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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빼고 다 가짐-201화 (201/316)

201화

개막전을 앞뒀을 때, 당연히 부모님에게 연락이 왔다.

내가 잘 나간다는 거야, 이젠 부모님들도 잘 아시지만, 어쩔 수 없이, 걱정될 수밖에 없으니까.

“올해는 108배 안 했어요?”

-이번에는 그래도, 정화수 떠다놓고 비는 거랑, 새벽기도만 해. 이것도 죽겠다, 진짜.“

그나마도 올해는 좀 낫지. 작년에는 난리도 아니었으니까.

메이저리그 데뷔전인 만큼, 나도 내 나름대로 아주 정성을 다해, 몸과 마음가짐을 바로 했지만.

엄마는 아예 정화수도 떠다놓고, 새벽에는 성당에 기도도 다니고, 개막전 직전에는 108배까지 하셨잖아? 아빠는 그런 엄마한테 휩쓸려서 강제로 끌려 다녔고 말이야.

올해도 걱정을 하시거나, 응원은 하셨지만, 그나마 낫지. 최소한 108배는 안 하니까.

-새벽에 재료 준비하는 것도 벅찬데, 너희 엄마 때문에 나까지 새벽기도 다니고··· 어휴, 몸이 남아나지가 않네, 남아나지가 않아.

물론 좀 나아졌다고 해도, 빡센 일정인 건 여전하겠지만.

‘어째 나보다 더 바쁘시네. 난 쉬기 바쁜데.’

우스운 건 정작 개막전 준비하는 나는 탱자탱자 놀고 있다는 거겠지. 어차피 준비는 다 됐으니, 최대한 휴식을 취하면서, 경기 감각만 올리고 있었으니까.

부모님이 나보다 더 바쁘네.

아빠는 굉장히 지친 목소리로 이번에도 내게 엄마를 말려달라며 간곡히 부탁했지만.

“Good Luck.”

-유석아? 너 또···

“효도할게요. 사랑합니다.”

작년에 영빨(?)로 훌륭한 데뷔전을 치렀으니, 올해도 믿어 봐야지.

왠지 좀 찝찝하잖아? 괜히 정성 들이는 거 막았다가, 자칫 하늘이 노하셔서 첫날부터 홈런 맞게 하면 어떡해?

매정하게 통화를 끝낸 뒤, 다시 대니얼과 함께 루틴을 이행했다.

“죽겠어요, 지금 당장 던져도 되는데, 계속 참고 있으니까. 이러다 터지겠네.”

“어떻게든 제어하셔야죠. 자칫 열을 내시다가, 쓸데없이 허비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야죠, 실전 감각 잘 다져놨는데, 막상 경기 들어갈 때 맥이 탁 풀리면 안 되니까.”

나도 마냥 편한 건 아니야.

가만히 노는 것도 일이거든.

이게 얼마나 힘든 건데.

특히나 다저스전 이후로 꽤나 시간이 지났기에, 이미 쉴 대로 쉬어서, 아주 풀 차징이 된 체력을 달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자칫 과하게 흥분했다간, 기껏 쌓아 놓은 감각이 훨훨 날아 가버릴 지도 모르고.

“오늘은 이 정도로만 하죠.”

“네, 더 했다간, 스위치 켜지겠어요.”

그렇기에 훈련도 최대한 조심스럽게, 아주 가벼운 것만 반복했다. 불펜피칭에서도 적당히 완급조절을 했고.

“잭 코자트가 1번으로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했죠?”

“아마도, 에인절스에 괜찮은 좌타자가 적잖아? 타순을 섞을 수도 있겠지만, 잭 코자트, 트라웃, 저스틴 업튼까지, 이렇게 우타자만 셋을 낼 가능성이 제일 높아.”

그것 외에는 스콧 에머슨과의 상대팀 전력 분석에 집중했다. 사실 이거 말고 나머지는 다 준비가 됐으니까.

우리가 오프시즌 동안 선수단이 갈아치워진 만큼, 올해도 내 개막전 상대가 될 에인절스 역시 제법 변화가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FA로 잭 코자트를 영입한 것이지. 3년에 3800만 달러였던가?

작년 신시내티 레즈에서 타율 .297 출루율 .385 장타율 .548로 OPS .933에 24홈런을 날렸다고 기록 되어 있네.

‘타격도 이만하면 준수하고, 수비도 잘하는 편이니, 꿀영입인가?’

