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측에서 조사 보고서를 보냈습니다. 또한··· 사무국이 원한다면, 모든 자료를 공유하겠다고 밝혔고요.”
비서의 말에 중년의 남자는 긴 한숨을 뱉었다. 축제가 채 식기도 전에, 문제가 생겼으니까.
월드시리즈가 무사히 끝마치고, 새로운 월드시리즈 우승팀이 탄생한지, 아직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애슬레틱스는 모두가 가장 행복한 순간에, 들개처럼 목을 물어뜯었다.
<전자기기를 이용한 사인 스틸, 과연 언제까지 용인해야 할까?>
<레드삭스가 아니다? 새로운 치터의 등장!>
여론은 이미 만들어지고 있다. 월드시리즈가 끝나고, 시상까지 모두 끝마친 이후. 하나둘, 저런 기사들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지.
그것이 대부분 애슬레틱스와 친밀한 관계를 가진 언론사라는 것은 비밀 아닌 비밀이고.
“···후우, 끝까지 가보겠다는 뜻이군요. 일단은, 잘 알겠습니다.”
비서를 내보낸 뒤, 남자, 롭 맨프레드는 조심스럽게 보고서를 읽었고,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사실··· 어느 정도 예측은 하고 있었다. 이미 들리는 소문이 있었으니까.
이토록 큰 문제가, 영원토록 감춰지는 게 이상한 일이지. 어떤 방식으로든지 새어 나갈 수밖에.
가령 잠재적 공범 혹은 방관자라고 할 수 있는 선수들 사이에서도, 친분관계가 있는 다른 선수에게 남몰래 알려주거나 하는 식으로.
‘안 걸리면 된다고 생각했겠지. 걸리지만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사실 모든 일이 그렇다.
결국 안 걸리면 되는 거지.
가령 부정투구의 경우, 사무국에선 엄격히 금하고 있지만, 암암리에 파인타르가 자주 사용되는 것이 현실이다.
걸리지만 않는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니까.
애스트로스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고. 우리는 그저, 분석 기술의 발전을, 조금 더 현명하고 영리하게 사용하는 것뿐이라고.
허나, 결국은 걸렸다. 그것도 아주 명확한 실마리가 잡혔지. 모든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애슬레틱스··· 작정하고 칼을 갈았어.”
꼼꼼하고, 철저한 보고서에서 느껴졌다. 애슬레틱스가, 이 문제를 쉽게 넘어갈 생각은 없어 보인다는 것이.
올해, 떠들썩하게 있었던 보스턴 레드삭스의 애플워치 건처럼 설렁설렁 넘긴다면···
그들 구단에서라도 자체적으로 언론이나 미디어를 통해, 대중들에게 공개하겠다는 것까지도.
‘협박이자, 제안이군.’
이건 명백히 협박이다.
사무국이 그들을 두둔한다면, 그 대신 자신들과 척을 져야만 할 것이라는 협박이다.
그러면서도 제안이다.
보고서를 올려, 사무국 차원에서의 공정한 조사와 징벌을 바라겠다면서, 손을 건넨 것이다.
보고서를 올린 것도, 그 이외의 자료도 공유하겠다는 말들도.
‘만약 터진다면···’
핵폭탄이 되겠지.
다른 것도 아니고, 월드시리즈 우승팀이니까.
거기다 원래도 휴스턴 애스트로스는 그리 보는 눈이 곱지는 않은 구단이기에. 그 여파는 더욱더 거세리라.
‘만약 포스트시즌에서도 사용한 사실이 적발된다면, 그때부터는 문제가 더 커질 테고.’
간단하게 말해서.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이번 포스트시즌 상대 팀은 모두 다 ‘공룡’이다.
디비전에서 맞붙은 레드삭스.
챔피언십의 양키스.
월드시리즈의 다저스까지.
그야말로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인기 팀 셋과 한꺼번에 맞붙은 셈이지. 그들의 팬들이 뭐라고 말할까? 어떻게 생각할까?
