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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빼고 다 가짐-182화 (182/316)

182화

“Happy New Year!”

한 해가 지나갔다.

크리스마스도 남자 셋이서 아주 쓸쓸하고 외롭고 고독하게 보냈지.

대도시인 만큼, 나만의 미니 캠프를 차린 피닉스 곳곳에선 새해를 맞이해, 행복한 미소가 감돌았지만.

나는 그저 땀을 흘렸다.

피닉스에 도착하자마자 대니얼이 예고했던 것처럼, 나를 아주 신나게 굴려댔거든.

“후우··· 스프링 트레이닝, 투수조 합류일이 2월 13일이죠?”

“예, 저번보다 하루 정도 이르군요.”

한 해도 지났고, 슬슬 스프링 캠프가 다가오고 있는데. 올해는 합류일이 하루 더 빨랐다.

작년 스프링 트레이닝 투수&포수조 합류일은 2월 14일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하루 정도 더 빨라진 것을 보아, 아마도 내년 정규시즌 시작도 올해보다 좀 더 이르겠네.

‘두 달이라··· 빠듯한 것 같으면서도, 딱 적절하네.’

남은 시간은 대략 두 달 반 정도. 폭발적인 상승은 힘들겠지만, 시즌을 준비하고, 체력을 늘리기에는 어느 정도 알맞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농땡이 부리기 시작하면, 시간이 금방금방 지나가 버리겠지. 그렇기에 땀을 뻘뻘 흘리는 거고.

“아··· 죽겠다.”

“아뇨, 안 죽습니다. 아직 말이 나오는 것을 보아, 체력이 남아 있나 보군요. 제가 Go를 너무 낮게 봤어요.”

“···선생님, 제발 살려주세요. 제가 너무 과한 꿈을 꾼 것 같습니다. 이러다 죽어요.”

“안 죽습니다.”

체력을 키우는 데에 가장 탁월한 트레이닝이 있다면 뭐가 있을까? 결국 인터벌이지.

인터벌 트레이닝.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이고, 잠깐 쉬면서 하고, 다시 죽기 직전까지 하고의 반복.

체력은 바닥을 찍으면 찍을수록, 결국에는 그 최대치가 증가한다. 어떻게 최대한 많이, 최대한 빨리 바닥을 찍게 만드느냐가 중요한 거지.

“저 혹시 철인 3종 경기 나가요? 대니얼이 저를 아는 사람 대회에 팔았다거나···”

“자선 대회 정도에 나가신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지금 수준으론 순위권은 어림도 없습니다.”

다만 그러다 보면 결국 관절에 큰 무리가 갈 수 있기에, 실내자전거나, 수영 위주의, 관절에 무리가 안 가는 방향으로 최대한 체력을 키우는 건데.

누가 보면 철인 3종 경기 준비하는 줄 알겠네. 아니지, 내가 워낙 유명해서, 얼굴 보면 알아볼 테니까, 오해하지는 않을지도.

아무튼 그걸 반복하다 보니, 진지하게 회한이 들었다. 아, 그냥 체력 키우지 말까?

솔직히 지금 정도면, 그냥 포스트시즌까지 쌩쌩할 거 같은데. 내가 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런 짓을 하는 걸까.

“좋은 몸이··· 점점 더 좋아지는군요. 정말, 만족스럽습니다.”

나는 죽을 것 같지만, 대니얼은 최근 들어 부쩍 직업 만족도가 최고조를 찍는 것 같았다.

자기가 좋아하는 몸, 그런 의미(?)가 아니라 순수하게 피지컬 트레이너로서 좋아하는 몸이 더욱더 하드코어하게 트레이닝되는 모습이 만족스러운 거겠지.

예전에, 처음 봤을 때의 눈빛이 요즘 들어 점점 더 잦아졌단 말이야. 먹잇감을 노리는 독수리와 같다고 해야 하나?

이렇게 표현하니까 좀 무섭네. 밤에 문 잠그고 자야겠다. 트레이닝하고 나면 몸이 녹초가 돼서 저항도 못 할테니···

‘너무 힘들어서 그런가, 개소리가 무궁무진하게 떠오르네.’

정신 차리자.

힘들다고 정신줄까지 놓아버리면, 그땐 정말 걷잡을 수가 없을 거야.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잖아?

