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사실상 AL 서부지구 꼴찌 결정전?>
이번 시즌 고유석의 남은 등판 경기는 공교롭게도 둘 다 텍사스 레인저스였다.
5일 휴식으로 인해.
일정상 9월 22일에 먼저 홈에서 붙은 뒤, 23~27일 휴식 후, 레인저스 홈에서 붙게 됐으니까,
물론 이번에 레드삭스전처럼 갑작스러운 이유로, 등판을 거르지 않는다면 말이다.
다가오는 매치업에 몇몇 언론에서는 사실상 서부지구 꼴찌를 결정짓는 경기라며 표현하기도 했지만. 대다수는 그보단, 조금 더 흥미로운 타이틀을 붙였다.
<‘신기록’ 시리즈! Rangers, 놀란 라이언의 기록을 지켜라!>
<‘놀란 라이언’, 목표까진 24삼진! 경기 당 12삼진이면 타이!>
신기록 혹은 놀란 라이언 시리즈라는 타이틀을 말이다. 마지막 두 경기에, 그 기록이 걸려 있었으니까.
[#A’s]
[레인저스, 알지? 눈치껏 하자? 지금까지 하던 것처럼.]
└헛스윙 조금만 더 당해주면 돼. 그 정도는 쉽잖아? 그치?
└이제까지 잘 해줬는데, 마지막도 확실하게 해줘야지.
└좀 아슬아슬하다고 생각했는데, 레인저스 쭉 찍힌 거 보고 가슴 쓸어내렸어.
홈에서 3연전. 그리고 매리너스 3연전 이후, 다시 레인저스 원정에서 4연전.
그 일정표를 본 오클랜드 팬들은 흐뭇한 미소와 함께,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번 시즌, 고유석에게 정말로 잘 ‘대줬다’고 할 수 있는 레인저스였으니까.
이번에도 그래주리라고 확신하며, 기대감을 올렸지만.
[#Rangers]
[X발 안 그래도 X같은데, 마지막에 더 x같겠네.]
└왜 오클랜드는 X발놈의 5일 휴식을 줘서 막판에 두 번이나 만나게 하는 거야. 어깨 박살나게 계속 굴리던가!
└다른 건 다 참는데, x발 기록 대주는 건 아니야, 이건 진짜 좀 아니라고.
└시즌 내내 X같이 털렸는데, 기록까지 대주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우리가 무슨 자판기야? 저 새끼가 원하면 툭툭 뱉어주게?
당연히 마찬가지로 일정표를 받아든 레인저스의 반응은 대단히 찝찝할 수밖에, 아니, 짜증날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기대보다 훨씬 못했던 시즌에 화가 나는데, 마지막에 와서 고유석을 두 번이나 만나며, 한결 더 X같이 끝나게 생겼으니까.
<텍사스 팬들, ‘팀 레전드의 기록을 지켜라!’며 선수들에게 독촉!>
<놀란 라이언까지 24걸음! 레인저스는 레전드의 기록을 지켜낼 수 있을까?>
또한 모르긴 몰라도, 족히 수십 년은 이어질 기록의 제물이 되는 것 또한 짜증스러웠고.
심지어 현재 기록의 주인공이 놀란 라이언이 아닌가? 무려 텍사스 레인저스의 영구결번인 놀란 라이언!
비록 놀란 라이언이 383탈삼진을 달성한 것은, 1973년, 캘리포니아 에인절스(LA 에인절스) 시절이라.
엄밀히 말하면, 레인저스와 딱히 관계가 없다고 하나. 어찌됐든 자 팀 레전드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영광을, 안 그래도 꼴보기 싫은 고유석이 차지한다고? 레인저스 팬들은 치가 떨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부디 마지막에라도 건승을 기원하며, 선수들을 독려했지만.
<3경기 24이닝 30K 무실점 ‘2완봉 1매덕스’, 레인저스의 고유석 극복기!>
<시즌 내내 Go에게 ‘Shutouts’중인 레인저스, 과연 이번에는?>
다만 그런 텍사스 팬들의 간절한 바램과는 별개로. 객관적인 통계는 고유석에게, 그리고 오클랜드에게 웃어줬다.
