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1, 2회가 끝난 뒤 확실해진 건, 레인저스 타자들이 제법 공격적으로 나온다는 거였다.
“긴장이 빡 들어가 있더라. 단단히 준비한 것 같기도 하고. Suck 니 공을 보는 게 아니라, 그냥 자기 스윙만 한다고 해야 하나?”
“어, 아마 저쪽 전략이겠지.”
평소처럼 타자들을 체크하던 브루스 역시 똑같은 감상인 걸 보면, 마음을 단단히 먹고 나왔나 보네.
오랜만에 보는 동안 꼴찌까지 내려가더니, 아주 정신 무장이 제대로 됐나봐.
‘솔직하게 말하면 운이 좀 좋았어.’
그런 것 치고는 사실 너무 쉽게 막긴 했다. 약간 운이 좋다고 볼 수 있지.
패스트볼이 좋고, 변화구가 나빠서, 패스트볼 위주로 던졌는데. 오히려 컨디션이 평소처럼 무난한 정도였다면, 안타 몇 개 맞았을 테니까.
괜히 해설자나 코치, 스카우트 등등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자기 스윙을 설파하는 게 아니야.
지구 5위, 돈값 못하는 꼴찌 놈들 주제에 타격감은 제법이군.
“오늘 삼진은 좀 힘들겠네.”
“어, 일단 때리고 보니까, 삼진은 힘들겠지. 저~기 레이더스 양반들 아쉽겠네. 니 삼진 보려고 야구보는 사람들인데.”
“괜찮아, 내가 잘하기만 하면 무조건 오케이니까.”
브레이킹볼 감이 약간 떨어졌으니, 평소보다 삼진 잡기 힘든데. 타자들까지 저렇게 나오니. 오늘은 확실히 좀 어렵겠어.
‘대신 패스트볼이 좋은 게 꽤 크네. 그냥 좀 힘든 경기가 될 거라고 생각했더니, 생각보다 좋은데?’
다른 경기들처럼 타자들이 잔득 웅크릴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적극적으로 나오고 있다.
이러면 중간중간 변화구를 섞으면서 삼진을 잡을 수도 있겠지만, 자기 스윙을 확실하게 하고 있으니.
오늘처럼 밋밋한 날에 변화구가 잘못 얻어걸렸다간, 세금 하나 더 징세하겠지. 피홈런 말이야.
“맞춰 잡자.”
그럼 뭐, 어쩔 수 있나.
이렇게 가야지.
옛날처럼 공이 날림인 것도 아니고, 오늘은 특히나 패스트볼이 좀 잘 받는데. 그걸 이용해서 때려잡아야지.
“그래? Suck 너라면 타자들 가지고 놀자고 할 줄 알았는데.”
“뭐하러? 더 쉽게 가는 길이 열렸는데, 그쪽으로 가야지. 괜히 돌아가 봤자 별로 안 좋아.”
브루스는 내 말에 조금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긴, 내 피칭은 누가 봐도 삼진을 너무나도 사랑한다는 게 잘 느껴지니까,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하고.
‘사실 생존 전략이었지만, 타고난 성향이기도 하지.’
맞으면 넘어가기에, 마이너 때부터 장착된 기본 전략이나, 애초에 삼진을 좋아하기도 했다.
그것이 생존과 어우러지면서, 더욱더 극대화된 거고. 예전의 경험 때문에 여전히 맞춰 잡는 피칭을 그리 선호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할 땐 해야지.
더군다나 상대가 그것에 잘 당해줄 상태라면, 더더욱 그래야 하고.
“아, 공격 끝났네, 가자.”
2회 말 공격은 금방 끝났다.
1회 말에도 점수를 내긴 했지만, 좀 금방 끝났었는데. 본의 아니게 경기가 타이트하구만.
물론 이제부턴 순수하게 내 본의로 경기를 빠르게 속행시킬 생각이지만.
“브루스, 오늘은 너도 타자들 눈치 보고, 뭐 노리는 거 같으면, 적극적으로 사인 내. 뭔가 켕기는 거 있으면 바로바로.”
“오~ 드디어 날 믿어주는 거야? 거참 오래도 걸렸네. 재깍재깍 보고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맞춰 잡는 건 투수 혼자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당연하지, 결국 투수가 유도한다고 해도, 처리하는 건 야수의 몫이니까.
