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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빼고 다 가짐-202화 (202/316)

202화

1회 말, 마커스 시미언의 안타 이후, 크리스티안 옐리치가 곧바로 담장을 강타하는 장타를 날리면서, 1타점을 올렸다.

이후 아쉽게도 추가득점을 해내지는 못하면서, 공격은 종료됐지만.

‘뭐, 이제 시작인데 1점만해도 감지덕지지.’

그렇게 다시 공수교대.

앞서 1회 초에서 KKK를 찍으며 삼자범퇴로 막았으니, 2회 초의 에인절스 타순은 당연히 4-5-6으로 이어졌다. 각각 알버트 푸홀스-콜 칼훈-안드렐톤 시몬스인데.

“그나마 콜 칼훈한테 집중해야겠지?”

브루스는 당연히 상식적인(?) 질문을 던졌지만, 나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혹시 모르니까, 푸홀스도 잘 관찰해. 저런 베테랑들이 한번 감을 잡으면 또 잘 치니까.”

알버트 푸홀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하지만 일그러지긴 했어도 한때는 영웅이기에 무시할 수는 없지.

안드렐톤 시몬스의 경우 애초에 파워툴 자체가 낮은 타자이니, 위험부담이 적으니까,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고.

“솔직히 감을 잡기에는 이미 그른 것 같은데··· 아무튼 알겠어.”

내 말에 브루스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사실 나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4번타자는 알버트 푸홀스.

오타니 쇼헤이가 지명타자로서 7번 타순에 위치하면서, 안 그래도 힘겨운 양반이 오늘은 1루수로 나왔는데.

‘작년에는 파워도 좀 떨어졌지.’

재작년인 2016시즌에서는 그래도 31홈런을 치며, 파워는 여전히 제법 괜찮다는 걸 증명했었지만. 작년은 그마저도 조금 맛이 갔으니까.

고작 23홈런을 치며, 그나마 그가 가진 재능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있던 파워까지 거의 맛이 갔지.

당장 내가 작년에 직접 상대했을 때도 정상적으로 보이지는 않았고.

그러니 위대한 타자이고, 리빙 레전드이며, 지금 당장 은퇴한다면, 에인절스가 환호하며, 5년 뒤 명예의 전당을 95%이상의 득표율로 첫 턴으로 뚫고 들어갈 전설 중의 전설인데도 브루스 같은 핫바리에게 무시를 당하는 거고.

‘작년 WAR이 마이너스였지? 아마 -2 정도였던 것 같은데.’

내가 본 게 틀리지 않다면, 푸홀스는 작년 2017시즌에 WAR을 –2를 찍었다,

리그 평균으로 잡은 대체선수보다도 못하다는 건데, 보통 보수적으로 WAR 1당 보통 연봉 600만 달러로 잡으니까.

작년의 푸홀스는 대충 에인절스에 마이너스 1200만 달러의 피해를 끼친 셈이다. 연봉이 2500만 달러 정도인 걸 감안하면, 총 3700만 달러의 민폐를 에인절스에게 끼친 셈이지.

‘거의 웬만한 스몰마켓 팀 페이롤 수준이네. 이 정도면.’

개논리가 어우러진 기적의 계산법 같지만, 최소한 에인절스 팬들이 바라보는 푸홀스는 진지하게 그 정도 영향력을 가지고 있 걸?

‘애초에 푸홀스 때문에 이번에 윈나우를 도전하는 걸지도 모르지. 리빌딩은 어차피 불가능하니까. 푸홀스가 은퇴하지 않는 이상에는.’

본인의 자존심과 누적 스탯을 위해서라도 올해는 절차부심해서 반등하려고 할 텐데.

“스트라이크!”

초구에 대한 반응을 보아, 어림도 없어 보였다. 몸쪽으로 패스트볼을 바짝 붙였는데, 미동도 없네. 공을 지켜본 것 같지도 않고.

브루스를 바라보니, 녀석도 같은 생각인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쩝, 한때 모든 메이저리그 팬들의 영웅이었던 사람이, 이렇게 변해버린 모습을 보니까, 괜히 가슴 한쪽이 시리네.

어쩌다 이렇게 되셨어요.

카디널스 때만 하더라도 진짜 동경하고, 존경했는데.

여기서 더 오래 보면 목까지 잠길 것 같아서, 굳게 결심했다. 괜히 승부를 길게 끌어서 고통 주지 말고, 금방 눈을 감겨드리자고.

