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179화 (179/316)

179화

11월 1일.

우린 모두 다 집에서 머물렀다. 나, 브라이언 그리고 대니얼, 이 셋 말이야.

한 시즌의 마지막이잖아?

아무리 남의 집 잔치라고 해도, 구경 정도는 해야지.

그렇다고 해서 경기장에 직관까지 하러 갈 정도로 흥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다르빗슈··· 좋은 투수죠. 저번 경기는 아쉬웠을 텐데, 오늘은 좀 다를까요?”

“뭐, 지켜봐야 알겠죠.”

어떤 의미에선 아주 제대로 흥행이 된 월드시리즈라고 할 수 있다.

한 팀이 원사이드하게 이기는 것 보다는, 7차전 마지막의 마지막 승부까지 이어지는 편이 더 재밌잖아?

물론 직접 하는 입장에선 엄청나게 쫄리겠지만, 그거야 나랑 상관없으니까.

‘다르빗슈··· 저번 경기는 이르게 털리던데.’

7차전의 선발투수는 3차전에 이어, 다시금 다르빗슈 유.

제대로 경기를 보지는 못했지만, 1.2이닝 만에 4실점을 하면서 내려갔다고 하던데.

솔직하게 말하면, 의심을 지울 수는 없었다. 내가 본 게 있다 보니, 그냥 그렇더라고.

‘거기다 미닛메이드 파크였으니···’

물론 나한테 호되게 당한 만큼, 애스트로스가 진즉에 그 개짓거리를 집어치웠을 가능성도 무시할 순 없지만···

이래서 나쁜 짓 하면 안 돼. 한번 걸리고 나니까, 괜히 의심스럽잖아.

그런 미묘한 찝찝함 속에서 월드시리즈의 마지막 경기가 시작됐고, 생각은 더욱더 아리송해졌다.

-다르빗슈 유! 3차전에 이어··· 7차전에서 무너집니다!

다르빗슈는 다시금 무너졌다. 지난 경기보다 더욱더 처참하게. 또다시 2회를 채 채우지 못한 채. 1.2이닝 5실점으로.

“와우.”

대니얼은 그 말 한마디만을 남겼다. 그럴 수밖에. 월드시리즈 역사상, 7차전에서 선발투수가 이 정도로 털리는 건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니까.

부럽게 생각했고, 약간의 동경심도 있었던 투수였기에, 나도 조금은 머리가 멍해졌고.

“애스트로스가··· 생각보다 더 화력이 강하군요.”

“네··· 그런 것··· 같네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조금 복잡했다. 만약 오늘 경기에서 다르빗슈가 호투를 보여줬다면, 오히려 확신했을 거다.

다저스의 홈, 다저 스타디움인 만큼, 역시, 저 자식들 지난 경기는 사인 훔친 거구나, 했을 테니까.

그런데 홈에서도 무너졌으니, 뭔가 조금 확신이 꺾이네.

원정에서까지 대담하게 사인을 훔쳤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으니까. 그것도, 조금은 평범하지 않은 방법을 통해서.

‘그러면 혹시 지난번도 사인 훔치기가 아니었던 건가?’

어쩌면 나한테 조롱당하고 마음을 고쳐먹은 걸지도. 괜히 생각이 복잡해서 그런지, 경기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휴스턴 애스트로스가! 구단 역사상 최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합니다!

다르빗슈가 무너진 이후.

다저스는 일어서지 못했다.

단 한 점만을 간신히 내며, 결국 역전이나 동점을 만들어내지 못했으니까.

너무 이르게 무너졌기에 7차전 치고는 조금은 심심했던 경기의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잡혔을 때. 캐스터는 우렁찬 목소리로 포효했다.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구단 역사상 최초의 우승이었으니까.

“충격적이네요, 저번 월드시리즈랑 마찬가지로.”

“그런가요?”

“사실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기세가 좋기는 했죠.”

두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기에, 그저 구단 역사상 최초의 우승을 차지한 애스트로스에 감탄할 뿐이었지만.

나는 마지막까지도 찝찝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지난, 2016년의 월드시리즈, 염소의 저주가 풀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올해 월드시리즈 역시 조금은 충격적이었다.