그렇기에 변수가 존재하는 만큼, 범타 유도보다, 삼진을 훨씬 높게 쳐주는 거고.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눈치가 중요하다. 상대 타자들을 잘 파악하고, 타격감에 맞도록 잘 조절해야 하니까.
‘루그네드 오도어. 못 본 새 많이 조졌네.’
3회 초, 첫 타자는 7번타자 루그네드 오도어. 원래도 공갈포 같은 느낌이 강하기는 했지만.
못 본 동안 비율스탯이 상당히 망가졌다.
‘OPS가 0.680인데 출루율은 .259, 그래도 뻥파워는 확실하네.’
물론 홈런은 27개로, 제법 잘 친다고 볼 수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팀에 민폐를 끼치는 수준이니까.
이 정도면 선구안은 없는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하겠네.
이런 타자는 잡기 쉽다. 삼진으로든, 범타로든.
“스트라이크!”
먼저 초구는 포심 패스트볼.
낮게 던졌는데, 배트가 헛돌았다. 아주 눈을 감고 휘두르네. 공 하나에 불과하지만, 이걸로 대략적인 파악은 끝이다.
“스트라이크!”
얜 그냥 삼진으로 잡자.
그냥 범타로 처리하기에는 너무 아까워. 맞춰 잡는다고 해도, 중간중간 삼진도 잡고 그래야 힘이 나겠지.
2구째에 바깥쪽으로 던진 서클 체인지업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평소보다 역회전이 부족하긴 한데, 그래도 살짝 들어왔네.
영점 잘 잡아야겠어.
“파울!”
그래도 파워는 확실히 진국이다. 과감하게 몸쪽으로 붙인 커터. 루그네드 오도어는 이번에도 눈을 감다시피 스윙했지만, 아슬아슬하게 배트에 스친 공은 그대로 쭉 뻗었다.
만약 정타였다면, 제법 큼직한 한 방을 맞았겠어. 홈런까진 아니겠지만.
‘일단 얘한테는 변화구는 자제하자.’
저런 맹인 같은 스윙에 홈런 맞으면 진짜 억울할 것 같거든.
“스트라이크 아웃!”
마지막은 다시 한번 더 서클 체인지업. 루그네드 오도어는 떨어지는 공을 크게 헛치며, 삼진으로 물러났다.
‘이제부터 수비 좀 만지자고.’
좌타자 한 놈 치웠으니. 이제 남은 건 우타자 두 놈. 반대손 타자인데, 오늘 나는 서클 체인지업이 약간 떨어졌으니, 평소보다 조금 더 힘들겠지만. 괜찮다. 어차피 범타를 유도할 테니까.
8번타자, 라이언 루아가 올라오기 전, 나는 즉각적으로 브루스에게 사인을 보냈다.
고개를 끄덕인 브루스는 곧바로 벤치로 눈짓했고, 그렇게 수비라인이 움직였다.
‘외야는 허허벌판이네.’
드넓은 콜리시엄의 외야는 텅텅 비었다. 내야 역시 타이트하게 조였고, 다들 3루 쪽으로 바짝 붙었지.
조금 극단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텅 빈 외야로 타구가 흐른다면, 3루타 혹은 그 이상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거기까지 안 가.’
조이 갈로가 안 나왔으니, 앞서 상대한 루그네드 오도어와 아드리안 벨트레를 제외하면, 거기까지 타구를 날린 타자는, 오늘 레인저스에 없으니까.
차라리 미연의 사태를 확실하게 방지하는 게 낫지.
‘자, 그럼 쉽게 가볼까?’
맞춰 잡는 방법은 아주 쉽다.
타자들이 스윙하면, 거기에 잘 맞도록 공을 던져주면 되지. 그냥 배팅볼 아니냐고? 맞아. 배팅볼이지.
맞춰 잡는 피칭이라는 건 엄밀히 말하면, 배팅볼을 던져주는 것과 크게 다를 건 없다. 그걸 가르는 차이는 세 가지다. 하나는 구위. 그다음은 뒤의 야수들의 유무. 마지막으로···
‘코스.’
때릴 만한 코스로 던진다는 거지, 정타가 될 코스로 던진다는 게 아니야.
