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스트라이크 아웃!”
6회 초, 두 번째 타석에서도 얌전히 공을 지켜보기만 하고 내려갔다.
“잘했어, 타자들이 한 건 해줄 테니까, Go 너는 피칭에만 집중하자. 지금··· 알지? 그거 중이니까.”
“네, 그래서 꾹 참고 내려왔잖아요?”
“그래, 참 착하네.”
마음 같아선 내가 직접 빠따질을 하고 싶은데. 어쩔 수 있나. 그림이 좀 그렇잖아?
‘지금 같은 상황에서 내가 빠따질까지 해버리면, 진짜 헤드샷이 날아오겠지. 공이 아니라, 납탄으로.’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런 짓까진 안 해. 사람이 어느 정도를 지켜야지.
그렇기에 뒤의 타자들을 믿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믿는 놈이 바보다.
애초에 믿으니까, 배신당하는 거야.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면 배신당할 일도 없는 거지.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시원하게 조져지고 돌아온 타자들을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새끼들이 사람일까? 아니, 혹시라도 사람이 아닐 수도 있잖아?
알고 보니 금수 새끼들이 사람의 탈을 쓰고, 야구방망이 휘두르는 걸지도 모르지. 사실 저건 손이 아니라, 앞발이고, 손톱은 발굽인 거지.
정말로 그런 거라면, 짐승 치고는 야구를 잘한다고 볼 수 있다. 엄청나게 잘하는 거지.
“야이 쓰레기들아!”
“Suck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한 점 내는 게 그렇게 어려워?”
“니들이 사람이냐?”
저거 봐, 레이더스도 그러잖아? 소수에 불과하지만, 분노가 컸기 때문인지,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렸다.
“···”
“심정은 이해하겠는데, 그런 눈으로 보지 마.”
“···”
“그러지 말라고···”
“···”
“우리가 잘못했으니까···”
“···”
아무 말 없이 쳐다보기만 했을 뿐인데, 마커스 시미언은 자기 혼자 알아서 침몰했다. 다른 타자들도 마찬가지고.
그래도 양심은 있나 봐.
죄책감을 느끼는 걸 보면.
아, 그게 더 악질인가? 자기들이 잘못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그런다는 거니까.
점수는 여전히 0대0이다.
그래, 아직도 0대0이지. 이번에도 점수를 못 냈으니까.
이해 못할 건 아니다.
필리스는 오늘, 불펜 자원을 다 써버릴 기세로 투수를 갈아치우고 있으니. 타자들이 적응할 틈이 없을 수밖에.
저쪽 투수들도 열심히 공을 던지고 있잖아? 그건 인정해줘야지.
근데, X발 아무리 그래도 한 점도 못 낸 건 좀 심한 거 아니냐? 심지어 내가 그거도 하고 있는데?
“하아···”
괜히 한숨을 내뱉으니, 여기저기서 움찔거리는 게 아주 보기 좋았다. 군기가 제대로 들었네. 마음에 들어.
‘뭐, 사실 그렇게 화나지는 않았지만.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내가 맨날 타자들을 채찍질하긴 하지만, 정말로 득점 지원이 형편없는 건 아니거든.
오늘처럼 한 경기 정도 죽을 쑤는 날이 종종 있긴 하지만, 그거야 다른 팀들도 마찬가지고, 대부분은 점수 적절하게 잘 내주니까.
‘어차피 이 문제는 내 손을 떠났고, 우리 타자들을 신경 쓰기보다는, 지금 내 페이스를 유지하는 게 최우선이지.’
일단 예상처럼 체력은 여전히 쌩쌩했다. 끝까지 달릴 수 있을 정도로.
3회부터 달렸으니, 보통은 이쯤 되면 방전돼야 정상인데, 휴식의 힘이 크긴 커.
‘명분도 있겠다, 잘~ 유지만 하면, 끝까지 던지는 건 가능하겠네.’
퍼펙트 중인데 설마 끌어내리기야 하겠어? 혹시나 싶어, 흘끔 스콧 에머슨을 보니.
그는 내가 타자들을 쪼아대던 것처럼, 타격코치를 쪼고 있을 뿐,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계속 던지게 하겠다는 암묵적인 허락이라고 볼 수 있지. 아마도 그럴걸?
“가자.”
“응···”
브루스도 타자라서 그런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넌 포수니까, 공만 잘 받아도 반은 먹고 가는 거야. 풀 죽지 마라.”
