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밝은 미래에 대한 확신이고 나발이고, 일단 엄청나게 혼났다. 귀가 떨어질 것 같네.
누가 감히 메이저리그 넘버원 에이스를 혼내느냐고? 그런 간 큰 놈이 팀에 있냐고? 있지 당연히. 그게 누구냐고?
“오프시즌 동안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거야!”
누구긴 누구겠어.
방금 전까지 넋이 나가 있던 투수코치, 스콧 에머슨이지.
이러니까 옛날로 돌아간 것 같네.
예전에, 한창 고등학교 다닐 때, 야구부 친구랑 복도에서 장난치다가, 화분 하나 깬 적이 있는데.
그때 학생주임에게 걸려서 엄청나게 혼났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슈퍼갑이고 나발이고 얄짤없네.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어쩌자고 그렇게 위험한 짓을 했어? 물론 결과가 좋기는 하지만, 그래도 최대한 조심해야지!”
음, 계속 혼나고 있으니, 과거로 돌아간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하구만. 나이가 어려진 기분이야.
다르게 말하면, 이 나이 먹고 선생님한테 혼나는 별로 모범적이지는 못한 학생이 된 것 같아서 조금 쪽팔리기도 하고.
“일단 나가서 하시죠, 나가서. 보는 눈이 많은데, 저도 연습피칭 끝났으니까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서-”
거기다 불펜 한복판이었거든.
몽롱한 표정을 짓고 있던 다른 투수들도 그의 목소리에 불현든 정신이 든 건지, 조금 웃음기를 머금으면서 우릴 쳐다봤고.
내 연습피칭을 열심히 찍어대던 기자들도, 이것 역시 제법 흥미로운 장면이라고 생각했던 건지 다시금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눌렸다.
그런 시선이 왠지 모르게 쪽팔려서 그를 설득해봤지만.
“지금 자존심이 중요해? Go 네 피칭 매커니즘이 걸린 문제야! 지- 지금 당장은 괜찮을지 몰라도, 나중에 큰 눈덩이처럼 돌아올 수도 있다고!”
씨알도 안 먹혔다.
이미 흥분해서 눈이 돌아간 스콧 에머슨은 내 만류에도 그저 성난 래퍼가 하드코어한 디스를 하는 것처럼 쉬지 않고 쏘아붙였으니까.
괜히 내가 변명하거나, 무언가 말을 할 때마다 더 길어질 것 같으니, 그냥 얌전히 닥치고 듣고 있자.
‘이럴 때는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게 상책이지.’
원래 누가 화났을 때는 맞서 싸우면 안 돼. 그냥 화가 풀릴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야지. 안 그러면 불이 꺼지기는커녕, 점점 커지기만 하거든.
아직 그렇게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어쨌든 인생 열심히 살아오면서 배운 교훈 중 하나이지.
그런 교훈을 지금 상황에 대입시키며, 얌전히 들었다. 대니얼이나 공을 받아줬던 브루스도 마찬가지고. 일종의 공범들이니까.
‘그렉은 방금 전까지는 엄청 흥미롭게 보더니···’
그렉은 조금 멋쩍은 표정으로 딴청을 부렸고 말이야.
어쩔 수 없지. 그가 아무리 위대한 레전드라고 해도, 이런 문제에 끼어들기는 좀 그러니까.
그는 스프링 트레이닝 동안에만 우리 팀에 잠시 머무는 시간 강사나 다름없는 신분이잖아?
투수코치의 위엄을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 존중해줄 수밖에 없는 거지. 약간 괴짜이기는 해도,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은 아니거든.
“하아··· 왜, 왜 이러는 거야? 역사상 최고로 꼽힐 시즌을 보냈잖아? 투수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위업을 여러 번이나 세웠고. 그런데 대체 왜 이런 무모한 짓을···”
한바탕 감정을 쏟아내고 나니, 조금 화가 풀린 건지, 그는 호통 대신 한탄에 가까운 말을 했다.
하긴, 이해가 안 될 수밖에.
이미 정점에 올라선 투수가,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이 판돈으로 걸린 것이나 다름없는 위험한 도박을 한 셈이니까.
“특히나 릴리스 포인트처럼 피칭 매커니즘을 건드렸을 때, 문제가 생기면 그 여파가 얼마나 큰지, Go 너도 잘 알잖아?”
“알죠, 너무 잘 알죠.”
그렇기에 나도 최대한 안전한 방향으로 연습하기는 했지. 기존의 릴리스 포인트에 문제가 가지 않도록 말이야.