이번 시즌 레인저스는 고유석에게 그야말로 영혼까지 털렸다고 봐도 무방했으니까.
한 투수에게 두 번의 완봉과 그중 한 번의 82구 완봉을 포함, 세 경기 내내 무실점으로 막혔으니, 더 말할 것도 없겠지.
[#Rangers]
[제발 부탁이다, 기록만 내주지 마. 완봉이나 다른 거 다 괜찮으니까, 삼진만 줄이자, 제발.]
그렇기에 레인저스 팬들은 차라리, 앞으로 남은 두 경기 역시 모두 다 완봉을 당하더라도.
신기록 만큼은 내어주지 말라며, 간절히 기도했고. 그런 들뜨고, 또 분노한 분위기 속에서. 첫 번째 경기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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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ck 유니폼 없어? XL로.”
“죄송하지만 L 이상의 사이즈는 전부 나갔는데, L이 크게 나와서, 단추를 안 잠그면 충분히 겉에 걸칠 수···”
경기 전, 오클랜드 콜리시엄 근처의 애슬레틱스 용품점들은 하나 같이 사람이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어제와 오늘 연이어서 도시, 아니, 주변 권역권 전체에서 사람이 몰려온 건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인파가 밀려들었으니까.
그들을 하나하나 응대하던 용품 샵의 직원은 곧 경기 시간이 다가온 건지,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사람을 보며 그제야 식은땀을 훔쳤다.
“우와··· 오늘 사람 진짜 많네요. 과장 좀 보태서 만 명쯤 본 것 같은데요?”
평소보다 두 배는 더 힘든 것 같은 느낌에, 그는 흘끔 점장을 쳐다봤다. 두 배를 일했으니, 두 배의 시급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표정으로.
“올해는 늘 많았잖아?”
허나 점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번 시즌은 작년과 비교했을 때, 엄청나게 많기는 했다.
과장을 조금 보탠다면, 거의 두 배는 될 정도로. 그 이유야 너무나도 뻔하고.
“Go는 오늘도 완판이네요.”
Go, 이 도시의 왕이 된 선수.
그가 모든 원인이었다.
당장 판매량만 보더라도, 그와 관련돤 유니폼과 MD(굿즈)가 압도적이니까.
거의 매일 같이 완판되는 수준이지. 등판하는 날이면 두 시간이면 족히 다 팔아치우고도 남고.
“아무리 그래도 유독 많은 것 같은데···”
오늘도 Go의 등판 날이니, 평소보다 사람이 많은 거야 당연하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오늘은 좀 심했다.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의 말에, 아까 전부터 주섬주섬 짐을 챙기던 점장은 설마 몰랐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이 이번 시즌 Suck의 마지막 홈 등판이잖아. 매장이 아니라, 콜리시엄 안에도 사람이 바글거릴 걸? 거기다 기록도 걸려 있고.”
“아··· 어쩐지!”
벌써 그렇게 됐던가?
가만히 일정을 꼽아보던 끄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야 충분히 이해가 됐으니까.
“마지막 홈 등판이라니··· 지금이라도 표를 사야 하나··· 외야 관중석이라도 암표 한 장 구하면···”
그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어차피 더 팔 것도 없이 다 거덜 났으니, 조기 퇴근하고 암표라도 구해볼까?
오클랜드이고, 심지어 콜리시엄 근처인 만큼, 적당한 만큼의 현금만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잘만 시간을 맞춘 다면, 지금까지 모아둔 걸 인출할 시간 정도는 있을 것 같았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의 모습에 점장은 코웃음을 흘렸다.
“암표는 무슨··· 그 암표상들도 오늘은 경기장 들어가기 바쁠 텐데.”
“아···”
“그러게, 더 후회하지 말고, 너도 내년에는 시즌권 구매해. 그쪽이 더 편할 테니까.”
“Go 같은 선수가 나올 줄 알았으면··· 저도 진작에 그랬죠···”
점장의 확언에 한숨을 푹 내쉰 그는 아까 전부터 계속 부산스럽게 구는 점장에게 쀼루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 점장님은 아까 전부터 뭐하세요? 뭐 찾으시는 거라도 있어요?”
