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댈러스-포트워스 공항에 내리는 순간 바로 알아차렸다.
여긴 날 정말로 싫어한다는 것을.
바로 구단 버스에 타서, 호텔로 직행했고, 버스 창문에 커튼이 처져 있어서 바깥 분위기를 딱히 보지도 못했지만, 척하면 척이지.
“저거 Suck이지?”
“누구?”
일단 마주치는 사람마다 나를 알아보는 건 오클랜드와 똑같다. 어쩔 수가 없지, 내 유명세는 하늘을 뚫고 있으니까.
그렇기에 Suck이라거나, Go라거나 아니면 You-Suck이라거나 하면서 자기 편할 대로 지칭하며, 날 알아봤지만.
“X같은 새끼···”
“저- 저 X새끼가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여기에-”
“X발새끼, 길 가다 차에 치여버려라.”
그 외에는 오클랜드와 정반대였다. 환호나 환희, 반가움 같은 게 아니라, 저주, 그것도 아주 증오가 가득 담긴 저주가 쏟아졌으니까.
오클랜드가 나를 사랑하고, 굳건한 신앙심으로 가득하다면, 댈러스-포트워스. 그리고 알링턴은 딱 그것과 반대되는 감정으로 가득 찼다.
“이야, 여기서도 다들 SuckSuck이네. 좋겠다?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서.”
“내가 인기가 많기는 하지.”
“미친놈이냐? 이게 인기로 보여?”
“원래 증오와 애정은 동전의 양면 같은 법이지. 저거 봐, 날 알아보고 자기감정을 충실하게 표출하잖아? 이게 인기가 아니고 뭔데?”
오직 환대만이 가득했던 도시에 입성했던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지만. 한편으론 이것도 마음에 들었다.
어쨌거나 도시 전체가 나한테 집중하고 있다는 거잖아?
‘이번에도 바깥 구경 하기는 글렀네. 여기 온 게 이번에 몇 번째인데, 어째 도시 풍경은 하나도 모르는구만.’
다만 그 관심이 너무나도 지대해서, 아쉽게도 이번 텍사스 원정 역시 기내 도박으로 열심히 벌어들인 밀머니를 사용하지 못할 것 같았다.
“다들 분위기 안 좋으니까, 웬만하면 호텔에 있고, 나가고 싶으면 뭉쳐서 다녀. 최소한 세 명 이상.”
코칭 스태프들도 도시 전체의 분위기를 읽은 건지, 선수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줬다.
이보다도 더 완벽할 수가 없는 어웨이로 왔으니, 몸가짐을 조심해야 할 테니까.
“Go 너는 그냥 밖에 나가지 말고. 경기장이랑 호텔에만 있어. 괜히 레인저스 팬한테 걸리면 맞아죽을 테니까.”
“얌전히 안에 처박혀 있겠습니다.”
나는 뭐, 당연히 감금 신세고. 이미 예상했던 일이니, 상관없지.
“Suck 너 2차전에 나오던가?”
“어, 문제가 없는 한.”
“아씨, 그럼 3,4차전 빡세겠네.”
“얘 나온 다음 경기는 분위기가 살벌해서 손이 다 떨린다니까.”
“Suck 너 그냥 시리즈 마지막에 나오면 안 되냐? 그래야 경기 끝나고 후딱 도망가지.”
4연전에서 나는 2차전에 등판하는데. 그것을 아는 시미언이나 제드 라우리 같은 동료들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살벌하게 털고 나면, 분위기가 싸해지거든. 특히 레인저스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런 상황에서 두 경기를 더해야 하니, 상상만으로 막막하겠지. 물론 내 알 바 아니지만.
난 내 경기에서 알아서 잘할 거니까, 남은 경기는 본인들도 알아서 하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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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잠자리에 민감한 타입은 아니다. 시끄럽지만 않으면 딱히 상관없지.
어쩔 수 없이 잠자리가 계속 바뀌는 메이저리거로서 딱 좋은 체질이라고 할 수 있겠네.
그런 타고난 체질 덕분인지, 첫 원정인데도 몸은 말끔했다. 물론 개막전과 비교하면 조금 덜하긴 하지만, 개막전은 X나게 오래 쉬었으니까. 그거랑 비교하면 안 되지.
