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6:1 텍사스 레인저스, 승리투수 고유석, 7이닝 12K 1피안타 무실점.>
경기는 애슬레틱스의 승리로 무난하게 막을 내렸다. 물론 레인저스 팬들에겐 그리 무난한 경기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올해도 극복하지 못한 레인저스의 Go 수난기? Go, 7이닝 12K!>
<16이닝 연속 무실점. 시즌 시작부터 다시 시작된 Mr.Zero!>
<두 경기 만에 30K, 올해 고유석의 목표는 꿈의 400탈삼진?!>
<레인저스의 저승사자가 알링턴으로 돌아왔다!>
<글로브 라이프 파크 인 알링턴의 지배자는 Go? 31이닝 46탈삼진 ERA – ‘Zero’>
경기가 끝난 직후, 각종 기사가 쏟아졌고, 사람들은 입을 모아 소리쳤다.
작년, 레인저스를 관에 처박아, 땅에 묻었던 저승사자가, 다시 알링턴으로 돌아왔다고.
저번 시즌부터 이어온, 알링턴에서의 압도적인 전적은 올해 역시 이어졌고.
몇몇 언론에선 어쩌면 투수 친화 구장인 콜리시엄보다, 극단적 타자 친화 구장인 글로브 라이프 파크가 고유석에게 더 잘 맞는 곳일지도 모르겠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A’s]
[알링턴은 이제 그냥 우리 별장이라고 봐야지.]
└어쩐지 Go가 콜리시엄에서보다 거기서 더 잘하지 않아?
└오, 나만 느낀 게 아닌가 보네. 맞아, 콜리시엄에서도 죽여주지만, 알링턴에선 진짜 다 죽여버리지.
└텍사스 애들 부럽네~ 걔들은 Go를 만나기만 하면 개쩌는 피칭이 확정된 거 아니야.
└사실 대부분 피칭이 개쩔지만 말이지.
선수 대 선수로서의 상성이 아니라, 메이저리그 구단이 일개 개인의 선수에게 상성을 느낀다는 것은 꽤나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였기에.
사람들은 레인저스를 비웃으며, 꽤나 재밌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지만.
<분노한 텍사스 팬들 일부가 알링턴 일대에서 난동!>
<‘대체 언제까지 Go에게 당해야만 하나?’ 참패에 레인저스 서포터들 울분을 토했다!>
당연하게도 당한 입장에선 하나도 재미있지 않았다. 그것도 작년 내내 털리고 올해까지 첫 만남부터 털린 입장이라면 말이다.
경기가 끝나고, 뇌를 집어삼켰던 몽롱함이 가라앉았을 때, 예상대로 그제야 뒤늦은 분노가 끓어올랐다.
[#Rangers]
[당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Mother Fucking 투수 한 명한테 X발 대체 언제까지 대줄 건데? Suck 그 새끼가 은퇴할 때까지? 이딴 식으로 할 거면 그냥 해체해라 x발. X같아서 야구 보기가 싫어지네.]
└나도 동의한다. FA 전까지는 웬만하면 오클랜드에 있을 텐데. 앞으로 계속 몇 년간 이럴 거면 그냥 해체해. 풋볼이나 보게.
└Suck 이 Cunt 새끼가 알링턴에서 지랄하는 걸 대체 몇 번이나 봐야 하는 거야?
└X발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레인저스가 왜 이 꼴이 됐냐고!
└Choo가 안타라도 하나 쳐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두 경기 연속 퍼펙트 당했겠네.
└X같은데 맞는 말 같아서 반박을 못하겠어.
밤늦은 댈러스-포트워스, 그리고 알링턴의 거리에는 고주망태가 된 레인저스 팬이 고성을 내지르고는 했고.
인터넷 커뮤니티 역시 마치 레인저스라는 팀에게, 아니, 야구라는 스포츠 자체에 환멸을 느낀 듯한 이들이 속출했다.
어쩌면 작년 마지막 등판에 이어, 올해 첫 만남부터 퍼펙트를 당했을 지도 모른다는 자조적인 예상도 빗발쳤고 말이다.
<애슬레틱스, 11대1의 압승으로 깔끔한 3연승! 위닝 시리즈를 확정 짓다!>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이어진 시리즈 3차전에선 아예 대차게 털려버리면서, 더욱더 울화가 타들어 갔고.
<애슬레틱스, 3승 1패 위닝 시리즈로 알링턴 원정 마감. 올해는 정말 다르다?>
<간신히 스윕은 면한 텍사스 레인저스, 시즌 초반부터 레인저스에 드리워진 먹구름!>
결국 한계치에 임박했을 무렵, 마지막 4차전에서 가까스로 승리를 따내면서.
