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199화 (199/316)

199화

“스트라이크 아웃!”

“Hell Yeah!”

주심의 우렁찬 삼진콜.

그와 함께 터져 나오는 함성.

그에 맞춰, 저 멀리 위치한 마운드를 바라보며, 크리스티안 옐리치 역시 휘파람을 불었다.

짐짓 뒷짐까지 진 그였지만, 과할 만큼 여유로운 모습을 질책하는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다른 야수들도 다 비슷했으니까.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구경하고 관망할 뿐.

“미쳤네, 진짜.”

그냥 이런 말 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마운드의 투수는 시작부터 깔끔하게 막아버리더니.

외야수들에겐 별다른 기회조차 주지 않으며, 다저스를 꽁꽁 틀어막았으니까. 그야말로 미친놈처럼.

‘쳤다, 바로- 아.’

멍하니 지켜만 보고 있던 크리스티안 옐리치는 타격음에 재빨리 몸을 움직이며 낙구지점을 확인했지만.

이번에도 내야를 넘지 못하고 유격수에게 잡힌 타구에 다시 제자리에 섰다.

이제 3회가 끝나가건만, 그가 한 일이라고는 앞서 1회 초에서 코디 벨린저가 날린 뜬공 하나를 잡은 게 전부였다.

‘나보다 관중들이 더 많이 움직였겠네. 몸 들썩거리느라.’

몇 발자국은 내디뎠을까? 확신할 수는 없었다. 공수교대 때마다 포지셔닝을 위해 걸어온 것을 제외하면, 딱히 움직이지도 않았으니까.

도저희 경기라고 볼 수가 없는 여유로움에 고개를 절레저었을 때, 슬그머니 다가온 채드 핀더는 마찬가지로 약간은 지루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충 보고 있어. 오늘 같은 날은 어차피 여기까지 타구 안 와. 아까 전에 네가 잡은 게 이례적인 케이스야.”

전천후 유틸 자원으로서 작년에도 몇 차례 고유석과 호흡을 맞췄던 그는 크리스티안 옐리치보다는 당연히 훨씬 더 지금 같은 상황에 익숙했다.

오늘처럼 작정한 날은 외야로 몇 구 날아오지도 않지. 안타조차 대부분은 짧은 타구로 그치고.

오늘도 아슬아슬하게 안타가 하나 나오기는 했지만, 2루수를 살짝 넘기는 럭키 펀치 정도였고 말이다.

“퍼펙트는 아니지만, 퍼펙트나 다름없어. 퍼펙트가 아니니까 더 마음이 편한 거고.”

“개소리 같은데, 정확한 말이네.”

차라리 퍼펙트가 이어지고 있었다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아주 조금이라도 긴장감을 유지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렇기에 훨씬 더 마음이 편한 거지. 채드 핀더의 말에 짧게 고개를 끄덕인 옐리치는 다시 멀어지는 그와 마찬가지로 한층 더 여유를 가지며 멍하니 마운드를 바라봤다.

마치, 그라운드의 상황이 훤히 잘 보이는 1등석에 앉은 관중처럼.

함께 경기를 치르는 것은 오늘이 세 번째인데, 앞선 두 번 역시 지금과 똑같았다. 그냥 편하게 구경이나 하는 거지.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네.’

흘끔 주변과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다저스의 벤츠를 훑은 크리스티안 옐리치는 헛웃음을 흘렸다.

전날, 카멜백 랜치-글렌데일에서 열렸던 경기와는 완전히 느낌이 달랐으니까.

‘어제는 정말···’

직전 경기에서 다저스는 그들의 의지를 보여줬다. 얼마나 자신들이 분노에 찼는지, 독기가 서렸는지, 얼마나 간절하게 월드시리즈를 바라는지 말이다.

정말이지, 앞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깨부술 것처럼, 강렬하고 파괴적인 기운을 물씬 풍겼었는데.

그 위험한 야수를 오늘은 마운드에 오른 단 한명의 투수가 너무나도 손쉽게 조련하고 있었다.

“스트라이크!”

애슬레틱스로 트레이드되고, 스프링 트레이닝에 합류한 이후로, 이곳은 꽤나 마음에 들었다.

스승, 배리 본즈의 말처럼, 잘 될 것 같은 팀의 기운이 물씬 느껴졌으니까.

