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이닝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스콧 에머슨은 대뜸 통보했다.
“오늘은 7회까지야. 그렇게 알고, 체력 조절 잘해.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오늘 폼이 좋아서 그런지, 조금 힘을 과하게 넣더라.”
“7회요? 왜요?”
“···Go 너는 왜 매번 예, 하고 넘어가는 적이 없어. 한 번쯤은 그냥 고개 끄덕이고 넘어가면 안 돼? 한 번은 그래 줄 수 있잖아?”
이유를 되묻자, 스콧 에머슨은 정말로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한탄했다.
아니, 그냥 물어본 거 가지고 너무 그러시네. 왜 굳이 7회인가, 어째서 6회나 8회가 아닌가, 그냥 좀 궁금할 수도 있잖아? 내가 뭐, 기어코 더 던질 거라고 떼 쓴 것도 아니고.
일단 투수코치의 마음속에서 내가 어떤 선수인지는 아주 잘 알겠어. 너무하시네.
“완봉했잖아. 저번 경기에서.”
“82구 밖에 안 던졌- 예, 7회까지로 알겠습니다. 어우, 그 정도만 던져도 감지덕지죠.”
“그래,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네.”
더 물어보려다가, 표정이 너무 심상치가 않아서, 닥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충분히 완봉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코치가 저렇게까지 바라는데, 적당히 해야지.
“코치 말 잘 들었지? 7회까지 던지고, 내려가니까, 5회부터 템포 좀 높이자. 빡세게 갈 거니까, 잘 받아.”
“왜?”
“왜는 뭘 왜야. 그냥 그런 거지. 얌전히 포구나 해.”
“그냥 평범하게 던져도 죄다 헛스윙인데, 오늘은 좀 쉬엄쉬엄··· 알았어, 닥치고 공이나 받을게.”
브루스 얘는 내가 뭔가 말하면 그냥 그런 줄 알면 되는 거지, 꼭 되묻는단 말이야.
그래도 말없이 살짝 노려봐주니,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뭔가 기시감이 드는 것 같지만, 내 착각이겠지.
“자자, 다들 주목. 나쁜 소식이다. Go가 7회 마치고 내려간다.”
옆에서 슬그머니 우리 대화를 듣던 타격코치는 공격에 나가기 전, 타자들을 불러 모았다. 뭐 좋은 소식이라고 그걸 동네방네 떠들고 그러셔.
“어, 왜요? 지금 완봉 페이스 아닌가? 그렇게 빨리 내려요?”
“안타 하나만 안 맞았어도 퍼펙트도 가능할 것 같은데, 굳이?”
“에이, 쟤 푹 쉬어서 엄청 팔팔한데, 좀 더 던지게 해요. 이길 경기는 확실하게 이겨야 좋잖습니까.”
그러자 타자들은 아쉬운 눈빛으로 나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잘하고 있어, 나, 대신 조금 더 투덜거려 봐. 감독님이나, 투수코치가 흔들리도록.
내심 타자들을 응원했지만, 스콧 에머슨의 날선 눈빛이 꽂히자, 다들 입을 닫았다. 이런 배짱도 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오늘 페이스가 좋긴 하지만, 연달아서 완봉하는 건 조금 그렇잖아? 그런데 1점은 조금 애매하다는 거 알지? 물론 우리 불펜 투수들은 굉장히 믿음직한 전우들이지만. Go의 트리플 크라운을 돕고 싶거든. Go가 마운드에 있을 때 점수 좀 내자. 1점이 뭐야, 1점이. 상대투수 이번 시즌 ERA가 4야. 최소 4점은 내야 맞는 거라고.”
갑자기 왜 뜬금없는 말인가 했더니, 날 팔아서 타자들 의욕을 좀 불어넣으려고 했던 거구만.
“미안하지도 않냐? 이길 경기만 확실하게 굳혔어도, 시즌 30승도 가능했을 텐데. 확실하게 이길 때까지 Go가 던지는 게 아니라, 7이닝만 던져도 이기게끔 해야지. 그게 너희들 역할 아니야?”
