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필리스, 2경기 연속 Shutouts!>
<필라델피아에서도 울려 퍼진 ‘You Suck!’>
경기가 끝난 뒤에도, 분위기는 꺼지지 않았다. 두 경기 연속 영봉패에, 두 번째 경기는 아예 무사사구 완봉까지 당했으니.
혈기가 넘치는 필리스 팬들로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였으니까.
<‘고유석은 제2의 베이브 루스’ 갑작스러운 일정 변경에도 팬들 몰고 다니는 고유석!>
필라델피아 야구의 성지라고 할 만한 시티즌스 뱅크 파크가, 괴상한 복장의 침략자들에게 약탈당한 것 역시 참을 수 없었고.
<피트 맥카니 감독, ‘팬들에게 죄송할 뿐’ ‘오늘 타자들은 Go에게 말렸다’ ‘열심히 던져준 투수들에게 미안할 따름’>
경기가 끝난 뒤, 피트 맥카니 필리스 감독은 고개 숙여 사과하는 것으로, 팬들을 진정시키고자 했지만.
<공포에 물든 필라델피아의 밤? 수십 건의 폭력 사태가···>
<시티즌스 뱅크 파크 곳곳에 기물 파손! 분노한 팬들의 실력행사?>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둠스데이! 필라델피아 경찰 당국은 그저 한숨만!>
당연히 이미 눈이 돌아간 필리건들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애초에 고개 숙여서 잠잠해질 정도라면, 지금처럼의 악명을 떨치지 못했을 테고.
한 필리스 선수의 말처럼, 그날 필라델피아의 밤은 정말이지 위험했고, 다시 동이 틀 때까지는 험난한 시간이 지나갔다.
도시 곳곳에 술에 취하거나, 잔뜩 화가 난, 필리스 유니폼을 입은 괴인들이 나타나, 난장판을 벌였으니까.
<한 시즌 동안 여섯 번의 봉우리에 오른 고유석!>
물론 그런 필라델피아와는 달리, 다른 쪽은 그저 축제가 이어졌지만 말이다.
다시금 완봉승을 올렸고, 또다시 무실점 기록이 시작됐으니까.
<고유석, 절묘한 번트로 본인의 승리를 만들었다!>
특히 절묘한 번트로, 직접 본인의 완봉승을 장식시키는 결승타점을 내기도 했던 고유석이기에, 그에 대한 말들도 많았다.
한 선수가 완봉승을 거두는 동시에, 결승타점을 날리는 일은, 굉장히 인생에서 보기 드문 진기명기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정확한 번트, 운이 아닌 실력? 고유석, ‘예전부터 번트는 자신 있었다’>
<리키 핸더슨, ‘Go는 배트 컨트롤도 예술적!’ ‘타자로서의 길을 걸었다면, 어쩌면 지금보다 훨씬 이르게 메이저 무대를 밟았을지도···’ Go를 극찬!>
[#A’s]
[리키의 말이 맞아. 우린 최정상급 테이블세터를 잃은 거야.]
└그 대신 역대 최고의 투수를 얻었지..
└혹시 모르지, 타자로도 엄청 쩔어 주는 선수가 됐을지도.
└피지컬을 봐서는, 잘만 배웠으면 최강의 슬러거가 됐을 거야.
└거기에 송구도 죽여줄 테니까, 오? 트라웃 상위호환인데?
└AL에 투수 타석 생기면, Go가 매 년 3할씩 치고 실버 슬러거 가져가지 않을까? 도루도 매 경기마다 해서, 30개쯤 하고.
└Go를 NL로 보내긴 싫으니까, 우리도 같이 넘어가거나, AL에 지명타자 제도를 없애자.
두 경기 연속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건,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었기에.
팬들은 우스갯소리로, 아메리칸 리그가 지명타자제만 아니었다면, 그가 매년 실버 슬러거를 챙길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아예 타자였다며, 지금보다 훨씬 더 빨리 메이저리거가 됐을 거라는 레전드, 리키 핸더슨의 말에 동의하기도 했고.
