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스트라이크 아웃!”
사인은 어느 정도는 정확했다. 어느 정도는.
“패턴이 바뀐 거 같은데? 제대로 확인한 거 맞아?”
“제이크 네가 보기엔 그래? 패턴이 바뀐 건가···?”
누군가는 잘못된 정보에 분통을 터트리며 의심을 품었지만.
“세이프!”
“그렇지! 한 점 더 내자! 동점 가야지!”
또 다른 누군가는 여전히 그것에 수혜를 입으며,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어냈다.
“딱 맞는데? 그냥 잘 못 본 거겠지.”
혼란이 시작된 건. 그렇게 선수들끼리 서로 다른 것을 보기 시작하면서였다.
“쟤 지금 사인이 바뀐 것 같지 않아? 조금 다르던데.”
“그래? 난 다 들어맞던데?”
“그런가···?”
“쟤 원래 지 마음대로 던지기로 유명한 놈이잖아. 그래서 그런 거 아니야?”
어쩌면 Go라는 투수의 특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번 시즌 데뷔한 루키이면서도. 포수들 대신 본인이 주도적으로 리드하는 투수. 때때로 포수를 제쳐놓고 자기 마음대로 굴기도 하는 투수.
그런 투수가 사인을 무시하거나, 그냥 자기 느낌에 따라서 마음대로 던지는 거야, 분명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니까.
그러니 사인과 구종이 한두 번쯤 다른 것 역시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오늘 좀 맞은 거 때문에 폭주한 거 아니야? 포수 못 믿고 지 마음대로 한다거나.”
“쟤 은근히 감정적이던데, 그럴 가능성도 있지. 그런 거면 좀 짜증 나겠네.”
“사인을 믿어야 하나? 또 대부분은 맞아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기에 그 누구도 확신하지 못했고, 계속해서 전달되는 사인과 정보는 그 혼란을 더욱더 가속했다.
사태를 진정 시켜야 했던 코칭스태프들 역시 가담 혹은 암묵적인 동조와 방관을 하고 있었기에, 그들 역시 함게 호란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고.
차라리 아예 사인이 바뀌고, 패턴이 달라졌다면 그나마 나았겠지. 깔끔하게 포기하고, 그냥 평범하게 플레이를 하면 되니까.
허나 그렇지 않았기에, 문제는 더욱더 복잡해졌다.
“스트라이크 아웃!”
그런 상황 속에서 2번타자 알렉스 브레그먼은 큼직하게 헛스윙하며 삼진으로 물러났다.
그에게 전달된 정보는 거짓.
그는 얼굴을 빨갛게 달아 올리며, 타석에서 물러났다.
“막판에 사인 틀렸잖아, 제대로 전달 안 해?”
“아, 쏘리쏘리. 쟤가 좀 마음대로 던진다. 그거 감안하고 들어.”
결정적인 순간 달라진 공에 분노를 터트렸지만, 그 외의 나머지는 거의 다 맞았기에 흐르듯 넘어갔다.
‘상황이 이상해졌어.’
곧이어 3번타자 호세 알투베.
오늘 첫 선취득점의 주인공이자, 팀의 리더라고 할 수 있던 그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직감적으로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순간부터, 훔쳐낸 투구사인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휘둘리고’ 있었으니까.
그는 동료들에게 신호를 보내지 말아 달라고 요청한 선수 중 하나였기에, 다른 사람들처럼 크게 혼란에 휩싸이지는 않았지만.
“아웃!”
그로 인해, 오히려 약간 한 발을 빼고 있는 셈이 되었기에, 확실한 정보를 얻어내지는 못했다.
그렇게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던 지난 이닝과 마찬가지로. 5회 말 역시 안타 하나를 제외한 수확은 없었다.
확실하게 점수를 내자고 외쳤던 것이 무색하게도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몇몇 선수들은 자괴감 혹은 경외감을 느꼈다.
“조지, 넌 사인 맞았지?”
“어, 맞던데? 왜, 혹시 문제라도 있어?”
“아니, 좀 이상해서.”
“나도 구종은 맞던데, 저 새낀 어떻게 사인을 보고 쳐도 힘드냐···”
“진짜 X같네. 쟨 뭐 어떻게 만들어진 새끼야?”
컨닝이나 다름없는 방법까지 동원했다. 아니, 다름없는 게 아니라, 그냥 대놓고 컨닝이다.