너 못하는 거야 이미 잘 알고 있는데, 뭘 그렇게 풀이 죽고 그래. 포수가 공만 잘 받으면 되는 거지.
우쭈쭈 해주니 조금이나마 활기를 되찾은 브루스는 호위무사처럼 앞장섰다.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위험해진 곳으로 올라가야 했으니까.
‘어우, 눈빛 한번 살벌하네.’
자기네들이 무엇을 당하고 있는지 깨달은 건지, 시티즌스 뱅크 파크는 한층 더 가라앉았다.
이제까지는 그나마 우리 레이더스들이 일기당천으로 싸워줘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그들 역시 말을 아끼고, 조용해졌기에, 냉기가 조금 더 날카롭게 느껴졌다.
관중석에 앉아, 욕하는 것밖에 못한다고 비웃기는 했지만, 적어도 지금 필리스 팬들은 당장이라도 그라운드로 뛰쳐나올 기세를 풍겼다.
‘내가 아니라, 필리스 타자들을 때려잡겠지만.’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 감정이 마운드가 아니라, X신 같은 꼴을 보인 자기네 타자들에게 향했다는 것 정도.
물론 나도 마냥 안전하진 않을 거다.
필리스 타자들을 먼저 잡아 족치고 나면, 그다음은 내 차례일 테니까.
그것이 좀 걱정스럽긴 했지만, 어쩔 수 있나.
“스트라이크.”
이게 내 일인 것을.
주심 역시 굉장히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훨씬 나직하게 콜했다. 괜히 자극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애들을 그렇게 쪼아대니까, 겁먹어서 스윙이 안 나오잖아.’
아마 그들 딴에는 더 잘하라고 채찍질하는 거겠지만, 사실 그건 능률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과도한 공포는 때때로 몸을 굳게 만들거든.
“스트라이크!”
바로 지금처럼.
공 두 개가 연달아 쏘아졌는데도, 타자, J.P. 크로포드는 여전히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잘못한다 싶으면, 바로 온갖 욕이 쏟아지는데, 자신감 있게 스윙할 수 있을 리가 있나.
그렇게 얼어버린 타자를 잡는 건, 너무 쉬운 일이다. 식은 죽 먹기나, 누워서 떡 먹기 같은 건 조금 식상하니까, 시원한 물 마시기 정도로 하자.
“아웃.”
시원하게 아웃.
“아아아···”
“좀 제대로 쳐라, 좀!”
아웃 카운트가 하나씩 올라갈 때마다 필리스 팬들의 반응을 보는 것도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었다.
거, 아웃 하나 가지고 너무 유난을 떠시네. 그렇게 부담을 줄수록 더 못한다는 걸 알아야지.
물론 나도 가끔 타자들에게 부담을 주기는 하는데, 그건 뭐랄까, 좋은 의미에서 우러러 나온 애정이 담긴, 음··· 아무튼 그런 거니까, 좀 다르지.
“스트라이크 아웃.”
8번타자 호르헤 알파로 역시 별다른 결과를 못 내며 4구째에 삼진아웃.
“대타!”
마지막 9번 투수타석에선, 또다시 대타가 나왔다. 또 투수를 갈아치우네. 저쪽은 자원이 남아도나봐. 리빌딩을 오래해서 그런가?
‘오··· 이것 참··· 애매한 시기에 만났네.’
대타로 나온 타자는 김현우.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한국분이시다. 음, 상황이 좀 그렇네. 경기 끝나고 대화도 못 나누겠어.
혹시라도 나랑 대화하는 모습이 필리스 팬들에게 걸리면, 아마 반응이 좋지는 않을 테니까.
‘9월 성적은 나쁘지 않던데. 타격감이 올라온 건가?’
오리올스에서 필리스로 트레이드 된 이후에도, 그리 성적이 좋지는 못했지만.
9월 들어서는 제법 나쁘지 않은 걸로 기억한다. 9경기 나와서, 3할 타율에 OPS 8할이니. 어느 정도는 타격감을 찾았다고 볼 수 있지.
‘메이저 성적은 별로 안 좋긴 해도, 그래도 가락이 있는 사람이니까. 확실하게 잡자.’
힘을 꾹 눌러 담아 던진 몸쪽 포심 패스트볼. 마찬가지로 타자 역시 재빠르게 스윙을 보였지만.
