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156화 (156/316)

156화

“저쪽 타자들 왜 이렇게 배트가 헤프지? 너무 쉽네.”

브루스는 조금 당황스러운 것 같았다. 본인이 직접 주도해서 아웃을 만든 것도 몇 개 있지만, 그렇기에 더 이상하겠지.

너무 잘 당하고 있잖아.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쉽게.

“어, 물반고기반 수준인데?”

“저쪽 뭐 잘못 먹기라도 했나? 어우, 땅볼 잡는 거 힘들어 죽겠네. 이러다 허리디스크 오는 거 아닌지 몰라.”

오늘 수비 내내 땅볼을 주웠던 마커스 시미언 역시 엄살을 부리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말이다.

“평소는 푹 쉬잖아? 오늘만 고생 좀 해라.”

“에이, 그냥 해본 말이지. 어쨌든 저쪽 타자들 완전 맛탱이가 갔네.”

마커스 시미언은 신기하다는 듯 혀를 날름거리며, 상대팀 덕아웃을 봤다. 우울함이 가득하네.

오늘 좀 잘 낚이긴 하지.

낚시도 이 정도로 잘 되면 오히려 재미가 떨어져, 낚시를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럴걸?

투수가 타자 잡는 건, 낚시랑 비슷한 면모를 가지고 있으니, 거의 비슷하겠지.

어쨌든 상대하는 입장에서 의아할 정도로, 레인저스 타자들은 너무 잘 당해줬다.

어느 정도 내가 유도한 거기는 하지만. 나도 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이렇게 할걸. 괜히 삼진 잡는다고 쓸데없이 욕봤네.’

물론 다시 브레이킹볼 감각이 돌아오면 주구장창 삼진만 잡겠지만.

“Go 네가 잘 유도한 거야.”

우리가 나란히 앉아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니, 스콧 에머슨이 다가와 말했다.

“삼진 당하면 차라리 배트를 사리게 되는데, 계속 범타만 나오니까, 오히려 문제가 된 거지.”

삼진이 아니라 범타라서 문제라··· 대충 무슨 뜻인지 알겠네.

“감각이 올라온 거네요. 안타는 아니지만, 어쨌든 공은 계속 맞혔으니까.”

“정확해, 저쪽 타자들, 지금 Go 너한테 제법 적응했을 거야. 릴리스 포인트도 익숙해졌을 거고. 타격을 하면서 타이밍도 잡았을 거고.”

쉽게 말해서, 범타를 치면서 타이밍이 잡혔으니, 굳이 공격적으로 하려고 하지 않더라도, 저도 모르게 배트가 나간다는 거다.

결과는 나빴지만, 어쨌든 손맛은 봤잖아? 그 감각이 남아 있는 거지.

“그럼 좀 위험하겠네요.”

“위험하지, 엄청. 그래도 계속할 거야? 슬슬 내려가도 되잖아? 6이닝이면 적당하지 않아?”

“오늘 리미트는 80구로 아는데요? 저 완봉 페이스인 거 아시죠?”

어딜 꼬시려고. 본인 입으로 80구라고 해놓고, 은근슬쩍 잘 던지고 있는 사람을 내리려고 하시면 안 되지.

“안 통하네··· 그래도 조심해. 저쪽도 파워는 있으니까, 계속 치다가 정타 하나 나오면, 넘어갈 수도 있어.”

“그건 뭐, 감수하는 거죠.”

본인이 뱉은 말이 있다보니, 스콧 에머슨은 아쉬운 듯 입만만 다시고 말았다.

어쨌든 덕분에 대충은 알겠네. 지금 레인저스 타자들의 상태, 그리고 내 상황을.

“위험하다니, 무슨 뜻이야? 쉽게쉽게 잘 되고 있지 않나?”

브루스는 조금 이해가 안 된다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얜 포수라는 놈이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지금 당장은 쉽지만, 그게 아슬아슬하다는 뜻이지.”

“아슬아슬해? 투구수도 넉넉하겠다, 공도 아직 위력이 멀쩡하겠다. 이대로 완봉까지 가면 되겠구만.”

