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You! Suuuuuuck!”
“Hell Yeah!”
“It’s Suck Time!”
뭐지, 여기 오클랜드인가?
아닌데, 오클랜드라기에는 너무 살기 좋은데.
불펜을 나선 순간, 여기가 혹시 오클랜드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우렁찬 환호성이 벌써부터 터져 나왔다. 시범경기인데 말이다.
‘불펜에서 듣기에도 좀 소란스럽더니···’
호호캄의 경우 불펜이 개방되어 있었기에 제법 시끌시끌했지만, 이게 진짜네.
익숙한 구호의 환호성에 조금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리며 둘러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 사람들이 있었다.
“이야, 여기까지 왔네, 여기까지 왔어. 하긴, Suck 솔직히 이제 좀 무섭지 않아?”
“뭐, 작년 내내 봤는데, 뭐가 무섭다고.”
“하긴, 작년에 필라델피아 원정도 따라왔던 사람들인데, 피닉스 정도야.”
열심히 공을 받아주다, 같이 불펜에서 나왔던 브루스도 내가 본 방향을 똑같이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레이더스.
내 조금은 광적인 팬들이 오늘도 경기장에 나타났으니까. 저 사람들은 대체 직업이 뭘까? 아니, 일 안 해요? 혹시 직업이 ‘레이더스’인가? 저거 하면 돈 주는 거 아니야?
뭔, 시범경기까지 따라와서 보고 있네. 물론 스프링 트레이닝이 시작된 이후로 종종 근처에서 보이기는 했다만.
막상 경기장에서 보니까, 뭔가 감회가 새로웠다. 반갑기도 하고. 그 집념이 브루스의 말처럼 좀 무섭기도 하고.
“여- 여길 봤어!”
“Suck! 너 보려고 피닉스까지 왔다아아악!”
“크핳하핳, 올해 첫 You-Suck은 우리가 하는 거야!”
손을 흔들어주니, 더욱더 광분해서 날뛰는데, 기존 동료들은 그저 피식피식 웃거나, 브루스처럼 감탄하면서 즐겼다면.
마이너나 새로운 영입생들은 적응이 안 되는 듯한 표정이었다.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나를 보기도 했고.
마찬가지로 에인절스 쪽 역시 지긋지긋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거나, 아니면 조금 기가 눌린 것 같았다.
그치, 처음 보면 넋이 나가지.
오죽하면 필리건들까지 꺾었겠어. 그것도 필라델피아 원정에서.
이 작은 호호캄 정도는 충분히 압도하고도 남을 만한 사람들이지.
“진짜, 슈퍼스타는 슈퍼스타네··· 시범경기까지 사람을 몰고 다녀?”
“와··· 저 정도 스타쯤 되면 저런 이상한 사람들도 팬으로 붙는구나.”
아무리 그래도 이상하다니, 말이 심하네. 우리 사랑스러운 팬들한테.
솔~직히 말해서 내가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기는 한데, 어쨌든 날 사랑해주는 건 사실이잖아?
“오늘도 가볍게 마음먹기는 글렀네. 삼진 못 잡으면 폭동 나겠어.”
시작부터 이렇게 반겨주는데, 그냥 넘길 수야 있나. 오늘도 빡세게 삼진 잡아야 그럭저럭 만족 하겠구만.
“어차피 그럴 생각 없었잖아? 늘 타자들 잡아 족치는 게 최우선이면서.”
“그렇긴 하지.”
뭐, 그렇지 않았더라도 타자들 조지는 거야 무조건 해야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특히나 실전 경험이 중요한 만큼 더욱더 공을 들여야 하고. 아무리 시범경기라고 해도 말이야.
그래도 조금 더 마음을 먹기는 해야겠지. 팬들이 보고 있었으니까. 저 양반들 보니까, 그게 확 느껴지네.
“평소처럼 갈 거지?”
“그래야지, 정규시즌이랑 비슷하게 해야 느낌이 올 테니까.”
“타자들 체크할까?”
“릴리스 포인트 바뀔 때마다 반응 체크해줘.”
“오케이, 감을 잡는지 아닌지, 확실하게 관찰할 게.”
그렇게 브루스와 헤어진 뒤, 홀로 마운드에 오르자, 그제야 다른 시선들도 느껴졌다.