반대로 정신이 건강하면, 몸도 같이 건강해지겠지.

아무튼 그럴 거다.

뺨을 한 대 두들긴 뒤, 다시 부들부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오늘 할당된 모든 트레이닝을 끝낸 뒤, 온몸이 흐물흐물해진 상태로 다시 숙소로 돌아왔을 때. 브라이언은 의외의 말을 했다.

“내년부터는 플로리다로 가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플로리다요? 캠프가 피닉스인데, 굳이?”

플로리다. 사실 이쪽이 훨씬 정석이기는 하다. 오프시즌 트레이닝의 성지나 다름없지.

‘다른 동료들도 대부분은 플로리다로 간다고 했었지.’

우리의 경우, 시범경기에서 선인장 리그 소속이라, 피닉스에서 스프링 캠프가 열리지만.

나처럼 처음부터 피닉스에 숙소를 차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플로리다에서 알아서 훈련하다가, 시간 맞춰서 피닉스로 오는 편이지.

나는 그냥, 어차피 스프링 트레이닝이 피닉스에서 열리고, 선인장 리그도 뛰어야 하니.

귀찮은 이동 시간을 줄이려고, 초장부터 피닉스에서 머무르는 거고.

“전 피닉스도 좋은데, 브라이언은 영 별로예요?”

“아뇨, 그런 의미가 아니라, 세금 때문입니다. 정확하게는 플로리다에 집을 사두시는 게 더 나으실 것 같아서요.”

“세금? 아, 세금.”

“지금은 서비스 타임이기에 크게 티가 안 나겠지만, 연봉조정이 되기 시작하면, 그떄부턴 좀 달라질 겁니다.”

“그렇겠죠, 엄청나게 뛸 거니까.”

“사실 지금도, 스폰서나 광고 촬영 등으로 받은 것에서 세금이 제법 나가고 있고요. 그럴 바엔, 차라리 플로리다에 거주지를 구해두셔서, 오프시즌 때마다 머무르시는 게 더 나으실 겁니다.”

그런 의미였구만.

쉽게 말해서, 주세 때문이다.

미국은 주마다 세금이 다른데, 소득세의 경우, 7개 주에서 주 소득세를 부과하지 않는다. 그중 하나가 플로리다고.

‘어쩐지, 베테랑들은 굳이 플로리다에 집을 마련해두더라.’

단순히 플로리다가 좋아서가 아니라, 이런 이유도 있었겠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것 때문이었구만.

“특히, Go의 현재 거주지로 되어 있는 오클랜드, 캘리포니아의 경우, 제법 주세가 높은 편이니. 점점 더 손해가 커질 테죠. 어떻습니까?”

“뭐, 슬슬 알아보기는 해야겠네요.”

간단하다.

앞으로 내가 벌 돈은 늘어나기만 한다. 해가 지날수록 점점 더 커지고, 높아지겠지.

위험부담이 사라지면서, 스폰서나 광고 등에서도 기존보다 더 쎈 페이를 제시할 거고.

연봉이야 뭐, 말할 것도 없이 끊임없이 늘어날 테니까.

아마도, 앞으로 한 10년 정도는 우상향을 그리겠지. 그것도 시간이 지날수록 아주 폭발적으로 올라갈 거고.

“알아봐 드릴까요?”

“그런 것까지 에이전트에게 부탁해도··· 회계사도 아니고.”

“다른 선수들도 비슷합니다. 오히려 Go는 훨씬 편한 편이죠. 회사에도 담당 부서가 따로 있고요. 괜찮은 리스트를 뽑아드리죠.”

“그럼, 부탁 좀 할 게요.”

“그리고···”

브라이언은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 건지, 조금 더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웬만하면 지금부터 노후준비를 해두시는 것이 나으실 겁니다.”

“노후요? 저 아직 팔팔한데?”

“···혹시나 모르는 일이니까요. 한창 벌어두셨을 때, 미리미리 준비를 해두셔야죠. Go의 말처럼, 50세까지 메이저리그에서 뛸 수 있다면, 괜찮겠지만···”

“모르는 일이겠죠, 그건. 브라이언의 말처럼.”

“너무 안 좋게 듣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알아요, 그냥 걱정하는 마음이신 거.”

그만큼 우리가 좀 가까워졌다는 뜻이겠지. 야구 다음의 일을 걱정할 정도로.

