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벌써 시범경기 마지막 등판이라니, 시간 참 빠르단 말이야.’
새로운 가능성을 품고, 메사로 왔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캑터스 리그의 마지막을 앞뒀네.
실제로 시간이 바뀌기는 했는지, 겨울에서 초봄으로 넘어가는 시기라, 적당했던 온도가 슬슬 더워지고 있었다.
피닉스는 피닉스인가봐.
한여름에는 대체 여기서 어떻게 사는지 몰라. 이제 3월 말인데 이 정도면, 여름에는 진짜 죽겠는데?
‘오클랜드가 날씨는 딱 좋지.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오클랜드가 도시 이미지와 치안이 좀 그렇기는 해도, 일단은 캘리포니아인 만큼, 기후는 적절하게 좋은 편이긴 하지.
다시 돌아갈 오클랜드를 그리며, 마지막 경기를 위해 훈련장으로 향했다.
푹 쉬어준 덕분인지, 컨디션은 딱 알맞았다. 스프링 트레이닝 내내 올렸던 폼도 적절하게 올라왔고.
이젠 진짜 실전 모드라고 할 수 있겠지. 구종들도 다 적절하게 잡혔으니까.
다만 최고구속이 여전히 88마일 정도만 찍히는 게 약간은 문제인데···
“평균구속은 이미 다 올라왔는데, 최고가 좀처럼 안 찍히네요. 무슨 문제는 없겠죠?”
“평균이 빨리 올라온 거지, 딱 적절합니다. 개막전 이전까지는 충분히 올라올 테니, 너무 큰 걱정은 마세요.”
“뭐, 대니얼을 믿어야죠.”
그렇게 대니얼과 함께 다시 호호캄으로 향했다. 아, 참고로 브라이언은 다시 돌아갔다.
처리해야 할 일도 아직 남아 있고, 또 미리 오클랜드로 돌아가서, 준비할 것들도 있거든.
미리 집을 구해놓기는 했지만, 집만 구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니까. 이렇게 보니, 내가 진짜 악덕고용주긴 하네. 진짜 별걸 다 맡기는구만.
‘경비 업체도 구했다고 했었지.’
참고로 브라이언은 안전에 가장 열을 올리고 있었다. 작년에 살던 곳 근처로 집을 얻었는데. 어쨌든 오클랜드 안이잖아?
아무래도 불안할 수밖에 없었던 건지, 보라스 코퍼레이션과 연결된 업체를 통해 단단이 준비할 거라고 했다.
내가 해야 할 일까지 다 대신 해주는 건데, 그래도 한 가지 떳떳한 게 있다면, 작년처럼 남의 돈으로 사는 게 아니라, 내 돈이 나간다는 거겠지.
“대니얼은 올해도 저랑 같이 살아도 괜찮아요?”
“예, 역대 최고의 선수를 바로 옆에서 도울 기회인데, 당연히 좋죠. 솔직하게 말하면, Go에게 얹혀사는 것에 조금 적응하기도 했고요. 일단 기타 경비가 안 나가는 게 가장 좋죠. 혹시 Go가 불편하시다면, 근처에 다른 숙소를 잡도록 하겠습니다.”
“아뇨, 저도 좋아요. 세세하게 관리해주니까. 이런 트레이너가 어딨겠어요?”
“노고를 알아주시는 것 같아 참 고맙네요.”
혹시나 싶은 마음에 슬쩍 물어보니, 대니얼은 어깨를 으쓱였다. 올해도 계약을 연장했는데. 따로 숙소를 구해준다고 하니, 그는 사양했다.
지금이 편하기도 하고, 내 관리를 더욱더 철저하게 할 수 있어서 좋다는데. 솔직히 나도 내내 같이 지내서 그런가, 없으면 좀 허전할 것 같더라고.
더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오클랜드가 좋기는 한데, 아무리 그래도 혼자 살기는 좀 무서웠는데, 올해도 그가 같이 살아준다고하니 참 다행이다 싶었다.