“그니까, 그 공 위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순간 대참사라고.”

돌이켜보면 지금 내 피칭은 굉장히 위험하다. 전적으로 패스트볼에만 의지하고 있으니까.

그 패스트볼들이 오늘 잘 긁히는 덕분에, 땅볼을 주구장창 만들면서 잘 막고는 있는데.

만약 서서히 체력이 떨어지고, 그로 인해 패스트볼들마저 위력이 약해지기 시작하면···

‘끝이지. 지금까지 나온 범타가 죄다 안타 혹은 장타로 뒤바뀔 테니까.’

스콧 에머슨의 말처럼, 지금 타자들은 확실하게 감을 잡았다. 단지 패스트볼의 위력에 밀려서, 그것이 정타로 이어지지만 못할 뿐.

만약 본격적으로 힘이 떨이지기 시작하면, 점점 더 타구의 질이 좋아지겠지.

“지금 내 투구수, 55개 맞지?”

“정확하게 아네. 와, 너 오늘 진짜 좀 매덕스 같은데? 혹시 매덕스 기록 깨는 거 아니야? 76구 맞지? 좀 빠듯하긴 하네.”

“기록은 무슨··· 패스트볼 제대로 봐. 조금이라도 힘이 덜한 것 같으면 바로바로 말하고.”

“타자들은?”

“그것도 계속 체크해야지, 포수인데 일 좀 해라.”

“포수가 무슨 노예냐? 죄다 시키게?”

툴툴거리기는. 그럼 포수가 노예지 뭐야? 일해라 핫산.

‘76구··· 그건 좀 힘들겠지만, 최소한 완봉은 가능성이 있지. 적당히만 잘 조절하면.’

그냥저냥 적당히 던지려고 했더니. 레인저스가 자꾸 부추기네. 혹시 고도의 전략인가?

####

기대했던 삼진쇼는 여전히 일어나지 않았다. 겨우 두 개에 그쳤으니, 말 다한 거지.

허나 그보다 더 색다르고, 흥분되는 일이 펼쳐지고 있었기에, 딱히 상관은 없었다.

“스트라이크!”

“휘둘러! 땅볼 치라고!”

이건 꽤나 놀라운 풍경이다.

상대 타자가 멍청하게 넋 놓고 스트라이크를 먹었는데. 무려 ‘레이더스’가 조롱이 아닌, 분노를 터트리고 있었으니까.

평소라면 삼진을 잡으라며 난리를 쳤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매덕스가 76구라던데. X발 투구수 하나 버렸네.”

“초구치고 뒤지라고 x발!”

“아니면 지난 이닝처럼 안타 치고 더블플레이 당해!”

최소한 미국인들 중에 매덕스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가 은퇴하고 한참 지난 후에 태어난 꼬맹이가 아닌 이상에는 말이다.

아무리 작년까지만 해도 베이스볼이 아니라 풋볼에 빠져 살았던 레이더스들이라도 한번 쯤은 들어봤지.

Suck이 그런 그렉 매덕스의 기록에 도전장(?)을 내밀었다는 소식은 금방 관중석 전체로 퍼져나갔고.

그 결과, 레이더스가 삼진이 아닌, 땅볼 아웃 같은 소소한(?)것을 바라는 진풍경을 낳았다.

그렇게 유명한 그렉 매덕스의 기록이라면, 아마도 메이저리그 신기록일 테고.

야구의 모든 신기록은 Suck이 다시 써야 옳다. 대충 그런 생각이었다. 사실 진짜 신기록은 이미 날아간지 오래였지만.

“이건 야구가 아니야··· 이건 Suck이 아니라고!”

“야구는··· 야구는 삼진을 잡아야 야구지! 땅볼은 야구가 아니야!”

“닥치고 보기나 해! Suck이 기록 도전하고 있다 잖아! 그럼 이것도 야구지!”

물론 정이 떨어진 레이더스 대신, Suck의 호쾌한 삼진에 빠져, 야구를 보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야구=삼진, Suck=탈삼진이라는 공식이 장착된 몇몇 이들은 약간의 인지부조화를 느끼기도 했지만 말이다.