허나 그것 역시 완벽하지는 않다. 피칭 매커니즘이라는 게, 대단히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마냥 그렇게 분석만으로는 알 수 없는 영역이거든.
약간의 미세한 차이만으로, 분명 데이터 상으로는 문제가 없는데도, 한순간 모든 게 망가지기도 하지.
마치 수만 번의 테스트를 거친 전자기기가, 고작 미세한 먼지 한 톨 때문에 고장 나는 것처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을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허나 그런 위험을 하나하나 다 고려한다면, 아무런 발전을 할 수가 없다. 그대로 멈추는 거지.
이전에도 말했듯, 발전이 끝나는 순간, 퇴보가 시작되는 거고.
‘더 높은 리턴, 충분히 위대한 성적보다도 더 나은 결과를 바란다면. 어느 정도의 리스크는 당연히 감수해야지.’
도전하고, 성과가 나왔는데도, 리스크가 오지 않는다면, 그저 행운이라고 여기는 거고.
당당한 내 말에 스콧 에머슨은 할 말을 잃은 건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허탈하게 웃었다.
“말은 잘해, 말은. 후우··· 계속할 생각이지? 위험한 길을 계속 걸을 거잖아?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까, 돌이키지도 않을 거고.”
“한번 시작했으니, 끝을 봐야죠. 스콧의 말처럼, 돌이키기에는 늦었어요. 이거 뽕맛이 너무 좋- 아니아니, 성과가 너무 좋으니까요.”
허락하는 분위기 같아서 마음이 누그러진 건지, 나도 모르게 저속한 단어가 나올 뻔했네.
“그러다가 모든 것이 망가지면? 모든 게 무너져버린다면? 지금 당장은 괜찮을지라도, 나중에 문제가 시작돼서, 다시 돌아갈 수가 없어진다면. 그땐 어떡할 거야?”
설득하기 위해서, 겁을 주는 걸까? 아니, 그건 아닐 거다.
설득을 하면 설득을 했지, 괜히 겁을 주는 사람은 아니니까. 그저 순수한 걱정이겠지.
나 역시 어느 정도는 염려하는 문제이기도 하고. 지금까지는 아무런 부작용이 없기에, 그저 숙련도를 높이는 것에 집중하고 있지만.
오히려 완성된 이후에 진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어쩌면 새로운 패턴에 너무 적응해린 나머지, 기존의 것과의 경계가 무너져서, 그가 언급한 대로 피칭 매커니즘이 박살날 수도 있고.
최악의 가정이기는 하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럼 뭐, 망하는 거죠.”
내가 뭘 어쩌겠어?
그냥 얌전히 망해야지.
그 또한 내가 선택의 결과이니. 그저 달게 받아들이는 수밖에.
‘팀한테는 몹쓸 짓 하는 거지만, 그렇게 되면 그냥 이번 시즌은 버리는 셈치고, 다시 차차 시간을 들여서 매커니즘을 잡는 수밖에 없지.’
막말로 내가 한 시즌 정도 망친다고 해도. 내 입지는 흔들리지 않는다.
시간과 커리어를 낭비하는 거지만, 어쨌든 지금 나는 최소한 앞으로 10년 정도는 메이저리그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러니 어떤 의미에선, 나한테는 아예 리스크 자체가 없는 셈이지.
뭐, 내가 잘해준다는 보장 하에 모든 걸 준비한 애슬레틱스는 피눈물을 흘리겠지만.
“참··· 대단하다. 대단해. 아주 속이 편하셔? 누구 때문에 나는 죽을 맛인데.”
“에이, 저도 당연히 걱정은 되죠. 하지만, 그럴 일 없게 만들면 되는 거죠. 시범경기 동안 열심히 해봅시다.”
태평한 말에 어이가 없어진 건지, 스콧 에머슨은 오히려 화가 풀린 것 같았다.
한계 이상으로 황당하니까, 황당함이 다른 감정까지 모두 억눌러버린 거지.
그래도 인상을 안 쓰니까 얼마나 보기 좋아? 너무 얼굴 붉히지 마요. 그러다 고혈압으로 쓰러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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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석과 투수코치가 첫날부터 대립했다는 소문은 채 한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힘껏 소리치는 스콧 에머슨의 모습을 담은 카메라가 무수하게 많았으니까. 보는 눈도 적지는 않았고.
“Go랑 투수코치랑 다투다니···”
“뭔가 걱정하는 눈치던데. 혹시 Go한테 문제라도 있는 거 아니야?”
