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로열스와의 경기를 위해, 그들의 시범경기 홈구장이자, 캠프 장소인 서프라이즈 스타디움으로 향하는 버스 안은 조금 어수선했다.
다들 은근히 나를 지켜본다고 해야 하나? 특히 올해도 주전으로 뛸 선수들은 더욱더 내 눈치를 살폈다.
“왜들 이래?”
그 눈길이 조금 거슬려서 직설적으로 물으니, 옆자리에 앉았던 브루스가 살짝 입맛을 다셨다. 쉽게 말하기는 민감한 문제라는 것처럼.
“그게, Suck 네가 Korea로 돌아간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그, 뭐야, 너희 나라는 징병제라며? 군대 가야 한다고 하던데.”
“시즌이 코앞인데 가긴 어딜 가? 미리 오클랜드로 돌아가는 게 아니고서야.”
내가 지금 군대를 왜 가··· 너무 뜬금없는 말이라서 그런지, 어디서부터 와전이 된 건지 짐작도 안 되네.
그래도 대충 뭘 말하고 싶은 건지는 알 것 같았다. 추론해보자면, 아시안게임에서 비롯된 거겠지. 이 개소리는.
‘유명한 게 이래서 문제라니까. 뭐 하나 걸리기만 하면 오만군데서 다 물고 늘어지니···’
단순히 한국만의 일은 아닐 거다. 하룻밤 새 미국에서도 미끼를 물은 거겠지.
리그 최고의 슈퍼스타가 시즌 중간에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건데, 얼마나 흥미롭겠어?
군 면제를 받기 위해서 아시안게임에 참가하려 잠시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소식이 와전된 거겠지.
입대를 위해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식으로 말이야.
“아니, 그냥 그런 얘기가 나와서. 좀 걱정했지.”
“걱정하지 말고 경기에나 집중해라. 오늘 드디어 몸 좀 푸는 날인데. 네가 이래서 되겠냐?”
경기가 코앞인데 말이야.
아무리 시범경기라도 경기에 집중해야지, 다른 것에 눈이 팔리면 쓰나. 특히 내 공 잡아줄 놈이.
“나 오늘 경기 안 나오는데? 오늘은 더스틴이야. 더스틴 가뉴.”
그럼 비켜 새끼야.
옆에 앉았길래 오늘도 지긋지긋하게 얘가 받는 줄 알았더니, 다른 녀석이었네.
“그럼 왜 내 옆에 있어? 자리 비켜, 오늘 배터리랑 대화 좀 나누자.”
“에이, 파트너끼리 같이 앉아서 가는 거지.”
넉살 좋게 클클거린 브루스였지만, 왠지 조금 마음이 편안해 보였다. 우리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고.
이제 좀 관심을 끊은 것 같네. 그래, 경기를 앞뒀으면 이런 분위기가 응당 맞는 거지.
내 눈치나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아시안게임···’
솔직하게 말하면 나도 그런 말 할 처지는 못 되지. 나 역시도 온전히 경기에 집중하기 보다는, 계속 그 생각 중이니까.
이참에 늘 문제일 수밖에 없는 군대 문제를 치워버릴 수도 있다는 게 기쁘면서도.
다른 논란을 방지하기 위해, 날 이용하려는 행위에 짜증도 난다. 조금 마음이 복잡하지.
“Suck! 어디 가는 거 아니지?”
“여권 맡겨, 여권! 절대로 돌아가면 안 돼!”
“정 문제가 생기면 내가 한국 대사관 앞에서 무릎이라도 꿇을 테니까! 계속 잘하기만 해줘!”
그런 생각으로 서프라이즈 스타디움에 도착하니, 오늘도 여지없이 따라온 팬들이 보였는데.
복잡한 나랑은 다르게, 그들은 꽤나 감정이 명확했다. 두려움, 딱 그것뿐이지.
내가 자신들을, 아주 잠깐이라도 중간에 떠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말이야.
그래서인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평소처럼 환호하거나, 썩썩 거리는 게 아니라, 간절하게 부탁하고는 했다.
“사인?”