“세이프!”

“아아아···”

“X발 뭐하냐! X새끼야!”

“마커스! 시미언 너 이 새끼 수비 똑바로 안 해! 뒤로 뛰어가서 잡았어야지!”

“이런 시부랄 개놈의 새끼! 차라리 초구를 치던가!”

“아니, 아니야. 더블 플레이 당하려는 거야. 다음은 Choo잖아. Choo가 해주겠지.”

안타 하나가 이처럼 아쉬웠던 적이 대체 언제였을까?

사실 어떤 경기든지, Suck에게 누군가 안타를 친다면, 열이 올라, 부들거리긴 했는데. 오늘처럼 아쉬운 적은 없었다.

그래도 지난 타석에서 한 건을 제대로 해줬던(?) Choo가 올라왔기에, 그나마 분노가 덜했지만.

“스트라이크!”

“볼!”

“휘둘러! 뭐해! Suck이 치라고 공 주잖아! 빨리 휘둘러서 공 때려!”

“Choo 너까지 이럴래? 후배한테 모범을 보이라고!”

Choo마저 시간을 조금씩 끌자, 결국 분노를 이기지 못한 이들은 황급히 재촉했지만.

“스트라이크!”

“스트라잌~ 아웃!”

순간적으로 던진 서클 체인지업에 삼진으로 물러났다.

평소라면 You Suck이라고 소리치며, 삼진을 반겼을 이들은 오히려 그것을 아쉽게 여기며 한숨을 내뱉었다.

“아, 왜 삼진이야··· 땅볼 쳐주지··· 그럼 더블 플레이인데.”

“그래, Choo는 이미 지난 타석에 했으니까. 두 번 연속으로 시키는 건 좀 그렇지.”

“이게 야구지! 다들 왜 그래? 삼진이면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니야?”

“X발 기록 도전 중이라고 몇 번을 말하냐! 귓구멍 막혔어? 내가 드릴로 뚫어줘?”

투구수가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레이더스는 점점 더 예민해졌다. 사실 다른 관중들은 그 정도의 반응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레이더스 쟤들 야구 재밌게 보네. 제대로 몰입했는데?”

“그러게, 소리만 빽빽 지르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까 야구 엄청 좋아하는구만.”

“맨날 야구 보는 너드너드 거리더니, 지들이 더하네.”

주변의 평범한 차림새의 이들은, 괴상한 외형을 한 녀석들이 아주 야구에 제대로 몰입한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야구는 샌님 스포츠라며 무시하고, 풋볼만 보던 놈들이, 어쩌다 저 지경이 되어버린 걸까.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대체 Suck에게 얼마나 흠뻑 빠졌기에 저러는지는 몰라도. 일단 야구를 재밌게 즐기는 것 같기는 했으니까.

“아웃!”

“그렇지! 그렇게 해야지! 넌 좀 착하네!”

“빨리빨리 끝내자! 이닝 아직 많이 남았어, 금방 가야지!”

지금처럼 아웃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3번타자 엘비스 앤드루스가 초구만에 아웃을 당하자, 레이더스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순수하게 흠뻑 빠진 듯한 모습은 주변의 다른 이들에게도 전염되었지만.

“볼!”

“보고만 있지 말고, 공을 치라고! 공을!”

“이런 X신같은 새끼! 배트질도 제대로 못 하면서 돈을 받아 처먹어? 니가 메이저리거야? 명색이 메이저면 스윙을 해야지, 스윙을!”

“허리를 휙 돌리라고, 휙! 매끈하게 휙! 이것도 못해? 그래가지고 와이프한테 사랑이나 받겠냐!”

금방 식었다. 역시, 저 정도로 몰입하는 건 조금 아닌 것 같았으니까.

“어우, 저러다 쓰러지지. 쟤들 따라하다간 제 명에 못 살아.”

“혈압 괜찮나? 누구 하나 뒷목 잡고 쓰러질 거 같은데. 미리 앰뷸런스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게, 쟤들 겉모습이랑 다르게, 생각보다 건강한가 보네. 아직 쓰러진 사람이 없는 거 보면.”