뛰어난 동료들이 많았던 말린스도 대단히 활력이 넘치는 팀이었지만, 여긴, 뭐랄까, 뭐든지 하기는 할 것 같은 느낌이었지.

그토록 관심이 가고, 기대했던 Go는 상상하던 것 이상의 투수였고 말이다.

하지만 정말로 월드시리즈 우승이 가능할 것 같냐고 묻는다면, 조금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흔히 우승 팀 하면 느껴지는 단단함이나, 끈끈함, 혹은 폭발적인 분위기는 없었으니까. 오히려 조금 가벼웠지. 분위기 자체는.

‘반대로 다저스는, 딱 우승 팀 같은 느낌이고.’

어제 직접 상대했던 다저스는 그런 챔피언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줬었다. 앞서 말했듯 굉장히 파괴적이었으니까. 꽤나 자신만만하기도 했고.

그렇기에 한편으로는 스스로 묻기도 했다. 지금 나의 팀, 내 동료들, 애슬레틱스가, 저런 팀을 상대로 월드시리즈에서 이길 수 있을까?

대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전날 그랬던 것처럼 그냥 가볍게 찍어 눌릴 것 같았지.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단순히 마운드의 투수, Go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가 마운드에 오른 순간부터, 상대팀은 물론이고, 애슬레틱스의 분위기 역시 달라졌으니까.

‘위닝 멘털리티. 최소한 Go가 마운드에 있다면, 무조건 이긴다는 생각을 모두가 공유하고 있어.’

전날은 그렇게도 무기력하게 졌던 녀석들이, 같은 팀이 상대이고, 전날보다 오히려 더 주전급으로 나왔는데도, 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패배라는 단어가 하룻밤 새 그들의 머릿속에서 삭제라도 된 것처럼. 크리스티안 옐리치, 자신도 마찬가지고.

그제야 깨달았다.

애슬레틱스가 가진 폭발력을, 그리고 그 특별함을. 팀 자체나 선수단이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오직 저 녀석, 저 녀석 하나만 바라보는 거야.’

쟤가 함께하는 이상, 우리는 누구도 이길 수 있다. 그게 애슬레틱스가 우승에 도전하는 원동력이었다.

배리 본즈가 했던 말과 아주 흡사하지. 미친 타자는 우승을 만들지 못하지만, 투구사 미치면 충분히 우승을 가져올 수 있다고 했던가?

그 위대한 약쟁이의 말을 증명하듯.

“스트라이크 아웃!”

Go는 가볍게 다저스를 압도했고, 그 앞에서 다저스의 의지는 너무나도 쉽게 꺾였다.

그토록 미쳐버린 투수의 존재감은 두 팀을 아우르기에 충분했다.

그러니, 만약 거기에 Crazy한 타자까지 추가된다면···

‘일이 더 쉬워지겠지.’

“뭐해? 가자. Suck 경기는 이래서 좋다니까. 수비에서 쓸 체력을 공격에서 쓸 수 있단 말이야.”

“그러게, 아주 잘 알겠어.”

이닝은 끝났다.

동료들의 부름에 상념에서 빠져나온 크리스티안 옐리치는 그들을 따라 다시 덕아웃으로 걸어가면서, 주먹을 세게 쥐었다.

####

“Suck, 수고가 많다.”

“많지, 알아줘서 고맙네. 기왕이면 점수도 내라. 시범경기 마지막 경기인데, 승리투수는 해야지.”

“그래야지. 기다리고 있어, 바로 점수 낼 테니까.”

벤치로 돌아와 자리에 앉으며 살짝 목을 돌리고 있으니, 크리스티안 옐리치가 타격장갑을 끼면서 다가와, 말했다.

얘도 이제 Suck이라고 부르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Go라고 불렀는데 말이야. 다른 놈들한테 전염된 거겠지.

내 노고를 알아주는 건지, 슬쩍 엄지를 추켜세운 크리스티안 옐리치는 대뜸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콜리시엄은 여기보다 훨씬 넓지?”

“당연하지. 아무리 그래도 메이저리그 구장인데. 아, 시설은 오히려 호호캄이 더 나으니까, 그쪽으로는 기대하지 마.”

“어차피 기대도 안 했어, 오클랜드인데. 그나저나, 그러면 펜스도 더 먼가?”