“스트라이크!”

그런 마음으로 던진 2구.

서클 체인지업에 푸홀스는 다시금 큼직한 선퐁기질을 선보이며 헛스윙 했고.

“파울!”

3구로 던진 투심은 간신히 맞춰내며 파울을 만들었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마지막 4구.

릴리스 포인트를 바꾸며 하이 패스트볼을 던지니, 또한번 냅다 휘두르며 헛스윙 삼진을 헌납했다.

‘잘 통할 것 같더라. 기량이 떨어진 거지, 경험이 사라진 건 아니니까.’

에이징 커브를 아주 씨게 맞으면서, 심각하게 폼이 떨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알버트 푸홀스라는 정점급 타자의 누적된 모든 경험이나, 노련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거기다 천재 타자인 만큼 감각도 나쁘지 않으니. 릴리스 포인트의 변화로 미묘하게 달라진 타이밍이 더 민감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지.

특히나 에이징 커브 이후 선구안이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타이밍에 의존하는 만큼, 더욱더 그런 경향이 두드러지고.

만약 기량이 따라줬다면, 결과가 달랐을 수도 있겠지만, 그의 시간은 이미 너무 많이 지나가 버렸다.

‘앞으로 에인절스 경기에서 푸홀스는 웬만하면 아예 신경을 안 써도 되겠네.’

특별히 발딱 서는 날이 아닌 이상에는 말이야. 조금은 초라한 한 시대의 끝을 보니, 기분이 별로 좋지는 않네.

“You Suck!”

“은퇴나 해라! Old man!”

“에인절스 새끼들, 내가 봐도 불쌍할 지경이네! 저런 놈한테 무슨 돈을 그렇게 퍼줘?”

“차라리 우리 Suck한테 너네가 대신 천만 달러쯤 줘라! 그쪽이 더 나을 테니까!”

내 속도 모르고 오늘 왕창 몰려든 레이더스는 내가 늙은 먹튀(?)를 손쉽게 조진 것이 기쁜 듯 소리쳤다.

하여튼, 분위기를 모르는 사람들이야. 하긴, 그러니까 남의 집에서도 당당하게 구는 거겠지.

왠지 조금 씁쓸한데, 원래 이런 종류의 우울함은 타자를 조지면서 케어하는 게 최고의 방법이다.

‘이쪽도 사실,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

딱 좋은 타자가 올라오기도 했고. 5번타자 콜 칼훈.

그나마 브루스가 주의해야 하지 않느냐고 했던 타자인데. 푸홀스와 비교한다면 훨씬 더 팀에 도움 되는 선수지만, 사실 이 양반도 그리 신통하지는 않다.

파워는 20홈런 정도는 가능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는 한데, 작년부터 컨택이 좀 심하게 떨어졌지. 선구안이야 원래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고.

“아웃!”

그것을 증명하듯, 콜 칼훈은 2구만에 투심 패스트볼을 빗맞히며 마운드 앞 땅볼을 만들었다.

주력도 안 좋은 편이기에, 손쉽게 잡아서 1루로 송구하는 것으로 투아웃.

‘이제 마지막으로 침대 양반만 남았네.’

6번타자 안드렐톤 시몬스.

극강의 수비력을 뽐내며, 투수를 침대에 누운 것처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유격수지.

솔직히 투수들 입장에서 누구나 바랄 거다. 내 뒤에 저런 유격수가 떡하니 받쳐주고 있는 것을.

얼마나 든든해?

센터라인 안쪽으로는 웬만하면 안전하다는 건데. 터벅터벅 배터박스로 들어오는 타자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탐스러워서 입맛을 다셨지만.

“Suck! 이번엔 내 쪽으로 굴려! 내가 다 잡아줄게!”

현실은 마커스 시미언이군.

그래도 얘 정도면 나쁘지는 않지. 타격은 솔직히 또이또이하거나 조금 더 낫고, 파이팅도 넘치는 편이니까.

거기다 올해는 아주 집중적으로 수비 훈련을 한 덕분에 꽤나 좋아졌다.

‘뭐, 그리고 어차피 지금은 수비 도움이 그리 필요 없기도 하고.’

