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다행히 설득은 잘 됐다.
대니얼 역시 나한테 꼭 필요한 일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코치처럼 못마땅하게나마 허락을 해줬지.
어쨌든 그렇게 확보한 4이닝.
아주 소중한 4이닝이 될 테니, 그냥 흘려보낼 수가 있나.
시범경기인데도 그 어느 때보다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다.
‘컨디션이 좋았으면 좋겠는데, 3회부터 인터벌을 빠르게 할 수 있도록.’
단순히 새로운 릴리스 포인트가 빠른 인터벌과도 조화가 잘 되는지 확인하는 일이니.
1이닝이면 충분하겠지만.
기왕이면 단순히 확인 작업보다는 확실하게 감을 잡아두는 게 낫잖아? 그러려면 그렇게 던질 이닝이 많을수록 좋은 거고.
“시범경기부터 괜히 폼을 올리는 것이 아닌지, 염려스럽네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설사 폼이 빨리 올라온다고 해도, 포스트시즌까지 버틸 수 있을 정도로 체력을 만들어뒀잖아요? 열심히 굴러서.”
“예, 그게 이런 식으로도 도움이 되겠군요.”
괜히 몸이 빨리 올라오면, 정규시즌 운영이 지장이 생길 수도 있지만, 체력이야 충분하니까.
원래도 충분한데 작년 겨울에 그것보다 더 채워뒀고. 아주 철저하게. 보험 정도는 되겠지.
“근데, 차라리 시간을 들여서 아예 기본적인 인터벌 자체를 빠르게 하는 게 낫지 않아? 새로운 릴리스 포인트도 그거에 적응하는 게 낫고. 가끔 든 생각인데, 굳이 유지하는 이유가 있어?”
다만 브루스는 그런 철저한 노력이 잘 이해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말이다.
나와 그렉은 그를 조금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봤다. 그래, 넌 아직 멀었다, 짜식아.
“너무 멍청한 질문이라서, 대답하기도 싫네. 커트 앵글, 네가 알아서 설명해라. 포수라는 놈이 왜 이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
“답답한 놈이지만, 저렇게 보여도 롤렉스가 세 개나 있는 녀석이에요. 저랑 같이 퍼펙트 두 번이랑 노히터 한 번 같이하면서 받았죠.”
“···그 얘긴 하지 말고. 왜 또 꺼내고 난리야?”
“왜? 아니, 그냥 기본적으로 인터벌 빠른 게 낫지 않아? 굳이 중간부터 빨라지는 것 보단.”
브루스는 억울한 듯 볼을 부풀렸지만, 살을 좀 뺏다고 해도 여전히 통통한 사내놈이 저러니까 더 화가 치밀었다. 이 새끼가 맞아 죽고 싶나.
“간단하게 얘기해서, 인터벌의 효과가 뭐냐? 빨라지면 뭐가 좋냐고?”
“그야, 타자들이 타이밍 잡기가 힘들어지지. 금방금방 던지니까. 그러니까, 애초부터 빠른 게 낫지 않아?”
인터벌이 빠르면 좋은 이유는 결국 타이밍이다. 타자들에게 여유를 없애버리는 것이니. 그만큼 타이밍을 잡기가 힘드니까.
내가 모셔오려고 했던 마크 벌 리가 오랫동안 롱런하면서 메이저리그에서 활약을 펼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고.
리그에서 가장 빠른, 매 시즌 통계마다 무조건 1위 혹은 그 근처에 있을 만큼 빠른 인터벌을 가졌으니까.
“그래, 그렇지. 하지만 중간부터 갑자기 빨라진다면 어때? 처음에는 무난하겠지만, 대신 나중에 타이밍을 잡기가 더 어렵겠지?”
“그치, 당장 너 상대하는 타자들도 중간에 빨라질 때는 더 미쳤으니까.”
반대로 나는 중간부터 빨라지는데, 덕분에 타자들이 어느 정도 적응했다 싶다가, 다시 타이밍을 잃고 무너지지.
거기에 새로운 릴리스 포인트까지 중간중간 섞기 시작하면? 그걸로 타자들 머리는 펑~하고 터지는 거다. 주화입마 입고 피를 토하던가.
