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159화 (159/316)

159화

고유석이란 이름은 현시점 메이저리그에서 하나의 자연재해처럼 받아들여졌다.

인간의 기술이 제아무리 좋다고 해도, 자연의 힘 앞에서는 무의미하듯.

<베이 브릿지 시리즈를 퍼펙트로 장식한 Go You-Suck!>

<밥 깁슨, 드와이트 구든, 페드로 마르티네즈를 넘어, 라이브볼 사상 최고의 시즌!>

내로라하는 메이저리그 팀들이 죄다 그 이름 앞에 박살 나거나, 주저앉았으니까.

“아··· 잘만 했으면, 앞으로 아예 안 만날 수도 있었는데···”

“오클랜드 자식들은 야망도 없나? 이런 시즌이면 쭉 달려야지! 무슨 5일 휴식이야, 5일 휴식은.”

그런 참담한 상황 속에서 시애틀 매리너스는 비교적 사정이 나은 편에 속했다.

같은 서부지구 팀인데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단 한 번밖에 만나지 않은 데다가.

그 한 경기 역시 6이닝 무실점 9탈삼진이니, 다른 팀들과 비교했을 때, 그럭저럭 무난하게(?) 얻어맞은 축이니까.

또한 앞으로 일정만 잘 맞는다면, 한 번 내지는 아예 안 만날 수도 있었건만···

“아주 대단한 휴머니스트 나셨어. 루키 복권 긁혔다고 잔뜩 굴릴 때는 언제고.”

본인들이 언제부터 그렇게나 유망주를 아껴주는 팀이었다고, 아주 팔자가 늘어진(?) 애슬레틱스가 뜬금없이 5일 휴식을 선언하며, 전날 등판을 거르면서 예상치 못한 승부를 벌이게 됐다.

“아, 진짜 싫다···”

미리 예매했던 티켓이 아까워 경기장을 찾은 관중들은 선발 라인업에, 선발투수에 당당히 찍힌 이름을 보며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차라리 미리 만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마음의 준비라도 했을 텐데.

전혀 예상치 못한 만남이었기에, 어쩌면 그 충격이 훨씬 더 컸고.

“Fucking···”

“쟤 뭐가 제일 약하냐? 어떻게 쳐야 돼?”

“트라웃. 트라웃에 제일 약하지, 그나마.”

“···X발 개소리 하지 말고.”

그건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스캇 서비스 감독 역시 애써 표정을 관리하면서도, Go You-Suck, 저 이름을 볼 때마다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오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전날, 갑작스러운 휴식이 발표되고, 오늘 등판이 확정되면서, 코칭 스태프들과 전력분석팀, 그리고 스카우트팀 등.

시애틀 매리너스의 거의 모든 전력이 급박한 미팅을 가졌다. 대책을 세워야 했으니까.

“쓰리핑거 체인지업이 가장···”

“슬라이더 역시 50점 정도는 줄만 하지만, 그래도 다른 주력구와 비교하면···”

“종종 의도적으로 커맨드와 컨트롤을 내려놓고 힘에 집중할 때가 있으니···”

자료는 많다. 없을 수가 없지.

애초에 메이저리그 구단 중에서 저 녀석을 분석하지 않은 팀은 없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건 직무유기나 다름없으니까.

제아무리 자연재해처럼 예견되어도 막을 수 없는 재앙이라고 할지라도. 그 피해를 최소화해야 하기에, 수없이 분석되고, 해체됐지.

물론.

“그래서, 타자들에게 어떻게 나서라고 하라는 겁니까? 어떤 방식으로, 어떤 걸 노려서.”

“·····비교적 힘이 약한 오프 스피드를 최대한 노리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는 뜻이군요.”

그런다고 해서 답이 나올 선수였다면, 애초에 지금 같은 성적을 찍지도 않았겠지만.

전반기가 끝나고, 올스타 브레이크 동안 오클랜드를 제외한 모든 메이저리그 구단이 저 선수를 해부했다.

반시즌 동안 보여준 임팩트가 워낙 대단했으니까. 그런데 정작 후반기 성적은 오히려 전반기보다 더 나았지.

그 이유에는 너클 커브라는 신무기가 장착된 것도 있지만, 그냥 애초에 답이 없다는 것도 주요했다.

