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190화 (190/316)

190화

“첫 경기부터 등판시켜도 괜찮을까요? 괜히 폼이 다 올라오지 않은 상황에서 등판했다가, 지난번 소니처럼 부상이라도 당하면···”

시범경기를 앞두고, 간략한 면담이 있었을 때, 데이비드 포스트 단장은 열심히 보고서를 살펴보고 있는 빌리 빈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고유석의 선인장 리그 첫 경기 등판은 빌리 빈이 밀어붙인 결과물이었으니까.

‘마케팅 쪽이야 반기는 눈치지만···’

마케팅이나 운영팀의 경우, 페넌트레이스전부터 팀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릴 기회라고 여겼기에, 대단히 반겼지만.

그런 비즈니스적 업무 이외의, 스카우트, 전력분석, 심지어 현장 스태프들까지, 첫 경기 등판에 대해 모두 다 조금은 회의적이었다. 데이비드 포스트, 그 역시 마찬가지고.

팀의 에이스, 그것도 절대적인 수준의 에이스를 굳이 아직 몸도 채 완성되지 않았을 때, 마운드에 오른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니까.

공연히 작년의 소니 그레이 때처럼, 소중한 에이스를 시범경기에서 잃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덕분에 고유석이라는 괴물이 치고 올라왔기에 전화위복이 됐지만, 만약 그때와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면, 그 여파는 훨씬 더 강력하리라.

그것에 대한 걱정을 담은 질문에, 빌리 빈은 보고서에서 눈조차 떼지 않으며 가볍게 입을 열었다.

“그렇기에 첫 경기에 올리는 거야. 혹시 모를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

“잘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자세한 설명을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데이비드, 자네도 알고 있겠지. Go가 오프시즌 동안 뭘 준비했는지. 무엇에 가장 열을 올리고 있는지.”

그 말에 데이비드 포스트는 그저 멋쩍게 웃었다. 그것이 처음 보고로 올라왔을 때, 그 역시 큰 혼란에 빠졌으니까.

리그 최고의 투수가 굳이 릴리스 포인트를 건드리다니, 심지어 그냥 바꾸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패턴을 추가하다니.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폭탄은 분명했다.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핵폭탄과 같은 파급력이 나올 것이고.

‘Go 하나만 보고 모든 걸 준비했는데, 혹시라도 그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최악이지.’

특히나 이번 시즌, 야심찬 출사표를 내던졌던 오클랜드에겐 재앙이나 다름없을 테고.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어떻게 생각해?”

“···그 효과야 차치하고, 일단은, 굉장히 위험하죠.”

솔직한 답변에 빌리 빈은 피식 웃었다. 사실, 데이비드 포스트만이 아니라, 그를 비롯한 모두 다 저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아니, 어쩌면 데이비드 역시 한때는 스카우트였기에 그들과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는 걸지도 모르지.’

효과적이겠으나, 대단히 위험하다는 건, 스카우트와 전력분석 팀 등, 여러 이들이 공유한 생각이었다.

제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아니, 대단한 천재이기에 더욱더 위험하다고 소리쳤지.

숱한 천재들이 자신의 재능이나 감각을 맹신하고 일을 벌이다가 망하는 모습을 수십, 수백 번도 더 봤으니까.

이번 역시, 후에 유망주들에게 들려줄, 그런 사례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르고.

“일단은··· 현재까지 트레이닝 보고서에 따르면, 걱정할 만한 문제가 나타나지는 않았어. 그건 정말로 다행이지.”

그런 불안함과는 달리, 일단 현재까지는 굉장히 성공적으로 순항 중이었다.

당장 지금 읽고 있는 보고서만 하더라도, 첫날과는 뉘앙스가 달랐으니까.

처음 투수코치가 올렸던 보고서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로 가득찼다. 그에 반해 지금은 어쩌면 좋은 효과를 보일지도 모른다는 논지가 가득했고.

마찬가지로 호호캄으로 파견한 스카우트들 역시 전보다는 훨씬 걱정이 덜했다.