겨우 볼 하나를 지켜봤다는 이유로, 아드리안 벨트레를 죽일 놈으로 몰아세우는 레이더스를 보며.

동화되려다가, 퍼뜩 정신이 들은 다른 홈팬들은 조금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그 엄청난 열기가 노련한 노장의 멘탈을 흔든 건지.

“아웃!”

곧이어 2구째에 홈 플레이트 위로 붕 떠오르는 뜬공을 만들며, 아드리안 벨트레가 타석에서 물러났다.

“Hell Yeeeeeeeah!”

“그렇지! 이제 좀 말귀를 알아 처먹네!”

“좀 더 빨리 아웃당하라고! 괜히 투구수 낭비하지 말고!”

“다음에는 이거보다 더 빨리 끝내! 혹시 질질 끌면, 아주 내 손에 뒤질 줄 알아!”

그러자 언제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다시 환호하는 레이더스를 보며, 평범한 팬들은 스스로 맹세했다.

야구를 좋아하고, Suck을 좋아하되, 저 정도로 빠지지는 말자고.

그렇게 이닝이 종료되면서, 이제 투구수는 64개. 남은 이닝은 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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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돌이키기엔 늦었다는 걸 모두가 알았다. 꾹 참아보려고 해도,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가는 걸 어쩌겠는가?

너무나도 완벽한 타이밍, 먹음직스러운 코스로 익숙한 공이 날아오는데.

그걸 보고 스윙을 참을 수 있는 타자가 있다면, 그는 정말로 대단한 사람일 거다.

“아 진짜··· 이놈의 손이 진짜 자기 마음대로!”

“딜리아노, 너 멀티히트 어떻게 했어? 뭐 특별히 감이 잡히는 거라도 있냐?”

오늘 레인저스 타자들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고 말이다.

일단 경기는 이미 패배가 거의 확정됐다. 오클랜드가 꾸준하게 점수를 내며, 6득점을 올렸으니까.

허나, 그런 건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이렇게 경기가 끝나버린다면···

“타자들의 타격감이 이상해질 겁니다. 애초에 기세가 별로 좋지는 않습니다만···”

“더 바닥으로 내려가겠지.”

타격코치의 말에, 제프 배니스터 감독은 애써 한숨을 참았다. 앞날이 예상됐으니까.

완벽하게 타이밍도 잡았고, 타격감도 올라왔는데, 정작 결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대로 경기가 끝난다면 어떻게 될까? 망가지는 거다. 감각 자체가. 확실한 타이밍이 잡혀도, 스스로 의심스러울 테니까.

‘Choo나 벨트레처럼 베테랑들은 쉽게 타격감이 망가지진 않겠지만, 그보다 젊은 선수들은 다르지.’

그렇게 된다면, 안 그래도 한숨만 나오는 레인저스의 성적은 더욱더 나락으로 처박힐 테고.

첫 시작을 잘못 끊었던 것이 불러온 나비효과가 텍사스 레인저스를 망가뜨린 거지.

‘오늘··· 브레이킹볼이 안 좋은 줄 알았다면 차라리 신중하게 나갔을- 아니지, 그랬다면 또 다른 방법을 찾았겠지.’

사실 저 녀석이 멀쩡하게 라인업에 올라온 순간부터, 이미 이런 미래가 예정되었을지도.

“최대한 정확하게 보고 타격해. 어차피 더 거리낄 것도 없어! 확실하게 임팩트를 주라고! 이대로 경기 끝나면, Maddux라고 찍히는 거 알고 있지? 한 점이라도 내고, 그냥 망쳐버려!”

이런 것 말고는 딱히 더 말해줄 것도 없었다. 이미 경기력이 올라온 타자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해봤자···

차라리 마지막까지 의지를 불태워서, 어떻게든 한 점을 내고, 완봉이든 뭐든 막아버려서, 최소한의 자존심이나마 지키는 게 낫다.

감독이 불어넣어 준 사명감을 가지고 타자들이 나갔지만.

“아웃!”