‘도시 전체가 날 사랑해주기는 하지만, 누구 하나 눈이 돌아서 강도하러 올지도 모르니까.’
이게 개소리 같아 보여도 오클랜드에선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야, 그러니 마냥 편하게 마음먹을 수는 없지.
그나마 내가 사는 곳은 부촌이라서, 오클랜드 내에서는 치안이 가장 좋은 편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좀 그래.
“Gym도 준비됐다고 했죠?”
“네, 공간이 더 넓다기에, 브라이언에게 부탁해서, 저번보다 조금 더 본격적으로 차려뒀습니다. 이번 겨울에 훈련하면서 사용했던 기기들도 있고요.”
“식단이나 트레이닝은요?”
“작년과 비슷하게 구성했습니다만, 전반기 직전에 체력이 떨어졌던 걸 감안하여 약간은 변형을 줬습니다. 올해 겨울에는 체력 훈련을 집중적으로 했지만, 무시할 수는 없죠.”
“뭐, 다 됐네요, 그러면.”
깔끔한 답변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정말로 모든 준비는 끝났다고 할 수 있겠지. 나 개인적으로는, 그 외적으로든 말이야.
그러니, 경기에만 집중하자고.
진짜 시즌이 시작되기 전, 내 스스로의 완성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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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범경기 마지막 등판이라는 소식에 잔뜩 몰려든 팬들에게 팬 서비스를 제공한 뒤, 클럽하우스에 들어서니.
바깥이랑은 다르게, 확실히 전보다 훨씬 한산했다. 3월 초만 하더라도, 그야말로 개미떼처럼 바글바글했는데. 이젠 사람이 많이 줄었네.
시범경기가 끝나려면, 아직 몇 경기가 더 남아 있긴 하지만, 그래도 내려갈 놈들은 다 내려갔으니까.
작년에는 누군가 하나 사라질 때마다 괜히 내 기분이 찝찝하고, 신경 쓰였는데. 올해는 관심도 없었네.
‘그만큼 내 입지가 많이 달라졌으니까.’
조금은 잔인할 수도 있겠지만, 내 동료는 어디까지나 정규시즌에서 함께할 사람, 딱 25명뿐이다. 그 외는 딱히 신경 쓸 이유가 없지.
첫 날만 하더라도 누군가와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조심 걸었던 것과 달리,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으며 라커룸에 도달하니, 웬 말라깽이가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어, 일찍 왔네?”
“Suck 네가 늦은 거지. 아니다, 오늘 등판하니까, 딱 평소대로 정확하게 왔네. 대니얼 씨도 어서오세요.”
“하하, 네, 오늘도 수고하십시오, 맥스웰 씨.”
브루스 말이야. 진짜 말라깽이라는 건 아니고, 새삼스럽지만 진짜 좀 많이 빠지긴 했네.
얘도 올해는 준비를 제대로 했어. 겨울에 처음 봤을 때보다도 살짝 더 호리해진 걸 보면.
물론 여전히 거구이고, 살짝 통통한 수준이지만, 그래도 뚱뚱에 가까웠던 작년이랑 비교하면 비약적인 발전이지.
“라인업은 나왔어?”
“나왔어, 오는 통로에 붙어 있었는데, 못 봤어?”
종이 쪼가리가 붙어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미처 확인하지는 못했다.
다만 그래도 큰 상관은 없겠지. 어차피 저쪽도, 우리도 풀 전력으로 나올 테니까.
정규시즌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전력 확인과 주전 결정을 내려야 할 텐데, 서로 적절한 상대를 만났으니까.
“오늘도 네가 받냐?”
“어, 빡세게 던져. 나도 폼 다 올라왔으니까, 걱정해서 살살 봐주지 말고.”
“오케이, 손 안 깨지게 조심해라. 제대로 쑤셔 넣을 거니까.”
자신감을 드러내던 브루스는 내 말에 당황한 건지 조금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지 못한다.
