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작년보다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은데?”
“훨씬 많지. 거의··· 두 배, 아니 그 이상일지도.”
1년여 만에 다시 찾은 호호캄 스타디움은 생각보다 사람이 더 붐볐던 작년과 비교하더라도 훨씬 더 많은 숫자의 인파가 몰려 있었다.
최소 두 배, 어쩌면 훨씬 더.
당연히 대부분은 애슬레틱스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지.
기자라던가, 기자라던가, 아니면, 기자라던가.
‘인천 공항이랑 비슷하네.’
시즌 종류 이후 모든 상을 다 휩쓴 뒤, 일정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입국장부터 기자가 쫙 깔렸었는데.
어쩌면 그때와 비슷한 숫자의 기자들이 주차장 근처를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배회했다.
당연히···
“아침 일찍부터 주인공을 기다린 것 같군요.”
그런 맹수들이 노리는 먹잇감 중 메인디쉬가 나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고 말이야.
그 압도적인 무리에 브루스는 조금 기가 질린 건지, 약간은 꾹 눌린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브라이언은 이미 일찌감치 예상했던 건지, 딱히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인파에 휩쓸리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제가 먼저 앞장설 테니, 바짝 붙어서 따라오시면 됩니다.”
다만, 그저 조금 더 강하게 주의를 줬을 뿐.
혹시라도 저 엄청난 인간의 파도에 내가 익사하지는 않을까, 염려스러운 거겠지.
“난 먼저 가볼게. 너랑 같이 가면, 나도 같이 중간에 끼여서 못 들어갈 것 같아.”
“그래, 그러는 게 낫겠네. 나중에 연습 피칭 때 보자.”
“오케이, 먼저 가서 몸 풀고 기다리고 있을게. 캬~ Suck 니가 겨울에 무슨 짓을 한지 알면, 다들 놀라서 자빠질 거야. 상상만 해도 흥분되네.”
니가 왜 흥분해.
당사자인 내가 멀쩡한데.
물론 나도 기대가 되기는 했다. 약간 걱정도 있었고.
‘생각해보니, 엄청 민감한 문제인데, 구단이랑 사전에 대화도 안 나눴네.’
팀의 에이스, 그것도 그냥 적당한 1선발이 아니라,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에이스가. 오프시즌 동안 자신들과 아무런 상의도 없이, 릴리스 포인트를 만진다는, 대단히 위험한 일을 벌였을 때, 구단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야 당연히···
‘아무 말도 못 하지.’
그냥 두고보는 수밖에.
뭐, 어쩌겠어? 나만큼 잘하면 구단이고 나발이고 무조건 선수가 슈퍼갑인데. 걱정은 하겠지만, 별다른 말은 못할 거다.
물론 나중에 밝혀지면, 스콧 에머슨은 기겁하고, 나는 그의 눈치를 좀 보겠지만, 뭐, 그래도 성과가 있으니까.
“휘유~ 난 언제쯤 저렇게 사람들을 몰고 다니려나. 여기 브루스 맥스웰이 왔는데, 저한테 관심 있는 사람은 없어요?”
먼저 차에서 내린 브루스는 곧 인파 속으로 사라졌고, 잠시 시간차를 준 뒤, 우리도 뒤따라서 내렸다.
누군가 차에서 사람이 내릴 때마다, 주변을 걸어 다니던 기자들은 미어캣처럼 목을 쭉 빼냈다.
“어? 저거 Go 아니야?”
“맞는 것··· 같은데? 뭐해! 빨리들 움직여!”
“이른 아침부터 기다렸더니, 드디어 왔네! 빨리, 빨리 카메라 들어!”
그들이 그토록 목이 빠지게 기다렸던 사람이 내가 맞는 건지, 금방 알아본 이들이 몰려들었고.
우르르 달려온 선발대로 인해, 마찬가지로 낌새를 감지한 다른 이들도 뒤이어 뛰어왔다.
“Mr.Go, 이번 시즌 목표가···”
“빌리 빈 사장이 월드시리즈 우승을 언급했는데, 혹시 Go의 생각은···”
“고유석 선수, 올해 열리는 아시안게임에 참가하실 계획이···”
개판이네, 개판이야.