‘약점이야 명확하지. 공이 느려서 타이밍을 잡기 쉽다. 대부분의 공을 존에 넣는 공격적인 피칭을 하니, 노리고 치면 된다.’

나온 답은 결국 하나였다. 그냥 잘해라. 알아서. 잘 보고, 잘 노려 치고, 잘 뛰어라.

경기에 나서기 전, 스캇 서비스 감독이 타자들에게 해준 말은 결국 그것밖에 없었다.

“저번 경기 찾아보니까, 변화구는 좀 밋밋해졌던데.”

“쟤도 사람인데, 슬슬 체력이 떨어지지 않았을까?”

“체력 떨어진 놈이 완봉을 한다고?”

“그거야 레인저스가 X신이라서 그런 거고.”

“막판에는 다시 브레이킹볼 X나게 던져서 세 타자 연속 삼진으로 끝냈잖아?”

“그야··· 그렇지.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그나마 희망이 있다면, 지난 경기에서의 모습이었다. 82구로 완봉한 경기에 대체 무슨 희망이 있겠느냐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늘 강력하고, 기괴하고, X같이 느껴지기만 했던 브레이킹볼들이 처음으로 조금 약해진 모습을 보였으니까.

대신 패스트볼이 미쳤지만.

전력분석팀이 확신에 차서 말했었지. 만약 오늘 패스트볼도 그날과 같다면.

지금 매리너스 타자들 중 그걸 외야로 날릴 수 있는 사람은 넬슨 크루즈밖에 없다고.

‘그걸 말이라고···’

그딴 소리나 지껄일 거면 사표 쓰고 꺼지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그래도, 휴식을 보장했다는 것 자체가, 슬슬 Go의 체력이 떨어졌다는 뜻이겠죠.”

“그랬으면 좋겠군요. 일단은 수비부터 잘 해봅시다. 오늘 마이크 리크는 어떻습니까?”

“일단은 컨디션이 좋다고 합니다. 트레이드 이후 줄곧 좋은 모습을 보였잖아요?”

“오늘도 그래 주면 정말 고마울 텐데···”

수석코치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고, 계속 죽상을 하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스콧 서비스 감독 억지로나마 얼굴 근육을 풀었다.

“플레이볼!”

크나큰 우려와 아주 미세한 희망 속에서 경기가 시작했다.

오늘 선발투수인 마이클 리크의 경우, 상대 투수에게 가져다 대기엔 많이 부족한 선수이긴 하나.

카디널스에서 매리너스로 트레이드된 이후, 준수한 성적을 기록 중이었다.

“아웃!”

“다행이군.”

“오클랜드는 초반에 몰아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일단 시작은 잘 넘겼네요.”

다행히 오늘도 좋은 스타트를 끊어주며, 무사히 1회 초가 마무리됐고, 그에 조금 더 희망이 커졌지만.

“으음···”

곧바로 마운드로 향하는 투수를 본 순간, 희망은 다시 콩알만큼 작아졌다.

그 얼굴은 너무나도 여유로웠다. 걸음은 당당했고.

“긴장감이라고는 하나도 없네. 개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데뷔하자마자 저런 성적 찍었는데,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겠어? 다 자기 세상이지.”

“하긴, 무슨 데드볼 시대 사람들이랑 비교당하고 있던데. 나 같아도 저러기는 하겠네.”

그 과도한 자신감이 선수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매리너스 따위는 딱히 긴장할 필요도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으니까.

“잘 나가서 그런지, 눈에 뵈는 게 없군. 가서 뒤통수 한 대 때려줘. 정신이 번쩍 들도록.”

스콧 서비스 감독은 거기에 약간의 기름을 부어줬다.

물론 감정이 과해질수록, 오히려 더 휘둘릴 거다. 사심이 섞일수록 스윙에 줏대가 사라지니까.

허나 애초에 답도 없는 적이 상대라면, 차라리 감정의 힘으로 한 방을 노리는 게 낫겠지.

그렇게 시작된 1회 말.

1번타자 진 세구라가 타석에 올랐다. 작년 203안타와 20-20를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를 찍었고.

올해도 3할의 타율을 유지하고 있는 만큼. 확실하게 전성기를 보내고 있는 선수.

