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고유석, 82구 완봉! ‘매덕스’ 달성!>
한 투수가 완봉했을 때, 투구수가 100개 미만인 경우, 그 경기는 흔히 ‘매덕스’했다고 불린다.
야구 전문 기자인 제이슨 루크하트가 만든 용어로, 팬들 사이에서 장난처럼 쓰일 것 같지만, 의외로 MLB.com을 비롯, 여러 매체에서 서 공식적으로 사용된다.
당연하게도 본인의 이름을 본딴 기록(?)인 만큼, 그렉 매덕스는 13회의 ‘매덕스’를 기록, 최다 매덕스 기록자로 남았고 말이다.
그런 매덕스 기록자에 고유석 역시 이름을 올렸다. 그것도, 아슬아슬하게 100구미만이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 매덕스라고 할 수 있는, 고작 82구에 불과한 투구수를 기록하는 것으로.
[오늘 고유석 신 내렸다 ㅇㅈ?]
-작두 탄 것처럼 땅볼 유도하네. 진짜 뽀록 다 터졌음
└그걸 뽀록이라고 보는 니 눈깔이 레전드다ㅇㅈ?
└신 내린 게 아니라, 걍 구위로 다 때려잡은 거임, 9이닝 내내
└추민수 병살타 치고 나서 어이없다는 듯이 고유석 보는거 봄?
└ㅇㅇ 존나 황당해 보이더라. 추민수 정도 베테랑이 봐도 어이가 없을 정도로 고유석 공이 미치긴 한듯
마치 무당이라도 되는 것처럼 귀신같이 땅볼을 유도하는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운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너무 정확하게 딱딱 맞아떨어졌으니까.
허나 단순히 운이라고 여기기엔, 고유석은 이미 충분히, 차고 넘칠 만큼 스스로를 증명한 선수였다.
또한 경기를 직접 보았다면, 고유석의 패스트볼에 배트가 밀리는 걸 못 봤을 리가 없으니. 경기가 끝난 시점에서 그걸 운이라서 생각하는 이들은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브레이킹볼 마스터, 오늘은 최고의 패스트볼을 선보였다!>
그렇기에 꽤 많은 이들이 색다른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비록 평소처럼 삼진은 많지 않으나, 오히려 그렇기에 ‘파워피처’로서의 고유석이 가장 잘 드러난 경기였으니까.
[고유석 구위 좋다는 거 이해 안 됐는데]
-오늘 경기 보니까 알겠네. 언론이나 고유석빠들이 고유석 보고 스터프가 좋다느니, 무브먼트가 지린다느니 할 때마다 솔직히 좀 우스웠음
80마일 똥볼러가 뭔 패스트볼이 좋아, 그것도 메이저리그인데, 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오늘 경기 보고 왜 그렇게 말하는지 알겠더라
걍 패스트볼만 ㅈㄴ게 던져도 타자들이 알아서 쓸려나가네
└변화구가 개지려서 가려진 거지, 패스트볼도 개사기임
└포심이야 뭐, 원래도 개쩔었는데. 오늘은 투심이랑 커터도 잘 긁히더라.
└서클이나 슬러브처럼 쩌는 무브먼트는 없지만, ㅈㄴ 깔끔하긴 함
└솔직히 투심 매덕스한테 배운 거 치곤 ㅈㄴ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반성합니다.
흔히 고유석 하면 떠오르는 역동적인 서클 체인지업이나, 슬러브라고 불릴 만큼 각도가 기이한 너클 커브로 절묘하게 삼진을 잡는 대신.
오직 패스트볼의 힘만으로 텍사스 레인저스를 압도적으로 잠재웠으니까.
마치, 자신은 엄청난 변화구가 없더라도, 오직 패스트볼만으로 충분히 한 경기를 지배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고유석 아시안게임 나오면 전경기 퍼펙트 쌉가능?]
