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처음에는 코스를 노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몸쪽이나 바깥쪽, 하나씩 정해놓고 때리는 거라고.
근데 번갈아서 던져보니까, 그것도 아니더라? 그다음은 구종을 노리는 거라고 예상했지만, 마찬가지로 그런 것 치더라도 너무 잘 골랐지.
마지막은 나한테 투구 습관 같은 게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 역시 아니라면, 남는 건 하나잖아?
“사인을··· 훔친다고? 애스트로스가?”
“어, 아마도.”
사인 훔치기.
작전을 지시하거나, 구종을 선택하는 수신호를 읽는 것으로.
당연하게도 상대의 전략을 손쉽게 대처할 수 있기에, 당연하게도 터부시되는 행위다.
당장 타석에서 타자가 고개 돌려서 포수를 본다면, 그건 ‘내 대가리에 패스트볼 던져주세요’랑 동의어인 수준이니까.
‘하지만 불법은 아니지.’
허나, 엄밀히 말해서 사인 훔치기 자체는 불법이 아니다.
물론 아예 합법인 것도 아니니. 비범죄 정도로 규정할 수 있겠네.
야구에서 사인 훔치기는 은근히 흔하다. 오히려 스틸 당한 쪽을 멍청하게 보기도 하지. 가장 귀중한 전략 정보를 상대에게 빼앗긴 것이니까.
대표적으로 2루에 주자가 있는데, 그 주자가 시력이 좋다? 포수 사인을 읽는 거야 어렵지도 않지. 그걸 안 들키고 타자에게 전달할 수 있으면. 그걸로 끝인 거고.
쉽게 말해서, 안 걸리면 장땡이라는 거지.
‘내 경우는 더 쉬워. 내가 직접 주도하는 편이니까.’
특히 오늘처럼 브루스랑 같이 호흡을 맞추는 날에는 아예 나 혼자서 하는 편이지. 내 쪽에서 먼저 사인을 내기도 할 정도로.
‘그러니 작정하게 사인을 훔치려고 한다면, 데이터 분석이 뛰어난 애스트로스가 못할 것도 없지.’
물론 그걸 어떻게 일일이 다 알아내고, 또 어떻게 타석으로 전달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 어쨌든 불가능한 건 아니다.
불법도 아니고, 불가능하지도 않다. 그러면 문제 될 게 없는 거 아닌가 싶겠지만.
“어쩐지 좀 이상하더라니··· 저 X새끼들이!”
당장 브루스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지. 말했잖아, 안 걸리면 장땡이라고. 근데 걸렸네?
“진정해, 아직 확정은 아니니까. 그냥 심증이야, 심증. 물증이 없으니까. 이것도 그냥 추론 중 하나지.”
물론 간만에 좀 얻어맞은 것 때문에 내 스스로 억하심정이 생겨서, 괜히 휴스턴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걸 수도 있다.
그냥 내 약빨이 떨어지거나, 휴스턴이 잘 치는 거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고.
“아니, 분명히 사인 훔치기야. 처음부터 쟤들 좀 수상했다니까? 어제도 그렇고, 그제도 그렇고. 묘하게 자신감이 넘치더라니···”
“뭐, 그건 나중에 까보면 알 거고. 중요한 건 지금 내가 그런 의심을 품었다는 거야.”
사실 진짜 애스트로스가 사인을 훔쳤느냐, 아니냐는 상관없다. 내가 그걸 의심하게 됐다는 게 관건이지.
의혹이 생긴 이상, 어떻게든 해소를 하거나, 대비책을 마련해야, 내 스스로도 마음이 편해질 테니까.
안 그러면 계속 신경이 쓰이겠지. 안타를 맞을 때마다, 뜻하지 않은 결과가 나올 때마다, 계속 그 생각이 나는 탓에 경기에 집중하지도 못할 거고.
“일단 대책부터 세우자.”
“어떻게 하려고? 이제부터 벤치 오더로 가야 하나?”
“아니, 그것도 안심 못 하지. 션, 켄달이 했던 말 기억하냐?”
이건 순전히 내 과대망상인데. 만약 휴스턴의 사인 훔쳤다면, 단순히 나 하나에 국한될 것 같지 않았다. 우리 팀 전체를 훔쳤겠지.