“아웃.”
배트가 밀린 건지, 먹힌 타구가 유격수 글러브로 쏙 들어갔다. 다시금 삼자범퇴.
‘무섭다, 무서워.’
이젠 욕설조차 나오지 않았다. 필리스가 상대팀 투수가 퍼펙트 중이라고 입을 닥칠 리는 없으니.
그저 분노가 한계선을 넘어, 목구멍마저 막아버린 거겠지.
그걸 증명하듯, 차가운 분위기 속 이글거리는 수만 쌍의 눈동자가 나한테 쏟아졌지만.
그렇게 노려본다고 해서 필리스가 나한테 발리고 있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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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네. 역시 퍼펙트를 당하- X발 입 밖으로 낼 뻔 했네.’
켈빈은 움찔거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침을 꿀꺽 삼켰다. 하마터먼 제 스스로 X신짓을 할 뻔했으니까.
그 단어를 입에 담다니. 절대로 안 될 일이지.
억지로 꾹꾹 참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다. 힘든 원정이 보람 있는 경기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으니까.
역시 옳은 선택이었다.
Go를 따라가는 건. 설사 그곳이 얼마나 멀고, 위험한 곳이더라도.
행복을 바란다면, 항상 정답이지.
“새끼들, 눈이 죽었는데?”
“Suck한테 발리는 놈들이야 다들 똑같지.”
다른 녀석들 역시 마찬가지인지, 레이더스는 주변의 다른 관중들, 절대다수의 필리스 팬들이 얼어붙은 모습을 보며 낄낄 웃었다.
그 말처럼 그 유명한 필리스 놈들은 완전히 죽은 시체 같았다. 시체치고는 좀 과하게 얼굴이 붉기는 한데. 어쨌든 싸늘하게 식었지.
“용케 욕을 참는데? 대단하네~”
“원래 풋볼에서도 90야드 터치다운 같은 거 당하면 욕도 안 나오잖아?”
“그 이상이지, 지금은.”
그럴 수밖에. 그걸 당하고 있지 않은가? 그거. 켈빈과 그의 형제들이 아무리 야구에 해박하지 못해도.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는 잘 안다.
이미 한번 직접 보기도 했고.
샌프란시스코 놈들.
항상 오만하기 짝이 없는 그놈들이, X신 같은 표정을 짓는 게 엄청 마음에 들었지.
어쩌면 오늘 그 표정을 다시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에 대한 기대감으로 인해, 처음과 달리 지금 시티즌스 뱅크 파크는 굉장히 조용했다.
물론 똑같이 조용하더라도, 한쪽은 참을 수 없는 분노로, 한쪽은 참을 수 없는 흥분 때문이라는 것이 조금 다르긴 했지만.
“아웃!”
계속해서 이어진 경기.
7회 초, 빌어먹을 타자놈들은 오늘도 Suck의 경기를 망치고 있었다. 무능한 놈들!
Suck 퍼- ‘그거’를 하고 있는데, X발 7회까지 1점도 못 내다니.
“만약 9회까지도 못 내면···”
“그땐 진짜 죽여버릴 거야.”
“Suck이 그거를 하고도 타자들이 점수를 못 내서 망친다면··· 내 총을 어디에다가 뒀더라.”
조용한 것과 더불어, 레이더스와 필리스는 이것 역시 똑같았다. 오늘 타자들을 증오하고 있다는 것.
레이더스가 증오감을 느꼈으니, 이제 다시 필리스가 느낄 차례가 됐다. 그들이 다시금 행복해질 시간이기도 했고.
“삼진도 좀 잡아줬으면 좋겠는데···”
“너무 부담주는 것도 안 좋아. 하나만 노려야지.”
“그래, 오늘은 그거로 만족하자. 삼진이야, 다음에 다른 X신들 조지면 되니까.”
Suck은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무능한 타자 새끼들과는 종자가 다르지.
“스트라이크 아웃!”
“우리 얘길 들은 거야!”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독심술을 사용하니까, 타자들이 X되지!”
“그는··· 신이야!”
그들의 대화를 들은 건지, 첫 타자부터 삼진을 잡아준 Suck. 평소라면 You Suck을 외쳤겠지만, 지금은 그저 은은하게 감탄했다.
나 따위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Suck의 집중력을 망치는 건 그야말로 최악의 죄악이었으니까.
‘You Suck!’