“엄청나게 멀지. 너도 들어서 알 텐데? 말린스도 투수 구장이긴 하지만, 콜리시엄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거야. 특히 홈런은 제대로 억제하고. 넌 좀 손해 보겠네. 파워가 늘었는데, 괜히 이런 구장으로 와서.”

나 다음으로 코치들이 기대를 거는 선수가 있다면 크리스티안 옐리치일 거다.

워낙 비싼(?) 몸이기도 하고, 이번 시즌 타선의 중심이 되어줄 선수였으니까.

다만 정상급 리드오프를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겨울 동안 훈련을 잘 한 건지, 더욱더 강력해진 파워까지 장착하면서, 그냥 정상급 ‘타자’가 됐지. 리드오프가 아니라.

아쉽게 됐어.

타자 친화 구장으로 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야, 하필 콜리시엄으로 와서, 파워가 좋아진 만큼, 펜스도 멀어졌구만.

하지만 그런 내 동정과는 달리, 크리스티안 옐리치는 그저 가볍게 웃기만 했다. 마치 기대가 된다는 것처럼.

“커트 앵글, 얘 좀 맛이 갔는데? 본즈가 다른 약을 준 거 아니야?”

“그러게요. 지금까지는 괜찮더니, 콜리시엄 갈 생각하니까, 갑자기 기분이 X같아진 건가?”

“하긴, 거긴 좀 그렇긴 해. 시설도 X같은데, 투수 친화적이니, 타자 입장에선 더 X같겠지. 저러는 것도 이해가 되네.”

콜리시엄의 악명이야 워낙 유명하기에, 그렉은 이해한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마찬가지고.

쯧쯧 젊은 친구가, 벌써부터 정신을 놓아버리다니. 안 됐네. 정규시즌 시작되면 내내 거기서 지내야 하는데 말이야.

‘말린스 홈구장이야 시설 좋은 편이니까, 더 x같기는 하겠어.’

우리가 옐리치를 안쓰럽게 보는 사이, 공수교대가 끝난 그라운드에선 우리 공격이 시작됐다.

“쟤 좀 괜찮은데? 나쁘지 않아. 다저스는 괜찮은 투수가 많단 말이야.”

“마에다 겐타요? 네, 뭐, 괜찮아 보이네요. 작년에는 살짝 아쉬웠지만.”

오늘 다저스 선발투수는 마에다 겐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일본 투수다. 듣기로 일본에선 다르빗슈 유, 다나카 마사히로와 함께 에이스로 유명했다고 하고.

메이저리그 첫 시즌인 2016년엔 꽤 훌륭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작년에는 좀 주춤했지.

그래도 오늘은 제법 한 점도 내주지 않고 잘 막고 있었지만, 그런 나와 그렉의 칭찬이 무색하게도 3회 말부터 위기가 시작됐다.

“세이프!”

“아웃!”

“베이스 온 볼!”

오늘 8번타자로 나간 브루스가 깔끔하게 좌전 안타로 출루했고, 9번 채드 핀더는 잘 잡았지만, 다시 1번 제드 라우리에게 볼넷을 허용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그나마 2번타자 마커스 시미언을 삼진으로 돌려 세우며 위기를 극복하는가 싶었지만, 곧 타석에 오르는 타자르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힘들겠네.’

아까 전, 뜬금없었던 질문과 맛이 간 듯한 미소를 남기고 떠났던 크리스티안 옐리치게 타석에 올라갔으니까.

굉장히 집중한 모습으로 배터박스에 입장한 그를 보니, 자연스럽게 결과갸 예측됐고.

“갔다.”

“와아아아아아!”

“옐리치! 너도 X발 좀 마음에 든다?”

“이거지! Suck 경기인데 무조건 이겨야지! 잘한다! 한 10점까지 내버려!”

아니나 다를까, 초구를 노린 스윙은 타구를 담장 너머로 멀리멀리 날려 보냈다.

0대0의 균형을 깨트리는 쓰리런.

덤덤하게 베이스를 돌고, 다른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한 뒤 돌아온 크리스티안 옐리치는 다시금 내게 물었다.

“콜리시엄 담장, 여기보다 훨씬 멀다고 했지.”

“멀다니까, 자꾸 물어봐.”

“그럼 방금 정도 타구도 펜스에 걸리나?”