켄달과 션이 그랬잖아? 이상하게 삼진을 안 당하고, 이상하게 잘 노리고 친다고.
그러니 단순히 내 투구 사인이 아니라, 우리 팀 자체가 싹 털렸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럼 내가 리드해야 하나? 아, 이것도 마찬가지겠네.”
마찬가지 의미로 포수가 리드하는 것 역시 배제. 애시당초 팀 투구 사인이 털렸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냥 다 털렸겠지.
그렇다면 남는 방법은 하나.
“브루스, 너 외우는 건 금방할 수 있지? 포수니까 최소한 암기력은 좋을 거 아니야? 그렇게 안 보이긴 하지만.”
“···말이 심하네. 내가 좀 둔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사인 바꾸려고?”
사인을 바꾸는 것.
사실 경기 중에 사인을 바꾸는 건 흔한 일이다. 사인이라는 게, 겉으로 드러나다 보니, 패턴만 잘 읽으면 알아보기 쉽거든.
그러니 중간중간 계속 바꿔줘야, 끝까지 안 들키고 무탈하게 경기를 끝낼 수 있다.
당장 우리 팀도 예비용 수신호가 수두룩하게 있으니까. 그걸 외우는 것도 선수들의 일이고. 한번 대대적으로 개선한다 치면 진짜 골머리 깨져.
그러니, 혹시라도 나는 공부하기 싫고, 몸 쓰는 게 좋다는 이유로 야구를 할 생각이면 때려치우길 바란다.
“바꾸긴 해야겠지.”
아무튼 우리도 예비용 사인이 있다. 그 패턴으로 바꾼다면 편안하겠지. 정말 애스트로스가 사인을 훔친 거라면 말이야.
“근데, 겨우 방지하는 정도로 끝내기는 조금 아쉽지 않냐? 당한 게 있는데.”
“그럼 어떻게 하려고?”
“그래서 물어봤잖아, 너 외우는 거, 자신 있냐고.”
“!”
그제야 의미를 깨달은 건지, 브루스는 동그래진 눈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최대한 암기하면, 가능은 할 거야.”
“섞어서 쓰자. 아니면 기존 사인을 약간 비틀던가. 손가락 두들기거나 하는 식으로.”
“해봐야 알겠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외울 수 있어.”
“오케이, 그럼 코치랑 같이 상의해보자고.”
섞는 건 말 그래도 섞는 거다. 기존 사인과 새로운 패턴을 혼용해서 사용하는 거지.
기존의 것을 비트는 건 예를 들어, 원래 사인이라면 포심이지만, 왼쪽 눈썹을 두 번 씰룩거리면 그게 너클 커브가 되는 식으로 가는 거고.
기존 사인에서 패턴만 살짝 더 추가하는 것이니 외우는 게 아주 어렵지는 않을 거다.
‘만약 정말로 저쪽이 사인을 훔치고 있다면. 큰 혼란이 발생할 거고.’
겸사겸사 애스트로스에게 독을 심어둘 수도 있겠지. 상대가 사인을 훔쳤고, 그걸 잘 이용하고 있다면.
그 독은 생각보다 더한 극독으로 작용하리라.
‘그냥 사인 패턴 바꾸고 편하게 넘길 수도 있겠지만···’
내가 성질이 못돼 처먹어서, 당한 건 무조건 갚아줘야 속이 풀리는 사람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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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팀 벤치가 수상했다.
덕아웃으로 돌아갔던 투수는 포수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더니, 투수코치와도 진지하게 대화를 나눴으니까.
“혹시··· 들켰나?”
벤치에 있던 선수는 조심스럽게 중얼거린 뒤, 한쪽에 있던 다른 선수를 봤다.
“눈치가 이상하긴 하네.”
카를로스 벨트란.
이 모든 일의 주동자라고 할 수 있는 선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건지, 침을 꿀꺽 삼켰다.
“저쪽이 알아챘다고?”
“어, 어쩐지 마운드에서 표정이 이상하더라니, 의심하고 있었던 거 아니야?”
그 의심은 4회 초, 수비가 끝난 뒤. 덕아웃으로 돌아온 야수들에게도 퍼져나갔고, 약간의 공황이 덕아웃에 흘렀다.