나한테 있어서는 말이다.

‘그냥··· 애스트로스의 기세가 좋았던 거겠지? 다른 거 없이.’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기분이 더러울 것 같거든.

“월드시리즈까지 완전히 끝났으니··· 이젠 진열장을 준비해야겠군요.”

“진열장이요? 아, 진열장.”

월드시리즈는 찝찝하게 끝났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내 영광은 이제 시작이구만.

시즌이 완전하게 끝났으니, 진열장을 꽉꽉 채울 정도의 상을 쓸어 담을 시간이 왔으니까.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때도 온 것이고.

####

<휴스턴 애스트로스, 구단 역사상 최초의 월드시리즈 우승!>

<윌리 메이슨 상(월드시리즈 MVP)의 주인공은 조지 스프링어! 4경기 연속 홈런의 괴력!>

[#Dodgers]

[X발 놈의 다르빗슈가 모든 걸 망쳤어! 두 경기 다 1.2이닝? 4실점이랑 5실점? 이게 뭐야! 얘 우승하려고 데려온 거 아니었어?]

└하아··· 드디어 우승이구나 했는데, X같은···

└그레거 저번 시즌에 Go를 트레이드로 데려왔어야 돼! 생각해봐! 커쇼에 이어서 Go가 다음날 선발투수로 오르는 모습을!

└그랬으면 엄청난 나비효과가 일어났겠네. 빌리 빈이 드디어 잘리고, 우린 우승하고. 그리고 Go는 한 시즌만에 연장계약을 제안 받았겠지. 거지 오클랜드랑 다르게 우린 부자니까.

└Ryu는 부상 후유증으로 시즌 망치고, 기대했던 다르빗슈는 월드시리즈에서 망하고. 왜 우리 팀 아시안만 이래···

└Ryu는 어쩔 수 없잖아. 본인이 부상을 원한 건 아닐 텐데.

└그냥··· X같은 시즌이라고 생각하자. 그래도 주축 선수들이 다들 젊으니까, 다시 도전할 수 있겠지.

└커쇼는··· 모르겠다. 커쇼가 아직 쌩쌩할 때, 우리가 우승할 수 있을지. 이젠 잘 모르겠어.

월드시리즈가 끝난 뒤.

축제로 접어든 휴스턴과 달리, LA에는 그저 우울함만이 감돌았다.

29년 만의 월드시리즈 우승이라고 생각했건만.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배한 것이니까.

그것도 기대했던 투수들이 줄줄이 털리면서, 완전히 애스트로스의 화력에 찍어눌린 느낌이었지.

그렇기에 팬들의 살망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특히나 가장 핵심적인 패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르빗슈 유에 대한 원망감도 상당했다.

우승을 위해서 데려왔던 선수이건만, 정작 월드시리즈라는 무대에서 상대팀에게 처절하게 망가지며, 팀에 가장 큰 피해를 끼쳤으니까.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분노한 마음에 그의 SNS에 욕설이 가득 담긴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고 말이다.

휴스턴이 축제를 열고, LA에 장례식이 열렸다면, 오클랜드는 어땠을까?

[#A’s]

[별 재미도 없는 월드시리즈가 드디어 끝났네. 자, 이제 닥치고 투표 좀 까봐.]

└셋 다 만장일치가 아니면··· 사무국에 불 지를 거야.

└맨프레드가 무슨 죄라고? 기자 새끼들이 X신인 거지.

└삼관왕은 확정 맞지?

└무조건이지. 만장일치가 중요하지, 수상 자체는 별 상관없어. 이미 확정이야.

└아직도 안 믿겨. 우리 팀에서 이런 선수가 나왔다고? 애슬레틱스에서? 신인왕-사이 영-MVP를 한번에 타는 선수가?

└아마 내년 정규시즌 시작하면, 콜리시엄에서 시상식도 할 텐데··· 벌써부터 바지가 흥건하네.

└실버 슬러거도 주면 안 되나? Suck이 이번 시즌 AL 투수들 중에선 제일 잘했는데.

└올해만 잠깐 열었다가 닫으면 딱 좋겠네.

그저 드디어 끝났구나, 하는 반응이었다. 애초에 월드시리즈는 지구 경쟁팀인 애스트로스가 진출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니까.

