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중요한 경기쯤 되면, 과거 레전드를 야구장에서 볼 수 있다.
포스트시즌이라거나, 월드시리즈 같은 거 말이야.
아마 우리도 월드시리즈 진출하면, 리키 핸더슨, 레지 잭슨, 배리 지토나 데니스 에커슬리, 롤리 핑거스 등등, 지금 살아 있는 팀 레전드란 레전드는 죄다 총출동할 걸?
관중석에 앉아있다가, 카메라가 비춰줄 때마다 박수를 치거나 흡족하게 웃거나 하겠지.
그 경기를 망친다면, 팀의 레전드로서 투지가 보이지 않았다며 쓴소리를 가하고, 성공적이었다면, 후배들을 믿고 있었다면서 칭찬하겠지.
그것과 비슷한 경우로는 오늘처럼 기록이 걸린 경기가 있다. 거기다 그 기록이, 해당 팀들과 연관있는 인물의 것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지.
“놀란 라이언이 관중석에 있다던데.”
“본인 기록 깨지는 걸 직접 보려고 온 거야? 대단하네.”
“뭐, 신기록에 대해 꾸준하게 좋은 반응이었잖아? 기쁘다고 말하기도 했고.”
“오, 전광판에서도 나오네.”
4회 초가 끝났을 때, 전광판에는 한 사람이 잡혔다.
놀란 라이언.
과거 기록이나 영상에서 본, 현역시절 모습과는 조금 다르지만, 내 기록 도전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진 이후, 종종 인터뷰나 티비 프로그램에서 얼굴을 비췄기에 바로 알아봤다.
“와··· 나 놀란 라이언 실물은 처음 봐.”
“Suck 기록 떄문에 온 거 맞지?”
“그게 아니라면 뭐··· 딱히 이유가 없지.”
그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주변에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아마 중계방송에서도 그 모습이 나가고 있겠지.
레인저스의 레전드이자, 현재 1위 기록자이니, 지금 상황에 딱 적절한 인물이잖아?
그의 기록이 깨질 지도 모르는 순간이니까. 그것도 바로 지금 이 순간 말이야.
‘언론에서 떠들기는 제일 좋긴 하겠네.’
세대교체라느니, 레전드의 앞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느니 하는, 상징적인 의미로도 딱이겠지.
“기분이 좀 어때?”
“신기하네.”
“끝이야?”
“그럼 뭐, 뭐가 더 있어?”
순수한 진심이다.
아니, 얼마나 신기해?
놀란 라이언은 나한테는 추억 속의 레전드인 사람들에게 레전드인 선수다.
랜디 존슨이나, 그렉 매덕스, 톰 글래빈, 페드로 마르티네즈 같은 사람들보다 더 윗 세대의 거성이지.
그런 대단한 사람이 내 경기를 직접, 관중석에서 보고 있다는 건데, 이게 신기한 일이 아니면 뭐가 또 신기하겠어?
“샌디 코팩스는 없나? 코팩스도 보고 싶은데, 이건 좀 아쉽구만.”
“카메라에 안 잡히는 걸로 봐선 쿠팩스는 없겠지. 에이, 재미없어. 무슨 반응이 이래?”
심경을 묻던 마커스 시미언은 생각보다 시큰둥한 반응이 불만스러웠던 건지 툴툴거렸지만. 여기서 무슨 감정이 더 들겠어?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아니, 그보다도, 당사자한테 뭘 묻고 있는 거야? 이제 곧 마운드에 다시 올라야 하는 사람한테.
“그럴 시간에 빠따질이나 잘해라.”
그보다도 오늘 같은 날 점수도 못 낸 타자놈이 감히 말을 걸다니. 요즘 세상 참 좋아졌어.
4회 초가 끝난 뒤, 공수교대가 이어지는 동안 놀란 라이언은 내내 카메라에 잡혔고, 관중들은 그에게 혹은 나에게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몇몇 나이가 많아 보이는 어르신들은 추억에 잠겨 과거를 떠올리는 건지, 뭉클한 표정을 짓기도 했고.
다시 그라운드로 나가기 전, 그 모습을 잠깐 동안 눈에 담았다. 어쩌면 다시는 못 볼 장면이잖아? 오늘 내가 기록을 깬다면 말이야.
‘아니지, 혹시 레인저스 상대로 통산 최다 탈삼진도 갈아치우게 되면, 그때 다시 볼 수 있기는 하겠네.’
정정한다.