사실 그리 안정적인 직업은 아니잖아? 올해에만 나는 천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연봉은 얼마 안 되지만, 그 외의 소득이 엄청나지.

하지만 부상으로 한번 망가지기 시작하면, 단 한 푼도 못 벌수도 있지. 당장 내년도 모르는 거고.

‘메이저리거들을 대상으로 투자 설명회도 있다고 했었지?’

실제로 메이저리그의 이미지를 위해, 은퇴한 메이저리거가 파산하거나, 망가지는 방지하려고, 투자 설명회 같은 걸 윈터 미팅 때 사무국 차원에서 열기도 한다.

올해는 나한테도 초청장이 왔었는데, 귀찮아서 그냥 무시했었지. 한번 가볼 걸 그랬나?

브라이언의 말을 들으니, 왠지 조금 아쉬움이 생겼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시즌 종료 이후, 어깨의 안정을 위해 한 번도 던지지 않았던 야구공. 그것을 손안에 굴리면서.

“이게 제 노후죠.”

노후 대비가 뭐 있겠어?

이거 한 번씩 더 던지고, 삼진 하나씩 더 잡을 때마다, 그게 노후 대비지.

“···그런데 저번에 선수들 얘기 들어보니까, 들리는 소문에 버스터 포지가 어디 음료수 회사에 투자했다던데.”

“바디아머 말씀이시군요. 코비 브라이언트를 비롯해서, 다른 스포츠 스타들도 투자한 회사죠. 플로리다 쪽 부동산과 함께 알아봐 드릴까요?”

“그래주시면 감사하죠.”

물론 안 하겠다는 건 아니고.

그냥 열심히 하면서, 뒷문도 살짝은 열어두자, 이거지 내 말은.

해피 뉴이어잖아?

죽을 때까지 쭉 해피 뉴이어가 되려면, 영리한 토끼처럼 굴을 따로 더 파두기는 해야지.

바디아머라, 나쁘지 않아.

이름이 마음에 들어.

혹시 모르지. 이게 나중에 나한테, 그리고 소문의 버스터 포지와 코비 브라이언트한테 돈다발을 가져다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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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엔 같이 못 뛰겠네.’

작년, 시즌 종료가 되기 전.

일찌감치 포스트시즌이 좌절됐을 때. 그의 동료, 스탠튼은 문득 그런 말을 했었다.

내년에는 같이 못 뛸 것 같다고. 우린 바보가 아니니까. 돌아가는 상황 정도는 알 수 있지.

윈나우가 죄절된 이상, 말린스, 데릭 지터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 말이야.

<지안카를로 스탠튼! 양키스로 전격 트레이드!>

<50홈런+ 타자를 두 명이나 갖춘 양키스! 그들의 목표는 추악하게 ‘찬탈’된 왕좌!>

예상처럼 가장 먼저 트레이드된 건 스탠튼이었다. 애초에 당연한 수순이었지.

그의 몸값은, 구단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웠으니까.

“기분 참··· 개같네.”

감독이 내년에 함께 우승하자고 소리쳤던 목소리가, 아직 채 잊혀지지도 않았건만.

가장 주축이라고 할 수 있는 선수가 트레이드됐으니, 더 말할 것도 없겠지.

또한 그것이 그 뒤의 일들의 신호탄이라는 것 역시 너무나도 뻔한 일이었고.

<디고든 매리너스로 1대3 트레이드!>

두 번째는 디고든이었다.

꽤나 즉각적이었지.

팬들에게 더 이상의 파이어세일은 없다며 선언할 때는 언제고.

-내가 먼저 나가려나? 아니면 크리스 너?

“글쎄, 침 흘리는 건 네쪽이 훨씬 심하지 않아? 어쩌면 내가 말린스의 Last Man이 될지도?”

-하하, 그건 불가능하다는 거 알잖아?

디고든마저 트레이드 된 이후로, 오즈나와 종종 통화를 가졌었다. 농담처럼 이야기를 주고받았지.

네가 먼저 나갈까, 내가 먼저 나갈까. 천 달러 내기도 했고.

-애슬레틱스가 널 노린다는 소문이 나한테까지 들리는데.

“애슬레틱스라···”

-크하, 상상만 해도 진저리나네. 콜리시엄 거기, 진자 너무 구리잖아?

“엄청나게 별로지.”