그보다 더 기대되고, 흥분되는 것들이 그 뒤에 있지.

삼관왕.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했던, 그 아름다운 트리플 크라운 혹은 그랜드슬램에 다가선 고유석의 모습을 그리며, 애슬레틱스 팬들은 그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저런 선수가 그들의 선수였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무수히 많은 영광을 함께할 테니까.

오클랜드 팬이 아니더라도, 그를 눈여겨보고, 응원했던 이들 역시 기대감을 품었고 말이다.

그런 기대감 속에서 하루하루가 지나갔고, 한 시즌의 마지막을 장식할 결과물들이 차근차근 발표됐다.

<2017 MLB AL Gold Glove Award···>

가장 먼저, 골드글러브에서는 아쉽게도 고유석은 수상하지 못했다.

준수하고 안정적인 수비력을 갖추기는 했으나, 대단히 역동적인 느낌은 없었으니까.

애초에 그의 경우, 탈삼진이 압도적인 만큼, 수비 기회 자체가 그리 없기도 했고.

그렇기에 투수 부문의 모든 것을 휩쓸지 못한 것에 안타까워하면서도, 팬들은 그럭저럭 수긍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아쉬웠던 애피타이저를 시작으로 드디어 본 게임이 이어졌고.

<2017 AL Rookie of the Year : Go You-Suck(OAK>

<2017 AL Cy Young Award : Go You-Suck(OAK - 32G 32Gs 235IP ERA 0.50 393K>

<2017 AL Most Valuable Player : Go You-Suck(OAK)>

결과는 모두가 예상한 대로였다.

마치 당연한 수순처럼, 고유석은 기존에 언급됐던 상들을 가뿐하게 휩쓸었으니까.

<역사상 최초로, 신인왕과 사이 영 상, MVP를 동시 수상한 고유석!>

<모두의 예상처럼 2017년의 주인공은 고유석이었다!>

<기자단의 몰표! Go, 모두가 인정하는 2017년 최고의 선수!>

<커쇼에 이어, 11번째 사이 영 상-MVP 동시수상! AL 기준 벌랜더 이후 6년만의 쾌거!>

기대했던 대로 모두 다 만장일치를 쓸어 담으면서 말이다.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2위 표가 조금씩 갈렸을지언정, 1위표는 모두 한 사람을 가리켰다.

신인 최다 홈런 기록을 경신하고, 양키스 프리미엄까지 붙은 애런 저지조차 각각 신인왕 2위, MVP 3위로 만족해야 했고 말이다.

<역사상 가장 긴장감이 없었던 투표, Go의 만장일치는 너무나도 당연했다!>

몇몇 이들은 그것을 더러, 이것보다도 더 긴장감이 떨어졌던 투표가 없었다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사실상 내정자가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만큼 고유석의 시즌이 압도적이었다는 것이기도 하고.

[#A’s]

[MVP는 타자상이나 다름없어서, 솔직히 조금 걱정했는데. 진짜 다행이다.]

└아무리 타자상이라도, 이 성적 찍었는데, 그냥 줘야지.

└혹시라도 만장일치 안 나오면 화내려고 했더니, 기자들이 눈치껏 잘 투표했네.

└꼭 이런 거 투표할 때 보면 괜히 튀는 놈들 있던데. 이번엔 없었나 봐.

└그런 트롤러들도 알았던 거지. 이번에도 그런 장난질하면 정말 뒤진다는 걸.

팬들은 혹시나 했던 걱정을 접은 채,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Yankees]

[이건 사기 투표야!]

└갑자기 왜 지랄이야. 솔직히 Suck보다 훨씬 못한 건 사실이잖아.

└아니, 그거 말고. 그건 나도 이견없어. 만장일치가 당연하지. 내가 사기 투표라고 말한 건 저지가 3위를 한 거 때문이야. 2위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그 땅딸보가 저지보다 더 잘했다고?

└그건 좀··· 이상하기는 하네.

└보니까 알투베가 2위표를 거의 독식했던데, 이러는 게 맞나?

└이해 못할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표가 양분되는 게 정상이긴 하지.