‘작년 홈런은 조금 플루크가 섞이긴 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파워는 있고, 컨택 능력은 확실하니···’

그렇기에 스콧 서비스 감독은 침을 꿀꺽 삼키며, 승부에 집중했다. 그의 타석에서 이번 경기의 향방이 대략적으로 드러날 테니까.

잠깐의 기다림. 그리고 던진 초구. 투수는 많은 전문가에게 극찬받는 부드러운 투구폼으로 공을 쏘아 보냈지만.

“스트라이크!”

그것에 담긴 힘은, 그 어떤 역동적인 동작보다도 더 강렬했다.

콱 박힌 포심 패스트볼에 진 세구라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살짝 피하려는 것처럼.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심하게 여유로운 투수의 모습에 분노를 느꼈는데도 말이다.

“빌어먹을 Asshole 새끼, 쉬려면 등판도 하지 말고 그냥 쭉 쉴 것이지···”

감독의 중얼거림을 들은 주변 선수들과 코치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이 아는 감독은 이처럼 거친 말을 입에 잘 담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곧 2구가 날아갔을 때는 그 누구도 놀란 표정을 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감독과 똑같은 심정이었으니까.

“스트라이크!”

공 두 개. 고작 그 정도로도 알 수 있었으니까. 휴식의 약빨이 죽여준다는 것을.

“스트라이크 아웃!”

그들이 그나마 희망을 걸었던 변화구 역시 멀쩡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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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이크 아웃!”

첫 타자는 너클 커브로 삼구삽진을 잡았다. 곧이어 두 번째 타자는 서클 체인지업으로 잡았고.

그래, 이 맛이지. 이렇게 휙휙 꺾이고 떨어져야 하는데. 저번 경기는 진짜 갑갑했어.

‘마지막으로 로빈슨 카노. 이런 거 보면 매리너스도 제법 전력이 좋단 말이야.’

한때는 악의 제국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선수이자, 지금은 시애틀 매리너스의 핵심이 된 선수.

통산 300홈런을 목전에 두고 있는 만큼, 시대를 대표하는 2루수라고 해도 좋은 선수이니, 실력은 뭐, 말할 것도 없지.

다만 올해는 작년보단 조금 덜하다. 아깝게 1홈런을 덜 치며, 40홈런을 찍었던 작년과 다르게.

올해는 좀 들쭉날쭉한 기복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약간은 미묘하지. 원래는 기복 없이 꾸준하게 잘하는 모습을 보여줬던 선수인데 말이야.

‘나이가 야속하네, 나이가.’

그래도 여전히 준수한 타자이긴 하지만, 괜찮다. 준수한 정도 타자들을 죄다 때려잡았는데, 뭐 어려운 일이라고.

특히···

“파울!”

오늘은 더더욱 쉽고.

좌타자 몸쪽으로 향한 포심 패스트볼. 위력은 확실하지.

로빈슨 카노는 제대로 곧바로 공을 쳤지만, 크게 밀린 배트에 타구는 홈 플레이트 뒤로 날아갔다.

그래도 제대로 마음먹고 당긴 것 같은데, 저게 밀리네.

‘내 포심 회전수가 2600이었던가? 오늘은 무슨 2700도 찍겠는데?’

놀랍게도 전력투구조차 아니다. 그냥저냥 완급조절하면서 던졌는데도 이래.

역시 사람은 좀 쉬면서 해야 돼. 그래야 일의 능률이 좋아지잖아?

‘그래도 빡세게 잡자. 괜히 내보냈다가는 뒤에 약쟁이가 좀 껄끄러우니까.’

이 정도로도 충분한 것 같지만, 그래도 조금 더 출력을 높였다. 4번타자로 있는 약쟁이가 조금 그렇거든.

“스트라이크!”

2구는 슬라이더.

오늘은 잘 긁혀서 그런지, 얘도 멋지게 들어갔다. 타자는 크게 헛스윙.

이번에도 작정하고 당겼네.

큰 걸 노리고 있는 건가?

어떤 의미에선 현명하다고 볼 수 있겠다. 짜잘한 스윙은 오늘 통하지 않을 테니까.

아마도 로빈슨 카노도 앞서 동료들이 쓸려가는 걸 보고 그걸 깨닫고 이렇게 나오는 거겠지.

