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일단 먼저 설명하자면, 나는 투구폼 자체를 바꿀 생각은 없다. 그건 주객이 전도되는 거지.
‘어디까지나, 릴리스 포인트 정도로 멈춰야겠지. 그 이상은 바보짓이야.’
릴리스 포인트를 건드리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히 위험성이 높은데. 거기에 팔의 각도, 투구폼까지 건드린다고? 피칭 메커니즘을? 밸런스 무너지고 망하기 딱 좋지.
그렇기에 내가 생각한 건, 릴리스 포인트, 그 자체였다.
원리는 간단하다.
릴리스 포인트의 높이나 익스텐션에 따라서, 약간이나마 공의 무브먼트나 궤적이 달라지잖아?
‘타자의 시선에서, 같은 구종이라도 받아들이는 느낌이 달라지지. 더 빠르기도 하고, 더 급격하기도 하고.’
쉽게 말해서 타자가 느끼는 ‘구질’이 달라지는 건데. 그걸 한번 실험해보자는 거지.
‘잘하면··· 타자들에게 큰 혼란을 줄 수 있겠지. 잘하면 말이야.’
물론 어디까지나 이론이다.
그걸 조금 다르게 한다고 해서, 정말로 공이 가시적인 변화를 일으킬지는 아직은 의문이니까.
옛날 투구폼으로 던진 포심이라는 예시가 있기는 하지만, 그건 단순히 릴리스 포인트의 차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투구폼, 전체적인 틀 자체가 다르니까.’
그 정도의 변화는 조금 그렇고, 적당히 기존의 범위 내에서 약간씩 다르게 변주를 주는 건데, 아마 대단한 변화가 생긴다거나 하지는 않을 거다.
‘그래도 만약 기존의 구질과 가시적인 차이가 나고, 생소한 느낌이 들게 할 수 있다면, 그게 어느 정도 위력적이고 내가 제어할 수 있다면, 그 효과는 엄청나겠지.’
왠지 모를 기대감에, 크리스마스 전날 밤의 어린아이처럼, 들뜬 마음으로 다음날을 기다렸다.
오늘의 할당량은 이미 끝났고, 대니얼이 단호하게 끊었으니, 실험은 내일로 미뤄야 할 테니까.
“쓰읍··· 이래도 되는지 역시 좀 걱정이네요. 자칫 안 좋은 영향이 갈 수도···”
“뭐, 아예 대대적으로 뜯어고치는 것도, 살짝 맛만 보는 거죠, 맛만.”
그리고 다음날.
실험에 앞서, 대니얼은 간밤 동안 감정이 가라앉은 건지, 조금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마 강력했던 포심의 위력에 벅차올랐던 흥분이 조금 가라앉은 거겠지. 그 대신 걱정이 그 자리를 채운 거고.
하지만 그 역시 유혹을 완전히 떨치지는 못한 듯, 내 꼬드김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으니···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면, 즉각적으로 중단하면 되기는 하겠죠.‘
그리고 다시 연습피칭 시간이 다가왔을 때, 조금씩 테스트를 진행했다.
“오히려 기존의 피칭을 뒤에 하는 것이 낫습니다. 혹시라도 실험을 뒤에 했다가, 감각이 덧씌워지기라도 하면 큰 낭패일 테니까요.”
“네, 투구폼이나 릴리스 포인트를 완전히 교체하는 것도 아니니까, 기존의 폼도 유지해야죠.”
혹시라도 만약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약간의 보험을 마련해둔 뒤에 말이다.
괜히 릴리스 포인트를 이래저래 바꿔보다가, 그 바뀐 감각이 덜커덕 몸에 붙어서 기존의 것들을 망쳐버리면, 그건 진짜 큰일이거든.
내가 지금 하려는 건 어디까지나 새로운 패턴 혹은 구질의 ‘추가’지 기존의 것을 ‘교체’하려는 것이 아니니까.
“이건 영 별로네요.”
“네, 별다른 느낌 없이, 그냥 릴리스 포인트만 달라요.”
“으음, 이건 좀 변화가 있기는 한데···”
“이걸 보시면, 던지기 한참 전부터 타자의 시선에선 공이 훤히 보일 겁니다.”