고생해라. 니 입으로 직접 빡세게 하라고 했으니, 진짜 온 힘을 다해서 던져주마. 애초에 그럴 계획이기도 했고.
한숨을 픽 내쉬는 브루스의 어깨를 두들겨준 뒤, 빠르게 환복한 뒤 워밍업을 시작했다.
“음- 힘이 좀 실렸네. 커트 앵글, 살살 해라. 내 나이에 이런 거 받으면 뼈 부러져.”
몸 풀고, 뛰고, 던지고. 뭐 그런 거지. 불펜피칭 전에 어깨를 풀어주기 위해 캐치볼을 살짝 했는데.
뒤늦게 합류해서 캐치볼을 받아주던 그렉은 살짝 엄살을 부렸다. 뭐 고작 캐치볼 가지고. 천하의 그렉 매덕스가 말이야.
“충분히 살살하고 있어요. 이런 것도 힘드시면 현역 때 골드글러브은 어떻게 타셨대? 타구가 훨씬 강할 텐데.”
“그땐 팔팔했잖아. 너도 나이 들어봐라. 뼈 마디마디가 쑤신다.”
말은 참 잘해.
그래도 마냥 엄살은 아닌 게, 가볍게 던졌는데도 제법 묵직하게 날아가기는 했다. 그만큼 몸이 풀렸다는 거지.
‘폼은 확실히 올라왔네. 캐치볼인데도 이 정도면.’
컨디션도 적당히 나쁘지는 않은 것 같으니, 오늘도 기대해볼 만하겠지.
워밍업을 마친 뒤, 아까 전에 미처 보지 못했던 오늘 라인업을 살폈다.
우리도 딱 주전들이 나왔고, 다저스 역시 그 정도네. 어제 보니까 폼도 올라왔던데, 진짜 정규시즌 경기라고 생각해도 되겠지. 그러길 바라고.
“오늘 컨디션은 어때?”
“아주 좋아요. 완봉도 할 수 있을 만큼.”
“음, 그런 소리는 하지 말고. 딱 7이닝이야. 그 정도로 참아.”
“옙.”
내 너스레에 스콧 에머슨은 아주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어림도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거 농담 좀 한 거 가지고.
내가 미친놈도 아니고, 시범경기에서 완봉을 왜 해? 그럴 힘 아껴서 정규시즌에서 해야지.
어쨌든 오늘 허락받은 이닝은 7이닝. 선발 감각을 확실하게 올려둬야 하기에, 꽤나 긴 이닝을 보장받았다.
시범경기 마지막으로 던지기 적절한 이닝이지. 투구수도 90구까지 허락한다고 했고.
‘경기수는 두 경기 줄었지만, 이닝은 작년이랑 똑같네.’
별문제 없지, 7이닝 채운다 치면 오늘이 캑터스 리그 마지막 등판이니, 25이닝이 되는 건데.
그러고 보면 작년에도 딱 25이닝을 던졌다. 대신 7경기를 나왔었지, 작년은. 올해는 다섯 경기에 25이닝이고.
적절하게 휴식을 보장받으면서 폼을 올렸다고 할 수 있지. 작년처럼 눈도장 찍기 위해 무리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작년보다 조금만 더 잘해보자, 올해는.’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혀를 내둘렀을 욕심을 품고서, 불펜에 들어섰다.
“Suck!”
“오늘도 잘해라!”
“이번 경기도 길게 던지는 거 맞지?”
“작년처럼 7이닝 퍼펙트 해버려!”
불펜이 훤히 개방되어 있었기에, 미리 들어와 앉아 있던 관중들이 반갑게 맞이했다.
내 사진을 찍기 위해서 미리 자리 잡고 있었을 기자들도 계속 찰칵거렸고.
그들에게 살짝 손을 흔들고, 카메라 셔터에 맞춰 장난스럽게 포즈를 취해준 뒤, 본격적으로 집중력을 끌어 올렸다.