지금으로부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나 볼 수 풍경이지.
그렇기에 잠시 밖을, 관중석을, 그리고 사람들을 훑었을 때, 모든 준비를 마친 듯, 포수장비를 착용한 브루스가 슬쩍 다가왔다. 그 뒤에는 다른 야수들 또한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본인들이 더 긴장했구만.
“편하게들 있어, 최선은 브루스 말고 아무한테도 공이 안 가는 거니까.”
“아, 그렇긴 하지.”
“아예 뒷짐 지고 있을까?”
“나쁘지 않네. 그걸로 Suck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보여주는 거지.”
“난 사실 경기 시작할 때부터 뒷짐 지고 있었어. 어차피 공이 외야로 안 올 거 같더라고.”
그래도 개소리하는 걸로 봐선, 완전히 굳지는 않은 것 같네.
만약 정말로 저런 짓을 했다간, 레인저스가 내 공이 아니라, 우리 머리를 노릴 거다.
대가리를 공으로 착각하고, 멋들어진 어퍼 스윙을 보여주겠지. 풀히트로 쭉 당겨칠 거야.
“갑시다.”
오늘 같은 날, 그런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기에, 덤덤하게 앞장서자, 휘파람이나, 박수 같은 소리가 따라왔다.
대단한 기록이다 보니, 직접적으로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기대하는 게 느껴지네.
물론 상대팀 덕아웃 빼고.
레인저스 타자들은 마치 임종을 앞둔 사람처럼, 절망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이미 걷잡을 수 없어졌으니까. 이제 와서 망치기엔 너무 늦어버렸지.
아무리 노력해봤자, 그 시기가 조금 뒤로 밀려나기만 할 뿐, 내가 신기록을 세우는 걸 완전히 없던 일로 만들고, 삭제 시키는 건, 이젠 그들의 힘을 벗어났다.
그나마 한 가지 가망이 있다면, 갑자기 내가 어깨 잡고 쓰러지는 건데.
‘컨디션 좋고, 경기력 좋고, 피칭 감각 좋고. 딱 좋네.’
애석하게도 그럴 가능성 역시도 없다. 오늘은 끝까지 던질 거라니까?
브루스와 가볍게 글러브를 부딪친 뒤, 다시 마운드에 올라, 기분 좋은 미소로서 타자, ‘코팩스’를 맞이해줬다.
엘비스 앤드루스가 아니었냐고? 아니, 지금은 코팩스다. 그냥 내가 그렇게 부를 거야.
사람들도 내 이름을 자기들 마음대로 부르잖아? 유석인데 유썩유썩 하면서 말이야.
그러니까 나도 다른 사람을 막 부를 권리가 있다는 뜻이다. 그래야 공평하지.
아무튼 그렇게 올라온 코팩스에게.
“스트라이크!”
주심의 인플레이 선언을 시작 신호 삼아서, 초구를 던져줬다.
몸쪽으로 낮게 걸치는 포심 패스트볼. 엘비스 앤드루- 아니, 코팩스는 크게 헛스윙했고.
그게 자신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던 건지,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스트라이크!”
그건 틀린 생각이다.
아주 완벽하게 틀렸지.
애초에 오늘 경기가 시작된 순간부터.
“스트라이크 아웃!”
레인저스에게 주어진 기회 같은 건 없었으니까.
코팩스는 코팩스가 되어, 타석에서 내려갔다. 마지막을 위해서 참는 건지, You Suck은 없었다. 환호성도 없었고.
그저 다음타자, ‘라이언’이 올라왔을 뿐. 추민수 선배한테까지 이러는 게 좀 그렇다는 건 잘 아는데. 아무튼 라이언이야.
“스트라이크!”
초구로 날아온 서클 체인지업을 라이언··· 역시 이건 좀 아닌 것 같네. 추민수 선배는 가만히 지켜만 봤다.
유려하게 꺾인 체인지업이 안쪽으로 들어오면서 첫 스트라이크가 올라갔지만, 여전히 두 눈을 부릅떴다. 오늘 레인저스가 대체로 저렇지. 그저 자기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대로, 자기 방식대로 맞섰지.
“볼.”
“스트라이크!”
2구째, 슬라이더는 골라냈지만, 3구로 던진 하이 패스트볼에 헛스윙하며 투 스트라이크가 잡혔다.
투 스트라이크 원 볼.
몰아넣은 상황에서 팔을 채찍처럼 휘두르며 던진 4구.