거기에 추가로 저스틴 업튼 역시 강력한 타자 중 하나다.

비록 오프시즌 동안의 수확은 아니지만, 어쨌든 작년 9월에 영입했었는데, 타이거즈와 에인절스 양팀 합쳐서, 35홈런을 날렸지.

그 두 타자를 필두로, 에인절스의 타선은 제법 막강해졌다.

“쓰읍, 작년보다 좀 빡세졌네요. 에인절스가. 트라웃 빼면 솔직히 그저 그랬는데.”

“우리랑 같은 이유지. 레인저스는 어차피 리빌등 모드고. 매리너스는 애매하고. 애스트로스는 나가리가 됐으니, 저쪽도 한번 노려볼 수밖에.”

솔직하게 말하면, 에인절스 타선은 트라웃 빼면 시체다. 아니, 시체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그리 강력한 편은 아니지.

물론 그 트라웃이 너무 강하다는 게 문제이기는 한데, 그를 제외하면, 당장 작년만 하더라도, 내 타구를 외야 멀리까지 날릴 타자가 드물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트라웃을 받쳐줄 타자들이 추가됐으니, 에인절스도 만만하게 보기는 어렵겠어.

“오타니도 나올까요?”

“글쎼, 나오기는 할 것 같은데, 아마 하위타순이겠지. 나온다고 치면, 푸홀스가 1루로 가겠네. 걔가 지명타자고.”

거기에 추가로 오타니 쇼헤이까지. 내가 그를 언급하자, 스콧 에머슨은 조금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단순히 그의 생각은 아니다.

대부분 저런 반응이지.

그리 좋지 못한 시범경기를 보내면서, 역사상 최고 수준의 재능이라는 타이틀에 약간은 흡집이 갔거든.

과격한 이들은 당장 투타겸업을 때려치우거나, 아니면 마이너로 가서 더 다듬으라고 할 정도로.

“솔직히 난 별로 큰 걱정은 없어. 오히려 나와주면 땡큐지. 100마일도 던지는 녀석이 뭐하러 타자까지 하는지 몰라. Go 너도 마찬가지고. 올해는 슈퍼소닉이고 나발이고 절대로 할 생각 하지마. 괜히 나쁜물 들지 말라고.”

“상황 보고요.”

“곧 죽어도 안 하겠단 소리는 안하네.”

아무튼 그래서인지, 대부분은 그냥 투수에나 집중하라는 반응이던데, 나는 좀 생각이 달랐다.

쉽게 잡기는 했지만, 재능이 괜찮아 보이더라고. 당장 릴리스 포인트를 바꾼 걸 곧바로 파악한 것만 봐도 말이야.

‘물론 감이 좋다고 해서 타격을 잘하는 건 또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피지컬도 좋은 녀석이라 파워도 제법일 테니, 시큰둥한 스콧 에머슨과는 달리, 나는 요주의 인물로 잡아뒀다.

혹시라도 개막전에 나왔을 때, 얕보고 설렁설렁했다가 한방 맞기는 싫거든.

메이저리그 역사를 통틀어도 드문 투타겸업에 도전하는 녀석이니, 어느 쪽으로든 길이길이 기억될 텐데. 그런 녀석의 첫 데뷔전에서 그 장엄한 시작을 내가 열어주기는 싫으니까.

“그리고 잭 코자트도 너무 크게 신경쓰지는 말고. 다른 건 몰라도, 파워는 플루크일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렇겠죠, 타격폼이 크게 변한 것도 아니던데. 갑자기 파워가 너무 강해졌으니까요.”

열 개 내외로 홈런 치던 타자가 갑자기 24개나 쳤으니, 그냥 어쩌다 아다리가 잘 맞아떨어졌을 가능성이 적지 않지.

“푸홀스는 어때 보여요?”

“여전하지. 이쪽은 걱정 안 해도 돼. 에이징 커브가 한창인데, 갑자기 중간에 회복하는 건 불가능하거든.”

그 밖에도 여러 선수들에 대해 분석하고 토론했지만, 우습게도, 이번에도 모든 이야기는 한 쪽으로 귀결됐다.

“결국 트라웃이 제일 문제네요. 트라웃을 잘 틀어막으면 이번에도 괜찮다는 건데···”

뭐, 결국 언제나 트라웃이지.

에인절스의 타선이 보강되고, 강력해졌다고 해도, 결국 모든 중심은 그였으니까.