타격도 점점 좋아지고 있는 것 같은데, 적어도 나한테 안드렐톤 시몬스는 그리 위협적인 타자는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파워툴 자체가 그리 거포라고 볼 수가 없기에, 내 구위를 감안하면, 적어도 그에게 큰 거 맞을 걱정은 없으니까.

최악의 결과물도 기껏해야 2루타나, 단타 정도겠지.

그렇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타석에 임했고, 그걸 알아차린 건지, 안드렐톤 시몬스는 조금 불쾌한 듯 입술을 비틀었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기분 나쁘다고 다 되는 세상이면, 난 이미 100마일, 아니, 200마일도 던지고 남았다.

4구째 슬라이더를 가만히 지켜보면서 삼진아웃. 그것으로 2회 초 역시 삼자범퇴로 끝났다.

“You Suck!”

“Suck! 딱 지금까지 한 거에 네 배만 더 잡자!”

“크하하하 퍼펙트 가버려!”

벌써 삼진만 다섯 개를 올려서 그런지, 분위기는 최고네.

‘저쪽은 더 약이 바짝 올랐네.’

물론 상대팀은 그런 내 흐름을 이대로 방치할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특히나 가장 의욕을 보이는 선수도 있었고.

####

경기 초반의 기세를 내준 에인절스의 덕아웃은 생각보다는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애초에 예상했던 일이니까.

“Suck 쟤는 여전하네.”

“시범경기부터 심상치는 않았잖아?”

“혹시 징크스라도 걸리지 않을까 기대했더니, 역시 개뿔도 없었네.”

작년처럼 애송이 루키인 것도 아니기에, 대부분은 그를 인정하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시즌을 보냈던 투수인데, 그런 투수를 좋은 경기를 펼친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겠지.

그저,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소포모어 징크스 따위가 없다는 것에 약간 아쉬웠을 뿐.

“아웃!”

그렇기에 문제없이 2회 말, 수비를 수월하게 끝낸 뒤,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가던 에인절스 선수들은 이내 한쪽을 흘끔 봤다.

다들 의욕이 넘치는 와중에도 가장 두드러지는 선수가 있었으니까.

“오타니, 준비는 됐어?”

“데뷔전인데, 하필이면 X같은 놈으로 걸렸네.”

“우리가 쟤 데뷔전에서 동정 때줬으니까, 네가 대신 갚아줘.”

“7이닝 9탈삼진인가 그럴 텐데, 넌 그 대신 큰 거 하나 날려버려. 그래야 형평성이 맞지.”

오타니 쇼헤이.

오늘 첫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앞둔 타자는 팬들은 물론 선수들 사이에서도 제법 기대받는 선수였다.

비록 시범경기 동안 기대이하의 모습을 보이며, 외부에서는 거품이 꺼졌다고 비난했으나.

최소한 훈련 등으로 보여준 재능은 확실한 선수였으니까.

그렇기에 구단에서도 과감하게 개막전부터 데뷔시킨 것이고. 마치 작년의 Go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기에 한 마디씩 던지는 동료들의 말에, 정확하게 알아듣지는 못하더라도 그 뜻은 전해졌던 건지, 오타니 쇼헤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느낌이 완전히 달라.’

의욕 넘치게 준비하고는 있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그는 속으로 조금 놀란 상태였다. 시범경기 첫 경기부터, 그토록 기대했던 그와 승부를 벌였고, 거기서 충분히 감명을 받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진짜 실전. 정규시즌의 마운드에 올라 선 Go, 고유석의 모습은 그때와 또 달랐으니까.

그런 그의 진짜 실전모드를 보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자신이 정말로 꿈의 무대 위에 있다는 것이. 시범경기는 그저 리허설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렇기에 더욱더 가슴이 불타올랐고. 그래, 시범경기에서의 실패는 그저 리허설일 뿐이겠지. 본게임은 이제 시작이다.

“하이 패스트볼 던지면, 웬만하면 그냥 편하게 지켜봐. 작정하고 찍어누른 건, 솔직히 첫 타석엔 공략하기 힘드니까.”

“조언 고마워요, 마이크.”

“다른 사람들 말처럼 처음부터 큰 걸 바라지는 말고, 타이밍을 지켜봐. 차근차근.”

그를 열심히 도와줬던 트라웃의 조언에 고개를 끄덕인 오타니 쇼헤이 짧게 한숨을 뱉은 뒤, 차분하게 준비를 갖췄다.

마찬가지로 준비를 갖추고 있는 그라운드를 흘끔흘끔 곁눈질로 관찰하면서.