너클 커브는 몸쪽 높이, 꼭지점부터 시작해서, 바깥쪽으로 낮은 꼭지점에 박혔다.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존을 사선으로 완벽하게 절단하면서.
추민수 선배는 배트를 휘두르지 않으며, 라이언으로서 타석에서 내려갔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번에도 You Suck을 참았다.
‘타이기록인데, 참을성이 대단하네.’
어쩌면 도박이라고 할 수도 있고. 바로 다음 타석이 어쩔 줄 알고 이걸 참아. 무려 44년만의 타이기록인데 말이야.
막말로 갑자기 내가 이 이후로 털릴 수도 있는 건데, 지금의 기쁨을 꾹 참고, 억누르면서 다음을 기다린 것이니.
아주 대단한 도박이지.
그런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마지막 타자가 올라왔다. 그는··· 혹시 모르니까 이건 말하지 말자.
‘부정 탈지도 모르니까.’
이제까지 잘만 별명 붙여놓고 갑자기 왜 그러냐 싶겠지만, 그래도 좀 찝찝하잖아?
내가 미신을 별로 좋아하진 않는데,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앞선 타자들에겐 미안하지만, 지금은 그저, 아드리안 벨트레라고 부르자고. 그 이름 그대로.
‘진지하네, 저쪽도. 아주 필사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저번 경기에 이어 오늘까지, 두 경기 연속 네 번이나 나한테 삼진을 헌납했던 그는 이번만큼은 어떻게든 넘기고 싶어 보였다.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영광으로 가득 찼던 커리어의 말년을, 신기록의 제물로 박제되어 마치긴 싫다는 것처럼.
자기 대신 그다음 타자, 조이 갈로를 잡으라는 거겠지. 나한테 홈런도 친 괘씸한 놈이니까.
“스트라이크!”
동료를 팔아치우는 모습이 괘씸해서 힘을 가득가득 담아, 초구를 던져줬다.
또다시 포심 패스트볼.
오늘만 다섯 번째지.
아마도 89마일이 찍혔겠지. 90마일은 죽어도 안 찍힐 거야. 이런 날은 좀 한계를 깨주면서, 내 체면을 살려줬으면 오죽 좋아.
그게 좀 화가 나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그 대신.
“스트라이크!”
나머지를 다 가졌으니까.
하나쯤은 나도 양보해야지.
2구는 서클 체인지업.
저번 경기는 브레이킹볼. 이번 경기는 포심 패스트볼로. 우리 서로 협정을 맺은 것 아니었냐며.
또다시 포심을 던졌다면 멋진 땅볼을 쳐줄 수 있는데, 이제 와서 왜 그러냐며, 아드리안 벨트레는 눈썹을 씰룩거렸다.
그에겐 미안하지만, 더는 여유가 없어서 말이야. 이제 마지막 한 구만을 남겨뒀을 때.
가만히 생각했다.
‘뭘로 잡을까?’
뭘 던져야 가장 확실하게, 아주 완벽하게 삼진을 끌어낼 수 있을까?
더 이상 시간도 끌리지 않고, 괜히 투구수를 더 소모하지도 않고, 그냥 딱 한 구. 딱 하나로 삼진을 잡을 수 있는 공 말이다.
너클 커브, 체인지업 세 개, 슬라이더, 변형 패스트볼 두 개, 포심 하나.
선택지는 엄청나게 많지.
맥도날드 키오스크처럼.
그중 가장 끌리는 메뉴이자, 나를 확실하게 만족시켜줄 메뉴는 딱 하나였다.
‘그걸로 가자. 잘 먹히겠네.’
잠깐 아드리안 벨트레와 눈을 맞춘 뒤 사인을 보내자, 브루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잘 알겠다는 것처럼.
다행히 위험하다거나 하는 신호는 보내지 않네.
손안에서 잠시 공을 굴린 뒤, 그립을 잡았다. 요즘 들어 참 뜸했었지.
근데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야.
‘가자.’
너밖에 없네.
와인드업. 왼팔을 쭉 끌어당기며, 손에 힘을 실다가, 어느 지점에서 살포시 공을 놓았다.
손에서 살짝 떠오르듯 빠져나가며, 유유히 홈 플레이트로 날아가는 공. 그것을 향해 아드리안 벨트레는 아름다운 스윙을 선보였고.
“스트라이크 아웃!”
그렇게 그는 ‘고’가 되었다.
그래, 384K. 신기록이지.