앞선 타석에서 내 피칭에 적응하거나, 나한테 얻어낸 것이, 죄다 헛수고가 되는 것이니까.
“그니까, 인터벌은 그냥 지금처럼 중간부터 빨라지는 게 나아. 거기다가 새로운 릴리스 포인트까지 생겼으니, 더더욱 그렇고.”
그러니 기본적인 인터벌을 그냥 유지하는 게 낫다. 결국 타자는 적응의 동물이라, 아무리 빨라도 몇 바퀴 돌면 적응하기 마련이거든.
‘내가 마크 벌리를 모셔와서 배우려고 한 것도 그거였고. 인터벌에 대한 노하우로 자유롭게 제어하는 거였고. 단순히 빠르게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동작을 빠르게 하려고만 했으면, 트레이너도 있고, 코치도 있는데, 그냥 트레이닝하면 되지, 뭘 복잡하게 마크 벌리까지 모셔?
마음대로 운용하는 노하우가 필요하니까, 그런 대단한 투수를 모셔오려고 한 거지. 물론 그에게 그런 요령이 있는지는 그다음 문제지만.
‘더군다나 이젠 새로운 릴리스 포인트라는 또 다른 한 수가 생겼으니, 더더욱 중간부터 빨라지는 걸 포기할 필요가 없고.’
내가 릴리스 포인트를 굳이 새롭게 하나 추가한 이유가 뭐야? 이것도 타자들 타이밍을 더 망치려고 하는 거잖아?
즉 급가속과 어우러지면 타자의 타이밍을 망치는 효과가 중첩되는 건데, 그런 효과 하나를 굳이 포기할 이유는 없다. 그냥 지금을 유지하는 게 훨씬 낫지.
이런 내 이론이 맞아떨어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스콧 에머슨 그리고 대니얼에게 그토록 떼를, 아니아니, 투쟁해서 4이닝을 얻어낸 것이고.
이제 좀 말 귀를 알아먹은 건지, 브루스는 아~하고 짧게 감탄했다.
그래, 똑똑하진 않아도, 멍청한 녀석은 아니니까. 설명해주니까 대충 알아듣네.
“그런 의미에서, 레인저스전에선 타자들 보지 말고, 무조건 나한테만 집중해. 특히 내가 빨라지기 시작하면 더 눈에 힘주고. 뭔가 이상한 건 없는지, 미묘하게 타이밍이 어긋나는지, 동작이 잘못되지는 않는지. 아주 세세하게.”
“그건 내가 잘하지. 너랑 경기 할 때마다 하는 일이 사람 관찰뿐이니까. 믿고 맡겨줘.”
대답은 참 잘해.
대답 말고 다른 것도 잘해라, 안 그러면 롤렉스 하나씩 뺏어버릴 거니까.
내가 작년에 얘한테 사다 바친 롤렉스 세 개 값만 합쳐도 작년 내 연봉의 절반이다.
옆에 있는 그렉은 커리어 내내 공 받아준 포수들한테 하나도 선물 못했는데, 너는 세 개나 받았으니. 그 값은 해야지.
“쯧, 커트 앵글, 기분 나쁘니까, 그놈의 롤렉스 생각 좀 그만해라. 서러워서 죽겠네.”
귀신이네. 진짜 독심술 있는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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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 오늘 나오는 거 맞죠? 오늘도 잘 던져요!”
“오늘 You Suck하러 왔으니까, 저번 경기처럼만 해! 아니다, 오늘은 열 번 정도 하자, 열 번!”
“Go, 작년 탈삼진 신기록의 제물로 삼았던 레인저스를 만나게 되셨는데, 혹시 어떤 생각을 가지고···”
보시다시피 나는 슈퍼스타다.
어제는 별로 사람이 많지 않더니, 내 등판일 되니까 다시 또 바글바글하네.
다른 선수들이 보면 좀 섭섭할지도 모르겠어. 아니지, 다른 경기는 그래도 레이더스가 별로 없으니, 오히려 더 좋아할 지도.
어쨌든 이토록 만인의 사랑을 받는 슈퍼스타이지만, 당연하게도 나를 싫어하거나, 증오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좀 많아. 엄청 많지.
아마 못해도 수십 만명, 잘하면 수백 만명도 될걸?