‘기술을 이용한 분석’이라는 말로 속이고 있지만, 본질은 결국 컨닝 혹은 치팅이니까.
당장 사무국이나, 외부에 걸린다면, 그저그런 헤프닝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일이지.
그런데, 그런 방법까지 동원했는데, 낸 점수는 고작 1점.
그마저도 경기가 막 시작했을 때, 기습적으로 낸 것이고. 투수가 본격적으로 집중력을 올린 뒤로는 쭉 틀어 막혔다.
애스트로스 선수들은 그것이 주는 자괴감과 박탈감, 그리고 투수를 향한 경외심으로 압도됐다.
“차라리··· 차라리, 쟤들 홈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했을 때가 더 나았어.”
“쟤한테 첫 홈런 만들어준 것도 우리였는데···”
“뭐야 이게···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우리.”
8이닝 무실점으로 털리기도 했지만, 두 번째 맞승부에선 오히려 홈런을 포함해 2득점을 올렸건만.
도리어 지금은 대놓고 정답을 보고 상대하는데도 쩔쩔매고 있다니···
“자자, 아직 한 점 차니까, 수비 잘하고, 금방 따라잡자. 최소한··· 여기서 20승 하는 건 막아야지.”
의심과 의혹. 그리고 자괴감.
그런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6회 초가 시작됐고. 선수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생각을 품은 채, 수비를 위해 그라운드로 나갔다.
그리고 공격에 나선 애슬레틱스는 1회 초 이후 아주 오래간만에 득점을 올렸다. 이제 스코어는 3대1.
“크하하하하!”
“그렇지! 점수 좀 내라 이 말이야! Suck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처음에 불타면 뭐 하냐! 그래봤자 유지 못 하는 조루 새끼들인데!”
“니들이 1위라고? 우리한테 대신 양보하지 그러냐! 포스트시즌 나가도 X같이 발리고 떨어질 것 같은데!”
관중석에 있던 ‘레이더스’, 최근 들어 유명해진 애슬레틱스의 열정 팬들은 원정 경기인데도 열띤 환호성을 질렀다.
경기 초반, 불안불안했던 것과는 다르게, 중반부터는 다시 기세를 잡더니. 조금 더 격차를 벌렸으니까.
그들과 반대로 처음과 달리 홈팬들은 뜨뜻미지근한 시선으로 그라운드를 내려 봤다.
“처음에 신 내는 거 보고, 금방 역전할 줄 알았더니···”
“정작 애슬레틱스가 또 점수 먼저 냈네.”
“타자들이 갑자기 좀 말리는 것 같은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저번에 붙었을 때처럼, 홈런이라도 하나 때려! 뭐하는 거냐고!”
경기 초반. 저 괴물 같은 투수를 신나게 두들기는 모습에 흥분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낸 점수는 첫 득점이 끝이었으니까.
차라리 시작부터 내내 틀어막혔다면 오히려 응원을 보냈을 거다. 격려를 해줬을 거고. 위로를 해줬겠지.
이번 시즌, 엄청난 성적을 올린 휴스턴이기에, 팬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그들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또한 상대투수가 그 녀석이니, 점수를 내기 힘들다는 거야 모두가 아는 사실이고 말이다.
하지만 기대감을 심어놓고서, 정작 그걸 터트리지 못했기에, 오히려 반응이 사나웠고. 그것은 이미 충분히 혼란스러운 애스트로스에게 조급함과 쪽팔림을 안겨줬다.
자신들은 사인을 보고 있는데도, 고작 1득점을 했건만, 반대로 상대 타자들은 추가득점까지 올린 셈이니까.
그런 복합적인 감정 속에 선수들은 둘로 나뉘었다.
“내 타석에선 그거 하지 마. 오히려 괜히 좀 거슬려. 그냥 승부하는 게 낫지···”
정확성이 떨어진 방법 대신, 뒤늦게 자신의 실력을 믿고 나서거나.
“신호 좀 잘 봐. 헷갈리지 말고. 전달 잘하고.”
혹은 기존의 믿음에 더욱더 절박하게 매달리거나.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사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비슷했다. 이번엔 안타조차 내지 못하며, 다시금 삼자범퇴.
너무나 손쉽게 빼앗긴 삼진과 가볍게 저지된 공격에, 애스트로스 타자들의 얼굴에 씌워졌던 자신감은 산산조각이 났다.