맞는 말이네. 지금 내 성적이 21승도 아깝다. 27경기 전승을 했어야 맞는 수준이지. 이런 시부랄거.
그렇게 말한 타격코치는 한숨을 내쉬며 타자들을 쓱 훑었다. 가슴이 먹먹해질 만큼 아주 멋진 명연설이었습니다, 선생님. 어우, 눈물이 다 나네.
“아니, 뭐··· 우리가 열심히 안 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좀, 그렇긴 하지.”
“21승도 많긴 하지만, 뭔가, 샌디 코팩스랑 같이 뛰는 타자가 된 기분이긴 해.”
“Suck, 너- 너 그렇게 보지 마···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당장 점수 내고 올 테니까.”
내 감정과 타격코치의 말이 먹힌 건지, 5회 초, 타자들은 의지를 불태우며, 다시금 2점이 추가됐다.
상대 선발투수인 마이크 리크도 제법 잘 막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뚫어내긴 했네.
“3점이면 충분하지?”
“네 눈빛 보고 특별히 점수 내준 거니까, 넌 계속 상대 타자들 조지기만 해.”
공격 시작할 때만하더라도 내 눈도 못 마주치던 타자들이 기세등등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보면 빅 이닝이라도 만든 줄 알겠어. 2점, 지금까지 총 3점 내놓고 자신감이 엄청나구만.
뭐, 그래도 충분하긴 하지. 다른 날이라면 모를까, 오늘은 특히나 더욱더 충분해.
“너도 수고했다. 득점씩이나 해주시고. 이제 공만 잘 받으면 되겠네.”
두툼한 몸으로 열심히 뛰어, 득점을 올린 브루스는 내 말에 포수 장비를 착용하며 긴 한숨을 뱉었다.
“이 덩치로 열심히 뛰느라 엄청 힘들었는데, 좀 살살하면 안 돼?”
“3점쯤 더 내면, 그때부터는 살살 할 게.”
“그럼 그냥 계속 빡세게 가겠다는 뜻이잖아···”
그래, 그런 뜻이지. 3점이나 더 낼 리가 없으니까. 포수답게 제법 명석하군. 눈치가 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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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회 말.
다시 마운드에 오르니, 이젠 체념한 눈빛이 이어졌다.
그럴 수밖에.
이번 시즌 내가 한 경기에서 가장 많이 실점한 게 2점이다. 그런데 지금은 3점차니.
이전의 경기들을 돌아봤을 때, 내가 마운드에 있는 동안 이 격차가 따라잡히거나, 역전될 일은 없다는 뜻이지.
“파울!”
“스트라이크!”
“볼.”
그런데도 선수단의 의지는 아직 꺾이지 않은 건지, 5번타자 카일 시거는 꿋꿋하고 차분하게 자기 스윙을 유지했다.
비록 헛스윙 한번과 파울 하나를 기록하긴 했지만, 어느 정도 가깝게 배트를 붙이기도 했지.
지난 타석 역시 삼진을 당하는 와중에도 저렇게 침착했었는데, 오히려 타이밍 자체는 조금 잡아가는 모양이네.
‘그럼 망쳐야지.’
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지금부터 타이밍은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할 테니까. 아예 조져버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고.
몸을 부드럽게 비틀면서, 최대한 등 뒤로 왼팔을 숨겼다.
야구부 감독님이 가르쳐주신 거지. 투수는 어떻게든 자신의 공을 숨겨야 한다고. 참 좋은 분이셔.
최근 연락이 왔었다. 원래는 잘릴 예정이었는데, 제자 유명세 덕분에 계속 맡게 됐다고.
아마 모르긴 몰라도 프로쪽에서도 어느 정도 러브콜이 올지도. 솔직히 내가 좀 과하게 잘하고 있잖아? 그런 선수를 길러낸 명코치이자, 명감독이고.
“스트라이크~ 아웃!”
그 가르침대로 최대한 숨긴 공, 점점 빨라지는 템포에 카일 시거는 조금 빠르게 스윙을 가져갔지만.