작년, 인터리그에서 원정을 떠났을 때 보았던 콜리시엄은··· 그야말로 최악이다. 최악 중의 최악이지.

낡아 빠진 리글리 필드가 5성급 호텔로 보일 정도로, 낙후되다 못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수준이었으니까.

녹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 보곤,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그리고···

‘다른 의미로 소름 끼치는 녀석도 있고.’

비록 그날 휴식을 부여받아, 경기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벤치에서 보며, 솔직히 전율을 느꼈다.

말린스, 그야말로 막강한 화력으로 숱한 투수들을 무릎 꿇렸던 그들인데. 그날은 아주 처참하게 패배했으니까. 그토록 자랑스럽던 동료들이 말이야. 심지어 스탠튼마저 경기가 끝난 뒤에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지.

“완전 괴물이야.”

“듣던 것 이상이지?”

“어, 오히려 축소된 수준인데? 아메리칸 새끼들, 저런 놈 상대하느라 진땀 빼겠네.”

그런 괴물이 그곳에 있었다. 그건 그나마, 괜찮다고 볼 수 있겠지. 고물덩이 콜리시엄을 가려줄 정도로.

‘아메리칸 리그로 트레이드된다면, 차라리 애슬레틱스가 제일 나을지도.’

최소한 같은 팀이라면, 그 녀석은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웃어넘겼는데, 소식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나왔다.

“트레이드···”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지?

“뭐, 당연한 수순이니까. 화가 나기는 하지만. 그래서, 어디야?”

-쯧, 오클랜드야. 데릭 지터, 이 망할 새끼가 하필 그런 곳으로···

에이전트는 혀를 끌끌 찼다.

선수들에게만큼이나, 에이전트에게도 오클랜드는 그리 환영받는 곳은 아니었으니까.

자신도 그나마 낫다며 말하기는 했지만, 역시 조금은 씁쓸할 수밖에 없었고.

‘오클랜드라··· 의욕이 뚝 떨어지네.’

콜리시엄, 그런 곳에서 한 시즌을 보내야 한다니. 한숨이 나오다 못해, 진저리가 날 정도였으니까.

오프시즌 동안 몸을 만들고, 훈련을 거듭하던 노력이 왠지 허사가 된 것만 같았지만.

그런 생각을 바꿔준 것은, 어쩌면 그의 타자로서의 인생을 바꿔줬던 스승의 연락이었다.

“배리, 트레이드 때문에 연락하셨어요?”

-뭐, 그거 말게 또 뭐가 있겠어? 아쉽네. 크리스 넌 키우는 맛이 있는 녀석이었는데.

“비즈니스가 항상 문제인 거죠?”

-그래도 애슬레틱스면 나쁘지는 않겠네.

배리 본즈.

약물 시대의 아이콘.

세상은 그를 추악한 치터이자, 빌어먹을 쓰레기로 욕하고 있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새로운 길을 열어준 스승이었으니까. 말린스의 타격코치로서 성심성의껏 자신의 노하우를 쭉 알려줘지.

다음 시즌을 위핸 오프시즌 훈련 역시 그의 입김이 잔뜩 들어갔고, 효과도 제법 나온다.

그런 스승은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애슬레틱스가. 조금은 어이가 없었지.

“진심이에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전성기 시절을 보내면서, 오클랜드의 거지 같음을 누구보다 자주 봤을 텐데.

그런 그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조금은 황당하게 느껴졌으니까.

-뭐, 투수 구장이라는 게 좀 짜증나긴 하지만, 그 정도면 나쁘지는 않잖아? AT&T수준은 아니니까. 내가 가르쳐준 타격법은 구장과 상관 없이-

“잘 맞으면 넘어간다. 귀에 딱지가 앉았어요. 그래도··· 뭔가 좀 그렇잖아요? 오클랜드는.”

-아니, 오히려 가장 좋을 수도 있어. 넌 오히려 운이 좋다고. 더욱더 의욕을 가져야지!

하지만 배리 본즈는 진심인 것 같았다. 진지하게 제자의 행운을 축하하는 것 같았으니까.

-내가 볼 때, 현시점에서 월드시리즈에 가장 가까운 팀은 애슬레틱스거든.

월드시리즈.

약물로 신이 되어버린 사나이가 유일하게 가지지 못했던 단 하나의 절대반지.