그렇게 보험을 마련한 뒤, 우리는 기존의 구종에서 약간씩 릴리스 포인트와 익스텐션을 다르게 하거나, 각도를 달리하면서, 차근차근 변화를 엿봤고.
주렁주렁 흩어진 장비들이 내가 단순히 ‘느낌’으로 표현한 것들을 구체적인 수치로 변환시켜 줬으니, 피드백은 그때그때 즉각적이었다.
애석하지만, 대부분은 별로 인상적인 차이를 보이거나, 효과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존의 디셉션이 사라지거나, 약간 위력이 떨어지는 등, 역효과가 나기 일쑤였지.
그럴 수밖에. 지금의 느낌으로 계속 던졌는데, 갑자기 약간 비튼다고 해서, 드라마틱한 변화가 나올리는 없으니까.
“아무래도 릴리스 포인트 정도로는 별 효과가 없는 것 같군요. 팔의 각도까지 변화를 주지 않는 이상.”
“네, 릴리스 포인트를 높게 찍으니, 너클 커브가 그나마 낙차가 좀 더 커지기는 했지만···”
“떨어지는 궤적만큼 위력도 더 떨어졌어요.”
“이건 못 쓰겠네요.”
그나마 너클 커브의 경우, 릴리스 포인트의 높이를 기존보다 높게 잡으며, 약간 내리찍듯이 던지니.
횡 이동이 조금 줄어드는 대신, 종 무브먼트가 강해져, 12-To-6처럼, 가파르게 떨어지는 듯한 무브먼트를 선보이며, 가시적인 변화를 보여주기는 했지만.
대신 꺾일 때의 날카로움이 훨씬 덜했다. 기존과 구질이 다르기는 해도, 이러면 그냥 안 쓰느니만 못하겠지.
‘역시 그냥 꿈인가?’
그렇게 현실을 파악하고 나니, 왠지 조금 김이 새버렸다. 아니, 뭐, 나도 엄청나게 큰 변화를 바란 건 아닌데.
기대보다 훨씬 못하네.
무언가 대단한 발견 혹은 진화라고 생각했더니, 별거 아닌 걸 깨닫고 나니까, 괜히 기분이 축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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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게도, 실험은 하루 만에 끝나지는 않았다. 첫날의 결과가 아쉽기는 해도, 곧바로 멈추는 건 조금 그렇지.
“역시 익스텐션을 깊게 하는 것도 그리 효과가 없네요.”
“네, 어떤 의미에선 높이보다 변화가 덜하군요. 물론 타자 입장에서 조금 더 구속이 빨라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기에 사흘 정도 더 시험해봤지만, 결과는 그저 실망뿐이었다.
릴리스 포인트의 타점을 높이든 낮추든, 수평거리를 늘리든 좁히든지 간에, 죄다 효과가 저조했으니까.
물론 실전에서는 또 다를 수도 있겠지만, 불확실한 실전에 기대고 계속 끌고 가기에는 당장의 결과물이 너무 초라하지.
“이 정도면 충분히 던진 것 같으니, 이젠 포기하시죠.”
결국 대니얼도 완전히 식어버린 건지, 기대감을 놓은 것 같았고 말이다.
쯧, 뭔가 아쉽네.
역시 그냥 체력이나 키워야 하나? 하긴, 사실 굳이 어메이징한 발전하지 않더라도. 이미 최고의 기량을 가지고 있기는 하니까. 어쩌면 괜한 욕심을 부린 걸지도.
마음이 씁쓸해서 그런가, 괜히 쓴맛이 감도는 입을 쩝쩝거렸다. 뭔가, 제대로 감이 온 것 같았는데 말이야.
‘개 같은 감이었네. 실전에서 이런 감을 믿었다간 바로 홈런 맞겠어.’
괜히 뻘짓해서 아까운 사흘을 날린 셈이지만, 그래도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해야겠지.
‘무언가 번뜩인다고 해서, 그게 항상 정답인 건 아니니까.’
그래도 웬만하면 내가 생각했던 이들은 거의 다 이뤄진 터라, 약간 아쉽기는 했지만. 이런 때도 있는 거지.
예감이 좋다고 해서 무작정 맹신하면 안 되겠네. 좋은 걸 배웠어.
그렇게 생각하며, 오늘의 마지막 트레이닝까지 마친 뒤, 혹시나 모르기에, 투구폼과 릴리스 포인트 익스텐션 등을 철저하게 분석했다.