우리 팀이 윈나우를 노리며,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팀 전력을 상승시켰다고 해도, 여전히 내가 가장 중요한 것처럼.

‘그러니 저쪽도 똑같은 생각 중이겠지.’

우리도 우승을 원하고 에인절스도 우승을 노리는 것 같으니. 아마 그쪽에서도 똑같은 논의가 있으리라.

올해 양 팀의 분기점은 하나였으니까. 작년처럼 내가 트라웃을 잡느냐, 아니면, 무실점 행진을 끊어냈던 것처럼 트라웃이 나를 뚫어내느냐.

결국 이것뿐이겠지.

개막전은, 그런 시즌 내내 이어질 장엄한 싸움의 첫 시작인 거고.

트라웃이라는 세 글자가 머리에 떡하니 박히니, 여전히 조금은 막막한 심정이었지만, 그래도 밀릴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적절한 제어 및 관리와 열띤 분석 속에서, 3월 29일, MLB의 시작이 도래했다.

####

눈을 찌르는 햇살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날이 맑네. 야구하기 딱 좋겠어.

커튼의 틈새를 뚫고 들어오는 햇살에 대한 감상은 그것이었다. 나도 참 정상은 아니야. 일어나자마자 야구 타령인 거 보면.

‘어쩔 수 있나, 오클랜드 도착한 직후부터 몸이 근질근질거렸는데.’

이미 마음에서도 불이 붙었는데도 꾹 참았으니, 더욱더 갈망이 커질 수밖에.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야구에 좀 과하게 집중하고 있기는 하고.

작년 여름까지만 하더라도 파파라치가 엄청나게 많았다. 어쩔 수 없지, 잘나가는 스포츠 스타, 그것도 슈퍼스타니까.

A-로드나 데릭 지터처럼 화려한 사생활을 보내지는 않을까, 기대하는 거겠지.

그런데 이제는 거의 없어졌다. 애초에 오클랜드 자체가 이방인에게 워낙 위험한 도시일뿐더러, 내가 별 건수를 안 주니까 말이야.

‘만나는 여자도 없고.’

따지고 보면 아주 수도승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셈이지. 몇몇 젊은 놈들, 마커스 시미언이나 맷 올슨, 채프먼, 브루스 같은 애들은 고개를 절레 젓기도 한다.

자기들이 이 정도로 인기가 많았으면, 아주 화려하게 살 자신이 있다는 건데. 난 별로 아쉽지는 않았다.

과하다 싶을 만큼 철저하게 살아가는 덕분에···

‘알람 울리기 1분 전이네. 그냥 일어나자.’

“끄읍- 아~ 좋다.”

지금처럼 좋은 컨디션을 가질 수 있는 거니까. 알람이 울리기 직전 꺼트려 버린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딘가 뻐근하다거나, 두통이 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막 자고 일어났는데도 머리가 맑네.

‘역시 난 태양열로 충전하는 거야.’

예전에 자면서 햇빛을 잔뜩 받으니까 컨디션이 좋았던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인가 봐.

질 좋은 수면을 위해 웬만하면 커튼을 치는 편이지만, 용케 뚫고 들어온 햇빛이 단잠을 깨웠는데도 컨디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좋았다.

“Go, 이제- 아, 일어나계셨네요. 알람이 울리지 않기에 올라왔는데.”

“방금 막 깼어요. 알람보다 딱 1분 먼저.”

“씻고 내려오십시오, 식사는 준비됐습니다. 브라이언도 이미 오셨고요.”

“쩝, 내가 가도 된다니까, 날 너무 악덕 고용주로 만드시네.”

“본인이 그게 마음 편하다니, 이해해 줘야죠.”

칼같이 시간에 맞춰서 나를 깨우기 위해 올라왔던 대니얼은 이미 일어난 내 모습을 보고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가볍게 웃었다.

음, 대니얼이 봐도 컨디션이 좋아 보이 나보네. 나쁘지 않아. 밖에서도 드러날 정도면 말이야.

“좋은 아침입니다, Go. 몸은 어떻습니까?”

“야구에 최적화가 됐죠. 아주 좋습니다.”

씻고 내려가니, 브라이언이 커피를 즐기며 반갑게 맞이했다. 진짜 매니저네, 에이전트가 아니라.

사실 이렇게 물심양면 도와주는 에이전트가 있다는 게 참 편하기는 해.