그것을 탐욕스럽게 노리는 골룸처럼, 배리 본즈는 묵직한 목소리로 끌끌 웃었다.

그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언론,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도 똑같은 말을 했으니까.

하지만 왠지 인정하면 지는 것 같아서 한번 튕겨봤다.

“Go 때문이라면 맞는 말이긴 하지만, 확신은 못 하죠. 애슬레틱스가 별로 좋은 구단도 아닌데. 혹시라도 이탈자가 생기면, 그 빈자리를 채우지 못할 수도 있고.”

-맞아, 좋은 구단은 아니지. 그래서 오히려 정규시즌에서 지구우승은 좀 힘들 수도 있고. 애스트로스를 나락으로 보내면서 더 가까워지긴 했지만, 전체적인 운영은 언제나 힘드니까. 하지만, 토너먼트는 다르지.

그렇게 말한 그는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Kid, 2002년의 자이언츠와, 2014년의 자이언츠가 뭐가 다른 줄 알아?

“뭐가 다른데요?”

-02년은 배리 본즈였고, 14년은 범가너였다는 거야.

그 말에 자연스럽게,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것처럼, 조금씩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느낀 건데, 결국 토너먼트는 투수싸움이야. 커트 실링, 매디슨 범가너, 결국 그런 거지. 이제 좀 알아듣겠냐? You lucky Bastard?

“무슨 뜻인지··· 잘 알겠네요. 고마워요, 덕분에 훨씬, 마음이 편해졌어요.”

-거기서도 잘해라. 종종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고. 다른 팀 새끼지만, 그래도 내 제자인데.

그렇게 통화가 끝난 순간.

마음을 뒤덮었던 걱정은 사라졌다.

애슬레틱스에 대한 왠지 모를 불쾌감, 그리고 찝찝함도 사라졌고. 스승은 이번에도 길을 가르쳐 줬으니까.

그는, 크리스티안 옐리치는 다시 훈련에 집중했다. 배리 본즈가 말했던 것처럼, 그를 비롯하여 숱한 레전드들도 껴보지 못한 반지를 낄, Lucky Bastard가 되기 위해서.

‘Go가 정말로··· 범가너가 되어줄까?’

왠지 모를 기대감을 품은 채로.

####

새해의 첫 달, 1월의 초순이 지나갔을 때, 나는 다시 야구공을 잡았다.

슬슬 피칭 감각도 올려야지.

체력을 엄청나게 키우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피칭이 잘 될 때나 효과가 있는 거지.

공이 개판인데 체력만 좋아봤자 뭐 하겠어? 그냥 쓰다 버리는 땜빵이나 되는 거지. 예전의 나처럼.

“그래도, 작년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하네요.”

작년에는 정말 긴장됐었다.

처음 공을 던질 때 말이야.

정말로 구위가 올라갈까?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눈도장 찍을 정도의 공을 던질 수 있을까?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온갖 종류의 고민과 걱정이 많았었는데, 올해는 죄다 해결됐으니까.

‘이젠 눈도장 찍을 필요도 없지.’

선발 라인업이 아니라, 그냥 1선발에 고정이 됐으니까. 구위는 뭐, 이제 상관없어졌고.

하지만 마지막 세 번째는 아직도 유효하다.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기. 이게 제일 어렵지.

“저번보다 사정이 더 좋아져서 다행이네요. 올해는 무슨 문제가 있다면, 그때보다 훨씬 일찍 알아차리겠어요.”

그런 첫 공을 던지는 지금 내 모습은, 시즌 종료 직후, 병원에서 검사받을 때와 비슷했다.

몸에 무언가를 덕지덕지 붙이지는 않았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용도의 기계 장비들이 가득했으니까.

돈 벌어서 뭐 하겠어? 장비빨이나 세우는 거지. 물론 내 돈이라기 보다는, 사실상 회사의 간판스타가 된 나를 위해, 보라스 코퍼레이션에서 제공한 것이지만.

‘대형 에이전시가 좋기는 좋아. 언젠가 브라이언이랑 독립할 때는 좀 아쉽겠어.’

저번에 롤렉스 때, 대놓고 선물하는 게 안 통한다는 걸 깨달았으니, 이런 식으로 은근하게 관계를 트려는 거겠지.

아무튼 나쁘지는 않구만.