“그건 우리 다 있다니까. 계속 묻고 그래. 그보다도 확답해 줘, 안 가는 거 맞지? 올해 우승하려면 Suck 네가 무조건 있어야 돼!”
“에이, 뭐, 길어야 2주 정도일 텐데.”
“2주도 안 돼! 우린 너 없이 한시도 못살아!”
사랑 고백도 하고 말이야. 그와중에 사인받으려는 사람이 하나도 없네.
하긴, 평소처럼 코스튬을 차려입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를 보아 레이더스가 분명한데.
레이더스쯤 되면 내 사인이 없는 사람이 없지. 저마다 사진도 열 장 이상씩은 가지고 있고.
혹시나 싶어서 꺼냈던 사인펜을 다시 품 안에 넣은 뒤, 불안함에 가득 찬 이들에게 씨익 웃어줬다.
“아무튼 그런 건 신경쓰지 마시고, 오늘도 You Suck 그거나 잘하세요. 삼진 많이 잡을 거니까.”
“아 진짜? 얼마나?”
“못해도 열 개는 잡아야죠. 오늘은 6이닝이니까, 기대들 하쇼.”
“캬~ 오늘 잘 따라왔네. 6이닝이면 좀 아쉽긴 하지만, 적당하긴 하지. 수고해라!”
“안 그래도 판넬 챙겨왔는데, 마침 잘됐어. 일곱 개밖에 없으니까, 못 해도 세 개는 뒤집어, 알았지?”
“예예, 다 해줄 테니까, 경기 즐겁게들 보십쇼.”
내 말에 그들도 신경이 경기로 향한 건지, 걱정을 잠시나마 접어뒀다. 그저 내 자신만만한 말에 기뻐하며, 다가올 경기에 대한 기대감으로 물들었을 뿐. 나도 마찬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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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팀에 집중해보자.
일단, 캔자스시티 로열스.
좋은 팀이지, 스몰마켓이 어떻게 반란을 일으켜야 하는가를 아주 제대로 보여줬으니까. 이젠 축제가 끝난지 좀 됐지만.
‘뭐 이건 별로 중요치 않고. 제법 레귤러에 가깝네.’
일단 이번 경기에서는 제법 전력을 갖췄다. 정규시즌이 다가오고 있는 만큼, 팀 전력을 자체적으로도 평가해보려는 거겠지.
내가 등판한다는 거야, 이미 기정사실이니까, 그에 맞서, 리그 최고의 투수를 상대로 말이야.
완전히 주전으로 꾸린 건 아니지만, 적당히 주전과 백업들이 나왔으니, 나로서도 나쁘지는 않았다.
‘이전에는 좀 너무 수월했어.’
11이닝 연속 퍼펙트.
아무리 시범경기라고 해도, 이게 말이나 되나. 상대도 전력이 아니었으니까 가능한 거지.
물론 나도 폼이 다 올라온 건 아니긴 한데, 그래도 너무 쉬웠지. 이번에야 좀 제대로 할 수 있겠네.
“더스틴.”
“어? 어, Suck, 아니, Go. 거- 걱정하지 말고 던져. 내가 다 잡아줄게.”
“편하게 해요, 편하게. 브루스한테 얘기는 들었죠? 조시한테도.”
“응, 웬만하면 그냥 네 말 따르고, 공 잘 잡으라고.”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익숙치 않은 포수가 오늘의 파트너라는 거겠지.
더스틴 가뉴(Dustin Garneau), 가노나 가니우라고 발음하기도 하던데. 아무튼 오늘 내 공을 받아줄 사람이다.
듣기로 작년에 웨이버 공시로 데려온 포수라고 하던데, 서드 포수 후보다. 나이가 적지는 않지. 87년생이면, 브루스보다 대충 세 살쯤 많네, 아마도.
나랑 비교하면 제법 나이차가 나는 건데, 어린놈의 자식 앞에서도 그는 조금 조심스러운 표정이었다.
약간 긴장한 것 같기도.
아마 조시 페글리나 브루스가 무서운 말이라도 한 모양이겠지.