그래, 아주 열심히 노려보네.
상대팀 말이야. 다들 눈에 살기가 서려져 있구만.
‘극과 극이네.’
아이러니한 건, 정반대로 눈을 마주치는 것을 꺼리거나, 혹은 아예 날 보는 것조차 불쾌하게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는 거였다.
대체로 작년에 나한테 열심히 털린 녀석들이지. 살기가 가득한 눈동자는 마이너들이고. 왜 마이너들이 나를 그렇게 보냐고? 간단하다.
‘걸어다니는 티켓이지, 마이너리거들한테 나는.’
그렇잖아? 리그 최고의 투수, 아니, 역사상 최고로 꼽히는 단일시즌을 보냈던 투수인데.
그런 상대가 버겁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회로 여겨지겠지. 프런트에 눈도장 찍을 기회 말이야.
그러니 절박함이 강한 마이너리거들이야, 나에 대한 두려움이나 껄끄러움 보다는 투쟁심 내지는 승부욕이 더 강할 수밖에. 과거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못해도 수십 명의 타자가 내 목을 따보겠다고 노려보고 있는 건데, 기분 째지네. 아주 좋아.
‘이제야 좀 진짜로 왕관을 쓴 기분이네. 그래, 모가지 노리는 놈도 있어야지.’
의욕은 충분히 인정한다.
애초에 그런 과정을 거친 놈들이 지금의 메이저리거들이니까. 나도 저랬었고.
그러니, 그런 절박한 마음과 강렬한 의지야 인정하지만···
‘그 정도로 따일 목이었으면, 레인저스가 진작 쑤셨지.’
작년에, 저것 이상의 적대감 혹은 투쟁심으로 무장했던 타자들도 죄다 조졌단 말이지.
시범경기이기는 해도, 열심히 할 생각이었기에, 그들이 바라는 그림을 그려줄 생각은 없었다.
어디서 감히 나를 제물로 삼으려고. 얌전히 내 성장의 제물이 될 것이지.
“스트라이크!”
마운드 감각 역시 잡은 뒤, 그런 도전자들에게 던진 초구. 몸쪽으로 날카롭게 파고든 포심 패스트볼에 타자의 배트가 헛돌았다.
“Yeeeeeah!”
“이래야지 Suck이지!”
“삼구삼진 가즈아아아아아!”
공이 잘 달라붙네. 나쁘지 않아. 이 정도는 돼야지.
‘에릭 영, 나이가 제법 있는 걸로 아는데, 많이 당황한 눈치네.’
나와 내 팬들이 만족감을 느꼈을 때, 반대로 타자, 에릭 영 주니어는 조금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AAAA리거, 작년 백업으로 메이저에서 좀 뛴 걸로 아는데, 상대해본 적은 없는 걸로 안다.
아마도 시범경기인 만큼, 적당히 살살할 줄 알았는데, 초구부터 묵직하게 꽂히니, 약간은 당혹스러웠겠지.
입지가 불안한 만큼, 날 두들기면서 기회를 잡고 싶었을 테니, 더욱더 흔들렸을 거고.
“스트라이크!”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살살 던진 거 맞다.
아직 전력투구는 아니니까. 적당히 조절했지.
‘내가 아무리 미쳤다고 해도, 올해 첫 경기부터, 그것도 시범경기에서 전력투구를 하겠어?’
새로운 발전을 위해 실전 경험이 중요하다고 해도, 부상으로 나가리 되면 결국 다 소용없는 일이지.
그렇기에 적절하게 힘조절을 하며 공을 던졌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그럼에도 타자의 배트는 닿지 않았다.
“유우우우우우우우우!”
“써어어어어어어억!”
레이더스는 신이 나서 소리쳤고 말이다. 간절한 사람한테 너무하네. 삼진 먹은 것도 서글플 텐데. 조롱까지 해버리고.
‘너무 당황해서 그런가, 릴리스 포인트의 변화를 눈치 못 챘어. 이러면 안 되는데···’
저쪽에서 적절한 반응을 보여줘야, 그걸 토대로 데이터를 쌓을 텐데, 타석 하나 버렸네.
‘반응 죽여주네. 그래, 저게 마이너지. 저런 맛이 있어야지.’