평범한 사인 훔치기였다면 이렇지는 않았으리라.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덕아웃 한쪽에 비치되어 있던 모니터로 향했다.
저것과 저것의 용도가 밝혀지는 순간··· 이번 시즌 휴스턴이 쌓은 업적은 모두 쓰레기더미로 처박히겠지.
“Suck 쟤는 눈치가 빨라서 위험하다고 했잖아.”
누군가 약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하자, 다른 이들 역시 은은하게 동조했다.
사실··· 이번 ‘분석’에서 가장 집중한 선수가 있다면 저 녀석, Suck이다. 그럴 수밖에 없지.
같은 서부지구 경쟁 팀 소속의 선수. 그리고 엄청난 성적을 올리며, 메이저리그를 휩쓴 괴물.
집중할 수밖에 없었지. 가장 위험한 놈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어떻게든 빈틈을 만들고 싶었다.
“젠장··· 좀 두들겨서 좋다 싶었더니.”
솔직하게 말하면. 저열한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다.
역사상 최고의 시즌! 역대 최고의 단기 임팩트! 무수히 많은 역사적인 기록!
그것을 자랑하고 있는 투수를, 자신들이 훤히 읽고, 쉽게 두들기는 것이 주는 쾌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으니까.
허나 그 뒤틀린 쾌감은 공포가 되어 그들을 엄습했다.
“아직··· 아직은 몰라. 그냥 의심하는 정도일 테니까.”
“그래, 들켰다고 해도··· 쟤가 독심술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다 알아내지는 않았겠지.”
“초반부터 좀 털려서, 저쪽 코치가 위로하는 걸지도 모르잖아?”
물론 다 끝난 건 아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걸 수도 있으니까. 정말로 사인 스틸을 알아냈을지는 아직 미지수지.
또한 설사 그걸 의심하고 있고, 확신한다고 해도, 그 ‘방식’까지는 알아내기 힘들 테고.
사인 훔치기 정도야, 야구에서 흔한 일이니, 겨우 그 정도로 애스트로스에게 똥물을 뿌릴 수는 없다.
“일단 확인을 해야할 것 같은데···”
그리고 여전이 욕심을 버리지 못하기도 했다. 사인 훔치기의 효과는 확실했으니까.
오늘 그들은 저 괴물 같은 녀석을 시원하게 두들겼다.
비록 득점은 1점밖에 못했지만, 당장 지난 이닝만 봐도, 마윈의 타구가 조금만 더 뻗었다면, 그래서 펜스 앞에서 잡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넘어갔다면. Go라는 거함을 그들이 침몰시킬 수도 있었을 정도로.
“일단··· 타석에 서면 뭔가 반응이 나오겠지.”
두려움과 탐욕. 그것이 뒤섞인 오묘한 분위기 속에서 4회 말이 시작됐다.
이닝 선두타자는 6번타자 J.D. 데이비스. 올해 8월에 처음으로 데뷔한 그는 타석에 오르며 짧게 한숨을 뱉었다.
‘왜 내가 이런 일에···’
솔직하게 말해서, 그는 이런 일에 엮이는 것이 별로 달갑지는 않았다.
빅리그로 콜업했을 때는 이미 분위기가 만연했기에, 어쩔 수 없이 휘말렸을 뿐.
‘난 오히려 집중이 잘 안 된다고!’
투수가 던질 구종을 알 수 있다면, 승부에서 대단히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는 있겠지만.
그걸 전달받는 과정에서의 집중력 저하는 오히려 그에게 해악을 끼쳤으니까.
단순히 사인 훔치기 수준을 넘어, ‘치팅’과 ‘컨닝’이라고 봐도 무방한 일에 연류된 것 자체가 두렵기도 했고.
‘그래도 어쩌겠어··· 시키는 대로 따라야지.’
그런 상황에서 동료들은 은근히 그에게 지시했다. 정말로 상대가 알아차린 건지, 아닌지. 알아내라는 지시를.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상황을 살펴보라는 것 자체가 그런 뜻이지.
갓 데뷔한 루키가 슈퍼스타들에게 어떻게 반항하겠는가? 얌전히 따라야지.
“하아···”
타석에 오르기 전 저도 모르게 한숨을 뱉은 그는 순간 화들짝 놀라며 투수와 포수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큰 신경은 안 쓰는듯한 모습. 오히려 잠깐 멈춰 선 것이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들어와?”