‘확실히 짬밥이 높은 선수라서 그런가, 금방 파악하네. 눈치가 빨라.’

비록 작년의 39홈런은 약간 플루크에 가깝다곤 하나. 그래도 파워툴은 확실한 타자다.

거기다 컨택은 뭐 말할 것도 없어서, 질 좋은 라인 드라이브를 아주 잘 만들지. 아차 하면 하나 크게 맞을지도.

오늘 공이 너무 좋아서 그런가, 약간 교만한 감정이 차오르고 있는데. 자제해야겠어. 매리너스가 만만한 팀은 아니니까.

그런 의미에서 3구는 제대로 전력을 담아서 던졌다. 하이 패스트볼.

“스트라이크 아웃!”

이번에도 크게 헛스윙.

구속은 89마일인가? 이야, 진짜 기를 쓰고 90마일이 안 넘네. 솔직히 오늘은 한번 넘어보나 싶었더니.

뭐, 스터프랑 무브먼트가 엄청나게 좋아져서, 예전처럼 구속이 절실하진 않지만. 그래도 좀 X같네. 내 인생의 90마일은 없는 건가?

이래서 사람이 간사해.

사실 지금 있는 것만 잘 지켜도 충분한데 말이야. 욕심이 끝이 없네.

“오늘 공 미쳤네. 손 터질 것 같아. 진짜로. 무슨 하루 쉰다고 이렇게···”

마운드에서 내려가니, 브루스는 아주 온갖 엄살을 부리며 호들갑 떨었다. 사실 엄살은 아니겠지.

마지막 하이 패스트볼은 진짜 좀 쎄게 박힌 것 같긴 하던데. 준비 빡세게 안 했으면 좀 다쳤을지도?

“꾹 참고 잘 받아. 아직 한참 남았으니까. 니 말처럼 우린 배터리잖아? 영혼의 파트너고. 앞으로 남은 경기가 얼만데. 겨우 한 이닝 가지고 그 난리야.”

“아···”

내 말에 브루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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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

“아웃!”

타자들은 금방 아웃당했다.

상대 투수 잘하네. 트레이드되고 나서 성적 좋다더니. 진짠가 본데?

“···미안.”

점수를 내지 못한 타자들은 죄인처럼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특히 크리스 데이비스, 우리의 공갈포 대장님께선 민망한 듯 먼 산만 보시고.

아마 내가 한소리 할 걸 예상하고 약간 쫄은 것 같은데. 뭐, 이제 겨우 2회인데.

“한 점만 내, 한 점만.”

“어떻게든 내야지, 그 정도는. 그런데··· 오늘은 진짜 그 정도면 충분한가 봐?”

“뭐··· 약간은?”

사실 다른 날이면 무능한 타자놈들, 하고 살짝 노려봤겠지만, 오늘은 뭐, 괜찮겠지.

물론 완봉할 생각까진 없다.

애초에 저~기서 혹시라도 내가 내 스스로의 강함에 취해 무리하지는 않을까, 호시탐탐 노려보고 있는 스콧 에머슨이 허락할 리가 없잖아.

솔직히 나는 하려면 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아무리 5일을 쉬었다고 해도, 두 경기 연달아 완투하게 시키는 코치는 없지. 요즘 시대에는.

‘뭐, 이미 21승이나 했으니까, 더 승리에 욕심내는 것도 조금 그렇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승리를 마다한다는 건 아니다. 승리 중요하지. 트리플 크라운 해야 하는데.

계속 언론에서 맨날 트리플 크라운 확정확정 떠들어서 그런가, 나도 좀 욕심이 나거든.

ERA랑 삼진이야 뭐, 이미 확정적이고, 남은 건 승리인데. 그것도 이미 압도적인 1위이긴 하지만. 아직 경기는 많으니까. 한 23승까지 찍어두면 안정적이겠지.

“수비나 잘해.”

“에이, 오늘은 수비할 일 없겠더만. 그냥 얌전~히 구경이나 잘··· 어우, 수비해야지, 잘해야지.”

자리 털고 일어나니, 너스레를 떠는 마커스 시미언을 살짝 노려봐주니까, 황급히 글러브를 챙겼다.

그렇게 2회 말.