아무래도 시즌 이후, 스폰서나 광고 같은 스케쥴 소화한 이후로는 그저 빡세게 훈련이나 하면서, 미디어와의 접촉을 끊었더니.
더욱더 애가 탔던 건지, 기자들은 광분한 듯 눈을 뒤집으며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작년처럼 좋은 성적을 내고 싶습니다.”
“사장님은 팀의 대표자이시고, 구단 모두의 생각은 그분과 같습니다. 저도 그렇고요.”
“국가대표의 자리는 정말 영광이겠습니다만,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질문을 빠르게 해치우며 뚫고 들어갔고, 대니얼과 브라이언은 트레이너와 에이전트 대신 보디가드를 자처하며, 돌파를 도왔다.
그렇게 한바탕 난리가 난 주차장을 지나, 이젠 팬들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공간까지 도달했는데···
‘뭐지? 묘한 기시감이···’
뭔가, 데자뷰가 느껴졌다.
대단한 사람이라도 본 건지, 어딘가 한쪽으로 우르르 몰려서, 누군가를 둥글게 둘러싼 팬들.
개중에는 레이더스도 있었다. 이건 그래도 작년이랑 다르네. 작년, 이맘때 호호캄에서 애슬레틱스 팬들이 제법 많이 돌아다녔지만.
그때까지는 레이더스는 애슬레틱스로 넘어오지 않았었으니까. 그러니 좀 다르긴 한데, 뭔가 이상하게 익숙하단 말이야.
경기장 앞에 바글거리는 팬들. 그들에게 둘러싸인 누군가. 영광이라는 듯한 사람들의 눈빛.
모두 다 작년, 정확하게는 364일 전에 본 적이 있는 풍경이었다. 다만 사람들의 눈빛에 영광이 아니라, 왠지 모를 진한 애정도 담겨 있다는 것이 좀 다르기는 했지만.
‘혹시···’
어쨌든 비슷한 풍경을 보니, 저 인파에 둘러싸인 남자의 정체도 조금 예상이 됐다.
“매덕스 씨! 아주 잘 어울리시는데요?”
“예예, 현역 때도 안 입어본 놈이라서 그런가, 좀 어색하지만 나쁘지 않군요.”
“이번에도 Suck을 잘 부탁합니다! 작년처럼 그를 돕고 지도해줘요! 부디 더 잘할 수 있도록!”
“거기서 더 잘해질 수 있으면 그건 좀 신기할 것 같은데···”
그래, 이럴 줄 알았어.
“그렉, 여기서 뭐 해요?”
“엉? 아! 커트 앵글! 너 때문에 사람들이 바글거리잖아. 좀 진정 좀 시켜봐. 제기랄, 이렇게 애슬레틱스가 날 사랑할 줄 알았으면, 현역 때 애슬레틱스에서도 한번 뛰어보는 건데.”
그렉 매덕스.
선거유세 중인 정치인처럼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던 그는 나를 보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거,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래서, 오클랜드 시장 출마는 언제 하십니까? 이젠 아예 우리팀 유니폼도 입으셨네.
대충 눈치를 봐서는 꽤나 과할 정도로 열정적인 우리 팬-거의 99% 확률로 레이더스겠지-이 강제로 입힌 거겠지.
이것도 작년이랑 비슷하구만.
다만 조금 다른 게 있다면.
“Go? Go다! Go! 계속 기다렸어요!”
“너 보려고 내가, 애리조나까지 왔어! 애리조나까지!”
“Suuuuuck!”
“너무 보고 싶었어!”
“X발 이렇게 길었던 겨울은 처음이었다니까!”
“크하하하, 올해도 X나게 잘하자, Suck!”
작년의 경우 사람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올해는 바로 알아보고는, 그렉을 버린 채 나한테 몰려들었다는 거겠지.
“뭐야, 방금 전까지 좋다고 악수할 때는 언제고, 주인공 왔다고 바로 버리네.”
그렉은 방금 전까지 자신을 칭송하던 이들이 밀물처럼 빠져나가 한산해진 주변에 헛웃음을 흘렸다.
[힘의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이게 바로 퍼펙트를 해본 자와, 못 해본 자의 차이다.
“···뭔가 X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눈치는 여전히 귀신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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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 남발과 사진 촬영을 통해 사람들을 진정시킨 뒤, 간신히 호호캄에 입성했다.
