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171화 (171/316)

171화

“사람 엄청나게 많네.”

“콜리시엄에서 이 정도 관중은 포스트시즌 나가도 힘들 텐데···”

관중석을 빼곡하게 채운 관중들을 보며, 아드리안 벨트레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혀를 내두르기도 했고.

최소한 그가 기억하는 오클랜드는··· 이렇게 열광적인 곳은 아니었으니까.

아무리 관중이 많더라도, 항상 조금씩 빈 듯한 느낌을 주는 곳이지.

“거의 리글리 필드 수준인데?”

“시설도 엇비슷하긴 하네. 여기가 리글리 필드보다 좀 못한 것 같긴 하지만.”

그런데 지금은 마치, 마찬가지로 광적인 열기를 자랑하는, 시카고 컵스의 홈, 리글리 필드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항상 언제, 어느 순간에 만나든지, 컵스가 어떤 성적을 내든지, 그 팬심이 두터운데. 오늘만큼은 그에 비견되는 수준이지.

‘성적도 성적이지만, 이런 점도 어떻게 보면 매직이지.’

실제로 이번 시즌 오클랜드의 관중동원이 상당히 올라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마법 같은 성적과 마찬가지로, 그것 역시, 저 녀석, Go 매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종종 연고지의 잠재성은 충분히 미들마켓 수준이라던 어처구니없는 말들이, 이제야 사실이 되는 걸지도 모르고.

“오늘 공은 어때?”

“전보다 더 좋아, 쉰 만큼 더 묵직해.”

“고향 후배라고 너무 좋게 평가하는 거 아니야?”

“직접 가서 보던가?”

의심스러운 벨트레의 말에 추민수는 그저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후배가 아웃라이어 수준의 괴물이라는 거야 텍사스 레인저스의 타자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까.

그저 농담이나 한 거겠지.

그 생각처럼, 2회 초, 이닝이 시작되자, 벨트레는 그 누구보다도 진지한 표정으로 타석으로 향했다.

‘힘들다, 힘들어. 말년에 이렇게 고생할 줄은 몰랐는데.’

은퇴를 앞두고, 명예의 전당을 위해, 남은 마일스톤이나 채우려고 했더니, 저런 괴물이 같은 지구에서 나오다니.

졸지에 팀의 핵심 중의 핵심 타자가 되어버리면서, 무거운 짐을 떠안게 되었다.

‘쉰 만큼 무겁다고 했었지. 하긴, 휴식이 확정된 뒤의 성적만 보더라도···’

최근, 저 괴물은 마일스톤을 채우려는 그처럼, 시즌 마지막 버닝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들에게 매덕스를 한 뒤, 갑자기 5일 휴식을 선언하고는. 이후 9월, 세 경기를 등판하여, 죄다 무실점으로 틀어막고 있고, 심지어 안타조차 경기 당 하나, 고작 세 개만 허용했으니까.

‘뭐? 후반기에 지쳐? 체력이 떨어져? 루키의 장기적인 시즌이 뭐가 어쩌고 저째?’

한 8월 초순까지만 하더라도 언론에서 나왔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벨트레는 코웃음 쳤다.

미디어가 그리 믿을만한 놈들이 아니라는 거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이번에는 틀려도 좀 심하게 틀렸다. 지치기는커녕, 진짜 놀란 라이언이라도 되는 건지. 막바지에 다다르니, 페이스를 유지하다 못해, 오히려 더 올라왔으니까.

‘아니지, 놀란 라이언이 아니라, 무슨 랜디 존슨 같은 느낌인데?’

까마득한 후배, 갓 데뷔한 루키의 앞에서 이 정도의 부담감을 느껴본 건 꽤나 어색한 일이었다.

하지만 마운드의 투수는 그 커다란 체격 때문인지, 마치 랜디 존슨처럼 엄청난 위압감이 흘렀다.

구속은 좀 심한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느낌은 엇비슷하지. 똑같은 좌완이기도 하고.

‘그래도 최근 너무 신을 냈으니까, 슬슬 떨어질 때가 됐겠지···’

타자에게 타격 사이클이 있는 만큼, 투수에게도 투수 사이클이 있기에. 그것을 기대하며, 타석에 올랐지만.