“Youuuuu Suuuuuck!”
“Hell Yeeeeeah!”
“으아아아아아아! 했어! Go가, Go가 진짜로 했다고!”
마침내 기다렸던 삼진이 올라간 순간, 꾹 참았던 함성이 토해졌고, 폭죽도 몇 개 터졌다. 전광판에 신기록 달성이라는 글자도 떠올랐고.
‘레인저스, 생각보다 마음이 넓네.’
자기들을 제물로 잡고 기록 만든 거니, 나 같으면 X같아서 대충 처리했을 텐데.
역시 메이저리그 구단이라서 그런지, 다르긴 달라. 배포가 커. 그래도 축하해주는 걸 보면 말이야. 다음 시즌은 좀 살살 잡아야겠네.
마지막 넘버를 채우는 삼진이 올라가고, 이닝이 끝났는데도, 잠시동안 여운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기립했고, 레인저스 팬들도 못 내키는 척 씨익 웃으며 함께 박수를 쳐줬다.
다들 내심 바라고 있었나 봐.
“Suck, 받아. 흙 안 묻게, 내가 꽈악 잡았어. 조심해서 들고왔고. 아주 깨끗해. 배트에도 안 스쳤고.”
“땡큐, 대신 383K나 382K는 너 가져라. 그리고··· 너도 수고했어. 남은 이닝도 수고해라.”
“수고는 무슨··· 그냥, 영광이지.”
마운드로 뛰쳐온 브루스는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떨리는 손길로 공을 넘겨줬다.
그걸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다시금 주변을 훑었다. 마찬가지로 경기가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달려오는 다른 야수들.
덕아웃에서 양손을 번쩍 들어올린 밥 멜빈 감독과 스콧 에머슨 등의 코치들.
조금 전 카메라에 잡혔을 때와 달리, 굉장히 환하게,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주변 사람들과 함께 박수를 치는 놀란 라이언까지.
이 모든 순간을 눈에 담았다.
물론.
“자자, 바짝바짝 내려가자. 나 어깨 식는다.”
“어딜 이대로 내려가려고! 아직 헹가레도 남았는데!”
“덕아웃까지 우리가 들어줄까? 어때?”
“소름끼치니까, 저리 비키슈.”
아직 경기는 한참 남았다. 오늘은 마지막까지 던질 거라니까? 뭘 다 끝난 것처럼 그러고 있어.
박수가 이어지는데도,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나를 보며, 지독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 젓는 동료들과 눈을 질끈 감는 레인저스 선수들에게 다시금 미소를 날려줬다.
‘기록은 땡큐. 마지막까지 우리 신명 나게 놀아봅시다.’
아, 참고로 위닝샷은 커브다.
슬로우~ 슬로우~ 커브 말이야.
그냥 이게 제일 좋겠더라고.
쿨타임도 적당히 돌았고, 너클 커브 때문에 완전히 잊혀져서, 다들 생각도 안 할 테니까.
비밀병기가 이번에도 통했네.
역시, 가장 삼진이 필요할 때 던지기에는 이게 최고라니까.
####
마지막 삼진이 올라간 순간.
-스트라이크 아웃! 고유석이! 고유석이 해냈습니다! 384번째 탈삼진! 메이저리그의, 현대야구의 역사를 다시 썼습니다!
한국도.
-Go, 3구를 던졌습니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Oh My Gosh! He did it! Go가 놀란 라이언의 앞에서! 그를 ‘2위’로 밀어냅니다!
미국도.
그 밖의 야구와 관련된 모든 곳에서 그 장면을 지켜봤다.
모두가 기다린 순간이었으니까. 설마하니 이토록 빠르게 이뤄질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긴 했지만.
<놀란 라이언마저 놀란 고유석! 현대야구 역사상 시즌 최다 탈삼진!>
<384K, 역사상 최고의 탈삼진! No를 외친 모두를 닥치게 한 Go!>
<새로운 시대의 시작! Go, 44년간 놀란 라이언이 지배했던 왕좌를 거머쥐었다!>
시작부터 가쁘게 달리는 고유석을 덜덜 떨면서 지켜보던 기자들은 환호하는 동시에 작성했던 기사를 올렸다. 굉장히 빠르게, 조금이라도 늦지 않도록.
사실, 그리 다급하지는 않았다. 아홉 번째 삼진이 올라가고, 마지막 타자가 타석에 오른 순간, 모두가 직감했었으니까.
드디어 그때가 왔노라는 것을.