말을 안 들으면 포심으로 손바닥 깨버린다거나, 성격이 지랄 맞아서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다거나 뭐 그런 거.
‘스티븐은 나갔는데, 그 소문은 계속 가네.’
정작 진짜로 나한테 그런 짓을 당했던 장본인인 스티븐 보그트는 겨울 동안 팀에서 나갔는데 말이야.
잔뜩 긴장한 모습에 괜히 보는 내가 불안해져서 다독여주니, 한결 편안해보였다.
“커트 앵글, 좀 빡세게 던져.”
“예? 왜요, 또 기죽이라고요? 이제 제가 그럴 수준은 아니지 않나?”
“아니, 딱 보니까, 저러다 공 흘릴 것 같은데, 미리미리 주의를 주자고. 적당히 평소 불펜피칭보다 더 강하게 던져. 그래야 집중하지.”
그렉의 조언에 흘끔 스콧 에머슨을 보니, 그도 같은 생각인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악한 양반들 같으니라고. 안 그래도 겁먹은 포수한테 다들 너무하시네.
“읍-”
하지만 나도 내 경기에서 포수가 공을 흘리거나, 잡지 못하고 포일을 범하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기에. 평소보다 조금 더 힘을 담아 불펜피칭을 가졌다.
“···잘- 잘할게, 내가. 정말로. 잘할게”
“경기에선 이거 보다 조금 더 빡세니까, 잘 잡아줘요.”
“그래··· 그렇겠지···.”
음, 왠지 역효과가 난 것 같지만, 그래도 집중은 한 것 같네. 나쁘진 않아.
그렇게 불펜피칭 겸 포수 길들이기, 아니아니, 포수 적응 돕기(?)까지 마친 뒤. 잠시 숨을 고르며 시간을 기다렸다.
‘별말이 없네. 뭐라고 할 줄 알았더니.’
기다리는 동안 흘끔 스콧 에머슨을 보니 그는 평소처럼 차분하게-
“눈물을 머금고 6이닝 딱 던지게 해주는 거니까, 또 갑자기 퍼펙트니 뭐니 하면서 고삐 풀고 더 던지게 해달라고-”
차분하지는 않고, 아주 꾹꾹 눌러 담은 감정을 표출하며 열심히 주의를 줬다. 내가 속을 많이 썩이긴 했나봐. 뭐, 가져다준 영광이 더 크기는 하겠지만.
아무튼 평소와 같았다.
나한테 이야기가 온 것을 보면 분명 구단에도 말이 갔을 거고,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지금 문제를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그는 이번 일에 대한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았다. 단순히 국제대회 참가 정도가 아니라, 워낙 민감한 문제이고, 또 팀 에이스 투수의 생각을 어느 정도는 존중하는 거겠지.
“공격 끝났네, 잘 던지고 올게요. 무리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편하게 보고 계십쇼.”
“그래, 제발 부탁이다.”
그렇기에 나도 평소처럼 말하며, 불펜을 나섰다. 1회 초, 무려 6점이나 몰아낸 덕분에 좀 오래 기다렸네.
그라운드로 나가 주변을 훑으니, 어쩐지 관중석에 우리 팬이 더 많은 것 같은 건 착각인가?
로열스는 비교적 최근에 월드시리즈 우승한 팀이고, 심지어 시범경기라고 해도 원정인데, 어째 애슬레틱스게 더 많네.
“Suck! 네가 말한 대로 열심히 You Suck 할 테니까, 삼진 잡아라!”
“아주 자신만만하던데, 난 그게 좋아! 약속 지켜!”
월드시리즈 우승의 후광보다 내 존재감이 더 크다는 거겠지. 사실 죄다 날 보러 온 거니까.
아까 전에 봤던 관중들도 몇몇 보였는데, 그들은 내게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진짜로 판넬을 챙겨 왔던 건지, 벌써부터 K자를 휙휙 흔들고 있었고 말이다.
순수하게 경기에, 내가 보여줄 피칭에 기대하는 거지. 그러니 내가 할 일도 딱 하나뿐.
“스트라이크!”