크리스티안 옐리치와의 연습승부에서도 대단한 효과를 보였다고 했지.

물론 옐리치가 생각보다 못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딱히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분명 기대이상의 폼이었으니까.

“잘 적응하고 있다는 보고서가 올라왔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빨리 확인해야지.”

“확인, 말씀이십니까?”

모든 것이 수월한 상황. 그렇기에 위험은 더 커졌다.

트레이닝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건데, 그만큼 몸에 더욱더 빠르게 스며들고 있다는 뜻이니까.

“정말로 효과가 있는지, 위험은 없는지, 실전에서도 통용되는 지. 최대한 일찍 확인해야지. 더 시간을 끌다가, 보고서의 내용대로 잘 적응하여, 그것이 몸에 완전히 정착된다면, 그땐 돌이킬 수 없을 거야.”

정규시즌까지 남은 시간은 한달 하고 조금 더. 그 정도라면, 문제가 생겼을 때 어느 정도는 대처할 수 있을 거다.

그러니 최대한 시간이 남아 있을 때, 더 관망하기 보다는 오히려 더욱더 과감하게 들어가는 것이 낫겠지.

그리고 만약, 정말로 아무런 문제 없이, 효과가 난다는 것이 입증이 된다면···

‘그때부터는 적극적으로 밀어줘야지.’

이미 최고인 투수가, 거기서 한 단계 더 진화할 수도 있으니까.

그 모든 건, 시범경기에서 드러나리라.

####

“올해는 시범경기에서 몇 경기 정도 등판하려나. 최대한 많이 던지고 싶은데.”

일단 첫 등판은 확정됐다.

LA 에인절스라, 나쁘진 않네. 까다롭기도 하고. 최소한 지금 연습에는 큰 도움이 될 거다.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트라웃 나왔으면 좋겠는데.’

최고의 타자가 거기 있잖아?

그 양반한테 통하면, 나머지는 더 볼 것도 없지. 다 통한다고 봐도 무방하니까.

조금 어이가 없네.

트라웃이 나와주길 바라다니.

정규시즌이었다면, 제발 꺼지라고 기도를 했을 텐데 말이야.

작년에 만날 때마다 웬만하면 잘 잡기는 했지만, 솔직히 죄다 빡셌거든. 타석 하나하나가 힘들었지. 결국 홈런도 하나 맞기도 했고.

그치만, 지금은 어차피 시범경기니까. 한방 맞더라도 거기서 배워갈 게 있다면 훨씬 남는 장사지.

언론에서는 또또 2년차 징크스니 뭐니 개지랄을 떨겠지만. 뭐, 그쪽이야 원래 그러니까. 이젠 안 그러면 오히려 섭섭하더라.

‘그치만,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

허나 아마도 트라웃은 안 나올 가능성이 높다. 기사를 보니까, 에인절스는 19일에 야수들이 합류했다고 하더라고.

본격적인 훈련은 20일일 테니, 아직 폼에 올라오지는 않았을 거다.

물론 투수보다야 야수들이 훨씬 경기력과 폼을 올리기 쉽다고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걸리겠지.

특히나 트라웃 같은 슈퍼스타들은 구단에서도 조심스럽게 관리할 수밖에 없으니, 더욱더 위험을 피하려고 할 거고. 그러니 당장 첫 경기부터 나오지는 않을 거다.

괜한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을 때, 옆에서 호통을 치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커트 앵글, 피칭 중에 잡생각 하지 마. 자꾸 타점이 흐트러지잖아. 커맨드도 안 잡혔어.”

“그래요? 이상하네, 전 언제나 머리 한쪽은 피칭에 집중하는 초능력이 있거든요.”

“그것참 더럽게 별 볼 일 없는 초능력이네.”

연습피칭 도중 딴생각에 잡힌 게 부끄러워서 대충 아무렇게나 지껄이니 ,옆에서 지켜보던 그렉은 코웃음만 쳤다.

음, 집중하자, 집중.

등판은 등판이고, 연습은 연습이지. 당장의 것에 전념하자고. 계속 나도 모르게 딴생각이 드네.

