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레인저스의 상위타선이 그리 인상적이지 못한 수준이라면, 하위타선은 당연히 그보다 못하다. 완전히 박살난 수준이지.
“스트라이크 아웃!”
그렇기에 어떤 의미에서 레인저스는 체력을 아끼기에도 딱 알맞은 상대다. 완급조절이 너무 편하거든.
7번타자 루그네드 오도어는 바깥쪽으로 멀리 날아간 슬라이더를 헛치며 4구만에 삼진으로 물러났다.
‘편하긴 편해. 경기장도 익숙하고, 타선도 약해서 그런가, 내 집 안방 같단 말이야.’
레인저스 팬들이 내 생각을 안다면 이를 바득바득 갈다 못해, 어금니가 닳아 없어지겠지만. 뭐, 이게 팩트잖아?
타선의 무게감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거지. 상하위타선의 무게가 제각각이면 투수에게 여유를 주니까.
물론 다르게 말하면 그냥 타선 전체가 강력해야 한다는 뜻이니, 애초에 그런 팀 자체는 많지 않다.
특히 내 기준에서 적당히 위협적인 하위타선을 갖추려면 더욱더 난이도가 높고. 물론 그런 걸 감안하더라도···
“아웃!”
‘레인저스는 좀 많이 쉽긴 해.’
8번타자 라이언 루아는 과감하게 초구를 노렸지만, 빗맞은 타구는 살짝 높이 뜬 뒤, 포수 글러브 안으로 들어갔다.
투구에 힘을 안 들이게 해주는 것도 모자라서, 투구수까지 아껴준다니. 이 얼마나 착한 사람들인가?
‘이렇게 편한 날은 완투도 쉽지만···’
흘끔 덕아웃을 보니, 스콧 에머슨이 내 피칭에 집중한 듯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니, 엄한 생각 품지 말라는 듯 눈을 부라리는데, 귀신이네, 귀신이야.
내가 그를 편하게 느끼는 것처럼, 그도 나한테 적응한 건지, 내 생각을 딱 알아챘군.
‘7이닝으로 만족하자.’
완투완투는 절대로 안 시켜줄 것 같으니, 그냥 허락된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하자고.
이제 한 타순의 끝이 다가왔다. 9번타자 드류 로빈슨.
작년에 데뷔해서, 제법 나쁘지 않은 성적을 찍으며 주가를 올렸지만, 이쪽도 그리 위협적이지는 않지.
‘거기다 욕심이 너무 가득가득하고.’
주전 라인업에 오른 만큼, 이참에 자리 깔고 앉고 싶어 하는 듯한 욕망이 훤히 보였다.
특히나 개미떼처럼 몰려든 홈팬들에게 어필하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한 방 날리면 조이 갈로처럼 영웅이 될 수 있으니, 내가 탐스럽게 보이겠지.
‘그런 생각은 시범경기까지만 가져야지. 정규시즌에도 끌고 오면 쓰나.’
허나 저런 종류의 눈빛은 시범경기에서 너무 많이 봤다.
아니, 마이너에서도 넘쳐나지.
제 스스로의 욕심에 잡아먹힌 타자들 말이야.
나 역시 비슷한 욕심을 품으며, 그런 놈들을 하나하나 조지면서 올라온 거고.
허나 그런 게 통하는 건 어디까지나 마이너, 그리고 시범경기 정도다.
본게임인 정규시즌 경기에서, 승부를 앞두고 저런 욕심을 풍기는 건···
“스트라이크!‘
아무런 도움이 안 되지.
‘적당히 잡으면 되겠네.’
초구 포심 패스트볼.
과감하게 안쪽으로 넣으니,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은 듯, 타자가 제대로 자세를 갖췄지만.
“스트라이크!”
그렇다고 해서 욕심을 버리지는 못했다. 본인 기준으로 칠만하도 싶으면 냅다 휘두르기 바빴으니까.
저렇게 대놓고 휘두르는 타자를 잡는 방법은 너무나도 많지. 너무나도 쉽고.
그냥 대충 브레이킹볼 하나 고르고. 위험한 코스 하나 설정하고. 거기다가 가볍게 공 하나 찔러 넣으면···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배트가 나오거든.
충분히 위력적인 브레이킹볼만 있다면야, 저런 타자를 잡는 건, 입가에 묻은 밥풀 떼는 것만큼이나 쉽지.