켈빈 역시 마음속으로 깊이 소리를 내지를 뿐, 최대한 엄숙하게 경기를 지켜봤지만.
“아웃!”
“Fuuuuuuuuck!”
“X발 뭐하냐고 대체!”
이 야만스러운 필라델피아 놈들은 교양이라곤 없는 것 같았다.
“이 멍청한 새끼들이!”
“안 닥쳐! 뒤지고 싶어!”
“우리도 꾹 참고 있는데!”
그거 중인데 이렇게 시끄럽게 굴다니! 정말이지 무식한 놈들이다. 이러니 레이더스와 달리(?) 다른 팀 팬들에게 욕을 먹는 것이겠지!
“저런 놈들이랑 우리를 같이 묶다니. 어이가 없네.”
“야만스러운 새끼들. 불문율도 모르나?”
“풋볼보다 온 우리보다 더 야구를 모르네!”
그들에게 당했던 다른 팀 팬들이 듣는다면, 코웃음을 쳤겠지만, 켈빈을 비롯한 레이더스는 진심이었다.
언제나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생각하는 법이니까.
“후우, 우리가 참아야지.”
“내버려둬, 평생 X신처럼 살라고 해.”
X같기는 해도, Suck이 아직 던지고 있으니, 소란을 피울 수는 없었기에 꾹꾹 감정을 눌러담은 그들이었지만.
“어?”
“X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알!”
“야이 X새끼야아아아아악!”
“너- 너이 X같은 새끼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곧 그들 역시 소리를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7회 말 투아웃. 3번타자 닉 윌리엄스는 여전히 빠른 인터벌로 던진 공을 받아쳤다.
빗맞은 타구였다.
제대로 컨택을 했다고 보긴 어려웠지. 타구는 비실비실 힘이 없었고, 속도도 느렸으니까. 다만 코스가 애매했을 뿐.
타구가 날아갈 때만 하더라도 설마설마했다. 잡아주겠지, 저건 잡아야지.
타석에서 X도 못하고 있으면 저런 거라도 잡아야지!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까.
유격수와 2루수, 중견수가 같은 위치를 향해 달렸고, 그들의 염원이 닿은 건지, 유격수 마커스 시미언은 필사적으로 몸을 던졌지만.
“Heeeeeeeeell Yeeeeeeah!”
“퍼펙트는 무슨 퍼펙트!”
“X발 X까고 있네! 어디서 그딴 개짓거리를 하려고! 어림도 없다, 이 X발놈아!”
공은 버뮤다 삼각지대로 떨어졌고. 아무도 잡지 못했다.
조용하고 싸늘했던 분위기는 다시금 산산조각났다. 필리스도, 레이더스도, 똑같이 괴성을 질렀으니까.
이번엔 레이더스가 분노로, 필리스가 환희로 찼다는 것이 조금 달랐지만.
“선취점까지 가자!”
“이제부터 시작이지!”
“X같이 털렸어도 어차피 0대0, 경기는 우리가 이긴다!”
이 빌어처먹을 양심도 없는 새끼들은, 대기록을 깨버린 주제에, 그 이상을 바라는 건지.
득점까지 소리쳤고, 오늘 경기 처음으로 필리스가 시티즌스 뱅크 파크의 기세를 잡았지만.
“내가- 내가 저 새끼 죽여버릴-”
“이런 개 X같은 호로잡놈의 색-”
“고든! 고든 그거 내놔! 그거 내놓으라고! 그라운드 내려가서 저 새끼 대가리 깨야 하니까, 빨리 내놔!”
더욱더 눈알이 뒤집힌 레이더스에, 놀랍게도 필리스 홈팬들이 조금 눈치를 보기도 했다. 퍼펙트가 깨진 지금 이 순간, 그들은, 그들은 정말로 위험해 보였으니까.
“아웃!”
다행히, 필리스가 바라던 것처럼 실점까지 이어지진 않았지만, 막힌 혈이 뚫린 것처럼, 경기장은 다시금 흥분으로 뒤덮였다.
이닝을 끝마치고 내려가는 투수, 고유석 역시 눈동자가 이글이글 불타올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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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떨어진 건가?’
덕아웃으로 돌아온 뒤, 잠깐 내 자신에게 물었다.
유석아, 너 혹시 체력이 떨어졌니? 힘들어?
아니, 그건 아니다.
아직 멀쩡하다, 쌩쌩하고.