“슬슬 막혀서 그런 거야.”

“뭐가요?”

“네가 자꾸 딴생각하는 거. 솔직히 좀 더뎌졌잖아? 발전 속도가 느려졌으니, 괜히 잡생각이 들 수밖에.”

그렉은 그렇지 않느냐는 듯 흘끔 곁눈질했다. 귀신이네. 딱 보고 알아채는구만.

그의 말처럼, 슬슬 막히고 있었다. 뭔가, 릴리스 포인트가 한 점으로 모이는 속도가 조금 느릿해졌다고 해야 하나?

아마도 한계가 찾아온 거겠지. 연습은 언제나 정답이지만, 결국 연습만으로는 벽이 있거든.

‘정규시즌 전까지는 어떻게든 완성시켜야 하는데···’

그래서인지 괜히 조급함도 생겼지만, 그것을 캐치한 듯 그렉은 도리어 어이가 없다는 긋 코웃음 쳤다.

“너, 이거 연습한지 아직 두 달도 안 됐다며? 이 정도까지 된 것만 해도 더럽게 빠른 거야. 배가 불러도 너무 불렀구만.”

“하긴, 엄청 빠르게 발전하기는 했네요. 고치는 게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짓는 거라서 그런가?”

사실 이 정도만 하더라도 충분히 괴물 같은 속도이기는 했다.

보통 다른 투수들이 릴리스 포인트를 고치는 것에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는 걸 감안하면 말이야.

난 그것에 비해 6분의 1밖에 안 되는 시간 만에 어느 정도 그럴듯한 수준까지 올라온 셈이니, 대단하다고 할 수 있지.

“뭐, 나야 투구폼도 오버핸드에서 쓰리쿼터로 반년 만에 고쳤지만.”

“예예, 거참 대단하십니다. 아주 존경스러워요.”

뭐, 가끔 더 한 괴물들도 있기는 하지만. 내 옆에 계신 분처럼.

대충 시큰둥하게 대꾸하니, 피식 웃은 그렉은 마치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시범경기가 중요하기는 하지. 결국 실전뿐이니까.”

“그렇겠죠, 실전이랑 연습의 감각은 다르니까요. 이럴 때 실전 한번 끼얹으면, 다시 또 확 올라가니까요.”

완성도가 일정 수준까지 올라온 만큼, 이제부터는 단순히 훈련만으로는 힘들다. 실전 경험에서의 누적돼야겠지.

제아무리 연습을 실전처럼 한다고 해도, 결국 실전과 연습의 감각은 월등하게 다르거든.

훨씬 더 정교하면서, 날카롭고, 그리고 극도로 예민하지. 내 스스로 차이점이 확 느껴질 정도로.

“반대로 안 좋은 게 몸에 확 녹아들기도 하고.”

“그건 최대한 조심해야겠죠. 일단 지금까지는 괜찮잖아요?”

“지금처럼 계속 딴생각하면 또 모르지. 나쁜 습관이 생길지도.”

제대로 꼬집으시네.

그의 질책에 억지로 집중력을 올려봤지만, 한번 흐트러지기 시작하니, 영 느낌이 안 살았다.

“오늘은 이 정도만 하죠. 어차피 곧 경기도 나가니까.”

“네, 딱 이 정도가 괜찮겠군요.”

훈련은 그것으로 종료, 이젠 합법적으로 잡생각을 할 수 있겠지. 물론 연습의 감각을 여전히 붙들어야 하겠지만.

“개막하기 전까지, 가능할 것 같아요?”

“글쎄, 그건 아무도 모르지. 실전에서 얼마나 감을 잡을 수 있느냐가 중요할 테니까.”

“그렇겠죠, 그럼 한 열 경기쯤 나가봐?”

“웃기고 있네. 커트 앵글 니가 무슨 마이너 애송이냐? 에이스라는 놈이 체력 아깝게. 그냥 얌전히 구단이 시키는 대로 등판해. 그 대신 최대한 집중해서 피칭하고.”