“아까 전에 막 경기장으로 들어갈 때는 표정이 밝아 보이던데?”
기자들은 저마다 삼삼오오 모여, 그에 대해 이야기했다. 분명 엄청난 기삿거리였으니까.
리그를 뜨겁게 달아올렸던 슈퍼스타가, 다른 것도 아니고, 스프링 트레이닝 첫날부터 코치, 조금 더 과장하자면 구단과 언쟁을 벌인 것이니까.
어떤 방향으로 엮더라도, 충분히 기삿거리가 될 만한 소스지. 허나 그 이유가 불분명하기에 그저 추측이나 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렇기에 몇몇은 고유석과 그 일행이 사라져, 잘 보이지 않는 훈련장 내부를 궁금함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기도 했고 말이다.
“무슨 일일까요? 작년만 하더라도 고유석이랑 투수코치가 잘 맞지 않았던가? 혹시 선배는 뭔가 짐작 가는 거 없으세요?”
“글쎄···”
그리고 그건 박기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작년처럼, 고유석을 담고, 이슈를 잡기 위해 피닉스로 왔더니. 전혀 예상치 못한 걸 봐버렸으니까.
일 년 새, 수습 딱지를 떼고, 그와 함께 사실상 미국 전담팀이 되어버린 부사수 역시 의문에 사로잡힌 것 같았고 말이다.
허나 사실 엄밀히 따지면, 그와 박기자 조금 궤를 달리했다. 의문을 품은 것 자체는 똑같지만, 그 방향이 약간 달랐으니까.
‘뭔가가 확실하게 있단 말이야. 중간에 연습피칭을 끊고, 재개한 뒤에, 묘한 느낌이 들기도 했고.’
그를 의아하게 만든 것은 연습피칭에서 고유석이 보여준 모습이었다. 무언가, 느낌이 달랐으니까.
아마 투수코치를 분노 혹은 흥분하게 만든 것 역시 그것과 관련이 있겠지. 그게 대체 뭐냐는 것이 문제겠지만.
“그래도 불펜피칭하는 모습을 보니까, 엄청나던데. 폼은 작년이랑 비슷했었죠?”
“그래, 그나마 다행이지. 죄다 고유석 하나만 보고 있는데, 무조건 잘 해줘야 하니까.”
그나마 한 가지 명확한 것은, 모두가 우려 혹은 기대했던 것처럼, 고유석이 무너진다거나, 망가진 것 같지는 않다는 거였다.
‘정말··· 엄청났지. 작년처럼.’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이슈로 인해, 주목받지 못했지만, 고유석은 첫날부터 작년, 비슷한 시기에 선보였던 것과 비슷한, 아니, 더 강력한 공을 뿌리며, 자신의 건재함을 제대로 선보였다.
그때처럼 신선한 충격이 없고, 더 큰 이슈가 있었기에 조금 잔잔할 뿐이지, 최소한 몇몇 언론에서 겨우내 열심히 떠들어대던, 부상이라거나, 혹사의 후유증 같은 건 모두 폐기처분 된 것이나 다름없지.
한국의 경우, 대부분 한국인 메이저리거가 실패를 경험하는 중이고, 그나마 류영진마저도 부상 이후 첫 시즌이 그리 밝지는 못하면서, 올해 역시 난항이 예상됐으니.
그 어느 때보다도 고유석이라는 슈퍼스타가 중요한 만큼 그의 폼이 멀쩡하다는 것만으로 굉장히 희소식이지.
“사진 잘 찍었지?”
허나 그 정도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더 큰 것이 느껴졌으니까.
“네, 혹시 몰라서 연속 촬영으로 쫙 찍었어요. 하나 건져야죠.”
“그래, 잘했네. 그거 잠깐만 좀 보자.”
“? 예, 그러세요.”
사진 촬영을 담당한 부사수에게서 거의 카메라를 뺏다시피하며 넘겨받은 박기자는 거의 똑같은 동작이 수십 장씩 반복되는 사진을 꼼꼼하게 훑었다.
강력한 모습을 봤으니 충분하다고는 해도, 역시 제대로 확인은 해야 했으니까.
이 미묘한 느낌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를.
“앞에 있는 사진이 다시 연습피칭 재개했을 때지? 더 뒤에 있는 게, 끊고 가기 전에 피칭이고.”
“어, 네. 왜요?”
그렇게 한참이나 카메라에 저장된 사진을 들여다보던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다시 세세하게 촬영된 사진으로 확인하니, 제대로 눈에 보였으니까.