‘슬슬 일어나 볼까.’
그래도 오늘 역시 완투 정도는 거뜬할 것 같네. 저번 경기처럼 중간부터 끝까지 쭉 달리는 건 힘들겠지만.
‘확실히 이젠 4이닝 정도는 거뜬하게 유지할 수 있어.’
대니얼의 말마따나, 딱 알맞은 체형을 찾은 게 크겠지. 지금 정도면 그래도 철인은 좀 그렇더라도 동인 정도는 되겠어.
“딱 내려올 것 같더라니, 역시 바로 오네.”
“Suck, 여기야. 여기 앉아.”
깨끗한 몸을 즐기며, 비몽사몽 호텔 식당으로 내려가니, 역시나 우리가 점령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막 내려온 건지, 아식 수저도 뜨지 않은 브루스가 슬쩍 손을 흔들며 나를 불렀다.
테이블에는 브루스, 시미언, 라우리가 있었는데, 여기까지는 원래 멤버고. 옐리치도 추가됐구만.
“좋은 아침, 에이스.”
“아, 그래, 크리스 너도 좋은 아침. 아니, 아침인가?”
“오후인데 아침은 무슨.”
크리스티안 옐리치가 인사하기에 받아주기는 했는데, 확실히 아침은 아니지.
저녁 경기라서 그에 맞춰서 준비한 만큼, 이미 정오를 훌쩍 넘긴 시간이니까.
그래도 우린 방금 막 일어났으니, 생체시계 기준으로는 아침이 맞기는 하겠네.
대니얼이 짜준 식단대로 요리를 집어 담은 뒤, 테이블에 앉으니, 제드 라우리가 무언가를 대뜸 보여줬다.
우리 SNS 중독 아저씨께서 이번엔 또 뭘 보셨나.
“이야~ 합성 잘했네. 프로의 실력인데요?”
“널 이렇게 만들겠대.”
“살인 예고인데, FBI에 신고해야 하지 않나?”
“괜찮아, Suck 얘 건드리는 순간, FBI가 아니라 레이더스가 출동할 테니까.”
“FBI보다 100배는 더 무섭네.”
혹시 누가 도발이라도 했나 싶었지만, 딱히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뭐, 레인저스 팬들의 반응이지.
내 사진을 합성해서 화형을 시키고 있다거나, 살인 예고를 한다거나, 지옥으로 꺼지라며 저주를 퍼붓거나. 늘 보는 것들이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이 정도로 나쁘면 쓰나.
오늘 마운드에 오르면, 면전에다 대고 더한 욕도 해댈 텐데.
“팬들의 죄는 선수들이 갚아야지. 브루스, 어제 타자들 보니까 좀 어떻든?”
“뭐, 맛이 갔지. 너도 봐서 알겠지만, 그냥 다들 좀 별로더라.”
일단 1차전은 승리로 끝났다.
시작부터 엄청나게 환영해줬는데, 그걸 뚫고서 우리가 5대1로 승리를 가져왔지.
그 승리에는 올해 우리 기세가 좋은 것도 있지만. 레인저스의 기세가 나쁜 것도 컸다.
브루스의 말처럼 나도 벤치에서 보니까, 딱 봐도 좀 그렇더라고. 흥분에 찼던 홈팬들과는 영~ 달랐지.
“하나 같이 타격감이 좀 별로긴 하더라. 레인저스 개막전 자료 찾아보니까, 개막전 시리즈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아직 표본이 많이 적기는 하지만, 레인저스 타선의 초반 분위기는 별로 즐거워 보이지는 않았다.
사실 작년부터 타선 전체가 침체되어 있었으니,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긴 하겠지만.
물론 나름대로 한 방이 있기야 하겠지만, 그리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그나마 위험한 타자는···’
“조이 갈로는 어때 보여?”
“고릴라지, 고릴라. 걘 사실 타격감은 상관없지 않아? 타격감이고 나발이고, 한번 걸리기만 하면 넘어가는데.”
“그렇긴 하지.”
그나마 조이 갈로 정도가 제일 위협적이기는 한데, 단점도 워낙 명확한 선수라, 상대하기 까다로운 타입은 아니다.