망치질처럼 강력한 충격이 애스트로스를 강타했을 때.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호세 알투베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동료들을 훑으며 물었다.
“···지금 타이밍 잡은 사람, 있어? 투수 정보는? 뭐라도 얻은 거, 있어?”
이제 세 타석이 돌았다.
네 번째 타석을 맞이하지.
투수에게 적응하고, 타이밍을 잡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없었다.
“하··· 그러니까, 6회도 끝났고, 이제 경기 후반인데, 얻은 건 하나도 없다. 그리고 쟤는 아직 멀쩡하다. 이거네? 지금 우리 상황이.”
호세 알투베는 동료들의 침묵이, 온몸의 털이 바짝 솟을 만큼 차갑고, 소름 끼쳤다.
피를 타고 흐른 독이, 애스트로스를 마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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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알아챈 거 같은데?”
“어, 엄청 침울해졌어. 생각보다 빨리 눈치깠네··· 좀 더 이용할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치팅도 치팅이지만, 실력도 있는 놈들이니까. 이상하다는 거야 금방 깨달았겠지.”
수비를 위해 그라운드로 나오는 애스트로스 선수들을 본 순간, 확 느낌이 왔다.
드디어 알아차렸구만.
내가 자기들을 가지고 논걸.
브루스는 예상보다 이르게 현실을 자각한 애스트로스가 아쉬운 듯 혀를 내둘렀지만, 사실 이 정도면 뽕은 충분히 뽑았지. 5회 말, 6회 말. 2이닝 날로 먹었으니까.
또한 알아챘다고 끝이 아니라, 후유증 역시 남을 테니까.
‘내가 본인들을 농락한 걸 깨달았다고 해도, 갑자기 정신을 차리지는 않겠지.’
알아챘다고 해서, 불쑥 정신이 번쩍 들어서 경기에 집중할까? 아니, 아니지 그냥 현실을 자각한 것뿐이지.
현실자각이야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거기서 다시 일어서는 건 또 다른 이야기다.
“다음 이닝부터는 다시 패턴 바꾸고, 무난하게 조지자. 이제부터 좀 타이트하게 가고.”
“오케이, Suck 너 체력은 괜찮아? 평소보다 좀 늦게 시작하는 거잖아?”
그러니 다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끔 계속 다리를 걸고, 넘어뜨려야지.
“최소한 2이닝 조질 힘은 있어. 잘하면 3이닝도 가능하고.”
“네가 그렇다면야··· 근데 코치가 허락할까?”
“피해자가 복수하겠다는데, 뭐, 어때?”
체력은 차고 넘친다.
생각보다 투구수가 적거든.
안타도 맞았고, 볼넷을 내주기도 했지만. 저쪽도 적극적으로 타격해준 덕분에 쉽게 맞춰 잡은 것도 꽤 되고.
그러니, 진짜 쇼타임은 이제부터다.
“아, 이상하게 안 맞네.”
“정의구현을 해줘야 하는 건데···”
“그래도 우리가 낫지. 쟤들은 훤히 보고 쳐도 꼴랑 1점인데. 우린 안 보고 쳐도 3점이잖아.”
“크리스 너 천재냐?”
“똑같이 죽 쑬 거면 깨끗하고 정정당당하게 죽 쑤는 게 더 낫기는 해.”
참고로 이젠 다른 선수들도 안다. 처음에는 나랑 브루스, 밥 멜빈 감독을 비롯한 코치들. 이렇게만 딱 알고 있었다.
확정적인 것도 아닌데, 굳이 다른 선수들한테까지 이야기해서, 분위기 험악해질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다 알려줬기에, 타자들은 정의구현이 마렵다는 표정을 했지만. 그럼 그렇지. 그래도 3점이라도 낸게 어디냐.
“Suck, 저 X같은 새끼들 그냥 죽여버려. 대가리에 하나 던지던가.”
“완투 가자, 완투. 아니면 싹 다 삼진으로 조져도 좋고.”
그라운드로 나가기 전, 마찬가지로 사인 훔치기의 피해자일 가능성이 큰 션 마네아와 켄달 그레이브맨의 악에 받친 응원(?)을 보냈고.
“Suck, 제대로 죽여.”
“무리하란 말 안 해요? 뭐야, 저 포기하지 마요.”