“응? 뭐하긴? 오늘 경기 보러 갈 준비하지. 시간 딱 맞네. 오늘은 어차피 더 팔 것도 없으니, 칼 너도 일찍 퇴근해. 난 콜리시엄으로 가니까.”
마지막 점퍼까지 챙겨 입은 뒤, 씨익 웃는 점장의 모습은 여태까지 그가 본 모습 중 가장 밝았다. 가장 부럽기도 했고.
그래, 시즌권을 가진 자의 여유겠지. 야구에 별다른 관심도 없다가, Go가 데뷔한 이후로 부쩍 흥미가 생긴 자신과는 달리. 점장은 예전부터 에이스의 오랜 팬이었으니까.
그것을 보며 직원, 칼은 결심했다. 멋진 차를 한 대 뽑으려고, 이 일을 시작한 것이지만.
조금 덜 멋진 걸 뽑는 한이 있더라도, 내년에는 기필코 시즌권을 마련하겠노라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경기의 시간은 서서히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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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가 엄청나네요.”
콜리시엄으로 향하는 길.
보조석에 동승한 대니얼은 창밖을 훑으며 혀를 내둘렀다.
지금 오클랜드가 엄청나긴 하지. 누가 본다면, 포스트시즌이라도 나가는 줄 알 거야.
당연하게도 원인은 나다.
애초에 올해 오클랜드 시민들이 행복했던 순간의 이유 중 60%는 내 덕분일 걸? 아니, 좀 더 될 수도?
[Go! 놀란 라이언을 향해 Go!]
[오늘 경기, Go의 탈삼진 하나 당 모든 품목 3% 세일!]
[오늘, Go가 10탈삼진 이상 성공시 전품목 10% 파격 할인!]
[It’s Suck Day! 가게 내, FHD TV 배치! 맥주를 주문하면, 스낵은 무료!]
그런 내가 대기록에 도전하고 있으니, 분위기가 엄청날 수밖에.
‘마지막 홈 등판이기도 하고.’
흘끔 창밖을 보니, 대충 주변 가게의 간판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이 무슨 놓칠 수 없는 대목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게란 가게는, 죄다 세일 폭탄을 터트리고 있네.
하나 당 1%, 10개 잡으면 뭐 15% 이런 식으로 말이야.
“오, 저긴 3퍼센트네. 경기 마치고 오는 길에 들러서 뭐 좀 살까요? 열 개만 잡아도 30퍼센트인데.”
“어··· 마침 세제가 좀 떨어지긴 했는데, 나쁘진 않겠네요.”
저런 걸 둘러보는 것도 출근길의 재미 중 하나다. 종종 진짜 파격적이다 싶은 곳들이 있거든. 방금 본 3%처럼. 저런 건 나도 가끔 혹한다니까?
커다란 슈퍼마켓인데, 내 삼진 당 전 품목을 3% 할인이라고 하니. 열 개쯤 잡고 오는 길에 장보면 딱 좋을 지도.
물론 진짜로 들르지는 않는다. 도심 안에서는 웬만하면 차에서 안 내리는 게 좋으니까.
아무리 내가 오클랜드에서 가장 사랑받는 남자라고 해도 말이야.
“거울보다 얼굴을 많이 보네.”
요새는 딱히 거울이 필요가 없다. 밖에 나가면, 죄다 내 얼굴이거든.
전광판에도 내 얼굴, 플랜카드도 내 얼굴, 포스터에도 내 얼굴. 가끔 소름끼칠 정도지.
“홈에서 마지막 등판이니, 오늘 같은 날 완봉이라도 해야···”
“완봉은 지난 경기에서 이미 하셨으니, 오늘은 웬만하면 7이닝 이내로 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래요? 저는 거뜬한데. 뭐 완봉 그게 뭐라고. 올해만 여섯 번을 했는데.”
“저번 경기 투구수가 109구에요. 분명 몸에 무리가 갔을 테니, 안정을 취해야죠.”