투수코치가 방금 전처럼 그토록 격렬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
그리고 그 역시 걱정과 기대로 흥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마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것 같은, 몇몇 다른 기자들도 확인한 것 같고.
‘위험한 짓을 저질렀어. 리그 최고의 투수가, 그것도 역사상 최고의 시즌을 보낸 투수가 이런 도박을···’
불펜피칭 중간, 대화를 나눈 건지 있었던 약간의 텀.
그것을 중심으로 따로 떨어진 두 번의 피칭은 서로 달랐다. 그래, 다르다. 위력이나 그런 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그냥 다르다.
투구폼이나 팔의 각도가 달라진 건 아니기에,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만약 이것이 실전 피칭이고, 타석에 타자가 있었다면, 그 차이점을 타자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겠지.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야구로 밥 벌어 먹고사는 만큼, 박기자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대단히 위험하면서도···
‘가능하기만 하다면, 굉장히 효과적이겠지.’
작년 고유석은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줬다. 탁월한 수싸움도 선보이며, 농락하기도 했고.
하지만 이것이 정말로 실현되고 완성되어 경기에서 펼쳐진다면. 올해는 굳이 수싸움까지 가지 않더라도 모든 타자가 그 앞에서 바보가 될 거다.
‘어쩌면 작년 이상일지도.’
종종 이런 예측을 한 기사를 보며, 같은 기자인데도 이건 조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진짜가 될지도 모르고.
“23일이지? 첫 번째 시범경기 날짜가.”
그렇게 확인을 마친 박기자는 부사수에게 조금은 흥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 아니, 그냥 흥분했다. 굉장히 몸이 닳기도 했고.
“네? 네, 아마도 그랬어요.”
“X발 더럽게 오래 남았네.”
미치도록 보고 싶었으니까.
정말로 마운드 위에서, 실전 피칭에서 이런 미친 짓거리를 실현시키는 고유석의 모습이.
오늘이 스프링 트레이닝의 첫날이라는 것이, 아직 시범경기조차 한참이나 남았다는 것이 야속하게 느껴질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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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ck! 여기 있었네. 근데, 무슨 일이야? 듣기로 너랑 스콧이 엄청 싸웠다며? 그것도 불펜에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
“문제는 무슨, 그냥 서로 간의 의견차이지.”
“에이, 그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아까 보니까, 스콧 표정이 장난이 아니더만.”
내가 투수코치와 대판 싸웠다는(?) 소식은 금방 캠프 전체에 퍼져나간 것 같았다.
스콧 에머슨이 날 포기하고, 투수코치로서 업무를 보기 위해 사라진 이후.
하나둘, 속속들이 합류한 다른 동료들이 날 볼 때마다 매번 저 말부터 하는 걸 보면 말이야.
지켜보던 눈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온 동네방네 다 퍼트렸겠지.
좀 억울하네. 싸우긴 누가 싸워? 일방적으로 혼났구만.
“의견차이라니까, 별일 아니야.”
“별일이 아니기는 무슨··· 그게 어떻게 별일이 아니야? 내가 코치였어도 뒤집어졌겠구만.”
“오, 매덕스 씨, 올해도 인스트럭터 맡으신 거예요? 올해는 Suck 말고 저도 좀···”
“봐서, 몇 가지 조언 정도는 해주지.”
그래도 대화 자체는 잘 끝났다.
어차피 직진 밖에는 답이 없다는 걸 깨달은 건지, 스콧 에머슨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더 뭐라고 하지는 않았으니까.
어쩌면 그렉을 믿는 걸 수도 있지. 현역 시절 가장 아름다운 투수 매커니즘을 보여준 선수니 말이야.
내가 엇나가더라도 어떻게든 그가 도움을 줄 거라고 믿은 거겠지. 물론 본인 역시 도움을 줘야 할 테고.
“그래서, 완성도는 얼만큼 돼? 아까 보니까 제법 커맨드는 제법 잡힌 것 같던데.”
그런 스콧 에머슨의 기대처럼, 그렉은 대단히 의지를 선보였다. 이렇게 흥분한 모습은 또 처음이네.
눈치 볼 사람이 없어져서 그런지, 아까 전 한창 혼날 때만 하더라도 딴짓하던 그렉은 다시금 흥미가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목소리에도 궁금함을 가득 담아서.
“아직 완성까지는 아니고, 기존의 릴리스 포인트랑 비교하면, 구종마다 타점에 약간씩 차이가 있어요. 커맨드도 더 잡아야 하고.”