“스트라이크!”

날아온 공은 듣던 그대로였다. 바깥쪽에 정확하게 걸치는 서클 체인지업.

지난번과는 달리, 확실히 변화구의 감각 역시 살아있는 건지, 제대로 조준했다.

지난 이닝에, 이미 스트라이크 존 정도는 다 파악을 했다는 거겠지.

‘서클은··· 힘들겠고. 묵직하더라도 패스트볼이 좋겠는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저런 공을 보면, 그냥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

일단 스윙해서, 공을 맞추는 걸 좋아하는 벨트레이나. 솔직히 저런 걸 던져대면, 우타자 입장에서 뭘 하겠는가? 그냥 다른 걸 노리는 게 낫지.

물론.

“스트라이크!”

다른 걸 노린다고 해서, 착하게 던져주는 녀석이 아니지만.

서클에 관심이 없다는 걸 귀신같이 포착한 건지, 2구 역시 서클 체인지업이었다.

다만 이번엔 떨어지는 놈으로.

‘이거도 점점 더 빡세지는 것 같은데···’

패스트볼이라고 생각하고 휘둘렀더니, 곧 느리면서 급격하게 떨어지는 것을 보며 벨트레는 헛웃음을 흘렸다.

역회전이 강한 서클 체인지업은 이미, 리그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결정구로 평가받는데. 그보다는 살짝 처진다는 것이 중론인 떨어지는 서클 체인지업 역시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조금 더 날카로워졌다.

아마 시즌을 거듭하고, 계속 등판하면서, 숙련도가 더욱더 올라온 거겠지. 그렇기에 엿 같은 것이고. 다시 만날 때마다 더 x같아진다는 뜻이니까.

그런 주제에 눈치도 더럽게 빠르다. 타자의 눈빛을 읽기라도 하는지, 뭘 노리거나, 뭘 거르기 시작하면, 귀신 같이 알아채서 지금처럼 쑤셔 넣지.

‘눈치가 빠른 녀석이라 금방 내 생각을 읽은 것 같은데, 그럼 또 체인지업? 세 번 연달아서? 아니, 그건 좀··· 역으로 하이 패스트볼로 들어오나? 아니면 타이밍을 꼬아서 슬라이더나 너클 커브 같은 걸, Mierda! 더럽게 많네.’

잠깐 타석에서 나와, 타이밍을 잡는 척 연습스윙하며 천천히 다음 공을 꼽아봤지만, 나오는 건 결국 욕이었다.

많아도 너무 많았으니까.

보통은 저렇게 구종이 많으면, 결국 사용하지 않는 것들이 하나씩 있는데. 저 자식은 그런 것도 없다. 적절하게 사용하지.

‘그냥 눈 대중으로 보고 치자. 머리싸움 하려다간 어차피 답도 없어.’

지난 경기들에서 몇 번이나 깨달았던 교훈을 다시금 마음 깊이 새긴 벨트레는 타석에 올라, 3구를 기다렸고.

드디어 그가 기다렸던 패스트볼 계열의 조금 높게 날아왔다. 하이 패스트볼. 그래, 이거지.

구속도 느린 녀석이, 하이 패스트볼을 대단히 선호한다고 생각하며, 휘둘렀지만.

‘Puta··· 또 체인지업이네.’

잘만 날아오던 공은 어느 순간부터 느려지더니, 곧 배트가 먼저 휘둘러진 뒤에야 포수 글러브로 들어갔다.

별다른 무브먼트가 없는 것을 보아, 쓰리핑거 체인지업이겠지.

‘체인지업 하나씩 다 봤네.’

녀석이 가진 세 종류의 체인지업을 한 타석 만에 모두 식견 하게 됐으니. 어떻게 보면 영광이라고 해야 할까?

“You Suck!”

“아드리안! 너한테 하는 말이야! 알지?”

“너 X나 Suck이네!”

‘X같구만.’

그럴 리가 있나. 그냥 X같은 거지. 어린놈의 자식에게 제대로 농락당한 건데.

그로 인해 이 지긋지긋한 오클랜드 놈들, 요즘 따라 행복해 보여서 괜히 더 밉살맞아진 오클랜드 놈들에게 조롱까지 당했고.