그렇게 에릭 영 주니어가 삼구삼진으로 물러났을 때, 흘끔 훑어본 에인절스 덕아웃은 꽤나 흥미로웠다.
앞에 동료가 삼구삼진으로 발렸으니, 기세가 꺾일 법함에도, 오히려 더욱더 사나워졌으니까. 약간은 반기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럴 수밖에. 마이너에 동료애나 팀워크는 없으니까. 죄다 경쟁자잖아, 저런 반응이 당연하지.
또한 경쟁자가 처참하게 발린 만큼, 자신이 더 돋보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 아니, 착각할 거고.
오랜만에 느껴보는 마이너의 맛이 꽤나 그립게 느껴졌지만, 한 가지 아이러니한 것이 있다면.
‘그런데 넌 왜 그러냐? 내가 뭘 어쨌다고? 마이너도 아닌 놈이.’
마이너뿐만이 아니라, 사실상 메이저리거, 그것도 확실한 주전 선수라고 봐도 무방한 녀석도 그런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거였다.
가볍게 연습스윙하다, 대기타석에서부터 타석으로 걸어오는 타자 혹은 투수, 아니, 그냥 선수라고 부르자.
아무튼 그런 녀석은 마이너리거들과 비슷한 눈빛으로 나를 봤으니까.
‘아니, 저쪽은 좀 더 순수하네. 탐욕스럽지는 않으니까.’
다만 다른 마이너들처럼 탐욕스럽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조금 더 순수하지. 순수하게 나한테 도전심을 느끼고 있다고 해야 하나?
오타니 쇼헤이.
그는 굉장히 뜨거우면서도, 아주 순수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봤다. 어우, 부담스러워.
덩치도 큰 녀석이 저렇게 노려보니까, 괜히 기분이 이상하네. 내가 뭘 잘못했나 싶기도 하고.
‘딱 좋네. 타자로도 재능이 좋다고 했으니까, 좋은 상대가 되겠지. 저 정도 의지까지 있다면.’
약간 반갑기도 하고.
저렇게까지 의지가 좋다면야, 앞서 에릭 영 주니어처럼 맥없이 정신을 놓지는 않겠지.
그렇기에 나를 향해 뜨거운 시선을 보내는 오타니를 가벼운 미소로 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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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굳이 첫 경기부터 출장할 필요가 있냐고 묻네요. 아직 준비가 다 되지 않았으니, 위험할 수도 있다고요.”
통역사가 전해진 코치의 걱정에 조금 더 단호하게, 의지를 담아서 부탁했다.
“딱 한 타석이라도 좋으니, 꼭 하고 싶다고, 전해주세요.”
첫 경기 출장.
대부분은 부정적이었다.
코치도, 동료들도.
그의 재능을 높이 산 건지, 친밀하게 반겨주며, 적응에 도움을 주고 있는 마이크 트라웃마저도.
“네 의욕이야 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만, 혹시 모르는 거야.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을 때 출장했다가, 자칫 부상이라도 당하면··· 너 같은 재능에게는 정말 끔찍할 테니까.”
“네, 저도 알아요. 부상은 정말로 끔찍하죠. 하지만, 꼭 보고 싶었거든요. 목표이기도 하고.”
“그 마음은 나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하아, 그냥 조심해.”
어쩌면 다른 동료들이나, 코치는 자신이 그에게 경쟁심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최고의 투수를 꺾어냄으로써, 투타겸업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허나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당장은 이기기 힘들겠지.’
내 자신을 잘 안다.
객관적으로 볼 줄도 알고.
지금은 당연히 힘들다. 아마 많이 힘들겠지. 겨우 한 타석일 테니, 긍정적인 성과를 내기란 굉장히 요원할 거다.
고국의 팬들이나, 언론의 기대처럼, 일본 야구 최고의 재능이, 한국 최고의 재능을 통타하는 것 같은 일은 최소한 지금은 불가능한 셈이겠지.
‘하지만, 어차피 이길 생각은 없어. 가능하지도 않고. 그냥 보고 싶다.’
그저 딱 그 정도의 마음이었다. 정점(頂點), 단순히 리그를 넘어, 모든 야구 역사를 통틀어 최고로 올라선 투수.