‘꾸역꾸역 경기 보러 와놓고, 저런 표정을 짓는 건 또 뭐야?’
3월 1일.
경기 준비를 위채, 잘 벼려진 몸을 이끌고 아침부터 호호캄을 찾았을 때.
바글거리는 사람들 중, 평범한 관광객의 복장이나, 우리 유니폼, 기자들의 정장 대신, 다른 옷을 입은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나한테 아주, 아주아주아주 적대적인 시선을 보냈지. 입모양을 보아, 욕도 하네? Son Of··· 여기까지만 보자.
중요한 날 아침인데, 괜히 욕먹어서 좋을 건 없으니까.
“커트 앵글, 너 무슨 살인이라도- 아, 저질렀지. 그것도 대차게 저질렀지.”
경기장에 들어와, 훈련을 시작한 뒤에도 관중석에 앉은 몇몇 이들의 증오 가득한 시선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렉은 마찬가지로 그들의 행색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살인이라, 그치, 내가 살인범이긴 하지.
“예, 저쪽 팬들한텐 연쇄살인마 수준이죠. 그 피해자가 친족인 거고.”
“그치, 레인저스한테 살인이나 다름없는 짓을 저질렀으니까. 이 무자비한 놈.”
그 피해자는 레인저스고.
레인저스 팬들에겐 난 살인마다. 그것도 393번의 자상을 남긴 살인마.
특히나 오늘처럼, 시범경기의 원정 경기까지 쫒아온 팬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이 레인저스의 열성팬일 텐데.
그런 사람들한테 있어선 자기 부모나 배우자, 연인 등 가족을 죽인 사람처럼 느껴지겠지.
‘탈삼진 신기록을 제외하더라도, 유독 나한테 많이 털리기도 했고. 고작 홈런 하나 친 걸 제외하면.’
내 작년 성적의 지분율을 따진다면, 레인저스가 못해도 10%는 될 거고, 잘하면 20%도 될 거다. 2017 고유석 신화의 제물이나 다름없지.
그러니 나한테 증오감을 가지는 거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영원토록 기록될 거잖아?
1900년대 이후 현대야구 전체를 통틀어, 단일시즌 역대 최다 탈삼진의 희생양으로.
‘설사 내가 그걸 갱신해서 1위에서 밀려나도 계속 길이길이 기억될 거고.’
자신들이 사랑하는 팀이 한순간 역사에 남을 희생양으로 전락했으니, 나한테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한데, 애석하게도 또 한번 레인저스는 제물이 됐다.
밑거름이라고 보는 게 맞으려나? 내가 더 발전하기 위한 밑거름.
“상대팀 라인업이··· 꽤 괜찮네.”
“이 정도면 그래도 적당히 전략을 갖췄어. 상대로 딱 좋긴 하겠네.”
마침 발표된 라인업을 보니, 상대하기도 딱 좋았다. 적절하게 주전급이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조이 갈로, 노마 마자라, 드류 로빈슨 등, 작년에 상대했던 녀석들이 섞여 있었으니까.
그러니 릴리스 포인트를 연습하고, 시험하기에 딱 좋은 상대겠지.
작년에 내 피칭에 어느 정도 익숙할 녀석들이니, 그만큼 특이점이 있다면 금방 눈치채거나, 반응을 보일 테니까.
‘만약 빠른 인터벌과 새로운 릴리스 포인트가 잘 안 어울린다면, 바로 알아챌 거고.’
조이 갈로가 3번타자인데, 내가 4이닝을 던지니, 걔가 한 타석하고 교체되지만 않는다면, 두 번째 타석도 만날 거다.
당연히 못해도 4회부터는 가속할 거고. 한 이닝 정도는 확인해야 할 거니까, 은근히 선구안이 좋은 녀석인 만큼, 만약 문제가 있다면, 아무리 시범경기라 폼이 올라오지 않았다고 해도, 바로 징벌을 내려주겠지.
작년에 그나마 레인저스의 자존심을 한줌이라도 남겨줬던 홈런처럼 말이야.
“홈런을 맞더라도 그걸로 문제를 알 수 있으면 남는 장사지.”
내 자존심은 좀 상하겠지만 말이야.