“나이스볼~”
초구는 언제나 서클 체인지업. 이게 국룰이지. 적어도 나한테는.
가끔 불안하다니까.
한번 브레이킹볼 감각이 떨어진 적이 있어서 그런지, 혹시나 오늘도 그러지는 않을까,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거든.
다행히 그날 결과야 좋았지만.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일이라서 그런지, 조금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렇기에 그렉과 함께 아주 철저하게 브레이킹볼 감각을 잡은 것이고.
‘오늘은 괜찮아 보이네. 제구도 잘 되고.’
그래도 최소한 지금은 좋아보였다. 오늘은 불펜포수가 받아줬는데, 과하게 호들갑을 떨지 않고, 짧게 나이스볼만 외치는 것을 보아, 위력이 적절하다는 거겠지.
초구이기에 살살 던졌는데도 저런 반응이면 나쁘지 않네. 내가 봐도 뚝 떨어지는 무브먼트가 제법 좋아 보였고.
“나이스볼!”
“나이스!”
“씁-”
서클 체인지업을 시작으로 차근차근 다른 구종들도 점검했고, 서서히 출력도 올렸다.
제법 힘을 담아 포심을 던지니, 묵직한 소리가 울렸는데, 불펜포수도 별다른 감탄사나 호들갑 없이 나직하게 신읍만 뱉었다. 아주 좋다는 뜻이지.
“이 정도면 됐네.”
제대로 달아오른 어깨.
옆에서 지켜보던 스콧 에머슨은 적절하게 커트했다. 흘끔 바라보니, 그렉도 고개를 끄덕였고.
모든 준비는 끝났다.
오클랜드로 돌아갈 준비도, 시범경기를 끝낼 준비도, 정규시즌을 시작할 준비도. 그리고.
‘어디, 그 대단한 다저스 맛 좀 보자.’
다저스를 조질 준비도.
####
다저스라는 팀은 어떤 의미에선 우상과도 같았다. 그렉 매덕스나 랜디 존슨, 페드로 마르티네즈 등의 선수처럼. 구단 자체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내가 아직 초등학교도 입학하지 않았던 시절에, 아빠랑 같이 봤던 메이저리그 경기는 거의 99% 확률로 다저스였거든.
그때 코리안 특급은 국민적인 영웅이었으니까. 어쩌면 그때부터 야구에 꿈을 꾸기 시작한 걸지도 모르고.
수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추억이기에, 나 혼자만이 아니라, 메이저리그를 꿈꾸는 대부분의 한국 선수들에게 다저스는 그런 존재다.
어떻게 보면, 메이저리그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양키스를 바라보는 미국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드디어 만났네, 시범경기에서나마.’
그런 다저스를 드디어 만났다. 그동안은 기회가 없었지. 리그도 다르고, 인터리그도 작년은 NL 동부랑 했으니까.
그나마 시범경기에서는 같은 캑터스 리그이긴 하지만, 작년에는 등판하지 못했고 말이야.
그렇게 처음으로 마주한 다저스는 내가 동경했던 모습과는 많이 다르지만, 아주 강력한 팀이라는 건 여전히 똑같았다.
“쟤들 타격감 좋다고 했지?”
“어, 어제도 잘 치더라. 특히 벨린저랑 시거는 그냥 훅 넘겨. Suck 너는 좀 어때?”
“나도 적절해. 딱 좋아.”
“타자들 체크할까?”
“됐어, 오늘은 공만 잘 받아라.”
일찌감치 내게 다저스의 강력함을 경고했던 브루스는 여전히 같은 생각인 것 같았지만. 날 흘끔 훑어보더니, 걱정을 내려놓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얘도 이제 척하면 척이지.
나랑 같이 뛴 경기가 얼만데.
딱 봐도 컨디션 좋아 보이니, 염려하지 않겠다는 거겠지.
브루스를 내려보낸 뒤, 흘끔 상대팀 벤치를 훑었다. 마찬가지로 그쪽도 나를 보고 있었고.