한 열 번 경기쯤 등판하면 감이 잡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툭 내뱉자, 그렉은 미친놈을 보듯이 나를 봤다.

명색이 한 팀의 에이스라는 놈이, 괜히 시범경기에서 체력 낭비한다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는 거겠지.

“잘 모르시나본데, 제가 좀 철인이거든요. 작년에 235이닝이나 던지고도 아픈 곳 하나 없이 멀쩡했는데, 아시나 몰라?”

철없는 애새끼를 보는 듯한 표정이 불쾌해서, 괜히 거들먹거리며 자존심을 세워봤지만.

“오, 그래? 너도 잘 모르나 본데, 내가 3년 연속 260이닝에, 14년 연속 200이닝 했거든. 철인? 고작 한시즌 235이닝 가지고? 하, 나 때는 겨우 그 정도 던지고 자랑하면 X신 취급당했어.”

“X발 괴물이에요? 260이닝? 3년 연속으로? 그러고도 팔이 멀쩡한 게 신기하네.”

본전도 못 찾았다.

아, 그래, 너무 친해져서 그런가, 종종 나도 모르게 이 영감님의 정체를 까먹는단 말이야.

메이저리그에서만 5000이닝을 던진 사람 앞에서 이딴 소리를 하다니. 얼굴이 다 뜨겁네.

그래도 한번 쪽팔리고 나니, 점점 차오르던 초조함이 약간은 가라앉았다.

‘그래, 괜히 조급해 하지 말고, 최대한 한 경기 한 경기에 집중하자.’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으며, 선인장 리그의 첫 경기를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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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유~ 딱 봐도 동종업계 사람들이 한가득 인데요?”

“당연하지, 죄다 주목하고 있으니까.”

2월 24일.

메사의 호호캄 스타디움 일대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대다수는 당연히 애슬레틱스 혹은 에인절스의 팬들이었지만, 개중에선 들뜬 표정의 기자들 역시 적지 않았다.

올해, 야구의 시작을 알릴 순간이었으니까. 비록 개막전은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관심이 쏟아지고 있었고.

“그런데, 한국에서 이렇게 많이 보냈나? 거의 코리안타운 수준인데요?”

다만 특이한 것은 그런 기자 중 제법 많은 이들이 동양인이라는 것이었다.

분명 미국의 한복판이고, 슈퍼스타의 첫 시범경기 등판인 만큼, 미국 전역에서 기자들이 몰렸는데도.

어쩌면 백인이나 흑인, 히스패닉보다, 동양인이 조금 더 많은 듯한 느낌이 들었으니까.

신기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부사수를, 박기자는 조금 한심한 듯 쳐다봤다.

수습 딱지는 뗐지만, 여전히 조금은 경험이 부족했으니까.

“설마 다 한국인이겠냐? 한국은 오히려 절반도 안 돼.”

“어, 그럼···”

“잘 들어봐, 일본어잖아.”

수많은 사람들이 내는 소음에 가려져 희미하게밖에 들리지 않았지만, 잘 집중하면, 수많은 영어들 속에서 종종 일본어가 섞여 나왔다.

“어··· 그렇네요. 근데 일본 기자들이 왜- 아, 오타니.”

“이제야 알겠냐? 또 못 알아들었으면 한 소리 하려고 했더니.”

“에이, 제가 아무리 둔해도 그 정도는 알죠. 그러고 보니, 오타니가 있었네, 에인절스에는. 어쩐지, 그러니까 일본인들이 많지.”

오타니 쇼헤이.

작년 고유석이 투수의 신화를 이룩했다면, 그는 투타겸업이라는 오래된 전설을 부활시켰다.

투수와 타자, 양쪽으로 대단한 재능을 선보이며 NPB를 정복한 만큼, 작년 오프시즌의 최대어 중 하나가 됐지.

그런 선수의 메이저리그 첫 쇼케이스나 다름없으니, 어떤 의미에선, 고유석과 함께 올해 스프링 트레이닝의 가장 큰 이슈나 다름없었다.

‘아니, 고유석의 신무기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오히려 오타니 쪽이 메인이었지.’