다만 아예 논란이 없지는 않았다. 고유석에 밀렸을 뿐, 신인왕과 MVP를 동시 수상했어도 이상하지 않았던 애런 저지였건만.

그가 호세 알투베의 2위표 독식에 밀려, MVP 투표에서 3위를 기록한 것에 대해 불만을 품은 팬들, 특히 양키스 팬들이 적지는 않았으니까.

고유석은 인정해도, 알투베는 인정 못 하겠다는 반응의 양키스 팬들이 분노를 토해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압도적인 최강자가 존재했던 만큼, 대부분은 무난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마무리 지어졌다.

새로운 지배자의 등극에 기뻐하며, 그를 향해 축복을 날린 사람들이었지만,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어쩌면, 고유석의 삼관왕 만장일치보다 훨씬 더 크고, 자극적이며, 충격적인 이슈가 닥쳐올 줄은.

<사인 훔치기 스캔들? 모 구단이 전자기기를 동원하여 사인을 훔쳤다는···>

└웬 사인 훔치기?

└보스턴 말하는 거잖아. 걔들 애플워치 걸린 거.

└기자라는 놈이 정보가 느리네. 그거 이미 다 끝난 지가 언젠데.

└혹시 다른 팀 아니야?

└딱히 그런 소문은 없었는데?

애슬레틱스가 정규시즌 후반기 내내, 사실상 성적을 버리고 그 대신 갈고닦았던 총알을, 모든 영광이 절정에 이르른 순간, 드디어 약실에 장전했다.

####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뭐, 준비랄 게 뭐 있어요. 집으로 돌아가는 건데. 몸만 가면 되는 거죠.”

“그렇긴 하겠군요. 아, 짐은 미리 새로운 집으로 모두 이동시켜 뒀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오클랜드 내에서 머무르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산호세나, 샌프란시스코, 프리몬트가 더 나을 텐데···”

“적응해서 그런지, 그냥 근처에서 계속 살고 싶더라고요. 멀리 갔다가, 주변 지리를 다시 외우는 것도 귀찮고.”

모든 일은 마무리됐다.

오프시즌으로 미뤄뒀던, 과거의 내가 정말 원망스러웠던 일도, 하다보니 끝이 보였고.

내년에 오클랜드에서 살 집도 미리 구했지. 원래 살던 곳 근처에, 조금 더 좋은 곳으로 얻어뒀는데.

브라이언은 여전히 조금은 못 마땅한 표정이었다. 그냥 오클랜드가 싫은 거지.

난 계속 살아보니까, 막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은 것 같은데 말이야.

어쨌든 할 일도 다 마쳤고, 상도 만장일치로 한 아름 쓸어 담았으니, 이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대니얼은 미국에서 머문다고요?”

“저도 휴가가 있어야죠. 또, 미리 피닉스로 가서 프로그램을 준비해야 하기도 하고요.”

“음, 그건 조금 아쉽네요.”

한국에서도 해야할 일이 있을 수가 있는 만큼, 브라이언은 함께 한국으로 가기로 했지만.

대니얼은 미국에 남아 있기로 했다. 가족들 만나고, 훈련 준비하고, 한창 바쁠 테니까.

흐흐흐, 드디어 해방- 아니아니, 좀 아쉽네. 정말이야. 진짜로. 같이 부대낀 시간이 얼만데, 아 너무 아쉽다.

“행복해 보이시는군요. 고향으로 가시면 맛있는 음식을 잔뜩 드시겠죠? 하긴, 오프시즌인데, Go도 쉬어야죠.”

“네, 뭐 시즌 중에 못 먹었던 것들로 배를 한가득 채우··· 아뇨아뇨, 절대로요. 몸 관리해야죠.”

유도심문에 넘어갈 뻔했어.

황급히 손을 흔드니, 대니얼은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쉬기도 해야 하니, 먹는 거야 괜찮습니다만, 술은 마시지 마십시오.”

“그건 원래도 안 해요. 그런데, 이번 시즌은 어떻게 하고 올까요? 또 벌크업? 아니면 좀 빼야 하나?”