타자가 공을 쳤지만, 아슬아슬하게 뜬공이나 땅볼이 될 코스로 던지는 것. 그게 맞춰 잡는 기술이지. 참 쉽지?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나는 쉽다. 거기에 필요한 구위와 제구력을 둘 다 갖췄으니까.
‘3루에 쟤도 있고.’
맷 채프먼. 최소한 우리 팀 야수들 중에서 수비력으로는 제일 믿을 만한 놈이 3루에 있으니까.
이 정도쯤 되면 파워툴이 조금 떨어지는 우타자들 조지는 거야···
‘일도 아니지.’
8번타자, 라이언 루아.
다른 타자들이 적극적이었던데 반해, 그는 최근 성적이 안 좋아서 그런지, 배트를 쉽게 내지 않았다.
“볼!”
“스트라이크!”
정확하게는 본인이 통제한 게 아니라, 그냥 겁먹고 안 내민 것에 가깝지.
하지만 제법 먹음직스러운 코수, 바깥쪽에서 살짝 더 들어온 위치로 공이 들어오자, 여지없이 배트를 휘둘렀다.
“아웃!”
투심 패스트볼, 무려 그렉 매덕스에게 배운 공이지만, 보조적인 역할 수준에 머물렀던 구종이 힘을 발휘했다.
살짝 하강함과 동시에 역회전을 하며, 배트를 비껴서 맞은 공은 툭 그라운드 바닥을 뒹굴었고.
굴러온 공을 직접 손쉽게 잡아 1루로 송구하는 것으로 투아웃을 올렸다.
‘로빈슨 치리노스.’
마지막은 로빈슨 치리노스.
9번타자이긴 한데, 성적만 놓고 본다면 상위타선에 있어야 한다. 포수라서 체력안배를 위해 아래에 있는 거지.
현재 레인저스에서 OPS가 8할이 넘는 타자가 세 명인데, 그 셋 중 한 명이 이 양반이니까.
‘그러니 맞춰 잡기에는 더 쉽지.’
성적도 잘 나오겠다, 자기 스윙에 망설임이 없을 거다. 굳이 위험한 코스로 넣어서 유도할 필요도 없는 거지.
그냥 스윙 궤적 예측하고, 배트의 손잡이와 끝부분을 골라서 하나 힘껏 꽂으면-
“아웃!”
범타가 나온다. 참 쉽죠?
3구째, 컷 패스트볼.
아슬아슬하게 배트 끝에 걸친 공에 둔탁한 타격음이 흐르며, 공은 유격수 방향으로 흘렀다.
발이 빠른 타자가 아니기에, 당연히 아웃. 이번 이닝은 투구수를 좀 쓰긴 썼네. 무려 10구니까.
“리미트인 80구중에서 무려 8분의 1이나 소모하다니. 조금 더 알뜰살뜰 아껴야겠어.”
내 자책에 브루스는 그건 뭔 개또라이 같은 소리냐며 눈살을 흐렸다. 뭐, 어쩌라고, 공이나 잘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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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레인저스 타자들 중에서 이번 시리즈를 반긴 사람은 없었다.
로테이션을 감안했을 때.
시즌 초반 그들을 옴팡지게 털어버렸던 괴물과 다시 조우할 테니까.
“쟨 뭐 사람은 맞냐?”
“성적이 무슨- 애스트로스는 대체 어떻게 1점을 낸 거야?”
발칙했던 애송이, 떠오른 초신성 루키는 이제 없다. 한동안 못 본 사이 리그를 씹어 먹은 미친놈만 존재할 뿐.
우리와 같은 사람은 맞는가 싶을 정도의 성적은 보는 이에게 헛웃음을 선사할 정도였다.
“Choo, 너 쟤한테 한마디 좀 해라. 같은나라 선배니까, 말 좀 통하지 않을까?”
“저번에도 말했지만, 선배라고 해도, 별로 관계도 없는데 무슨. 공이나 잘 보고 쳐.”
“쓰읍, 니 후배 너무 미쳤어. 말년에는 편안하게 은퇴하고 싶었는데, 하필이면 저런 놈이 같은지구에서 나오다니···”
아드리안 벨트레, 명예의 전당이 확정된 선수마저도 그에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부탁을 할 정도면 말 다 했겠지.