선두타자로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올라왔다. 에이, 약쟁이 새끼. 괜히 눈 버렸네.

‘안녕?’

나보다 한참 선배에, 엄청난 노인네지만, 약쟁이에게 챙길 예의 따윈 없다.

내가 한국에서 배운 유교 문화에도 약쟁이랑은 상종하지 말라고 적혀 있거든.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도 그럴 걸?

넬슨 크루즈.

약빨로 날려대는 홈런이 죽여주는 양반이다. 그 이름처럼 크루즈 미사일처럼 쭉 날아가는 홈런을 잘 만들지.

배트 스피드도 빠르고, 속구 대처도 좋은데, 다만 그런 거포답게 삼진을 잘 당한다. 볼넷도 적고.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그리고 변화구에 약하지. 공을 잘 보는 스타일은 아니니까.

서클 체인지업을 연달아 던졌다. 하나는 V1, 하나는 V2.

넬슨 크루즈는 둘 다 헛스윙하며 투 스트라이크를 적립했다.

“아웃!”

그리고 마지막 3구. 몸쪽으로 낮게 나가도록 포심 패스트볼을 던졌는데, 이번에도 크게 스윙한 그는 공을 낚아챘다.

‘저게 저기까지 날아가네.’

쭉 뻗은 타구는 오늘 좌익수로 나온 크리스 데이비스가 잡았다.

제법 뒤로 물러났는데, 잘못했으면 머리 넘기고 큼직한 장타가 됐겠어.

그냥 하나 빼본 건데. 꾸역꾸역 걷어 올려서, 저기까지 날리네. 노친네 약빨 한번 오래간다, 오래가.

넬슨 크루즈의 한방이 희망을 준 건지, 내가 경기장에 왔을 때부터 쭉 시무룩해 보였던 매리너스 팬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웃을 당하긴 했지만, 제법 그럴듯한 타구를 만들었으니, 가망이 있다고 여긴 거겠지.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내 역할은 그런 가망을 잘근잘근 짓밟아주는 것이고.

뒤이어 카일 시거와 대니 발렌시아를 연이어 삼진으로 잡아버리자, 다시 시무룩한 표정을 했다.

아예 경기가 텄다는 듯 관중석을 비우는 사람들도 있었고. 티겟 값이 제법 나갈 텐데. 초반만 보고 나간다고?

‘현명한 사람들이네.’

암, 현명하고말고.

날 좋아해서, 비밀스럽게 나를 응원하던 게 아닌 이상에야, 앞으로 그들이 볼 건 계속 매리너스가 조져지는 걸 텐데.

돈 버리고 시간도 같이 버리는 것보다는, 그냥 깔끔하게 돈만 버리는 게 낫잖아?

옳은 선택이야.

####

“스트라이크 아웃!”

3회 말 역시 지워졌다.

첫 타자는 바깥쪽 보더라인에 걸친 커터에 삼진아웃. 두 번째 타자는 3구만에 포수 팝플라이로 아웃. 마지막 타자는 다시 삼진으로 물러났으니까.

“3회 역시 삼자범퇴! 마지막 타자에게 삼진을 잡으면서, Go가 아홉 명의 타자에게 일곱 개의 삼진을 잡아냅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 혹은 긴장감 속에 경기를 지켜보던 기자들은 작성하던 기사를 끝마치거나, 새로 시작했다.

일단 지금까지의 모습만 본다면, 애슬레틱스가 고유석에게 선물한 휴식은, 120%의 효율을 발휘했으니까.

이제 겨우 3이닝을 던졌는데도 삼진이 일곱 개가 나왔고, 매리너스 타자들은 넬슨 크루즈 정도를 제외하면 그럴 듯한 스윙도 못해봤다.

그러니 괜히 잘 던지는 투수의 리듬을 망쳤다거나, 애슬레틱스가 휴식을 줄 수밖에 없을 만큼 체력이 떨어진 모습을 보였다거나 하는 기사를 내보낼 수야 없지.

몇몇 이들이 황급이 수정하는 동안에도, 경기는 계속 이어졌다.

“세이프!”

4회 초. 드디어 애슬레틱스가 선취점을 내면서, 한 점을 앞서갔고, 그건 그나마 매리너스가 걸었던 희망조차 앗아갔다.