“조이, 넌 나처럼 괜히 머리 굴리지 말고, 그냥 네 힘 믿고, 시원하게 날려. 하나 얻어걸리기만 하자는 마음으로. 타이밍만 맞으면, 정타가 아니라도, 넘어가잖아? 그거 하나만 노려라.”

“조언 고마워요. 안 그래도, 전 이미 좀 포기했어요. 쟨 너무 머리가 아파서···”

뒤이어 올라오는 조이 갈로에게 그렇게 조언을 남긴 뒤,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간 그는 자신을 반겨주는 선수, 마찬가지로 베테랑인 Choo에 한숨만 내쉬었다.

“Choo, 아무래도, Korean들은 날 싫어하는 것 같아. 예전에 Kim도 그렇고, Go, 쟤도 그렇고. 다들 나한테 너무 모질어.”

“대신 내가 좋아하잖아? 그리고 한국 사람들도 너 좋아해. 네가···”

“알아, 알아. 그 배우인가 뭔가 닮았다며? 배우라니, 하긴, 내가 좀 잘생기긴 했지. 그럼 투수들만 날 싫어하는 건가? 생각해보면 Park도 날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계속 시달려서 그런지, 우울함 과거의 기억마저 조금씩 변질되는 상황에 아드리안 벨트레는 한숨을 뱉었다.

그의 조언이 효과를 본 건지, 조이 갈로가 큼직한 2루타를 날리며, 정말 다행스럽게도 첫 안타가 금방 나왔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뒤이어 올라온 타자들을, 삼진 하나를 포함, 연이어 잡아버리며, 2회 초 역시 금방 끝났으니까.

363K. 5위 랜디 존슨과 다시 한 개차가 됐고, 1위, 놀란 라이언까지 남은 숫자는 이제 단 20개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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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런! 맷 올슨! 우중간을 훌쩍 넘기는 깔끔한 홈런입니다!”

“애슬레틱스, 오늘 기세가 좋은데요?”

2회 말, 크리스 데이비스의 볼넷 이후, 곧바로 맷 올슨이 큼직한 홈런을 날리며, 애슬레틱스가 선취점을 가져갔다.

콜리시엄의 분위기는 당연히 더 말할 것도 없이 올라갔고, 해설자들은 일찌감치 승리를 예측하기도 했다.

“애슬레틱스가 먼저 선취2점을 가져가면서, 아무래도 고유석 선수가 오늘, 25승의 고지에 올라설 것 같네요.”

“아, 이제 2회인 걸 감안하면, 조금 섣부른 예측이지 않을까요? 야구에서의 2점은 사실 언제든지 뒤집을 수 있는 점수니까요.”

해설자의 당연하다는 듯한 말에 캐스터는 살짝 태클을 걸기도 했지만, 사실 그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냥 성적만 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으니까. 2점이면 낙승이라는 것을.

“네, 그렇기는 합니다만, 아무래도 고유석 선수가 등판한 경기에서 2점을 내줬다는 건, 다른 경기와는 조금 다릅니다. 현재 0.50이라는 말도 안 되는 수준의 평균자책점을 기록 중인 선수니까요. 사실상 한 점만 내더라도 웬만하면 이긴다는 뜻이죠.”

역사상 상대하는 입장에서 이보다 더 지독한 투수가 있었을까?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 투수가 0점대 ERA를 기록하고, 300개가 훌쩍 넘는 삼진을 기록했으며, 볼넷이나 피홈런은 그에 반해 한없이 낮다니.

심지어 올해가 데뷔 시즌이라는 것까지 감안한다면, 그 확률은 더욱더 희박해지겠지.

“그래도 레인저스 역시 저력이 있는 팀이기에, 마냥 안심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 물론이죠. 일단 추민수 선수도 최근 힘이 좋기도 하고, 아드리안 벨트레나 조이 갈로처럼 파워가 준수한 타자들이 있으니까요. 특히 지난 타석에서 조이 갈로는 엄청난 장타를 쳐낸 바가 있으니, 요주의 인물이고요.”

다만 너무 한쪽으로 치우칠 경우, 약간의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에 캐스터는 어느 정도 포장하기는 했다.