느릿하게 날아간 서클 체인지업에 배트는 H2O만 갈랐다. 아, 이건 물이고, O2가 공기였던가? 아무튼 허공을 갈랐다. 스트라이크 아웃.
“아, 제발 좀 삼진 좀 그만 당해라 제발!”
“이기는 건 바라지도 않으니까, 삼진이라도 덜 당해줘!”
“카일! 니 동생처럼 좀 해봐! 어떻게 형이란 놈이, 동생보다 못해!”
관중들은 절규했다.
벌써 열 번째 삼진이니까.
오늘 경기장에 와서 본 거라고는 내가 자기네 타자들 삼진 잡는 것밖에 없으니. 속이 뒤틀려도 한참은 뒤틀리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좀 너무하시네. 형제끼리 비교한다니. 카일 시거 정도면 그래도 나름 좋은 선수인데.’
끝까지 침착하게 나섰던 카일 시거로서는 좀 억울하겠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관중들이 언급한 그의 형보다 나은 동생은 코리 시거다. 작년 NL 신인왕인 다저스 유격수 말이야.
작년에 이어, 올해도 엄청나게 잘하고 있는 걸로 아는데. 그걸 꼬집다니, 좀 너무한데?
그만큼 매리너스 팬들이 정신적으로 몰려 있다는 거겠지. 듣기로 카일 시거도 제법 팬들에게 사랑받는 선수라니까.
“크하하핳핳 You Suck!”
“KKK! KKK! KKKK!”
“이제 뒤집으면 되지? 뒤집게 빨리 삼진 잡아!”
“이거 싹 다, 다시 뒤집는 거 가능하지? Suck 너라면 가능하잖아? 믿고 있을게!”
우리 레이더스들은 뭐, 그냥 좋다고 유썩거리고 계시네. 한결같은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원정인데 K 판넬까지 챙겨 오셨네. 열 개 쭉 세웠고. 남의 집에서 패기가 넘치는구만.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야.
지난 에인절스 전에서 나 안 나온다고 할 땐 오열을 하더니, 오늘은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다.
기다린 만큼 좋은 경기 보여줄 수 있어서, 한결 마음이 편해.
“스트라이크!”
그래서 그런가, 가속이 막 너무 잘 붙녜?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은 전부 다 정신이랑 연관되어 있다니까.
후속 타자는 6번타자, 대니 발렌시아. 그는 앞서 침착했던 카일 시거와는 다르게, 굉장히 초조한 모습을 보였다.
내가 뭐, 퍼펙트 진행 중인 것도 아니고, 뭐 저렇게까지 조급하게 구나 몰라.
“스트라이크!”
아주 터무니없는 스윙만 남발하고 있는데, 제일 쉽지, 이런 타자는. 타자가 자기중심을 잃은 순간. 투수에게 그 타자는 맞서 싸울 적이 아니라.
“스트라이크 아웃!”
하나의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이로 보인다. 사람보고 고깃덩이라니까 식인종 같아서 좀 그렇네. 먹잇감 정도로 하자.
다시 스트라이크 하나 더.
정말로 뒤집었나 보고 싶은데, 꾹 참았다. 신성한 경기 중에 한눈팔면 안 되지.
“아웃!”
어차피 이닝 끝내는 데까지 얼마 걸리지도 않을 테니까.
7번타자, 기예르모 에레디아는 4구째에 던진, 낮은 너클 커브를 퍼 올렸다. KKK로 잡고 싶었는데, 기어코 때리네.
제법 잘 맞은 건지, 좀 날아가긴 했지만, 앞으로 나와 있던 좌익수에게 딱 잡혔다.
아슬아슬했네, 조금 애매한 위치라서, 잘하면 안타가 됐겠어.
아까운 타구에 안 그래도 아쉬웠을 타자에게, 한 무리의 비난이 쏟아졌다. 뭐, 누군지는 안 봐도 뻔하지.
“아, 이 눈치 없는 새끼!”
“그걸 왜 쳐, X신아!”