그런 투수의 공을 직접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가늠하고 싶었다. 자신과 그의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
그래야지만,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정확한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향해 도전할 수 있을 테니까.
“조심해, 그리고 굉장히 영악하게 피칭하니까, 말려들지 말고.”
결국은 허락이 떨어졌다.
아마도 프런트 역시 보고 싶었던 거겠지. 그가 정말로 기대만큼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건지.
트레이닝을 통해 확인하고 있기는 하나, 그것이 실전에서도 통용되는 지는 조금 다른 의미일 테니까.
“괜히 자리나 뺐고···”
“어차피 레귤러는 확정됐을 텐데, 욕심도 많네.”
당연히 사정이 좋지 못한 몇몇 이들은, 이미 안정적인 미래가 펼쳐진 녀석이 자신들의 기회마저 빼앗는다며 별로 좋지는 않은 반응을 보였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지, 그제 기대와 흥분으로 시간을 보냈다. 물론 철저한 준비도 곁들여서.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자신 역시 할 수 있는 최대한, 최고의 컨디션으로 임해야 할 테니까.
그렇게 충분한 준비와 노력, 그리고 집중 끝에, 시간이 다가왔다.
“스트라이크 아웃!”
“You Suck!”
“올해도 시작이네.”
“아, Suck 저 새낀 좀 안 다치나? 부상이라도 당했으면 소원이 없겠어.”
“저 지랄을 올해도 볼 생각을 하니까, 벌써부터 노이로제가 올 지경이야.”
“소포모어 징크스는 지랄, 아주 끄떡도 없구만.”
경기가 시작되고, 지그시 바라본 끝에, 차례가 다가왔다.
다른 동료들은 짜증이 섞인 한탄을 뱉었고 말이다. 기대했던 것처럼, 강력한 피칭을 보여줬으니까. 올해의 시작부터.
“오타니, 긴장하지 말고, 침착하게 하나 날려. 죽여주는 파워로 담장 넘기면 더 좋고.”
몇몇 정신을 차린 이들의 응원과 격려를 뒤로한 채, 타석으로 올랐을 때, 몇 번이고 홀로 생각했던 그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머릿속으로 홀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렬했다.
같은 아시아인을 본 것이 반가운 건지,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사납게 노려본다거나, 고고하게 내려본다거나 하지 않고, 조금은 가볍게 웃으면서 반겨줬음에도 말이다.
“Hello, Babe Ruth.”
타석에 오르자, 귀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기한 생물을 보는 듯한 시선도 함께 왔고.
불쾌하거나, 신경에 거슬리지는 않았다. 대부분은 저런 반응이었으니까. 그 자신은 투타겸업에 도전하는 희귀생물이니까.
또한 포수에게 관심을 줄 정도의 여유도 없었고. 타석에 올라온 직후부터 한여름의 도쿄처럼, 왠지 텁텁한 느낌이 들었으니까.
‘지켜보자. 최대한 지켜보자.’
그런 압박감을 억지로 떨쳐내며, 차분하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자신의 목적을 잊지도 않았고.
어떻게든 본다. 최고의 공을.
오직 그것 하나에만 집중한 채, 승부에 임했고.
“오타니! 힘내요!”
“당신이 누군지 보여줘요!”
그를 보기 위해 일본에서 날아온 건지, 익숙한 고향의 말을 시작신호 삼아, 초구가 날아들었다.
“스트라이크!”
몸쪽 패스트볼.
직전의 타석과 똑같았다. 굉장히 강력하게 들어온 것도.
‘83마일. 83마일? 133이라···’
기대했던 것 이상.
비록 그 자신처럼 160km/h의 강속구를 던지지는 못하지만, 그 위력은 그런 구속 ‘따위’로 설명되는 종류가 아니었다.
라이징 패스트볼.
그래, 그 설명 그대로지.
여러 기사들은 물론, 에인절스에 합류한 뒤의 동료들도 모두 그렇게 표현했다.
분명히 떠오른다고.
착시에 불과하고, 그걸 잘 알고 있지만, 저도 모르게 그렇게 믿을 정도로 좋은 공이 들어왔다.
‘저쪽도 진심이다.’
그걸 보는 순간 깨달았다.
그 역시 이번 승부에 제법 진지하게 임했다는 것을.