뭐, 이거밖에 더 있겠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던진 초구. 서클 체인지업.
1번타자 타일러 콜린스는 크게 헛스윙하며 오늘 내 첫 번째 스트라이크를 만들어줬다.
‘몸쪽으로 하나 더.’
곧바로 2구.
본격적으로 공을 던지기 시작하니, 복잡했던 머리는 깨끗하게 비워졌다. 오로지 타자를 잡는 것, 호언장담대로 탈삼진을 올리는 것. 그것으로만 가득 찼을 뿐.
“스트라이크!”
몸쪽으로 딱 붙어서 날아온 공에 타자는 화들짝 놀란 듯 몸을 비틀었지만, 슬라이더는 그를 농락하며 아슬아슬하게 스트라이크 존의 끄트머리로 스쳐지나갔다.
판정이 좀 널널하네. 시범경기라서 여유를 주는 건가? 볼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여기까지 몰아넣었으니, 더 볼 필요는 없지.
‘첫 타자인데, 잡고 시작하자. K 휘두르고 있으니까.’
마지막 3구째.
릴리스 포인트를 바꾸며, 다시금 몸쪽으로 높게 하나 찍어서 던지자, 이번에는 타자는 놀라지 않았다. 하이 패스트볼을 예상한 듯 얌전히 지켜봤을 뿐.
“스트라이크 아웃!”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번엔 너클 커브다. 쭉 꺾이는 무브먼트를 타자는 그저 멍한 눈빛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You Suck!”
미리 삼진을 많이 잡을 거라고 선언해서 그런가, 평소보다 반박자 빠르게 터져 나온 목소리가 여전히 멍한 타자를 질책했다.
‘알렉스 고든. 성적이 별로 좋지는 않았지. 완전히 폼이 떨어졌어. 에이징 커브일수도.’
다음타자는 2번 알렉스 고든.
07년부터 활약해서, 올해로 12년 차에 접어드는 노련한 베테랑 선수다.
원클럽맨으로 로열스에서만 뛰었기에 프랜차이즈 스타라고 하기에도 적합한 선수지만. 작년과 재작년은 성적이 폭망한 터라, 먹튀라고 해도 무방하다.
우승을 이끌었던 코어이기에, 팬들은 여전히 그에게 애정을 품고서 부활을 꿈꾸겠지만.
“스트라이크!”
아무래도 올해 역시 그리 폼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배트 스피드가 좀 느리네. 시범경기라고 감안해도.’
조금 낮게 포심을 하나 던져봤는데, 깔끔하게 헛스윙. 타이밍은 얼추 잡은 것 같은데, 정작 속도가 늦었다.
85마일쯤 나왔을 테니. 까놓고 말해서 내 패스트볼도 못 칠 정도면 좀 심하다고 할 수 있지. 시범경기니 올라가긴 하겠지만.
“볼.”
2구는 바깥쪽으로 다시 포심.
노련한 선수인 만큼, 한번 릴리스 포인트를 바꿔봤는데,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을 뿐.
아예 눈치를 채지도 못한 것 같은데, 언론에서 하도 내 이야기를 많이 해서 이제 신무기가 널리 알려졌을 텐데도 저러면, 전체적인 폼 자체가 부족하다고 할 수 있겠네.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아웃!”
별다른 효과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굳이 릴리스 포인트를 바꾸지 않고, 빠르게 잡아냈다.
“You Suck!”
“아아아···”
신난 우리 팬들의 환호성에 가려졌지만, 로열스 팬들은 짧게 탄식했다.
시범경기이니, 삼진당하는 거야 그렇다 쳐도, 그들이 사랑하는 선수가 올해도 별로 느낌이 좋아보이지는 않는 것이 안타까운 거겠지.
그런 반응을 뒤로한 채, 그다음 타자, 체슬러 커스버트가 긴장이 가득한 얼굴로 타석에 올라왔다.
재작년에는 주전으로 뛰었고, 작년에는 백업으로 뛰었는데, 그리 성적이 좋지는 못했다.