“방금 타구라면···”

잠깐 생각했다.

내 기억 속의 콜리시엄을.

방금 전의 타구, 큼직하긴 했지. 내가 조이 갈로에게 맞았던 한방처럼 말이야. 그러니 저 정도면.

“뭐, 저 정도면 충분히 넘어가지, 아주 훌쩍 넘기겠네.”

“그럼 됐어. 잘해보자, 이번 시즌.”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는 크리스티안 옐리치의 모습에 그제야 깨달았다. 나도 나지만, 얘도 준비를 마쳤다는 것을.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나쁘지 않지. 팀에서 믿을 만한 타자가 있다는 건. 든든하잖아?

“그래, 잘해보자. 콜리시엄 가서도 담장 많이 넘기고. 옐리치 너는 그거에만 집중해.”

그러니 적극적으로 밀어줘야겠지.

“수비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지금처럼, 온전히 타격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

“오늘은 길게 가보자.”

“뭘? 진짜 완봉하려고?”

그라운드로 나가며 그렇게 말하니, 브루스는 진지하게 미친놈을 보는 것처럼 나를 흘겨봤다.

얘도 점점 코치를 닮네.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그런 거 아니야 새꺄.

또라이도 아니고, 시범경기에서 완봉할 리가 있나.

“아니, 인터벌 빨라지는 거 말이야. 보통 3이닝으로 끝이잖아? 오늘은 지금부터 7회까지 쭉 해보자고.”

“아, 그거. 괜찮겠어? 괜히 시범경기에서 무리하는 거 아니야?”

“정 힘들면 중간에 끊거나, 교체되야지. 그냥 알아두라고.”

인터벌이 가속되기 시작하면, 보통 3이닝쯤 간다. 체력이 훅훅 닳기에 그 이상은 힘들거든.

하지만 저번 경기에서 느껴보니, 3이닝을 쭉 유지했는데도 체력이 남아돌더라고.

‘겨울 동안 열심히 구른 보람이 있는 건가?’

특별히 컨디션이 좋거나 하지는 않았으니, 어쩌면 겨우내 철인 3종 경기를 준비하는 것처럼 체력 단련했던 것이 효과를 보는 것 같은데.

이번 기회에 그걸 확인하고자 했다. 물론 겸사겸사 인터벌 가속 상황에서 릴리스 포인트 변환이 끼치는 영향을 다저스를 상대로도 한번 보고 싶었고.

그런 내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인 브루스는 홈 플레이트로 향했고, 나는 마운드로 걸어갔다.

“편히 쉬어라. 홈런 쳤으면 자리 깔고 누워도 되니까.”

수비 위치로 가기 위해, 스쳐지나가던 크리스티안 옐리치에게 그렇게 속삭이니, 녀석도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암, 홈런 쳤으면 인정이지.

나도 마냥 타자를 깔고보는 사람이 아니야. 잘하면 인정해준다고.

아무튼 그렇게 모두 포지셔닝을 갖추자, 다저스 타자들도 그라운드로 걸어 나왔다.

2회에 5번타자로 나왔던 야시엘 푸이그에게 뜬금없이 안타 하나를 맞은 탓에, 이번 이닝은 2번타자부터 시작인데.

‘집중이 대단하네. 그렇게 빡쳤나?’

코리 시거는 처음보다 훨씬 더 뜨거워진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저벅저벅 배터박스로 입장했다.

아까 생겼던 오해가 시간이 지나면서 풀리기는커녕, 더욱더 진해진 거겠지. 바라던 바였기에 나는 그런 코리 시거의 모습이 반갑게만 느껴졌다.

‘재능이야 확실한 녀석이니, 제대로 반응하겠지.’

그것을 기대하며 만족스럽게 웃으니, 코리 시거의 눈동자는 조금 더 불타올랐다.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구만.

“스트라이크!”

하지만 그런 강렬한 감정도 순간적으로 날아온 초구에 잠시 사그라졌다. 한복판으로 날아온 쓰리핑거 체인지업이 제대로 분위기를 깨트렸으니까.

감정에 매몰된 나머지, 좋은 코스, 좋은 구종을 놓친 코리 시거는 스스로를 진정시키려는 듯 숨을 골랐지만.

“스트라이크!”

나는 그에게 그런 여유를 허락한 적이 없다. 적어도 지금부터는 말이야.