“일단··· 시즌 동안 검토해본 결과, 지금이 딱 좋습니다. 220파운드요. 물론 내년에도 또 인터리그에서 미친 듯이 달리고 싶으시다면··· 감량을 하셔야죠. 무릎이 나갈 테니까. 대신 불확실성이 높은 만큼, 피칭에서 올해 같은 퍼포먼스가 나올지는 의문이지만.”

음, 협박이구만.

내년에 또 슈퍼소닉이고 지랄이고 하면 참지 않겠다는 뜻이야.

그렇게 치고, 달리는 게 좋으면, 살 빼고 그거나 하라는 뜻이지. 피칭은 그냥 포기하고. 그 협박에 일단은 고개를 저었다. 포기했다는 건 아니고. 고개만 젓는 거지.

“그럼, 잘 다녀오십시오. 트레이닝은 12월 말부터 시작하죠. 자세한 날짜는 프로그램을 짜고 나서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2월이면, 작년보다 살짝 이르네요?”

“체력을 더 키우고 싶으시다면서요? 체력이야말로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 천천히 길러야 하는 건데. 더 시간이 필요하죠. 또 해야 할 다른 일도 있고.”

12월 말이라. 대충 한 달 반쯤 쉬는 건가? 사실 쉬는 것 자체는, 이미 정규시즌 끝난 뒤부터 스케쥴 소화한 걸 제외하면 이미 푹 쉬었기에, 큰 상관은 없지.

그렇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뒤, 떠나기 전, 대니얼과 잠깐 악수했다.

“내년에도··· 잘 부탁할 게요.”

“고향에서 잘 지내시다가, 건강하게만 돌아오십시오. 잘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그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공항으로 향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으니까. 아니, 잠깐 갔다 온다는 게 더 맞으려나? 미국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으니까, 말이야.

그렇게 공항으로 향하는 길, 오늘은 손수 운전기사를 맡아준 브라이언은 몇 가지 당부사항을 남겼다.

“아마 입국 하는 대로 기자들이 상당히 많을 겁니다. 정말··· 엄청나게요.”

“그렇겠죠.”

“갑작스럽게 마이크나 카메라를 들이밀더라도, 웬만하면 응대하지 마시고, 간략한 기자회견을 잡아뒀으니, 그때 이야기하십시오.”

아마 엄청나겠지.

솔직히··· 한국 선수가 이런 성적 찍었는데, 반응이 없으면 더 이상하겠네.

설사 스포츠 부문이 아니더라도, 기자란 기자는 죄다 몰려올 가능성이 높다.

한국에서 야구의 인기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사실상 가장 흥행한 스포츠 중 하나니까.

실제로 종종 한국 쪽 인터넷 커뮤니티를 쓱 훑어보면, 내 이야기가 엄청나게 많았고.

그만큼 지금 나를 향한 관심이, 한국에서도 미국만큼이나, 아니, 미국보다 훨씬 더 크다는 뜻이겠지.

브라이언은 기자회견 예상 질문 리스트와 적절한 답변을 이야기해줬다.

“그렇게까지 준비해야 해요? 그냥 평소처럼 하면···”

“물론 그래도 괜찮습니다만. 지금 Go는 워낙 슈퍼스타니까요. 웬만하면 조심하는 게 좋죠. 예전에 Go와 같은 나라 메이저리거가 기자들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고 하던데.”

“아, 그거.”

내 나이대면 누구나 알지.

법규말이야, 법규.

얼마나 억울했겠어.

메이저리거고, 기자들과 친하지 않다는 이유로 온갖 루머에 시달렸는데.

사실 나는 뭐라고 떠들던지 간에, 그렇게 크게 신경쓰지는 않을 것 같지만, 어쨌든 브라이언은 자신의 선수가 그런 일에 휩싸이기를 원치 않는 것 같았다.

“기자회견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어느 정도는 기자들에게 우호적인 뉘앙스를 보여야겠죠. 물론 Go가 내키지 않으시다면, 거절해도 괜찮습니다.”

“하죠, 뭐.그거 얼마나 오래 걸린다고.”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내가 신경쓰지 않는다고 해도, 부모님은 다르잖아? 한국에서 사시니까.

아들이 괜히 욕먹는 꼴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으니, 어느 정도는 장단에 맞춰주면 되겠지.