포수와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 건지, 마운드에 올라가지 않고 잠깐 홈 플레이트에 머물던 Go는 이내 다시 편안한 모습으로 마운드에 올랐다.

과하게 긴장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여유롭지도 않았지. 그것을 흉내 내듯, 오타니 쇼헤이 역시 애써 두근거리는 심장을 다스리며 모든 준비를 마치고, 헬멧을 꾸욱 눌러썼다.

“긴장하지 말고, 연습 때처럼 네 스윙에만 집중해. 투수는 신경쓰지 말고, 그냥 자연스럽게. 연습한다는 생각으로.”

너한테 큰 걸 바라지 않는다는 듯, 타격코치는 별다른 지시를 내지리 않으며, 그저 긴장감만 풀어주는 형식으로 그를 배웅했다. 그렇게 나아간 그라운드.

“우우우우우!”

“네가 Suck이라도 되는 줄 아냐?”

“에인절스 새끼들, 대가리에 총이라도 맞았나. 어디 애새끼 데뷔전을 Go를 상대로 치러?”

“Hey, Kid! 다른 건 신경쓰지 말고, 그냥 편하게 삼진이나 처먹고 돌아가면 돼, 알겠지?”

마치 재팬시리즈라도 되는 것처럼 꽉 들어찬 관중 수만 명이 자신에게 야유를 보내는 것은 꽤나 신선한 경험이었다.

메이저리그는 정적이고, 소음이 크지 않다. 일본이나 한국처럼 대단히 소란스러운 응원문화가 아니다.

분명 그렇게 들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일본과 비교하더라도 더 소란스러우면 소란스러웠지, 덜하지는 않았다.

이게 진짜 메이저리그인 걸까? 오타니 쇼헤이는 고개를 저었다.

‘모두 다 이렇지는 않겠지.’

특별한 경기에서나 이런 분위기일 거다. 흥분한 사람이 고성을 참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에게 오늘은 특별한 날이겠지. 개막전이고, 그토록 사랑하는 선수가 마운드에 있으니까.

그렇기에 오타니 역시 바랐다. 자신도 오늘이 특별하게 기억되기를.

“후우-”

심호흡하며 배터박스로 입장하자, 포수가 흘끔 봤지만, 이내 휙 고개를 돌렸다. 안중에도 없다는 것처럼.

‘신뢰감이 대단하네.’

단순히 오타니 자신을 무시해서만은 아닐 거다. 그것도 없지는 않겠지만, 그만큼 투수에 대한 믿음이 굳건하다는 거겠지.

그 누가 올라오더라도, 크게 걱정하거나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아니, 포수만이 아니라, 이 그라운드, 이 경기장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랬다. 그도 그럴 것이-

“스트라이크!”

그럴 수밖에 없는 투수였으니까. 초구는 몸쪽 포심 패스트볼. 스트라이크가 됐다.

단 한 구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당연하게도 시범경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단순히 공의 위력을 넘어, 더욱더 날카로웠으니까.

‘제대로 제구한 느낌이 이런 건가?’

단순히 몸쪽으로 던졌는데 스트라이크가 됐다는 종류가 아니다. 정확하게 스트라이크존의 선을 노리고 던졌으니까.

타자에게 위협이 되면서도, 스트라이크는 되도록. 그 아슬아슬한 라인의 중간을 똑똑히 제어하면서.

‘초구를 노렸다면···’

초구를 노렸다면 정타가 나왔을까? 몸쪽 패스트볼을 사랑한다는 거야 이미 아는 사실인데.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면 말이다.

홀로 고민해봤지만, 별로 좋은 그림은 그려지지 않았다. 살짝 입술을 깨물며 다시 자세를 잡자.

“파울!”

곧바로 2구가 날아왔다.

꽤나 숨 가쁜 피칭.

순간적으로 타이밍을 캐치하고 배트를 휘둘렀지만, 배트는 가까스로 간신히 스치기만 했다.

서클 체인지업.

리그 최고로 손꼽히는 마구는 과연 명불허전의 공. 커트하긴 했으나, 운이 좋았다.

마치 포크볼처럼 훅 떨어지는 무브먼트는, 헛스윙이 아닌 게 신기한 정도였으니까.

그 궤적과 위력을 다시금 머릿속으로 재생하며 곱씹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감탄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으니까.