저놈의 공은 도저히 위력이 떨어지질 않는다. 대체 왜 저 모양인 걸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선두타자 카를로스 고메즈는 2구만에 아웃을 당하며, 물러났다. 하위타선이 이어지는 만큼. 그나마 믿을 만한 타자일 텐데.

그는 오늘 경기에서 노이로제가 걸릴 만큼 지긋지긋하게 봤던 유격수 땅볼로 아웃처리 되었다.

“아웃!”

곧이어 마이크 나폴리는 그나마 한 구를 더 끌어, 3구만에 아웃을 당했다.

그래도 외야까지 타구를 날려보내, 중견수에게 타구가 잡혔으니.

오늘 텍사스 레인저스 타자들을 기준으로 한다면, 그나마 좋은(?) 타격을 했다고 할 수 있겠지.

그리고 마지막 7번타자, 로그네드 오도어. 사실 그에게는 큰 기대가 없었다.

이번 시즌 커리어 최악의 성적을 찍으며, 그나마 뻥파워라도 보여줬던 타자이지만.

오늘은 그마저도 없었으니까.

“볼!”

하지만 초구가 박혔을 때. 초조한 듯 난간에 붙어 승부를 지켜보던 제프 베니스터 감독은 약간의 희망을 엿봤다.

“강공, 어떻게든 공을 맞추라고 해. 상대 투수, 힘이 떨어지기 시작했어.”

그건, 레인저스에게 마지막 단물과도 같았다. 드디어, 길고 긴 고통 끝에, 때리다가 지친 건지, Go의 공의 위력이 조금 떨어졌다.

비록 벤치에서 본 것이기에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오늘 경기 지긋지긋하게 봤던 만큼. 느낌은 확실하게 받았다.

어차피 이미 강공이지만, 더욱더 확실하게 배트를 휘두르라는 의미에서 그가 내린 지시에 타격코치 역시 슬쩍 타석에서 물러난 루그네드 오도어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표정이 밝아, 타석에서 봐도 마찬가지인 거야.’

느낌이 좋았다.

루그네드 오도어도 표정이 밝았으니까. 그 역시 똑같은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이겠지.

어쨌든 파워는 확실한 타자.

한방은 있다. 어떻게든 정타만 만든다면··· 최악의 굴욕은 면할 수 있겠지.

“스트라이크!”

2구는 스트라이크.

투수 역시 무언가를 느낀 듯, 내내 던지던 패스트볼 대신, 쓰리핑거 체인지업을 던져 카운트를 잡았다.

갑작스런 오프 스피드에 루그네드 오도어는 헛스윙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래, 확실해!’

느낌은 확실하게 왔으니까.

비록 투구수 자체는 평소보다 훨씬 덜하다고는 하나. 체력적으로 떨어질 때가 된 거겠지.

그리고 3구.

“갔다! 저거 갔다!”

“넘어가버려!”

“끄아아아아악!”

청아한 타격음이 들려온 순간, 침울하게 있던 레인저스 타자들은 죄다 덕아웃 난간에 붙어 소리 질렀다.

정말 오늘 너무나도 야속하게 느껴졌던, 자주 배트에 맞았기에 더욱더 얄미웠던 공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번 경기 최장거리가 아닐까? 쭉쭉 뻗어가는 타구에 홈팬들은 분노가 섞인 고함을, 레인저스는 환호성을 내지르며 바라봤고.

“아웃!”

조금 앞으로 나왔다가, 황급히 뛰어간 좌익수가 펜스에 딱 붙어 간신히 잡아내면서, 비행은 막을 내렸다.

다시 쓰리아웃. 삼자범퇴.

투구수는 지난 이닝보다 하나가 더 줄어든 여덟 개.

허나 이번 경기의 그 어떤 이닝보다 더욱더 큰 희망을 품었다.

‘만약 마지막 욕심을 낸다면. 한 방을 날릴 수 있다.’

완봉까지 남은 이닝은 단 하나. 아마 상대 투수 역시 깨달았을 거다. 자신의 위력이 떨어졌다는 것을.

그럼에도 기어코 욕심을 내겠다면, 그에게 한 방을 날려줄 수 있으리라.