“뭐, 저런 Cheater 새끼들 조지는 게 뭐 얼마나 힘든 일이라고. 그냥 가볍게 찍어 눌러줘.”
투수코치라서 직접적인 피해자는 아니나, 간접피해를 봤다고는 할 수 있는 스콧 에머슨 역시 평소대로 나를 자제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징벌을 부추겼다.
아닌 말로, 사인 훔치기를 깨달았을 때, 그가 가장 크게 충격을 받았다.
왜냐고? 이미 말했듯, 사인 훔치기 자체는 당한 놈이 X신 취급받는다. 그런 중요한 것도 못 지키냐는 식으로.
‘그런데 투구사인을 스틸 당했으니. 투수코치의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지.’
상대가 뻔히 사인을 훔치는데도 막지 못한 무능한 코치라는 말이 나올 수도 있다.
본인 생계(?)를 위협한 개자식들인데, 스콧 에머슨으로서는 당연히 격노할 수밖에.
“Yes Sir.”
나는 코치의 말을 잘 따를 줄 아는, 착하고 모범적인 선수니까! 그의 부탁을 들어줘야지. 주인님께서 목줄도 풀어주셨으니. 마음껏 물어뜯으면 되겠어.
“대타!”
마운드에 오르자마자, 상대 덕아웃에선 대타가 나왔다. 기세가 확 기울었으니. 교체로 분위기를 쇄신하겠다는 건가?
‘벨트란이라···’
기존의 7번타자였던 데릭 피셔 대신 타석에 오른 선수는 카를로스 벨트란.
대단히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낸 노장으로, 사실 이번 시즌 성적은 그리 좋지는 않다.
‘까놓고 말해서 그냥 먹튀 수준이지, 성적만 놓고 보면. 다만, 상징성 값도 있으니, 그것도 감안해야 하겠지만.’
대단히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낸 스위치히터라는 특별함이 있기에, 대부분 명예의 전당은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보는 만큼. 리빙 레전드라는 불릴 만한 선수인데···
‘표정이 묘하네.’
타석에 들어온 그는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마치 잘못을 저지른 걸 부모님에게 걸린 어린아이 같다고 해야 하나?
그걸 보고 직감했다.
너구나, 이번 일의 핵심이.
그게 아니라면, 저 정도로 불안에 떨지는 않을 테니까.
인성이 좋기로 유명한 선수였기에, 그런 반응을 본 순간 왠지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조금, 아니, 많이 실망이네.
“스트라이크!”
영웅의 뒷면을 본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물론 사인 훔치기야, 숱하게 있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내가 생각하기에 이번 일은 그저 그런 사인 훔치기 수준이 아닌 것 같거든.
‘두 눈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사용했을지도 모르지.’
나 같은 경우 벤치에서 투구 오더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2루에 주자가 자주 나가지도 않았지.
오늘 경기에서 2루에 주자가 있었던 건, 3회 말, 딱 한번 뿐이니까.
그런데도 사인이 읽혔다.
그것이 무엇을 뜻할까?
저쪽 선수나 코치 한 명이, 몽골인처럼 엄청나게 시력이 좋아서, 덕아웃에서 바로바로 나와 포수의 사인을 포착하는 것? 글쎄···
‘여기서부턴 확실하게 규정 위반이니까, 단순히 심증으로 몰아세울 수는 없겠지만···’
강하게 의심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지.
그런 일에 저런 거물이 가담했다는 게 그리 반갑지는 않았다.
“스트라이크!”
감정이 가라앉은 것 때문인지, 오히려 집중은 더욱더 올라갔다. 반복적인 동작 역시 보다 수월하게 이어졌고.
2구는 바깥쪽 너클 커브.
아예 나가는 코스였는데 헛스윙을 하는 것을 보아, 이제는 사인 훔치기를 멈췄겠지.
이제야 멈췄겠지.
이미 늦은 줄도 모르고.
“스트라이크 아웃!”
3구는 몸쪽으로 박히는 하이 패스트볼. 좌타석에 들어온 그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러뜨렸다. 빈볼을 예상한 것처럼.
이래서 죄짓고 살면 안 돼.
지 혼자 쫄아서 저러잖아.
내가 뭐하러 빈볼을 던져?
이미 죄다 멘탈 터진 것 같은데, 싹 다 뽑아먹고 가야지.
“스트라이크 아웃!”
후속타자, 후안 센테노 역시 큼직하게 헛스윙을 하며 내 탈삼진을 올려줬다.