9회까지도 거뜬하지.
‘방심한 건가?’
그것도 아니다.
X발 퍼펙트 중인데 방심하는 미친새끼가 어딨어? 똥꼬에 힘 빡 주고 젖먹던 힘으로 공 던지는 거지.
‘그럼 운이 나빴던 거네.’
결국은 이거지.
야구가 좋으면서도 X같은 게 이거다. 가끔 운이 엄청나게 큰 역할을 할 때가 있거든.
지금처럼 퍼펙트를 날려먹을 정도로.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미안하다, 정말- 정말로 미안해.”
마커스 시미언은 죄인처럼 머리를 박았다. 사실 얘 잘못은 아닌데 말이야.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애초에 잡기 힘든 타구인데, 따라간 게 대단한 거지. 그러지 마.”
내 위로에도 자책감을 떨치지 못한 건지, 마커스 시미언은 머리를 쥐어뜯었고.
사실 마커스 시미언뿐만이 아니라, 다른 타자들 모두 다 그랬다.
퍼펙트가 이어지고, 깨질 때까지, 죄다 X같이 막혔잖아? 나랑 눈도 못 마주치네.
“자자, 다들 정신 차려! 아직 경기 안 끝났어!”
“퍼펙트까지 조져놓고, 승리도 안 챙겨줄 거냐? 공격 준비 안 해!”
“Suck한테 미안하면, 지금이라도 점수 내! 오늘 Suck은 완봉한다!”
그런 타자들의 모습에, 코치들은 힘껏 소리치며, 그들을 일깨웠다.
어차피 망했는데, 괜히 축 늘어져봤자 좋을 것도 없으니까.
그나저나, 완봉? 이건 좀 좋네.
퍼펙트 깨진 순간 솔직히 좀 걱정했다. 내려갈 줄 알았거든. 퍼펙트도 깨졌으니까.
그래도 심란한 내 마음을 헤아려준 건지, 스콧 에머슨은 시원스럽게 완봉을 보장해줬다. 항상 이렇게 집중하면 얼마나 좋아.
‘뭐, 완봉도 일단 점수를 내야 하겠지만···’
그거야 이제는 나도 힘을 낼 거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8회 초. 조금은 격앙된 분위기 속에서 공수교대가 이어졌다.
“···어떻게든 해볼 게.”
“최소한 승리는 가져와야지.”
“이미 늦긴 했지만, 꼭 점수 낼게.”
7번부터 시작되는 타석.
선두타자로 나갈 준비를 마친 브루스를 비롯해 타자들은 굉장히 비장한 얼굴로 그렇게 한 마디씩 뱉었다. 진작 이랬으면 오죽 좋아.
“나이스!”
“그래, 브루스! 배터리가 최고네!”
그래도 진심이기는 했던 건지, 딱딱한 얼굴로 타석에 오른 브루스는 꽤나 깔끔한 안타를 기록했다.
“뭐하는 거야!”
“X발 수비 제대로 안 해!”
“뛰어서 잡으라고!”
“브루스 X나게 잘했다!”
“완봉가자, 완봉!”
중견수의 머리를 넘기며, 장타를 날리며 2루에서 세이프.
무사 주자 2루의 찬스에 적막이 깨졌던 경기장은 다시금 시끄러워졌고.
“X발 이제 와서 실점하면 죽여버릴 줄 알아!”
“퍼펙트 깼다고 봐줄 것 같아! 경기 지면 뒤지는 거야!”
특히 필리스 홈팬들은 퍼펙트를 깨트리면서 생긴 희망을 놓기 싫었던 건지, 더욱더 흥분해서 소리쳤다. 방금 전까지 경기는 자기들이 이길 거라고 소리쳤는데, 선취점을 내주기는 싫겠지.
“아웃!”
“세이프!”
뒤이어 타석에 오른 맷 채프먼은 우익수에게 잡히는 외야뜬공을 기록했고, 아쉬운 한숨을 내쉬었지만. 2루의 브루스가 한 루를 더 진루하면서, 1사 주자 3루. 그 결정적인 찬스를 맞이한 건.
“Go···”
나였다.
타석에 오르기 전, 덕아웃 밖까지 나온 스콧 에머슨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상식적으로는 아무리 투수 타석이라도 해도, 지금 같은 찬스라면 번트를 댈 만한 상황이니까.