사실 첫 만남부터 심상치 않은 녀석이라는 건 확실하게 느끼긴 했다. 그 역시 신나게 털린 레인저스 타자 중 하나이니, 못 느낄 수가 없지.
하지만 그 이후, 지금까지 보여준 고유석의 행보는 그 정도를 넘어, 상상을 초월했다.
‘한국에서도 이런 투수가 나오긴 나오네.’
약간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 역시 한때는 투수였고, 전설적인 투수들을 보며, 꿈을 키웠던 입장이니까.
드디어 한국인, 아니, 아시아인 중에서도 사이 영 상 수상자가 나오겠구나 싶기도 했고.
‘그것도 어느 정도껏이지···’
허나 이젠 아니다. 잘하는 것도 정도껏 잘해야지. 저게 사람은 맞나 싶었으니까.
“코치, 진짜 계속 막 쳐도 돼요? 지금 쟤 투구수가···”
“이러다가 또 완봉이라도 당하면···”
경기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지만, 초반 이닝들은 이미 삭제됐다.
그런데도 여전히 고유석은 쌩쌩하고. 아니, 당연히 쌩쌩해야지. 몇 개나 던졌다고, 힘이 빠지겠나?
그렇기에 아직 이른 시점이지만, 지난 악몽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완봉을 당했던 것 말이다.
한동안 온갖 조롱을 다 들었었지. 무슨 올해 데뷔한 루키에게, 구속도 느린 놈에게 완봉까지 당하냐고.
‘그땐 정말···’
심지어 몇몇 팬들은 추민수 그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혹시 같은 나라 후배라는 이유로 살살 봐주면서 한 거 아니냐고. 억울하다 못해, 복장이 터질 정도였지.
안 그래도 대형 계약 이후 연봉에 비해 약간(?) 부족한 성적을 기록하고 있었기에, 더욱더 의심이 짙었지.
그래도 만약 오늘도 그런 걸 당해버린다면··· 그때처럼 격렬한 반응은 나오지 않겠지.
‘이제 와서 완봉이야 뭐···’
퍼펙트와 노히터를 당한 놈들도 있는데, 완봉이 뭐가 대수라고.
저 녀석이 올해 이륙한 것들을 감안하면, 완봉 정도는 기록 축에도 못 끼겠지.
팬들도 화는 나겠지만, 그때와는 다르게 어느 정도 수긍할 가능성이 높고.
“으음··· 그래도 종종 변화구 던진 걸 보면, 평소보다 조금 밋밋했으니까. 최대한 변화구 위주로 노리고, 다시 신중하게 가보자.”
처음 계획은 이제 철회됐다.
쳤다 하면 땅볼귀신이라도 붙은 것처럼 죄다 그라운드 바닥에 찰싹 달라붙는데, 뭘 어떡하겠는가? 얌전히 사려야지.
그나마 브레이킹볼 마스터라고 불릴 정도로 압도적이었던 변화구들이 오늘은 조금 약한 듯한 느낌이 있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거리겠지만.
‘문제는 그 변화구를 안 던지고 있다는 거지.’
변화구를 빼도 패스트볼만 세 종류이니, 그래도 쓰리피치다.
물론 변형 패스트볼의 경우 타이밍이 거의 같기에 오프 스피드로서의 역할은 없지만. 대신 오늘은 위력이 엄청나지.
포심이야 원래도 굉장히 무겁기로 유명하지만, 커터와 투심은 오늘 제대로 날이 섰다.
“세이프!”
“그렇지!”
“아, 진짜 더럽게 쫄렸네. 혹시라도 퍼펙트 당할까봐.”
4회 초, 다시 한 타순이 돌아, 1번타자 딜리아노 드쉴즈가 선두타자로 나갔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안타를 쳐주면서, 퍼펙트를 막았다.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해소되자, 레인저스 선수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한번 퍼펙트를 해본 녀석이기에, 노히터도 했던 놈이기에, 솔직히 많이 쫄렸으니까.
‘침착하게 보고 하나 치자.’
무사 주자 1루.
짧게 숨 쉬는 것을 반복하며, 호흡을 안정시킨 추민수는 타석으로 향했다.