“너 때문에 하나밖에 못 뒤집었잖아! 똑바로 안 해?”
쟤 입장에선 충분히 똑바로 잘 하고 있는데 왜들 그러세요. 진정하십쇼, 선생님들.
너무 흥분한 것 같아서, 진정하라는 의미로 손을 흔들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저 사람들, 어쩌면 나보다, 내 삼진을 더 좋아하는 게 아닐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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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이크 아웃!”
브루스 맥스웰의 간절한 바램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6회 초, 마이크 리크는 저력을 발휘하며, 다시금 애슬레틱스의 공격을 저지했으니까.
6이닝 3실점. 퀄리티 스타트를 기록, 그럭저럭 적당한 피칭을 선보이며, 트레이드 이후의 호투를 계속 이어간 그였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매리너스 팬들은 안타까웠다. 제법 잘 막았는데도, 그의 승수는커녕, 팀의 승리 역시 희박했으니까.
“그냥··· 우리도 일어나자. 이걸 뭐하러 계속 보고 있어?”
처음 시작했을 때도 그다지 관중이 많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그보다도 조금 더 관중석이 비었다.
팀에 대한 애정과 의리, 그리고 티켓 값이 아깝다는 이유로 꾹 참고 경기를 지켜보던 이들조차 속 시원하게 욕 한 사발을 뱉고서 경기장을 떠났으니까.
“혹시··· 혹시 모르잖아. 막판에 역전할지도.”
“쟤 저번 경기에 완봉했다며? 82구이긴 해도, 일단은 완투니까. 오늘도 끝까지 던지지는 않겠지.”
“애슬레틱스 불펜 실력이야 뻔하잖아? 혹시, 마지막에 몰아쳐서 이길지도···”
그럼에도 남아 있는 이들은 오기에 가까웠다. 저 투수를 두들길 수는 없겠지만. 그다음에라도 어떻게든 해주지 않을까, 하는 미련이기도 했고.
애슬레틱스의 불펜이 시원찮다는 거야, 이미 유명한 사실이다. 불펜이 적당히 평범한 수준만 됐더라도.
이미 포스트시즌을 거의 확정 지었을 거라는 말이 나올 정도니까.
그러니, 그때까지만 참자. 저 빌어먹을 놈이 무슨 짓거리를 하던 그냥 무시하고 버티자.
불펜이 올라올 때까지.
그렇게 마음을 먹은 홈관중들이었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You Suck!”
“크헤헤헤! 매리너스 이 X밥 새끼들, 니네 그냥 캐나다 가라! 설마 우리나라 야구팀이 이렇게 X밥일 리가 없잖아?”
정말 해도해도 너무했다.
저 투수도, 그 투수를 추종하는 광신도 같은 저 빌어먹을 개자식들도.
“X발 누가 보면 여기가 오클랜드인줄 알겠네···”
“대체 야구 경기 보면서 저딴 옷은 왜 입고 있는 거야?”
“Fucking Asshole같은 새끼들··· 완전 자기들 세상이네, 자기들 세상이야.”
어차피 틀려먹은 녀석이니, 달관하고, 무시하려고 해도, 경기가 이어질 때마다 속이 수천 번도 더 뒤집혔다.
그놈의 You-Suck 소리도 이젠 지긋지긋하고, 스트라이크를 알리는 주심의 목소리도 X같이 느껴졌다.
“스트라이크!”
이미 충분할 만큼 매리너스를 난도질해놓고도, 아직도 부족한 건지, 점점 더 속도를 높이는 게 제일 짜증났고.
5회 말부터 점점 더 올라가던 투수의 템포는, 6회 말에 이르러, 제대로 시동이 걸렸다.
이미 5이닝을 넘게 던졌고, 삼진만 열두 개.
“스트라이크 아웃!”
열세 개를 잡았는데도. 여전히 만족할 수가 없는 건가? 그래서 이미 너덜거리는 매리너스에게 더욱더 철저하게 확인 사살을 가할 정도로?
8번타자 마이크 주니노와 9번타자 제러드 다이슨은 눈을 몇 번 깜빡이는 사이 삼진이 잡혔다.