<고유석 359K 역대 단일시즌 탈삼진 6위, 1위와 24개차!>
<남은 경기는 둘! 목표까지는 24탈삼진! 고유석, 역대 1위 기록에 오를 수 있을까?>
<고유석, 9이닝당 탈삼진 14.821! 충분히 가능!>
물론 정말로 그랬다면, 이런 투수를 보지 못했을 테니, 그저 재밌는 If 정도로 여겼지만 말이다.
####
시리즈가 끝난 뒤, 우린 도망쳤다.
“어우, 필라델피아 분위기 살벌한 것 봐.”
“괜히 여유 부렸다간, 좋은 꼴은 못 봤겠네.”
“어차피 우리도 포스트시즌 그른 거, 한 경기는 져줬어야 했나?”
“브루스 너 사상이 불순하네. 승부조작이라도 하자고?”
“그런 말이 아니잖아.”
스윕했거든. 우리가.
한창 달려야 할 때는 스윕 못하더니, 다 내려놓으니까, 잘 이기네. 물론 그만큼 필리스가 약한 것도 있고.
그나마 다행(?)인 건, 세 경기 연속 영봉승은 아니었다는 거다. 그랬다면 진짜 폭동 났지.
비행기 뜨지도 못했을 거야.
우리 죽이려고 몰려온 필리건들이 공항에 테러했을 테니까. 경찰 정도로는 어림도 없고, 주 방위군이 출동해야 했겠지.
그렇게 필라델피아를 떠나, 아니, 탈출하여 우리가 향한 곳은···
“여기가 더 위험하지 않나?”
“타이거즈 팬들도 좀 예민하긴 하던데. 성적 때려 박았잖아.”
“필리스보다 더 암울하지. 거긴 순수하게 구단주 덕분에 굴러가는 건데, 그런 구단주가 우승도 못 보고 갔으니···”
“필라델피아 다음은 디트로이트? 이거 일정 누가 짠 거야? 우릴 죽이려고 한 게 분명해.”
“오클랜드 놈들이 이런 말 하는 것도 좀 우습긴 하지.”
디트로이트다.
일정 한번 죽여주네.
산 넘어 산이 이어지는 일정에 선수들은 한숨을 내쉬거나 했다.
물론 오클랜드도 위험한 도시로는 안 꿀리는 곳이고.
사실 미국 내에서 디트로이트보다 더 위험한 도시들이 제법 있지만, 그것의 대명사 같은 곳이니, 한숨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연이어 험난한 원정이 이어진 가운데, 우울한 분위기가 기내에 감돌았지만, 이내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뭘 보고 저렇게 웃는 거야?”
등판이 없는 만큼, 컨디션 관리 대신, 느긋하게 휴대폰이나 하고 있을 때 들려온 소리는 왠지 좀 귀에 거슬렸다.
느낌이 안 좋기도 했고.
근원지를 찾아, 기내를 이동하니, 제드 라우리, 라제이 데이비스, 켄달 그레이브맨 등.
고참급 선수들이 옹기종기 모여 무언가를 아주 즐겁게 보고 있었다.
‘나 빼고 포커하나? 서운하네.’
몇 번 져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몽땅 쓸어가서 그런지, 요즘 따라 포커판에 잘 안 껴주는데, 이번에도 그런 건가 싶어, 왠지 좀 서운한 마음에 다가갔지만.
테이블에는 포커 같은 건 없었다. 밀머니도 없었고. 그저 제드 라우리의 휴대폰을 보며 다들 낄낄거렸을 뿐.
“뭐 봐요?”
“아, 깜짝이야!”
“놀랐잖아, 갑자기 훅 들어오지 마.”
“Suck, 우리 나이는 한창 조심해야 할 때야. 그렇게 불쑥불쑥 나타나면 심장에 안 좋다고.”
뭔가 나쁜 짓을 한 사람처럼 기겁하는 모습을 보니, 더욱더 의심스러웠다.