‘마지막은···’

그는 하이 패스트볼을 사랑한다. 특히나 체인지업 등의 오프스피드 계열로 카운트를 잡았다면, 더욱더 즐겨서 사용하고.

문득 트라웃의 조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큰 뜻을 가지지 말고, 타이밍에 적응한다는 느낌으로 지켜보라고 했었지.

최고의 타자인 만큼, 그를 존경하기에 그의 조언을 주워섬길 각오가 되어 있었기에, 조심스럽게 타격을 준비했다.

‘봐야 늘어. 타이밍, 그리고 시각의 차이를 느끼려면, 배트를 내야 한다.’

첫술부터 배부를 생각이 없다. 그렇기에 삼진을 각오하고서라도, 만약 하이 패스트볼을 던진다면 배트를 내고 싶었다.

그렇게 조금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린 3구. 그의 동작을 두 눈 가득 눈에 담았을 때, 순간적으로 릴리스 포인트가 바뀌었다.

‘음!’

정확하게 포착하지는 못했지만, 미묘한 차이는 느껴졌다. 그로 인해 초구를 떠올리며 잡은 타이밍이 약간 흔들렸지만.

그럼에도 꿋꿋하게 스윙을 가져갔다. 타격코치의 말처럼, 연습하듯, 내 스윙을 잊지 않고서.

그대로 쭉 뻗는 스윙. 날아오는 공의 높이는 힘껏 비틀고 있는 오타니 쇼헤이의 시선과 일치했다.

높은 코스.

예상했던 것처럼 하이 패스트볼이 날아온다고 생각하며 스윙을 가져갔지만, 어느 순간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공은 느렸다.

날아오는 동안 서서히 느려졌다. 아니, 원래부터 느렸는데, 빠르다고 착각했다고 하는 게 옳겠지.

“스트라이크 아웃!”

헛스윙.

배트가 지나간 뒤에야 공은 유유히 날아들며, 그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평범한 체인지업.

그토록 유명한 서클 체인지업처럼 대단한 무브먼트나 변화는 없지만, 오프스피드로서의 역할은 확실하게 할 수 있는 공.

포수 글러브 안으로 들어간 그것을 보며, 오타니 쇼헤이는 허탈하게 웃었다.

‘이런 느낌이었어. 머릿속을 들여다본다는 게.’

경기에 앞서, 다른 타자들도 트라웃과 마찬가지로 몇 가지 조언을 해줬다. 주로 Go에 대한 이야기였지.

절대로 원하는 공을 주지 않는다. 만약에 준다면, 그걸로도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다. 그렇게 말했었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뜻인지.

마치 오타니 쇼헤이 그 자신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본 것처럼, 하이 패스트볼을 기다린다는 것을 간파하고 가지고 놀았으니까.

“You Suck!”

앞서 동료들에게 쏟아졌던 조롱을 오타니 쇼헤이 역시 들으며, 타석에서 물러났다.

허탈하고 황당한 한편으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면, 그렇게 그 자신을 잘 안다면, 어째서 굳이 하이 패스트볼인 것처럼 높은 코스로 던졌느냐는 거였다.

‘단순히 농락하기 위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런 종류의 선수는 아니니까. 그랬다면 이미 그에게 당했던 에인절스 타자들은 깊이 증오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그보다는 인정하는 분위기가 많지 않은가? 조금은 얄밉게 느끼더라도.

“널 인정하고, 위험하게 본다는 뜻이야.”

복잡한 마음에 조금 고개를 숙이며 돌아왔을 때, 트라웃은 조심스럽게 그의 기분을 살피며 한 가지 조언들 던졌다.

“네?”

“체스 하는 것처럼, 수 하나를 던진 거거든. 타이밍도 망치고 흥분도 시키고, 지금 너처럼 머리도 복잡하게 만들고. 여러 가지 이유가 담겨 있지.”

그렇게 말한 트라웃은 피식 웃었다. 약간은 안쓰럽다는 듯이 보기도 했고.

“Go는 쉬운 타자들에겐 굳이 깊이 머리를 안 쓰거든. 그런 의미에서 난 이미 찍힌 지 오래지.”

“아···”

짧게 탄성을 흘린 오타니 쇼헤이는 문득 그라운드를 봤다. 그 말처럼, 8번타자로 나온 루이스 발부에나를 상대하는 Go의 모습은 조금은 편안했다.