물론 전력투구는 아니겠지.
허나 한도 내에서 좋은 공을 던진 것만큼은 맞으리라.
그것이 못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더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집중을 놓치는 순간, 눈 깜짝할 사이, 기회는 사라진다.’
한순간 목을 꺾어 버리겠지.
작년, 수없이 많은 메이저의 타자들을 그렇게 쓰러뜨렸던 것처럼.
그렇기에 그저 감정에 젖을 시간은 없었다. 그저 또렷하게 쳐다볼 뿐.
“볼”
2구 역시 포심 패스트볼.
이번에는 볼이 선언됐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참고 기다리기는 했으나, 제대로 보지 못했다. 뒤늦게나마 들어온 코스를 확인했을 때, 조금 깊기도 했고.
그러니, 심판의 재량에 따라 투 스트라이크가 되기에도 충분하겠지. 이건 운이 좋았다.
그리고 묘한 감각도 느껴졌고. 무언가, 조금은 달랐다.
‘공을 끝까지 숨겨서, 제대로 보기가 어렵지만··· 미묘하게 달라.’
뭘까, 이 이상한 느낌은.
분명 같은 속구인데도, 초구와는 분명히 달랐다.
혹시 변형 계열인가? 아니,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무브먼트도 다르지 않았고, 구속도 마찬가지.
그렇다면 대체 이 기시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머릿속이 뒤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애써 털어냈다.
‘집중해, 생각에 잡히는 순간 끝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혼란을 포착한 건지, 곧이어 3구가 날아왔고.
“스트라이크!”
이번엔 스윙했지만, 닿지 못했다. 슬러브. 정확한 명칭은 너클 커브라고 했었지.
작년, 시즌 중간에 뜬금없이 나타난 이후, 모든 좌타자를 절망으로 집어넣었던 공은 역시나 명불허전이었다.
날카롭게 꺾이며, 스트라이크존을 사선으로 자르는 궤적은 솔직히, 지금까지 전혀 보지 못한 수준의 공이었으니까.
‘다만 느낌은 다시 초구와 비슷하다. 그냥 착각했던 건가?’
하지만 그 경악스러운 위력과는 별개로, 2구에서 느꼈던 미묘한 찝찝함은 가셨다.
그것을 그저 착각이라고 여기며, 다시 타격폼을 취했고, 꿀꺽 침을 삼켰다. 느껴졌으니까, 그가 들어올 것이라는 게.
투 스트라이크 원 볼.
이 아슬아슬한 매치 포인트에서 가장 날카로운 투수니까. 그렇기에 393개나 되는 탈삼진을 잡은 것이고.
‘온다.’
마지막 결정구.
그것을 기다리고 두 눈에 힘을 조금 더 불어넣은 순간, 미묘한 느낌이 다시금 들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다시 한 번 더 패스트볼.
특유의 하이 패스트볼에 헛스윙이 저절로 나갔고, 당연히 결과는 삼진 아웃이었다.
“You Suck!”
“아아아···”
참담한 패배.
기이한 관중들은 그에게 조롱을 가했고, 자신을 보기 위해 날아온 팬들은 아쉬운 탄식을 뱉었다.
애석한 승부의 결과였지만, 그보다도 더욱더 마음에 남은 것은 여전히 미묘한 감각이었다.
분명이 어느 정도는 지켜봤다. 타이밍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달라졌고.
정확하게 무엇이라고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딱 한 가지는 확실했다.
“더 잘해진 건가··· 거기서 더.”
이미 최고라고 생각했던 정상의 봉우리가, 조금 더 높아졌다. 그곳까지의 거리도 더 멀어졌고.
그것이 당혹스럽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더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래 이 정도의 거리란 말이지. 만약 내가 늦는다면, 더 멀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고.’
목표가 더 높아진 만큼, 그것을 향한 도전심도 더욱더 강해졌으니까.
“더 할 생각은 없지?”
“네, 충분합니다.”
비록 한 타석에 불과하지만, 성과는 많았다. 마음도 확실하게 다 잡혔고.
“스트라이크 아웃!”
다만 그것은 마운드의 남자 역시 마찬가지였던 건지, 조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에인절스를 쓰러뜨렸다.
너무나도 수월하게.