이 모든 것이 터졌을 때, 그 여파는 어디까지 퍼져나갈까?
‘그나마 레드삭스는 낫겠지.’
그들도 똑같은 치팅을 벌였는데도, 사무국의 보호에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으니까.
그나마 레드삭스는 조금은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일 거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다저스는 참지 않을 것이라는 거다.
오랜 시간만의 구단의 우승 도전이, 더러운 치팅에 무너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범위 자체는 국소적일 것이나. 그 폭발력만큼은 과거의 여러 스캔들에 못하지 않겠지.
‘버드가 이런 느낌이었군.’
그는 버드 셀릭을 기억했다.
그의 오른팔로서 활동하며, 커미셔너 역시 그의 후계자로서, 왕좌를 물려받은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맨프레드가 기억하는 버드 셀릭의 모습 중, 그가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은, 단연 그 자신이 만들어낸 ‘영웅’들이 약물로 추악하게 무너졌을 때였다.
그가 일궈놓은 제국, 메이저리그라는 이름의 제국 전체가, 무너지기 시작했으니까.
실제로 그 이후로 쭉 내리막을 걷다가, 올해, 확연히 늘어난 홈런과 Go라는 새로운 슈퍼스타의 등장으로 조금 반등하기 시작했고.
‘그래도 그때보다는 조금 더 낫겠지.’
그나마 스테로이드 때보다는 낫다. 그땐 정말로 야구 자체가 끝장나버릴 것 같은 분위기였으니까.
지금은 그나마 괜찮겠지.
이대로 품고 간다면, 문제가 생기겠지만, 애슬레틱스가 내민 손을 잡고, 휴스턴 애스트로스를 ‘제물’로 바친다면. 구단 하나가 멸망하는 선에서 끝날 테니까.
“하···”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애슬레틱스가, 빌리 빈이 어째서 자신에게 이렇게 선량하게 손을 내민 것인지.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일 줄 알고, 이런 보고서를 먼저 올려보내고, 자료 공유까지 흔쾌히 쾌척하는 것인지.
‘시범경기 전에 끝내자는 뜻이군. 시간을 들이지 말고. 확실하게.’
괜히 시간을 끌 필요 없이, 함께 손을 잡아, 애스트로스를 무너뜨리자는 것이겠지.
정규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휴스턴 애스트로스가 가장 크게 흔들릴 수 있는 순간에.
‘매리너스는 애매하지. 레인저스는 이제 리빌딩을 시작해야 하는 시기고. 에인절스는 푸홀스라는 거대한 암이 존재해.’
그런 상황에서 애슬레틱스가 날아오르기 위해 치워야하는 것은 딱 하나, 휴스턴 애스트로스 밖에 없다.
그런 애스트로스를, 아예 링 위에도 올리지 않겠다는 것이리라. 애슬레틱스의 보다 더 확실한 비상을 위해서.
제 자신들을 위해 사무국을, 그리고 커미셔너인 롭 맨프레드 그의 숨통을 옭아매고, 이용하겠다는 것인데.
그것이 무척이나 불쾌하면서도.
“제퍼슨.”
-네, 롭,
“조사팀 꾸리세요. 강도는 지난번, 레드삭스 때보다 더 강하게. 철저하게 싹 다 털어버릴 정도로.”
-···목표는 어딥니까?
“휴스턴 애스트로스. 월드시리즈 우승팀의··· 전자기기를 이용한 사인 스틸입니다.”
그 손을 쳐낼 수가 없었다.
이걸 쳐낸 순간, 애슬레틱스의 공격 대상에는 애스트로스만이 아닌, ‘무능한’ 사무국도 포함될 테니까.
물론 애슬레틱스 ‘따위’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인기가 올라갔다고는 하나, 리그에서 가장 최하위에 머무르는 스몰마켓이니. 그들의 발언력은 리그 내에서 그리 강력하지는 않으니까.
허나, 그렇기에 가장 큰 피해자 ‘후보’라고 할 수 있는 다저스를 비롯해서, 그 밖의 애스트로스에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진, 여러 구단과 손을 잡겠지.