간신히 스윕만은 면하면서 마지막 격발장치가 눌리지는 않으며, 시리즈는 막을 내렸다.
물론 터지지만 않았을 뿐, 여전히 위험이 내재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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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든(?) 알링턴을 떠나, 다음 원정지로 향하는 비행기 안은 조용했다. 그럴 수밖에 없지.
보통 기내를 시끄럽게 만드는 게 도박판이나 술판인데. 둘 다 없었으니까.
“제드, 한 게임 안 해요?”
“···오늘은 됐어, 그보다도 언제는 너네나라는 속인주의라서 도박 불법이라고, 계속 상습적으로 하면 안 된다고 하더니. 이제보니, 이거 상습적인 놈이었네.”
“쫄았다는 말을 뭘 그렇게 장황하게 하고 그러십니까.”
일단 도박판의 중심인 제드 라우리가 이탈하면서, 판이 성립되지 않았다.
올해 첫 경기(?)부터 나한테 다 털린 게 좀 충격으로 남았나 봐.
이번 원정지는 LA라서, 알링턴과 달리 위험부담이 적기에, 밀머니를 싹 쓸어 담고 LA 전역에 뿌리려고 했더니, 아쉽게 됐네.
‘텍사스 가면서 벌어둔 게 아직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 그래도 풍족하긴 하겠어.’
LA에 내리면 칼질 좀 해야 겠구만. LA 순두부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순대국밥도 맛있다고 하고.
아니지, 나 혼자 칼질하는 게 아니라, 따로 만나서 밥 한 끼 할 사람이 있지.
이번 LA원정은 LA의 탈을 쓴 애너하임 원정만 있는 게 아니니까. 인터리그도 끼어 있거든.
에인절스와 먼저 3연전을 가진 뒤, 다저스와도 인터리그 매치업으로 2연전을 하니까.
‘다저스라··· 드디어 만나 보는구만. 다저 스타디움에도 가보고.’
LA 다저스.
저번에도 말했듯 나한테 있어선 드림팀이었던 팀을 드디어 정규시즌에서도 만나게 됐지.
이쯤 되면 대충 누굴 말하는 지는 감이 잡히리라. 다저스 선수 중에서 내가 따로 만날 사람이 한 명 말고 더 있겠어?
‘서로 리그가 달라서 많이는 못 만나겠지만, 그래도 이쪽이 텍사스보단 훨씬 부담은 덜하네.’
추민수 선배는 자주 만나기는 하는데, 그쪽 팬들이 너무 극성(?)이라 사적으로는 딱 한번 밖에 못 만났다.
이번에도 친한 척도 못하고 눈인사만 찔끔 주고받았지. 내가 레인저스를 너무 박살 내버려서.
하지만 다저스는 그보다는 나에 대한 적대감이 훨씬 적고, 또 팬덤 자체가 강성 팬덤이 아니니, 걱정은 없으리라.
‘같이 등판도 하면, 한국 터지겠네.’
아마 한국 쪽에선 그런 장면을 대단히 기대하고 있겠지. 얼마나 좋은 장면이겠어?
한국인 투수가 메이저리그 무대에서 각각 선발투수로 나온다는 게.
다만 일정이 맞아떨어질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참고로 나도 원래 일정대로면 에인절스와의 3연전 마지막 경기에 등판을 해야 했지만, 전체적으로 선발 일정이 약간씩 조정됐다.
아무래도 올해는 긴 시즌을 보고 있는 만큼, 팀에서 최대한 선발투수, 정확하게는 나, 소니, 션에게 휴식을 주고 싶어 했거든.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야심차게 윈나우에 도전했는데, 혹시 선발진에서 부상자가 발생해 이탈이 나오면 상황이 이상해지니까.
‘귀족 선발이구만, 귀족 선발. 메이저리그에 있는 것도 신기한데, 이런 호사까지 누리고.’
어쨌든 그 덕분에 나는 한때 동경했던 다저스를 내 손으로 조지고, 같은 나라 선배도 만나고, 인터리그라 슈퍼소닉도 할 수 있게 됐으니. 불만은 없었다.
그렇기에 그저 새로운 만남에 대한 기대감만을 품고서, 나 역시 조용한 기내 분위기에 녹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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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이이익!”
“오늘 완전 Hot 하네!”
“이게 야구지! X나 재밌는 경기구만!”
잠깐만에 다시 만난 에인절스와의 1차전은 아주 화끈했다. 조용한 것으로 유명한 애너하임이 들썩였을 정도로.