아니다, 그것보다 더 쉽겠네. 거울이 없으면, 밥풀 떼는 게 은근히 어려운 일이니까.
“You Suck!”
3회 말 종료.
지난 공격에서 2득점을 올리며, 점수는 이미 3대0. 한 이닝에 만루홈런이 두 번 나오며, 8점을 내기도 하는 게 야구인 만큼, 아직 따라잡을 만한 점수지만.
이미 경기를 포기해버린 건지, 홈팬들의 표정은 이제 완전히 맛이 가버렸다.
조용한 경기장에서 울리는 건 오직 레이더스의 환호성밖에 없었으니까.
그들이 그토록 기대했던 장면은 오늘 볼 수 없다는 걸 이미 깨달아버린 거겠지.
“4이닝 남았어.”
“예예, 더 던지겠다고 떼 안 쓸 테니까, 부담주지 마세요. 거 너무 집착하시네.”
“이게 다 Suck, 아니, Go 너 때문이야. 달게 받아들여.”
덕아웃으로 돌아가니, 스콧 에머슨이 얄짤없이 남은 이닝을 통보해줬다.
오늘도 흐름을 제대로 탄 만큼, 혹시라도 내가 딴 마음을 품었을까, 염려한 것 같은데. 눈치를 너무 주시네.
“앞으로 계속 퍼펙트해도 7이닝 던지고 내려가요?”
“···그러면 그냥 계속 던져야지.”
“융통성이 있으시구만.”
그치, 퍼펙트 하면 그냥 계속 던져야지. 안 그러면 오늘 따라온 레이더스가 폭동을 일으킬 테니까. 남의 집 안방에서 말이야.
그 말을 들으니 괜히 조금 혹하기는 했지만.
“아 씹···”
“세이프!”
다음 이닝 바로 혼쭐이 났다.
4회 초, 다시 한 바퀴를 도아서 선두타자로 나온 추민수 선배에게 깔끔하게 좌전 안타를 맞았다.
우리 선배님 잘하시네.
아까 전에도 눈치가 괜찮다 싶더니, 기어코 후배한테 안타를 먹이시는구만.
1루에 안착한 선배를 보니, 괜히 배신감이 들어서 입을 삐죽거렸지만.
“Go Choo! Go Choo!”
“Choo! 난 너 믿었어! X신들은 죄다 네가 먹튀라고 했지만, 난 믿고 있었다고!”
“Choo Choo Train 가자!”
“그래! 원래 후배는 강하게 키워야지! Choo 네가 진짜 프로다!”
선배는 한순간 영웅이 됐다.
이야, 조용해졌던 사람들이 안타 하나 나왔다고 되살아났네.
침울한 표정이던 홈팬들은 벌떡 일어나더니 아주 경기 시작 때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Choo! 너 이러기야?”
“X발 고향 후배한테 너무하네!”
“퍼펙트 각이었는데, 왜 망치고 지랄이야! 이 배신자 새끼!”
반대로 레이더스는 나처럼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사실 배신자는 아니긴 한데··· 아무튼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 같겠지.
그렇게 한순간 다시금 달아오른 경기장. 퍼펙트를 깨트리고, 다시 희망을 되살린 안타가 반가운 것도 있겠지만, 그다음 타자의 영향력도 컸다.
“조이! Choo가 기회 만들었으니까, 투런 날려버려!”
“네가 트라웃보다 더 나으니까, 너도 Suck 새끼한테 투런 하나 먹여버려!”
“Home Run! Home Run!”
조이 갈로.
그의 앞에 밥상(?)이 차려졌으니까.
사실 주자 1루 가지고 밥상이라고 부른다면, 밥 먹는 게 너무 힘든 거기는 한데.
어쨌든 주자가 나갔으니,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는 거겠지. 어쩌면 작년 무실점을 깨트렸던 트라웃처럼 나한테 투런 먹여주지 않을까, 하면서.
그런 당신들의 기대.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으로 변환됐다.
어딜 흥에 취해서 영웅 스윙을 하고 있어. 맞아 죽으려고.
뜻밖의 안타에 머리가 얼얼하긴 했지만, 본격적인 가속을 시작하며 몰아붙이니. 조이 갈로는 선풍기질만 냅다 세 번 하면서 물러났다.