그에 동조하는 구단이 일정 숫자를 넘기 시작한다면, 그때부터는 정의를 저버린 사무국과 커미셔너를 향한 ‘쿠데타’도 함께 시작될 테고.
-알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건 핵폭탄이다.
행복감에 젖어 있을 일본제국을 무너뜨린 '뚱보'와 '꼬맹이'처럼, 어쩌면 새로운 제국이 될지도 모르는 애스트로스를 몰락하게 만들 핵폭탄.
그러니···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정도로 끝내야겠지.’
최대한 파급력을 줄여야했다.
상호확증파괴처럼, 그 이상 번지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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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돌아온 뒤, 엄청난 인파를 마주했다. 정말 장난이 아니었지.
‘브라이언도 좀 당황한 눈치였어.’
심지어는 나한테 미리 주의를 줬던 브라이언조차, 그 정도의 사람들이 몰릴 줄은 몰랐던 건지.
내 앞에서 보기 드물게, 굉장히 당황한 듯한 모습을 보여줬었다.
뭐, 그 뒤에는 오히려 내 인기가, 그와 보라스 코퍼레이션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것 같으니, 만족스럽다는 반응을 보이기는 했지만.
“어우, 창문 좀 열어 놔! 어둠의 자식도 아니고, 왜 맨날 창문을 닫아.”
“창문 열면 춥잖아. 한국 진짜 더럽게 춥네.”
“한동안은 한국 와서도 얼굴 보기 힘들더니, 이젠 너무 집에 박혀 있는 거 아니야? 누가 보면 백수인 줄 알겠어.”
그 이후로는 다시 일을 조금 했다. 워낙 제안들이 좋더라고. 휴대폰, 자동차, 광고가 엄청났지.
일은 미국에서 질리도록 하기는 했지만, 액수가 엄청난 터라, 막상 제안서를 받으니 ,거절하지 못했다.
‘어쩐지 브라이언이 한국을 따라오더라. 일 시키려고 그런 거였어.’
내년에는 같이 한국 가자고 하면 바로 막아야겠네.
그래도 며칠 또 고생한 뒤, 브라이언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고, 나는 계속 집에 틀어박혀서, 겨울잠 자는 곰처럼 지냈는데.
‘그래서 그런가, 계속 마음이 허~하네.’
할 일이 사라지고, 지루함이 시작되면서부터,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품고 있던 불쾌감이 다시금 스멀스멀 자라났다.
약간의 자괴감도 있었고.
다르빗슈말이야.
정말로,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건가? 내가 그의 커리어를 망칠 수도 있지만. 이대로 가만히 방관한 것 때문에 그가 무너질 수도 있는 건데.
난 기본적으로 선하지는 않은 사람이지만, 그래도 다른 이의 불행을 편하게 볼 정도로 나쁜 놈도 아니다.
어쩌면 같은 투수이기에, 그 여파를 더욱더 잘 아는 만큼, 더 마음이 가는 걸지도 모르고.
“···엄마 말처럼 계속 집안에 틀어박혀 있으니까, 사람이 너무 늘어지네.”
“운동하려고? 브라이언 씨가 그건 금물이라고 했잖아.”
막상 또 나간다니까 걱정하시네. 혹시라도 내가 지루함을 못 참고 몸을 굴릴까, 걱정스러웠던 건지.
브라이언이 부모님한테도 단단히 세뇌를 걸어뒀구만. 아주 감시자가 다 됐어.
“슬슬 겨울 훈련할 때인데, 거기나 가야지.”
“거기?”
“학교.”
이대로 계속 늘어져 있으면, 찝찝함이 더 커지면 커졌지, 가시지는 않을 것 같았다. 뭐라도 해서, 생각을 정리해야겠지.
생각해보니, 한국 돌아왔으니까, 모교에서도 내심 기다렸을 텐데. 배때지에 기름이 차서 그런가, 그걸 생각 못했네.