영입 전에 참전했는데도 선택받지 못했던 여러 구단과 그 팬들 또한 정말로 베이브 루스인지 한번 보자며 이를 갈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 엄청난 재능과 투타겸업이라는 그 누구도 바라지 않았던 전설에 흥분해 기대한 이들도 적지는 않았고.

‘그런데 때마침 첫 경기부터 에인절스와 애슬레틱스가 만났으니···’

원래도 고유석의 대항마 혹은 라이벌 같은 느낌으로 오타니에게 기대를 걸었던 일본 쪽에선, 당연히 황급히 짐을 싸들고 날아올 수밖에.

아니, 단순히 일본 언론만 그런 것은 아니다. 미국 쪽에서도 은근히 그런 매치업을 바라는 눈치였으니까.

‘잘해도 너무 잘했으니까. 어느 곳이든 한 사람의 독주를 바라는 곳은 없지.’

작년 그야말로 폭군처럼 메이저리그를 휩쓸어버린 고유석이기에, 그런 대마왕이 대항할 용사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이리라.

최고의 재능이라고 평가받은 만큼, 어쩌면 그와 비견될 흥행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르고.

아마 사무국이 바라는 것은 이쪽에 가깝겠지. 서서히 내려가던 야구의 인기를, 하퍼-트라웃의 라이벌리처럼, 그들이 함께 되살려주기를.

“그런데 정말로 나올까요? 고유석이야 이미 등판 기사까지 나왔다고는 하지만···”

“글쎄,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모르지. 투수로서 마운드에 오를 생각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고. 만약 타자로 나온다고 하면, 조금은 희박하겠지.”

물론 그런 기대감이 무색하게도, 사실 오타니 쇼헤이의 출장은 딱히 확정된 것은 없었다.

일찌감치 구단을 통해서 등판이 확정된 고유석과는 달리, 오타니의 경우 그런 말이 별로 나오지는 않았으니까.

각 구단의 담당 기자들이 예상 라인업을 발표했고, 거기에 고유석과 달리 오타니의 이름이 오르지는 않았고 말이다.

허나 그것 역시 확정이라고 볼 수는 없으니, 그저 기자들만이 한줌의 기대감을 가지고서 경기장을 찾아온 거겠지.

모르긴 몰라도, 투수와 타자, 어떤 쪽으로든 만약 나오기만 한다면, 올해 시범경기의 시작을 장식하기에는 충분할 테니까.

“아, 발표가 난 것 같아요. 라인업이··· 어?”

혹시나 하는 기대감 속에서 시간이 흘렀을 때, 본격적인 경기 라인업이 발표됐다.

애슬레틱스의 경우 생각보다 주전급이 많이 나온 것을 제외하면, 고유석의 선발투수 등판부터 대부분은 미리 기사로 나왔던 예상 라인업과 일치했지만.

에인절스는 조금 달랐다.

혹시나 했던 잭팟이, 제대로 터졌으니까.

“지명타자. 오타니 쇼헤이. 2번타자라··· 재밌게 됐네.”

여기저기서 환호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부분은 아까 전, 스쳐봤던 동종업계 사람들.

특히나 일본 쪽 기자들은 쾌재를 부르짖으며 벌써부터 황급히 준비했고 말이다.

박기자 역시 뜻밖의 선물을 받은 것 같아 기쁘기는 했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다.

그에게 이번 경기의 메인 이벤트는 어디까지나···

“고유석 릴리스 포인트에 집중해. 카메라 줌 확실하게 당기고. 그거 화질 좋지?”

“아 그렇다니까요. 이게 달 찍는 거예요, 달 찍는 거. 관중석에서 마운드까지야, 그냥 맨눈처럼 확실하죠.”

“그래, 어디 한번 보자고. 고유석의 준비가 얼마나 됐는지. 얼만큼 완성됐는지.”

고유석의 신무기, 릴리스 포인트였다.

오타니가 기대만큼, 혹은 그 이상의 재능을 선보이며 새로운 슈퍼스타가 되든, 아니면 다른 타자들과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박살나든지 간에.