이번의 장대한 개짓거리 때문에, 약간이라도 기존의 밸런스가 틀어졌을 수도 있으니까.
“다행히 큰 문제는 없네요.”
“뭐, 겨우 사흘이니까요. 기존에 단단히 박혀있던 것들인데, 사흘 만에 밀어내기는 힘들겠죠.”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릴리스 포인트와 투구폼, 모두 다 기존의 데이터와 균일하네.
그래도 문제가 생기지 않아서 다행이야. 아쉽더라도, 이 정도로 만족해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넘기려던 찰나, 또 다른 데이터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건 뭐예요?”
“아, 그건 이번에 시험한 릴리스 포인트들입니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했던 개짓거리라는 건데, 혹시나 싶어 가볍게 훑어본 순간, 묘한 가시감이 들었다.
“대니얼.”
“네, 혹시 아직도 미련을 떨치지 못하셨어요? 어차피 효과가 없는 것 같으니 그냥 포기하시고, 남은 트레이닝에 집중하시는 게-”
“아뇨, 그게 아니라···”
나는 두 데이터를 번갈아서 쳐다봤다.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데, 뭘까? 뭐가 문제인 걸까?
진지한 내 표정에 이젠 확실하게 시큰둥해진 대니얼 또한 무언가 있는가 싶었던 건지, 눈썹을 씰룩였다.
그렇게 몇 번이고 번갈아서 봤을 때, 깨달았다. 기시감의 정체를.
“뭐랄까··· 다른 투수 같지 않아요?”
“네?”
“같은 투수가 아니라, 전혀 다른 투수가 제각각 던진 것처럼 보이지 않냐고요.”
내 말에 대니얼 역시 무언가를 깨달은 건지, 방금 내가 했던 과정을 똑같이 선보인 뒤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중얼거렸다.
“릴리스 포인트.”
이번 오프시즌의 키포인트.
그건 릴리스 포인트 그 자체였다. 단순히 릴리스 포인트에 변화를 줘서, 새로운 구질을 추가해보려고 한 건데···
‘이게 진짜였어.’
방향이 잡혔다.
이번 오프시즌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의 방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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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말해서.
타자들이 투수를 상대할 때, 가장 중요한 건 릴리스 포인트다.
얼마나 릴리스의 타이밍을 잘 읽느냐, 그때 놓는 지점을 얼마나 정확하게 확인하느냐가 중요하지.
“타자들이 타이밍을 잡는다는 건, 결국 릴리스 포인트에 적응하고, 그걸 포착하는 거죠.”
“구종 선택은 그다음의 문제고요.”
그렇기에 수많은 투수들이 딜리버리 등을 이용해 기를 쓰고 디셉션을 만들어, 릴리스 포인트를 숨기는 것이고.
타자가 타이밍을 잡지 못하도록 어떻게든 방해하기 위해서.
그런 건데. 지금 이 두 데이터에서 그 릴리스 포인트는 서로 달랐다. 애초에 그렇게 던졌으니까.
그러 그건 마치, 서로 다른 투수가 공을 던지는 듯한 효과를 줬다.
‘단순히 데이터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차이점은 존재해.’
그런데 만약, 기존의 위력과 제구를 유지하되, 내가 원하는 대로, 릴리스 포인트를 조절할 수 있다면?
그래서 일종의 추가적인 패턴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구질이 문제가 아니죠.”
“네, 타자들은 매번 서로 각기 다른 투수와 상대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테니까요. 마치, 쿠에토처럼.”
타자들의 선택지는 무수하게 늘어난다. 릴리스 포인트도 따로, 그것에 따라 구종도 따로. 그야말로 수십, 수백 가지 갈래로 갈라지는 거지.
사실 비슷한 논지의 생각은 메이저리그에서 꾸준하게 있었다.
효과를 보인 사람도 있지. 대표적으로는 자니 쿠에토 말이야.
평범한 투구폼, 등이 보일 정도로 크게 몸을 트는 투구폼, 락킹 체어라고 불리는, 특유의 어깨를 씰룩거리는 투구폼 등등.
여러 가지 종류의 투구폼으로 타자의 타이밍을 흔드는 것이 특징인 투수다.
