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펑-하고 가죽을 때리는, 아니, 터트리는 듯한 소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나이스 볼! 점점 잡히는 것 같은데? 크~ 역시 다르긴 달라. 멍청한 타자 놈들, 시즌 시작하면 아주 피눈물을 흘리겠네.”
글러브로 공을 잽싸게 포구한 브루스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실실 웃으며 감상을 토해냈고 말이다.
“너도 일단은 타자 아니냐?”
“난 포수지, 포수. 포수는 원래 타자보다 포지션 역할이 더 중요해.”
“말은 잘해.”
브루스가 합류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훈련, 아니 ‘개발’이 시작됐는데, 그는 꽤나 열정적이었다.
첫날, 내 공을 직접 보고, 느낌을 말해준 뒤부터, 브루스는 묘하게 텐션이 높아졌지. 굉장히 흥분한 것 같기도 하고.
뭐랄까, 조금 심할 정도로 열정이 가득하다고 해야 하나?
‘저거 괜찮은 거 맞나? 쟤 혹시 못 본 동안 뭐 이상한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야?’
과하게 열기가 넘치는 모습을 보니, 조금 당혹스럽기도 했고, 엄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뭐, 축 늘어진 것보다는 의욕이 강한 게 낫지.
저 열정으로 내 연습을 열심히 도와주고 있으니까. 그저 감사하게 여겨야지.
“무브먼트는 어때?”
“똑같아, 기존의 릴리스 포인트, 새로운 릴리스 포인트. 둘 다.”
“디셉션은? 조금 더 접을까?”
그리고 처음에는 얼굴 보고 조금 실망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생각보다 큰 도움이 됐다.
포수와 타자, 두 가지의 시선으로 기존과 비교하며, 정확하게 체크해줬으니까.
“디셉션은 이 정도면 충분해. 기존보다는 조금 덜하기는 한데, 여전히 잘 안 보여.”
“오케이, 그럼 이대로 유지하는 걸로 하고, 타점은 어때? 여전히 조금씩 달라?”
“어, 아직은 구종마다 차이가 뚜렷해.”
“쓰읍··· 이러면 안 되는데, 타석에서 봤을 때도 그래?”
“어, 타석에서는 그래도 디셉션 덕분에 제대로 보는 건 힘든데, 일단 확인만 하면 금방 파악할 거야.”
물론 릴리스 포인트야, 연습장 가득 채운 장비들 덕분에, 정확하게 수치로도 알 수 있지만.
기계 장치와 사람의 눈은 다르니까. 사람도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하나의 지표로 삼기 딱 좋지.
“정규시즌, 아니, 넉넉잡아서 최소한 5월 전까지는 어느 정도는 일치시켜야 할 텐데···”
그렇게 물심양면의 도움을 통해, 두 번째 릴리스 포인트, 그러니까, 지금 열심히 추가 중인 새로운 패턴은 점점 더 완성되었고, 분명 그 효과는 엄청났다.
말 그대로 두 명의 투수가 제각각 공을 던지는 건데, 효과가 없을 리가 있나.
아마 타자들에게 큰 혼란을 줄 수 있겠지. 처음 그것을 목도했던 브루스가 그랬던 것처럼.
다만 문제가 있다면, 구종마다 타점이 조금씩 어긋난다는 것.
‘지금 당장도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는 있겠지만, 나중에 분석되고 난 뒤부터는 구종이 쉽게 읽혀서, 오히려 두 번째 패턴을 쓸 때마다 난타를 당할 거야.’
이건 조금 심각한 문제다.
새로운 릴리스 포인트를 만들고, 그걸 추가적인 패턴화 시킨다고 해도. 구종마다 차이가 난다면, 그건 결국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마구잡이로 던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거든.
그렇게 되면, 굳이 새로운 패턴을 만든 의미도 없어지지. 상대 타자들에게 당혹감을 주기는커녕. 어느 정도 분석된 뒤부터는, 구종마다 릴리스 포인트에 차이가 있으니, 훨씬 더 쉽게 읽힐 테니까.