그것과 상관없이, 새로운 무기가 올해의 고유석을 결정지어줄 테니까.

물론 설사 그런 새로운 무기가 없더라도, 그가 최고의 투수라는 건 변치 않는 사실이지만.

“자, 들어가자. 슬슬 시간 됐네.”

스프링 트레이닝 첫날, 불펜피칭을 본 뒤부터 줄곧 품어왔던 기대감을 안고서, 박기자는 호호캄 스타디움으로 입장했다. 기자라기보다는 한 명의 야구팬으로서.

####

“쟤가 걔지? 베이브 루스.”

“대단하긴 하네. 등판하고 나면 녹초가 되는데, 거기서 타석에도 설 생각을 하고.”

“부럽다, 부러워. 마이너도 스킵하고, 연봉도 두둑하게 받고.”

“어? 쟤 최저연봉 아니야? 난 그렇게 아는데.”

“계약금만 20M 아니었어?”

“그건 이적료고. 쟤 계약금은 200만 달런가 그럴 걸?”

“뭐야, 그냥 갓 콜업한 마이너네.”

경기 전, 워밍업 시간에는 여기도, 저기도 죄다 한 선수 이야기였다.

화제의 주인공이 얼굴을 보였으니까. 나도 직접 보니까 좀 신기하기는 하네.

“아~ 쟤가 걔야? 요즘 난리도 아니더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별 신기한 놈들이 다 나오네. 커트 앵글 너도 그렇고, 저 핏덩이도 그렇고. 동양의 신비인가?”

“그거 인종차별이에요. 동양의 신비는 무슨. 일본이랑 한국에 뭐 신비로운 게 있다고. IT 강국인데.”

“한 마디를 안지네, 한 마디를 안 져. 내가 만난 아시안은 다들 착하던데. 커트 앵글 넌 왜 이렇게 생겨먹었냐?”

몰라요, 유독 착한 사람만 만났나 보죠. 난 지극히 평범한 성격이야. 아마도?

아무튼 그렉도 제법 흥미롭다는 듯 봤다. 사실, 야구인이라면 누구나 신기하고, 흥미로울 수밖에 없지.

‘투타겸업이라··· 그걸 진짜로 하네. 그것도 메이저에서. 체력이 남아도나?’

뭐, 듣기로 평범한 로테이션은 아니고, 6~8일 정도 휴식 보장받을 예정이라고 하던데, 그걸 감안해도 대단하지.

좀 부럽기도 하고.

아니 무슨, 투타겸업도 하는 주제에, 구속이 100마일을 찍어? 평속이 97마일이라던가? 내가 아니라, 쟤가 괴물이네.

‘거, 빠따질까지 할 거면 나한테 5마일, 아니, 3마일만 때주지. 그럼 내가 평생 떠받들면서 살 텐데.’

나이도 이제 겨우 스물둘인가 그럴 거다. 나는 저때 마이너에서 허덕거렸는데, 쟤는 이미 슈퍼스타네.

하여튼 부러운 삶이야.

“커트 앵글, 너도 투타겸업하지 그러냐? 타격 잘하잖아?”

“절대로 안 됩니다.”

그렉은 장난스럽게 권유했지만, 워밍업을 돕던 대니얼은 처음으로 그가 그토록 동경하는 그렉 매덕스에게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트레이너 양반도 봤잖아? 그 요상한 타격폼에 투수들 넋이 나가는 거. 바로 옆에서 봤을 텐데, 아깝지 않아? 사실 타격이라기 보단, 주루에 가깝지만.”

그치, 나도 작년에 어메이징한(?) 빠따력을 보여주기는 했지, 쓰읍, 진짜 한번 해봐?

생각해보면 내 재능을 묵히기 조금 아까운데 말이야. 20-20이나 30-30은 몰라도, 00-50은 할 자신 있거든.

00홈런 50도루 말이야. 이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겠지. 잘하면 타율도 3할을 찍을지도. 장타율도 3할 찍을 거고.