물론 그럼에도 엔터키를 누르는 손가락은 수전증 환자처럼 세차게 떨렸지만 말이다.
어쩌면 앞으로 한 세기가 지나더라도, 다시는 볼 수 없을 지도 모르는 장면이었으니까.
[고유서ㄱ탈사ㅈ히ㅆ신기로학]
-ㅆㅆㅆㅆㅆㅆㅆㅆㅆㅆㅆㅆ
└X발이걸내가직접보네
└고유석은신이다고유석은신이다고유석은신이다
└신은고유석이다신은고유석이다신은고유석이다
└고는신유석이다고는신유석이다
[못할 거라던 ㅂㅅ들 어디감?]
-4이닝 만에 했는데?
└못매달고 죽으러갔나봄
└ㅁㅊ이걸 4회 말에 해버리네 저게 사람새끼임?
└말이 안나온다ㅋㅋㅋ
└솔직히 열 개나 남아서 좀 아슬아슬하다고 생각했는데 개ㅈ까고 그냥 4이닝에 10개 잡아뿌네
└만세하다 실수로 리모컨 던져서 모니터 부숨 고유석 ㅅㅂ새끼
[#A’s]
[G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
└Suuuuuuuuuuuuuuuuuuuuck
[#A’s]
[Suck이 해냈어! Suck이 그 MotherFucking 탈삼진 신기록을 해버렸다고!(직관샷)]
└비행기 티켓+관중석 티켓+묵을 숙소+간식, 다 합쳐서 거의 5000Bucks쯤 썼지만. X발 너랑 내가 위너다!
└내가 X발 내가 이걸, 이걸 직접 X발 이걸···
└와··· X발 미리 준비하고 있었는데도 지려버렸어. 직관인데도 X발 아무것도 마시지도 않고, 먹지도 않았는데··· 마지막 삼진이 나온 순간 그냥 Shot! 해버렸다고.
[#A’s]
[공동주택에 살고 있는데, 열 번째 삼진 잡히는 순간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질렀어. 그러면 무조건 퇴출인데 말이야.]
└안타깝지만, 그래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어. 나도 같이 소리쳤거든!
└└괜찮아, 다른 집도 다 소리 지르더라고. 여긴 오클랜드거든:)
└그럼 X발 상관없네! 지금 오클랜드 전체가 소리 지르고 있으니까!
└샌프란시스코 새끼들도 아닌 척 같이 소리지를 걸?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방식대로, 아직 얼마 지나지도 않은 일을 증언하기도 했다.
흥분을 못 이기고 박살 낸 티비를 보여주거나, 컨셉인지, 진심인지, 흥건하게 젖은 자기 바지를 다른 이들에게 공유하면서 말이다.
종종 운이 좋았던 이들은 현장 사진을 찍으며 자신의 성실함과 똑똑했던 판단력을 칭찬하기도 했고.
그밖에도 수십만 명 이상이 SNS나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거나, 비슷한 입장인 이들과 어울리며 트래픽을 폭발시켰다.
그도 그럴 것이, 앞으로 못해도 한 세대가 함께 기억하고 추억할 순간이었으니까. 못해도 수백만 명 이상이 말이다.
-스트라이크 아웃! Go! 신기록을 만들었는데도! 여전히 기세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레인저스에겐 완전히 재앙의 날이네요! Go가 본인의 올해 마지막 경기를 완전히 불태우고 있어요!
거대한 대폭발이 일어난 것처럼, 그 압도적인 여파가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었는데도.
-또다시 삼자범퇴! 고유석이 6회마저 지워버렸습니다! 14번째 삼진! 기록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습게도, 고유석은 여전히 레인저스를 잡고, 또 잡았다.
마치 신기록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마침내 모두가 간신히 진정했을 땐, 이미 또다른 기록이 이어지고 있었다.
####
“Go, 혹시···”
“안 피곤해요. 아주 좋고요.”
“그래, 그렇구나.”
기록 달성 이후 이닝이 끝날 때마다, 스콧 에머슨은 조심스럽게 묻고는 했다.
이제 좀 피곤하지 않냐고.
이제 좀 만족하지 않았냐고.
혹시 내려갈 생각 없냐고.
물론 강요는 아니라고.
본인이 뱉은 말이 있다보니, 강압적으로 권유하지는 못하고, 그냥 은근슬쩍 꼬시려고 하는데, 어림도 없지!