그런데 괜히 그러다가 내가 다칠지도 모르니, 머리가 복잡할 수밖에.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갔다 올게요. 걱정말고 계세요. 저번에도 말했지만, 엄마가 진짜 좀 튼튼하게 낳아주셨거든요.”
어차피 그가 뭐라고 하던지, 난 이미 결정을 내렸거든.
오늘은 타순 계산도 정확하게 했다. 저번처럼 실수하지 않기 위해, 꼼꼼하게 검토도 했고. 완봉이라고 소리쳤는데, 또 중간에 헤드샷 무서워서 내려가면 안 되잖아?
우리 타자들이 갑자기 X나게 잘쳐서, 타순이 쭉 이어지지 않는 한, 다다음 타석은 안 돌아올 테니, 더 거리낄 것도 없지.
‘신사협정 끝이다 X새끼들아. 퍼펙트도 깨졌겠다, 나도 내 X대로 할 거야.’
배터박스에 오르며, 흘끔 3루쪽을 보니, 브루스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굉장히 비장한 표정으로.
“속이 좀 쓰리겠어?”
반면 필리스 포수는 킬킬거리며 반겨줬고. 놀리려고 하는 건지 포수 마스크 안의 눈썹까지 씰룩거리네.
“좀 괜찮냐? 퍼펙트가 눈앞에서 날아가다니··· 나 같으면 마운드에 불 질렀을 거 같은데. 심지어 타자들이 점수도 못 내고 있으면.”
아주 신이 났어?
속도 엄청 후련해 보이고.
하긴, 정말로 퍼펙트라도 당했다면, 지금 분위기를 보아, 타자들 죄다 사형대에 올랐을 텐데. 그걸 면했으니···
공포해서 해방됐으니, 괜히 깐죽거리는 거 충분히 이해하는데. 그러니까 너도 이해해라.
“이번에도 얌전~히 삼진이나 당하고 돌아가.”
그렇게 말하며, 포수는 투수의 공을 유도했다. 이제까지 내가 얌전히 있어서 그런지, 크게 걱정하지 않는 것 같네.
“번트 대려면 대보던가? 할 수 있다면. 차라리 하나 굴려봐. 더블 플레이라 더 쉽겠네.”
그리고 아메리칸 리그 투수가 번트를 해봤자, 얼마나 잘하겠어?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의식하기는 했던 건지, 내야수들이 번트를 대비해, 수비 포지션을 취하고 있었다.
투수도 마치 해볼 테면 해보라는 것처럼 도발적인 눈빛으로 나를 쏘아봤고.
‘여유로운 척하면서 준비는 제대로 했네. 좀 까다롭긴 하지만···’
보통은 이렇게 되면 조금 힘들다. 작정하고 대비하고 있으면, 번트 성공하기 엄청 까다롭거든. 그러니까 요새는 번트를 잘 안 하는 거고.
하지만 괜찮다.
‘이 정도야 거뜬하지.’
오늘 난 슈퍼소닉이 아니라, 번트 장인이니까.
투수는 공을 던졌고, 포수는 그걸 받으려고 했겠지만, 공은 글러브로 들어가지 않았다.
배트를 잘 세운 뒤, 그걸 가볍게 결대로 툭 밀었으니까.
야구부 시절 친구들도, 심지어 감독님도 감탄했었지. 원하는 윈치로 정확하게 공을 굴린다고. 골프 안 하고 왜 야구 하냐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고.
메츠전 이후로도 종종 타격 연습을 했던 것 덕분에 감이 살아있던 건지. 공은 이번에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정확하게 굴러갔다.
‘속도 좋고, 위치 좋고. 상대 수비 반응도 좋고, 다 좋네.’
“어?”
1루 방향으로 굴러가다, 절묘하게 멈춘 공. 그에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포수가 낸 거겠지.
‘너만 좋으면 된다. 브루스.’
그런 포수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배트를 대충 던지고, 열심히 1루로 달리면서도. 두 눈은 오직 3루의 브루스에게 향했다.
내가 1루로 나가는 것보다, 쟤가 홈에 들어오는 게 더 중요하잖아?
열심히 눈빛을 보낸 보람이 있는 건지, 브루스는 공이 구르는 즉시 반응하며, 재빠르게 스타트를 끊었고.
“어- 어어어-”
“빨리- 빨리 처리해!”
반대로 필리스 수비는 조금 움찔거리며 시간을 허비했다. 절묘한 코스에 당황이라도 한 것처럼.