받아먹을 건, 확실하게 받아먹어야지.

“동작도 추적해 준다고요?”

“네, 기존과 동작이 균일하지 못할 경우, 바로 나타납니다. 릴리스 포인트, 스트라이드 폭, 세밀한 동작까지 전부.”

“세상 참 좋아졌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10년, 아니 5년 전과 비교해도 너무 좋아졌죠.”

혼자 캠코더로 찍은 영상을 수십 번 돌려보면서, 고물 노트북으로 스스로 투구폼을 분석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전쟁터에서나 쓰일 법한 추적 장치까지 동원해서 내 모든 동작을 읽는다니.

“작년 오프시즌 트레이닝의 데이터가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Go의 정규시즌 데이터가 이미 누적되어 있다고 합니다. 여길 보시면, 영상을 통해서, 동작의 차이가 드러나죠.”

“대단하네요.”

종종 어른들, 나도 이젠 어른이긴 하지만, 어쨌든 내 기준에서 어른들은 종종 세상이 말세라며 혀를 끌끌 차기도 하는데, 내가 보기엔 더 좋아진 것 같단 말이야.

이러다 진짜 나 은퇴할 때쯤 되면, 야구로봇이 나와서 사람 대신 야구하는 건 아닌가 몰라.

‘최소한 감각을 찾기는 더 좋겠네.’

투구폼이야 체력 훈련하면서도, 꾸준하게 섀도피칭이나 연습 등을 통해서 유지하기는 했지만.

결국 실전 피칭이 아니니까, 어느 정도는 작년과 차이가 날 텐데, 그 데이터가 미리 누적되어 있다고 하니. 투구폼 잡기는 좋겠어.

그렇게 현대 문명의 기술력에 감탄하면서, 차분하게 폼을 취했고, 첫 공인 만큼 와인드업 없이, 차분하게 세트 포지션으로 공을 던졌다.

“음···”

“어때요?”

“네, 거의 균일하네요. 릴리스 포인트가 살짝 다르기는 합니다만, 이 정도는 며칠 내로 조정이 가능하겠군요.”

“회전수도 나와요? 포심이었는데.”

“네, 아무래도 시즌 평균보다는 살짝 덜하군요. 이천이백에서 삼백 정도가 찍힙니다. 수직 무브먼트도 조금 덜하고요. 그래도 오프시즈인 걸 감안하면 대단히 좋네요. 몸을 잘 만든 보람이 있어요.”

다행히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포심으로만 10구를 더 던졌고, 마지막은 와인드업까지 제대로 갖춰서 던졌는데.

“82마일. 평균적으로 81마일 정도군요. 구속은 금방 올라오겠어요. 작년 평균이 86.2마일이었던가요?”

“어··· 후반기부터 좀 올라서 아마 86.5마일 정도일 거예요.”

“그런데 81마일이면, 괜찮은 건가요, 대니얼?”

“네, 아주 좋은 거죠. 브라이언도 보셨겠지만, 전력투구를 하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라는 건, 구속이 금방 올라왔다는 뜻이죠. Go, 힘을 안 들이신 것 맞죠?”

“네, 아주 편안해요.”

결과는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벌써 81마일이라. 아직 스프링 트레이닝도 한 달이나 더 남겨뒀는데 말이야.

잘하면 시범경기 때 구속이 완전히 올라올 지도 모르겠는데?

다만 마냥 안심할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몸이 생각보다 일직 올라온 걸 수도 있으니까.

그러면 오히려 역효과지.

막판에 퍼진다는 뜻이니까.

마찬가지로 그걸 걱정한 건지, 옆에서 진지하게 지켜보던 브라이언은 조금 눈빛을 흐렸지만, 대니얼은 큰 걱정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컨디션이나, 몸의 가동률, 모두 다 평범합니다. 그냥 몸이 더 잘 만들어진 거지, 폼이 올라온 건 아니에요. 아마 벌크업과 하드코어 트레이닝의 효과겠죠.”

“그럼 최구구속이 더 올랐을 수도 있다는 뜻인가요?”

“아뇨, 그건 모르죠. 최대치가 증가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니까요. 그런 쪽의 트레이닝은 하지 않았고요.”

아쉽구만.

이놈의 똥볼은 언제 90마일 찍어보나 몰라. 그래도 최고구속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더라도, 평균구속은 오히려 점점 더 오르고 있으니.