그러니 올해는 아예 마이너에서 머물 가능성이 높은데, 그렇기에 어떻게든 자신을 증명하고 싶겠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난 다른 사람의 사정엔 관심 없다.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썼으면, 작년에 삼진을 그렇게 못 잡았지.
깔끔하게 KKK.
경기 이외의 것들로 소란스러웠던 분위기를 찍어 누르기에 딱 좋은 퍼포먼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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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는 빌리 빈에겐 참 편한 선수였다. 그나마 유일하게 가끔이나마 경기를 지켜보는 선수였고.
선수에게 사심이 생기지 않도록 경기를 관람하거나, 시청하지 않는 편이지만. 그는 사심이 필요없는 선수였으니까.
객관적으로도 그냥 가장 잘한다는 것이 명확하고, 또 어차피 무조건 쥐고 있어야 하는 선수인데, 사심을 품든 말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특히나 이번 시범경기에선 앞선 모든 경기를 지켜봤다. 올해 애슬레틱스의 운명은 그의 폼에 달려있다고 봐도 무방했으니까.
“차출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민감한 문제가 걸려 있었으니까.
빌리 빈은 데이비드 포스트에게 물었다. 이번에는 그도 섣불리 결단을 내릴 수가 없는 문제였다.
Go, Go You-Suck.
최소한 지금 오클랜드에서는 신에 준하는, 아니,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이다.
‘지저스지, 오클랜드의.’
절대적이다 못해, 전능한 수준의 에이스다. 그 인기도, 실력도. 그리고 그에게 팬들이 품은 기대감도.
그런 선수의 앞날이 걸린 문제인 만큼, 아무리 애슬레틱스 그 자체라는 말을 듣는 빌리 빈이라고 한들,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실리적으로 본다면, 차출을 막아야죠. 올해 저희는 윈나우를 놀고 있는데, 중간에 빠지는 경기야 그렇다고 쳐도. 토너먼트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에이스 투수의 체력을 갉아먹는 일이니까요.”
“그래, 그게 당연하지. 실리적으로는.”
전날, 아시안게임 차출 허가에 대해 연락이 왔다. Korea의 사무국에서 애슬레틱스가 그를 차출할 생각이 있는지를 물어봤지.
솔직하게 말하면, 군대고 나발이고 차출 안 하는 게 정답이다. 오직 구단의 이득만 본다면.
데이비드 포스트의 말처럼, 그는 올해 오클랜드가 펼친 웅대한 대계의 핵심 요소인데. 그런 그의 뜻밖의 이탈은 모든 계획을 망가뜨릴 테니까.
허나 그럼에도 확실하게 고개를 젓지 못하는 이유는, 막상 보내지 않는다고 해도 그게 정말로 이득이냐는 거였다.
“다만, Go가 그런 종류의 선수는 아니라고 해도, 만약 불만을 가지고 태업이라도 한다면···”
“그래도 망하는 거지. 저희의 윈나우는.”
“예, 그렇겠죠.”
Go는 성실하다. 조금 장난스럽고 가벼운 듯 보여도, 분명 노력이라는 걸 아는 선수지. 워크에씩과 로열티도 제법 뛰어나고.
현장 스태프들이 입을 모아 하는 이야기인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사람의 감정은 시시각각 바뀐다.
‘본인이 태업을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감정에 휘둘릴 수도 있고.’
물론 그가 일부러 불만을 품고 태업할 거라는 생각은 안 했다. 이미 말했듯 그런 선수가 아니니까.
하지만 속으로 삭인 감정이 피칭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었다.
투수란 한없이 예민한 존재이기에, 그 누구보다도 감정에 잘 휘둘리니 말이다.
특히나 에이스, 정점에 이르른 최고의 투수쯤 되면 그 프라이드가 강한 만큼.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을 때의 역풍 역시 적지 않고.
“한 선수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댄 게 문제군.”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겠죠. 윈나우라고 하지만, 조금은 허술하고, 개인의 비중이 너무 크니까요.”
“어쩔 수 없지. 모든 걸 완벽하게 할 정도로 여유롭지는 않으니까.”
“사장님께선 최선을 다하신 겁니다.”