내가 추구하는 것 역시 그것과 어떤 의미에서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
‘리버스 쿠에토라고 해야 하나?’
다만 그가 다양한 투구폼과 일정한 릴리스 포인트라면, 나는 반대로 하나의 투구폼과 다양한 릴리스 포인트라는 게 차이점이겠지. 어쨌든 목적은 똑같다.
“문제는 제구인데···”
그런 내 생각을 이루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당연히 제구다. 구종이 읽히지 않기 위해, 릴리스 포인트가 일정한 것도 중요하지만, 제구와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거든..
약간 바뀌는 것만으로 코스가 몰리거나, 커맨드가 흔들리지.
그러니 그 정도를 넘어, 아예 릴리스 포인트를 새로 추가한다면, 그것의 커맨드를 잡는 건 상당히 까다롭겠지만. 지금 이 데이터 속의 나는, 사실상 중구난방으로, 제멋대로 던졌는데도···
‘생각보다 괜찮은데?’
제법 나쁘지 않은 제구를 보여줬다. 막 던지는 것 같으면서도, 공을 제어했다는 뜻.
“최소한 실투라고 할 만한 코스는 없네요. 어렴풋이나마 제어했어요. 허, Go, 조금 무례한 말입니다만, 혹시 강박증이라도 있으세요? 연습 삼아 던진 건데, 이렇게 철저하게···”
“예전에는 제구를 못하면 홈런 맞았거든요, 그래서 약간 강박 비슷한 게 있기는 하죠. 이 정도인 줄은 몰랐지만.”
몇 번이나 재확인한 대니얼은 헛웃음을 흘렸다. 나도 그랬고. 좀 신기하네. 무서울 정도야.
내가 원래도 제구력이 좋기는 한데, 릴리스 포인트가 달라도 이 정도라고? 어떻게든 효과를 보겠다며, 막 던지느라, 아예 개판이 났는데도?
‘내가 내 생각보다 훨씬 잘하네···’
잘하는 거야, 성적만 봐도 알 수 있고, 타자들도 손쉽게 때려잡았으니, 나도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렇게 명확한 수치와 데이터로 확인하니까, 이야, 이건 무슨 진짜 제구 괴물인데?
실제로 언론이나 여러 칼럼에서도 종종 내 가장 큰 무기를 강력한 무브먼트나 브레이킹볼이 아니라, 핀포인트 제구로 꼽았는데. 이해가 되네.
“전부 다 제어할 수 있다면 정말이지 끔찍- 아니, 환상적이겠지만···”
최선의 상황을 상상한 건지, 대니얼은 살짝 몸을 떨었다. 끔찍하다고 말하려다, 애써 환상적이라고 바꾸기도 했고.
솔직하게 말해서, 끔찍한 거 맞지. 상대타자들 입장에서는 말이야. 거의 코즈믹 호러 수준일걸?
생각해봐, 안 그래도 X같은 투수가, 공 던질 때마다 릴리스 포인트가 다른 모습을. 나라면 배트 집어 던질 거야.
“그건 불가능이죠. 아무리 제가 괴물이라고 해도.”
상상만 해도 행복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건 불가능하다.
이걸 다 제어한다고? 다 일정하게 다듬고? 거짓말 좀 보태서 10년은 더 걸릴 거 같은데?
아무리 내가 괴물이라도, 이런 수십 가지의 릴리스 포인트를 모두 다 소화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욕심 낼 필요도 없고. 그저 딱 하나의 패턴만 추가하더라도···
‘대공황이지. 타자들한테는.’
그러니 중구난방하게 닥치는 대로 하기보다는, 차라리 하나를 선별해서, 그것만 붙잡고 가다듬는 것이 베스트다.
최대한 위력도 떨이지지 않으면서, 커맨드도 잘 잡히는 것으로.
“이중에서 가장 균일한 건··· 이거네요. 타점도 조금 높으면서, 수평거리 또한 투구판에서 더 긴 것. 표본이 적기는 하지만, 제구가 일정합니다.”
“아, 네. 이게 좀 잘 채이기는 했죠. 위력도 거의 비슷했고.”
다행히 후보자는 금방 나왔다. 약간씩 차이를 준 정도였기에, 크게 엇나가는 느낌은 없었지.
그렇기에 오히려 금방 버렸었다. 내가 원했던 건, 릴리스 포인트의 변화를 통한 새로운 구질이었으니까.