특히나 눈이 좋은 타자들은 금방 그 미세한 차이를 포착해서, 자기가 원하는 공을 던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곧장 담장 너머로 타구를 날리려고 할 거고.
최소한 5월, 그 정도쯤 되면 확실하게 분석이 될 텐데, 그때까지는 어느 정도 완성시켜야 하는데 말이야.
“그래도 생각보다 타점이 금방 좁혀지고 있으니, 큰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연습한 시간을 감안하면, 오히려 대단히 빠른 셈이죠.”
내 초조함을 읽은 건지, 대니얼은 큰 걱정은 하지 말라는 식으로 부드럽게 웃었다.
혹시라도 내가 조급함을 가져서, 일을 그르칠까, 걱정했던 거겠지.
‘하긴, 아직 개발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내가 욕심이 너무 과하기는 하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엄청난 수준이지. 연습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제법 그럴듯해졌으니까.
정규시즌까지도 아직 한참 남았으니. 발전 속도를 감안하면, 분석되기 전에 어느 정도 타점이 일치되겠지.
‘정 아니다 싶으면, 다음을 기약하고, 그냥 기존의 릴리스 포인트로만 던지면 되고.’
아예 릴리스 포인트를 고치고, 교체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걸 추가하는 것인 만큼.
기존의 릴리스 포인트도 철저하게 유지하고 있으니. 최소한 보험은 확실하지. 아무리 못해도 작년처럼은 피칭할 수 있을 테니까.
“컨트롤은 어때?”
그렇기에 편하게 마음을 가지며, 다시금 브루스에게 감상을 묻자, 이번에는 아까 전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는 대신 자신 있게 대답했다.
“기존이랑 비교하면 당연히 조금 부족한데, 그거야 Suck 니 원래 컨트롤이 심하게 좋은 거고. 이 정도만 해도 웬만한 투수들보다는 훨씬 나아. 점점 더 영점이 잡히고 있고.”
다행히 가장 걱정했던 커맨드는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잡혔다. 단순히 브루스의 느낌 말고도, 손에 잘 채이는 게 느껴질 정도로.
그것까지 감안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나타나기는 했지만, 제법 순항 중이라고 볼 수 있겠지.
그러니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어떤 의미에서는 로우 리스크 하이 리턴인 셈이니까.
만약 여러 문제점을 정규시즌 전까지 지우고, 새로운 패턴을 완성 시킬 수 있다면···
‘브루스의 말처럼 타자들이 피눈물을 흘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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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체력 단련 이외에도, 새로운 연습에 몰두하며, 고유석이 한창 겨울의 마지막을 불태웠을 때. 잔잔했던 리그 역시 봄을 맞이하며, 다시금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스프링 트레이닝까지 단 일주일! 각 구단은 얼마나 준비가 되었을까?>
<2018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선수단 평가>
오프시즌이 거의 마지막에 다다랐고, 웬만한 빅딜들 역시 이젠 거의 다 성사가 되었기에, 어느 정ㄷ 마무리 단계에 들어선 만큼.
당연하게도 언론에서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했다. 줄 세우기 말이다.
<2018 시즌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선수단 평가···>
<이번 오프시즌에서 주목할 만한 유망주는?>
오프시즌을 알차게 보낸 구단을 선정하는 것부터, 유망주 개개인까지, 시즌의 기대감을 품은 이들의 속을 긁어줄 기사나 칼럼이 줄지어 쏟아졌고.
개중에선 일찌감치 우승팀을 예측하는 등, 아주 과감한, 어떤 의미에서는 당돌하고, 자극적인 것들도 제법 많았다.
<제2의 Go, 작년의 주인공이 됐던 Go처럼 새롭게 라이징 스타가 될 선수가 있을까?>
또한 시범경기에 앞서, 몇몇은 작년을 추억하기도 했고 말이다.
캑터스 리그에서 뜻하지 않은 벼락스타가 탄생하여, 그 선수가 전 리그를 휩쓸었으니까.