두 타석이 끝나는데 걸린 시간은 대략 2분 남짓. 어쩌면 더 짧을지도 모르고.
동료들이 대단히 짧은 간격 동안 연이어 삭제된 충격 때문인지는 몰라도, 마지막 9번타자, 제이크 마리스닉은 어금니를 꽉 물고 올라왔다.
‘자, 착하지? 니 동료들 다 눈치 챙겼는데, 너도 그래야 하지 않겠어?’
눈치 챙겨라. 죗값을 달게 받으라고. 아주 대대적으로 사인 훔친 거 들켰는데, 대가리에 공 안 날아간 걸 다행으로 알아.
성질 더러운 투수였으면, 니들 중 최소한 두 놈은 뇌진탕으로 그라운드 바닥에 누웠을 테니까.
왜 둘이냐면, 한국과 달리, 메이저리그는 헤드샷을 퇴장 판정을 주심 재량에 맡기기에, 첫 번째 헤드샷은 실수라고 커버할 수도 있지만. 두 번째는 무조건 퇴장이라서 그렇다.
“스트라이크 아웃!”
어쨌든 마지막 제이크 마리스닉 역시 삼진으로 잡히면서, 세 타자 연속 삼진, 그것에 소모된 투구수는 단 아홉 개. 무결점 이닝이지.
“You Suck!”
“경기 후반오니까, 이제 좀 신이 나네!”
“초반에 좀 맞아서 실망했더니, 내가 X신이었다! 끝까지 믿었어야 했어!”
“어딜 우리 Suck한테 개기려고! 얌전히 삼진이나 처먹어! 이 Suck같은 새끼들아!”
7회 말 종료까지 걸린 시간 역시 단 3분에 불과했고. 그건 애스트로스를 넉아웃 시키고, 우리 레이더스를 광분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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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Suck!”
소수에 불과한데도, 워낙 경기장이 조용해졌기에, 그 소리는 경기장 안을 쩌렁쩌렁 울렸고.
개폐식 돔구장이고, 오늘은 돔을 닫았기에, 그 함성은 마치 메아리처럼 미닛메이드 파크를 맴돌았다.
You Suck! 정말 유명한 구호다. 녀석이 삼진을 잡을 때마다, 이름을 외치듯이 타자를 조롱하는 챈트지.
당연하게도 저것을 싫어하는 타자는 무수히 많았다. 삼진을 당한 것도 억울한데, 조롱까지 듣는 셈이니, 듣기만 해도 욕설을 뱉거나, 경기를 일으킬 정도지.
저 투수, Go로 인해 타자들에겐 워낙 익숙한 소리였으니까, 아주 노이로제가 생기기도 했고.
“You Suck!”
그 유명한 구호가, 애스트로스의 가슴을 후벼 팠다. You Suck. 그 두 단어는 마치 자신들의 실태를, 그러고도 무참히 쓸려나가는 오늘 경기를 지칭하는 것 같았으니까.
“X발.”
평소라면 불쾌감에 노려보기라도 했겠지만, 오늘 애스트로스 타자들은 그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들을 ‘Suck’이라고 지칭하는 저 말을,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었으니까.
7회 말, 속도를 높였던 투수는 8회에 다시금 마운드에 올랐다. 마치 너희들이 뭘 했는지 훤히 안다는 눈빛으로.
그래, 확실하게 알아챈 거겠지. 그래서 철저하게 농락했던 거고.
“조지, 하나 날려.”
“···후우, 어떻게든 점수는 내보자. 출루할 테니까, 호세 네가 끝내줘. 1회 말처럼.”
어차피 추해졌다. 그렇다면 최소한의 결과라도 얻어내야겠지. 조지 스프링어에게 부탁한 호세 알투베는 입술을 깨물며 그라운드를 봤다.
이제 귓가에 속삭거리던 신호는 없다. ‘쓰레기통’은 저 멀리 치워졌지. AJ 힌치 감독이 매번 착잡하게 보던 모니터 역시 꽁꽁 숨겨졌고.
‘진작··· 진작 집어치웠어야 하는 건데.’
그것을 보며, 호세 알투베는 스스로 질문했다.
언제 멈춰야 했을까? 처음 벨트란이 카메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며 제안했을 때?
그것에 적응하여, 더욱더 쉽게 전달하기 위해 덕아웃에 모니터까지 설치했을 때?