“아니, 잠깐 발이 꼬여서.”
대충 얼버무리며 배터박스에 오른 뒤 타격폼을 잡자, 포수와 투수는 다행히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승부.
초구가 날아오기 전.
귀를 쫑긋거린 J.D. 데이비스였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스트라이크!”
이어서 날아온 초구.
포심 패스트볼.
일단은··· 신호와 맞다.
자신이 듣지 못한 건지. 아니면 아직 전해주지 못한 건지는 조금 애매했지만.
‘이런 공을 던져대니···’
한편으론 초구를 보자, 동료들의 생각이 이해되기는 했다.
분명 다른 투수와 비교하면, 구속이 느리다는 게 체감되지만, 그런 강속구들이 스포츠카라면, 이건 대신 묵직한 탱크였다. 모든 걸 밀어버릴 것 같은 탱크.
이러니 그런 방법을 갈구할 수밖에. 물론 다른 투수들에게도 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매한가지이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Go에게 더욱더 집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집중하자, 집중.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살펴보기는 해야겠지만··· 내 성적도 중요해.’
정신을 바짝 차린 J.D. 데이비스가 다시 타격폼을 잡았을 때,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도 익숙한 소리가.
퉁퉁. 희미하지만, 똑똑히 들린 두 번의 소리. 빠른 간격으로, 연속적이게 울렸다. 그것이 뜻하는 건···
“볼!”
서클 체인지업.
그것도 떨어지는 녀석으로.
이번에도 적중했다.
뚝 떨어진 공은 아슬아슬하게 스트라이크존 밖으로 내려갔다.
사실 다른 투수들에겐 구종까지 정확하게 맞추는 것은 아니다. 조금은 더 포괄적이지.
두들기지 않으면 패스트볼. 한 번 두들기면 오프스피드. 두 번은 슬라이더나 커브 같은 브레이킹볼. 보통 이런 식으로,
하지만 저 녀석은 달랐다. 조금 더 신호가 세밀하게 나뉘었지. 워낙 구종이 다양하고, 그 위력이 막강한 투수니까.
“파울!”
“볼!”
“스트라이크 아웃!”
이후에도 신호는 거의 적중했다. 다만 너무 빠르게 투구했을 때는 시간이 촉박해 미처 전달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아직은 유효했다.
‘알아차리고 사인을 바꿨으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을 텐데.
뱉지 못한 말을 씹어 삼킨 J.D. 데이비스는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왔고. 은근한 시선이 그에게로 쏟아졌다.
“···전과 똑같아.”
그렇게 말하면서, 구역질이 샘솟았다. 결국 싫다, 싫다, 말만 그럴 뿐. 자신 역시 동조하고 있는 것이니까.
“그래? 그냥 긴가민가한 정도였나 보네.”
“후우··· 눈치가 빠른 놈이라서 괜히 걱정했네.”
언제 패닉에 빠졌냐는 듯, 활기를 띠는 덕아웃의 분위기에, 그는 고개를 숙이고,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벤치 한쪽에 앉았다.
방관자이자 동조자로서 지금까지 쭉 그래왔던 것처럼.
“이제 좀 확실하게 점수 내자. 한 점은 너무 아쉽잖아?”
“그래야지. Suck 쟤도 사실 그렇게 컨디션이 좋아 보이지는 않던데.”
그렇게 다시금 자신감을 되찾으며, 하얗게 질렸던 애스트로스에 핏기가 돌았을 때, 피에 실려, 독 또한 함께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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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들 이번이 처음이 아니네. 상습범이야.’
J.D. 데이비스가 내려간 뒤, 애스트로스 덕아웃을 훑었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저 새끼들의 사인 훔치기가, 단순히 이번 시리즈, 이번 경기에만 국한된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말이다.
왜냐고? 이것도 그냥 감이다.
반응이 너무 심하거든.
‘단순히 한, 두 번 한 정도라면, 저 정도로 기겁하지는 않았겠지. 저 정도로 안심하지도 않았을 거고.’
나한테 들켰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그런 게 아니라는 안도감. 그것으로 깨달았다.
얘들, 생각보다 조금 더 뒤가 구리구나. 저렇게나 극단적인 반응이 나올 정도로.