그때를 다시금 되새김질하며, 과연 올해에도 그런 벼락스타가 탄생할지, 예상하는 기사도 적지 않았고, 구단과 그 팬들은 기존에 그다지 주목 받지 못했던 유망주에게 혹시나 하는 시선을 날리기도 했다.
어쩌면 올해의 Go가 자신들의 팀에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235이닝의 혹사. Go에게 영향이 없을 수가 없다!>
물론, 제2를 찾기보다는, 그냥 진짜 고유석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대다수였지만.
역사상 가장 압도적이었던 시즌, 그것도 루키 시즌을 보냈던 선수의 2년차이니, 관심이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었다.
더 나은 성적을 보여주든, 아니면 그저 유지하든, 혹은 혹사로 무너져 내리든지 간에 모두 다 제법 흥미로울 테니까.
[#Rangers]
[제발 Suck 새끼 팔 부러지게 해주세요.]
└혹사를 그만큼 당했는데, 좀 앓아 누워라!
└남들 3년치를 작년에 했으니, 올해는 쉬어야 맞는 거지.
특히나 작년, 고유석에게 가장 큰 제물이었던 레인저스의 경우, 올해는 부디 그가 망가지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고유석, 오프시즌 동안 비장의 신무기 개발?>
[#A’s]
[혹시 Suck이 또 구종 하나 새로 장착해서 오는 거 아니야?]
└가능성은 있지. 시즌 중간에도 너클 커브 같은 공을 갑자기 들고 나타났는데. 오프시즌 정도면 시간이야 충분하니까. 또 뭔가 엄청난 걸 들고올 지도.
└X신들은 Suck이 망하라고 저주를 퍼붓지만, 난 믿어. 분명 또 뭔가 어메이징한 모습을 보여줄 거야!
└혹시 몰라, 갑자기 95마일을 던질 지도. 내가 기억하기로 원래 마이너에서는 무브먼트가 별로였던 투수인데, 갑자기 강해졌었잖아? 이번엔 구속 차례인 거지.
└95마일의 Suck이라. 상상만 해도 아래가 축축하네.
꽤나 촉이 좋은 이들은, 그가 이번에도 또 다른 진화를 보여줄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고. 작년 놀라운 진화를 보여줬던 고유석이니, 이번에도 그럴 지도 모른다면서.
다만 그 내용까지 정확하게 추측하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점점 스프링 트레이닝, 그리고 시범경기가 다가오며, 잔잔했던 분위기를 다시금 일깨우며, 야구의 시간이 도래했음을 알렸을 때.
그런 축제에 끼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나락으로 치닫는 이들 역시 있었다.
<휴스턴 애스트로스, 징계 확정!>
<죄질에 비해 심하게 가벼운 징벌! 야구팬들의 성토가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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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짧다. 특히 한 달도 채 안 되는 시간은 거의 쥐꼬리 수준이지.
1년도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가는데, 그 정도쯤이야 뭐, 하품 한번 하면 지나갈 걸?
거기에 시간을 알차게 보낼 루틴까지 확실하게 잡혀 있다면,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렇기에 내 시간도 금방 흘러갔다. 나도 루틴이 확실하잖아? 훈련-훈련-훈련이기는 하지만.
“아니, 작년에 상대 타자들은 이걸 대체 어떻게 친 거야? 스치지도 않네, 스치지도 않아.”
처음 합류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배트를 들고 서서, 공을 지켜 본 브루스는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혹시라도 타격했다가, 나나 브라이언, 대니얼이 맞기라도 하면 큰일이 날 수도 있는 만큼, 그냥 지켜보기만 하라고 하기는 했지만.
‘진짜 실전이었어도 삼진이었겠네.’
배트를 휘두르게 해줬더라도 사실 결과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만큼 폼이 많이 올라왔으니까.
“대니얼, 구속은 얼마나 찍혔어요?”
“85마일입니다. 전력투구 아니시죠?”
“네, 평범해요.”
“그렇다면, 구속은 거의 다 올라왔다고 봐도 무방하겠군요.”
당장 구속도, 거의 작년 평균수준까지 올라왔고 말이다. 그래, 이제 진짜 시간이 된 거겠지.