그렇게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다, 브라이언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구단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구단이요? 뭐, 연봉 때문인가?”

“연봉은 아직 서비스 타임이니, 그쪽에서 알아서 통보할 테고. 그저··· 흔들리지 말라고 하더군요. 오프시즌 동안, 생각보다 큰일이 있을 수도 있다고. 들어보니, 다른 선수들에게도 비슷한 연락이 갔다고 합니다.”

흔들리지 마라···

오프시즌 동안의 큰 일이라면 몇 가지가 잡히기는 하는데.

‘소니가 트레이드되는 건가?’

내가 에이스이기는 해도, 여전히 프랜차이즈 스타이니, 그가 트레이드된다면, 꽤나 큰 혼란이 올 거다. 어쩌면 크리스 데이비스일 수도 있고.

아니면 사실상 클럽하우스의 리더이자, 분위기 메이커인 제드 라우리가 대상일지도 모르지. 나이가 있기는 해도, 그도 제법 값어치가 나가는 선수니까.

‘어떤 쪽으로든, 뭔가 조금은 의미심장하네.’

그런 조언 속에서, 공항에 도착했고, 곧 비행기는 이륙했다. 한국을 향해서.

####

요즘 세상 참 좋아졌어. 비행기 안에서 인터넷도 다 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 지루함에 휴대폰이나 만지작거렸다. 심심하잖아.

영화 같은 걸 보려고 해도, 딱히 마음에 드는 것도 없고.

“혹시 간식 필요하신가요?”

“아뇨, 괜찮습니다.”

퍼스트 클래스라서 그런지, 아니면 내 인기 때문에 그런지, 승무원들이 돌아가면서 무언가를 권유하거나, 지켜보는 게 부담스럽기도 하고.

‘한국은 난리도 아니네. 선글라스 챙기길 잘했어. 찰칵찰칵 거릴 텐데, 맨 눈으로보면 실명하겠지.’

아직 태평양을 채 반도 건너지 않았는데도, 한국에선 벌써부터 기사가 쏟아졌다.

누가 보면 스토커인줄 알겠네. 내 입국 시간은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영웅의 귀환이라거나, 메이저리그를 정복한 위대한 한국인이라거나 하는 낯간지러운 말들도 이어졌다. 사람 부끄럽게스리.

‘어우, 한국 쪽은 부담스러워서 못 보겠다.’

평소 기사나, 인터넷 커뮤니티를 살펴보는 걸 좋아하기는 하는데, 한국은 나를 향한 칭송이 너무 심해서 오히려 좀 꺼려지네.

물론 아시아 최초의 사이 영 수상에, 삼관왕에, 내가 생각해도 안 빨 수가 없기는 한데. 좀 부끄럽잖아.

‘흔들리지 말라고 했지··· 혹시 뭔가를 터트리려는 건가?’

그때, 구단이 모든 선수들에게 전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엄청난 스캔들이라도 있는 건가? 단순히 트레이드 같은 것이 아니라.

‘설마, 승부조작?’

그런 생각도 들어서, 혹시 뭐나 터지지는 않았는가, 기사를 쭉 훑었지만, 그다지 눈에 들어오는 건 없었다.

음, 그냥 좀 내부적으로 큰 일인가보네. 그에 다시금 흥미를 잃었을 때, 문득 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무너진 다르빗슈 유, 그 원인은 투구 습관?>

다르빗슈 유.

월드시리즈에서 무너진 별.

그의 이름을 타이틀로 내건 자극적인 기사 제목에 흥미가 돋았다.

솔직히 이해가 좀 안 됐거든.

여전히 생각이 복잡하기도 하고.

애스트로스가 월드시리즈에서도 사인을 훔친 건지, 아니면 정말 실력으로 그가 무너진 건지 좀 헷갈리잖아.

7차전은 다저스 홈이었으니, 아마도 사인 훔치기는 아닌 것 같기는 한데. 찝찝한 건 사실이지.

그렇기에 그 원인을 이야기해주겠다는 기사에 이끌려, 그 내용을 쭉 훑었을 때, 나도 모르게 입꼬리 한쪽이 크게 비틀렸다.

“하.”

어처구니가 없었으니까.