옛날에는 제발 훈련에 끼워달라면서 감독님 바짓가랑이 잡았었는데, 이래서 사람이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가 다르단 말이야. 반성해야겠어.
“감독님한테 종종 연락이 오던데, 잘됐네. 가서 힘 빡 주고, 자랑 좀 하고 와.”
엄마는 내심 잘난 자식이 아무리 휴식이라고 해도 집안에만 틀어박혀서 떵떵거리지 못한 게 아쉬웠었나 보네.
음, 하긴. 엄마 기 좀 살려 드려야지. 모교에서 모가지에 힘 좀 주고 나면, 엄마도 어디 가서 자랑하기 좋을 테니까.
그리고···
‘감독님이라면 뭐라도 해답을 주시겠지. 어느 쪽으로든지.’
지금처럼 계속 혼자 찝찝함에 끙끙 앓는 것보다는 나을 거고.
“떵떵거리는 거, 제대로 해보자고. 엄마, 출장뷔페 같은 거 알아?”
“출장뷔페?”
뭐,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후배들을 위해서 돈지랄 좀 하다보면, 기분이 풀리겠지.
지금 같은 정신 상태로 12월 말에 들어서서, 트레이닝 시작하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마음을 푸는 게 나을 테니까.
돈 왕창 벌어서 뭐해? 쌓아둘 게 아니라, 왕창왕창 써야지.
지난번은 메이저리거(진)이라서, 치킨 정도로 끝냈지만. 이번엔 메이저리거, 그것도 가장 잘나가는 메이저리거의 '부'를 이번에 아주 확실하게 과시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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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명문!>
<메이저리거 고유석 배출!>
언제부터 우리가 야구 명문이었을까, 확실한 건 난 모르는 이야기다. 우리가 명문이라고? 개도 안 웃겠네.
최소한 내가 기억하는 동안에는 야구부 성적이 좋았던 때가 없을 텐데 말이야. 프로에 진출한 사람도 별로 없고.
근데 나 하나 때문에 갑자기 야구 명문고가 됐네.
‘하긴, 나 정도면, 웬만한 프로 선수 열 명 몫은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명문이긴 하지.’
미리 간다고 연락을 줘서 그런가, 아주 삐까뻔쩍하게 맞이하고 있는데, 기분이 묘하구만.
‘애들도 다 기다리고 있었네. 무슨 국빈 방문도 아니고···’
운동장으로 가니, 야구부도 쭉 늘어서 있었다. 평소라면, 졸업하는 3학년은 취업이나, 프로 진출 문제로 고민하고.
나머지는 한창 동계훈련으로 바쁠 시기인데, 훈련에서 빠져서 그런지, 아니면 정말로 내가 좋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다행히 후배들은 꽤나 기대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는··· 교감 아니면 교장이네. 이사장일 수도 있고. 아니면 행정 쪽?’
감독님은 그리 표정이 좋지는 않았다. 너무 호들갑을 떠는 것 같아서, 쪼끔 그렇다는 거겠지.
다행히 내 덕분에 자리를 지켰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여전히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안심이 되는구만.
그 옆에는 아마도 야구부 관계자가 아닌, 학교나 재단 쪽 인사인 것 같고.
“하하하, 고유석 선수 이것 참, 이렇게 모교에 다 방문해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 뭐, 예. 와야죠. 한국 왔는데, 한 번쯤은. 감독님 얼굴이라도 뵈어야 하고.”
역시 좀 부담스러워.
내가 무슨 동문회 회장 같은 느낌이 됐잖아. 장학금이라도 찔러줘야 할 것 같은 분위기라고.
사실 야구부를 위한 기금 정도는 이미 말을 하기는 했는데, 직접적으로 금전을 대줘서 그런가, 너무 극진하네.
학부모 같은 사람들도 제법 많았는데, 아마도 아들 선배로서 내가 직접 학교 왔다고 하니, 한번 들른 거겠지.
저번처럼 애들 밥이나 좀 맥이려고 했더니, 일이 너무 커졌구만.