“그거야 브루스 니 타격 실력이 부족한 거고. 아무튼 릴리스 포인트는 좀 어때?”
“좋아, 여전히 집중해서 보면 차이가 나기는 하는데, 이 정도는 시범경기에서 던지다 보면 금방 잡힐 것 같은데?”
“다행이구만.”
이번 오프시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잇는 새로운 릴리스 포인트는 점점 더 자리를 찾아갔다.
50구, 각각 릴리스 포인트대로 반씩 잘라 25구씩 나눠서 던지고, 간혹 지금처럼 브루스를 상대로 시험 삼아 실전 피칭 비슷하게 하기도 했는데.
이젠 제법 느낌이 올라왔으니까. 물론 여전히 손색이 있기는 하지만, 이건 결국 시간문제다.
‘반복 숙달뿐이지, 릴리스 포인트는.’
릴리스 포인트라는 게, 한없이 추상적인 영역이거든.
물론 데이터가 쌓이고, 그 데이터에 대한 갖은 분석이 곁들여지면, 정확하게 수치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결국 던지는 사람 입장에선, 아무런 실체가 없다. 그냥 대충 감으로 던지는 거지.
그 감은 꾸준한 노력과 반복된 연습을 통한 경험 누적이 만드는 거고. 그러니 계속 열심히, 공을 들여서 연습하는 수밖에.
아무튼 그렇게 추가로 장착한 릴리스 포인트를 열심히 다듬는 것도 굉장히 바빴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구장창 공만 던진 건 아니다.
수영도 하고, 실내 자전거 타고, 웨이트도 하고. 다른 것도 할 일이 많았거든.
새로운 패턴도 패턴이지만, 애초에 올해 오프시즌의 목표는 체력 향상이었는데, 당연히 열심히 해야지.
“처음보다 훨씬 좋네요.”
“이 정도면 자선대회 정도는 입상할 수 있겠죠?”
“아뇨, 아직은 어림도 없습니다. 그래도, 조금 성과가 나타나기는 하네요.”
“거, 너무 야박하시네”
“정직한 거죠.”
다행히 이쪽으로도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고. 물론 그냥 수영을 좀 더 잘해진 것 같기는 한데. 원래 체력이란 건 조금 더 진득하게 시간이 지난 뒤에 드러나는 법이니까.
그렇게 내가 마지막까지도 악착 같이 시간을 보냈을 때. 반대로 정말이지 길고 긴 시간을, 아주 고통스럽게 보낼 이들도 있었다.
-애스트로스에 대한 비난의 여론이 점점 더 격화되면서, 간혹 투수들 중 애스트로스를 향한 데드볼을 예고하는 과격한 이들도···
“당연한 거지. 그냥 사인을 훔친 것도 아니고, 아예 기계로 훔쳤는데. 심지어 Suck 너한테도 그랬었고. 그때 진짜 눈치가 이상했다니까! X같은 새끼들.”
애스트로스 말이야.
작년 말, 모든 이들을 놀라게 했던 스캔들은 해가 지나고, 이젠 2월에 접어들었는데도 그 여파가 잦아들기는커녕, 오히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더 불이 붙었다.
‘징계가 시원찮았으니까.’
일단 감독, 수석코치, 단장은 1년간 자격정지를 받았고. 당연히 드래프트 픽도 날아갔다. 500만 달러의 벌금도 떨어졌고.
같은 죄질로 묶였던 레드삭스가 직원 한명 해고된 걸 감안하면, 엄청난 중징계 같아 보이지만...
‘너무 약하지. 사람들의 생각과 비교하면, 심각하게 가벼워.’
그런 중징계조차 대중정서와는 아주 심각하게 동떨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가 입을 모아 외쳤던 월드시리즈 우승 박탈은 아예 언급조차 안 됐고. 사실상 사인 훔치기를 주도했던 선수들에 대한 징계도 없었으니까.
그나마 주동자로 꼽힌 카를로스 벨트란이 출장 정지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오긴 했지만, 그는 이미 작년을 끝으로 은퇴했으니···
“도핑이나 다름없는 치팅인데, 사무국 X신들은 저걸 징계라고 내놓은 거야? 싹 다 출장정지 때려도 모자라구만.”