Go, 그 녀석이 억지로 뽑아냈지. 강제로, 세금을 징수하듯이.
“최악이네··· 경기 자체가.”
최악은 면했다고 생각했다.
로빈슨 카노가 간신히 안타 하나를 쳐줬으니까. 오늘 경기에서 매리너스가 보여준 유일하게 예쁜 행동이지.
그렇기에 퍼펙트와 노히터는 면했기에, 최악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깨달았다.
더 밑바닥을 볼 필요가 없이, 그냥 지금 이 순간 자체가 최악이라는 것을.
“파울!”
“파울!”
1번타자, 진 세구라가 끈질힌 커트로 5구까지 승부를 끌었지만, 더는 기대하거나, 희망을 품은 사람은 없었다.
“아웃!”
어차피 이럴 테니까.
6회 역시 삼자범퇴.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이젠 그들 역시 포기해버린 건지, 허탈한 미소를 흘리는 진 세구라를 보며, 남아 있던 홈관중들은 생각했다.
그래, 역시 최악이라고.
오늘 경기도, 오늘 경기에서 당한 일들도, 오늘 경기를 보러 온 상대 원정팬들도.
결정적으로 하필, 하필 오늘 뜻하지 않게 상대하게 된 저 투수, 푹 쉬고 온 Go You-Suck까지. 모두 다 최악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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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체력이 떨어질 때가 됐는데···’
보통 템포를 높이고, 인터벌을 빠르게 하기 시작하면, 체력이 훅훅 떨어진다.
기존의 투구동작을 거의 2배속은 빠르게 처리하는 거니까, 당연한 일이지.
이제 가속을 붙이기 시작한지 2이닝이 지났고, 설사 그게 아니더라도 6이닝이나 던졌으니 슬슬 힘이 빠져야 하는데.
‘생각보다 괜찮은데?’
휴식의 효과는 대단했다.
이야, 아직도 멀쩡하네.
삼진을 엄청나게 잡은 덕분에 저번 경기만큼은 아니더라도, 평소보다 투구수가 적긴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좋네.
이거, 7이닝으로 끝내기는 너무 아쉬운데, 어떻게 조금 더?
“코치, 혹시 저 조금만 더-”
“안 돼. Go. 날 선발투수를 두 번이나 연속으로 완투시킨 정신병자로 만들지 말아줘. 부탁한다,”
“옙.”
단호하군.
저렇게까지 부탁하면 어쩔 수 없지.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앞으로 등판은 제법 남았으니까.
오늘이 특별히 컨디션이 좋은 날도 아니니, 더 좋은 때가 있겠지.
“불만 없지?”
“어··· 있을 리가 있나. 그냥 네 마음대로 던져. 마음대로.”
7회 초, 공격이 끝난 뒤 브루스는 긴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한 점도 못 냈거든.
적당히 퀄리티 스타트만 하고 내려갈 줄 알았더니, 마이크 리크는 7회까지 던지며 우리 타자들을 잡았다.
‘대단하네. 실점하고 좀 흔들릴 줄 알았더니.’
그 덕분에 매리너스는 불펜이라도 아낄 수 있게 됐으니. 팀 입장에선 정말 고맙겠어.
뭐, 어쩌면 그걸 원하고, 저쪽 감독이 그렇게 지시한 걸 수도 있고.
어쨌든 무난하게 7회 초 종료. 이번 경기에서의 마지막 이닝이 다가왔다.
‘마지막 이닝인데, 아쉬운 만큼 확실하게 끝내야지.’
체력은 앞서 말했듯 아주 멀쩡하다. 힘은 남아돌고. 그러니, 부담 없이 유종의 미를 거둬야지.
그라운드로 나가니, 시선은 전보다 훨씬 덜했다. 다들 멍~하다고 해야 하나?
“Suck! 일곱 개 남았다, 일곱 개!”
“아직 세 개밖에 못 뒤집었어! 다 뒤집으려면 한참이야!”