기존과 별 차이가 없으니, 별로라고 생각했었는데, 이게 진짜였구만.
그렇게 나도 흥분하고, 대니얼은 더 흥분한 상태로, 시험이 시작된 이후, 가장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을 때.
“어··· 브라이언이네요. 지금 오고 있다는데···.”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잠시 집 나가서 잊고 있던 엄마가 돌아왔네.
그러고 보니, 그와 상의하기로 해놓고, 정작 우리끼리 너무 신나서, 그냥 해버렸네. 먼저 그렇게 건의했던 대니얼도 까맣게 잊어버렸고 말이야.
그치만··· 기다릴 수가 없었는걸. 새로운 가능성에 너무 흥분했었으니까.
물론 그를 바쁘게 만든 건, 내가 일을 산더미처럼 떠맡긴 것 때문이긴 하지만.
‘그래도, 가시적인 결과물이 있어서 다행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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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구단 측에서 특별 인스트럭터 초청에 실패했다고 합니다.”
“아, 그래요? 그건 좀 아쉽네요.”
다시 피닉스의 숙소로 돌아온 브라이언은 먼저, 비보를 전해줬다.
이번 스프링 트레이닝 동안 가르침을 받기 위해 인스트럭터를 초청하려던 게 실패했다는 소식이었지.
“그가 거절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은퇴한지 얼마 안 된 선수다 보니, 여유를 즐기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화이트삭스 이외의 구단에서 활동하는 것 역시 꺼리는 것 같고요.”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는 없다. 본인이 싫다는데 뭐 어쩌겠어?
‘하긴, 현역 때 열심히 뛰었으니, 편히 쉬고 싶기는 하겠네.’
이번에 모시려던 인스트럭터는 마크 벌리였다. 그의 현역 시절을 놓고 보면, 차이점이 있기는 해도, 전체적으로 나랑 스타일이 비슷하잖아?
거기다, 내 입장에서 굉장히 탐스러운 것도 가지고 있고. 인터벌 말이야.
원래 나는 그에게 스프링 트레이닝 동안 노하우와 더불어, 인터벌을 배우려고 했었다.
현역시절, 리그에서 가장 빠른 인터벌 속도를 자랑한 선수인 만큼, 그만의 요령이 있을 테니까.
‘나도 제법 빠른 편이고, 더 가속하는 것도 가능하긴 하지만, 어느 정도는 달궈진 뒤의 이야기지.’
경기 감각이든, 집중력이든 적절하게 차올라야, 그때부터 가속이 가능한데. 마크 벌리는 아니잖아?
그는 그걸 본인의 의지대로 제어할 수 있으니, 그것을 스프링 트레이닝 동안 배우려고 했는데, 그쪽에서 거절했다면, 어쩔 도리가 없네.
뭐, 2015시즌이 끝나고 은퇴했으니, 이제 은퇴한지 2년하고 조금 더 된 건데, 한창 쉴 때기는 해.
“구단 측에서도 적절한 인스트럭터를 찾고 있다고는 하는데, 혹시 생각해두신 다른 분은 없으십니까?”
다른 인스트럭터라.
딱히 떠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그렉?
일단 모시고 오면, 뭐라도 가르쳐 주겠지. 그렉 매덕스인데.
“그나마 작년과 마찬 가지로 그렉 매덕스 정도? 다른 사람은 딱히 안 떠오르네요.”
원했던 인스트럭터를 모셔오지 못한 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큰 상관은 없었다. 인터벌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게 따로 있었으니까.
만약 만족스러운 결과물과 가능성을 얻지 못했다면, 그의 거절에 크게 실망 했겠지만···
‘어떤 의미에선 차라리 그가 거절해준 덕분에, 한쪽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으니, 오히려 좋아.’
괜히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는 것보다는, 확실하게 선택과 집중을 하는 게 낫겠지.
“그보다도··· 브라이언.”
“네, Go. 아, 투자 건은 처리 중입니다. 플로리다 쪽 부동산도 회사에서 적절한 리스트를 뽑는 중이고요. 포수는 구했는데. 사흘 뒤에 피닉스로 온다고 합니다, 괜찮으신가요?”
“네, 딱 좋네요. 그때부터 슬슬 본격적으로 실전 감각을 올려야 하기는 할 테니까. 그보다도 할 얘기가 있어요.”