그제야 내가 가속을 시작한 걸 깨달은 듯, 코리 시거는 잠깐 타임을 요청하여 숨을 골랐고, 다시 배터박스로 들어왔을 때는 재빠르게 타격자세를 잡았다.

“파울!”

다만, 그래도 완벽하게 준비가 된 것은 아닌지, 다시 연이어 던진 투심을 정확하게 맞히지 못하면서 간신히 커트만 했다.

파상공세와 같은 피칭에 그는 어떻게든 페이스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것처럼 강렬한 의지를 표현했다.

‘빨리 잡자.’

여기서 시간을 더 준다면, 흔들린 것을 다시 복구하고, 자기 중심을 찾을 것 같았기에, 리듬 그대로 빠르게 던진 4구.

코리 시거 역시 내가 속전속결을 바란다는 것을 깨달은 듯 다시금 스윙을 냈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순간적으로 바꾼 릴리스 포인트에 속아, 타이밍이 망가졌다. 높이 던진 슬라이더는 배트가 지나간 뒤에야 가볍게 꺾이며, 스트라이크 존을 파고들었다.

컨택이 좋고, 눈이 좋은 타자이기에, 더욱더 타이밍에 민감했던 거겠지.

‘잘하는 놈들한테 더 잘 통한다니, 조금은 아이러니하네.’

차라리 아예 아무것도 모르고, 느끼지도 못하는 타자였다면, 그나마 나았겠지만.

타이밍을 잘 잡는 타자이기에, 오히려 그의 리듬이 망가졌다. 그 덕에 이번에도 삼진.

들끓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코리 시거는 아쉬운 한숨만 흘리며 타석에서 물러났다.

그다음은 내가 과거의 추억을 다시 떠올리게 해줬던 코디 벨린저.

‘첫 타석은 힘으로 눌렀지만, 그래도 위험한 녀석이지. 극단적인 만큼 파워도 괜찮으니까.’

정타만 맞는다면, 아무리 지금의 나라고 하더라도, 아까 전처럼 뜬공으로 끝나지는 않을 거다.

‘그러고 보니, 그걸 안 봤네. 간만에 하나 던져볼까?’

이 녀석을 어떻게 잡아야 잘 잡았다고 소문이 날까? 곰곰이 고민했을 때, 문득 한 가지가 떠올랐다.

이참에 한번 보자고. 이것도 어찌 보면 타이밍을 조지는 종류인데. 빠른 인터벌과 새로운 릴리스 포인트로 던지면 어떻게 되는지.

아주 강력한 타자가 타석에 있기는 하지만, 그래야 더 집중할 수 있겠지. 삐끗하면 넘어간다는 마음가짐이 들 테니까.

‘일단 차근차근 쌓아보자.’

가장 먼저 던진 초구.

“볼.”

너클 커브를 하나 던져봤는데, 애초에 칠 생각이 없었던 건지, 코디 벨린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케이, 내가 빨라진다고 해서 조급해지지는 않겠다는 뜻이구만. 아주 잘 알겠어.

“파울!”

곧이어 던진 몸쪽 포심 패스트볼. 살짝 존으로 들어온 것 같으니, 곧바로 배트를 냈다.

“볼.”

“스트라이크!”

바깥쪽은 그냥 지켜보는 것 같고. 순간순간 동작이 워낙 빠르게 이어지고 있으니,

바깥쪽은 어차피 코스 가늠이 안 되는 만큼, 타이밍 잡기도 힘드니까, 그냥 무시하겠다는 뜻이겠지. 일정 수준을 넘지 않는다면 말이야.

톰 글래빈의 심정으로 바깥쪽으로 조지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오히려 나는 더욱더 과감하게 몸쪽으로 던졌다. 그것도 꽤나 위험한 코스로.

‘왔다.’

그러자 즉각적으로 나오는 반응. 새로운 릴리스 포인트로 던졌기에, 꽤나 빠르게 타이밍이 잡혔는데도 그는 자기 스윙을 유지했다.

보는 내 허리가 다 아플 정도로 잔뜩 몸통을 비틀면서, 모든 걸 박살 내버릴 것처럼 휘두른 스윙.

투수로서 타자가 저런 타격을 보여주면 심장이 철렁거리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두근두근하지. 결과가 기대되니까.