첫 에이전트는 개차반이었는데, 두 번째 만에 가챠가 대박이 났구만.

‘어차피 길에 적응해야 하는데, 그냥 내가 운전해?’

픽업하러 오기는 했지만, 또 운전기사를 맡긴다니 조금 미안해서, 그냥 내가 운전할까 싶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이 도시를 참 좋아하기는 하는데, 솔직히 어떤 돌발상황이 일어날지 모르니, 운전할 때는 항상 조심스럽거든. 차량 강도도 적지는 않으니까.

등판하기 직전인데 괜히 운전으로 심력을 소모하는 것도 별로 좋지는 않겠지.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식사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옷까지 쫙 빼입은 뒤 차에 탑승하니, 브라이언은 입을 달싹거렸지만, 이내 꾹 닫았다.

아마도 투자나 부동산 관련된 내용이겠지. 그것 말고는 딱히 없으니까.

하지만 굳이 등판 전에 돈 얘기를 해서 괜히 부정 타는 것도 조금 그러니, 참은 것 같다.

“차가 막히네요. 이 정도였던가?”

콜리시엄으로 향하는 도로는 그야말로 차가 뺵빽했다. 도시 전체의 자동차가 움직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제, 가볍게 몸 풀고 경기 전에 분석하기 위해 들렸던 것과는 달랐기에, 대니얼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운전대를 잡은 브라이언은 거북이처럼 느린 속도에도 당연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개막전이니까요. Go가 나오는 개막전. 이 정도는 당연합니다.”

“아···”

“만원관중일까요?”

“아마도요. 오클랜드만이 아니라, 베이 브릿지 전역에서 몰려들 테니까요. 듣기로 작년보다 시즌권 구매량이 상당히 늘었다고도 하고.”

못해도 4만 명은 되겠지. 오늘 관중 말이야. 어쩌면 정말로 수용량을 꽉 채울 수도 있고.

이 많은 사람들이 내 경기를 보러 온다는 건, 작년 내내 겪었는데도 여전히 조금은 적응되지 않았다.

‘제2의 베이브 루스라니···’

언론에서는 종종 관중을 구름떼처럼 몰고 다닌다는 이유로, 날 밤비노에 비유하고는 했다.

마찬가지로 베이브 루스 소리를 듣는 오타니와는 조금 다른 이유로 말이야.

미국인들의 오랜 신앙이자, 야구의 신과 비견된다니, 고유석 너 좀 많이 출세했다.

‘그럼 그만큼 잘해야겠지. 최소한 쪽팔리지 않으려면.’

그렇게 마음을 다졌을 때, 차는 멈췄고, 느린 행진 끝에 드디어 도달했다.

“도착이네요, Suck의 집에.”

오클랜드 콜리시엄.

‘Suck’의 집으로.

내가 지은 건 아니니까.

지은 집은 좀 그렇고, 그냥 내 집 정도로 하자.

“어? Suck 아니야?”

“Go! 새벽부터 기다렸어!”

“Suck! 트라웃 그 자식, 너한테 홈런 치고 기고만장(?)하던데, 버릇을 고쳐줘!”

“올해는 개막전부터 퍼펙트 해야지! 작년에 두 번 했으니까, 올해는 다섯 번 정도 하자!”

“퍼펙트는 됐고, 21삼진 잡아! 한 경기 신기록도 깨버려!”

나 보려고 온 손님이 이렇게나 많은데, 내가 집주인 해야지.

####

“Suck, 왔어? 밖에 사람들 엄청 많던데. 사인하느라 고생 좀 했겠네. 손목은 괜찮냐?”

“사인은 무슨. 펜 들이밀어도 아무도 안 받으려고 하더만.”

“하긴, 곧 등판할 텐데, 사인받기는 좀 그렇겠네. 우리 팬들이 그런 예의는 넘치지.”

“Suck, 너 때문에 새벽부터 레이더스가 바글거렸다더라. 오늘 못하면 큰일 나겠던데?”

“알아서 잘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크리스는 홈런이나 쳐요.”

“크리스? 어떤 크리스? 옐리치? 아니면 나?”

“내 눈앞에 있는 늙은 크리스, 저~기 있는 젊은 크리스 둘 다. 혹시라도 득점지원 없어서 못 이기면 그때야 말로 진짜 큰일 날 테니까요.”