“구종마다 차이가 있다고?”
내 답변에 그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대단한 투수인 만큼, 그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 그 역시 잘 아는 거겠지.
특히나 그도 어느 구종이든 일정한 릴리스 포인트가 장점 중 하나였던 투수니까 말이야.
“그러면 좀 위험한 거 아니야? 완전 다른 투수가 올라오는 셈이니까, 효과는 확실하겠지만. 구종이 읽히면 결국 다 소용없을 텐데?”
“그러니까, 차차 잡아가야죠. 살짝 오차가 있는 정도인데, 연습할수록 계속 줄어들고 있어요. 더 경험을 쌓으면 처리가 되겠죠.”
“뭐, 커트 앵글 네가 괜히 허세를 부리는 놈은 아니니까. 감도 좋고. 그럼 큰 문제는 없겠네.”
마지막 걱정까지 해결되자, 그는 다시금 흥분감이 감도는 미소를 지었다. 약간 신기하다는 것처럼 보기도 했고.
“크~ 나도 한번쯤 상상은 해봤었지. 다른 투구폼, 다른 릴리스 포인트로 던지면, 타자들이 어떻게 될지. 상상만 했는데, 그걸 진짜로 하는 미친놈이 있을 줄이야.”
그는 마치 꿈이 이뤄진 것처럼 굴었다.
하긴, 투수 맞춤용 동화같은 일이잖아?
오른손으로 던지다가, 좀 지친다 싶으면 왼손으로 던지는 스위치 피처라거나. 흑마술사처럼 타자마다 다른 투구폼을 선보이며 상대한다거나 하는 거 말이야.
물론 내가 준비한 게 좀 쇼킹하긴 해도, 그 정도로 미친 짓거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엇비슷하기는 하지.
어찌됐든 서로 다른 투수가 한 몸에 공존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거니까.
“부작용이 없다니 다행이지만, 그럴수록 더 조심해. 위험한 일이니까.”
“네, 조심해야죠. 코치의 말처럼 피칭 매커니즘이-”
“아니아니, 그거 말고.”
클클 웃더니, 대뜸 주의를 주는 그렉에 잘 알겠다는 식으로 대충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는 그게 아니라는 듯 턱을 까딱거렸다.
“솔직하게 말하면, 난 그런 쪽으로는 걱정 안 해. 넌 감이 좋은 타입이거든. 작년에 스스로 구질을 둘로 나눈 것만 봐도 알아. 그러니, 길을 잃지는 않겠지.”
오, 좀 감동이네.
왠지 뿌듯하기도 하고.
그렉 매덕스한테 인정받은 거잖아?
칭찬도 야박하신 양반이 웬일인가 몰라.
“그럼 뭘 조심하라는 건데요?”
“다른 투수들에게 넌··· 쯧, 내 입으로 말하려니까, 배알이 꼴리지만, 어쨌든 커트 앵글 넌 아이콘이야. 모든 투수들의 이상이고.”
그만해요. 칭찬도 너무 들으니까, 거북하네. 아까 전만 하더라도 시큰둥하시더니. 이젠 거의 비행기를 넘어서, 우주 왕복선을 태워주시는구만.
그래도 대충 알 것 같았다.
그가 말한 위험의 주체가.
“즉, 네가 무슨 짓거리를 할 때마다 따라하는 놈들이 생긴다는 거야. 특히 어린애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린스컴 알지? 걔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잘 알죠. 우리나라에서도 그랬거든요. 다들 따라 하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내가 아니라, 다른 투수들이라는 것을.
음, 설명하자면, 팀 린스컴이라고 있다.
아마 다들 알 거야.
2년 연속 사이 영 상 수상이라는, 정말 불꽃같은 전성기를 보냈던 선수니까.
특히나 그 역동적이고 화려한, 아주 멋들어진 투구폼이 특징인 선수인데.
그 간지에 홀려서 그 투구폼을 따라하다가, 어깨나 허리가 박살난 사람이 적지 않다.
“너도 마찬가지야. 커트 앵글 너 따라하다가 매커니즘 조지는 놈들이 속출하겠지.”
“그거야 뭐··· 어쩔 수 없죠.”
나도 비슷할 거다. 내가 이런 걸 처음 선보이고, 그게 성과를 내기 시작하면, 분명히 따라하는 놈들이 생길 거라는 거지.
모든 전문가가 위험하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던 린스컴의 투구폼을 따라한 사람들처럼 말이야.