####

패스트볼의 위력이 떨어졌다.

오늘 투구수를 많이 아낀 만큼, 엄청 큰 수준은 아니지만.

‘이미 타이밍을 잡은 만큼··· 위험성은 훨씬 크겠지.’

지금처럼 어메이징하게 땅볼을 만들지는 못할 가능성이 높다. 정타가 조금 더 잘 나올 거고.

‘내려갈까?’

스콧 에머슨은 나를 배려하는 건지, 아니면 본인이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던 건지.

선택권을 나한테 넘겨줬다.

8회 말, 공격이 진행되는 동안 내 스스로 판단하라는 거겠지.

솔직하게 말하면 내려가도 상관은 없지. 삼진을 많이 못잡기는 했지만, 뭐, 8이닝 무실점이면 충분하긴 하잖아?

‘하지만 완봉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야.’

다만 완봉도 가능하긴 하다.

많이 위험해지긴 했지만. 대신 하위타선이니까.

일단 8번타자 라이언 루아는 그냥 감 자체가 떨어졌다. 오늘 경기에서 보여준 것만 보면 말이다.

애초에 그럴 만한 성적이기도 하고. 솔직히 좀 심하지, 성적 자체가. 그러니 아무리 패스트볼의 위력이 떨어졌더라도, 무조건 잡을 수 있다.

‘로빈슨 치리노스도, 성적에 비해 생각보다 떨어졌고.’

로빈슨 치리노스 역시 라이언 루아보다는 나은 것 같기는 한데, 영~ 눈이 안 좋더라고. 컨택도 안 좋고.

다만 파워는 좋으니, 이쪽은 조금 아슬아슬하긴 하네. 하지만 어찌 됐든 여기까지는 세이프.

‘드쉴즈는 확실하게 감을 잡았어. 이젠 장타도 나올 거야.’

딜리아노 드쉴즈는 오늘 유일한 안타를 기록 중이다. 멀티히트 중이기도 하고.

그러니 이번에 만난다면, 솔직히 조금 위험할 가능성이 높지. 다만 애초에 파워가 좋지는 않은 타자이기에, 홈런까진 모르고.

‘또 안타 하나 맞는다고 치고, 추민수 선배까지 연결된다고 해도. 충분히 가능은 해.’

솔직히 선배님께는 미안한 말이지만, 오늘은 영 아니신 것 같더라. 어쩌면 그냥 나랑 상성이 안 좋은 걸 수도 있고.

“선택은 내렸어?”

“네, 한번 해봅시다. 별의별 걸 다 해봤는데, 이 기회에 매덕스 스티커도 받아봐야죠.”

내 선택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 스콧 에머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조금 위험하기는 하지만, 객관적으로 봐도, 완봉 각이잖아? 그렇기에 나도 놓지 못하는 거고.

투구수가 겨우 72구밖에 안 되는데. 여기서 멈추는 것도 좀 그렇지.

그리고 혹시 알아? 내가 막 삼구삼자범퇴 같은 거 해버려서, 매덕스를 놀려줄 수 있을지.

우리 영감님보다 한 구 덜 던지고 완투하면, 기분 째지기는 하겠네.

저번에 노히터 했을 때랑 퍼펙트 했을 때 놀리니까, 아주 반응이 죽여주던데.

어쨌든 결정은 내렸고, 마치 그걸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8회 말 공격은 마무리됐다.

“자자, 다들 똥 빠지게 공 잡아. 가제트처럼 팔을 늘려서라도 어떻게든 잡으라고!”

“너 오늘따라 되게 우리한테 의지하네.”

“가끔은 이런 날도 있어야지.”

“최대한 잡아볼게.”

야수들은 내 채찍질에 오히려 기분 좋게 웃으며, 믿고 맡기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따라 되게 예쁘네.

점수도 6점이나 내고, 수비도 척척 잘하고. 매번 이랬으면 소원이 없겠어.

“가자.”

마지막 9회 초.

마운드로 걸어가며, 짧게 숨을 골랐다. 확실히 다른 때보다는 훨씬 몸이 편하네.