-오늘 경기 보니까, 아시아 레벨에선 죽었다 깨도 안타 못 치겠던데
└전타석 삼진도 가능
└구속이 느려서 보고 칠 수는 있겠지 문제는 그걸 외야로 못 굴린다는 거고
└혹시 모름 한국식 매운맛 수비 맛보고 고유석 멘탈 터질 수도
└고유석 운 좋은 줄 알아라 뒤에 메쟈 수비가 있으니까 완봉한 거지, 레쟈였으면 최소한 5개는 흘렸다
물론 어찌 됐든 맞춰 잡은 경기인 만큼, 평소보다 수비의 역할이 컸기에, 그에 대한 우스갯소리도 있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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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경기가 끝난 뒤, 드디어 처음으로 만남을 가졌다. 뵌 게 몇 번인데, 이렇게 인사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네.
‘매번 저쪽 홈이었던 데다가, 만날 때마다 내가 너무 심하게 털어서 좀··· 그렇긴 했지.’
텍사스는 날 굉장히 안 좋아한다. 맨날 자기들 쥐어박으니까, 꼴도 보기 싫은가 봐.
그런데 먹···하고 있는 선수랑 그런 미운 놈이랑 같이 사석에서 만나서 하하호호 하면 모양새가 조금 그렇잖아?
이번에도 완봉으로 털기는 했지만, 여긴 그래도 우리 홈이니까.
“명색이 선배가 되가지고. 동생한테 밥 얻어먹어도 되나 모르겠네. 1년차 신인 연봉이야 뻔한데.”
추민수 선배님은 조금 어색한 듯 웃음을 흘렸다. 기분이 묘하긴 하겠지.
전날 완봉한 투수랑 같이 살갑게 식사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
그래도 이번에는 우리 홈에서 만났는데, 후배 된 입장에서 대접은 해드려야지.
“그냥 신인이 아니라서, 저 돈 많습니다. 선배님보다는 훨씬 덜하겠지만.”
내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뭐, 고급진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키 먹는 것도 아니고, 근처 한인 식당에서 밥 한 끼 먹는 건데. 설마 그럴 돈도 없을까.
“하긴, 그렇게 하는데 돈이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하긴 하겠네요.”
내 말에 추민수 선배는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맞는 말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 솔직히 나 정도 하면서 돈 못 벌면 그게 이상한 거지.
다른 것도 아니고, 유명한 것만으로 백만장자가 될 수 있는 미국에서, 역대급 성적을 찍고 있는데 말이야.
그런데 존댓말을 하시네.
“말씀 편하게 하세요, 선배님. 솔직히 저랑 나이차가 얼만데···”
내가 아무리 싹수가 없는 놈이라도,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선배한테 존댓말 듣는 놈은 아니다.
한, 두 살 정도면 모를까, 나이가 나랑 얼마나 차이 나는데···.
과장 좀 보태서,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만약 늦둥이 보셨으면 나이 어린 삼촌뻘이야, 삼촌뻘. 대우를 해드려야지.
“···그래, 니 덕분에 새삼 내 나이를 느껴서, 참 고맙네. 유석이 니도 편하게 해라. 여가 한국도 아이고, 미국인데, 뭐 그렇게 예의를 차려.”
물론 추민수 선배님은 그런 대우가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오클랜드에도 한인타운있더만. 거 가서 안 먹고, 와 이 먼 곳까지···”
“여기가 훨씬 안전해요.”
“아··· 그래, 그렇겠네. 근데 진짜 그렇게 심하나?”
“요새 강도 정도는 뉴스에도 안 나와요. 총 정도는 쏴야 나오고.”
내가 오클랜드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기는 한데. 그래봤자 총알 구멍 뚫리면 죽는 건 똑같아.
혹시 알아? 어떤 미친놈 하나가 약 먹고 돌아버려서 총 빵빵 쏴댈지.
개소리 같지만, 오클랜드인 걸 감안하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거든. 최대한 몸 사려야지.
“용케 잘 사네···”
“몇 달 지내니까, 얼추 적응이 됐어요. 또 저한테는 착하게 잘 대해주니까. 구단이 부촌에 집을 구해줘서, 생각보다 안전하기도 하고.”
추민수 선배는 굉장히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괜히 주변을 둘러보기도 하셨고.
“네, 음식 나왔습니다, 이거는 어디로-”
“아, 가운데에 놔 주세요.”