앙팀 도합 23점을 내며, 무려 12대13의 무호흡 노가드 난타전이 일어났으니까.
타자들이 아주 신을 냈다고 할 수 있지. 양팀이 서로 타선의 성적을 올려준 셈이고.
“···”
“이런 날도 있는 거야. 너무 신경쓰지 마.”
“···네.”
물론 그걸 다르게 말하면 투수들이 복날 개처럼 두들겨 맞았다는 뜻이기에, 덕아웃 분위기가 마냥 좋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특히 이번 시즌은 시작부터 선발진에 합류하며 스스로 기대를 가졌던 다니엘 고셋은 넋이 나갔다.
홈런 하나를 포함해서, 5자책점을 기록하며 완전히 털렸으니까.
아직 어린 녀석인지라, 스콧 에머슨이 옆에 딱 붙어서 열심히 위로해줬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이런 경기 한번 하면, 다른 사람 말이 귀에 안 들어오니까. 아무리 좋은 말이든지 간에. 어쩔 수 없이, 본인이 극복해야 하는 문제지.’
나야 뭐 메이저리그에서는 불패의 신화라지만, 마이너에선 더한 난타도 당해봤기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다만 그런 멘탈적인 문제 외에도 현실적인 걱정도 섞여 있겠지.
혹시나 마이너로 강등되지 않을까, 하는 것들 말이야. 가능성이 낮다고 볼 수 없으니까.
“대니.”
“괜찮아, Suck. 뭐, 코치 말처럼 이런 날도 있는 거지.”
“그래, 자신감 가지고 빡세게 던져. 월드시리즈에도 나가야지. 축 처지지 말고.”
제법 오랫동안 알고 지냈고, 메이저에서는 자주 어울리지 못했지만, 더블A에선 바로 옆방 친구이기도 했던 녀석이라.
넋이 나간 모습이 안쓰러워 그렇게 말하니, 녀석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1차전은 양 팀 투수진 학살로서 막을 내리며, 우리의 1점차 패배로 끝났고.
이후 2차전에선 7대2의 압승을 거뒀지만, 3차전에선 다시금 아쉬운 패배를 기록하며, 개막전과 반대로, 애너하임 원정은 1승2패의 루징 시리즈로 막을 내렸다.
그것으로, ‘진짜’ LA에서의 내 턴이 다가왔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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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휴식일부터 나는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다저스, 다저스··· 직접 상대하려니까, 괜히 가슴이 벅차네.’
왠지 좀 흥분이 되더라고.
내 개인적인 감정도 감정이지만, 다저스가 만만하게 볼 팀은 아니니까.
사실 다저스를 만만하게 볼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말이야.
‘생각보다 일찍 만났네, 멋지게 헤어졌더니.’
올해 시범경기 마지막 경기 상대이기도 했었는데. 가뿐하게 때려잡고 멋진 척하면서 월드시리즈에서 다시 보자고 암시를 남겼었는데.
정작 시즌 시작하고 한 달도 안 돼서 바로 만났네. 좀 민망하구만.
‘최근 성적은 별로 좋지는 않은데···’
우승을 노리겠다며 천명한 것 치고는, 다저스의 시즌 초반 성적은 별로 좋지는 않았다.
9경기 동안 3승 6패로, 우리가 8승 3패인 걸 감안하면, 초반 기세는 우리 쪽이 훨씬 좋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성적은 이래도, 무시할 수가 없는 라인업이지만 말이야.’
물론 10경기도 채 치르지 않은 상황에서의 성적은 별로 중요하지 않지. 아무리 강팀이라도 초반에 말아먹는 건 야구에서는 흔한 일이니까.
‘당장 작년 월드시리즈에 갔었던 팀이니, 더 말할 것도 없고.’
다르게 말하면 위닝 멘털리티, 이기는 습관이 장착된 팀이라는 건데. 이런 팀들은 언제든지 다시 일어난다.
어쩌면 그것이 내 등판날이 될 수도 있고. 무시할 수 없는 타자들이 제법 있는 만큼, 시범경기만 생각하고 안심했다간 큰 코를 다치겠지.
‘물론 이대로 아예 대침체에 빠져서 꼬라박을 수도 있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아보이네.’
어쨌든 강팀을 상대로 미리미리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그렇기에 칼같이 루틴을 지키기 위해, 대니얼과 만든 수면 패턴을 철저하게 지키며, 경기를 준비했다.
“대니얼, 폼 좀 빡세게 올려야겠어요.”
“네, 휴식일 덕분에 시간도 넉넉하니, 제대로 준비를 갖출 수 있겠죠. 다만 그렇다고 너무 흥분하는 것도 좋지는 않고요.”