경기를 앞둔 클럽하우스는 더럽게 웅성거린다. 사람도 많은데, 죄다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완전히 개판이지.

“유니폼 잘 다려서 Go의 라커룸에 뒀어요. 바로 입으시면 됩니다.”

“수고가 많아요, 제이미. 아, 아들이 올해 입학한다고 했죠? 미리 사인 공 좀 드려요?”

“하하, 그건 이미 많습니다. 다음에 티켓이나 한 장 주세요.”

“열 장도 더 드려야죠.”

특히나 클러비들이 제일 바쁘고 말이야. 나도 도움을 많이 받는 터라 사인공이나 티켓, 그리고 팁을 짭짤하게 주는 편인데.

그래서 그런지, 라커룸은 아주 깨끗했다. 이 낡아빠진 콜리시엄에서 내 라커룸이 제일 깨끗할 거야.

방금 공장에서 막 찍어낸 것처럼 따끈따끈한 유니폼을 잠시 매만지다가, 곧바로 갈아입었다.

‘느낌이 다르긴 하네.’

시범경기에서도 줄곧 입었고, 오클랜드로 돌아온 뒤에도 자주 걸쳤던 유니폼인데.

진짜 정규시즌, 개막전을 앞두고 입는 유니폼의 감각은 역시 조금 다르구만.

“바로 가시죠.”

“오늘은 고삐 풀면 되죠?”

“예, 족쇄 풀고 그냥 확 끌어 올리세요.”

입는 순간, 근질근질거렸던 몸도 바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화약고에 불이 붙은 것처럼.

당장 불펜이라도 들어가서 공을 던지고 싶었지만, 아직은 목줄을 차고 있어야 했기에, 적절하게 제어하며, 초 단위로 정확하게 루틴을 이행했다.

“Suck, 오늘은 몇 이닝 정도 던질 거야? 혹시 나 첫 경기부터 롤렉스 받아?”

그렇게 워밍업 할 때, 내내 내 주변에서 알짱거리던 브루스도 내 컨디션이 좋아 보였던 건지, 은근하게 욕심을 드러냈다.

얘는 경기 앞두고 잿밥부터 찾고 자빠졌네. 뭐, 반쯤은 농담이겠지만, 그래도 폼이 좋긴 좋아 보이나 봐.

“글쎄, 상황을 봐야 하겠지만. 못해도 7이닝은 던지겠지.”

“에이~ 눈치가 그게 아닌데?”

“코치가 보고 있잖아, 이 정도로 참아야지.”

“다 들린다, Suck 무리할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마.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을 거니까.”

일단은 오늘 계획된 이닝은 7이닝 정도다.

시범경기 동안 폼을 올렸다고는 해도. 괜히 첫 경기부터 무리했다가 괜히 부상을 당하면 안 되니, 적절하게 끊겠다는 건데.

솔직히 말은 그렇게 해도 스콧 에머슨 역시 별다른 리미트를 걸어 두지는 않았을 거다.

그냥 내가 무리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정해둔 거겠지. 나도 내심 완투 정도는 가능하다는 생각이고.

“올해는 100구제한 없다고 했죠?”

“왜? 제한 없다고 그냥 막 던지게? 그래도 웬만하면 100구 내외로만 던지게 할 거니까, 알아둬.”

거기다 작년에 있었던 투구수 제한도 사라졌으니까. 작년만 하더라도 넘긴 적이 제법 많았기에, 애초에 별로 구애받지는 않았는데, 어쨌든 형식적으로나마 존재했던 족쇄 하나가 풀린 셈이지.

그렇게 생각하다, 문득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러니까 그렉이 걱정하지. 리미트 풀리자마자 달릴 생각부터 하네.’

그렉이 괜한 염려를 한 게 아니야. 이런 내 성향이 훤히 보이니, 주의를 준 거겠지.

하지만 이미 말했듯 어쩔 수가 없다.

“15분 됐습니다. 이제 불펜으로 가시죠.”

불펜으로 걸어가며, 흘끔 확인하니, 벌써부터 관중석의 3분의 2가 꽉 찼는데. 저런 걸 보고 어떻게 참아. 난 그 정도의 자제력은 없는 사람이라고.

“지금 좀 흥분한 것 같은데, 차분하게 천천히 올려.”

“제가 어린애도 아니고. 그 정도는 알아서 잘 하죠.”

특히나 오늘은 더 그렇지.

난 원래···

“음!”