오클랜드의 충격적인 현실에 잠깐 적막이 흘렀을 때, 적절하게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메뉴는 갈비찜. 원래는 식단에 맞춰서 먹는 편이지만. 솔직히 어제 완봉했는데, 가끔은 나한테 즐거움을 줘야지.
한 상이 깔리고 나니, 분위기는 다시 누그러졌다. 원래 뭔가 입에 들어가는 게 있어야 마음도 편해지는 법이니까.
“마이너 숙소에서 형수님이랑 같이 사셨다고요? 와, 저는 혼자 지내도 깝깝하던데.”
“상상도 못하지, 근데 생각보다 많지 않나? 내 때만 하더라도, 애 셋이랑 같이 사는 놈도 있었는데.”
“하이A까지는 종종 있기는 했죠. 근데 더블 A부터는 기혼자는 숙소 못 들어와서···”
대화는 잘 통했다. 미국에서 야구하면서 밥 벌어 먹고사는 한국인. 이 얼마나 희귀한 집단이야? 말이 안 통할 수가 없지.
그렇게 서서히 입이 트이기 시작하니, 어찌어찌 번호까지 교환했고, 그러다 문득 조금은 민감한 이야기가 나왔다.
남자들끼리 모여서 하는 얘기가 뭐 있겠어? 하나는 게임, 하나는 관심 있는 스포츠, 남은 하나는 뭐다?
“유석이 니 근데, 듣기로 올해 말에 얼라들 나가는 대회 안 나가기로 했다매? 나가지, 거기서 사정 봐준 것 같은데.”
군대다~
어린애들 나가는 대회. APBC(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을 뜻하는 말이다. 소문이 금방 돌았나 보네.
사실 선배 말처럼 내 사정을 봐준 거기는 하다. 대회 자체가, 한국, 대만, 일본 프로야구의 2군 혹은 어린 선수들이 출전하는 대회니까.
브라이언의 말에 의하면, 대회 흥행을 명분으로 해서, 나도 끼워 넣으려고 했다고 하더라고. 와일드카드 같은 느낌으로.
뭐, 내가 깔끔하게 거절하면서 죄다 없던 일이 됐지만. 슬슬 시기로 봐서는 예비 엔트리가 나왔겠네.
“솔직히 올해 너무 많이 던졌잖아요? 풀시즌 꽉 채울 텐데, 11월까지 또 던지면···”
“어깨 나가겠지. 그래도 안 아쉽나? 이러면 내년 아시안게임은 날아가는 건데. 유석이 니가 먼저 손 내민 거 쳐낸 거니까, 얄짤 없을 낀데?”
아시안게임으로 극적인 군면제를 받은 장본인이셔서 그런가, 추민수 선배는 굉장히 안타까운 듯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진짜 쫄리는 일이거든. 야구뿐만이 아니라, 스포츠 선수들한테 군대는.
나이가 차면 찰수록, 그리고 기회가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점점 더 목이 조여오는 심정이지.
“그래도, 아직 나이가 그렇게 많은 건 아니니까. 다음 올림픽 노려야죠. 19년에 WBC 나가고.”
그나마 다행인 건, 다음 올림픽인 도쿄 올림픽이 있다는 거였다. 진짜 천만다행이지.
아무래도 몇몇 국가들만 하는 스포츠라서, 올림픽에서 야구는 대부분 퇴출되는 분위기인데. 도쿄 올림픽이잖아? 일본.
“하기사, 다음 올림픽은 일본에서 여니까, 야구는 무조건 있긴 하겠네. 뭐, 유석이 니가 나가면, 메달이야 당연히 딸 거고.”
내 말에 추민수 선배도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나가기만 한다면 메달은 무조건 따겠지. 설마 동메달도 못 따겠어? 세상에 야구하는 나라가 몇 개나 된다고.
내가 없더라도, 금은 모를까, 적당히 집중만 해도, 동 정도는 충분히 따지. 거기에 나까지 있으면, 뭐, 더 말할 것도 없고.
“연투로 어깨를 갈아서라도 어떻게든 따야죠. 아니면 답도 없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영주권 쪽도 한번 알아봐라. 듣기로, 정만이 갸는 아예 영주권만 노린다고 하던데.”
다른 방법도 있기는 하다.