익숙한 얼굴도 보이는구만.
같은 한국인을 만난 게 반가웠던 건지, 류영진 선배는 살짝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도 수고하십쇼. 응원하고 있습니다.’
이 이역만리 타국에서 소수밖에 안 되니, 동질감이 생길 수밖에 없지. 마찬가지로 나도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런 내 표정을 타자들은 조금 다르게 받아들인 것 같네. 괜히 도발한 게 되버렸지만, 오히려 좋아.
‘제대로 해봐. 시범경기라고 설렁설렁하지 말고. 그래야 감이 잡힐 테니까.’
오해를 샀지만, 굳이 정정할 생각은 없다. 그걸로 인해 더 적극적으로 나와준다면야 나야 감사하지.
그렇기에 휙 고개를 돌린 뒤, 마지막으로 몸을 풀었다.
‘사람 많네. 거의 만원인데?’
경기 시작 선언을 고려하는 건지, 주심이 입을 달싹거렸을 때, 잠깐 경기장을 훑었다.
경기에 집중하느라 뭐라뭐라 소리치는 것도 제대로 안 들었는데, 호호캄 스타디움의 안에는 사람이 꽉꽉 차 있었다.
누가 보면 페넌트레이스 경기인 줄 알겠어. 내 마지막 등판이라는 타이틀이 그렇게 유혹적이었던 건가?
시범경기인데도 우리 홈이라는 게 확실하게 느껴질 만큼, 호호캄은 녹색으로 물들었다.
“플레이볼!”
그리고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뒀을 때, 마침내 주심이 큰 목소리로, 모두가 기다렸던 경기의 시작을 알렸다.
그러자 타석으로 올라오는 타자. 크리스 테일러. 유틸리티 자원인데, 타격도 좋다.
‘작년에 20홈런이었던가?’
작년, 첫 풀타임 시즌을 소화했는데, 훌륭한 성적을 기록했었지. 타율도 2할 8푼에, OPS는 8할 중반을 찍었다.
홈런도 아마 20개 정도 쳤을 거고. 21개인가? 잘 기억이 안 나네.
어쨌든 제법 준수한 파워툴도 가지고 있고, 컨택도 뛰어나다, 준수한 스프레이 히터지.
그런데 그는 마치 정규시즌 경기처럼 대단히 집중한 모습으로 타석에 올라섰다.
기회를 찾아 헤매는 마이너리거가 아닌데도 저렇다는 건, 저쪽도 이번 경기를 꽤나 진지하게 여긴다는 건가?
‘나쁘지 않지. 그렇게만 상대해주라. 나도 진지하게 할 테니까.’
그런 타자의 반응을 감사하게 여기며, 초구를 조준했다. 늘 그렇듯 언제나 몸쪽.
“스트라이크!”
허나 서클 체인지업이다.
초구부터 아주 과감하게 스윙을 했는데, 뚝 떨어지는 무브먼트에 배트가 헛돌았다.
꽤나 확신에 차서 스윙한 것을 보아, 내가 몸쪽 패스트볼을 자주 던진다는 걸 알고 그런 것 같은데. 말했잖아, 진지하게 한다고.
지금까지는 순수하게 실력빨로 그냥 찍어 눌렀지만, 오늘은 머리도 굴릴 생각이다.
정규시즌이 코앞인데, 단순히 신체만 올리는 게 아니라, 대가리도 잠에서 깨워야 하잖아?
“스트라이크!”
2구는 다시 몸쪽으로 낮게.
한번 더 서클 체인지업을 깔아서 던져봤는데, 나갈 거라고 생각한 것 같지만, 절묘하게 꺾이면서 들어갔다.
그렇게 잡은 투 스트라이크.
피칭을 보고 감을 잡은 듯, 타자 크리스 테일러는 조금 더 배트를 꽈악 잡았다.
마지막 3구.