당연히 얘 같은 반응이 나올 수밖에.
브루스는 못마땅하다는 감정을 잔뜩 표출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Suck, 너도 그냥 다른 투수들처럼 대가리 맞춰. 만날 때마다 한 대씩. 어차피 넌 선발투수니까, 출장 정지 받아도 4일 안쪽이면 아무 상관없잖아?”
“뭐 하러 나까지 그래? 어차피 망신창이가 될 텐데.”
그렇기에 오히려 애스트로스에겐 독이었다. 차라리 시원하게 징계라도 받았다면 속이라도 후련했을 텐데. 그러지도 않았으니. 공공이 적이 된 거지.
‘애스트로스 경기 때마다 사적제재가 판을 치겠구만.’
당장 지금도 공공연하게 데드볼을 이야기하거나, 벤치 클리어링을 각오하라거나 하는 협박이 빗발치고 있었다.
주루 플레이 때 은근하게 발목을 노리겠다거나, 팔꿈치로 찍겠다는 선수들도 제법 있었고.
‘거기다가 인터리그 매치업이 좀 요상하게 됐으니, 부상자 명단이 꽉꽉 차겠네.’
정규시즌이 시작되고, 사람들의 주의가 다른 곳으로 돌아가면, 그나마 한숨 돌릴 수도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딱히 그러지도 않을 것 같았다.
왜냐고? 올해는 인터리그 지구 순환 매치업에서, AL 서부는 NL 서부랑 맞붙거든.
그게 무슨 소리냐면···
‘다저스랑 매치업이 있었지. 그것도 다저스 홈에서 3연전.’
작년 월드시리즈의 피해자와 피의자가 만난다는 뜻이다.
당장 다저스의 투수들 중 리치 힐을 비롯해, 애스트로스를 향한 헤드샷을 예고한 투수가 다섯이 넘으니, 더 말할 것도 없겠네.
물론 다저스 외에도 다들 이를 갈고 있다. 가장 큰 피해자는 당연히 다저스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진짜 억울한 건 애스트로스와 같은 리그인 아메리칸 리그 전체니까 말이야.
그러니 굳이 나까지 나설 필요가 있나. 옆에서 대충 구경만 해도 꿀잼이겠구만.
“하긴, Suck 너는 사인 읽히고도 개같이 털어버렸으니까. 굳이 저런 놈들을 상대해줄 필요가 없기는 하지.”
내 시큰둥한 반응에 브루스는 오히려 만족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애스트로스에게 내려진 징계와 그에 대한 반응을 보니, 확실하게 실감이 났다. 이제 정말로 메사로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이.
작년 최대의 스캔들까지 이렇게 마무리가 지어졌으니, 남은 건 새로운 시작뿐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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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은 다 챙기셨습니까?”
“네, 어차피 대부분은 미리 보냈으니까, 그냥 몸만 가면 돼요. 브루스는 내일 같이 간다고 했었죠?”
“네, 열심히 도와주셨으니, 최소한 픽업은 해드려야 하니까요.”
마침내 시간이 되었을 때, 생각보다 훨씬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준비를 마쳤다.
짐도 미리 부쳐뒀고, 겨울 동안 트레이닝도 열심히 했고. 폼도 충분하게 올려뒀으니. 더 걱정할 게 없었으니까.
“여기 생각보다 괜찮은데, 여기도 살까요? 피닉스 올 때마다 여기서 머물 수 있도록.”
“음,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대도시인 만큼, 집값이 크게 떨어지지도 않을 테니.”
그래도 정든 숙소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괜히 아쉽네. 플로리다에 집 사는 김에, 여기도 같이 사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아무래도, 플로리다 쪽 집을 알아보면서, 나도 모르게 부동산에 맛이 들렸나 봐.
‘스프링 트레이닝이라···’
여기서 보내는 마지막 하루라고 생각하니, 왠지 모를 설렘이 차올랐다. 조금 기대가 되기도 했고.