그렇게 홀로 중얼거리니, 그렉은 혀를 끌끌 찼다. 또 뭐요.
“그딴 게 어딨어? 커트 앵글, 어떤 상황이든지 투수는 홈런 맞을 생각하면 안 돼. 그러는 순간부터 지고 들어가는 거니까. 홈런이 투수의 세금? 세금이고 지랄이고, 일단 타자들 잡아 족칠 생각을 해야지. 그리고 그게 최선이잖아?”
“하긴, 가지고 놀면 제일 좋긴 하겠네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거니까.”
나도 아직 멀었구만.
좋은 배움이고 자시고, 일단 타자들을 조지는 게 우선인데. 경기를 앞두고 딴생각을 하다니.
그래, 시범경기이고, 오늘 경기에서 무얼 배우고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작년처럼 레인저스를 쥐 잡듯이 패는 것, 그게 제일 중요하지.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당연하게도 집중력이 조금 더 올라왔다. 그래, 응당 이런 마음가짐을 가져야지.
그래야만 정말로 원하는 바를 얻거나,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조금 많이 던지는 거 아니야? 너무 몸이 풀리겠는데.”
“최대한 불펜피칭으로 올릴 수 있는 만큼 감을 올리려고요. 무리하는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마음을 잡은 뒤, 평소의 루틴보다 살짝 더 심혈을 기울여서 불펜피칭을 가졌다. 적절하게 감각을 올리기 위해서.
마음도 잡혀 있고, 노력도 기울여서 그런가, 경기가 시작되기 전, 집중력은 제법 날카로워졌네.
‘딱 좋아. 잘하면 3회부터 시동이 걸릴 수도 있겠는데?’
다행히 오늘 컨디션도 좋았던 건지, 몸은 기대이상으로 달아올랐다. 당장이라도 공을 던지게 해달라는 것처럼 아우성을 치기도 했고.
하필 아무리 잘해도 인정받지 못하는 시범경기에서 이렇게 컨디션이 좋은 것이 아쉽기도 하지만, 뭐, 감사히 여겨야지.
“시간 됐네. 바로 가자. 나머지는 마운드에서 풀어.”
“옙, 가시죠. 가자, 브루스.”
모든 준비가 마쳤을 때, 불펜의 문이 열렸고, 저번 경기와 마찬가지로 압도적이 환호성이 반겨주는 동시에 짜증이 가득한 시선도 반겨줬다.
아니, 저번보다 더 심하지.
에인절스는 그나마 양반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레인저스랑 비교하면 말이야.
‘아주 잡아서 죽일 기세네, 죽일 기세야. 추민수 선배님, 선배님까지 그렇게 보시면 좀 서운합니다?’
주인공의 등장에 열광적인 호호캄의 분위기와는 별개로, 원정팀 덕아웃에는 그저 살기 혹은 냉기가 감돌았다.
‘특히나 벨트레는 나한테 아주 유감이 심한 것 같고.’
막판 탈삼진 기록 도전 때, 호구 중의 호구였던 벨트레는 오물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봤다.
커리어 말년에 본인에게 똥물을 끼얹었으니, 곱게 볼 수가 없기는 하겠지.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말이야.
다만 그런 증오심과 함께, 약간의 존경도 느껴졌다. 조금은 모순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럴만 하지.
‘나한테 많이 당했으니, 그만큼 내 피칭에 더 익숙하지. 그러니까 더 체감이 큰 거고. 본인들 밟아서 세운 내 성적이나 기록들이.’
어쩌면 조금은 두루뭉술할 수 있는, 내 실력, 피칭에 가장 익숙한 사람들이니 말이야.
그런 선수단의 분위기가, 마이너에도 전염된 건지, 마이너리거들 지난 경기처럼 마냥 탐욕스럽게 보지 않았고.
물론 욕심이 아예 없다는 건 아닌데, 그렇기에 딱 좋지. 적당히 욕심을 부리면서도 경계를 하고 있다는 거니까.
더욱더 철저하게 달려들 거야. 작년에 옴팡지게 털렸던 놈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X나게 오랜만이다, X발놈아! 겨울 동안 잘 지냈냐!”
그런 미묘한 분위기를 잘 설명하는, 끝내 나를 향한 감정을 참지 못한 한 레인저스 팬의 오묘한 환영인사와 함께 마운드에 올랐다.