####
“스트라이크 아웃!”
“You Suck!”
“지치지도 않나 보네요.”
“고유석이랑 애슬레틱스 팬들, 어느 쪽?”
“둘 다요.”
그래 정말 지치지도 않고, 일방적인 학살이 이어졌다.
에인절스의 공격이 시작될 때마다, 시간은 너무 빠르게 흘러갔다. 그도 그럴 것이, 숨 쉴 틈도 주지 않으며, 모조리 쓸어버렸으니까.
삼진이 하나씩 올라갈 때마다, 관중석을 빼곡하게 채웠던 애슬레틱스의 팬들은 여지없이 특유의 You Suck 챈트를 소리쳤고.
“아웃!”
“아, 그나마 범타라도 하나 쳤네요.”
“어설프긴 하지만, 제일 잘 맞추기는 했네.”
“쓰읍, 아홉 타자 연속 탈삼진이었으면, 그림이 더 예쁠 텐데.”
“지금도 충분해. 좋은 구경도 했고. 이 정도면 만족해야지.”
중간에 나온 범타 하나.
그마저도 내야뜬공에 불과했지만, 그것이 선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에인절스 타자들은 처참하게 패배했다.
대부분 마이너리거이기에, 리그 최고의 투수가 그 상대인 만큼, 그저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고유석의 준비가 확실하게 되었다는 것은 알 수 있겠지. 또한···
“기대 이상이네.”
“네, 다행이에요. 조금 걱정했더니, 고유석이 잘 준비가 된 것 같아요.”
“그걸 말고, 신무기 말이야. 완성도가 예상보다 훨씬 더 좋아 보여. 상대가 대부분 마이너리거라서 효과가 잘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토록 기대했던 신무기 역시 기대이상의 모습을 보여줬고 말이다.
상대의 수준이 낮기에, 정확한 위력을 평가하기는 어렵겠지만, 그저 고유석이 그것을 수월하게 사용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본인이 잘 제어할 수만 있다면, 그 효과야 더 말할 것도 없이 강력할 테니까.
“스트라이크 아웃!”
그리고 마지막 삼진이 올라갔을 때, 다시금 우렁찬 챈트가 울렸고, 몇몇 관중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기도 했다.
“올해도 X발 X나게 잘하겠네! 아주 좋아!”
“Suck 사랑한다! 그래, 이게 야구지! 이번 시즌도 계속 You Suck으로 가자!”
겨울 동안 그의 피칭을 기다렸을 팬들에겐, 그 무엇보다도 만족스러운 결과물일 테니까.
“3이닝 8탈삼진 퍼펙트라. 제대로 잡아 족쳤네.”
“그냥 어나더 레벨이네요. 오히려 너무 잘 잡아서 걱정될 정도예요. 괜히 시범경기에서 체력을 쓰는 건 아니겠죠?”
“자기관리가 철저한 선수니까, 적절하게 조절했겠지. 그나마 조절한 게 저 정도인 거고.”
잠시 팬들에게 인사하다, 더욱더 거세진 박수 속에, 마운드에서 내려가는 고유석을 보며, 제법 많은 이들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노트북을 두들겼다.
“씁, 우리도 빨리 작성하자. 어디, 달 찍는 카메라 화질 좀 감상하자. 메모리 카드 줘.”
“투구 하나하나 안 빼놓고, 프레임 하나 단위로 다 찍어뒀으니까, 염려 마세요.”
대부분은 기자들이지.
그의 몰락을 기대했든, 건승을 기대했든지 간에, 무조건 환영할 수밖에 없는 결과가 나왔으니까.
3이닝 8탈삼진 퍼펙트.
시범경기를 시작하기에는 너무나도 완벽한 피칭이었으니 말이다.
왠지 알 것 같았다.
다른 기자들, 아니, 이 경기를 지켜본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작년과 똑같이 강력한, 아니, 만약 내막을 아는 이에게는 더욱더 잔인하게 느껴질 피칭을 봤으니, 이렇게 생각하겠지.
‘왕의 귀환이구만.’
작년, MLB를 무자비하게 폭격했던 폭군이, 왕이 다시 그의 왕좌로 돌아왔노라고.
비록 3이닝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왕의 귀환을 알리기에는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