높게 날아가는 공에 타자는 이번에도 기다렸다는 듯이 스윙했다. 하이 패스트볼은 내 필승 법 중 하나이니까.
“스트라이크 아웃!”
하지만 몸쪽으로 파고들며 떨어지는 궤적에 배트는 이번에도 공에 닿지 못했다.
한번 꼬아서 너클 커브를 던져봤는데, 어우, 잘못하면 맞출 뻔했네. 물론 배트가 제대로 돌았으니, 설사 맞았다고 해도 삼진이긴 했겠지만.
“You Suck!”
타자와 내가 실전처럼 승부를 벌였듯이, 경기장을 가득 채운 관중들 역시 평소보다 조금 더 흥겹게 소리쳤다.
호호캄이 아닌 콜리시움처럼 변해버린 분위기 속에서 올라온 두 번째 타자, 얘도 진짜지.
‘코리 시거, 좀 곱상하게 생겼는데 말이야.’
코리 시거.
쟤 형은 작년에 종종 봤다. 매리너스 소속으로 뛰는 카일 시거의 동생이거든.
형이랑 닮기는 한 건지, 얼굴이 좀 낯이 익은 느낌인데, 준수한 얼굴만큼이나 타격도 제대로다. 22홈런을 날렸으니까.
그것 외에도 전체적으로 앞에 상대한 크리스 테일러랑 비슷한 성적을 찍었는데, 유격수라는 걸 감안하면 수준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약점이 좀 있던데, 이번에 한번 보자고.’
이번에도 초구는 몸쪽.
새로운 릴리스 포인트로, 조금 길게 뻗어, 바짝 붙여서 던졌는데, 몸만 움찔거렸다.
“스트라이크!”
포심 패스트볼.
힘을 실어서 던졌더니, 87마일이 찍혔다. 지켜본 건가?
“볼.”
2구는 바깥쪽으로 낮게 깔린 투심. 코리 시거는 이번에도 스윙을 참았고, 주심은 살짝 나갔다고 판단한 건지, 볼을 선언했다.
걸치게 던진 것 같은데, 빡빡하시네. 시범경기인데 좀 여유롭게 잡아주지. 너무하다야.
얌전히 지켜보는 눈길을 보아, 릴리스 포인트가 바뀐 걸 조금은 포착한 것 같았다. 사실 이미 유명하기도 하고.
‘재능이 좋긴 좋네.’
최근 최고의 주가를 올리는 선수에게 새삼 감탄하며, 3구를 조준했고.
“파울!”
다시 몸쪽으로 찍어 누른 포심 패스트볼에 배트가 돌았고, 살짝 스친 타구가 파울라인을 넘었다.
‘몸쪽에 생각보다 약하다고 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네.’
듣기로 몸쪽 공에 약점을 보인다고 해서 한번 던져봤는데, 아무리 똑같은 패스트볼이라고 하도 바로 맞추는 걸로 봐선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하긴, 분석이 됐을 정도면 쟤도 알 텐데, 어느 정도는 보강했겠지.’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새로 받은 공을 왼손 안에서 굴렸다.
내가 자신을 관찰하는 것을 느낀 건지, 코리 시거는 살짝 입술을 깨물면서 두 눈을 부릅떴다. 어이구 무서워라.
‘바로 가자.’
그 시선에 피식 미소를 날려주니, 조금 더 눈빛이 뜨거워졌다. 그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스트라이크 아웃!”
제대로 손끝으로 챘다.
타자의 시선 앞에서 유유히 낙하하는 공. 서클 체인지업 V1.
좌타자이긴 하지만, 역회전보다는 떨어지는 무브먼트가 메인인 구질이었기에, 제대로 말린 타자는 큼직하게 허공을 갈랐다.
조금 분노에 차서 내려가는 타자에게 다시금 싱그러운 미소를 날려줬지만,
“You Suck!”
조롱하는 유썩 소리 때문인지, 이번에도 선의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이게 다 팬들 때문이야.