“그래도 수비하면서 보니까, 확실히 콜리시엄보다 담장이 좀 가깝기는 하던데. 조심해. 콜리시엄에서 뜬공도 여기서는 넘어가겠더라.”
어제 솔로포를 터트렸던 크리스티안 옐리치는 콜리시엄과 전혀 다른 글로브 라이프 파크의 매력에 흠뻑 빠진 건지, 그렇게 경고하기도 했지만.
테이블의 다른 선수들은 피식피식 웃었다.
“왜? 맞는 말이잖아?”
크리스티안 옐리치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고, 텃세를 부리는 건가 싶었던 건지, 눈살도 찌푸렸지만, 마커스 시미언은 그런 게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다.
물론 그의 지적은 타당하다.
나도 글로브 라이프 파크에 올 때면 항상 주의하고는 한다. 아주 제대로 된 타자구장이고. 당장 파크 팩터만 봐도 콜리시엄과 정반대의 양상이니까.
홈런을 잘 만들지.
쿠어스 필드 같은 부정구장 수준은 아니긴 한데. 어쨌든 리그에서 알아줄 정도로.
하지만···
“그래, 정확한 지적이긴 한데. Suck 얘한테 그러니까 좀 웃겨서.”
“크리스, 얘한테 레인저스 원정 걱정하는 것만큼이나 쓸데없는 행동이 없으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
그런 타자구장의 주인은 나다. 콜리시엄과 마찬가지지. 원래 제일 잘하는 놈이 주인인 법이거든.
“얘 작년에 레인저스 원정에서 24이닝 34탈삼진인가 그럴걸? 완봉 한 번에 퍼펙트 한 번으로. 무실점이지.”
“최다 탈삼진도 여기서 했지. 레인저스 경기에서 얘 걱정은 하지 마.”
“···그래야겠네. 레인저스 팬들이 Suck을 보면서 이를 가는 이유가 있었어.”
“원래 이유 없는 증오는 없는 법이지.”
브루스의 친절한 설명에 크리스티안 옐리치는 헛웃음을 흘렸다. ‘미친놈인가?’하는 표정으로 날 보기도 했고.
레인저스 팬들은 무언가를 착각하고 있다. 날 겁주고, 위협하면 내가 언젠가는 기가 질려서 흔들리지 않을까, 하는 거지.
작년 내내 그랬는데도 나한테 털렸던 건 기억 못하고 말이야. 오늘도 마찬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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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그 시간이 왔네.”
“겨울 동안 콱 뒤져버리지, 팔다리 멀쩡하게 다시 돌아왔어. 개 같은 새끼.”
경기를 앞두고, 준비를 갖췄을 때, 레인저스 팬들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늘 등판할 투수를 떠올리면, 마치 당연한 생리현상처럼 저절로 푹 내쉬었으니까.
Go.
이 증오스러운 이름.
사악한 악마가 여러 이름을 가졌듯이, 이 사탄에게도 여러 가지 명칭이 있었다.
흔하게는 Suck이 있고.
“You Suck!”
“텍사스 레드넥 X신들아 잘 지냈냐! 오늘도 You Suck의 시간이다!”
“It’s Suck Time!”
오늘도 여지없이 원정을 쫓아온 약탈자들이 외치는 You Suck도 있다.
이쪽은 레이더스로 인한 트라우마를 자극하기에, 그리 자주 거론되지는 않는 편이지만.
특히 작년 마지막 대결에서 하룻동안 무려 열아홉 번이나 You-Suck 소리를 들었기에, 노이로제가 걸린 사람들도 많았고.
그 밖에도 염소(Goat)라는, 그 악마를 추종하는 빌어먹을 놈들이 자주 칭하는 칭호도 있고.
아메리칸 서부의 폭군이라거나, 레인저스의 저승사자 같은 조금 낯부끄러운 별명도 있다.
그런 놈이 다시 글로브 라이프 파크로 왔다. 작년 여기서 했던 짓들을 벌써 잊은 건지, 너무나도 당당하게. 자기 집 안방처럼.
“만약에 권총에 총알 두 발이 있는데, 눈앞에 Suck이랑 사자가 있으면 뭐부터 쏘냐?”
“사자한테 두발 갈기고, Suck 새끼는 손잡이로 인중을 찍어야지. 총으로 죽이는 건 너무 자비롭잖아.”