컨디션 좋을 때는 빠구없이 엑셀만 밟는 사람이거든.

늘 그렇듯 첫 번째 공은 서클 체인지업. 자세를 가다듬고 던진 오늘의 초구에, 글러브를 눕혀, 조심스럽게 받아낸 불펜포수는 짧은 탄성만 뱉었다.

나이스 볼이라거나, 아주 좋다거나, 완봉도 하겠다거나 하는 추임새가 없었지만. 그렇기에 완벽했다.

지금까지 쌓아 올렸던 내 준비를 설명하기에는.

‘나이스볼.’

####

불펜이 열리고 마운드로 걸어가는 길은 언제나 가슴이 설렌다. 거기에 메이저리그라는 글자까지 추가되면 더 말할 것도 없지.

‘진짜 꽉 찼네.’

관중석에 빈자리는 없었다.

그리 놀랍지는 않지.

콜리시엄 오는 길에 봤던 자동차들, 경기장 근처의 사람들만 봐도 여길 꽉 채우고도 남았으니까.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야.

관중 동원률이 밑바닥을 기던 애슬레틱스가, 이 낡고 후진 콜리시엄을 꽉 채운다는 게.

그렇기에 부담감도 가져야 하고. 내가 데려온 사람들인데, 계속 앉히는 것도 내 몫이니까.

“Suuuuuuuuuuck!”

역시 시범경기에서 봤던 레이더스는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오늘은 아예 한 구역을 통째로 점령했으니까.

원래 저 정도 규모인 건지, 아니면 못 보던 새에 더 늘어난 건지는 몰라도 말이야.

‘혹시 모르지, 슈퍼볼 보면서 주변의 다른 사람들한테도 전염시켰을지.’

철새처럼 팀을 바꾸는 게 아니라, 연고지역 내에서 다른 스포츠 종목을 응원하는 것이니, 거부감도 덜할 테니까.

홈구장 역시 오클랜드 레이더스와 똑같은 콜리시엄이기도 하고.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찰떡 같다고 할 수 있다. 진짜 콜로세움이 따로 없네. 관중들 면면을 보면.

“트라웃만 살펴봐. 감을 잡는 것 같으면 바로 말하고.”

“나머지는?”

“나머지는 괜찮아. 트라웃한테만 집중해.”

“오케이, 레이더스 엄청나게 왔는데, 삼진 팍팍 잡아주자.”

“그래야지.”

검투사들도 입장했다.

어느새 준비를 마친 에인절스 덕아웃에선 투구를 쓰고, 기다란 방망이를 든 검투사들이 몸을 들썩거리고 있었으니까.

‘라인업은 예상했던 거랑 똑같네.’

상대팀 라인업은 앞서 예상했던 것과 같았다. 잭 코자트-마이크 트라웃-저스틴 업튼으로 1-2-3번타자가 이어지지.

트라웃이 2번이라.

진짜 x나 강한 2번타자네.

트라웃이 출루해도, 푸홀스가 말아먹는 것이 많으니, 차라리 트라웃을 당기고 그나마 생산력이 있는 저스틴 업튼을 3번에 둔 거지.

‘평범한 좌투수였으면 질식하겠네, 질식하겠어.’

준수한 우타자가 쭉 이어지는 타선이니, 아마 평범한 반대손 투수였다면 꽤나 난감했으리라.

물론 난 좌타자 때려잡기 충분한 서클 체인지업‘들’이 있으니까 상관없지.

‘드디어 시작이네.’

브루스가 홈 플레이트로 내려간 뒤, 홀로 남은 마운드 위에서 길게 숨을 뱉었다.

원래 심호흡은 마음을 진정시키거나, 차분해지기 위해 하는 것이지만, 나는 조금 달랐다.

‘그래, 이래야지.’

오히려 고삐를 푸는 작업이니까. 불펜에서도 마지막까지 꾹꾹 참았던 것을 개방했다.

이젠 더 제어할 필요도 없으니까. 마운드에 올라왔는데, 그냥 다 쏟아부어야지.

마지막으로 마운드에서의 감각까지 올린 뒤 정면을 바라보자, 오늘의 첫 번째 검투사가 입장했다.

‘잭 코자트.’

3년 3800만 달러를 거머쥐고 에인절스로 입성한 선수.

작년, WAR을 5나 기록할 정도로, 수비는 물론, 공격에서도 제법 준수한 타격을 선보였지만, 플루크 성이 강하다는 평이 중론이다.