브라이언은 에이전트인 만큼, 돌아갔고, 대니얼은 함께했지.
“올해도 그렉 매덕스를 만나다니··· 작년이야 미리 듣기는 했었지만··· 올해는 머치 서프라이즈 선물 같군요.”
“이번에도 제 트레이너를 맡은 게 영광이에요?”
“물론이죠.”
그래, 또 이런 반응이군.
우리의 성공한 덕후께서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올해도 아주 행복에 겨운 표정을 했다.
그토록 열렬히 사모하는 그렉 매덕스를 2년이나 연속으로 만나게 된 것이 정말이지 믿기지 않는다는 것처럼.
“커트 앵글 너 때문에 진짜 더럽게 힘들단 말이야. 여기저기서 코치하라고 징징징. 컵스나 브레이브스는 왜 자기네 투수는 그렇게 안 키워주냐고 징징징. 심지어 카디널스에선 형까지 이용해서···”
다만 그의 히어로는 그저 한탄하기 바빴지만 말이다.
오래간만에 만난 그렉은 하고픈 이야기가 많은 것 같았다. 클럽하우스로 가는 내내 나한테 토로했으니까.
나 때문에 본인이 얼마나 귀찮은 상황에 놓였는지를.
‘하긴, 많이 귀찮기는 하겠네. 서른 개 구단에서 죄다 코치 제안이 왔을 텐데.’
어쩔 수 없다. 나랑 관련된 사람들은 죄다 이렇게 됐거든. 야구부 감독님도 그랬잖아? 프로 씬에서도 제의가 계속 오고 있다고.
투덜거리는 그렉 매덕스를 신성하게 여기며 말없이 지켜보는 중인 대니얼도, 그에게 제안을 보낸 스포츠 스타가 한 가득이지.
그들도 그 정도인데, 그렉은 오죽하겠어? 무려 그렉 매덕스인데 말이야.
원래도 레전드 투수로서, 각종 러브콜을 받던 사람인데, 그의 제자 비스무리한 내가 역대급 성적을 내버렸으니.
만약 그에게 각 구단의 프런트가 아무런 제안을 하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직무유기나 다름없다.
‘본인은 그런 관심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것 같지만.’
아들이 뛰는 대학교에서 코치하는 것만 보더라도, 그는 그냥 편하게 안빈낙도를 누리고 싶어 하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을 온 야구계가 못살게 굴고 있으니 그저 귀찮기만 하겠지만.
“예예, 거참 제가 너무 잘나서 죄송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적당히 잘하는 건데. X나게 잘해버려서, 그렉한테 피해가 갔네요.”
“···커트 앵글 너 못 보던 새에 싸가지가 많이 없어졌다? 아니지, 원래도 싹수가 없긴 했지. 그 빌어먹을 놈의 퍼펙트게임 할 때마다 자랑질한 것만 봐도.”
“에이, 그건 그냥 기쁜 소식을 전해준 거죠. 그렉은 못해본 거잖아요? 그것도 무려 22년이나 되는 커리어를 보내는 동안 단 한 번도. 단 한 번도요.”
단 한 번도, 라는 단어를 굳이 강조해주니, 그렉의 얼굴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는데, 아주 보기가 좋군.
한때 동경했고, 지금도 동경하고, 나보다 훨씬 선배이자 모든 투수의 귀감인 레전드를 놀리는 게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나는 그에게 약간의 유감이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이 양반이 문제였거든. 내가 루키 헤이징 데이 때 레슬링 복을 입은 거 말이야.
지금처럼 작년 캠프에서 매번 그가 날 계속 커트 앵글이라고 부르니까, 그렇게 된 거잖아.
난 쪼잔한 사람이야. 아주 소심하지. 그렇기에 내게 엿을 먹은 사람을 절대로 잊지 않는다.
“이런 새파랗게 어린놈한테 이딴 소리 들을 줄 알았으면, 어깨가 박살나는 한이 있어도 한 번은 하는 건데···”
심한 현타감을 느끼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조금 풀리는구만. 물론 어디까지나 장난이다.
통화야 작년 시즌 중에도 종종 했었지만, 간만에 얼굴 보니까, 왠지 기분이 좋네.