“밖에 포스터를 보세요. 삼진 하나 당 세일율이 저렇게나 높은데. 오클랜드 시민들을 위해서라도 제가 더 많이 마운드에 올라서, 최대한 탈삼진을 잡아야하지 않겠습니까?”
“그 가게의 사장님들도 오클랜드 시민이니, 그들도 생각해주셔야죠. 너무 많이 잡으면, 가게들이 줄줄이 폐업하지 않겠습니까?”
한 마디를 안지네.
어차피 기대도 안 했다.
완봉하고 나면, 대니얼이든, 코치든, 정말 칼 같이 끊어버리니까.
말한 것처럼, 오늘도 길어야 7이닝 정도겠지.
‘타이기록까지 스물넷. 오늘 못해도 12개는 잡아둬야 안정권일 텐데···’
이닝은 정해져 있으니. 그 안에서 최대한의 효과를 뽑아내야겠지.
“너무 기록에 집착하지 마세요. 기록은 따라오는 것이지, 쫓아가는 게 아니니까요.”
대니얼은 혹시라도 이런 분위기에 휩쓸려, 내가 무리를 할까 걱정됐던 건지 그렇게 말했다.
기록은 따라오는 거지, 쫓아가는 게 아니다라. 멋진 말이네.
“직접 생각한 거예요?”
“뭐, 엇비슷한 말이야 엄청나게 많겠죠.”
하긴, 나도 몇 번 들어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들긴 하네. 과거에 누구라도 한 명쯤은 비슷한 말을 했겠지.
그래도 생각보다 좋은 조언이었기에 가슴에 새기며, 콜리시엄으로 입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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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y, Suck! 봐봐. 회사가 샌프란시스코에 있다더니, 배송이 엄청 빠른데? 벌써 왔어!”
“예, 참··· 오늘 등판하는 투수한테 좋은 거 보여주네요.”
경기 전, 한창 몸을 달아 올릴 때, 제드 라우리가 왠 쫄쫄이를 휘적거리며 나한테 자랑했다.
뭔가 했더니, 익숙한 디자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내가 내 손으로 직접 고른 디자인 말이야.
‘저건가, 남은 평생 동안 날 치욕스럽게 만들 옷이.’
이번 시리즈 끝나고, 다음 매리너스 시리즈도 끝난 뒤에, 저걸 입어야 한다.
입고 길거리를 걷거나, 아니면 원정을 가거나, 둘 중 하나를 해야 하지.
내가 X나게 유명한 만큼, 아주 널리널리 퍼질 텐데. 아마도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거야. 위대한 투수의 위대한 복장이라고. X발.
조금 있다가 등판하는 상황에서 저런 걸 보니, 벌써부터 멘탈이 흔들리는 것 같지만. 덕분에 기분이 좀 축 가라앉았다.
아마 제드도 그걸 의도한 거겠지. 온 사방에서 기록에 대한 부담을 팍팍 주고 있으니, 이런 거라도 보고, 긴장을 풀라고.
“크하하핳, 네가 입은 거 상상한 것만으로 벌써 좀 웃기네. 어우, 이거 들어가긴 하려나? 찢어지겠는데?”
아닌가? 그냥 X새끼인가?
“그딴 거에 신경 팔려서 오늘 수비 제대로 못하면, 제드도 그거 같이 입게 만들 거니까, 잘 알아두슈.”
진심을 가득 담아서 노려보니, 제드 라우리는 그제야 조금 꼬리를 내리는 듯 슬그머니 하늘 높이 흔들거리던 레슬링복을 등 뒤로 숨겼다.
“오··· 당연히 잘하지, 내 실력 알잖아? 아니지, 오늘은 내가 잘할 일이 없어야 더 좋은 거 아니야?”
여전히 입은 살아 있었지만.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네.
삼진에 야수가 할 일은 없으니까. 남은 두 경기는, 그를 포함해, 다른 야수들이 한가로운 게 베스트겠지.
물론 삼진 외의 이유로 한가로우면 절대로 안 되겠지만.