“네, 말씀하십시오.”
가볍게 계획을 설명하니, 브라이언은 표정이 점점 진지해졌다. 아니, 딱딱하게 굳었다.
에이전트 입장에선 그리 달가운 말은 아닐 테니까.
“릴리스 포인트라··· 예, 무슨 느낌인지 알겠습니다만. 조금 걱정이군요. Go는 이미 지난 시즌 엄청난 성적을 올렸는데,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일단 엄청 위험하잖아.
원래도 잘하는 선수인데, 괜히 그런 쪽, 투구 밸런스와 관련된 영역을 건드렸다가, 혹시라도 잘못되면. 그땐 진짜 큰일이 날 테니까.
그것을 염려한 건지, 우려가 가득한 표정인 브라이언에, 흘끔 대니얼에게 시선을 주니, 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큰 위험은 없을 겁니다. 혹시라도 무언가가 잘못된다면, 즉각적으로 알아챌 수 있으니까요. 기존 데이터가 있으니 말입니다. 바로 중단하면 되겠죠.”
우린 공범이잖아. 공범끼리는 서로를 변호하고 그러는 거야.
그의 당당한 말에 브라이언도 어느 정도는 설득된 건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표정이 그리 밝아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남은 문제도 있습니다. 앞으로 스프링 트레이닝까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는데, 그때까지 유의미한 결과를 낼 수 있겠습니까? 시간이 촉박할 텐데요.”
그렇기에 촉박한 시간을 문제로 삼아, 최대한 미루거나, 천천히 진행하는 방향으로 가려고 했지만.
걸렸군. 그래, 시간을 문제 삼을 줄 알았지. 이제 남은 오프시즌 기간은 그리 길지는 않았으니까.
아무래도 걱정 때문에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 같은데···
“아뇨, 시간이야 두 달도 더 남았죠.”
“예?”
“지금 저한테 스프링 트레이닝이나 시범경기가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1선발 에이스인데. 연습하느라 시범경기 좀 망쳐도, 어차피 개막전에 등판하겠죠.”
“아···”
시간은 아직도 차고 넘친다.
막말로 시범경기와 스프링 트레이닝은 이런 거 테스트하라고 있는 거다.
적어도 주전이 확실한 선수들 입장에선 적당히 컨디션과 경기 감각을 올리는 용도밖에 안 되지. 나는 그런 주전 중에서도 가장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1선발 에이스이고.
올해 내가 목표로 삼아야 하는 건, 개막전과 정규시즌이지, 시범경기가 아니다. 작년처럼 굳이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기를 쓸 필요가 없지.
‘좀 얻어맞거나 망치더라도, 기껏해야 언론에서나 부상의 징조니, 2년차 징크스니 뭐니 떠들겠지.’
그러니, 오프시즌, 스프링 트레이닝, 시범경기까지 싹 다 포함하면, 시간은 빠듯하긴 해도, 아주 부족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작년보다 사정이 훨씬 좋아. 그때는 갑자기 전체적으로 강해진 구위를 한 달 만에 죄다 커맨드를 잡아야 했으니까.’
물론 이번엔 릴리스 포인트를 아예 새로 추가해야 하니, 난이도는 그보다 훨씬 어렵지만, 대신 시간도 더 널널한 셈이지.
그것으로 체크메이트.
더는 반박할 거리가 없었던 건지, 브라이언은 그저 긴 한숨만 뱉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영 아니다 싶으면 바로 그만둘 테니까.”
제법 단호하게 말하니, 브라이언은 그제야 염려를 내려놓은 건지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구했다는 포수는 누구예요? 메이저리거가 공이나 받아줄 리는 없고. 마이너? 아니면 불펜포수? 은퇴한 선수?”
분위기를 바꾸는 의미에서 포수에 관해 물으니, 브라이언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뭔데. 왜 말을 안 해줘? 진짜 메이저리거야?
“Go도 꽤나 만족하실 겁니다.”
아주 당당하게 말하는데. 뭐지? 무슨 몰리나라도 데려온 건가?
미묘한 표정이 괜히 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어련히 알아서 잘 구해왔을까,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스프링 트레이닝 전까지 적절한 결과를 내려면, 포수도 제법 중요한데, 실력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