뭐, 진짜로 홈런 맞을 수도 있겠지만, 시범경기인데 하나쯤 맞는다고 안 죽어. 작년에도 아예 안 맞지도 않았고.

‘이거···’

그런 마음으로 지켜봤을 때, 결과가 나오기 전, 입고리가 먼저 올라갔다. 생각보다 훨씬 그럴 듯 했으니까.

‘제법 물건인데?’

“스트라이크 아웃!”

크게 휘둘러진 배트.

그보다 한참 뒤에야 공은 유유히 포수 글러브 안으로 도착했다.

슬로우 커브. 한번 꺼내봤는데, 이거, 생각보다 괜찮은데?

인터벌이 빨라진 상황에서, 익스텐션이 더 뻗는 터라 더 빠르게 느껴지는 새로운 릴리스로 던지니. 정말이지 거북이처럼 느린 구속과 어우러져, 뭔가 많이 꼬였다.

당장 코디 벨린저만 보더라도 자세가 완전히 무너졌고.

제법 쏠쏠하게 써먹기는 했지만, 사실 효과라고는 예상치 못한 의외성, 그리고 생소함 밖에 없었는데.

‘이젠 진짜 비밀병기네.’

딱 한 구이지만, 타이밍을 완전히 망가뜨리기에는 충분했다. 다만 내 스스로 느끼기에도, 다른 구종과 릴리스 포인트가 심하게 차이가 난다는 것이 문제지만.

어쩔 수 없지. 많이 던지지 않았으니, 숙련도가 더 떨어질 수밖에.

구종이 간파되는 순간 리그 최악의 타자라도 넘길 수 있는 공인 만큼 그러니 자주 써먹지는 못하겠지만.

‘애초에 슬로 커브의 존재 이유가 그건데 뭐.’

딱 한 번만 쓸 수 있는 비밀병기가 더 날카롭게 벼려진 것이니, 이 정도로 만족해야지.

그렇게 뜻밖의 과실을 얻어내며, 투아웃이 올라갔고, 마지막 4번타자, 맷 켐프가 올라왔지만.

“아웃!”

그 역시 타이밍을 잡지 못하며 내야뜬공으로 물러났다.

그렇게 앞선 이닝들보다도 더욱더 빠르게 끝나버린 4회 초.

전멸에 가까운 상황에, 전날 우리 팀을 압도했던 다저스의 기세가 제대로 꺾였지만.

‘이제 좀 몸이 풀리네. 남은 3이닝도 재밌게 놀아봅시다.’

그들이 겪어야 할 내 피칭은 아직 한참은 더 남아 있었다.

이제 시작이었으니까.

겨우 이 정도로 만족해서 쓰나. 아직 3이닝이나 남았는데. 시범경기 마지막 등판이니, 제대로 뽕을 뽑아야지.

####

올해 다저스는 불타올랐다.

스프링 트레이닝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선수들 간에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했지.

부당하게 빼앗긴 월드시리즈, 그것을 찾아오자는 단 하나의 목표를 품고서.

단장은 굳이 그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며, 선수들을 재무장시켰지만, 이건 집착이 아니었다. 그저 의지였지.

그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선수단에 이식되어, 캑터스 리그를 휩쓸었다. 다저스를 압도적인 1위로 만들었으니까.

“X발 2연패 가자!”

“X같은 휴스턴 새끼들한테, 정정당당한 우승이 뭔지 보여주자고!”

물론 시범경기의 순위 따윈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그딴 걸 누가 알아줄까?

허나 올해도 다저스가 품은 대의를 표현하기엔 충분했다, 그렇기에 멀리까지 찾아온 팬들은, 작년 빼앗긴 우승과 더불어 ‘2연패’를 해내고, 더 나아가 쓰리핏까지 실현에 왕조를 세우자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놀랍도록 분위기가 달라졌다. 오늘 경기가 시작된 순간부터 그 모든 열기가 순식간에 사그라졌으니까.

“스트라이크!”

안타 단 하나.

그것이 오늘 다저스가 얻어낸 전부였다.

작년, 너무나도 위대한 시즌을 보냈던 선수이고, 이번 시범경기에서도 그 기세가 이어졌던 지라,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거야, 이미 알고 있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어제와 오늘의 온도는 너무 달랐다.

“스트라이크!”