“나이스볼, 나쁘지 않은데? 오늘 한 15개쯤 잡겠어. 다음 경기는 편하겠구만.”
워밍업을 마친 뒤의 불펜피칭. 불펜포수의 말을 보아, 인상적인 컨디션은 아닌가보다.
그래도 뭐, 저번에 매덕스 했을 때처럼, 갑자기 변화구가 맛이 간 건 아니니까.
‘굳이 컨디션이 좋지 않더라도, 레인저스쯤이야···’
“밖에 장난이 아니던데. 설마 신경 쓰고 그런 건 아니지? Go 네가 여론에 휘둘리는 팔랑귀는 아니잖아?”
슬슬 불펜피칭까지 끝날 때가 되니, 스콧 에머슨은 흘끔 곁눈질하며 그렇게 물었다.
코치도 봤나보네. 세일이니, 신기록이니 하는 것들. 하긴, 오클랜드 전체에 쫙 깔렸으니, 못 보는 게 이상하지.
그도 대니얼처럼 혹시나 내가 그런 말에 휘둘릴까, 염려하는 것 같았지만, 난 가볍게 걱정말라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래, 오늘도 잘 해보자. 레인저스 애들이 Go 널 갈아마시려고 하는 것 같던데,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잘 놀려줘.”
“그래야죠.”
마지막으로 복장까지 깔끔하게 정비한 뒤, 불펜의 문을 열었다.
“Suuuuuuck!”
“오늘 그냥 25K 가자!”
“오늘이 마지막 홈 등판인데, 기록도 오늘 세워야지!”
언제나처럼 소란스러운 분위기. 그러고 보니, 오늘이 마지막 홈 등판이지.
어쩐지 평소보다 사람이 더 많아 보이더라. 거의 만원이라고 무방할 만큼, 관중석이 꽉꽉 차 있는데. 죄다 나 보려고 왔구만.
기왕이면 홈에서 신기록을 세우라며 소리치는 사람들도 있데, 꿈도 야무져.
“Suck! 이거 봐! 네 유니폼이야! 마킹은 내가 직접 했어!”
그 압도적인 환호성 속에서, 터덜터덜 마운드에 오를 때.
한 관중은 새로 뽑은 건지, 깔끔한 유니폼을 나한테 뽐내기도 했다.
아마도 내 유니폼일 거다.
올해 오클랜드의 야구 유니폼 중 대다수는 내 거니까. 99%확률로 내 거지.
기특하다는 의미에서 슬쩍 손을 흔들어주니, 갑자기 휙 돌아서는데, 등짝이 찍힌 등번호와 이름이 평범한 것과는 조금 달랐다.
‘어? 내 거가 아닌 것 같··· 아, 내 거 맞네.’
내 등번호인 79가 아니라, 384가 찍혀 있었으니까. 그 아래의 이름으로는 평범하게 GO대신, sucK라고 박혀 있었고.
희미하게 보여서, 순간 내 유니폼이 아닌가, 했는데, 자세히 보니 잘 알겠다.
384와 특별히 강조된 K라.
아주 노골적인 뜻을 담고 있구만. 의미를 모르는 게 이상하겠어. 신기록 하라는 거겠지.
좁은 등판에 숫자 세 개를 꾸역꾸역 쑤셔 넣은 걸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 웃는다! 웃는다!”
“크헤헤헤, 레인저스 정도는 코웃음도 안 나온다는 뜻이지!”
“컨디션이 좋다는 뜻 같은데?”
“오늘 퍼펙트 해버리나? 저번 경기는 좀 아쉬웠는데.”
“뭐든 간에 하겠지! Suck이니까!”
그걸 다르게 받아들인 건지, 관중들은 긍정적인 예측을 하며, 들뜬 기대감을 품고 얌전히 기다렸다.
“플레이 볼!”
그리고 경기 시작.
첫 타자가 올라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렁차게 소리치는 주심의 콜을 기점으로 초구를 던졌다.
1번타자 Min-Soo Choo.
그래, 추민수 선배님이지.
어제, 휴식일에 문자도 왔었다. 자기한테는 삼진 잡지 말라고. 약간의 농담과 진담이 섞여 있었지.