“그거야 당연하죠. 그냥 철저하게 하자는 뜻이었어요.”
대니얼도 에인절스 시리즈가 끝나자마자 바로 LA에 도착했기에 딱딱 준비가 맞아떨어졌고 말이다.
휴식일이 끼여 있으면 원래 좀 편하긴 하지. 등판을 준비하는 게.
폼을 더욱더 가다듬을 수 있으니까.
물론 휴식이 점점 더 길어지기 시작하면, 감각을 유지하는 것에 피해를 끼치기도 하지만, 지금 정도 휴식은 딱 알맞은 수준이기에 괜찮았다.
“Suck, 뭐해?”
“손톱 다듬는다. 내일 경기인데, 오늘 미리 해둬야지. 손톱강화제도 미리 발라둬야 잘 마를 거고.”
“아, 하긴, 좀 길긴 하더라.”
그렇기에 열심히 폼을 올리는 한편으로, 손톱 역시 조심스럽게 다듬었다.
덩치 큰 남자가 깨작거리는 게 우습게 보이겠지만, 이게 은근히 중요한 작업이야.
폼 올리는 것만큼이나 중요하지. 아무리 폼이 좋아도 손톱 관리가 개판이면 10구도 못 던지고 손톱 꺠져서 내려가야 학니까.
또한 혹시라도 손톱이 길어서 공이 잘못 긁혀대면 마운드 위에서 낭패를 볼 수도 있고.
“Suck 손톱 다듬어? 어? 너 손톱강화제 그거 쓰네? 리암도 그거 쓰던데.”
“저는 좀 잘 맞더라고요. 너무 흐르지도 않고, 딱 좋아요.”
“그래? 나도 그쪽으로 바꿀까?”
“Suck, 귀찮게 네가 직접 그러지 말고, 그냥 네일 아트 샵을 하나 구해. 내가 다니는 곳 알려줄까? 전문가한테 주기적으로 관리 받는 게 나을 텐데.”
그렇게 내가 신중하게 손톱을 다듬고 있으니, 지나가던 다른 투수들이 하나둘 관심을 보이며 조언을 던졌다.
“말씀은 고맙지만, 내 덩치에 그런 곳 들어가면 미친놈처럼 볼 걸요. 그리고 항상 이렇게 해서, 이젠 내가 거의 준전문가예요.”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 대니얼 씨랑 비슷하게 생각해. 혹시 생각나면 연락해줘, 바로 알려줄 게.”
“마음은 고맙게 받을 게요, 소니.”
아래에 털이 무성한 사내새끼들이 네일 아트를 놓고 하하호호 대화를 나누는 것이 조금은 역겹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우린 진심이다.
투수의 손톱은 고양이의 발톱이랑 똑같거든. 흔히 그러잖아, 고양이는 발톱이 그냥 발톱이 아니라고.
사람으로 치면 손가락 마디와 같은 거라서, 함부로 깎는 게 아니라, 조심스럽게 다듬어 줘야 한다고 말이야.
‘투수도 마찬가지지.’
투수도 이게 밥줄이고, 생명줄이라 고양이의 발톱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렇기에 대부분은 평범하게 손톱깎이로 자르는 게 아니라, 사포 비슷한 손톱갈이로 살살 갈아내지. 나도 마찬가지고.
아니면 앞서 소니 그레이의 말처럼, 단골 네일아트 가게나, 아티스트를 구해서 직접 관리받기도 하지.
나도 브라이언이 추천해주기는 했는데, 닭살이 돋아서 그냥 내가 직접 하는 편이지.
“됐네.”
전투를 앞두고, 무기를 정비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갈고닦은 뒤.
깨끗하게 다듬어진 손톱을 흡족하게 바라보며, 잘 바른 손톱강화제가 마르도록 후후 불어줬다.
이상하게 뿌듯하단 말이야.
내가 손이 큰데, 은근히 세심하지. 원래 투수들은 다 손재주가 좋아. 천하디 천한 타자들과는 다르지.
그런 의미에서 타자들 중에서도 제일 천것이라고 할 수 있는 포수, 브루스 너는 왜 계속 나 보고 있냐? 훈련 안 해?
“왜?”
다들 경기를 준비하며 바쁜 와중에도 혼자 쭈뼛거리며 내 곁을 지키고 있는 브루스의 모습이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으니, 어딘가를 흘끔 보던 브루스는 지나가는 듯한 말로 내게 물었다.
“아니, 뭐, 그냥 좀 궁금해서. Suck 너 내일도 막 뛰고 그럴 거야?”
뭔 소리야. 알아듣게 말해.