구단의 권리라고 할 수 있는 국가대표 차출 허가를 놓고 이토록 전전긍긍하는 것이 우습기도 하지만.
그 선수의 입지가 이토록 거대하고, 그에게 맡긴 역할이 이토록 많다면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애초에 그 하나만을 보고 시작한 우승 도전인 만큼, 그와 관련된 일에도 크게 휘둘릴 수밖에.
모든 것이 완벽하게 만들 정도의 능력은 애슬레틱스에게 없으니, 너무나도 완벽한 선수에게 기대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대놓고 요구한 겁니까?”
“아직은 의사를 물어본 수준이지만, 만약 Go가 바란다면, 정식적인 요청이 오겠지.”
그나마 다행인 것이 있다면, 지금은 그저 질문 정도라는 것.
Go를 아시안게임으로 보낼 의사가 애슬레틱스에 있는지를 확인하는 수준이지만.
만약 Go 본인이 강력하게 원한다면, 그쪽에서도 아주 강력하게 요청하고 나서겠지.
아직 엔트로 발표도 채 나지 않았건만, 벌써 구단의 생각을 묻는 것만 보더라도 그쪽의 의지야 강력하니까.
“···일단은 그의 선택을 두고 보자고.”
Go에게 있어서도 아시안게임 차출에 가장 큰 난관은 구단과 프런트이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주도권은 선수가 쥐고 있었다.
그의 결정에 따라, 모든 것들이 흔들리거나, 다시 평온해질 테니까.
오직 승리만을 바라보며 겨울을 준비했던 빌리 빈은 그런 상황 앞에서 긴 한숨을 뱉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Go가 벌써 여덟 번째 삼진을 잡아냅니다! 그리고 15이닝 연속 퍼펙트를 달성하는군요!
결국 참지 못하고 켠 라디오에선, 언제나처럼 Go의 삼진콜이 울렸다.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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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벤치에서 봐도 공에 힘이 실렸던데.”
“실전 감각 올리는 거지. 정규시즌까지 얼마나 남았다고.”
“하긴, 그래도 더스틴이 생각도 좀 해라. 오늘이 첫날인데, 아주 쥐 잡듯이 잡네.”
브루스는 자신이 잘 안다는 듯, 이제 막 4회가 끝났는데도 벌써 녹초가 되어버린 더스틴 가뉴를 보며 동정적인 시선을 날렸다.
오늘 좀 힘이 실리긴 하네.
피칭에 감정을, 사심을 담으면 안 되는데, 나도 모르게 이런단 말이야.
그 덕에 내 스스로 말도 안 된다고 했던 11이닝 연속 퍼펙트가 이젠 15이닝이 됐다.
‘어쩔 수가 없지. 아무리 언론이나 팬들이 완벽하다고 떠들어도, 결국은 나도 사람이니까.’
거기다가 감정적인 동요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고. 그래도 이제는 확신이 생겼다.
“더스틴, 인터벌 빨라진 뒤부터 힘들어 보이던데, 괜찮아요?”
“···아직, 아직은 괜찮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더스틴 가뉴는 그렇게 말했지만, 아무리 봐도 안 괜찮아 보이는데 말이야.
코치도 그걸 캐치한 건지, 그는 타석에 오르지 못하고 교체됐다. 대신 조시 페글리로.
브루스는 오늘 완전 꿀빠네.
넌 대체 왜 따라왔냐? 나오지도 않는 놈이.
“아웃!”
5회 초, 다시금 1점을 더 추가하며, 공격이 마쳐졌다. 이제 다시 내가 올라갈 차례라는 뜻이지.
“조시, 감은 살아 있죠?”
“걱정 하지마. 얼마나 아픈지도 아직 잘 알고 있으니까. 뭐, 시즌 중보다는 더 낫겠지.”
간만에 호흡을 맞추게 된 조시 페글리는 조금 긴장한 듯하면서도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스틴 가뉴보다는 그래도 좀 낫겠지. 믿을 만하겠어.
‘어디 보자, 이제 여덟 개째지? 말한 게 있는데 최소한 열 개는 채워야 안 쪽팔리겠네.’