“고유석 선배님은 메이저리그에서···”
“고유석 선수님은 혹시 어떤 훈련법으로-”
애들도 아주 극단적인 존대를 보이며 날 낯간지럽게 만들었다. 작년에도 메이저리거(진) 타이틀을 달고 가니까. 보는 눈이 좀 다르긴 했었지만.
올해는 무슨··· 내가 뭐 사이비 교주도 아니고, 애들 세뇌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좀 그렇네.
장학사라도 되는 것처럼, 훈련하는 모습을 참관까지 했을 때, 미리 예약했던 출장뷔페가 오고 나서야,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역시 뭐든 먹여야 한다니까.
“어우, 감독님 보러 온 건데, 이제야 같이 대화 좀 하겠네요.”
“그러려니 해. 나도 솔직히 적응이 안 돼. 갑자기 세계 최고의 투수를 길러낸 명코치이자 명장이 돼버렸어. 유석이 너, 잘해도 너무 잘했잖아?”
나보다 앞서서 이런 것들을 느꼈던 건지, 감독님도 상당히 힘들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셨다.
하긴, 저번에도 그러셨었지?
무슨 프로팀 코치 제안도 오고, 다른 학교에서 스카우트도 하려고 한다고.
야망이 큰 분은 아니라서, 그냥 딱 이 정도로 머물기를 바라셨던 분이시니, 굉장히 부담스러웠겠어.
“그래서, 온 이유가 뭐야?”
“뭐, 그냥 뭐. 이 학교의 자랑이자, 야구부 최고의 아웃풋으로서 후배들 구경이나 온 거죠.”
내 말에 감독님은 그런 말은 하지도 말라는 것처럼 피식 웃으셨다.
“그런 녀석이 한국 돌아오고 한참 뒤에 와? 분명히 까먹고 있다가, 다른 이유가 있어서 온 거지.”
귀신이네.
나이가 들면 다 저렇게 되나?
그렉도 그렇고, 다른 베테랑들도 그렇고. 사람 속마음을 읽는 게, 현역 투수인 나보다 더 칼 같단 말이야.
딱히 속일 이유도 없었기에, 그냥 편안하게 속내를 털어놓으니, 감독님도 미묘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것 참··· 고약한 문제네. 덮어두기는 찝찝하고, 말하자니 걱정되고. 아주 고약해.”
“그쵸?”
“그나저나, 그건 확실해? 네 생각에. 보통 일이 아닐 텐데. 월드시리즈 우승팀이 그런 일을 저지른 거면.”
“확실해요. 사인 훔친 것 자체는. 거의 100% 정도. 사실 사인 훔치기야 큰일은 아니잖아요?”
“그 사인 훔치기가 평범하지 않아 보인다며?”
“그건··· 확신까지는 아니고, 그냥 느낌정도?”
생각해보면 진짜 큰일이네.
솔직하게 말하면, 난 사인 훔친 것 자체는 100%고, 전자기기 같은 걸 동원했을 가능성도 거의 80%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그런 녀석들이 덜커덕 월드시리즈까지 우승해버렸으니. 만약 이게 전부 다 진자라면, 장난 아니게 큰일이기는 하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나한테 하는 이유는?”
“어떻게 할까요? 감독님 말처럼 덮기엔 찝찝하고, 말해주자니 그것도 좀 마음에 걸려서.”
내 물음에, 골똘하게 고민하던 감독님은 이내 입을 열었다.
“유석이 네 입장에선, 말 안하는 게 맞아.”
“그럴까요?”
“괜히 알려줬다가 문제가 생긴다면, 자칫 유석이 너한테도 화살이 갈 테니까. 아무리 그게 선의라고 해도. 내가 애들한테 뭘 가르치는 거랑은 다른 이야기지.”
그렇긴 하지.
내가 무슨 애들 코치도 아니고. 불확실한 가능성에 기대서, 누군가의 앞날을 좌지우지하는 건 좀 그렇긴 하니까.