“아웃!”

마치 대충 던지는 것처럼, 깊은 생각 없이 휙휙 던졌으니까.

다만 그럼에도 공의 위력까지 가볍지는 않았지만. 뒤이어 마틴 말도나도 역시 가볍게 잡아냈고.

“스트라이크 아웃!”

다시금 삼자범퇴.

그렇게 이닝을 끝마치고 돌아가던 그는 이내 덕아웃에 들어가기 전 흘끔 오타니 쇼헤이를 봤다. 마치 트라웃의 말을 증명하는 것처럼.

‘날 위험하게 보는 거라고···’

같은 투수로서, 동경에 가까운 감정을 품은 이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은 분명 기쁜 일이건만. 타자로서의 오타니 쇼헤이는 고개를 저었다.

저런 괴물에게 찍혔다는 게, 정말로 기쁘기만 한 일인지, 조금 의아했으니까.

“축하한다, Go도 타자로서의 네 재능을 알아본 모양이네.”

그렇기에 마이크 트라웃의 장난스러운 축하에도, 그는 마냥 웃지는 못했다.

메이저리그, 꿈의 무대를 실감한 것처럼, 그저 구름 위의 산 정상처럼, 목표로만 삼고, 동경만 품었던 선수의 진짜 모습 역시 이제야 조금 실감이 났다.

####

이닝을 마치고 돌아오며, 흘끔 상대팀 덕아웃을 훑었다.

오타니 쇼헤이, 생각보다 좀 더 위협적이네.

“생각보다 잘하지?”

“어, 얕봤으면 한방 맞았겠네. 좀 감을 잘 잡던데.”

2구 서클 체인지업은 작정하고 던졌는데, 그걸 커트해? 정규시즌에선 처음 보는 건데 말이야.

순간적으로 스윙의 궤적을 바꾸면서 가까스로 때리던데, 애가 재능이 좋아. 부럽구만, 부러워.

‘아쉽지만, 흥분하지는 않은 것 같네. 그래도 타이밍은 망쳤어. 머리도 좀 복잡해진 것 같고. 계속 생각이 나겠지. 높은 코스를 볼 때마다.’

삼진으로 잡기는 했지만, 혹시 몰라서 몇 가지를 깔아뒀다. 농락하는 것처럼 해서 흥분시키려고 했는데, 성격이 좋은 건지 그러지는 않았지.

그래도 오프스피드를 이용해서 타이밍을 망쳐뒀으니, 나쁘지는 않겠지.

그리고 앞으로는 하이 패스트볼 같은 코스를 볼 때마다, 종종 지금의 체인지업이 생각날 테니, 조금 머뭇거리기도 할 거고.

‘그래도 아직까지는 크게 어렵지는 않아. 찍어 누르려면 찍어 누를 수 있어.’

물론 더 쉽게 잡더라도, 트라웃 정도 괴물은 아니니, 충분히 간단하게 할 수 있기는 한데.

쟤 오늘이 데뷔전이잖아.

그렇게 방심하다가 괜히 하나 맞으면, 한일전의 패배라느니, 작년 최고의 재능이 올해 최고의 재능의 데뷔전에서 통타를 맞았느니 뭐니. 아주 별소리를 다할 텐데. 내가 그런 꼴은 절대로 못 보지.

내가 다른 사람은 제물로 잘 삼지만, 내 스스로가 남의 제물이 되는 건 싫거든. 내로남불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네.

“다음 이닝에 바로 시동 걸 거야?”

“아니, 한 이닝 더 보고.”

“5회부터 하게?”

“어, 좀 길게 가고 싶거든.”

그렇게 덕아웃으로 돌아왔을 때, 브루스는 인터벌에 대해 물었다.

언제 시동을 걸 거냐는 거지.

적절하게 집중력과 경기력이 올라와서 준비는 이미 됐으니, 당장 다음 이닝부터도 스위치를 올릴 수 있지만···

‘웬만하면 더 길게 가야지. 나 보려고 이렇게 몰려왔으니.’

오래간만에 콜리시엄으로 왔는데, 괜히 4회부터 스퍼트를 냈다가 중간에 내려가는 것도 좀 그렇잖아?

시범경기 마지막 등판 이후로 거의 10일 정도를 쉬어서 그런가, 체력이 남아돌거든. 그러니 기왕이면··

‘못해도 완투는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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