그렇게 호언장담을 했는데, 이 정도로 만족해서 쓰나. 내 체면을 위해서라도 더 잡아야지.
“Suuuuuck!”
“이번 이닝에 열 개 채우자!”
“아직 하나밖에 못 뒤집었어! 좀 더 잡아봐!”
다시금 마운드에 오르니, 분위기가 무르익어서 그런지, 처음보다 더 큼직한 목소리로 반겨줬다. 타자들의 반응도 더 짙어졌고.
‘코디 애쉬, 초청받은 선수였던가?’
4번타자 코디 애쉬.
메이저리그에서도 좀 뛰었던 선수인데, 지금은 구단은 없고, 로열스에서 뛰고 있다.
정식 계약은 아니고, 테스트 삼아 로열스의 스프링 캠프에 초청된 걸로 아는데. 지난 타석에선 삼진으로 물러났다.
정식 계약으로 전환하기 위해선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만큼, 그는 최소한 이번 경기에서 본 선수들 중 가장 간절해 보였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두 번째 타석 역시, 그에게 가혹했다. 어쩌면 첫 타석보다 조금 더.
간절함이 낳은 집중력 덕분에 제법 타이밍을 잡은 것 같지만, 빨라진 속도와 계속 바뀌는 릴리스 포인트가 그를 완전히 무너뜨렸으니까.
그것으로 탈삼진은 아홉.
몸은 오히려 더 좋아졌다.
간만에 길게 던지니까,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이래야 재밌지.
내가 무슨 중간계투나 롱 릴리프도 아니고, 3이닝 4이닝씩 찔끔찔끔 던지니까, 오히려 감질만 난단 말이야.
“아웃!”
다음타자, 라이언 고인스는 4구째 커터를 맞춰냈지만, 먹힌 타구는 마운드 앞으로 굴러왔다.
“우우우우우!”
“삼진당해라! 삼진!”
열 번째 삼진을 기대하고 있었던 건지, 내야땅볼로 아웃을 당했는데도 타자에겐 야유가 쏟아졌다.
오히려 삼진을 당했다면, You Suck 소리는 듣겠지만, 차라리 야유는 덜했을지도.
‘어우, 분위기 살벌하네. 내가 너무 기대를 올려놓은 건가?’
경기 시작 전부터 기대감을 잔뜩 심어둬서 그런지, 아주 제대로 흥분했구만.
진정시키려면 삼진을 꼭 잡아야겠어. 더 끌었다간, 폭동이라도 나겠네.
‘라울 아달베르토 몬데시. 이름 엄청 기네.’
마지막으로 6번타자 라울 아달베르토 몬데시. 당연히 풀네임이고 콜네임은 아달베르토 몬데시다.
무려 역대 최초로 월드시리즈에서 데뷔한 선수라는, 아주 진귀하기 그지없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데. 실력은 괜찮아 보였다.
‘선구안은 별로 안 좋아보이지만, 공을 맞추는 것 자체는 잘했지.’
그래서 지난 타석은 내야뜬공으로 물러났는데, 이번에는 그럴 수야 없지.
“스트라이크!”
적극적으로 스윙을 하는 선수인 만큼, 속도는 유지하되, 과격하게 찍어 누르지는 않았다. 살살 꼬셔야지, 이런 스타일은.
바깥쪽으로 낮게 떨어진 서클 체인지업, 냅다 휘둘렀지만, 배트는 닿지 않았다.
“파울!”
2구는 파울.
높게 하이 패스트볼을 던져봤는데, 저걸 기어코 따라가서 치네. 조금 늦은 것 같은데 말이야. 어쨌든 투 스트라이크.
“볼.”
차분하게 낮게 슬라이더를 깔아서 던져 한구를 빼봤지만, 이번에는 또 참아냈다.
‘얼추 감을 잡은 것 같으니-’
나도 이건 하나 깔아본 거고. 순간적으로 릴리스 포인트를 바꾸며 몸쪽으로 공을 집어넣자, 그는 스윙을 내지 못했다.