그러자 더욱더 차오르는 감각, 역시 실전이 달라. 마운드 위에만 있어도 집중력이 저절로 올라온단 말이야.
그런 집중력을 담아, 마찬가지로 오랜만에 보는 레인저스, 제물을 향해 첫 공을 던졌다.
“스트라이크!”
늘 시작은 이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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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이크 아웃!”
“You Suck!”
청아한 스트라이크콜.
그에 맞춰, 우렁찬 환호성도 터져 나왔다. 그래, 작년과 똑같았다. 올해도 말이다.
“지긋지긋하다, 지긋지긋해. 또 시작이네, X발 놈들.”
“난 신경쇠약 걸릴 지경이야. 작년 막판에 너무 많이 들어서 그런가···”
“그러게 오지 말자니까. 딱 봐도 X같은 레이더스 새끼들 텃밭일 텐데. 뭐 하러 여기까지···”
극히 소수에 불과한 레인저스 팬들은 자연스럽게 저들끼리 모여 앉았다. 애초에 일행인 경우가 더 많았고.
작년 내내 들었던, 특히 마지막에 이르러서 아주 신명나게 들었던 구호가 다시금 귀에 꽂혔을 때, 그들은 몸서리를 쳤다.
저 빌어먹을 소리를 또 듣게 됐으니까. 또 듣게 될 테니까. 또 일 년 내내 들을 테니까.
정규시즌이 시작된 뒤에 들어도 X같을 텐데, 굳이 그전부터 듣는 것이 엿 같은 만큼, 굳이 이런 시범경기 원정까지 끌고 왔던 이에게 눈총을 보내기도 했고.
“X발 우리도 질 수 없잖아. 혹시 알아? 또 조이가 멋지게 홈런 날려줄지도. 시범경기니까, 아무도 모르는 거지. 만약 그걸 놓치면 그 뒤로는···”
친구들의 비난을 받은 이는 오히려 의지와 기대감을 드러냈지만, 마지막에 이르러선 조금은 기세가 떨어졌다.
내심 품고 있었던, 가장 최악의 생각이 다시금 떠올랐으니까. 굳이 시범경기까지 Go를 보러 온 이유 말이다.
시범경기, 양쪽 다 충분히 준비되지 않아,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지금이 아니라면···
“뒤로는?”
“···영영 못 볼 수도 있잖아, 그런 장면을.”
레인저스가 Go를 두들기거나, 홈런을 날리는 속이 후련한 장면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말이다.
당장 작년도 홈런 한방이 아니었다면, 아예 단 한 점도 못 낼 수도 있었으니까. 올해는 더할 지도 모르지.
그렇기에 시범경기에서나마 그런 것을 보고 싶어서, 굳이 원정까지 따라온 것이고.
그 말에 다른 이들은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딱히 반박하지는 못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You Suck!”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몸소 증명하듯, Go는 올해의 첫 만남부터 레인저스를 아주 신나게 털고 있었으니까.
“아웃!”
그나마 희망이라고 할 수 있던 조이 갈로마저도 허무하게 땅볼로 물러났고.
그나마 저번 경기 에인절스는 시작부터 세 타자 연속 삼진을 당했으니, 그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르겠지.
“진짜 X나게 잘하네···”
“저 새낀 어떻게 매번 저러냐, 매번. 우리랑 만날 때마다.”
“코리안들은 텍사스를 싫어해. 그게 분명해. Park이랑 Choo는 금전적으로 피해를 끼치고. 쟤는··· X발 그냥 X나게 털어버리는 거지.”
물론 새삼스럽게 다시금 그 피칭을 느끼고, 겨우내 조금 옅어졌던 증오감을 되새기는 것이야, 에인절스와 똑같았지만 말이다.
1회 말, 애슬레틱스의 공격도 무난하게 지나가고, 다시 2회초가 이어졌을 때도 열심히 레인저스를 때려잡고 있는 고유석을 보며,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저렇게 신내다가 팔 부러졌으면 소원이 없겠네.”
“아니면 어깨가 박살나거나. 똥볼이라서 안전할 거라고, 의사들이 아주 확신하던데. 그 확신이 깨지는 거지.”