그리고 사인을 해석해, 저 휴지통을 두들기기 시작했을 때?
확실한 건, 멈출 수 있는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당장 어제, 아니, 오늘 경기에서도 그만둘 수 있었지.
‘누군가 한 명이 입을 열었다면.’
그들은 어린애가 아니다.
이게 얼마나 X같은 일이고, 어떤 위험을 가지고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
단순히 어린 시절 옆집 안테나 신호를 훔쳐서, 케이블 채널을 훔쳐보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도.
그렇기에 누군가는 적극적으로 가담했고, 누군가는 소극적으로 이득을 챙겼으며, 누군가는 두려움에 방관했다.
그중 단 한명이라도 그만두자고 이야기를 했다면, 모두가 멈췄겠지.
그저, 그러지 않았을 뿐.
‘이젠 멈출 수가 없어졌어.’
오늘로써 드러났다.
자신들은 명백히 휘둘리고 있다. 이 방법과 그것이 주는 효과에.
“아웃!”
조지 스프링어는 내야 플라이로 물러났다. 정신적으로는 이미 패배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지.
그들은 1회 말을 이야기했지만, 결과는 달랐다. 그것인 묘한 대비를 이뤘다.
사인을 훔쳤을 때는 비교적 쉽게 공략했건만, 그러지 않으니, 개처럼 털렸다. 너무나도 손쉽게.
물론 Go가 함정을 파놓았고, 그들의 멘탈이 크게 흔들린 것 역시 이유 중 하나겠지만. 어쨌든 그런 극명한 대비가, 다시금 효과를 증명해줬다.
그러니, 앞으로는 더더욱 끊을 수가 없겠지.
“스트라이크 아웃!”
알렉스 브레그먼 역시 삼진.
이번 경기 10번째 삼진.
아까 전, 삼진을 당했을 때와는 달리, 그는 얼굴을 붉히거나 하지 않았다.
살짝 이를 갈면서, 조용히 덕아웃으로 돌아갔을 뿐.
“···수고했어.”
돌아오는 알렉스 브레그먼을 스치며, 호세 알투베는 타석으로 향했다. 단두대 안으로 걸어가는 사형수의 심정으로.
억지로 자신감을 올리고, 정신을 다잡아보려고 했지만, 그리 신통하지는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듯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두 눈동자가 이글거리는 투수와 마주 보면, 모든 게 무너져버리니까.
‘한 점. 한 점이라도 낸다.’
그런 투수에게 말하고 싶었다. 이런 방법을 쓰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아니, 나는 충분히 너를 공략할 수 있다고. 네 공을 두들길 수 있다고.
지난번, 너희 홈에서 맞붙었을 때처럼, 우리에겐 너를 상대로 홈런과 실점을 빼앗을 만한 충분한 실력이 있다고. 그걸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야지만 이 불쾌한 심정이 조금이라도 해소될 것 같았으니까.
허나···
“파울!”
Go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를 사납게 압박했다.
이제 8회인데도 여전히 강력한 포심 패스트볼. 어쩌면 투수 역시 최선을 다해 던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공의 중심에 코르크와 고무가 아니라, 쇳덩이가 심으로 박혀 있는 것처럼, 공이 더럽게 무거웠으니까.
“스트라이크!”
서클 체인지업은 더 말할 것도 없겠지. 명품 중의 명품이니까. 나갈 것 같다고 예상했지만, 공은 보더라인에 걸쳤다.
그리고 마지막 3구.
이 경기를 더 끌고 싶지 않다고 말하듯, 투수는 공을 받은 즉시 던졌고, 자신을 노려보는 눈빛에 호세 알투베는 이를 앙다물며 배트를 휘둘렀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느릿하게 날아온 쓰리핑거 체인지업은, 마치 그를 비웃듯 유유히 한참은 더 기다린 뒤에야 존안으로 들어왔다.
헛스윙 삼진아웃.
타이밍은 잡지 못했다.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고.
“You Suck!”
그것을 끝으로 투수는 마치 모든 일을 마쳤다는 듯, 피식하는 짧은 웃음을 남긴 채 마운드에서 내려갔고. 포수 또한 비웃음을 흘리며 떠났다.
그 뒤의 야수들 역시도.
8이닝 1실점 6피안타 11탈삼진 1볼넷.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양심의 값어치는 고작 1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