‘그래도 좀 무섭기는 하네. 무슨 놈의 스윙이 저렇게 우렁차.’
확실히 맞으면 골로 갈 것 같긴 하네. 작년에 홈런 맞은 것처럼. 물론 맞는다면 말이야.
맞지만 않으면, 지금처럼 삼진 잡는 게 그리 어려운 타자는 아니지.
“아아아···”
기대했던 조이 갈로가 다시금 손쉽게 처리되자, 억지로나마 텐션을 올렸던 홈팬들은 다시 탄식만 뱉으며 축 늘어졌다.
그래도 여전히 주자가 나가 있기는 했기에, 실낱 같은 기대감은 품는 것 같지만.
“아웃!”
“아웃!”
3번타자 엘비스 앤드루스와 4번타자 아드리안 벨트레가 나란히 범타로 물러나며, 찬스는 날아갔다.
‘연속 삼진 끊었네. 작년 막판부터 계속 이어지지 않았던가? 기분 좋으시겠어.’
그나마 아드리안 벨트레가 내 상대로 쭉 이어오던 연속 삼진을 드디어 끊어냈다는 게 유일한 수확이었다.
본인은 그리 기뻐 보이지는 않았지만. 혹시 모르지, 분위기 상 표정관리하는 걸지도.
“Fuck!”
아닌가?
덕아웃으로 돌아가시다가 욕 한번 시원하게 박으시네. 아직 화가 많이 남아 있나봐.
‘어우, 이번에도 You Suck소리 들었으면 진짜 혈압 터졌겠네.’
이번에도 삼진당하고 레이더스한테 조롱당했다면, 아마 진짜로 넘어갔을지도 모르겠어.
리빙 레전드를 내 손으로 죽이지 않게 돼서 다행이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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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글로브 라이프 파크에선 장례식이 3번 열렸다.
4월 8일에 한번.
5월 13일에 한번.
마지막으로 9월 28일에 한번.
특히 그중에서 마지막 장례식은 가장 처절했고, 가장 성대했었는데. 그 이후로 7개월 만에 다시 알링턴에선 엄중한 장례식이 이어졌다.
얼마나 엄숙한 분위기면, 덕아웃 안의 누구 하나 입 밖으로 숨소리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스트라이크 아웃!”
‘아니, 사형식인가?’
장례식처럼 우울한 분위기였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사형식이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분위기가 비슷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한 추민수는 흘끔 주변을 둘러봤다.
“하아···”
“올해도 X같네.”
“이번엔 팬들한테 며칠 정도 욕 먹으려나.”
“최소한 퍼펙트는 아니잖아? 그나마 다행이지.”
“저 새낀 왜 더 X같아져서 왔어? 시범경기 때도 심상치 않더니.”
“릴리스 포인트 때문에 죽겠어요. 계속 바꿔대는데, 타이밍을 못 잡겠네.”
“아드리안, 혹시 무슨 노하우라도··· 아, 죄송합니다.”
“Choo는 안타 어떻게 쳤어요?”
“그냥, 적당히 휘둘렀지. 공 안 보고 게스히팅으로. 그쪽이 훨씬 나을걸?”
작년부터 애슬레틱스와 경기를 가지면, 추민수는 언제나 좌불안석이었다.
사형 집행자와 같은 국적이라는 이유로 팬들이 그를 보는 시선이 그리 곱지는 않았으니까.
사실 국적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애슬레틱스, 아니, 고유석, 저 후배가 등판하는 경기는 특히나 몸가짐을 바로 해야 하지.
‘아드리안은 넋이 나갔네.’
비법을 물어보는 동료에게 대답해준 추민수는 아드리안 벨트레를 슬쩍 확인하다, 이내 눈을 돌렸다.
눈시울이 붉었으니까.
아니, 그냥 얼굴 전체가 붉었다. 마치 한도까지 열이 달아오른 용광로의 쇠처럼.
오늘이 장례식이라면, 상주는 아마도 아드리안 벨트레일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아웃!”
이런 분위기를 읽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읽을 생각이 없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오히려 즐기고 있는 건지.
마운드의 투수는 그저 한없이 무자비했다. 작년 텍사스 레인저스에게 충분한 굴욕을 안겨줬는데도 말이다.