“어이, Choo! 알지? 저번처럼만 해! 저번처럼만!”
“삼진당해라! 서로 돕고 살아야지! 그럼 언젠가 Suck도 안타 하나 줄 거야!”
콜리시엄은 예전보다 훨씬 시끄러웠다. 레인저스에 온 이후, 올해가 가장 소란스럽다고 할 수 있지. 사람도 그가 본 이래로 가장 많은 축에 들고.
‘고유석 신드롬이라고 하던가?’
조금 낯간지러운 수식어인데, 놀랍게도 한국이 아니라 미국에서 나오는 말이다.
애런 저지와 함께, 새로운 영건으로서 이번 시즌의 흥행을 이끌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지칭한 거지.
그런 신드롬의 장본인과 같은나라 선수라는 이유로, 콜리시엄은 비교적 그에게 호의적이었다.
‘참 대단한 신드롬이야.’
그 정도로 오클랜드 팬들이 고유석에게 푹 빠져 있다는 거겠지. 상대팀 타자인데도, 그들이 사랑하는 ‘Suck’과 같은나라 선수라는 이유로, 약간 호감을 가질 정도로.
그래서 그런지 터무니없는 부탁도 했지만, 추민수는 그저 양손의 배트를 꽉 쥐었다.
“···”
배터박스에 들어서자, 그를 흘끔 보는 포수. 별로 중요하지는 않은 녀석이다. 어차피 모든 건 고유석이 다 하니까.
아주 유명하지. 그렇기에 칭송받기도 하고. 스스로 경기를 운영할 줄 안다면서.
‘밀어치기론 안 돼.’
수비 시프트가 펼쳐졌다.
대부분 앞으로 당겨졌고, 좌타자의 당겨치기를 대비하기 위해, 조금 치우쳐지기도 했고.
밀어치는 것도 어느 정도 자신은 있지만, 오늘은 절대 금물이다. 아무리 시프트가 걸렸어도, 무조건 풀파워로 당겨야지.
간결하게 밀어치는 정도로는, 절대로 내야 밖으로 타구를 보낼 수 없을 테니까.
“볼!”
초구는 볼. 가볍게 골라냈다. 평소보다 변화구의 비중이 낮으니, 코스만 보고 판단하면 되기에, 고르는 것 자체는 평소보다 쉽다. 문제는 칠 수 있느냐는 것.
“스트라이크!”
“볼!”
“스트라이크!”
적극적으로 나서면 안 된다는 것을 느꼈기에, 추민수는 본인의 방식대로, 최대한 가장 알맞은 코스를 기다렸다.
그곳으로 딱 하나, 하나만 들어온다면. 그래서 앞으로 당겨진 시프트를 넘길 수 있다면.
딜리아노의 주력이 나쁘지 않으니, 득점도 가능할 테니까.
“파울!”
5구는 제법 들어왔지만, 그는 곧바로 커트했다. 바깥으로만 쳐냈는데도 묵직한 무게감.
손이 약간 아려오기도 했지만. 그래도 한 구를 더 버텨냈다.
‘하나만 와라, 하나만.’
그가 좀처럼 빈틈을 보이지 않으며 투구수를 끌자, 호의적이었던 홈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좋은 징조지. 적에게 그런 시선을 받는다는 건.
마찬가지로 고유석 또한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설프게 유도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마지막 6구.
‘왔다.’
쭉 들어오는 코스를 보며 추민수는 더는 고르지 않고, 최선을 다해 배트를 휘둘렀다.
공을 쭉 빨아 당기기 위해서.
노리던 코스가 왔으니까.
굳이 투구수를 더 끌기보다는, 이쯤에서 승부를 내기로 판단한 거겠지.
‘이런 X-’
자신감 있게 스윙했지만.
조금 전 커트하면서 느꼈던 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묵직한 손맛이 짜릿하게 배트를 타고 올라왔다.
어떻게든 그걸 밀어내기 위해, 온몸에서 가져온 힘을 배트에 실었지만-
‘아.’
곧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이건 절대로 그가 원하는 곳으로 날리지 못한다는 것이.
“아웃!”
“아웃!”
결국 힘없이 굴러간 타구는 더블 플레이로 이어졌고, 몇 걸음 내딛지도 못한 채 물러난 추민수는 허탈한 듯 고개를 저으며, 마운드를 봤다.