우리 팬들만 멀쩡하네.
아니, 이 양반들도 멀쩡한 건 아니다. 평소보다 과하게 흥분한 것 같으니까.
그럴 수밖에. 삼진에 환장하는 사람들인데, 저번 경기는 완봉에다, 매덕스 하긴 했지만, 삼진이 적었던 데다가.
심지어 하루를 거르고, 그다음 날에 등판했으니, 얼마나 안달복달 났겠어?
그런데 오늘 드디어 그토록 사랑하는 삼진을 입안에 욱여넣어 줬으니, 뽕이 치사량을 넘었겠지.
‘어차피 다 뒤집지는 못하고, 반 정도는 해봐야지.’
바라는 걸 다 이뤄줄 수는 없지만, 그 절반 정도는 채워 줘야 좋은 스타라고 할 수 있겠지.
7회 말, 2-3-4로 타순이 이어지기에, 선두 타자는 2번 미치 해니거였다.
‘멘탈 좋네.’
타석에 올라온 그는 제법 눈빛이 살아 있었다. 오늘 삼진이 두 개인데, 별로 흔들린 기색은 아니네.
마지막 한 방을 노리는 건가? 배터박스에 들어온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나를 노려봤다, 집념이 대단해.
“스트라이크!”
허나 의지와 결과는 별개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집념을 불태우는 건 분명 대단하지만.
‘영웅 스윙이네.’
그것의 발로인지, 스윙이 너무 크다. 흔히 말하는 영웅 스윙. 단순히 멘탈이 좋은 게 아니었구만.
팬들 다 실망한 와중에 한 방 날려서, 확실하게 영웅이 되어보시겠다?
“스트라이크!”
어림도 없지! 어딜 내 앞에서 멋진 척을 하려고. 최소한 내가 마운드 위에 있는 동안 주인공은 나 하나면 충분하다.
내가 욕심 많은 관심종자라서, 남이 나보다 주목받는 걸 싫어하거든.
영웅 스윙의 약점은 간단하지. 눈이 돌아갔을 테니까, 그냥 멀게 변화구 하나 던지면 된다.
바깥쪽 서클 체인지업에 그는 붕 휘둘렀으나, 헛스윙에 그쳤다. 이제 투 스트라이크.
“파울!”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다시금 연이어 던진 서클 체인지업, 이번엔 떨어지는 V1이었는데.
급박한 피칭에도 그는 가까스로 3구를 맞췄지만, 오프 스피드였는데도 그리 힘이 실리지는 않았다. 맥없이 날아간 파울타구.
“스트라이크 아웃!”
그제야 정신이 든 건지, 다시 정상적인 눈동자로 돌아왔지만, 이미 늦었다.
백도어로 들어온 슬라이더에 미치 해니거는 가만히 지켜만 보면서 삼진으로 물러났다.
“You Suck!”
“14!”
레이더스의 신명 난 외침과 함께 그다음으로 들어온 타자, 3번 로빈슨 카노.
오늘 경기 유일하게 안타를 기록했던 선수의 등장에도 홈 관중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왜 안타를 쳐가지고··· 퍼펙트 유지 중이었으면, 어쩔 수 없이 더 던지게 해줬을 텐데.’
저 정도의 베테랑은 존중해야 하나, 오늘 그가 한 짓거리가 심히 흉악(?)하기에, 그딴 건 없다.
“아웃!”
순간적으로 몸쪽으로 투심을 꽂아 넣자, 초구를 노렸던 건지 그는 배트를 휘둘렀으나.
여전히 힘이 강력하게 담긴 공에 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아마 제법 많이 던졌으니, 슬슬 힘이 떨어졌을 거라고 생각했나 보네.
마운드 앞으로 굴러온 것을 가볍게 잡아 1루로 송구하는 것으로 아웃.
“에휴···”
“쯧, 그럼 그렇지···”
“로비, 그래도 넌 잘했어, 덕분에 퍼펙트는 면했으니까, 니가 그나마 최고다!”