작년과 마찬가지로, 올해 역시 선보일 게 있었으니까.
‘뭐, 그때처럼 엄청난 반응이 나오지는 않겠지. 화려하게 드러나는 유형은 아니니까.’
하지만, 만약 기대했던 것처럼 효과를 발휘해 준다면, 최소한 그 파급력만큼은 작년 구위가 갑자기 급상승한 것과 비슷하리라.
그에 대한 기대감이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을 무렵, 문득 누군가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작년 이맘때쯤 뜻밖의 인연이 있었지?
“이름이 노아···였던가?”
“노아, 말입니까?”
내 말에 브라이언은 눈썹을 씰룩였다. 그게 누구냐는 것처럼. 그런 사람이 있었던가, 하고 기억을 되짚어보는 것 같기도 하고.
“그 꼬맹이 말이에요. 작년 피닉스 숙소 옆집에 살던 녀석.”
꼬맹이라는 말에도 여전히 떠오르지 않는 건지, 브라이언은 계속 갸웃거렸지만, 대니얼은 기억해낸 듯, 씨익 웃었다.
“사인볼을 줬던 그 어린 친구 말이군요. 그러고 보니, 딱 작년 이맘때였죠. 그때도 캠프에 합류하기 직전이었으니까요.”
왜, 그, 있잖아.
작년에 피닉스에서 훈련할 때, 몰래 훔쳐보다가, 나한테 사인볼 받아갔던 녀석 말이야.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아마도 이름이 노아였을 거다. 여덟 살인가 그랬을 거고. 작년이니, 올해는 아홉이겠네.
“올해도 봤으면 재밌을 뻔 했네요. 그때랑 완전히 급이 달라졌는데.”
“예, 야구 좋아하는 것 같던데. 굉장히 좋아했을 겁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쪽으로 숙소를 잡을 걸 그랬군요.”
브라이언도 드디어 기억해낸 건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꽤나 당돌한 녀석이었지. 야구공만 선물 삼아 주려고 했더니, 사인펜 들고 와서 공에 사인까지 받았었잖아?
올해는 숙소가 바뀌어서 당연히 만나지 못했다. 피닉스쯤 되면 엄청난 대도시인데, 우연히 마주치는 것도 힘들지.
“사인볼은 잘 가지고 있을까, 모르겠네.”
그때 공에 사인을 해주면서 다짐했었지. 그 녀석이 다 자라, 대학 갈 때쯤 되면, 그 사인볼의 가치가 등록금 정도까지 올라가게 만들겠다고.
“대충 얼마일 거 같아요? 그때 그 사인볼.”
“글쎄요, 그리 높지는 않겠죠. 사실 Go의 사인볼이 너무 흔하잖아요? 특별한 기록구도 아니고.”
“하기는, 그냥 딱 야구공 값만 되겠네.”
아마 그 약속은 지키지 못할 것 같다. 내가 워낙 사인을 많이 뿌려서 말이야. 거의 오클랜드 전역에 쫙 깔려 있을걸? 집집마다 하나 정도는 있겠지.
그러니 그리 가치가 높지는 않겠네. 희소성이 떨어지니까. 음, 약속을 못 지켜서 아쉽구만.
대니얼도 같은 생각인지, 어깨를 으쓱거렸지만, 반대로 브라이언은 그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마 못해도 오백 달러는 될 겁니다.”
“그래요?”
오백 달러라.
대학 등록금에는 턱없이 못 미치겠지만, 그래도 제법 높은데?
내 사인볼이 그 정도 가치라고? 대니얼의 말처럼 기록구인 것도 아닌데?
의아함을 담아 바라보자, 브라이언은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특별한 스토리가 있으니, 평범한 사인볼과는 다르죠. 그리고··· Go가 잘할수록 가치는 계속 올라갈 테고요.”
그렇게 말하며 은근하게 쳐다보는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결국 올해도 잘하라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이었으니까.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돌려서 말하고 그러시나. 굳이 그러지 않아도···
“그럼 올해는 한, 이천 달러까지 올려보죠.”
당연히 잘할 건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