단순히 고유석의 등판인 것도 아니고, 상대편, 아니아니, 레인저스에게도 추민수라는 한국인 메이저리거, 그것도 사람들에게 친숙한 베테랑급 선수가 있으니. 자칫 뒷말이 나올 수 있지.

그런 캐스터의 말에 눈치를 본 해설자 역시 어느 정도 동조하기는 했으나, 사실 생각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당장 애슬레틱스의 공격이 끝난 뒤, 다시 고유석이 마운드에 오른 3회 초.

“스트라이크 아웃!”

그 첫 시작 역시 예상대로였으니까.

8번타자 브렛 니콜라스가 헛스윙을 선보이며 삼진으로 물러났고, 그것으로 순위는 한 계단 더 올라갔다.

“스트라이크 아웃! 고유석 선수가 364삼진으로 역대 공동 5위에 올라섰습니다!”

이제 공동 5위.

경기가 이어질수록 서서히 계단을 오르듯 올라가는 순위는 중계진은 물론, 팬들에게도 큰 기쁨이었다.

중계 화면에 나온 역대 탈삼진 순위 중, 고유석이라는 이름이 한층 더 올라가는 것을 볼 때면.

마치, 그들이 역사 속 한순간에 있다는 것이 생생하게 실감이 났으니까.

“다시 랜디존슨이네요. 그 위는 다시 놀란 라이언, 랜디 존슨, 그리고 샌디 코팩스와 놀란 라이언입니다.”

“이젠 정말, 정상까지 얼마 남지 않았네요.”

거대한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듯, 차곡차곡 올라온 걸음 속, 이젠 정말로 정상이 보였다. 앞으로는 그 누구도 닿지 못할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그곳이.

“아웃!”

“음··· 네. 드류 로빈슨이 아쉬운 내야땅볼을 기록하며, 범로 물러났습니다.”

“이제 한 타순이 돌았는데, 타자들이 고유석 선수에게 얼마나 적응했는 지가, 경기의 관건이겠네요.”

이제 거의 다 왔다는 생각 때문인지, 범타를 당하는 타자를 보며, 괜한 아쉬움이 흐르기도 했고 말이다.

“자, 다시 1번타자 추민수가 타석에 들어왔습니다. 올해 추민수 선수 역시 괜찮은 성적을 올리고 있죠? 다시 전성기 시절만큼의 파워를 보여주고 있고, 선구안이 좋은 선수인 만큼, 고유석 선수에게도 쉽지는 않겠습니다.”

그래도 중요한 타석인 만큼, 애써 텐션을 올리며,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고.

“파울!”

5구까지 투구수를 끌어내며, 격렬하게 저항하긴 했지만, 흐름을 타기 시작한 고유석을 저지하지는 못했다.

“아웃!”

6구째, 파울 플라이로 물러나며, 두 번째 타석마저 아쉽게 마무리한 추민수였지만. 중계진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다른 경기라면 모를까, 오늘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으니까.

그것도 메이저리그 전체를 통틀어 올해의 메인 이벤터라고 할 수 있는 선수가 말이다.

“3회 초 역시 삼자범퇴! 삼진을 한 개 더 추가하며, 1위까지 열아홉 개를 남겨두는 고유석입니다!”

####

“조이 갈로는 타격감이 좀 이상하지?”

“어, 내가 봐도 좀 뭔가 좋아 보이더라. 아까 전에는 펜스에 맞아서 다행이지··· 쟤 뭔가 문제 있는 거 아니야?”

“문제가 단단히 있지. 미친놈이야, 저거.”

마운드로 나가기 전, 나와 브루스는 한 타자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누구냐고? 조이 갈로 말이야. 이번 경기 유일한 안타의 주인공.

아까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린다. 진짜 좀 또라이 같았거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단 말이야. 그걸 그렇게 날려? 똥파워 하나는 진짜···’

분명 컨택이 제대로 안 된 것 같은데, 한없이 쭉 뻗던 타구가 머릿속에 제대로 박혔다.

솔직히 넘어갔다고 생각했다, 좀 컸거든. 다행히 펜스 맞고 떨어졌는데. 조금만 더 잘 맞았으면 무조건 넘어갔겠지.