‘좀 사람같이 해라.’
저게 사람 새끼는 맞는 건지, 혹시 사람의 거죽을 뒤집어쓴 다른 생명체는 아닌지, 조금 의심스러웠으니까.
곧이어 엘비스 앤드루스 역시 다시금 범타를 기록하며, 이닝은 종료됐다.
####
<추민수, 아쉬운 병살타!>
└고유석 유교야구 좀 배워야 할 듯 선배한테 뭐하는 짓이냐
└이래서 바로 미국 건너가면 안 된다, 장유유서를 모르잖아~
[고유석 오늘 날로 먹는다 ㅇㅈ?]
-4이닝 투구수 33개 실화? 전기톱 새끼들 오늘 빨리 뒤지기 대결하네
└평소보다 삼진은 적은데 진짜 ㅈㄴ 효율적으로 막는다
└33개 밖에가 아니라 33개나 되냐? 생각보다 많이 던졌네ㅋㅋ
└오늘 공 던지기 귀찮은 듯ㅋ
극단적으로 효율적인 피칭을 보며, 몇몇 팬들은 고유석을 더러 경기를 날로 먹는다며, 농담 섞인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평소처럼 화끈한 삼진을 보여주는 대신, 마치 작두라도 탄 것처럼 던지는 족족 타자들을 땅볼로 잡는 모습은 꽤나 신선하게 느껴졌으니까.
[고유석 운빨 조지네]
-솔직히 오늘은 오클랜드 수비가 다 하는 중
└삼진 많이 잡은 덕분에 바빕 마일리지 모인 거 쓰는 거임
└야알못 새끼야, 저게 운빨로 보이냐? 누가 봐도 유도하고 있구만
└└솔직히 맞춰 잡는 건 운칠기삼아니냐?
└그럼 매덕스도 운칠기삼임?
몇몇은 운이 아니냐며 어그로를 끌기도 했지만. 그리 신통하지는 않았다.
-아웃! 고유석! 또다시 땅볼을 유도합니다! 2루수 제드 라우리가 잡아서 1루로! 아웃! 고유석 선수, 오늘 아주 그라운드와 친밀한데요?
-좋은 구위를 바탕으로 그라운드볼을 잘 유도하고 있네요. 평소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지만, 역시 고유석입니다.
-네, 역시 고유석이죠.
이후에도 인플레이 상황이 자주 나오기는 했지만. 레인저스는 내내 땅볼을 면치 못했고, 이닝은 빠르게 지워졌다.
같은 내용이 반복된다는 건, 단순히 운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당장 직접 경기를 보더라도, 고유석이 구위로 레인저스를 압도하고 있다는 것이 명확하긴 했지만 말이다.
-마이크 나폴리,, 지난 이닝은 유격수 땅볼로 물러났는데··· 스트라이크 아웃! 삼구삼진!
-오늘 맞춰 잡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삼진 역시 무시할 수 없죠.
-5회 초를 이닝 종료! 투구수는 45구입니다.
그렇게 5회마저 빠르게 지워지고.
-아웃! 다시금 10구만에 이닝을 삭제시키는 고유석! 그야말로 가공할만한 구위로 레인저스를 몰아붙입니다!
-오늘 정말 효율적인 피칭이 뭔지 잘 보요주고 있네요. 마치, 본인이 맞춰 잡는 피칭도 충분히 잘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6회 역시 별다른 반항 없이 삭제되면서, 곧 사람들은 혹시나 하는 생각을 품었다.
[고유석 완봉 페이스 아님?]
-투구수 ㅈㄴ적은데 고덕스 가나?
└이제 55구니까, 지금까지처럼만 하면 76구 안쪽도 킹능성 있음
└아직도 그거밖에 안 됨? 평소보다 대충하는 것 같은데 ㅈㄴ 잘잡네
└76구가 뭐 있음? 신기록임?
└매덕스가 완투 76구만에 함 참고로 메쟈 신기록은 58구
└76구도 신기한데, 신기록은 개또라이네
└아무튼 76구는 가능해 보이기도?
어쩌면 매덕스가 선보였던 전설이, 오늘 다시 반복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그의 한 달 반짜리 제자의 손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