묘하게 웃는 얼굴이, 왠지 나와 연관되어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대체 뭔가 싶어 슬쩍 휴대폰 화면을 보니, 웬 인터넷 쇼핑몰이 화면에 떠 있었다.
기괴한 쫄쫄이를 보여주면서.
이거 레슬링... 복장 아니야?
“·····취향 존중할게요. 참··· 예, 대단하네. 혹시 와이프분 취향이 그런 쪽?”
“···그런 거 아니야.”
제드 라우리는 본인이 그것을 입은 모습을 떠올린 건지, 몸을 부르르 떨며 그런 개같은 소리는 하지 말라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뭔데요?”
“그게···”
“선물이야, 선물.”
내 물음에 제드 라우리가 어물쩍대니, 라제이 데이비스가 씨익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선물? 이딴 걸? 차라리 나체로 다니고 말지, 돈 주고 입으라고 해도 안 입을 것 같은데?
“마침 잘됐네, Suck 너도 같이 골라줘.”
“진심이야?”
“왜? 재밌잖아? 얘도 선택권을 줘야지.”
“? 뭔지는 모르겠지만··· 재밌어 보이긴 하네요. 오케이, 같이 좀 봅시다.”
어차피 할 일도 없겠다, 흔쾌히 수락하니, 라제이 데이비스는 씨익 웃었고. 다른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얼굴을 빨갛게 부풀렸다. 뭔가 불쾌한데···
“누구한테 선물할 거예요?”
“우리 팀 선수. 어떤 게 제일 재밌을 거 같아? 너무 노출이 심한 건 안 돼.”
“난 이게 제일 좋은 것 같은데, Suck 네 생각은 어때? 적당히 웃기면서, 너무 과하지도 않고.”
“에이, 그보다는 이쪽이 더 재밌죠. 노출이야 뭐, 레슬링복인데 당연히 좀 있는 거지.”
“··네 의견이 그렇다면야. 근데 젖꼭지가 나올 것 같은데-”
“뭐, 패드를 붙이든 반창고를 붙이든 하면 되죠. 근데 선물 받을 사람이 우리 팀 선수라고요? 누군데요?”
“어, 신인이야, 신인.”
“아~ 대충 알겠네.”
신인에게 이런 걸 선물한다라. 대충 감이 잡혔다. 역시 그거였구만?
어쩐지, 고참들끼리 똘똘 뭉쳐 있더라. 원래 이런 건 베테랑들이 준비하는 게 불문율이니. 그래서 그런거였구만.
“루키 헤이징이죠?”
“어? 어어, 그렇지.”
“역시 눈치가 빠르네. 하긴, 피칭은 원래 결국 눈치싸움이니까.”
“잘 나가는 녀석인 뭐가 달라도 달라.”
루키 헤이징 데이.
정규시즌 마지막 원정 경기를 떠날 때, 혹은 돌아올 때, 루키, 즉 신인 선수들이 선배들이 준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입는 행사다.
슈퍼루키든 뭐든, 이건 무조건 해야 하지. 루키 헤이징 자체는 건너뛰더라도 말이야. 나도 대상자고.
이 사람들, 아주 무자비해?
이런 걸 입히려고 한다니.
맷 채프먼이나, 다니엘 고셋 같은 녀석이 이걸 입은 모습을 떠올리니, 나도 웃음이 절로 나왔다.
사무국 차원에서, 과도한 노출이나 여장을 금지시켰다고는 하지만··· 이건 레슬링이잖아? 스포츠 유니폼이라고.
충분히 가능하지.
조금 더 흥미가 올라왔다.
“이거, 금메달도 같이 줄까 하는데, 어때?”
“느낌이야 좋죠. 금메달이 나쁜 의미는 아니니까. 이만큼 잘하라는 뜻이기도 하고.”
“그치··· 실력이나 성적이 금메달감이기는 하지.”
아마도 맷 채프먼인 것 같다.