그 압도적인 피칭이 경기 초반을 지나, 4회, 5회, 6회에도 이어지는 것을 본 순간.

“···아메리칸 서부지구 새끼들이랑 악연이 깊네.”

“쯧, 휴스턴에 이어서 이번엔 오클랜드인가?”

마치, 오클랜드가 다저스를 보며 내셔널리그의 월드시리즈 진출자를 예상했듯. 다저스 역시 ‘오늘’의 오클랜드를 보며, 같은 생각을 품었다.

이번 월드시리즈에서는 어쩌면 휴스턴이 아니라, 전혀 안중에도 없었던 팀, 오클랜드와 마주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스트라이크 아웃!”

이유는 저것 하나면 충분하겠지. 분명 분석 자료에선 3이닝으로 제한된다던 빠른 인터벌은 4이닝째에 접어든 7회에도 멈추지 않았다.

지치지도 않는 건지, 아주 매섭게 다저스를 몰아붙였지.

“세 번째 타석부터는 칠 수 있을 것 같아?”

“글쎄, 봐야 알겠지만, 힘들겠지. 아예 감을 못 잡겠던데.”

“Ryu도 타이밍으로 잘 흔들지만, 쟤는 더하네. Korea 투수들은 다 저런가?”

선발 라인업에 올랐던 주전 타자들은 두 번째 타석 이후로 대부분 교체되어, 벤치에 앉아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명목상의 이유는 굳이 시범경기에서 체력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였지만. 대부분은 알았다.

코치와 감독이 자신들이 저 투수에게 박살 나는 걸, 아니, 망가지는 걸 원치 않았다는 것을.

속도가 빨라진 이후부터는 완전히 타이밍을 잃었으니까. 단순히 이번 경기를 넘어서, 앞으로도 두고두고 후유증이 남을 정도로. 제대로 박살 났지.

특히나 어처구니없는 슬로 커브에 당했던 코디 벨린저는 약간은 허탈함마저 느끼는 것 같았고.

“2년 전만 하더라도. Suck이 저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원래 알던 녀석이라고 했던가?”

“마이너에서 몇 번 만났죠. 그땐 지금이랑 완전 달랐고요.”

“그래, 그렇다고 들었어.”

“약이라도 한 거 아니야? 애슬레틱스가 그쪽 방면으론 유명하잖아?”

“그랬으면 구속이 저 모양은 아니었겠지.”

교체된 타자들을 폭압적으로 찍어 누르며, 아마도 마지막일 7회 초를 마무리 짓고 있는 Go를 보며 몇몇은 입술을 씹기도 했다.

흔히 우승 후보급 팀들 간의 경기를 미리보는 결승전이라고 지칭한다. 결승전이나 다름없는 경기라는 뜻이지.

최소한 오늘의 경기가 다저스에겐 그렇게 느껴졌다. 오클랜드가 그 대상이라는 것이 참으로 어이가 없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저 존재감 하나만으로 무시할 수는 없었다.

다저스가 커쇼에게 바랬던,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에이스의 모습을 오늘 Go가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그것에 홀린 건지, 어제는 너무나도 스무스하게 압도되었던 것과는 다르게, 애슬레틱스의 다른 선수들 역시 제대로 독기를 품었고 말이다.

만약 정말로 이것이 결승전, 월드시리즈의 마지막 경기였다면, 다저스는 그대로 패배했겠지.

“스트라이크 아웃!”

수미상관 구조처럼 마지막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깔끔하게 삼진 아웃으로 장식됐다.

오늘 경기 13번째 삼진.

그것으로 이닝은 종료됐다.

피칭 역시 그렇게 끝났고.

처음부터 끝까지, 오늘 경기를 지배했던 분위기가 한순간 뚝 끊겼기에.

조금은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최소한 다저스 선수들은 잘 알았다.

그저 시범경기이기에, 예고편에 불과하기에 여기서, 이 정도로 끝난 거라는 것을.

“준비 제대로 해야겠네. 쟤 다시 볼 때는.”

“그래야겠지,, 오늘처럼 7회에서 끝나지는 않을 테니까.

처음, 덕아웃의 그들을 훑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유롭게 웃으면서 벤치로 돌아가는 투수의 뒷모습에선, 그 어떤 피로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마치 이 정도로 끝내는 것이 아쉽다고 말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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