괜히 무언가 일이 잘못됐을 때, 나에 대한 원망을 품을 수도 있고. 그런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지만, 모르는 일이지.
여전히 조금 찝찝하지만, 고개를 끄덕였을 때, 감독님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같은 야구인이자, 투수로서는, 알려줘야지. 그게 같은 길을 걷는 사람끼리의 의리니까. 유석이 네가 느끼는 찝찝함도 그런 이유고.”
“의리···”
그 단어가 귀에 박힌 건지, 몇 번이고 되뇌었다. 의리라··· 참, 추상적인 말이지.
그리고 감독님은 의리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어떤 의미에선 이것 역시 제자, 고유석 본인을 위한 조언이었다.
‘계속 찝찝하지 말라는 거겠지. 그냥 훅 털어버리라고. 뒷일이 어떻든지 간에.’
계속 이렇게 이 일에 꽂혀서, 계속 신경을 쓰는 것 역시, 별로 좋은 일은 아닐 테니까. 계속 발목이 잡히겠지.
그보다는, 차라리 나중에 원망을 듣더라도, 무책임하게라도 훌훌 마음에서 털어버리는 것이 더 낫다는 뜻이리라.
“그냥 그런 이야기가 있다, 그런 느낌을 받았다, 고려하길 바란다. 그 정도로 끝내. 너무 깊이 들어가지는 말고. 결국 모든 건, 본인이 선택하는 거니까.”
“그래야죠, 뭐, 그 정도의 선수라면, 알아서 잘 할 테니까.”
결국 내가 뭐라고 말하든지 간에, 모든 선택은 다르빗슈 본인이 하는 거기도 하고.
생각해보면 좀 웃기네.
내가 뭐라고, 내 말의 파급력을 그렇게 크게 여겼을까?
그 정도로 커리어가 탄탄한 선수 입장에선, 오히려 한순간 떠오른 애송이의 치기 어린 개소리로 여길지도 모르는데.
그러니 철저하게 나를 위해서, 그냥 훅 털어버리는 쪽이 어쩌면 더 나을지도.
“잠깐 자리 좀 비울게요. 어디갔냐고 물으면, 뒷간 갔다고 말해주세요.”
“내가 무슨 매니저도 아니고··· 바로 하려고?”
“계속 사로잡힐 바에는, 그냥 훅 처리하고 늘어지게 쉬는 게 낫겠죠.”
그렇게 말한 뒤, 휴대폰을 들고 잠시 자리를 비우려던 찰나, 손안의 휴대폰이 먼저 요란하게 울렸다.
“음? 브라이언이네?”
“누구, 에이전트?”
“네, 갑자기 전화가 왔네요. 미국 돌아간 지 얼마 안 됐을 텐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
브라이언.
얼마 전까지 한국에서도 나를 열심히 굴린 뒤 미국으로 돌아갔었는데, 다시 연락이라니.
‘연봉인가?’
드디어 구단의 올해 연봉 통보라도 나왔는가 싶어서, 잠시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연결한 순간.
“브라이언, 무슨 일-”
-Go.
생각보다 훨씬 묵직하고 진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구단이 말했던 큰일이, 제대로 터졌습니다.
“···뭔데 그래요? 혹시 저 트레이드 됐어요? 그러면··· 진짜 엄청나게 큰일이기는 할 텐데.”
이 정도면 소니가 아니라, 내가 트레이드 된 수준인데, 혹시나 싶어서 물었지만, 당연하게도 그건 아니었다.
빌리 빈이 계속 살고 싶으면, 날 트레이드할리는 없지.
-폭탄이 터졌습니다. 전자기기를 이용한 사인스틸.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그에 관련된 기사가 나오고 있어요.
느낌이 왔다. 그가 무엇을 말하는 건지.
‘어쩐지, 조용하게 넘긴다 싶더라니··· 칼을 갈고 있었구만.’
지난번, 사인 훔치기에 대한 말을 프런트로 보냈는데도, 별다른 반응이 없어서, 그저 그런 평범한 사인 훔치기라고 흘려 넘긴 줄 알았더니.