“미리 연락이라도 주시지 그러셨어요? 이번에도 인스트럭터죠? 까맣게 모르고 있었네.”
“뭐 대단한 일 맡았다고 연락 씩이나 해? 이것도 억지로 맡은 건데. 어느 유니폼이라도 하나 입고 있어야, 더 귀찮게 안 굴겠지.”
그렇게 말하며 그는 혀를 끌끌 찼다. 자기 일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것처럼.
“일단 인스트럭터를 맡기는 했는데, 솔직히 커트 앵글 너한테 뭘 더 가르치겠냐? 내가 전성기 시절에 3년 걸쳐서 찍은 성적을 한 번에 찍은 놈인데. 투심이나 커터는 이미 가르쳐줬었고.”
“그래도 아직 한참은 멀었죠. 그리고 이번에도 도움이 필요한 게 있고요.”
“왜? 올해는 겨울 동안 서클 체인지업이 플라나리아처럼 또 증식했어? 이젠 세 개야? 아니면 그 커브인지 슬러브인지가 두개가 된 건가? 오, 아니지, 그래, 구속이군. 맞지? 작년엔 구위였으니, 이번엔 구속이 한 100마일 찍었어? 그건 좀 놀랍겠네.”
내 말에 그렉은 그저 코웃음을 쳤다. 내가 오프시즌에 뭘 준비했든지 간에, 작년만큼 쇼킹하지는 않을 거라는 거겠지.
갑자기 구위가 급상승하면서 그의 마음을 돌렸고, 그러다가 또 갑자기 두 가지의 서클 체인지업을 선보이며, 그에게 커맨드 잡는 법까지 배웠으니 말이야.
그렇기에 그는 조금 시큰둥한 반응이었지만, 글쎄···
‘솔직히 이쪽이 더 놀라울 것 같은데.’
단순히 구종 하나를 더 추가하는 정도가 아니라, 피칭의 매커니즘 자체를 바꾸는 문제니까 말이야.
시큰둥한 모습을 보니, 오히려 나중에 있을 그의 반응이 더욱더 기대됐다. 아주 놀라 자빠졌으면 좋겠네.
“공부터 보자, 어디, 역사상 최고라는 그 잘난 공을 다시 한 번 봐야겠어.”
“일단 코치들한테 인사부터 해야죠. 감독님도 봬야 하고요. 작년에도 마음대로 굴었는데, 올해까지 그럴 수는 없죠.”
“오~ 드디어 예의라는 게 생겼구만. 작년에는 내 얼굴에 홀려서 냉큼 불펜으로 졸졸 따라오더니, 많이 컸어. 이래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단 말이야. 겸손하니 보기 좋네. 잘나간다고 정말로 싹수가 없어졌을까봐 걱정했더니. 다행이네.”
대단히 의외라는 것처럼 눈썹을 씰룩거렸는데, 음, 그렉의 머릿속에 내가 어떤 이미지인지 아주 잘 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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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는 되게 일찍 왔네?”
“레귤러 선발 투수 중에선 제일 먼저 온 거 맞지? 다른 사람은 안 보이던데.”
“아직은 루키에 가까우니까, 아마 일찍 온 거겠지.”
“사실 2년차기는 해도, 저게 루키인가 싶기는 하지만.”
투수&포수조의 합류일인 만큼, 호호캄에는 당연히 투수들만 가득했다.
포수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투수가 훨씬 많지. 그게 당연한 거고.
물론 캠프에 초청된 야수진 중 몇몇 이들 또한 투수조 합류일에 맞춰, 그들의 일정보다 일찍 캠프에 입성하기도 했다. 일찌감치 팀에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
그렇게 여러 사람이 모여 어우러져, 꽤나 가득해진 호호캄 스타디움에서, 대다수의 이들의 입에 거론되는 건 당연히 Go였다.
역사상 최고의 시즌을 보낸 선수가 아닌가? 특히나 현재까지는 캠프 인원의 대다수를 자랑하는 투수들에겐 동경하거나,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선수고.
투수라면 누구나 염원하는 사이 영 상과, 루키들의 꿈인 신인왕, 모든 야구 선수들의 최종 목표인 MVP를 단 한 시즌 만에 거머쥔 괴물이니까.