얘가 실력은 진국이니까.
금메달에 어울리는 인재지.
특히 수비력이 말이야.
“녹색으로 하죠? 아니면 회색이나.”
“우리 유니폼처럼? 안 그래도 우리도 그 생각 했어. 너도 같은 생각이라니, 다행이네.”
“근데 시간 맞출 수 있어요?”
“충분하지. 보니까, 3일 안에도 가능하다고 하니까.”
“일정 딱 맞겠네요.”
“그치?”
그렇게 모든 선택을 마친 뒤, 세 사람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찝찝한 미소도 날렸고.
혹시나 싶어서 물었다.
“근데··· 난 뭐에요?”
“뭐가?”
“내 루키 헤이징 복장요. 나도 있을 거 아니에요?”
“하려고? 심부름 때처럼, 안 하려고 지랄할 줄 알았더니.”
“솔직히 Suck 너만큼 잘하면 가끔 지랄하거든. 자긴 건너 뛰어야 한다고.”
“뭐, 심부름이야 여전히 할 생각 없지만, 이건 재밌는 행사인데. 저도 해야죠.”
“그렇다니 다행이네, 넌 두 개를 생각했어. 하나는 그- 뭐야, 흰 코끼리있잖아.”
“코끼리? 덤보 같은 거?”
흰색 코끼리?
그건 뭐, 어디서부터 비롯된 건지 예상이 안 되네. 그거랑 나랑 대체 뭔 상관이야?
“그래, 그거. 근데 대신 좀 하얗게. 우리 마스코트가 흰 코끼리잖아? 사실상 이번 시즌 우리 팀의 본질은 Suck 너라고 해야 하고. 그러니 흰 코끼리가 딱 좋겠더라고.”
“아···”
“너무 싫어하지 마, 그건 기각 됐으니까, 다들 별로라더라. 난 괜찮았던 거 같은데.”
정말로 다행이다.
이 나이 먹고 아기 코끼리 덤보 분장하긴 싫거든. 안 그래도 덩치가 큰데 그런 것까지 입으면, 진짜 코끼리 같겠지.
상상만 해도 싫다.
기각이라니, 다른 사람한테 진짜 고맙네. 제드 때문에 X될 뻔했어.
정말, 진짜 정말 다행이야.
“그럼 나머지 하나는?”
“응? 방금 직접 골랐잖아?”
“내가요?”
“응, Suck 네가. 덕분에 금방 끝났네. 역시 당사자 의견을 불어보는 게 제일 좋다니까.”
“멋지겠던데, 잘 입어. 아, 혹시 모르니까, 패드나 반창고는 니가 직접 준비해. 우린 옷만 사줄 거야.”
“아래가 튀어나올 수도 있으니, 특별히 반바지까진 허락해줄게. 대신 엄청 짧은 걸로 입어. 핫팬츠처럼.”
X발 그 말 취소다.
흰 코끼리 내놔 X새끼들아.
어쩐지, 표정이 X같더라.
괜히 실실 쪼개는 게, 눈치가 이상했을 때 알아차렸어야 하는 건데.
“왜··· 하필··· 이런 개X같은 걸?”
“말이 심하네. 레슬링 선수들이 들으면 서운해할 걸?”
“그야, 넌 You Suck이잖아. You Suck하면 커트 앵글이고.”
“정규시즌 시작하기 전에 얘기하지 않았던가? 커트 앵글 스타일로 갈 거라고. Suck 너 은근 기억력이 나쁘네.”
You Suck이라서 커트 앵글이고 커트 앵글이니 레슬링이라니.
그게 무슨 개같은 의식의 흐름이야.
눈앞이 캄캄해지며 떠오른 건, 그렉 매덕스였다.
이게 다 그 노친네 때문이다.
지금도 날 커트 앵글이라며 불러대는데. 스프링 캠프에서 그렇게 부르니까, 다른 선수들이 그거 듣고 이런 사달이 난 거 아니야.