자유이용권을 받았는데, 중간에 나가는 놈이 어딨어? 마지막 경기인데, 오랫동안 즐기면서, 최대한 뽕을 뽑아야지.
‘넋이 나갔네, 넋이 나갔어.’
거기다 상대도 딱 알맞은 상태였다. 신기록이 달성된 직후부터, 모든 걸 놓아버린 것처럼, 완전히 넋을 놨거든.
수비에서든, 공격에서든, 멍~하니 허공만 보면서 말이야.
이해는 한다. 멘탈이 터질 수밖에. 영원불멸할 것이라던 기록이, 자기들이 제물이 되어 갈아치워진 건데. 제정신이면 이상하지.
특히나, 벨트레야 더 말할 것도 없고. 명예의 전당을 가던지, 어느 팀 영구결번이 되든지 간에. 384번째 삼진의 주인공으로 남을 테니까.
그토록 정신이 박살 나버린 레인저스와 아드리안 벨트레에게 조금 더 나쁜 짓을 해줬다.
“스트라이크 아웃!”
7회 말.
다시금 청아아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아까 전만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포기한 듯, 함께 웃고 박수치던 레인저스의 홈팬들은 이젠 작작 좀 하라는 듯 눈빛을 보냈다.
아마도 나나 우리 팀 팬은 아니지만, 역사적인 기록이 갱신되는 장면이 보고 싶어서 왔을 다른 팀의 팬들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고.
“You Suck!”
물론 레이더스를 비롯해 우리 팬들은 아까 보다는 덜하더라도, 여전히 신이 나서 소리쳤지만. 부관참시 제대로네.
아마도 생각을 못하고 있나 봐. 하긴, 더 중요한 일이 있었고, 그게 이뤄졌으며, 그 여운이 아직 남아있으니.
정말 냉철하고, 흥분을 잘 안 하는 스마트한 사람이 아닌 이상에야, 미처 생각이 안 미칠 수밖에 없지.
“아웃!”
다행스럽게도(?), 추민수 선배는 라이언으로 그쳤다.
그 이상은 절대로 용납 안 하겠다는 듯, 억지로 타구를 빗맞추며 땅볼로 물러났으니까.
그리고 다시 이닝의 마지막 타자로 올라온 아드리안 벨트레는 아까와 달리, 이젠 어떠한 욕망도 없어 보였다.
그저 타석에 올라오기 전, 길게 한숨을 내쉬고, 터덜터덜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을 뿐.
‘이해하십쇼. 원래 커리어가 길어지다 보면, 못 볼 꼴도 보고 그러는 거니까.’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
어디까지나, 그가 하필이면 내 상대팀이고, 상대타자라는 게 문제였던 거지.
나 벨트레 좋아한다니까?
그래도 일은 일이기에. 이번에도 철저하게 상대했을뿐.
“스트라이크 아웃!”
아까 전, 더럽게 느렸던 커브와는 달리, 깔끔하게 하이 패스트볼로 삼진을 당한 그는 한번 하늘을 올려보다, 그다음은 나를 봤다.
“You Suuuuuuck!”
“벨트레 넌 진짜 Suck이야! 여섯 타석 연속 삼진이라니!”
“아낌없이 주는 벨트레가 최고다!”
“아드리안! 390만큼 사랑해!”
대체 자기한테 왜 그러냐고, 왜 이딴 소리를 듣게 만드냐고,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있다면 정말로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에게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 그저, 390번째 삼진이 되신 걸 축하합니다,라고 말하는 것 밖에 못 하겠네.
어쨌든 그런 아드리안 벨트레의 표정과, 다른 레인저스 타자들의 분위기를 보아. 다들 모르고 있는 것 같구만. 전혀 신경도 못 쓰고 있어.
“브루스, 모르는 것 같지?”
“어? 뭐가? 뭘 몰라?”
“아니, 아무것도.”
그래, 너도 모르네.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가면서, 잠깐 레인저스 덕아웃을 지그시 봤다. 나랑 눈이 마주치자, 벌레라도 본 것처럼 아주 불쾌한 표정을 짓는데.
그 시선이 기분이 나쁜 것과는 별개로, 그들을 비롯해, 이 경기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묻고 싶었다.
‘혹시, 나 퍼펙트 중인 거 아는 사람 없어요?’
왠지, 다들 정신없을 때 나 혼자 날로 먹는 것 같아서, 기분이 별로 안 좋네.
좀 섭섭하기도 하고. 이것도 나름 기록인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