종종 레인저스 팬들 사이에선 이런 농담 같은 말들이 돌았지만, 최소한 그를 바라보는 눈빛과 감정은 농담이 아니었다.
최근 수십 년을 통틀어서, 레인저스에게 최악의 굴욕을, 역사에 길이 기억될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선사한 선수니까.
“393삼진··· 잊혀지기는 할까?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글쎄··· 아무도 모르지. 놀란 라이언이 코팩스 기록 갈아치운 게 9년 걸렸고. Suck 저 새끼가 다시 44년이 걸렸으니까··· 감도 안 잡히네.”
그렇기에 울분에 찬 얼굴로 팬들은 글로브 라이프 파크로 향했다. 누군가 본다면, 이번 경기가 개막전인 건가, 착각할 정도로.
수많은 인파가 빽빽하게 몰려든 경기장 안은 오직 한 사람을 향한 적대감으로 가득 찼고.
그라운드에 애슬레틱스 유니폼이 나타난 순간 그런 분위기는 더욱더 짙어졌다.
“조이가 해줄 거야. 분명해.”
“홈 무득점도 이번에 깨야지. 1년이나 당했으면 충분해.”
그들은 깊이 바랐다.
부디 작년 레인저스의 묵은 한을 조금이나마 어루만져주었던 것처럼, 오늘도 홈런, 큰 거 한 방이 나오기를.
혈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올라갔고, 해는 이미 한참 전에 저버려, 일교차 때문인지, 조금 쌀쌀한 저녁이 찾아왔는데도 후덥지근할 정도의 열기가 감돌았을 무렵.
어느덧 준비를 마친 그라운드에는 레인저스 선수들이 각자 본인의 포지션으로 향했다.
“오늘은 이겨라!”
“X발 루징 시리즈 당해도 되니까, 제발 오늘만 이겨!”
“큰 거 안 바란다! 1점이라도 내! X발 10점을 실점해도 상관없고, 20점도 상관없으니까. 수비는 그냥 신경쓰지 말고, Suck 새끼만 두들겨!”
수비 진형을 갖추는 선수들에게 득점, 무조건 득점을 요구하는 모습은 조금은 우스워 보일 수도 있었으나.
최소한 그렇게 외치는 홈팬들의 얼굴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비웃을 수 없었다.
눈가가 빨개질 정도로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으니까. 작년부터 이어진 악몽이 끝나기를.
“세이프!”
그렇게 시작된 경기.
1회 초부터 실점이 나왔다.
시즌의 시작을 좋게 끌어가고 있는 애슬레틱스는 날쌘 타격감을 자랑하며 1득점을 올려냈고.
경기 시작부터 한방 날아온 펀치에 얼굴이 얼얼할 법 한데도, 레인저스는 개의치 않았다.
“1점이면 됐어! 점수 좀 내줘도 돼! 공격에만 집중해!”
“배트만 잘 휘둘러! 오늘 야수는 필요 없으니까!”
어차피 오늘 목표는 따로 있었으니까. 상대가 얼마나 점수를 내든지 간에 말이다.
가드를 내리고 오직 펀치와 그것에 담긴 한방에만 집중하는 복서처럼 레인저스 팬들은 오직 한방, 통쾌한 한 방을 원했다.
이후 추가적인 실점 없이 1회 초가 마무리 지어졌고, 다시 불펜의 문이 열렸을 때. 드디어···
“Suck! 오늘도 잘하-”
“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뒈져라 X새끼야!”
“여기가 니 무덤이다!”
“Fuck You-Suck! Fuck Korean!”
그가 입장했다.
평소처럼 원정을 따라온 레이더스는 한 곳을 점거하고 그들의 영웅, 아니, ‘신’을 맞이했지만.
그들의 우렁찬 환호성조차, 수만 명이 내지르는 야유 속에선 가볍게 흩어졌다.
그것이 악에 받쳐 더욱더 소리를 내질러도, 감정이 가득 실린 욕설에 가려졌고 말이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어웨이. 오직 증고가 가득한 적의만이 경기장을 휩쓸었으나.
“···미동도 없네, x같은 새끼.”
“저 새끼 저러는 게 하루 이틀이냐. 지 X대로 사는 놈이야. 아마 귓등으로도 안 들을 거다.”