‘오늘은 그나마 안타라도 하나 쳐서 다행이지···’
그나마 본인이 퍼펙트를 깨지 않았다면, 이번에도 자칫 불똥이 튀었으리라고 추민수는 확신했다.
경기를 지켜보는 관중들의 얼굴이 심상치가 않았으니까.
“스트라이크 아웃!”
“You Suck!”
본인들이 사랑하는 슈퍼스타를 닳은 건지, 마찬가지로 눈치가 더럽게 없는 원정팬들도 그런 분노에 큰 몫을 했고.
5회 역시 순식간에 종료.
경기는 마치 누군가가 강제로 미는 것처럼 휙휙 지나갔다.
“쟤 슬슬 멈출 때 되지 않았어?”
“원래는 한계가 3이닝이니 다음 이닝이 마지막이긴 한데··· 저번 에인절스전에서는 5이닝을 유지했잖아.
“에휴, 릴리스 포인트도 X같은데. 저런 것까지 키워서 왔네.”
저 속도야 레인저스 역시 너무나도 잘 아는 것이긴 한데. 그 유효시간이 더 길어졌다는 게 조금 문제였다.
비록 한 경기이기는 하나, 개막전에서 에인절스에게 5이닝 동안 쭉 퍼붓던 모습은 분석 자료로 남아, 레인저스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으니까.
“설마 완봉하지는 않겠지?”
“에이, 설마··· 두 경기 연속으로 한다고?”
“Go, 저 새끼라면 가능할지도··· 워낙 미친놈이라서, 감이 안 잡히네.”
수비를 위해 걸어나가며 중얼거린 말들이, 어쩌면 지금 레인저스의 상황과 선수들의 정신을 설명해줬다.
다들 완봉이라고 표현했으니까.
완투가 아니라, 완봉이라고.
상대 선발투수가 끝까지 던지더라도, 자신들이 점수를 내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는 것처럼.
그것이 조금 우습게 느껴지면서도, 추민수 역시 크게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아···”
6회 초, 수비는 다시금 실점을 낳았다. 애슬레틱스가 1점을 더 추가했으니까.
그나마 팬들이 실점이나 수비는 상관없다는 듯이 굴기는 했지만.
‘그건 우리가 타격을 잘했을 때의 얘기지.’
기대를 걸었던 공격이 번번이 막히고 있었기에, 수비에서의 면책특권은 이미 희미해졌다.
“X발 안타도 못 치고, 공격도 못하면서, 실점은 더럽게 하네.”
“수비 안 바라니까, 제발 Go 저 새끼한테 한방 먹이라고 좀!”
“공격 X같이 할 거면 실점이라도 하지 마!”
아니나 다를까, 홈팬들은 분노에 찬 노호성을 선수들에게 토해냈지만. 사실 그마저도 소수에 불과했다.
대다수는 이미 포기해버린 것처럼 한숨을 쉬면서 멍하니 그라운드를 내려 보거나,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있었으니까. 이젠 모든 기대가 사라졌다는 것처럼.
“쪽팔린다, 진짜. 홈에서 뭔 개쪽이야···”
“오늘 포함해서 홈에서만 네 번 만났는데, 아직도 무득점이라는 게···”
“팬들이 화내는 것도 당연하긴 하지. 이젠 화도 안 내지만.”
그런 팬들의 반응이 오히려 레인저스를 부끄럽게 만들었고, 어떻게든 분위기를 살려보자며, 의욕을 내기도 했으나.
“스트라이크 아웃!”
현실은 더럽게 가혹했다.
다시 공수가 교대되고, 이닝이 시작된 순간부터 삼진이 올라갔다.
8번타자 라이언 루아는 별다른 반항조차 하지 못하면서 물러났고 말이다.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곧이어 9번 드류 로빈슨이 또다시 투 스트라이크까지 몰렸을 때. 이미 그를 포기한 듯.
이번 이닝에 세 번째 타석이 돌아오는 만큼, 미리 준비를 하고 있던 추민수에게 기대가 쏟아졌다.
“Choo! 하나만 더 쳐줘! 제발!”
“너밖에 없다, 너밖에 없어!”
“오늘 멀티히트하면 앞으로 한 열 타석, 아니, 스무 타석은 못쳐도 괜찮아!”
“X발 홈런 날려버려! 너라도 그렇게 해달라고!”