이젠 정말로 아예 똥볼이라고 보기는 어렵기는 하겠네.

####

이후에도 인터벌 트레이닝과 연습피칭을 반복하며, 서서히 몸을 만들었다.

대니얼은 데이터를 통해 알아낸 정보 몇 가지를 지적하면서 도움을 줬고.

그렇게 시간이 점점 흘러갈 때쯤, 대니얼이 조금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Go의 릴리스 포인트가 생각보다 낮군요? 익스텐션도 신장에 비해 약간 짧고요. 확실히 데이터화 된 수치로 보니, 느껴지네요.”

릴리스 포인트와 익스텐션.

쉽게 설명하자면, 릴리스 포인트는 공을 놓는 ‘높이’이고 익스텐션은 놓는 ‘위치’이다. 홈 플레이트와의 거리를 뜻하지.

신장보다 조금씩 짧고, 낮은 것이 눈에 걸렸던 건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대니얼에게 나는 피식 웃으며 설명해줬다.

별로 좋은 이유는 아니었거든. 여전히 다시금 떠올릴 때면, 좀 씁쓸한 이야기지.

“아, 최대한 몸 안쪽으로 공을 숨기려고 하다보니까, 그렇게 되더라고요. 원래는 하이 쓰리쿼터였는데, 미국 온 뒤부터는 로우 쓰리쿼터가 됐어요.”

내 투구폼이 항상 일정했던 건 아니다. 한국에서 파릇파릇한 고딩 시절에는 하이 쓰리쿼터, 그러니까 투구폼이 지금보다 조금 더 높았지.

오버핸드는 어깨 작살날 것 같아서 무섭고, 그래도 최대한 큰 키를 이용하자는 생각에 릴리스 포인트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높게 잡았었고.

익스텐션도 아주 깊게, 긴 팔을 쭉 뻗어서, 홈 플레이트와 보다 더 가까운 지점에서 공을 놓았지.

‘그러다가 마이너에서 개같이 털렸고.’

한국에서는 그나마 괜찮았지만, 마이너에선 공이 훤히 보이는 건지, 졸라게 잘 두들기더라고.

사실 이제와서 돌이켜 보면, 아예 디셉션이랄 게 없었거든, 그때 투구폼은.

맞았다 하면 넘어가는 구위를 가졌는데, 심지어 공이 잘 보이기까지 하니, 진짜 호되게 혼났었지.

그래서 싱글A에서 다시 루키리그로 내려갔을 때부터, 조금씩 디셉션을 가미하며, 공을 숨겼고.

그러다 보니 팔 각도도 좀 내려가고, 공을 숨기기 위해, 팔을 더 접어서, 빠르게 던졌는데, 그러다가 결국 전체적으로 짧고 낮아지면서, 지금 같은 폼이 됐다.

갑작스럽게 크게 변화하는 게 아니라, 차근차근 점진적으로 변화한 덕분에, 다행히 커맨드는 금방 잡혔었지.

‘진짜··· 힘들었지.’

그날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정말이지, 내 인생에서 가장 크게 좌절했던 시기였으니까.

메이저는 그때도 솔직히 그냥 꿈이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더블A까지는 쉽게 갈 줄 알았거든.

메이저리거들 전부 그러잖아?

그 아래는 낙원이고, 진짜 지옥은 더블A부터라고.

‘난 아니었지. 지옥이 생각보다 빨랐어.’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나한테는 그냥 루키, 싱글A, 하이A, 죄다 지옥이었지. 살얼음판이었고.

내 스스로 천재라는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심지어 남들보다도 못하다는 걸 깨달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어린 나이에 그 잔인한 진실이 엄청나게 상처가 됐던 거야 말할 것도 없고.

뭐, 결국은 그때 열심히 털린 덕분에 강철 멘탈이 돼서 지금은 웬만한 걸로는 기스도 안 나는 거지만.

그때의 아픔은 아직도 가슴 한편에 남아 있다. 그렇기에 죽는다는 소리를 하면서도, 열심히 구르는 거고.

‘노후 대비고 나발이고, 일단 야구부터 계속 잘해야지. 다시 그때처럼 안 두들겨 맞으려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한 구를 더 던졌고. 불쾌한 기분이 섞여서 그런가, 공은 전보다는 조금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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