그렇기에 앞서 스콧 에머슨과 했던 분석에서도 크게 염려하지는 않았지. 홈런을 제법 날렸다고는 해도.

“스트라이크!”

내 공을 여기서 담장 너머로 날릴 정도는 아니니까.

초구부터 던진 서클 체인지업. 내가 자주 애용하는 코스인 몸쪽 포심을 의식한 건지, 몸을 움츠러뜨리던 잭 코자트가 민망한 듯 입술을 씰룩거렸다.

이내 다시 자존심을 챙기려는 듯, 그는 조금 더 홈 플레이트로 바짝 붙었다.

포수 시야를 가리는 타자의 모습에 브루스가 짜증난 건지, 뭐라뭐라 투덜거리는데, 나는 살포시 막았다.

그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있으니까. 어딜 내 앞에서 홈 플레이트에 바짝 붙어?

‘이런 타자는 초장부터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돼. 저딴 식으로 서면 투수보고 어쩌라고?’

저런 걸 허용해주다 보면, 결국 던질 곳이 없어진다. 기세에서도 밀리는 거고. 그러니 초장이 눌러야지.

입술을 꽉 깨물며, 힘껏 공을 뿌리자, 타자, 잭 코자트 역시 어느 정도 예상한 듯, 질 생각은 없다는 듯이 두 눈을 부릅떴다.

맞출 테면 맞춰봐라.

뭐 그런 거겠지.

바짝 붙은 타자에게 던진 몸쪽 위협구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거겠지만.

“스트라이크!”

이번에도 서클 체인지업이다.

분명 몸쪽으로 바짝 붙어서 날아가던 공은 급격하게 역회전하며, 스트라이크존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굉장히 비장했던 타자를 놀리는 것처럼. 위협구를 왜 던져? 공 아깝게. 괜히 볼 하나 날리는 건데.

차라리 바보로 만들고, 스트라이크를 하나 더 챙기는 게 낫지.

‘어우, 열이 바짝 오르셨네.’

완전히 바보가 됐다는 걸 깨달은 듯, 타자는 원수를 보듯 강하게 노려봤는데. 그렇게 감정적이면 쓰나.

거기다 이미 투 스트라이크인데 말이야.

‘바로 잡자.’

몰아넣었고, 타자의 페이스도 망쳤으니, 더 볼 게 있나. 후딱 판을 끝내야지.

브루스가 사인을 냈는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아주 마음에 들어. 너도 슬슬 나한테 적응하는구나. 딱 알맞네.

“쓰읍-”

진공청소기처럼 공기를 빨아들이다, 순간적으로 임팩트를 주며, 투구동작을 이행했다.

온몸 가득 차오른 힘을 왼팔에 담아 힘껏 뿌리치자, 타자도 배트를 꽈악 틀어쥐었다.

제법 높은 코스.

이것 역시 즐겨 사용하지.

하이 패스트볼 말이야.

구속은 느려도 마음만은 파이어볼러고, 꽤나 효과도 쏠쏘하니까. 라이징 패스트볼인지 뭔지 덕분에.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잭 코자트 역시 그걸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감정을 가득 실어 스윙을 가져갔지만, 공은 맞지 않았다.

배트는 공의 아래를 지나쳤고, 당연하게도 힘을 실은 만큼 잭 코자트는 완전히 돌았다.

‘안다고 칠 수 있으면, 애초에 그렇게 고평가를 안 받았지. 90마일도 안 되는 느려터진 공인데.’

그것으로 삼진아웃.

이번 시즌 내 첫 번째 탈삼진 기록의 주인공은 잭 코자트였다.

‘이제부터가 진짠데.’

여기까진 참 좋은데.

결국 이 양반을 잘 잡아야 한단 말이지. 눈을 질끈 감은 잭 코자트와 바톤 터치하며 올라오는 그다음 검투사.

마이크 트라웃, 그 역시 나와 비슷한 마음인지, 조금은 복잡한 표정으로 배터박스에 입장했다.

서로가 껄끄러울 수밖에 없지. 하필 같은 서부지구라는게 짜증스럽기도 하고.

‘은근히 초구 타격이 제법 늘었지. 시범경기 동안에도 그런 경향이 짙어졌고.’

트라웃의 그나마 약점은 그거였다. 초구를 지켜본다는 것. 일종의 본인만의 타격 방법론이겠지.