조이 갈로 얘도 고릴라과야.

그 있잖아, 말린스에서 기르는 힘 센 고릴라.

지안카를로 스탠튼 말이야.

걔랑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지, 스탠튼 보단 덜하겠지. 그 양반이엇으면 진짜 넘겼을 거야.’

걘 60홈런 날릴 기세던데.

조이 갈로는 그에 일종의 하위호환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보다 타율도 훨씬 낮으면서, 홈런도 좀 적으니까.

물론 멘도사 라인보다 낮은 타율인 주제에 홈런은 38개인 이쪽도 상당히 미친놈이긴 하지만.

“아무튼 좀 조심하자. 쟤한텐 웬만하면 안쪽으로 넣지 마.”

“그냥 거를까? 예전에 완봉했을 때처럼.”

“예전에? 그때 고의사구를 했던가? 아, 시즌 초반. 그땐 나 없었을 때잖아··· 뭐, 아무튼 Suck 네가 괜찮다면야 그것도 좋긴 하지. 일단 안전하니까.”

“오케이, 대충 보고, 낌새가 이상하다 싶으면, 그냥 바로 고의사구 사인 보내.”

“알았어, 잘 지켜 볼 게.”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으니, 최대한 타석이 안 가도록 하는 게 베스트겠지.

이번 이닝은 2번부터 타순이 시작하니, 잘 막아서, 앞에서 끊어야겠어. 고릴라 앞에 주자까지 세워두면 좀 힘들 테니까.

그렇게 결심하며, 다시 마운드에 오르니, 팬들은 입맛을 쩝쩝 다시며 나를 맞아줬다.

“Suck! 삼진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잡아줘!”

“지금은 좀 부족한 거 알지?”

3이닝 동안 삼진을 다섯 개나 잡았는데, 그거 가지고 부족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우리 팬들밖에 없을 거야.

물론 목표가 높은 만큼, 무족하게 느껴지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는 되지만.

‘최소한 10개 정도는 잡아야, 다음에 편하기는 할 텐데. 겨우 15% 밖에 못 쌓았네.’

음, 아직 파산까지는 힘들겠어. 더 분발해야지. 그런 마음을 가득 담아, 선두타자를 환영해줬다.

“스트라이크!”

엘비스 앤드루스.

이번 시즌 그럭저럭 괜찮은 성적을 올리고 있긴 하지만, 오늘은 별로 신통해 보이지는 않았다.

초구 너클 커브를 지켜만 보면서 스트라이크 하나.

“볼!”

2구로 몸쪽에 포심을 박으니, 이번에도 참았다. 이걸 안 잡아주네.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아웃!”

기본적인 실력은 있는 선수이니, 괜히 길게 끌었다가는 얻어맞기 십상이지. 감을 못 잡고 있을 때 확실하게 삼진을 잡아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재빠르게 투구 타이밍을 당기며, 연달아 포심과 슬라이더를 던지니, 그는 자연스럽게 삼진을 헌납했다.

‘나이스.’

오늘 경기 여섯 번째 삼진.

이제 단독 5위인가?

내 위로 남은 건, 놀란 라이언과 랜디 존슨, 샌디 코팩스, 그리고 다시 놀란 라이언이다.

샌디 코팩스야 그렇다 쳐도.

나머지 두 양반은 자기들끼리 다 해먹고 있네. 넘어도넘어도 계속 앞에 있어. 통산 삼진도 나란히 1,2위로 아는데. 진짜 좀 괴물 같은 사람들이야.

“아웃!”

물론 나도 마찬가지고.

앞서 신중했던 엘비스 앤드루스와는 달리, 노마 마자라는 이번에도 잽싸게 스윙을 냈지만, 2구째, 투심을 빗맞히며 내야뜬공으로 처리됐다.

아쉬운 듯 입맛만 쩝쩝 다시는 그를 뒤이어 다시금 올라온 아드리안 벨트레.

명예의 전당이 확정되신 분께서는 눈을 꽤나 사납게 치켜떴다. 인상이 괜찮은 사람인데, 어째 나한테만 저러네.

날, 별로 안 좋아하나봐.