그런 선수가 생각보다 일찍, 이른 아침부터 캠프에 합류했다는 소식은 금방 퍼져나갔다.
“올해도 작년만큼 잘할까?”
“모르지, 솔직히 235이닝이나 던졌는데, 어깨가 남아나겠어?”
“어쩌면 구속이랑 다르게 내구성은 놀란 라이언처럼 타고났을 지도 모르잖아?”
“내가 Go보다 구속은 훨씬 빠른데, 어쩌면 나도···”
“꿈 깨라, 꿈 깨. 구속이 문제냐? 그 괴물 같은 브레이킹볼이 있는데.”
몇몇은 대단히 도발적인 생각을 하기도 했다. 특히나 어리거나 젊은 선수들은 더더욱.
작년, 스프링 트레이닝의 라이징 스타로 떠올랐던 그처럼, 자신 역시 그렇게 화려하게 등장해, 구단을 사로잡아, 역사를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물론 터무니없는 말이라는 건 본인들이 가장 잘 알았지만, 모르는 일이잖은가?
또 한편으론 작년, 2017년을 뜨겁게 불살라버렸던 그토록 위대한 투수가 과연 얼마나 잘나셨을지, 조금 궁금해하기도 했고 말이다.
“완전 대우가 딴판이네··· 우리는 대충 훑기만 하더니.”
“야야, 바랄 걸 바래라. 1선발 에이스, 그것도 사이 영까지 수상한 에이스인데. 대우가 똑같으면 그게 이상하지.”
“쩝, 나한텐 신경도 안 쓰겠네. 열심히 던지려고 했더니, 쳐다도 안 보겠구만.”
그걸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메이저 투수코치, 그렉 매덕스, 그리고 누군지 모르겠는 남자 한명과 함께, 그가 불펜으로 들어왔으니까.
“자자, 빨리빨리 찍어.”
“Gofd 매덕스 같이 나오도록, 포커스 잘 잡으라고.”
“아, 무조건 아까전에 인터뷰를 땄어야 하는 건데···”
당연하게도 불펜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기자들은 단 한 장면도 놓칠 수 없다는 것처럼 재빠르게 카메라를 찰칵거렸고.
순수하게 애슬레틱스의 팬 혹은 관광객으로서 왔던 이들 또한 휴대폰 카메라로 찍거나, 잔뜩 흥분했다.
“와··· 진짜 Go네.”
“지나가는 척하면서 가까이서 볼까?”
“옆에는 그렉 매덕스 맞지?”
“어, Go가 매덕스 제자잖아.”
“코치보다 저쪽이 진짜 아니야? 혹시 알아? 나도 매덕스한테 배우면, 저런 실력을 가지게 될지.”
물론 선수들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았고 말이다. 기존에 불펜에 있었던, 아니면 워밍업 겸 스트레칭을 하던 중이든지 간에.
그가 불펜에 들어가는 모습을 본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사람이 몰렸다.
보고 싶었으니까. 그토록 대단하다던 피칭을.
이미 티비 화면으로, 그리고 각종 기사로서 그 강력함이야 충분히 보고 들었고, 위대한 성적도 봤지만. 그래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과는 다를 테니까.
“작년에도 엄청났었지. 초구 던지자 마자, 다들 쳐다볼 정도로.”
“아마 올해는 그때보단 좀 덜할걸? 그때랑 입지가 달라졌으니까. 이번엔 적당히 살살 던지겠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엄청난 걸 볼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저 정도의 투수, 한 팀의 에이스씩이나 되는 선수이니, 정규시즌도 아니고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전력을 보여줄 리는 없었으니까.
그래도 그 느낌이나마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에 아닌 척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시선이 향했고, 은근히 주변을 맴돌았다.
그리고 마침내 투구판 위에 선 순간, 여기저기서 꿀꺽-하고 침을 삼키는 소리가 이어졌다.
마이너리거들의 경우 무언가 배울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 눈을 부릅뜨기도 했고.
그런 긴장감 속에서 던진 초구.
“와···”
작년의 경우 달라진 구위를 선보이기 위해 포심부터 던져서, 미리 주변을 압도했던 것과는 달리.