마운드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언제나처럼 흥겨웠다. 마치 더 하라고 말하듯 슬쩍 관중석을 훑기도 했고.
황당할 정도로 대담한 모습에 몇몇 레인저스 팬은 기가 질린 듯 헛웃음을 흘리기도 했으나.
대다수는 여전히 야유를 토해냈고, 그것은 마운드에 오르고, 마지막 준비까지 마친 뒤, 본격적인 이닝이 시작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우우우우!”
“야! 이 Cunt 새끼야! Choo한테 홈런이나 처맞아라!”
“Choo! 고향 후배 좀 교육시켜! X발 선배면 그 정도는 해야지!”
광기, 그 누구도 잠재울 수 없는 광기가 이어졌고, 선두타자가 올라오자, 그나마 방해하지 않기 위해 잦아들었지만, 분위기는 여전했다.
그렇게 시작된 오늘의 본 게임. 그 첫 시작은.
“스트라이크!”
언제나 그렇듯 스트라이크였다.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고, 홈팬들이 뭐라고 떠들던지 간에. 마운드 위에 오른 순간, 시작은 언제나 정해져 있었다.
“뭐해! 홈런 날려!”
“같은 나라 출신이라고 봐주지 말라고!”
“이제 돈값 좀 해라! 오늘 홈런 치면, 지금까지 먹은 거 다 용서 해줄 게!”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시금 채찍을 쥐어든 레인저스 팬들이었으나.
“아웃!”
그리 신통하지는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나마 나은 결과일 수도 있었다. 최소한 시작부터 삼진을 당하지는 않았으니까.
물론 맥없이 아웃당한 타자를 향한 분노야 당연히 있었지만, 2번타자가 올라오고 있었기에 팬들은 고이 접어뒀다.
“조이이이이이이이이!”
“너만 믿는다! 너만 믿어!”
“저번처럼 시원하게 하나만 날리자! 그거면 됐어!”
조이 갈로.
텍사스 레인저스에 실망한 팬들이 유일하게 믿는 선수가 있다면, 아마도 그밖에 없으리라.
작년 레인저스의 체면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살려 준 선수이고, 화끈한 펀치력은 팬들을 사로잡았으니까.
2번타자로 올라온 그를 보며, 관중들은 열광하며, 곧 그가 작년에 콜리시엄에서 만들었던 묵직한 타격음을 이번엔 홈에서도 선보이길 기원했으나.
“스트라이크 아웃!”
그런 기대가 무색하게도 열기는 탁 풀렸다. 삼구삼진으로 물러났으니까.
쓸쓸히 돌아가는 조이 갈로의 뒷모습을 본 순간, 그제야 뇌를 집어삼켰던 열기가 가셨고. 텍사스의 일교차가 그렇듯, 한순간 열기가 빠진 경기장에는 쌀쌀한 냉기가 감돌았다.
“너무··· 멀쩡하잖아.”
억지로 소리쳤던 팬들조차, 전광판에 잡힌 얼굴과, 마운드 위에서의 모습을 본 뒤에는 결국 목소리를 죽였다.
그들을 홀렸던 복수라는 단어 대신, ‘악몽’이라는 단어가 다시금 떠올랐으니까.
“스트라이크!”
그래, 악몽이다.
레인저스의 가슴에 쓰리게 남을 악몽이, 차분해진 머릿속에서 다시금 재생됐다.
“스트라이크!”
그것은 곧 눈동자에, 지금의 시선에 덧씌워져, 마치 환각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을 선사했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미치지 않았다. 환각이나, 헛것을 보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저, 뇌리에 박힌 것들처럼, 레인저스가 다시 박살나고 있었을 뿐이었다.
1회 말.
공격은 끝났다. 너무나도 익숙한 느낌을 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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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과 증오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어제 했던 말이지.
그게 참 맞는 말인 게, 애정이든 증오든, 그게 극한으로 치달으면 서로 비슷한 양상을 보이거든. 광기, 광기가 되어버리지.
“서서히 잦아들고 있네. 벌써 다들 목이 쉬었나?”
“아무리 소리 질러도 네가 끄떡도 안 하니까, 그냥 기가 질린 거겠지.”
오늘도 마찬가지다.