보통은 완봉하고 나면 며칠은 앓아눕는데, 이번엔 안 그러겠어.

‘눈빛이 수상해.’

기분 좋게 마운드에 올랐지만, 문득 상대팀 덕아웃을 훑다, 레인저스 감독과 눈이 마주친 순간, 기분이 묘했다.

마치 ‘됐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으니까. 뭔가 노리고 있는 건가?

묘한 찝찝함이 차올랐을 무렵, 이닝 시작과 동시에 저쪽 벤치에서 말이 나왔다.

“대타! 조이 갈로.”

바로 대타 교체.

라이언 루아 대신 걸어 나온 녀석은 조이 갈로였다.

X발 어쩐지, 느낌이 이상하더라.

조이 갈로. 뭐, 공갈포지. 루그네드 오도어랑 비슷한 성향이야.

문제는 그 공갈포가 진짜 어마어마하다는 것. 괴물 같은 수준이니까.

‘안타가 71개인데 그중 홈런이 35개, X발 이게 사람이냐.’

타율은 2할이다. 근데 홈런이 35개야. 미친 개또라이라고 할 수 있지.

컨택이 심하게 안 좋은 녀석이라, 평소에 이 정도 몸 상태라면, 우습게 잡았겠지만···

‘컨택과는 별개로 선구안 자체는 나쁘지 않아. 패스트볼 정도는 충분히 고르겠지. 브레이킹볼은 오늘 안 통할 거고.’

의외로 좋은 선구안.

다른 타자들에 비해 타이밍은 안 잡혔겠지만, 그래도 패스트볼을 알아보기는 할 거다.

저 녀석의 파워를 감안하면, 지금 폼이 떨어진 상태에서 패스트볼을 던졌다간. 그대로 담장 너머로 가겠지.

‘외통수네.’

지금이라도 다시 마운드를 내려갈까,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있나. 해봐야지.

“Suck! 삼구삼자범퇴 가자!”

저렇게 열심히 응원을 해주시고 있으니까, 말이야.

‘76구는 이미 글렀고. 간부터 보자.’

사실 76구는 이미 글렀다.

그러니 최대한 안전하게 가보자고. 이미 투구수는 충분히 적어서, 완봉만 한다면 ‘Maddux’로 기록은 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던진 초구.

바깥쪽 너클 커브.

오늘 무브먼트가 밋밋해서 자제한 공이지만, 그래도 밖으로 빼는 것인 만큼 조심스럽게 던졌는데···

“스트라이크!”

조이 갈로는 크게 헛스윙했다. 그리고··· 대단히 놀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고.

솔직히 나도 놀랐다.

‘어? 감 돌아왔네?’

오늘 나를 괴롭히고, 강제로 맞춰 잡는 즐거움을 깨닫게 했던 저조한 변화구의 감각이 다시 돌아왔거든.

새끼, 진짜 지 마음대로네.

이래서 감이 좋아. 자기 마음대로 안 좋았다가, 지금처럼···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아웃!”

다시 돌아오기도 하니까.

깔끔하게 삼구삼진.

다시 상대팀 덕아웃을 보니, 감독은 아까 전의 미소 대신 좌절하고 절망하여 고개를 떨궜다. 타자들도 마찬가지고.

너네, 내 타이밍에 익숙해졌지? 정확하게 말하면···

‘패스트볼에만.’

아아, 이 기분 좋은 감각.

맞춰 잡기의 신, 리틀 매덕스 고유석은 이제 끝이다.

“스트라이크 아웃!”

브레이킹볼 마스터, 서클 체인지업의 신, 최고의 삼진 투수 고유석으로 돌아갈 시간이지.

로빈슨 치리노스는 연이어 삼구삼진으로 물러났다. 오늘 처음으로 역동적으로 꺾이는 서클 체인지업에 속아서.

“스트라이크 아웃!”

딜리아노 드쉴즈는 그나마 오늘 타격감이 좋은 타자답게 4구까지 끌었지만, 삼진인 건 변함없고.

‘80구 안쪽으로 못 끊었네.’

82구. 오늘 경기를 완봉으로 끝마치는데 필요한 투구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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