쉽게 말해서 투구 습관, 쿠세가 캐치를 당해서, 애스트로스 선수들이 그걸 이용하여 다르빗슈 유를 두들겼다는 건데.

‘다르빗슈한테 쿠세?’

투수라면 안다.

그건 개소리라는 걸.

릴리스 포인트, 투구동작, 스트라이드. 모두 다 일정해서, 칭송받는 투수인데. 그런 투수한테 쿠세가 있었다고? 그걸 월드시리즈 직전에 갑자기 알아챘고?

‘투구 동작이 균일한 선수이니, 쿠세가 있었다면 진작 모두 다 알았겠지. 항상 똑같이 드러났을 테니까.’

애스트로스의 분석팀이 특출나다고 평가받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팀이 X신이라는 건 아니다.

어떤 투수에게 투구 습관이 있었다면, 당연이 알아챘겠지. 심지어 월드시리즈에서 난타를 당할 정도로 큰 것이라면.

하지만 나는, 그가 텍사스 레인저스의 투수로서 수도 없이 상대해봤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선수인데도. 그런 이야기를 전혀 들은 적이 없다.

물론 우리 팀의 전력분석이 허접해서 알아채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가능성이 큰 것은···

‘애초에 쿠세 같은 건 없었다는 게 더 말이 되겠지.’

그럼 이 기자는 대체 뭘 보고, 어떤 대가리로 이딴 개소리를 기사로 지껄인 걸까?

그 이유는 맨 하단에 있었다.

애스트로스 타자들이 인터뷰에서 종종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는 건데. 그걸 본 순간 복잡했던 머리는 맑아졌다. 찝찝함도 가셨고. 그 대신 참을 수 혐오감이 깃들었지만.

확신이 생겼거든.

‘이 새끼들, 월드시리즈에서도 사인 훔쳤네.’

다르빗슈 유의 투구 습관.

그것이 애스트로스가 준비한, ‘핑계’라는 확신이 말이다.

‘어떻게 할까.’

그리고 또 다른 고민이 시작됐다. 내가 만약에 그런 입장이었다면, 월드시리즈에서 털렸다면, 진짜 속이 썩어 문드러졌을 거다.

하루에도 수십 번 피가 거꾸로 솟겠지.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날 거고.

그런데, 상대 타자들은 그 원인을 쿠세, 투구 습관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상황에서··· 그 투수가 취할 행동은 뭐가 있을까? 당연한 행동이 하나 있지.

‘일단 투구 습관부터 지우려고 하겠지. 월드시리즈야 두 경기지만, 다음 정규시즌에선 서른 경기를 털릴 수도 있으니까.’

설사 그 쿠세가 사실은 없다고 해도 말이다.

당연하게도 습관을 없애려면 투구폼을 바꿔야 하고. 그건 크나큰 위험이 뒤따른다.

안정적이고, 일정한 투구폼이 트레이드 마크인 다르빗슈인 만큼, 그 위험성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지.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나는 어느 정도는 확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없지.’

없다. 애석하게도 없다.

마음 같아선, 너한테 쿠세 같은 건 없고, 그 새끼들은 사인을 훔쳤다고 전해주고 싶지만.

'만에 하나, 진짜 천만 분의 하나라도 그에게 정말로 쿠세가 있었다면? 애스트로스가 정말로 사인을 훔친 게 아니라, 그 쿠세를 읽은 거라면? 그래서, 이번이 그걸 고칠 기회였다면?'

내 입방정으로, 한 투수의 커리어가 망가질 수도 있는 거지. 그렇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브라이언.”

“네, Go. 혹시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역시 기자회견이 조금···?”

“아뇨, 그게 아니라. 음··· 혹시 그, 구단이 뭘 준비하는 건지 예상이 가요?”

“구단, 애슬레틱스 말입니까? 몇 가지 소문이 있기는 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도움이 되지 못해서 죄송하군요. 많이 신경 쓰이십니까?”

“아뇨, 그냥 좀. 아무것도 아니에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브라이언을 뒤로 한 채, 창문 너머로 구름이 자욱한 하늘을 내려다 봤다.

오래 간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기쁜 순간이었지만, 내 기분은 그 어느 때보다도 X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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