오히려 강한 확신을 갖고, 비수를 더욱더 날카롭게 벼린 것 같았다.
-아직 정확하게 정체가 밝혀지지는 않았습니다만, 사무국의 조사단이 애스트로스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대대적으로 조사를 나선 것을 보아··· 이미 증거도 확보한 상황이겠죠.
“그렇겠죠, 사무국이 구단과 척지는 건 쉽지 않으니까. 이건 완전히 싸우자는 건데. 무언가 확신이 있었기에 움직였겠죠.”
그래, 가장 빛나는 순간에, 그 날개를 찌르기 위해서.
생각보다 무덤덤한 내 반응에 브라이언은 조금 당황한 것 같았지만, 대충 무언가 언질을 받았을 거라고 여긴 건지, 딱히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 뒤로도, 트레이드 동향이나, FA, 포스팅 같은 것에 대한 소식과, 오프시즌 준비를 이야기해준 뒤, 통화는 끝마쳤다.
“왜?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연봉이라도 엄청 올랐나?”
“아뇨, 그냥··· 마지막 걱정이 사라져서요. 괜한 걱정이었네요.”
나 혼자 괜히 뻘짓했네. 이렇게 재대로 터질 줄도 모르고.
브라이언도 거의 확신하고 있으니, 내가 굳이 이야기해주지 않더라도, 다르빗슈 쪽에도 이미 전해졌겠지. 알아서 대처할 거고. 쓸데없이 걱정했어.
음, 그냥 애들 밥이나 맥인 셈 치고, 앞으로도 계속 트레이닝 전까지 늘어지면 되겠구만. 아무런 걱정 없이, 내년이나 준비하면서 말이야.
찝찝함과 불쾌감으로 가득했던 마음이 시원한 사이다를 한잔 마신 것처럼 싹 씻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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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기기를 이용한 사인 스틸, 그 주인공은 월드시리즈에 있다?>
<휴스턴 애스트로스, 첫 번째 영광에 얽힌 추악한 비밀?>
<단독보도)휴스턴 덕아웃에서 모니터가? 관련자들 증언이 잇따라···>
트리거가 당겨진 순간.
총알은 발사됐다.
더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히 강력하게.
사무국이 대대적인 조사에 나섰다는 이야기는 순식간에 전 리그를 휩쓸었고. 시즌 종료 이후부터 은근하게 나오던 의혹의 주인공이, 이미 시들해진지 오랜 레드삭스가 아닌.
올해 최고의 영광을 차지한 챔피언일지라도 모른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을 때. 붕괴는 시작됐다.
방조하거나, 소극적인 동조를 하던 이들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이들을 팔아넘기기 시작했으니까.
물론 어쩔 수 없이 지켜보며, 기회를 엿보던 양심적인 이들도, 이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말이다.
[#Dodgers]
[그러니까··· 다 치팅이었다는 거지? 우리가 7차전까지 가서 진 거도. 다르빗슈가 털린 거도?]
└아직 확실하진 않지.
└사인 스틸을 한 건 맞는 것 같은데, 포스트시즌이나 월드시리즈에서도 했는지는 아직 불분명해.
└어쨌든 그 X같은 놈들이 그런 방법을 동원해서 성적을 올렸다는 거 아니야?
└아직 모른다니까? 사무국 차원에서 발표도 없었고.
└당장 애스트로스의 우승을 박탈해버려! 우리가 진짜 우승자라고!
└X발 어쩐지 투수들이 너무 쉽게 털리더라!
일단, 롭 맨프래드의 예상처럼, 다저스는 불타올랐다. 아주 격렬하게.
그저 아쉽게, 마지막 순간에 놓친 줄만 알았던 우승이, 사실은 그보다 조금 더 더럽게 꼬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됐으니까.
[#Dodgers]
[다르빗슈 한테 너무 미안해···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욕 엄청 했었는데···]
└다르빗슈는··· 진짜 억울했을 거야.