미국 영주권을 얻는 거지.
해외거주자의 경우 한국에서 일정기간 이상 머물지만 않는다면, 자동적으로 영장이 미뤄지거든.
정만이라면, 아마도 양키스 마이너 팀에 있는 최정만을 말하는 걸 텐데. 그쪽은 그냥 영주권 노리나 보네. 사실 이쪽이 훨씬 편하긴 하다.
시민권도 아니고, 영주권이면 얻기가 쉬우니까. 특히 메이저리거쯤 되면 거의 프리패스나 다름없고.
다만 나는 그쪽은 조금 내키지 않았다. 뭔가 좀 그렇잖아. 군대 가기 싫어서 다른 나라 영주권을 딴다는 게.
물론 메달로 면제받는 거나, 영주권으로 미루는 거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도찐개찐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영주권으로는 37살까지만 미룰 수 있다면서요? 전 50살까지 메이저리그에서 뛸 거라서···.”
나는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똥칠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은퇴 안 할 생각이다. 그러니 적당히 미루는 게 아니라, 아예 면제를 받아야지.
“이야~ 모이어네, 제이미 모이어. 근데 그렇게 올림픽만 노리다가, 만약에 사무국에서 차출 막으면 우짜려고? 요새는 시즌이랑 겹치는 대회는 차출 잘 안 해주는 걸로 아는데.”
혹시나 하는 걱정은 있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국제대회를 별로 출전 안 시켜주거든.
그도 그럴 게, 괜히 선수들 국제대회 나가서 부상 당하고 돌아오면, 좀 난감하잖아?
흥행에도 지장이 가고.
그게 유일한 문제인데···
“그럼 뭐, 불 질러야죠.”
뭐, 어쩌겠어.
만약에 사무국에서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메이저리그 X같다고, 쿠퍼스타운에 불 지른 다음, 커미셔너 붙잡고 같이 옥상에서 뛰어내려야지.
“유석이 너처럼만 하면, 솔직히 사무국 입장에서도 면제되면 땡큐지. 막기야 하겠어?”
“좌완 매덕스가 알아서 군면제 받고 오겠다는데, 진짜 흥행을 바라면, 고이 보내주겠죠.”
그렇게 생각하며 웃고 넘겼지만, 이때는 몰랐다. 진짜 불을 질러야 하게 될 줄은. X발.
미래를 알았다면··· 기를 쓰고서라도 아시안게임에 나갔을 거야. 어떻게든. 내 모든 걸 걸어서라도.
s...t...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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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저스와의 3연전은 우리의 깔끔한 스윕으로 끝났다.
<고유석과 추민수, 두 한국인 메이저리거의 훈훈한 친목!>
추민수 선배는 홈 돌아가면 좀 난감하시겠네. 한국 쪽은 한국인들끼리 어울리는 게 보기 좋다는 반응이지만, 미국은···
“Suck, 너 때문에 Choo가 엄청 욕먹고 있는데? 저쪽 팬들 장난 아니야. 니 경기에서 일부러 더블플레이 당한 거라고 욕이 그냥···”
음, 이래서 친목질은 웬만하면 자제를 해야 하는 건가봐.
인터넷 중독자, 제드 라우리는 뭐가 그리도 신이 난 건지, 나한테 레인저스 팬덤의 분위기를 신명나게 알려줬다.
건수 하나 잡히니까, 아주 죽일 듯이 물어뜯네. 계속 보니까 나도 좀 화나는데? 뭐가 어쩌고 저째?
“같은 나라 끼리 밀어주기는 무슨, 정정당당 내 실력으로 완봉 만들었구만! 이 새끼들, 이런 소리 못하도록 다음에도 완봉으로 조져야겠어.”
“···Choo 욕먹는 건 화 안나냐? 너 때문에 역적 취급받고 있다니까?”
“괜찮아요, 그 정도 경력쯤 되면 욕먹는 거 이골이 나셨을 테니까.”
욕 그거, 뭐 어떻다고. 유명인에겐 늘 따라붙는 건데. 그냥 참고 견디는게 일상이지.
나도 매일 같이 듣는 게 욕이다. 물론 상대팀 팬들한테. 가끔 살해협박도 받지.