나는 어릴 때부터 자주 봐서 그런가, 이상하게 정감이 가는데, 저쪽은 노골적으로 싫어하니, 좀 서운하네.

물론 어느 정도는 내 잘못이 있긴 하지. 지난 타석에서 체인지업 세 개로만 잡았으니까.

완전 가지고 논 건데, 저런 거물의 입장에선 자존심이 상할 만하기는 해.

“스트라이크!”

그렇다고 해도, 서운한 건 사실이기에, 상처받은 마음을 꾹꾹 눌러담아, 공을 던졌다. 아까 보니 체인지업은 거르는 것 같더라고.

패스트볼을 노리는 눈치 같던데,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또 서클이나 하나 던져줬다.

얼마나 편해? 같은 그립 계속 쥐니까. 야구가 이렇게 쉬운 맛도 있어야지.

‘이야, 잘못하면 한대 맞겠는데?’

또다시 던진 체인지업에 그는 이젠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뜨겁게 노려봤다.

이러다 얻어맞겠어. 공 말고 내 얼굴 말이야. 당장이라도 뛰쳐 올라올 것 같은 눈빛인데?

선하게 생긴 사람이 인상을 쓰니까, 왠지 좀 더 무섭구만. 패스트볼 하나 던져줄까? 마음이라도 풀라고.

“스트라이크!”

그럴 수야 없지.

2구는 너클 커브로 넣었다.

바깥쪽에서 살짝 스트라이크존을 긁으면서 내려가는 공에 그는 헛스윙했고. 지긋지긋하다는 것처럼 나를 봤다. 왜요? 그래도 체인지업은 아니잖아? 그럼 된 거지.

‘실력 아직 좋아 보이던데, 뭐하러 패스트볼을 던져?’

나이가 들기는 했지만, 실력은 아직도 확실한 타자다. 올해는 경기를 좀 거르기는 했어도, 좋은 타격을 보여주고 있고.

파워는 살짝 줄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고, 컨택은 아직 확실하게 살아 있으니, 괜히 기대하는 패스트볼 던져주면, 바로 기깔하네 날릴 거야.

내 패스트볼이 Old Man들을 잡기에는 적절하지 못하잖아? 느린 배트 스피드로도 따라갈 만한 구속이니까.

‘그러니 그냥 변화구로 잡아야지.’

괜히 간절히 바라고 있는 패스트볼 던져서 출루시켰다간, 뒤에 녀석이 좀 껄끄럽기도 하고. 물론.

“스트라이크 아웃!”

그렇다고 해서 아예 안 던진다는 말은 아니다. 그냥 조심하자는 거지.

갑작스럽게 와인드업을 생략하고, 세트 포지션으로 높게 포심 패스트볼을 던지자, 타자는 타이밍이 꼬인 듯, 반박자 느리게 스윙했다.

기껏 기다렸던 공이 날아오자, 마음이 급했던 건지, 냅다 휘둘렀는데, 박자는 느려도 스윙은 빨랐지만, 그렇기에 헛스윙이 나왔다. 스트라이크 아웃.

‘다음 타석은 좀 위험하겠네.’

진짜 화가 제대로 난 건지, 입모양을 보아, 욕을 중얼거리는 것 같은데. 괜히 자극한 건가?

저런 클래스의 타자들은 자칫 발동 제대로 걸리면 좀 짜증날 텐데.

“You Suck!”

“벨트레 너도 X나게 늙었네! 스윙이 그게 뭐냐? X같이 못한다야!”

“크하하핳, 어차피 젊었어도 X되는 건 똑같았겠지만!”

“삼진 고맙다! 오래 본 놈이라서 그런가, 시원하게 잘 대주네! 계속 그렇게만 해!”

“어? 화났냐? 에이, 그러려니 해~ 상대가 Go잖아~”

지금이라도 조심해야 할까, 했지만, 이미 늦은 것 같다. 내가 조심하려고 해도, 우리 팬들이 알아서 속을 박박 긁어주네.

이래서 우리 팬들이 좋아.

내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약하게 먹는 것 같으면, 자기들이 알아서 강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주거든.

저 업보를 돌려받기 싫으면, 그냥 계~속 닥치고 잘해야겠지.

사실 그게 제일 쉽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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