고액연봉자인 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던 팬들이 오죽하면 이렇게 매달릴까 싶어, 괜히 마음이 무거워 졌지만.
애써 침착하게 가슴을 가다듬었다. 이미 몇 번이나 상대해본 만큼, 빈틈을 보여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잘 알았으니까.
“아웃!”
드류 로빈슨이 내야땅볼로 물러나고. 다시 타석에 올랐을 때, 마운드의 투수는 미묘한 시선을 보냈다.
이번이 세 번째 타석인데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했지. 분위기에 눈치가 보여서.
‘안타 때린 것 때문에 꽁했네.’
아까 전, 입술을 삐죽이기도 했으니, 아마 감정이 상한 거겠지. 물론 둘 다 프로이기에, 진심으로 그런 건 아니겠지만.
“Choo, 너무한 거 아니에요? Suck이 얼마나 서운해 했는데.”
“내가 더 서운하다, 내가 더 서운해. 나한테 잡은 삼진, 범타는 생각도 안 해?”
“···그렇긴 하죠.”
진심을 담아 토로하니, 슬쩍 트래시 토크를 하려던 포수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래, 안타 하나는 아무것도 아니지. 레인저스를 쓸어버리면서, 추민수 자신도 제법 당했으니까.
“스트라이크!”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일 테고. 초구로 날아온 너클 커브. 그 괴악한 궤적이 인상적인 구종인데.
역시나 엄청나게 꺾이더니, 바깥쪽 보더라인에 딱 걸쳤다.
‘진짜···’
궤적이 대단하나.
역시 진짜는 이거다.
이제 경기가 후반에 접어들었는데도, 여전히 칼 같은 제구 말이다.
엄청나게 꺾이고, 떨어지는 공인데도, 정확하게 컨트롤 해서 딱 선에 걸치는 제구력은 볼 때마다 구역질이 솟을 정도였다.
‘작정했네.’
그 날카로움이 투수가 마음을 잡았음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 더 껄끄럽기도 했고.
“볼!”
2구는 볼.
다시 바깥쪽에 걸친 포심 패스트볼이었는데, 이번에는 살짝 나갔다.
‘89마일··· 이게 무슨 야구게임도 아니고···’
전력투구를 하면서, 살짝 컨트롤에 미스가 난 거겠지. 미스난 게 저 정도인 거고.
이제 6회 말인데도 여전히 손쉽게 최고구속을 찍는 모습은 마치 저스틴 벌랜더를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 편하게 야구한다는 생각이 들게 한 선수였는데, 눈앞의 후배 역시 마찬가지지.
심지어 저번 경기는 9회에도 최고구속을 찍었다고 했던가? 대단치 않은 구속이라고 해도. 어쨌든 본인 최대 출력인데, 쉽게 제어하는 모습은 한때는 투수였던 입장에서 조금 황당하게 느껴졌다.
“스트라이크!”
3구는 몸쪽.
바짝 붙어서 날아왔는데, 릴리스 포인트가 바뀌면서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다.
그대로 움찔거리기만 하면서 스트라이크. 그래, 이런 것도 새로 생겼지.
두 가지 릴리스 포인트라니.
상대하는 입장에선 머리가 터질 지경이 됐다. 공 하나하나가 죄다 다르게 보였으니까.
‘보지 말자, 보지 말자. 봐봤자 좋을 것도 없다. 그냥 보지 말자.’
어느 정도 적응하기 전까지의 답은 결국 하나다. 앞서 동료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냥 안 보고 게스히팅 하는 것.
물론 그것도 힘든 일이지만 말이다. 구미호라도 되는 건지, 구질이 아홉 개에 달했으니까.
이번에도 부디 행운이 따라주길 기도하며, 입술을 꽉 깨문 추민수였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애석하게도 그의 배트는 허공을 갈랐다. 헛스윙 삼진. 그렇게 다시 이닝 종료.
무너진 자세를 다시 일으켜 세운 추민수는 여기저기서 울리는 탄식에 흘끔 관중석을 확인했다.
앞서 보았던 것처럼, 오히려 큰 반응은 없었다. 거무죽죽하게 죽은 눈을 했을 뿐.
허나 그는 잘 알았다.