아마 출루율도 3할 정도일 테니까, 타율은 3할인데 OPS는 6할인 끔찍한 혼종이 되겠네.

“됐어요, 난 그 정도로 팔팔하지는 않아서. 그냥 투수나 잘해야죠.”

“그렇지, 넌 그냥 투수나 해라. 이쪽이 맞아. 다른 거 하기에는 재능이 아까워, 쟤도 100마일 던질 수 있으면 그냥 투수나 할 것이지. 이참에, 저 베이브 루스한테, 21세기의 참맛을 보여줘. 그러면 혹시 마음 바꿔서 투수할지도 모르잖아?”

“한번 노력은 해볼게요.”

“Go, 15분 됐어요. 불펜으로 가시죠.”

그렇게 시원찮은 농담이나 나누면서 워밍업을 마친 뒤, 본격적으로 불펜으로 들어가자, 뜻밖의 사람이 맞이해줬다.

“Go, 준비 됐어?"

“네, 딱 좋아요. 근데, 네가 직접 받아주려고?”

스콧 에머슨이야 당연히 투수코치니까, 그렇다고 쳐도, 불펜포수가 아니라, 브루스가 글러브와 포수장비를 끼고서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시범경기라도 보통은 불펜포수가 받아주는데, 그에 의문이 들어 고개를 갸웃거리니, 브루스는 씨익 웃었다.

“어차피 우리 홈이라 수비가 먼저잖아? 그리고 나도 미리미리 준비해야지. 연습 때랑 비교가 안 되게 빡세게 던질 텐데.”

“요즘 들어 부쩍 보기 좋아? 살도 쫙 빼고. 알아서 잘하고. 아주 마음에 들어.”

짜식이 말이야.

처음에는 파트너 소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요즘은 인정이다.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

흡족한 마음에 어깨를 두들겨 주니, 씨익 웃은 브루스는 너스레를 떨었다.

“그렇게 마음에 들면, 올해도 같이 롤렉스 하나 만들자. 기왕이면 월드시리즈에서.”

음, 그냥 한 말이겠지만, 어쩌다 보니 누군가를 먹이게 되는구만.

2차 대전 이후 최고의 투수로 꼽히지만, 22년이라는 커리어를 통틀어 퍼펙트를 못해본 사람 말이야.

“그렉 앞에서 롤렉스 얘기 하지 마. 한 번도 못 해봐서 속이 많이 쓰리시거든.”

“아··· 매덕스 씨 들으라고 한 건 아닌데, 죄송합니다.”

“애새끼들 잘들 노네. 공이나 던져. 늙은이 속 긁지 말고.”

내가 하도 자랑하고 놀려서 그런가, 이젠 달관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저은 그렉은 자연스럽게 내 옆에 섰고, 나도 잠시 우두커니 서서 준비를 가졌다.

‘시범경기지만, 철저하게 하자. 최대한 감각을 올려서.’

시범경기라고 설렁설렁할 생각은 없다. 물론 다른 선수들이 대충한다는 건 아니고, 나는 상황이 조금 다르잖아?

정규시즌까지 얼마 남지 않은 만큼, 한 경기, 한 경기가 소중하니 말이야. 새로운 것들을 최대한 휘어잡아서, 완벽하게 내 것으로 만들어야지.

“마운드 위에서는 너무 의식하지마. 그러다 보면 더 꼬이니까. 모순적이라는 건 아는데, 어느 정도 집중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던져. 최대한 자연스럽게.”

“무리하지도 말고. 그래봐야 시범경기인데, 편하게 가자. 아직 시간 많이 남았어.”

“예예, 그래야죠. 브루스, 하나 간다. 잘 잡아.”

“바로 던져.”

그렉과 스콧 에머슨의 말을 뒤로한 채, 가볍게 휘둘러진 왼손에서부터 깔끔하게 날아간 첫 공은 평소처럼 날카롭게 역회전하며 포수글러브로 들어갔다.

준비는 완벽하게 됐다, 몸도, 마음도. 그러니···

‘오늘도 타자들을 열심히 조져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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