횡설수설에 가까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뒤늦게나마 깨달았다.
“코치가 보낸 쁘락치였구만.”
“쁘락치?”
“스파이라고.”
일정이 바뀌어서 인터리그 원정 경기에 출장하게 됐으니, 또 슈퍼소닉이 출동하지는 않을까, 코치가 걱정한 것 같은데.
본인이 말해봤자, 내가 귓등으로도 안 들을 게 뻔하니, 아무래도 스콧 에머슨이 브루스를 시켜서 내 의중을 물어보려고 한 것 같았다.
브루스 얘는 맨날 파트너라고 떠드는 주제에 코치의 개가 되어서 날 염탐하러 왔구만.
“상황 보고 알아서 해야지. 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할 거야. 난 투수가 아니라, 야구 선수니까.”
“코치가 난리 피울 텐데. 감당할 자신 있어?”
“그전에 저부터 넘어야죠. 누구 마음대로 뛴다는 겁니까. 벌크업까지 해서, 관절이 무리가 갈 텐데.”
사실 나름대로 등판이 확정도니 뒤 타격을 준비하기는 했다. 타격이라기 보다는 주루에 더 가깝긴 하겠지만.
물론 스콧 에머슨과 더불어서, 날 열심히 돕고 있는 대니얼도 극도로 반대하고 있지만 말이야.
누누이 말하지만 그들의 걱정은 나도 충분히 이해한다. 내가 쓸데없이 뛰댕기다가 무릎 나가는 꼴을 보기는 싫다는 거겠지.
하지만 브루스에게도 말했듯이 나는 야구선수다. 포지션이 투수인 거지, 직업은 야구선수지.
그러니 나한테 타석에 찾아온다면, 그때도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로는 X나게 재밌지. 상대 투수들 멘탈 터트리는 게. 같은 투수한테 당하니까, 죽을 것처럼 굴더만.’
물론 그런 숭고한 뜻보다는 솔직히 그냥 재미가 9할이긴 해. 잭 그레인키의 마음을 알겠다니까?
고딩 때는 타격하는 게 조금 귀찮기도 했는데, 희귀해지니까, 막상 또 재밌단 말이지.
특히 같은 투수한테 안타나 번트를 당하고 넋이 나간 투수 얼굴 보는 게 가장 즐겁지.
‘확실히 나도 정상은 아니야.’
물론 그레인키처럼 피칭은 일이고 타격이 진짜 재미라는 수준까지는 아니다.
안타 맞은 투수 얼굴도 재밌지만, 그보다는 삼진 당한 타자를 보는 게 더 즐거우니까. 그저 부수적인 재미지.
‘부담감이 없으니까. 내 X대로 해서 X같이 망쳐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하니. 얼마나 좋아?’
거기다가 부담도 없으니, 더 마음이 편하고.
투수는 내가 아무리 차분하게 던진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약간의 부담감이 있지만. 타격은 그렇지 않거든.
요컨대 책임 없는 쾌락이다, 이 말이지. 그런 걸 어떻게 포기해?
“위험하다 싶으면 자제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심 폼을 올리는 한편으로 타격도 흥겹게 점검했지만. 그렇게 준비하던 내게 뜻하지 않은 소식이 전해졌다.
<고유석과 류영진의 맞대결?! 드디어 성사된 코리안 더비!>
<다저 스타디움의 마운드를 지배하는 한국인들!>
원래 등판 예정이었던 알렉스 우드가 식중독 증세를 보이면서, 뜻밖의 투수가 내 상대투수가 되었다는 소식 말이다.
어··· 형이 왜 나와요.
코쟁이한테 안타치고 슈퍼소닉으로 능욕하려고 했더니. 갑자기 밥이나 한 끼 같이 먹으려던 같은 나라 선배가 나오네.
‘첫 경기를 망친 뒤에, 일정이 꼬였다가, 다시 8일 만에 선발 등판한 같은 나라 선배한테 번트도 대고, 안타도 치고, 막 뛰어다니기도 하면···’
이야~ 너무 개새낀데?
상상만으로 내 안의 유교드래곤이 용오름 치는군.
혹시, 다저스 놈들이 이걸 노린 건가? 내 발을 묶어버리려고?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비록 타격은 작년에 두 경기밖에 안했지만, 그 임팩트가 크잖아?
내가 상대하는 투수 입장에서 아주 띠꺼운(?) 놈이라는 거야, 이미 유명할 테니까. 그에 맞춰서 가불기를 준비한 거지.
이 악랄한 다저스 놈들.
역시 강팀은 강팀인 이유가 있어. 이렇게 철저하게 판을 깔아놓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