└뭐? 투구 습관을 읽어? X까고 있네, x새끼들.
자연스럽게 이번 월드시리즈 패배의 가장 큰 원이으로 지목됐던 다르빗슈에 대한 동정 여론 역시 생겨났고 말이다.
이렇듯 다저스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토해내고 있었다면, 애스트로스는 그저 혼돈이었다. 이 거대한 스캔들의 중심이, 자신들이었으니까.
[#Astros]
[아니 X발 이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왜 치터야?]
└아직 조사 결과도 안 나왔는데, 벌써부터 몰아가네.
└다저스 팬들이 많긴 많나 봐.
└우승한 게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해. 괜히 애먼 사람 잡지 말고.
└레드삭스 때는 흐지부지 넘어가더니, 우리한테만 열 올리는 거 보면. 그냥 비인기팀이 잘나가서 마음에 안 드는 거야.
└다르빗슈 털린 건 자기들 홈인 거 기억도 안 나는 건가?
아직 명확한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기에, 처음에는 그저 분노했다.
정말로 자신들이 치팅을 저질렀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는데도, 이미 죽일 놈으로 몰렸으니까.
특히나 아직 첫 우승의 영광이 식어버리지 않았기에, 그런 반응에 격렬하게 저항하는 애스트로스 팬들이 많았지만.
[#Astros]
[만약··· 만약에 정말로 우리가 그걸 해버린 거라면··· 우승 박탈당하는 건가?]
└글쎄, 모르지···
└하아··· 첫 우승이라고 좋아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만약 정말로 그런 거면, 차라리 우승을 안 하는 게 나아! 그딴 식으로 할 거면 안 하는 게 낫다고!
└X같네.
공포와 실망감에 떠는 이들도 적지는 않았다. 오랜 웅크림 끝에, 드디어 날아오르는 줄 알았건만. 그 날개짓이 어쩌면, 정당하지 못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주는 박탈감과 배신감이 팬들을 뒤덮었다.
그 외에도 롭 맨프레드의 예상처럼 양키스나 레드삭스에서도 반응은 나왔다.
물론 레드삭스는 그들 역시 저지른 죄가 있기에 조금은 미묘했지만, 양키스는 다저스에 밀리지 않을 만큼 격렬했다.
그 밖에도 수많은 구단과 그 팬들이 유감을 표하거나, 분노에 떨었고 말이다.
그렇게 월드시리즈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부터, 메이저리그 전체가 새로운 파란으로 뒤흔들렸고. 그런 혼돈 속에서 시간이 지나.
어쩌면 겨울 동안, 한 해의 마지막 동안 모두가 주목했던 조사의 결과가 예상보다 훨씬 이르게 나왔다.
부디 이 모든 것이 꿈이기를, 그저 악몽에 불과하기를, 이기지 못한 자들의 저열한 질투심의 발로이기를 애스트로스의 팬들은 간절히 바랐지만.
<사무국 조사단,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전자기기 사용 적발!>
<사무국 중징계 논의? ‘어쩌면 애스트로스의 우승이 박탈될지도···’>
<선수단의 주동자는 카를로스 벨트란? 그는 ‘극구부인’!>
철저한 조사의 결과는 애스트로스의 몰락이었다.
2017년의 마지막은, 처참한 난도질로서 서서히 막을 내렸다.
<오타니 쇼헤이,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와 계약 성사!>
<오타니, ‘Go와 맞서고 싶었다!’, 최고에게 도전장을 내밀다!>
<애슬레틱스와 말린스의 긴밀한 논의?>
<애슬레틱스, 새로운 도전의 시작? 윈나우를 위한 전력보강!>
<다시 시작된 말린스의 파이어 세일? 디고든-옐리치-오즈나-스탠튼, 최강 화력의 4인방의 해체!>
<빌리 빈, ‘내년 오클랜드의 목표는 월드시리즈’, 다음 시즌에 대한 목표를 밝혀···>
한 팀의 몰락과는 별개로, 또 다른 야망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