이럴 줄 알았으면, 노히터랑 퍼펙트 했을 때, 더 놀려줬어야 하는 건데.
X발 이게 내 거인 거 알았으면, 최대한 얌전한 거 골랐지··
‘내 꾀에 내가 넘어갔네.’
혹시나 싶어서 세 사람을 봤지만, 그들은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건 마치 나한테는 이렇게 느껴졌다.
안 돼, 안 바꿔줘. 바꿀 생각 없어. 빨리 자리로 돌아가. 라고.
이래서 마음을 곱게 써야 돼.
남의 일이라고 막 고르는 게 아니었는데···
“자자, 우리 이렇게 된 거. 전부 다 세트로 갑시다. 레슬링 팀 같은 느낌으로.”
“어? 세트?”
“고셋, 채프먼, 올슨, 브루스, X발 루키 전부 다 이걸로 가자고요. 복장에 통일성이 있어야 재밌죠. 안 그래요?”
머리를 뜯고 싶었지만, 그래도 괜찮다.
난 혼자 안 죽을 생각이니까.
아마 다들 자거나, 노래 듣거나, 딴짓하고 있을 텐데. 우리 같이 죽자.
동기사랑 나라사랑인데. 나만 혼자 톡 튀어서 되나. 우리 다 같이 함께 어우러져야지.
내 스스로 마음을 곱게 써야 한다고 했지만, 어차피 더럽게 써서 X된 거. 일관성 있게 더럽게 쓰자.
“그으···런가? 다른 애들 건 이미 준비해두긴 했는데, 좋을지도?”
“오, 진짜 좀 재밌을 거 같은데? 난 찬성. Suck이 너무 잘 골랐어. 이거 좀 마음에 들어.”
“단체 유니폼 같아서 사무국에서도 괜히 태클 안 걸고, 좋게 넘길지도.”
“음, 좋아, Suck, 이번에도 좋은 의견 고맙다. 이만 자리로 돌아가 봐. 나머진 우리 베테랑들이 알아서 준비할 테니까.”
“수고들 하십쇼.”
다행히 이번에도 내 의견은 받아들여졌다.
####
디트로이트에 도착한 뒤.
시리즈가 이어졌지만, 시즌 막바지라서 그런가, 덕아웃 풍경은 마이너리거 때와 비슷했다.
“넌 이번에도 플로리다?”
“어, 스프링캠프 대비해서, 피닉스에서 머물까 하긴 했는데, 난 플로리다가 좀 더 잘 맞더라고. 너는?”
“나야 뭐, 가족들이랑 유럽에···”
사정이 좋은 선수들은, 이미 포스트시즌 가능성도 없겠다, 일찌감치 오프시즌을 준비하며, 내년 시즌을 대비하고.
“이번 시즌 성적이 조금···”
“마이너 옵션이 남아 있어서 내년에는 아무래도···”
성적이 애매한 선수들은, 마이너 옵션을 떠올리며, 마이너리그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거나. 지명할당, 즉 방출을 걱정하는 거지.
경기에 집중해야 한다고 하지만, 시즌이 이번이 끝인 건 아니니까, 어쩔 수가 없지.
결국 마이너나 메이저나, 크게 다를 건 없는 거야. 다 사람 사는 곳이고, 프로야구 선수들이니까.
물론 나도 마찬가지고. 나 같은 경우는 그중 압도적인 전자에 해당하니, 마음이 편한 편이었다.
비슷한 사정의 다른 선수들처럼, 나도 슬슬 오프시즌이나 준비하면 되는 거니까. 앞으로 남은 등판이 두 번이니, 눈 깜짝할 사이, 시즌이 끝날 테니, 금방금방 해야지.
“Suck 넌 Korea로 갈 거지?”
내 파트너이자, 사실상 차기 주전 포수라는 이유로, 마찬가지로 사정이 괜찮은 브루스도 일찍 내년을 준비하는 듯, 은근히 나한테 물어왔다.