지금 당장만 저렇게 잔잔할 뿐, 경기가 끝난 뒤, 시간이 흘러 멍했던 정신이 다시 깨어나 감정이 되살아나면···
‘또 난리가 나겠지.’
거대한 대화재처럼 분노로 들끓으리라는 것을. 이미 세 번이나 보았으니까. 그런 광경을.
그나마 안타를 쳐서, 불똥이 튀지는 않겠지만, 바짝 머리를 숙이고 있어야 하리라.
‘이번에도 같이 밥 한 끼 먹기는 글렀네.’
선배 된 도리로, 지난 번 오클랜드 원정에서 받았던 대접을 다시 돌려주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이번 역시 그냥 넘겨야 할 것 같았다.
어쩌면 앞으로 영영 기회가 없을 지도 모르고. 팬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홈에서 만나 밥이라도 먹이려면, 고유석이 못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글로브 라이프 파크에서 난타 당하는 모습은 그려지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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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유지할 거지?”
“그래야지, 체력이 남네.”
“Suck 너 대체 겨울 동안 무슨 훈련을 한 거야? 원래도 이닝이터이긴 했지만···”
많은 일이 있기는 했지.
브루스는 쌩쌩한 내 모습을 보며 인간 이외의 무언가를 보는 것처럼 눈동자가 흔들렸다.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고.
사실 좀 힘들긴 하다.
저번 경기보단 훨씬 힘들지.
그때랑 비교하면 쉰 기간이 다르니까.
하지만 확실히 체급 자체가 커지긴 한 건지, 3이닝 동안 빡세게 달렸는데도, 여전히 여력이 꽤나 남아있었다.
‘앞으로도 대충 4이닝 정도는 유지할 수 있다고 봐야겠네. 나쁘지 않아.’
물론 상대팀이 약한 것도 어느 정도는 체력에 영향을 주기는 했다. 편하게 던질 수 있었으니까.
아마 조금 더 빡센 타선을 상대로 한다면, 지금보다는 더 힘들겠지. 그렇더라도 체력이 남긴 하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오늘 내 마지막 이닝을 앞두고, 레인저스 덕아웃을 쭉 훑었다.
“조용하니까, 더 무섭네.”
“아, 내일 분위기 장난 아니겠다.”
“Suck 얘 나온 다음 경기는 늘 그렇잖아? 뭐, 어쩔 수 ᅟᅥᆹ지.”
도란도란 대화도 나누고, 미래에 대한 걱정도 하고 하면서 흥겨운 우리쪽과는 달리.
반대편은 초상집처럼 우울함이 감돌았다. 분명 같은 공간 안에 있는데도 날씨가 다른 느낌이네.
이쪽이 햇빛이 쨍쨍한 화창한 날이라면, 저쪽은 비바람이 몰아치는 우중충한 장마철 같다고 해야 하나?
‘아마도 비구름은 나일 거고.’
비구름은 초큼 약해 보이니까, 폭풍우라고 하자. 상대팀에겐 폭풍 같은 남자 고유석. 꽤나 멋지구만.
“Suck, Suck! 무슨 망상을 하길래 그러고 있어? 안 나가? 지친 거야?”
“어, 가야지 가야지. 안 지쳤어. 걱정하지 마. 아니지, 아닌가?”
홀로 개소리를 상상하고 있으니, 벌써 공격이 끝난 듯, 이미 포수장비를 차려입은 브루스가 내 정신을 일깨웠다.
아직 거뜬하기는 한데.
확실히 체력이 빠지긴 했나봐. 이닝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잡생각이나 하는 걸 보면.
역시 아직 철인이라고 하기에는 멀었구만. 더욱더 정진해야겠어.
“가자. 2번부터 시작이던가?”
“어, 2번부터야. 조이 갈로, 엘비스 앤드루스, 아드리안 벨트레네.”
“주의할 사람은?”
“조이 갈로야 뭐, 말하는 게 귀찮고. 그나마 앤드루스 정도? 벨트레는 좀 안쓰럽더라. 타석에 오를 때마다 콧김을 내뿜는데··· 보는 내가 다 걱정이야.”
배터리가 맞긴 하네.
얘도 같은생각인 거 보면.
벨트레가 좀 걱정스럽긴 하지. 전적으로 나 때문에.
안타라도 하나 친다면, 그나마 울화가 꺼지고, 속이 후련해지겠지만. 그럴 수야 없지.