“스트라이크!”
죄송하지만 그건 안 됩니다.
저도 바쁜 몸이라, 누구 가리고 삼진 잡을 처지가 아니라서···
바깥쪽 포심 패스트볼에 크게 헛스윙하며 첫 스트라이크가 올라갔고.
“Hell Yeah!”
“시작부터 느낌이 좋네!”
“KKKKKKKKKKKKKKKK가자!”
고작 스트라이크 하나에 리액션은 죽여줬다. 홈에서 보는 마지막 등판이라서 그런가.
다들 리액션이 좋네. 난 뭐, 렉이라도 걸린 줄 알았어.
래퍼처럼 K라는 글자를 숨도 안 쉬고 쏟아붓는 관중의 목소리를 귀에 담으며.
“스트라이크!”
2구를 던졌다.
너클 커브.
여전히감을 잡지 못하겠는 건지,쭉 날아온 공을 가만히 지켜보셨고, 딱 들어간 공에 투 스트라이크가 올라갔다.
“볼!”
“볼!”
“스트라이크 아웃!”
몰린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골라내며, 투구수를 끌었지만, 마지막 5구째의 하이 패스트볼에 다시금 배트가 헛돌았다. 일단 삼진 하나.
“You Suck!”
“You Suck!”
평소처럼 유석유석거리네. 그러지 마요, 나중에 선배 보기 민망하잖아.
“아웃!”
그다음 후속타자인 2번, 엘비스 앤드루스는 3구째에 과감하게 스윙하며, 공을 맞췄지만.
살짝 떨어지는 투심의 무브먼트에 땅볼이 나오면서, 범타로 처리됐다.
“우우우우우!”
“헛스윙 해라 X신아.”
삼진이 아니라는 게 못 마땅했던 팬들은 당연히 야유를 쏟아 부었고. 오늘은 뭔가, 관중들이 전부 다 레이더스 같네.
하나 같이 삼진에 집착하고 있는 걸 보면. 아니, 관중 정도가 아니라, 오클랜드 전체가 다 그렇지.
한 도시가 내 어깨에 올라탄 느낌은 어떨까? 도시 전체가 투수 한 명을 바라보는 느낌 말이다. 정답은···
“스트라이크!”
‘기분이 째진다’다.
아마 4만 명이 좀 넘을 것 같은데, 그런 사람들이 죄다 날 보러 왔다고 생각해봐?
멘탈이 조금 약한 사람이라면, 부담감에 오줌을 지릴 수도 있겠으나.
내 스스로 느낀 바, 관심종자의 기미를 타고난 나에게는.
“스트라이크!”
그저 최고의 상황이었다.
1구와 2구 둘 다 포심 패스트볼. 코스 역시 몸쪽으로 연달아 콱콱 박혔는데도. 3번타자, 노마 마자라는 스윙하지 않았다.
덫에 걸린 사람처럼 움찔움찔 거렸을 뿐. 스윙을 못 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겠지.
‘쉽게 가자. 이번엔 스윙해.’
타자에게 그렇게 부탁하며, 왼손으로 움켜진 공을 굴리다, 그립을 잡고 쭉 던졌다.
내 부탁들 들은 건지, 아니면, 스스로 의심이 사라진 건지, 시원스럽게 스윙하는 타자.
“스트라이크 아웃!”
허나 그의 스윙은 공에 닿지 못했다. 3구째, 서클 체인지업. 바깥에서부터 들어오며 하강하는 공은 배트를 얄밉게 지나쳤으니까.
“You Suck!”
첫 타석인데도, 삼진이 그토록 아쉬웠던 건지, 노마 마자라는 성난 표정으로 콧김을 뿜으며 타석에서 물러났고. 1회 초는 끝났다.
‘일단 두 개인가?’
그것으로 현재까지 적립된 할인은 6%. 내 삼진 하나에 할인을 3%나 태우다니, 명백한 판단 미스다.
아무래도 사장이 장사에 소질이 없는 것 같으니, 오늘, 이참에 내가 직접 폐업 시켜줘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