“만약에 그러면 난 교회 꼬박꼬박 다닐 거야. 지금처럼 일요일에도 거르는 게 아니라, 아예 매일 새벽마다.”
“글쎄, 일요일도 거르는 놈이라서 기도를 안 들어주는 걸지도 모르지.”
간절하게 기도하기도 했고.
저 모습을 정규시즌에서도 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조금 현기증이 느껴졌으니까.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고.
저런 투수를 가져놓고도, 아니, 저런 투수를 가졌기 때문인지.
더욱더 전력을 보강하여, 이젠 리빌딩으로 접어들어야 하는 레인저스와 달리, 우승에 도전하는 애슬레틱스가 말이다.
“와아아아아아!”
5번타자 크리스티안 옐리치가 2회 말의 시작부터 날려버린 홈런을 보니, 그런 감정이 더욱더 짙어졌다.
시범경기에서나마 고유석을 상대로, 레인저스가 다시금 혼런을 날리길 기대하고 굳이 원정까지 따라온 것인데.
정작 그들은 여전히 털렸고, 반대로 홈런은 애슬레틱스가 쳤다. 그 소문의 신입생이 말이다.
“진짜 우승하려나?”
“글쎄, 가능할지도. 그러면 난 야구 끊는다. 그 꼴은 절대로 못 보지.”
“애슬레틱스가 우승은 무슨. 우리가 한번 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안 되지.”
“오클랜드 공식이잖아? 바짝 신내다가, 정작 우승은 못하는 거. 빌리 빈도 글렀어. 내가 볼 땐 그쪽이 원인이야. 무관의 운명을 가진 거지.”
“그것 참 말 되네.”
그럼에도 애써 그렇게 비하하며, 씁쓸한 마음을 다잡았지만, 전보다 길었던 애슬레틱스의 공격이 끝나, 3회 초가 되고, 고유석이 다시 마운드에 올라왔을 때.
그들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역시나 작년에 보았던 모습을 다시금 선보였으니까.
“느낌이 달라졌네.”
“어, 이제부터 시작이야··· X발.”
“저거 개사기 아니냐? 차라리 애초부터 빠르던가, 중간에 갑자기 빨라지고 지랄이야. 그러니까 타자들이 쪽도 못쓰지.”
사뭇 달라진 기세.
씨익 웃으면서, 조금은 가볍게 마운드에 올라왔는데도, 느낌이 달랐다.
저건 징조 중 하나였다.
저 놈이 본격적으로 타이트하게 타자들을 조질 때의 징조.
보통은 경기 중후반부터 저러기 시작하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빨리 올라 온 모양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한탄과 함께 지친 한숨을 뱉었을 때, 애써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시범경기에서부터 저러는 거 보니까, 올해는 글렀어. 전문가들 말처럼 괜히 정규시즌 전부터 체력을 허비···”
“스트라이크 아웃!”
길게 끌고 가지는 못했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냐는 듯 열심히 조졌으니까. 가까운 좌석에 앉았기에, 집중하면 조금씩 보이는 또다른 릴리스 포인트를 섞어서, 아주 빠르게.
작년 많이도 보았던 장면이라서 그런지, 약간의 차이점이 느껴졌기에, 어쩌면 그 변화를 느낄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르고.
“저거 뭔가 좀···”
“저 새끼는 볼 때마다 X같은 걸 들고 오네. 기록이든, 신무기인지 뭔지든.”
아마 그토록 떠들어댔던 신무기라는 놈이겠지. 또다시 진화했다며 난리도 아니었으니까.
미운놈이 더 미워지려고 하는 모습이 더럽게 밉살맞아서 괜히 짜증을 부렸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마지막까지도 철저한 모습은 그 입을 봉인해버렸다. 그렇게 다시금 레인저스를 조지고, 전보다 훨씬 빠르게 조지고 내려가는 고유석의 뒷모습은 마치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우승, 진짜로 못할까?”
정말로 애슬레틱스가, 아니, ‘내가’ 월드시리즈 우승을 못 할 것 같냐고.
미운놈이 더 미워진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봐서 그런지, 이번에는 아무런 폄하도, 비하도 하지 못했다. 그저 정규시즌을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