“마지막인데 후딱 잡고 끝내자. 빡세게 갈 거니까, 잘 잡아.”
“아···”
어차피 마지막 이닝이고, 완투는 절대로 안 시켜줄 것 같으니, 남은 힘을 모두 털어 넣어야 할 테니까. 미련이 남지 않도록.
다시 마운드에 오르자, 분위기는 잔잔했다. 처음과 정 반대구만.
물론 그 잔잔한 바다 아래에선 마그마가 부글부글 끓고 있겠지만, 어차피 오늘 안 터지지는 않을 테니까.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조이 갈로, 아직 감을 못 잡았던데.’
이닝 선두타자로 나온 조이 갈로, 여전히 감을 잡지 못한 것 같았기에 크게 염려하지는 않았-
“엌-”
“가- 갔다! 가라! 가라!”
“제발! 제발 넘어가!”
염려해야지. 염려 해야겠네.
초구로 포심을 던졌는데,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제대로 받아쳤다.
그대로 쭉 뻗는 타구.
살짝 타이밍이 어긋난 것 같은데도, 일단 배트에 맞은 공은 훨훨 잘도 날아갔다.
그것을 보니 뒷목이 서늘해졌고, 좀비처럼 늘어져 있던 홈팬들은 화들짝 놀라며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아웃!”
다행히 우익수, 크리스티안 옐리치가 펜스 앞, 워닝트랙에서 잡아냈다. 와, X바 진짜로 넘어가는 줄 알았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X발 바람아 좀 불어라, 불어!”
“X바아아알! 저게 왜 안 넘어가, 왜! 왜!”
홈팬들은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절규했다. 혹시나 했는데, 이번에도 기대가 산산조각이 났으니까.
결국에는 화가 터져버린 건지, 고막이 터지도록 절규를 토해내기도 했고 말이다.
‘어우, 식겁했네. 역시 저런 타입이 제일 무섭다니까.’
홈팬들이 아쉬워했다면, 나는 뒷목이 서늘했다. 방심했더니, 바로 한방 날려주시는구만. 타이밍만 조금 더 잘 맞았으면, 진짜 넘어갔겠는데?
소중한(?) 알링턴 무실점 전설을 막판에 깨트릴 뻔했어.
확실히 저렇게 뻥파워가 좋은 타자들, 스탠튼이나 쟤처럼 고릴라 같은 타입들을 상대할 때는 마음을 놓으면 안 된다니까. 언제 한방이 터질지 모르니 말이야.
본인도 아쉬운 듯 탄식하듯 한숨을 내쉬며 돌아가는 조이 갈로를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며.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조금 느슨해졌던 긴장감일 다시금 바짝 조였다.
‘집중하자, 집중.’
“아웃!”
그대로 긴장감을 유지한 채, 최대한 집중해서 이를 악물고 던지며, 뒤이어 나온 엘비스 앤드루스를 5구만에 범타로 처리했고.
마지막으로 4번타자, 아드리안 벨트레에겐···
“스트라이크 아웃!”
“You Suck!”
“진작 이랬어야지!”
“지난 타석에서도 이렇게 당했으면 오죽 좋아! 아드리안 너 처신 잘해라! 쩨쩨하게 범타 치지 말고 지금처럼만 해!”
하이 패스트볼로 오늘 내 투구의 마지막을 장식할 삼진을 뽑아내며, 그에게 다시금 고혈압을 안겨줬다.
다행히 쓰러지진 않았네.
베테랑이라서 분노를 잘 제어하는구만. 보고 배워야겠어.
그렇게 24이닝 무실점이, 31이닝까지 연장되면서, 올해 첫 알링턴 원정이 막을 내렸다.
“7이닝 1피안타 12탈삼진 무실점이라··· 알링턴에서 이 정도면 적당히 평범한 정도네.”
완봉도 하고, 퍼펙트도 했던 곳인데, 이 정도는 그럭저럭 무난하다고 해야지.
작년에 세 경기에 24이닝 34탈삼진 무실점이니, 대충 평균 내면 7이닝 11탈삼진 정도니까.
“그 말 그대로 저~기 관중석에 있는 사람들한테 해봐라. 어떤 반응을 보일까, 좀 궁금하네.”
“총 맞고 죽으라는 말을 뭘 그렇게 돌려서 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