아까 전, 경기가 시작했을 때만 하더라도, 마치 저번 콜리시엄의 개막전 때와 비슷한 기운이 감돌았거든.
들끓는 열기, 우렁찬 목소리, 모든 관중들을 둘러싼 광기. 엇비슷하잖아?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니까.
“아까 전에 특별히 주의해야 할 타자는 없었지?”
“어, 딱히. 그나마 조이 갈로가 좀 박력이 있긴 하던데···”
“그거야 이미 예상했던 거니까 됐고, 잘 살펴봐. 그래도 크리스티안 말처럼 글로브 라이프 파크니까, 혹시라도 감 잡고 제대로 후리면 넘어갈지도 몰라.”
광기가 끝나고 난 다음의 깊은 애정은 둘 중 하나다. 실패한 사랑에 좌절하거나. 이루어진 사랑에 황홀경에 취하거나.
저번 경기, 그리고 오늘 따라온 레이더스가 딱 그렇지. 저거 봐, 눈이 뿅 갔잖아?
“Go,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오늘은 절대로 7이닝 이상은 허락 안 할 거니까. 나중에 떼쓰지 마.”
“저도 완투한 다음에 바로 완투 노리는 몰상식한 놈은 아니에요. 그럼 8이닝 정도만···”
“7이닝이야.”
“넵.”
반대로 광기가 가신 깊은 증오는 딱 하나뿐이다. 오직 절망, 절망밖에 없지.
2회 초 공격이 끝나고 다시 걸어나온 그라운드. 흘끔 관중석을 훑으니, 벌써 몇몇은 그런 단계에 접어들었다.
“우우우!”
여전히 야유가 쏟아지고.
욕이나 저주를 퍼붓고 있지만. 그들 중 몇몇은 분명 두 눈은 그라운드를 내려 보고 있는데도,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몹쓸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난 좀 시끄러운 게 좋던데. 볼륨이 내려갔네.’
그것을 아쉽게 느끼며, 올라오는 타자를 확인하니, 어우, 이쪽이 진짜였네.
‘벨트레··· 음···’
아드리안 벨트레.
4번타자로 나오셨는데.
레인저스가 내 단골이라면.
벨트레는 그 단골들 중에서도 최고의 단골이지.
원래 사람은 언제나 마지막이 중요한 법인데, 그가 작년 내 마지막을 아름답게 수놓아 줬었잖아?
최대 탈삼진 신기록에 아주 지대한 공헌을 하면서 말이야.
그때의 추억(?)을 그 역시도 여전히 품고 있는 건지, 날 싫어하는 홈팬들보다도 더욱더 깊은 미움이 그에게서 느껴졌다.
‘시범경기에선 안 저러더니. 저쪽도 정규시즌이라 진심모드인가?’
저번에 캑터스 리그에서 레인저스를 상대했을 때, 비록 출장하지는 않았으나, 덕아웃에는 있었는데. 그땐 저 정도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정규시즌이기에 그 역시 마음가짐이 달라진 거겠지. 저런 거물이 노려보는 게 조금 껄끄럽기는 하나.
“스트라이크!”
두렵지는 않았다.
존경하는 리빙 레전드이긴 한데, 솔직하게 말해서, 이미 시간이 지나간 타자니까.
특히나 올해는 더욱더 폼이 떨어진 것 같고. 어쩔 수가 없지. 세월의 흐름은.
“스트라이크!”
2구는 바깥쪽 너클 커브.
그는 어느 정도 파악한 듯 몸을 움찔거렸지만, 반응이 늦었다. 그 사이 역동적으로 꺾인 너클 커브는 이미 스트라이크존을 통과헤 포수 글러브 안으로 들어갔으니까.
‘반응속도가 늦네.’
슬픈 일이지.
저번 경기 푸홀스도 그렇고. 오늘 벨트레도 그렇고. 에이징 커브라는 게 참··· 서글픈 거야. 언젠가 나에게도 닥쳐올 일이기도 하고.
“파울!”
“스트라이크 아웃!”
물론 지금은 아니다.
몸쪽으로 낮게, 무릎 정도 높으로 던진 포심 패스트볼이 아무런 방해 없이 무사히 목표지점에 안착했다.
다시 삼진아웃. 세 개째인가?
“You Suck!”