어차피 욕값은 레인저스 구단에서 두둑하게 챙겨드리고 있을 테니까, 선배님도 귀나 후비면서 무시하시겠지.
“넌 참··· 볼수록 대단한 놈이야.”
제드 라우리는 묘한 감탄사를 흘리며, 더 이상 인터넷 반응을 퍼 나르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편안하게, 오늘은 딱히 포커도 땡기지 않아서, 그냥 무난히 원정길을 즐기고 있었는데.
문득 스콧 에머슨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뭔가 하려는 말이라도 있나?
“Go, 시간 괜찮아?”
“뭐, 시간이야 남아돌죠. 그런데 왜요? 혹시 등판에 무슨 문제라도···”
원래대로면 나는 30일에 등판한다. 다시 에인절스와 만나지. 우리 팬들은, 정확하게 말하면 레이더스는 아주 난리도 아니다.
트라웃이 저번에 나한테 홈런 갈기고 무실점 기록 깨버린 걸 응징하라고 말이야.
대가리에 공 던지라고 하더라. 그 양반들 날 진짜 좋아하는 건 맞나 싶다. 내가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서 경기 좀 걸렀으면 하는 걸지도.
“다른 게 아니라, 네 등판일을 조금 조정하는 게 어떻겠냐는 말이 나와서 말이야.”
등판일 조정이라.
대충 감이 잡혔다.
‘막판 스퍼트를 내려는 건가?’
보통 선발은 5인 로테이션이다. 사실 그마저도 다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어쨌든 정석은 5인이지.
선발투수에게 확실하게 5일의 휴식을 보장하고 싶은 경우, 불펜으로 벌떼야구를 해서, 임시적인 6선발 로테이션을 하기도 하고.
하지만 포스트시즌이 걸린 경우, 4인 로테이션으로 당기기도 한다.
잘 던지는 투수를 최대한 많이 당겨쓰면서, 어떻게든 승리를 챙기는 방식이지.
‘우리가 다시 2위. 와일드카드는 여전히 4위였던가?’
현재 우리는 조금 아슬아슬하다고 볼 수 있다. 일단 지구우승은 이미 물 건너갔고.
와일드카드는 양키스가 선두를 달리고 있지. 제법 게임차가 크고. 그러니 남은 건 와일드카드 2순위 한 자리뿐인데.
‘아슬아슬하긴 해도, 잘만 승리 챙기면, 불가능한 건 아니지. 이번에 스윕한 덕분에.’
남은 9월 한 달간, 잘 쓸어담기만 한다면, 얼추 노릴 만했다. 그러니 그걸 말하려는가 싶었지만···
“앞으로 무조건 5일 휴식이야. 그렇게 결정됐어.”
“예?”
정작 스콧 에머슨이 한 말은 예상과 정반대였다. 5일 휴식이라고? 무조건?
지금 같이 중요한 시기에, 1선발 에이스한테 휴식을 준다고? 왜?
“···솔직히 이제 와서 조치를 취하는 것도 너무 늦기는 했지만. 이번 시즌 Go 네가 심하게 혹사했잖아?”
“그렇긴··· 하죠.”
음, 하긴.
까놓고 말하면, 조금 심한 정도가 아니라, 이번 시즌 난 엄청나게 혹사를 당한 케이스다.
아니, 올해 데뷔한 투수가 200이닝은 훌쩍 넘길 페이스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 첫 풀타임 시즌도 아니고, 첫 데뷔시즌인데.
‘감독님도 좀 욕 먹고 있긴 하지. 지구우승 할 것도 아니면서, 역대급 유망주를 너무 굴린다고.’
아닌 말로, 다들 알겠지만, 외부에선 꾸준하게 지적했다. 내가 과하게 혹사당한다고 말이야.
더는 내 체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지만, 밥 멜빈 감독과 빌리 빈 사장은 제법 비판받고 있지.
성적만 추구하려다가, 제 2의 ‘마크 프라이어’를 만들 셈이냐고.
‘솔직히 난 아무렇지 않지만.’
난 오히려 많이 던져서 좋지만, 걱정하는 것도 이해는 된다.