내가 번트 도사라니까? 이 좋은 걸 왜 못하게 하나 몰라. 이거 봐? 얼마나 잘해?
“3루 뛴다!”
“홈? 1루? 홈! 홈!”
“빨리! 던져!”
그라운드는 요동쳤다.
애매한 코스에 투수는 직접 번트 타구 잡으러 달려오고, 1루수는 어버버 거리고, 3루수는 고래고래 소리치고. 포수는 빨리 송구하라며 아우성이고.
아주 시장통이 따로 없어.
저마다 자기 말만 하는 터라, 제대로 정보전달조차 되지 않았고. 그 모든 난장판의 끝은.
“세이프!”
“세이프!”
필리스의 멸망이었다.
3루 주자 브루스 맥스웰 홈인, 나도 1루에서 세이프. 그들로선 최악의 결과가 나왔으니까.
아까 전까지만 해도 깝죽거리던 포수는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1루수 역시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깔끔하게 1루 베이스를 밟은 나를 헛웃음을 흘리며 쳐다봤고.
“이런 개 X부랄-”
“야이 개 같은 색-”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경기장을 가득 채웠던 수많은 필리스의 팬들은 비명을 지르거나, 욕설을 토해냈고.
“X발 발목을 부러뜨릴 거야! 이 개 같은 새끼!”
“총 맞아 뒤질 새끼 같으니! 너 같은 Chink 새끼는 십자가에 못 박아야-”
“너랑 니 가족, 니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병 걸려서 뒈져라!”
나를 향해 저주를 퍼붓기도 했지만, 괜찮다.
저건 욕설이라기보단, 죽어가는 필리스의 단말마 혹은 신음에 가까웠으니까.
그 정도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이 X같은 새끼···”
뒤늦게 정신 차린 1루수도 으르렁거리며 사납게 노려봤지만, 오늘 나한테 개같이 털린 놈들의 분노 따윈 우습지도 않다.
그보다는 꾹꾹 응어리를 눌러 담아, 그걸 원동력으로 확실하게 결과를 내는 게 더 무섭지.
“아직 너네 공격 남았으니, 꼬우면 너도 쳐. 난 계속 마운드에 오를 거니까.”
“X같은 새끼.”
“You Too.”
물론, 할 수 있다면 말이야.
8회 초, 번트 성공.
오늘 경기 선취점이 올라갔다. 남은 건 온전한 정신으로 마지막까지 필리스를 조지는 것 뿐. 오래도 걸렸네.
‘이제 끝낼 때가 됐지.’
사실 퍼펙트를 내줬으니, 겨우 번트 하나랑 타점 하나로는 분이 안 풀리는데···
“1사 주자 1루인데, 저 도루라도 한번?”
“Go, 부탁이니까, 제발 그러지 마. 난 잘리기 싫어. 난 투수한테 도루시키는 미친놈이 되기 싫다고.”
“아쉽네요. 잘할 자신 있는데.”
“미친 새끼···”
공이나 잘 던져야겠네. 아쉽구만. 멋지게 2루를 훔칠 자신 있는데. 이걸 허락 안 해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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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는 깨졌지만. 곧 현실이 닥쳐왔다.
“X발···”
“X같네, 퍼펙트 깨면 뭐해···”
다행히 퍼펙트는 깨졌다. 정말 다행이지. 하지만 투수는 아직 멀쩡했고, 오히려 경기 초반보다 더 힘이 남아도는 것 같으며. 당연히 마운드에 올랐다.
그리고 빌어먹을 공을 힘을 가득 담아 던지면서, 또다시 이닝을 삭제시켰지.
“스트라이크 아웃!”
8회 말 역시 삼자범퇴.
퍼펙트가 깨졌으니, 이제 완봉을 망칠 차례라며 소리쳤던 이들은 더는 목청을 높이지 않았다.
머리를 쥐어뜯거나, 술기운과 울분으로 벌겋게 물든 눈알을 부라리거나 했을 뿐.
“아웃!”
“아웃!”
“아웃!”
9회 초, 애슬레틱스는 얌전히 삼진만 당했다. 어떤 식으로든지, 절대로 9번까지 이어지게는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X발··· X발···”
대가리라도 맞춰야 하는데···
그렇게라도 해서, 투수 주제에 타점을 올린다는 X같은 짓을 한 놈을 징벌해야 하는데, 애석하게도 필리스에게 그런 기회는 돌아오지 않았다.