안 그래도 마음이 잔뜩 썩어버린 벨트레인데, 그걸 또 기어코 우리 레이더스께서는 벅벅 긁어버렸다. 아예 흉터로 남으라는 것처럼. 진짜 잔인한 사람들이라니까.
작년 막판에 수도 없이 들었던 단어를 다시 들어서 그런가, 울컥한 벨트레는 관중석을 훑었지만, 오늘도 풀세팅을 하고 나타난 레이더스는 더욱더 그를 놀릴 뿐이었다.
어우, 어르신 저러다 목잡고 넘어가시겠네. 보는 내가 다 아슬아슬하구만.
‘어디보다, 다음이, 그래 너였지. 노마 마자라.’
레인저스 참 편하네. 작년에 만났던 타자들이 그대로 나오니까.
노마 마자라. 작년은 뭐, 그럭저럭 괜찮게 했다. 비율스탯은 평균보다 모자란데, 홈런은 스무 개를 깠지.
물론 글로브 라이프 파크를 홈으로 쓰니, 완전히 실력으로 보기는 어렵겠지만, 어쨌든 2년 연속 20홈런을 기록하며, 주가를 올렸다.
나이도 젊어서, 앞길이 창창한 청년인데,
“스트라이크!”
사실 그리 어려운 상대는 아니지. 애초에 레인저스 자체가 나한테 그렇기도 하고.
무언가 오프시즌 동안 어메이징한 변화도 없었던 것 같으니.
“스트라이크!”
굳이 길게 끌 이유는 없었다.
브루스 역시 문제가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에 맞춰 왼팔을 채찍처럼 휘두르자.
“스트라이크 아웃!”
노마 마자라는 큼직한 헛스윙을 선보이며, 역회전하는 서클 체인지업의 무브먼트를 따라가지 못했다.
“You Suck!”
다리 울려퍼지는 청아한 소리. 1회 말에만 하더라도, 야유에 묻혀서 잘 들리지 않았는데. 이젠 쩌렁쩌렁 고막을 뚫는구만.
레이더스의 흥이 올라온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레인저스의 열기가 꺼진 영향이 더 크겠지.
그런 분위기에서 올라온 6번타자, 로빈슨 치리노스.
포수인데도 꽤나 강력한 타격을 자랑하며, 공격형 포수로 주가를 높이지만. 수비는 영~ 별로인 선수다.
‘아직까지 안타가 없던데.’
다만 올해는 그런 두각을 보인 공격도 아직은 가동이 되지 않았고 말이야.
시범경기에서 폼을 제대로 올리지 못한 거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스트라이크!”
“볼!”
“파울!”
그래도 이젠 슬슬 타격감이 올라오는 건지, 제법 공을 고르고, 맞춰내며 의지를 드러냈으나.
‘쉽게쉽게 좀 갑시다. 앞에 그쪽 동료들처럼.’
4구째, 높게 찍어서 던진 투심에 다시금 배트를 가져다 대며 땅볼을 양산했다.
“아웃!”
그대로 2루수 제드 라우리가 잡아 1루로 송구하면서 아웃. 몇 발자국 떼지도 못한 로빈슨 치리노스는 아쉬운 듯 제 허벅지를 내려치며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로빈슨 치리노스는 좀 주의해야겠더라.”
“그래, 최소한 지금까지는 제일 감이 괜찮긴 해보이네.”
그것으로 2회 말 종료.
홈 플레이트로 걸어가서 브루스와 함께 덕아웃으로 돌아가며 이번 이닝에 대한 논의를 하다가, 문득 관중석을 보자, 빼곡하게 관중석을 채운 눈동자들은 방금 전, 그라운드로 나왔을 때보다 조금 더 꺼져있었다.
경기 시작, 날 열렬히 환대했던 광기 역시 단 2이닝 만에 반절 이상이 사라졌고 말이야.
앞서 말했듯, 사라진 광기의 빈자리는 절망이 가득 채워졌고.
‘시끄러운 것도 좋지만, 이쪽이 더 익숙하긴 하네. 이제 좀 글로브 라이프 파크 같구만.’
그런 뒤바뀐 풍경 속에서 글로브 라이프 파크는, 내가 잘 알고, 익숙한 기억 속의 모습처럼, 어두운 침묵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