하지만 작년 중순부터, 서서히 그런 경향이 옅어졌다. 올해 시범경기에서도 마찬가지고.

지켜보는 버릇 때문에 손해보는 걸 어느 정도는 바로잡겠다는 건데.

“볼.”

그렇기에 초구는 조심스럽게 던져봤지만, 그는 얌전히 바라만 봤다. 공을 고른 게 아니라, 애초부터 보려고 한 것 같은데, 내가 지레 겁먹고 빼버린 셈이네.

약간의 손해를 보면서 승부를 시작한 셈이지만.

“스트라이크!”

곧바로 바깥쪽으로 너클 커브를 하나 쑤셔 넣으며, 다시 흐름을 중간으로 끌어왔다.

‘부담은 버린다. 어차피 첫 승부라 내가 유리해. 절대 타이밍 못 잡아.’

사실 마음은 생각보다 편했다. 아무리 트라웃이라고 해도 나 역시 확신이 있었으니까. 아니, 트라웃이기에 더더욱 그렇지.

‘두 번 지켜봤지. 한번 더 보게 할까?’

“볼.”

다시 볼.

이번엔 완전히 골라냈다.

살짝 움찔거리다 스윙을 참았으니까. 선구안도 참 좋아. 대단한 사람이야. 물론 그렇기에.

“스트라이크!”

새로운 릴리스 포인트에 더 휘둘리기가 쉽기도 하고. 눈이 좋고 감이 좋은 타자인 만큼, 미묘하게 달라진 타이밍이 더 예리하게 느껴질 테니까.

일부러 안 보여주려고 앞선 타자들한테 안 썼는데, 아니나 다를까, 미묘한 차이에 트라웃은 헛스윙을 가져갔다.

투 앤 투. 일종의 매치 포인트지. 여기서 내가 볼 하나를 내주면 쓰리볼로 듀스가 되는 거고.

‘첫 타석인데, 쉽게 갑시다.’

그렇게 부탁하며, 브루스를 봤고, 다행히 별다른 이상은 없었던 건지,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신호 삼아, 그대로 채찍처럼 휘두른 왼팔. 앞서 잭 코자트와의 승부와 마찬가지로, 이번 위닝샷 역시 높게 잡혔다.

높은 코스.

하이 패스트볼은 트라웃의 유명한 약점 중 하나다. 원래는 약점이었는데, 다시 그걸 보강했다가, 작년 후반기부터 다시 좀 두드러졌지.

물론 질 좋은 하이 패스트볼을 던질 수 있는 투수들은 그리 많지 않기에, 그냥 죄다 두들겨 팼지만 말이다.

그 역시 예상했던 건지, 의외로 배트는 내지 않았다. 한 구를 더 지켜보겠다는 것처럼.

‘그래, 이럴 것 같더라.’

“스트라이크 아웃!”

내가 생각하기에, 트라웃 역시 나한테 첫 타석부터 무언가 큰 걸 얻어낼 작정은 아닐 것 같더라고.

어찌됐든 첫 타석은 타자에게 가장 불리한 상황이니까 말이야.

그러니 적극적으로 스윙하지 않을 것 같아서, 혹시 몰라 서클 체인지업 V1으로 던졌는데, 그는 내가 바라던 대로 얌전히 승부를 포기했다.

“You Suck!”

“크하하하 트라웃 별거 없네!”

“그래, 너도 Suck 앞에선 삼진이나 처먹어야지!”

루킹삼진.

그것을 알리는 승전보가 울려 퍼졌고, 우렁찬 조롱 속에서 트라웃은 살짝 눈썹만 씰룩거리다, 씨익 웃으며 타석에서 물러났다.

저게 더 무섭네.

차분해 보이는 게, 칼을 갈고 있는 것 같단 말이야. 어우, 저번에도 저러다 홈런 맞았으니까, 이번에는 진짜 조심해야겠어.

‘일단 트라웃은 잡았고.’

그다음 검투사는 저스틴 업튼. 그 역시 제법 파워가 강력하고, 훌륭한 타자인 만큼, 무시할 수 없는 상대이나.

상관없다.

“스트라이크 아웃!”

난 이 콜로세움의 챔피언이니까.

4구째 너클 커브를 헛치며 헛스윙 삼진아웃. 저스틴 업튼은 앞선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타석에서 물러났다.

KKK, 개막전에 어울리는 시작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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