너클 커브, 느린 커브, 슬라이더. 여섯 개나 되는데. 더럽게 많긴 하네.
어느 것이 날아올지도 모르는 만큼, 복잡해진 머릿속에 코리 시거는 그제야 끝까지 붙들고 있던 평정심을 놓쳤고.
그것은 곧 내 타이밍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You Suck!”
“너보다 마커스가 더 낫다!”
“Hell Yeah! 이래야 Suck이지!”
높은 코스.
순간적으로 판단을 내리지 못한 채, 무의식적으로 휘두르며, 코리 시거의 배트가 따라 나왔다.
이번에도 포심 패스트볼.
하이 패스트볼이지.
크게 헛돈 코리 시거는 이젠 노골적으로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포심만 네 개를 던졌으니,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겠어?
자신을 농락한 것 같은 나를 향한 분노도 있겠지만, 허무하게 당해버린 스스로에 대한 분노도 공존하는 것 같았다. 그것으로 평정심은 끝난 거고.
‘마지막으로 야시엘 푸이그.’
3번타자 야시엘 푸이그.
재능과 스타성이 대단해서, 다저스 팬들의 관심과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최고의 유망주이자, 미래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각광받은 선수인데.
최근 들어서는 좀 미묘하지.
14년 이후로 성적도 계속 내려가고 있고, 약간 똘끼가 넘쳐서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으니까.
한국에서는 류영진 선배와 친밀한 걸로 유명하기도 하고.
뭐 이런 것들은 상관없고.
제일 중요한 건···
‘좌상바지.’
“스트라이크!”
좌투수 상대로 바보라는 거다. 작년부터 그런 경향이 심해졌지. 우투수는 잘 패는데, 좌투수한텐 좀 약하더라고.
우타자라는 걸 감안하면 좀 신기한 일이지.
올해도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초구는 터무니없는 헛스윙을 선보였다.
낮게 너클 커브를 던졌는데, 대놓고 내려갔는데도 냅다 휘두르네.
‘오히려 위험할지도. 안 보고 휘두르는 타입이라, 타이밍을 흔들고 지랄이고 신경도 안쓸 테니까.’
의외의 복병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오늘 내 컨디션을 보아···
“스트라이크!”
의외의 복병 정도로는 힘들 테니까. 바깥쪽 패스트볼에 다시금 헛스윙하며 투 스트라이크.
마지막 3구로 던진 낮은 슬라이더에도 역시나···
“스트라이크 아웃!”
크게 휘두르며, 그는 헛스윙만 세 번 하며 삼진으로 물러났다.
스트라이크존에 넣을 필요도 없겠네. 막 휘두르는 걸 보면.
물론 조금 더 나한테 적응하고 난다면 좀 다를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삼진 세 개는 못했네.’
몇몇 레이더스는 KKK를 기대했었는데, 아쉽게도 그건 못 이뤄줬구만.
“You Suck!”
“크헤헤헤, 이게 Suck이지!”
“LA 새끼들은 Suck의 Ass나 Suck해라 이거야!”
그래도 괜찮겠지. 반응을 보아하니, 충분히 만족하는 것 같고. 아직 경기도 한참이나 남아 있잖아?
[Ryu Young-Jin – No.99]
Korean Night는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다시 바톤 터치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