평소의 루틴대로 휙 던진 서클 체인지업이 포수 글러브 속으로 날아들었지만, 사실 그것 역시 주변을 압도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같은 투수인데도, 같은 투수이기에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역동적인 각도로 역회전하는 공은 남몰래 품은 기대를 완벽하게 충족시켜줬으니까.
은은한 감탄사가 불펜에 흘렀고.
“난 택도 없겠네···”
“나도 서클 던지는데··· X발 이걸 코치한테 어떻게 보여줘.”
“구종 비슷한 놈들은 다 X됐네. 저걸 보고 다른 걸 보면 만족이나 하겠어?”
도발적인 반응을 보였던 이들은 단 한 구만에 기세가 꺾였다. 그저 걱정스러웠다. 저 이후, 자신들이 피칭할 장면이.
이미 저런 걸 본 코치들이, 다른 것을 보고 감탄할까? 아주 조금이라도 미동을 보일까?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자신이 그럴 수 있으리라고는 딱히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 뒤로도 계속해서 이어진 연습피칭은, 그토록 그 장면을 기다리던 이들조차 기가 질릴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특히나 느즈막이 던진 포심의 경우, 뻐엉-하는 소리를 내며, 이제는 조금 식상하기도 한 말을 자아내게 하기도 했고.
“저게··· 80마일대라고?”
“구속은 내가 훨씬 빠른데··· 스터프는 택도 없겠네.”
“무슨 무브먼트가··· 저러니까 라이징 패스트볼 소리를 듣지.”
“진짜, 클래스가 다르긴 다르네.”
마침내 연습피칭이 끝났을 때, 무언가에 홀린 듯이 지켜보던 이들은 이내 새삼 체감되는 그 위엄에 압도되어 고개를 절레 저었고.
자신감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 마치 나쁜 짓을 하듯, 몰래 숨어서 자신의 불펜피칭을 재개하기도 했지만.
“어?”
“뭐야, 저건.”
“저게 무슨 미친 짓···”
그의 피칭은 끝나지 않았다.
진짜 충격 역시 따로 있었으니까.
잠시 휴식을 취한 뒤, Go는 다시 피칭을 재개했다.
마치 다른 투수를 보는 듯한, 기묘한 분위기를 흘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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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요? 죽이죠?”
“뭐, 나쁘진 않네. 그런 성적 낼만 해.”
조금 가열된 어깨를 살짝 돌리며 묻자, 그렉은 살짝 어깨를 으쓱거렸지만, 입꼬리와 눈썹이 씰룩거리는 걸 감추지는 못했다.
본인의 감정에 충실하셔야지. 그렇게 아닌척하기만 해서 쓰나. 야박하게 굴지 말고 칭찬 좀 해줘요.
“···잘하네, 솔직히. 작년보다 더 나은데? 폼을 너무 일찍 만든 건 아니야? 슬러브 같은 건 또 어디서 배웠어? 커맨드도 잘 잡혔는데.”
음, 결국 버티지 못했구만.
참지 못하고, 다다다다 말을 쏟아낸 그렉은 이내 갑자기 부끄러워진 건지 괜히 코를 찡긋거렸다.
“동료한테 배웠죠. 리암 헨드릭스. 이상하게 잘 맞더라고. 폼은 딱 적절하게 올렸고요. 그쵸, 대니얼?”
“예? 아··· 예, 사실입니다, Mr.Maddux, 정규시즌을 대비해서 철저하게-”
“압니다, 압니다. 그냥 공이 좋길래 빈말 한번 해본 거요.”
“올해도 폼이 좋아 보여서 다행인데··· 어디 아프거나 한 곳은 없지? 어깨는 멀쩡하고?”
스콧 에머슨은 내심 걱정됐던 건지 굉장히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그렇게 물었다.
작년 꽤나 혹사당했으니, 혹시라도 겨울 동안 무슨 이상이라도 있었는가 싶었겠지. 다행이게도 없다. 아니, 하나 있네.
“그··· 일단 어깨는 멀쩡합니다. 아주 좋아요. 병원에서 검사도 받았는데, 제가 철인이래요.”
“그렇다니 다행이네. 그런데, 그··· 뭐?”
“새로운 걸 좀 준비했는데.”
스콧 에머슨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조금 표정이 굳기도 했고. 내가 뜸을 들이고 있으니, 마음이 걸렸겠지.