타이밍을 잃은 거지.
“스트라이크 아웃!”
그렇게 루킹 삼진.
You Suck하는 소리를 들으며, 흘끔 관중석을 훑으니, 쭉 늘어져 있던 K 중 세 개가 뒤집혀져 있었다.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대로.
아까 전, 경기장 앞에서 만났을 때와는 달리 아무런 걱정도 없이 기뻐하기도 했고.
그 모습을 잠시 눈에 담은 뒤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오자, 스콧 에머슨은 이제 내려가자고 설득하려는 건지 입이 근질거리는 것 같았지만. 결국 꾹 참았다.
“오늘도 아주 열심히 던지네. 체력 좀 아끼지 그러냐? 시범경기 동안에라도. 8월이면 체력 훅 빠질 시기인데. 지금이라도 챙겨 둬야지. 태평양 왔다갔다 하면 빡셀 텐데, 괜찮겠어? 월드시리즈까지 가려면, 체력을 남겨둬야 할 텐데.”
내가 자리에 앉으니, 그렉은 뜬금없는 말을 했다. 약간은 걱정하는 표정으로.
아하, 이쪽은 이렇게 생각했구만. 맨날 툴툴거리기는 해도 날 많이 생각하긴 하나 봐.
무려 그렉 매덕스가 무슨 아시안게임 일정까지 알고 있네. 아마 기사 같은 걸 찾아본 거겠지.
“당연히 안 괜찮겠죠.”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무리지. 막말로 8월쯤 되면 원정길 비행도 짜증나는 시기인데.
아예 지구 반대편으로, 태평양을 건너는 게 괜찮을 리가 있나. 아무리 퍼스트 클래스 타고 다녀도 비행의 피로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철저하게 관리한다고 해도, 무리가 뒤따를 수밖에 없지.
‘거기다 시차 적응까지 해야 하니, 더 말할 것도 없고.’
시차 적응, 이게 진짜 사람 골로 보내는 거거든. 특히나 나처럼 섬세하게 관리하는 유형은 더욱더 맛이 가지. 루틴 자체가 박살 나니까.
거기다 결승전만 나간다고 해도 피칭까지 하고 돌아와야 하니, 어우, 체력이 훅훅 빠질걸?
‘거기다 올해는 월드시리즈까지 가야 하니까. 중간에 그렇게 체력이 빠지면, 아무리 내가 열심히 준비했다고 해도 피로가 많이 쌓이겠지.’
올해 애슬레틱스와 내 포부를 잘 알기에, 그렉도 그것을 걱정한 건지, 어쩌면 처음으로 약간은 걱정어린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서 안 가려고요.”
그래서 거절하기로 했다.
물론 마음 같아선 나가고 싶지. 얼마나 좋아, 막말로 금메달은 확정이나 다름없는데.
“뭐? 아니, 금메달 못 따면 군대 끌려간다며? 커트 앵글 너 그래도 괜찮겠어? 테드 윌리엄스라도 되려고?”
“강제로 안 끌고 가요. 다음 올림픽을 노려도 되고, 아니면 뭐 다른 방법이 있겠죠.”
그치만 올해의 목표는 이미 정해졌다. 그것도 한참 전부터. 이미 브루스랑 같이 약속도 했잖아?
“Suck!”
“그냥 이대로 퍼펙트게임 하면 안 되냐? 부탁이다!”
“크하하하핳, 오늘 자신만만하게 선언하더니, 아주 좋아! 계속 잘하고 있어!”
내가 있을 곳은 여기다.
괜히 욕심부려서 두 마리 토끼를 노릴 수는 없지.
애초에 올해는 딱 하나만 보고 모든 것을 준비했으니까, 겨울 내내 말이야. 그 모든 계획을 망가뜨릴 수야 없다.
물론 나중에 상황이 이상해지만 진짜 후회하고, 분노하고, 지금의 내가 정말로 미워지겠지만. 최소한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이미 결정을 내렸다.
“월드시리즈 우승해야죠. 그거 하나만 보려고요.”
올해 내 목표는 월드시리즈 우승, 오직 그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