“마이크 리크 선수, 오늘 좋은 피칭을 보여줬는데, 결국 실점하네요.”

“애슬레틱스가 선취점을 가져가면서, 스코어는 1대0. 한 점차이지만··· 오늘 매리너스에겐 그 한 점이 너무나도 어렵겠네요.”

중립성을 지켜야 하는 해설자조차 짧게 혀를 찼다. 야구에서 한 점은 스윙 한 번에 만들 수 있을 만큼, 아주 값싼 점수이나.

최소한 오늘 어느 한 팀에겐 그 한 점이 천근의 무게처럼 느껴질 테니까.

“아웃!”

그것을 증명하듯 4회 말에도 쇼는 이어졌다. 그래, 쇼다.

한 유망주가, 스카우트를 불러놓고 제 자신을 뽐내는 쇼케이스를 연 것과 오늘의 경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유석이라는 선수의 역량을 그저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보여주기 바빴으니까.

“스트라이크 아웃!”

2번타자 미치 해니거는 4구째에 몸쪽으로 들어온 쓰리핑거 체인지업을 멍하니 지켜보며 루킹삼진을 내줬다.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자로서, 트레이드된 이후에도 제법 주목받은 기대주였지만,

그는 오늘 이번 시즌 시애틀 매리너스 팬들을 설레게 만들었던 질 좋은 타구를 만들지 못했다. 그저 삼진 두 개만을 기록했을 뿐.

“또다시 삼진! Go, 오늘 굉장히 몸이 가벼워 보이죠? 아주 능수능란하네요.”

“최고구속도 쉽게 찍히고 있는데, 확실히 애슬레틱스가 휴식을 보장한 보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혹사라는 말이 나올 만큼, 엄청난 이닝을 소화하는 와중에도 역사적인 성적을 기록한 선수인 만큼, 휴식의 효과가 더 컸던 것 같네요.”

매리너스에게 한없이 암울한 상황. 올해 기대보다 훨씬 못한 성적을 기록하며. 에이징커브의 징조를 보이긴 했으나.

그래도 타선에서 믿을 만한 타자인, 로빈슨 카노의 등장에도 팬들은 큰 기대를 품지는 않았다.

“로빈슨 카노, 지난 타석에서 하이 패스트볼을 헛치며, 삼진을 기록했습니다.”

“그래도 한방의 저력이 있는 타자인 만큼, 오늘 Go의 기세가 좋긴 하나, 무시할 순 없겠죠. 비록 헛스윙하긴 했습니다만 좋은 스윙을 보여줬으니까요.”

해설자들의 생각이 적중한 건지. 로빈슨 카노는 아슬아슬하게 2루수와 우익수 사이에 타구를 날리며, 안타를 기록했다.

“깔끔한 우전안타! 로빈슨 카노! 퍼펙트를 깨트립니다!”

“아, 역시 베테랑답네요. 한건 해줬어요.”

혹시나 했던 퍼펙트가 깨진 순간, 침울하게 경기를 보던 매리너스 팬들은 저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일단 최악의 사태만큼은 면하게 됐으니까.

“4번타자 넬슨 크루즈, 지난 타석에서 좋은 타구를 만들었죠?”

“네, 살짝만 비거리가 더 좋았다면, 2루타가 됐을 타구였습니다.”

또한 지난 타석, 매리너스에서 유일하게 좋은 타구를 날리며, 기대감을 심어준 넬슨 크루즈가 곧바로 등장했기에.

매리너스 팬들이 활기를 되찾으며 열띤 응원을 보냈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기대와 달리, 넬슨 크루즈는 큼직한 헛스윙을 선보이며, 삼진으로 물러났으니까.

그렇게 4회 말 역시 종료.

열세 명의 타자가 안타 하나를 고작 만드는 동안, 무려 아홉 개의 삼진이 올라간 것을 보면서,

매리너스 팬들은 절망을. 그 외의 사람들은 전율을 느꼈다. 확실하게 실감이 났으니까.

이미 리그를 씹어 먹은 괴물에게, 약간의 여유까지 선물한다면 어떻게 되는지 말이다.

더욱더 매리너스 팬들에게 절망감을 안겨준 것은, 그 괴물이 내려가려면 아직 한참은 더 남았다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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