“혹시 또 구종이 늘어난 거야? 너클 커브처럼? 이번엔 스플리터?”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막상 얼굴 보니까, 뭔가 좀 그렇네. 부모님 앞에서 내가 위험한 짓을 했다는 걸 직접 고백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일단 보시죠.”
말하면, 왜 그런 짓을 했느냐, 밸런스는 문제가 없느냐? 너 정말 미친 거냐? 나 잘리는 꼴을 보고 싶은 거냐 등등.
온갖 말을 쏟아낼 게 분명하기에, 바로 준비했다.
“브루스! 그거로 가니까, 잘 준비해서 받아.”
“어? 아, 그거. 오케이!”
공은 브루스가 받아줬는데, 일부러 쟤를 요청했지. 불펜포수가 있기는 하지만, 연습 도와준 만큼, 쟤가 제일 익숙하잖아?
“더 던지려고? 끝낸 거 아니었어? 어쩐지 연습피칭을 좀 짧게 하더라니···.”
“어디, 얼마나 대단한 걸 준비했길래 그렇게 뽐내는지, 한번 구경이나 하자. 던져봐.”
그렇게 외치며 살짝 곁눈질하니, 그렉도, 스콧 에머슨도 둘 다 의아함이 가득한 눈으로 봤다.
특히나 그렉은 시큰둥하더니, 막상 피칭을 보니까 달아오른 건지, 재촉하기도 했고. 분부대로 합죠.
잠시 숨을 고른 뒤, 연습 때의 감각을 올렸다. 기왕 선보이는 거, 아주 제대로 보여주자고.
그대로 다시금 투구 동작을 이행하자, 스콧 에머슨이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내 반응에 혹시 내가 투구폼이라도 건드린 건 아닐까, 걱정했었는데, 이전과 똑같으니 안심한 거겠지.
당연히 투구폼은 아니다.
나도 그렇게 몰상식한 놈이 아니야. 그···
‘이쯤에서 놓자.’
조금 엇비슷하기는 한데.
아무튼 투구폼은 아니다.
릴리스 포인트지.
내내 열심히 연습했던 대로, 조금 더 깊게, 그리고 약간 높은 위치에서 공을 놓았다.
그러자, 가장 감이 잘 잡혀서 선택한 포심은 이전과 다른 위치에서 일직선으로 쭉 뻗었고, 곧, 빠악-하는 소리와 함께 포수 글러브 안으로 들어갔다.
“나이스볼! 컨트롤 좋네! 커맨드 잘 잡혔어. 아주 정확해.”
너도 나이스다. 열심히 가르친 보람이 있어. 열심히 PR을 해주는 군. 그래, 계속 그렇게 해라.
“허?”
“이 미친 자식이···”
다시 흘끔 양옆을 보니, 반응은 아주 좋았다.
스콧 에머슨은 정신이 아득해진 건지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한 눈을 했고. 그렉은 내가 기대했던 것처럼 입을 조금 벌렸으니까.
그대로 흐름을 놓치지 않고, 다시 아홉 개의 공을 던진 뒤에 다시 확인하자, 스콧 에머슨은 멘탈이 완전히 안드로메다로 간 것 같았고.
그나마 정신을 차린 그렉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어때요? 죽이죠? 솔직히 좀 놀랐죠?”
“그래, 진짜 X나게 놀랐네. 이 미친 또라이 새끼. 겨울동안 이런 걸 준비했어?”
쪼오끔 말이 격하기는 한데, 그래도 아주 극찬을 해주시네. 이것 참, 노력한 보람이 있구만.
기대했던 것처럼 놀라 자빠지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만족스러웠다.
그가 흥미를 가졌다는 것 자체가, 내 생각이 헛되지는 않았다는 걸 증명했으니까.
‘그나저나, 이것도 작년이랑 비슷하네.’
불펜의 분위기 말이야. 작년이랑 똑같은데? 그때도 이랬잖아, 투수코치는 넋을 놓고, 그렉은 만족스러워하고, 나머지는 경악하고 있으니. 다 똑같네.
‘데자뷰 데이구만.’
그걸 보니 확신이 들었다.
올해도, 작년처럼 밝을 거라는 확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