혹사로 망가진 천재들이 좀 많아야지. 방금 언급한 마크 프라이어만 해도, 제2의 매덕스, 파이어볼러 매덕스 같은 별명이 붙었던 양반인데.
어깨가 갈리면서, 너무 이르게 망해버렸으니까.
‘그렇다곤 해도, 이제 와서 외부 반응에 신경 쓸 리는 없고.’
다만 그런 말이 나온다는 것고, 이번의 조치는 조금 별개의 문제다.
애초에 아껴 쓰려고 했으면 진작에 아껴 썼겠지. 신나게 사용하다가, 정작 중요한 때가 되니까 아끼겠다는 건데···
대충 예상은 가네.
구단이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
“그래, Go, 넌 머리가 좋은 녀석이라서 금방 알아차리네.”
스콧 에머슨 역시 내가 무얼 생각한 건지, 알아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랫동안 같이 부대껴서 그런가. 독심술도 하시네.
구단이 나한테 휴식을 준다는 건 간단하다. 확정적인 승리를 어느 정도는 버리겠다는 거겠지. 그 말은 곧···
‘이번 시즌은 포스트시즌을 포기하겠다는 거구만.’
9월 확장 로스터를 이용한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대신, 한 발자국 떨어지겠다는 것과 동일했다.
‘사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포스트시즌에 나간다고 해도, 조금 힘들기는 하지.’
엄밀히 말하면, 지금 우리 전력은 절대로 컨텐더급 팀이 아니다. 나 때문에 엄청 강해 보이지만. 구멍이 너무 많지.
타자들이 공갈포 성향과 몰아치는 것이 너무 심한 거나, 불펜이 좀 많이 부실한 것 말이야.
‘럭키 시즌이라고 봐야지, 올해는. 운 좋게 내가 터진 덕분에 성적이 확 오른. 럭키 시즌.’
만약 내가 빠지고, 내가 벌어준 승리가 빠진다면, 올해도 꼴찌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지금 포스트시즌에 도전하고 있는 건 순전히 내 영향력 때문인 거지. 조금 오만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지극히 객관적인 평가다.
‘그러니, 굳이 올해 마지막까지 날 굴려서 도전하기 보다는, 조금 늦게라도 날 최대한 보존해서, 내년을 노리는 게 나은 셈이지.’
그러니 프런트에서도 굳이 이번 시즌에 이런 전력으로 무리해서 달렸다가, 괜히 퍼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 구멍들을 조금이라도 확실하게 보강해서, 조금 더 확실한 전력을 갖춘 뒤에 도전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 건데.
“그럼 다음 등판도 미뤄지는 거예요?”
“일단은. 물론 네가 싫다면··· 싫어도 어쩔 수 없어. 프런트의 명령이니까.”
“이번엔 선택권도 없네요.”
“솔직히, 이미 성적은 차고 넘치잖아? MVP도 확정인데, 더 바라는 건 아니지? 그리고 그래봐야 어차피 한 경기 차이인데. 혹시 놀란 라이언의 기록을 노리는 거라면. 내가 단장을 설득해보고.”
“뭐, 그러려니 받아들여야죠.”
구단이 결정을 내렸다면, 어쩔 수가 있나. 얌전히 따르는 수밖에.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조금 심하게 달리긴 했어. 작년에 더블A에서 140이닝을 던졌는데. 올해는 이미 194이닝을 찍었으니까.
5일 휴식이 주어진다고 해도, 앞으로 한 4경기는 더 할 텐데. 220이닝은 그냥 찍겠지.
스콧 에머슨의 말처럼, 이미 나는 더 높이 올라갈 것도 없다. 죄다 이뤘는데 뭘 더 하겠어? MVP도 이미 확정이고, 사이 영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러니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지. 다만···
“타자들은 피눈물 흘리겠네요.”
내가 5일이나 쉰다는 걸 알면, 아마도 타자들이 조금 피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그렇겠지, 솔직히 너처럼 든든한 에이스가 등판하고 안 하고의 차이는 엄청 크니까. 마음이 편하-”
“아니, 우리 타자들 말고요.”
상대타자들이.
5일 쉬고 온 고유석?
어우, 내가 생각해도 아주 X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