오늘 같이 경기를 걸러서, 나란히 앉아 있는데, 녀석은 주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는 했다.
거의 풀시즌을 출장하며, 확실한 메이저리거가 됐으니, 얘도 그에 맞는 준비를 해야 할 테니까.
“일단 한국부터 가야지. 가족들도 봐야 하고, 야구부도 한번 들려야 하고.”
“그래? 쓰읍, 난 어떡하지··· 오프시즌 너랑 같이 보내려고 했는데.”
누구 마음대로.
그런 계획을 세우려면 내 동의를 먼저 얻어야지. 왜 니 멋대로 세우고 그러냐. 뭐, 한국 따라오기라도 하려고?
나랑 같이 한국 TV 프로그램 나가서, 사랑해요 연예Tv, 김치에 스팸 너무 맛있어요, 그런 거라도 하게?
“시즌 내내 얼굴 보고 살았으면 됐지, 무슨 니가 내 와이프도 아니고 오프시즌까지··· 너 알아서 보내.”
“왜? 배터리끼리 미리미리 호흡 맞추면 좋잖아? 돈독하게 관계도 다지고.”
“그럴 시간 없어, 인마.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단순히 브루스를 떨쳐내려고 하는 말은 아니다. 시즌 끝나도, 진짜 일이 더럽게 많거든. 같은 팀 친구랑 노닥거릴 여유는 없지.
일단 한국도 한국인데, 다음 시즌 동안 머물 집도 미리 구해야 한다. 지금 있는 집은 정말 마음에 들지만, 구단이 렌트해준 거니까.
내가 뭐,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이제 내 집 마련해야지.
브라이언은 샌프란시스코나 산호세를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어차피 차타고 다닐 것이니, 경기장이랑 별로 멀지도 않고. 결정적으로 치안 수준이 다르니까.
내가 오클랜드에서 지내는 걸 못마땅해 하는 눈치지. 나는 괜찮은데 말이야.
‘나만 보면 환희에 차서 악수부터 하고 보는데, 위험할 게 뭐가 있다고.’
물론 딱 30분만 뉴스 봐도 엄청나게 위험하다는 거야 알 수 있지만, 언제나 상대적인 법이지. 나한테만 안전하면 괜찮다 이거야.
“좋겠네, 하긴, Suck 너 정도면, 오프시즌에도 엄청 바쁘긴 하겠다. 나는··· 나도 좀 잘하지 않았나? 이놈의 비즈니스 사회는 그걸 몰라준단 말이야. 나도 음료수 멋지게 마실 수 있는데.”
“좋기는,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건데.”
“대신 캐시가 두둑하게 들어오잖아? 듣기로 너 이미 스폰서로만 천만 달러 벌었다며?”
“그건 그렇지.”
아무튼 새집을 사면서 빠져나갈 돈을 다시 채우는 것도 해야 하는데. 다행이게도 일은 더럽게 많다.
솔직히 브루스 말이 정답이다. 나 정도 선수쯤 되면, 일이 없는 게 이상하지.
한국, 미국 가리지 않고, 스폰서나 광고 등 온갖 종류 제안이 다 들어오고 있으니, 그중에서 다시 괜찮은 거 골라잡아야겠지.
물론 시즌 중간에 계약하고, 오프시즌으로 미뤄뒀던 광고 촬영도 해야 하고.
게임이랑 스포츠 잡지 표지모델 제안도 왔다고 하는데, 브라이언은 이 정도는 하는 걸 추천했다.
그야말로 시즌이 끝났는데도,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셈이었지만, 그게 죄다 돈이라는 걸 감안하면, 몸은 고될지라도 마음은 행복했다.
곳간에 쌀을 쟁여두는 것처럼 두둑~하네. 잘한 보람이 있어. 그래, 이렇게 뭐가 보상이 뒤따라야 의욕이 생기지.
‘그리고 오프시즌 동안 고칠 것들도 찾아봐야 하고.’