실제로 이미 제법 소문이 들리기도 했고. 서클 체인지업이랑 너클 커브가 아주 유행이라더라.
원래도 유행을 타는 구종이긴 했는데, 내가 거기에 기름을 부어버린 셈이지.
“그러니까, 선 잘 그어. 이게 잘 먹히기 시작하면, 아니 무조건 먹힐 테니, 분명히 참고하겠다는 둥, 나도 연마하겠다는 둥 할 텐데. 그때마다 확실하게 말해.”
“뭐라고요?”
“이건 나밖에 못 하니까, X도 아닌 네놈들은 절대로 따라하지 말라고. 그래야 인생 조지는 놈들이 좀 줄어들 테니까.”
농담하는 줄 알았는데, 그는 생각보다 표정이 진지했다. 애멋 짓 하다가 꺾이는 투수가 많아지는 걸 원치 않는다는 거겠지.
“···일단은 알겠는데, 그렇게 광역 도발하면 오히려 더 따라하지 않을까요?”
“그때는 그놈들 잘못이지. 넌 만류한 건데 괜히 따라하다 망한 거니까. 뭔 상관이야?”
아무튼 무슨 뜻인지는 잘 알겠네.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니, 흡족하게 웃은 그는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뭘 좀 도와줄까? 솔직히 릴리스 포인트처럼 민감한 건 아무리 나라고 해도 터치하기 좀 애매해. 사람마다 감각이 다르니까. 조언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아니면 저번처럼 커맨드 잡는 것 좀 도와줘? 뭘 원해?”
“···그러게요?”
“응?”
그러고 보니, 그렉을 어디에다가 쓰지? 이 영감님은 원래 계획에 없었거든,
애초에 인스터럭터가 된 줄도 몰랐어. 오늘 보고 안 거지. 원래 내 계획은 마크 벌리였다니까?
그에게 투구 인터벌의 노하우를 배우는 거였는데, 그가 거절하고, 릴리스 포인트라는 새로운 것이 생기면서, 내 머릿속에서 인스트럭터는 지워졌다.
“뭐··· 할 일 없으시면 말동무나 해주세요. 그거 말곤 딱히 생각이 안 나네.”
“···날 말동무로 쓰겠다고? 이 그렉 매덕스를? 뭐 배우고 싶은 거 없어? 다른 투수들은 바짓가랑이 잡을 텐데? 작년에는 제발 가르쳐달라며 사정사정 하더니.”
“본인 스스로 말씀하셨잖아요. 솔직히 더 가르칠 게 없다고. 커터, 투심, 마인드, 시즌 운영. 심지어 수비까지. 죄다 작년에 배웠는데 여기서 뭘 더···”
그의 말처럼, 사람마다 개개인의 감각이 다른 만큼, 그가 아무리 위대한 투수라고 해도 솔직히 그쪽으로는 큰 도움을 받지 못한다.
그리고 까놓고 말해서, 나도 비슷한 타입이잖아? 투구폼 부드럽고, 기존 릴리스 포인트에 한해서 구종들 대부분 거의 일정하고.
그러니 이 경우는 오히려 내 몸이니까, 노하우 자체는 내가 더 많다고 할 수 있지.
애초에 노하우고 나발이고, 경험과 반복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고.
음,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기는 한데. 막상 되게 쓸데가 없네.
“뭐, 배울 만한 게 더 없는가, 천천히 생각해볼게요.”
그래도 그렉 매덕스니까.
더 배울 게 하나쯤은 있겠지.
아, 그러고 보니 마침 생각나는 게 하나 있네.
“아! 어떻게 해야 22년씩이나 메이저리그에서 던질 만큼 롱런해요? 비법이라도 있어요?”
22년이나 메이저리그에서 선수생활 할 만큼 위대한 내구성 말이야. 이건 꼭 배워야지.
그런 의미에서 물어봤지만···
“응? 있긴 뭐가 있어. 그냥 타고난 거지. 놀란 라이언 나, 제이미 모이어. 다 그래. 타고나야 돼. 몸 관리야 네 옆에 있는 트레이너가 나보다 더 잘 알 테고. 딴 거 궁금한 건 없어?”
돌아오는 대답은 시원찮았다.
그치, 뭐가 더 있겠어. 내구성이야 그냥 타고나는 거지. 철저하게 자기 관리하면서 말이야. 그럼 뭐, 딱히 다른 거 궁금한 건 없고, 그냥 말동무나 하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