별말 없더니, 내심 기대는 했나보네. 로빈슨 카노가 아웃당하니, 아쉬운 한숨만 흘렀다.
그래도 그는 오늘 경기의 범인이 아니었기에, 초구만에 아웃당했는데도 비교적 반응이 좋았다.
‘음, 마지막 타자로 안성맞춤이네. 딱 좋아.’
이제 투 아웃. 오늘 내가 상대할 마지막 타자가 올라왔다. 무조건 잡을 거니까, 마지막 타자지.
안녕, 로이더야.
공수교대하는 동안 약은 잘 맞고 왔니? 그래야 할 텐데. 내가 그쪽한테는···
“스트라이크!”
진짜 온 힘을 다해서 던질 예정이거든. 과감하게 집어넣은 포심에 넬슨 크루즈의 스윙이 나왔다.
홈런에 걸맞은 꽤 박력 있는 배팅. 허나 배트는 공의 한참 아래를 지나갔다.
라이징 패스트볼의 착시 효과도 아직 멀쩡한가 보네. 힘이 진짜 남아돌긴 남아도나봐.
보통은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이쯤 되면 저렇게 헛돌지는 않는데 말이야.
좋은 일이지. 마지막이 약쟁이인데, 철저하게 조질 수 있을 만큼의 힘이 남았다는 건.
“스트라이크!”
2구는 쓰리핑거 체인지업.
순간적으로 타이밍을 늦추며 던지니, 넬슨 크루즈는 공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래도 뭔가 제대로 장전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약빨로 힘은 장사다. 오늘 내가 아무리 힘이 남아돈다고 해도, 포심이든 뭐든 잘못 맞으면 골로 가겠지.
그렇기에 브루스가 공을 넘겨준 즉시 자세를 잡고 마지막 3구를 던졌다.
‘바람이 여기까지 불어오네.’
어차피 뭘 맞든 다 위험하다면. 최대한 안 맞는 방향으로 가야지. 넬슨 크루즈는 거침없이 배트를 휘둘렀다.
하이 패스트볼을 노린 듯 제법 높게 휘두른 스윙. 아마 본능적으로 느꼈겠지. 내가 자기를 싫어한다는 걸.
그러니 멋지게 하이 패스트볼 던져서 돌려 세울 거라고 예상했던 거 같은데. 실제로 그러려고 하긴 했지만···
‘그냥 툭 휘둘러도 맞추기만 하면 넘어갔을 텐데 말이야.’
그냥 쓰리핑거 한번 더 던졌다. 치려면 치던가.
“스트라이크 아웃!”
못 치면 할 수 없고.
헛스윙 삼구삼진.
넬슨 크루즈가 멋진 스윙으로 오늘 내 피칭의 끝을 장식해줬다. 정말 고맙게도 말이다.
“수고했다, 브루스, 던지는 족족 잘 받으면서 엄살이야.”
“억지로 참는 거지, 진짜 아파. 엄살이 아니라. 너도 수고 했어, Suck. 이제 편하게 관람해.”
이닝이 끝난 뒤, 브루스와 가볍게 덕담이나 주고받으며 덕아웃으로 향하니.
혹시라도 내가 딴맘이라도 먹을까, 걱정스러웠던 건지. 스콧 에머슨이 버선발로 마중을 나왔다.
“잘했어, 쉬게 한 보람이 있네. 아이싱 바로 받고, 푹 쉬어.”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날 질질 끌고 얼음통에 넣으려고 하네.
“저 그런데-”
“그런데는 무슨 그런데야. 아이싱이나 받아!”
왜 소리를 지르세요. 제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억울하다, 억울해.
“그게 아니라, 코치, 다음 시즌은 그냥 처음부터 5일 휴식하면 안 돼요? 저 그러면 진짜 ERA Zero도 가능할 거 같은데.”
“···나도 그렇게 보이네. 한번 상부에 진지하게 건의해볼 게.”
혹시라고 내가 딴말을 할까 싶어, 사납게 눈을 치켜뜨고 있던 스콧 에머슨은 이어진 내 말에 그건 본인 역시 조금 혹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