물론 오프시즌 내내 팔자 좋게 돈만 벌 생각은 아니다. 2년차, 소포모어 징크스도 대비해야지.
솔직히 여기서 더 고칠 게 있는가, 싶긴 한데. 혹시 모르잖아? 나도 모르는 내 비밀스러운 습관이 있을지.
다른 팀들이 그걸 내년에 찾아내서, 두들겨 맞을 수도 있고.
잘한 만큼, 다른 곳에서 분석도 더 철저하게 들어올 테니, 나도 더욱더 확실하게 준비해야겠지.
“네 트레이너분, 진짜 좋던데. 나도 어떻게 안 되나? 돈이라면 나도 모아둔 거 있는데.”
“이미 늦었어. 계약 갱신한지 오래니까.”
“알아, 그러니까 너랑 같이 보내고 싶다고. 한국에서 돌아오면 피닉스야? 아님 플로리다?”
“몰라도 돼.”
“아, 튕기지 좀 말고. 상부상조 좀 하자. 안 그래도 코치가 살 빼라고 닦달이란 말이야. 기왕이면 좋은 트레이너 구해야 하는데, 딱 니 옆에 있잖아?”
“더 좋은 사람 구해봐. 아니면 니 에이전트한테 부탁하던가.”
사실 대니얼도 나만큼 제안이 빗발쳤다. 내가 이번 시즌 워낙 어메이징하게 휩쓸었잖아?
그런 선수를 직접 조각했다고 볼 수 있는 피지컬 트레이너이니, 에이전트든, 에이전시든, 선수 본인이든, 침을 질질 흘릴 수밖에.
미리 도장 찍어뒀기에 망정이지, 자칫 늦었으면, 소중한 트레이너를 털릴 뻔했어.
‘시즌 끝나도 바쁜 건 매한가지겠네. 아니지, 오히려 오프시즌이 더 바쁘겠어.’
시즌 동안에는 그나마 휴식일이라도 있지만, 오프시즌에는 그런 것도 없을 테니까.
그야말로 할 일이 태산같이 밀려 있긴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당장 눈앞의 일부터 해치워야겠지.
“아웃!”
“경기 끝났네. Suck 너 바로 다음 1차전 등판이지? 텍사스 또 쥐잡듯이 털리겠네.”
“뭐, 어쩌겠어. 정 나랑 만나는 게 싫으면 다른 지구로 가야지.”
디트로이트에서의 3연전은, 다행히 무사히 막을 내렸다. 루징 시리즈라, 상대 팬들도 그럭저럭 편안했고.
오히려 필라델피아보다 여기가 더 안전한 것 같네.
시리즈가 끝났으니, 이젠 내가 등판할 차례였다. 그게 지금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이지.
“Suck, 준비는 다 됐어. 마지막 원정 떠나기 전에 딱 배송될 거야.”
“전부 다 네가 말했던 거랑 똑같은 걸로 구했으니까, 기대해라.”
그래, X발 이것도 할 일 중 하나지. 경기 져놓고 클클 거리는 제드 라우리를 보니, 굉장히 마음이 심란해졌지만, 애써 정신을 가다듬었다.
등판 전에 멘탈 터져서 좋을 건 없으니까. 속이 뒤틀려도, 억지로 참아야지. 그리고···
“뭔 소리야? 너 뭐, 제드한테 부탁한 거라도 있어? 라제이 말은 또 뭐고?”
“있어, 그런 게. 아, 브루스, 너 반바지 있냐?”
“있지, 당연히. 반바지가 없을까. 아무리 그래도 메이저리건데.”
“그래, 있으면 됐어, 있으면.”
나 혼자 만의 굴욕은 아닐 테니까. 그 정도로 만족하자.
브루스의 순진무구한 얼굴을 보니, 왠지 조금 죄책감이 들었다. 너랑 다른 녀석들까지 끌고 늘어져서 미안하다, 정말로.
그래도 니 말처럼 우린 배터리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나랑 함께 해야지.
그게 맞는 거지. 그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