정 반대로, 그들이 사형대에 올라, 마지막 징벌을 받아들이는 입장이 됐을 뿐.
“···”
9회 말, Go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사뿐한 걸음으로 마운드에 올랐다.
지치지도 않는 건가?
제법 투구수도 많은데? 거기다 중간부터는 X나게 달렸는데? 저 새낀 로봇인가?
다시금 목구멍이 턱턱 막혔다. 그저 허탈한 헛웃음이 나왔을 뿐.
“It’ Suck Time!”
“필리스가 X될 시간이다!”
“크헤헤헤! X같은 X신들! 쪽수만 많지, X도 아니네!”
“앞으로 오클랜드 방향으로 절이나 해라! 우리가 니네 주인이니까!”
그래, 이 빌어먹을 놈들도 도저히 지치지를 않았다. 처음에는 조금 눈치라도 보던 레이더스는 이젠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저 소리쳤다.
퍼펙트도 깨졌겠다, 더 거리낄 것도 없다는 듯, 더욱더 신나게 필리스를, 필라델피아를, 심지어 자유의 종까지 조롱했지.
켈빈과 그의 곁에 모인 소수의 무리는 아예 어깨동무까지 하고서 노래를 불렀고.
그것이 정말 X같고, 치욕스럽게 느껴졌지만, 오늘 필리스의 팬들은 아무런 반발도 하지 못했다.
마치, 경기에서 필리스 선수들이 그 투수, Go에게 그랬던 것처럼.
“스트라이크 아웃!”
이어진 마지막 집행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즉각적으로 이뤄졌다.
“아웃!”
굉장히 빠르고, 군더더기 없으면서, 아주 깔끔했지. 그래, 오늘 경기 내내 필리스를 조지던 것처럼.
“스트라이크 아웃!”
마지막 삼진이 올라가고, 경기가 끝난 순간, 그라운드는 황급히 비워졌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는 것처럼.
“You Suck!”
“You!”
“Suuuuuuuuuck!”
오늘의 마지막 You Suck이 터져 나온 순간, 경기장을 가득 채웠던 필리스는 그들을 두렵게 쳐다보는 선수들의 예상과는 달리.
오히려 평소보다 훨씬 침착하게, 아무 말 없이 주섬주섬 경기장을 떠났다.
다만, 오늘 자신이 본 장면을 잊으려는 것처럼, 나가는 이들 모두 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지만 말이다.
“Hell Yeah!”
“이게 Suck이다!”
“x신 필리스! 진짜 X나 못하네!”
“니들 야구 때려치워! 그냥 구단 해체하고 다른 거나 해! 야구는 영~ 아닌 것 같으니까! 그래서 만패인가?”
한 줌도 안 되는 X같은 무리는 마지막까지도 만패를 운운하며, 그들을 확실하게 긁었지만, 아무 말 없이 경기장을 떠났다.
그렇기에 선수들은 더욱더 두렵게 느꼈다. 그건 마치, 정말로 큰일을 저지를지도 모르기에, 스스로 감정을 꾹 억누르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험난한 밤이 되겠네.”
한 필리스 선수는 문득 그런 말을 뱉었다. 아마, 내일 아침 동이 틀 때까지, 필라델피아의 밤은 정말 험난할 것 같다고.
퍼펙트는 면했다.
그저 두 경기 연속 영봉패를 당하고, 한 투수에게 무사사구 완봉을 당했으며, 투수에게 결승타점을 내줬을 뿐.
퍼펙트는 면했다.
퍼펙트‘만’ 면했다.
“Suck이 필리스를 좆되게 만들었다~ Suck이 필라델피아를 불질렀다~”
“Fuck Philadelphia! Fuck Phillies!”
“퍼펙트가 아니라서 아쉽네~ 이런 쓰레기들한텐 퍼펙트가 최곤데!”
순식간에 비어버린 시티즌스 뱅크 파크의 주인은, 오늘만큼은 레이더스였다.
켈빈은 위대한 승리를 자축하며, 마지막까지 소리 높여 외쳤다. 오클랜드가 필라델피아를 정복했노라고. Suck이 필리스를 X되게 했노라고.
그들을 제지하거나, 시비 거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 승자는 그들이었으니까.
항상 그랬던 것처럼, 이번 원정 역시 성공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