내가 순수하게 미소를 지어도, 저 유썩유썩 때문에 다들 오해하고 그러잖아.
이를 꽉 깨물고서 거친 걸음으로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코리 시거를 배웅해준 뒤, 뒤이어 올라오는 타자도 훑었다.
‘얜 그래도 익숙하네. 이렇게 보니까 반갑다야.’
코디 벨린저.
마이너에서 상대했던 녀석이다. 하이A 그리고 더블A에서.
어쩌면 내 전설의 시작이기도 하고. 숨겨진 실링이 터진 건지, 첫 각성을 했던 날. 그날 더블A 경기에서 상대했던 녀석이니까.
‘털사 드릴러스.’
이름도 안 까먹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어쩌면 내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순간이니까.
하이A에서는 개털렸었지만, 그땐 삼진으로 잡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날이 모든 시작이지. 그날 지금의 서클이 긁혀서, 지금의 서클 V1이 만들어지면서, 3이닝 퍼펙트를 기록한 뒤로, 지금까지 쭉 이어졌으니까.
그렇기에 다시 마주한 코디 벨린저는 왠지 조금 반가웠다. 그날 보았던 저 나른한 눈동자도 반갑고. 또한···
‘집중했네, 제대로.’
그때 날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과는 다르게, 지금은 아주 또렷하게, 긴장감을 담아서 쳐다보고 있는 것도 아주 좋네.
그땐 정말로 온 사력을 다했다. 별짓을 다했지, 어떻게든 맞지 않기 위해서.
파워가 출중한 놈이라, 맞는 순간 홈런이었을 테니까.
사실 그때는 굳이 파워가 강한 놈이 아니더라도, 일단 맞으면 넘어가는 수준의 구위를 가졌지만.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조금 민망하긴 하지만, 어쨌든 저~기 있는 대니얼 덕분에 제대로 던지는 법을 배웠으니까.
“스트라이크!”
그렇기에 그때처럼 별짓을 하지 않더라도. 운 좋게 긁힌다고 생각한 서클 하나에 의존하지 않아도.
“스트라이크!”
충분히 잡을 수 있다.
‘화끈하게 가자. 그때처럼 이상한 짓거리는 안 할게.’
설사 과감하게 몸쪽으로 포심을 던져서, 저 우람한 스윙에 공이 걸린다고 할지라도.
“아웃!”
공은 넘어가지 않는다.
그는 공을 맞췄다.
몸쪽으로 날아온 포심을 제대로 끌어당겨서. 체인지업에 삼진을 당했던 그때와는 다르게.
하지만 나 역시 달랐기에, 제대로 맞췄는데도 공은 뻗지 않았고. 우익수로 나온 크리스티안 옐리치는 움직이지조차 않으며 가볍게 타구를 잡았다.
그것으로 쓰리아웃.
오늘의 첫 이닝이 끝났다.
“빡세게 하랬더니, 진짜 빡세네. 손바닥 터지겠다야.”
“안 터져, 사람 몸은 생각보다 튼튼하거든. 6이닝 남았으니까, 수고해라.”
타구를 잡아준 크리스티안 옐리치에게 따봉을 날린 뒤, 브루스와 함께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길.
기분인 조금 미묘했다.
어릴 적 동경했던 다저스를 드디어 만났다. 상대팀으로. 월드시리즈의 경쟁자를 미리 본다는 느낌으로.
어쩌면 내 진짜 시작이라고 할 수도 있을 그 날의 가장 강력한 적이었던 코디 벨린저도 다시 만났다. 이번엔 삼진으로 못 잡았지만, 대신 외야 뜬공으로 잡았지.
그런 결과를 통해 내가 얻어낸 것은.
‘할 만하네, 다저스. 생각보다 훨씬.’
생각보다 훨씬 할 만하다는 거였다. 크게만 느껴졌던 것들이 작아졌다는 건. 그만큼 내가 커버렸다는 뜻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