어쩌면··· 단순히 평범한 사인 훔치기 수준이 아닐지도 모르고.
‘뭐, 그건 사무국이 알아서 밝혀낼 거고.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쟤들이 미끼를 물었다는 거지.’
어째서 안도했을까?
그건 내가 사인 훔치기를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안도감에는 미약한 기쁨이 섞여 있었다. 얼굴에는 다시금 자신감이 깃들었고.
일부러 기존의 사인을 고수했더니, 거기에 홀라당 넘어가서, 제대로 낚였네.
‘이제부터가 중요하겠어.’
나는 브루스를 봤다.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 다행히 눈빛을 보아, 똑똑히 기억하고 있나보네.
스콧 에머슨, 그리고 밥 멜빈 감독과 상의하여, 간략하게 패턴을 새로 만들었다.
‘다른 사인과 섞는다면, 금방 알아차리겠지. 사인이 다르니까.’
하지만 기존의 동작에 살짝 다른 행동을 추가하는 정도라면,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겠지.
그것을 이용해서, 애스트로스를 조지는 것. 그게 오늘의 목표였다.
‘일단 판은 깔았으니, 이제부터는 줄다리기를 잘해야겠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다음타자에게 집중했다. 7번타자 데릭 피셔.
선구안이 좋지. 컨택은 조금 못하지만. 파워도 제법 준수하고. 전형적인 OPS히터라고 해야 하나?
녀석은 꽤나 도발적인 시선을 했다. 아주 자신감이 대단하셔?
“스트라이크!”
초구는 낮은 투심 패스트볼.
아슬아슬한 코스였는데, 스트라이크가 선언되자, 약간 눈썹이 흔들렸다.
선구안이 좋다더니. 다른 거에 시선이 팔려서, 스트라이크존도 제대로 파악 못 했네.
오늘 주심은 바깥쪽은 짠 대신, 높낮이는 후하게 잡아주고 있는데 말이야.
“파울!”
곧이어 2구. 몸쪽으로 쭉 너클 커브를 집어넣자, 아슬아슬하게 커트했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래, 알고 있었겠지.
다만 공 자체가 위력이 좋고, 무브먼트가 가파른 탓에, 간신히 커트하는 정도로 그쳤네.
“스트라이크 아웃!”
마지막 공은 서클 체인지업.
‘이 아니라, 포심.’
눈앞으로 날아온 하이 패스트볼에, 타자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헛스윙했다.
꼴사나운 헛스윙 삼구삼진.
‘알쏭달쏭하지? 분명 초구랑 2구는 정확했는데.’
아주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네, 지진이 일어났어. 표정 관리 좀 해라.
‘위험한 짓을 하면서, 표정관리도 못하면 쓰나.’
고개를 갸웃거린 데릭 피셔는 타석에서 물러나,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이제 투아웃. 8번타자 후안 센테노는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타석에 올랐다.
아마도 데릭 피셔에게 무언가 전해들은 거겠지. 이상하다거나, 의심스럽다거나.
“볼!”
“아웃!”
나는 손수 그 의혹을 풀어줬다. 그대로 기존의 사인을 유지했으니까. 알아서 땅볼로 물러나네.
‘자, 너도 가서 니 친구들한테 전해. 사인은 여전히 똑같은 것 같다고 말이야.’
한 집단의 사람들에게 서로 각기 다른 정보를 쥐여준다면 어떻게 될까? 정답은 바로 대혼돈이다.
누구는 맞다고 하는데, 누구는 틀리다고 하면, 어떻게 판단을 내릴 수가 있겠어?
만약 진실을 가려내고, 그 모든 혼란을 휘어잡아줄 유능한 리더가 있다면 금장 진정되겠지만···
글쎄, 어차피 뒤가 구린 짓 하고 있는데, 그런 것까지 떠맡을 놈이 애스트로스에 있을까?
‘뭐, 두고 보면 알겠지.’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만약 혼란을 진정시키지 못할 경우, 애스트로스는 내 손에 뒤진다는 거였다.
‘X같은 방법 썼으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지, 안 그래?’
그것으로 쓰리아웃, 이닝 종료. 이번 경기 첫 삼자범퇴에 이전 이닝까지만 하더라도 흥분에 휩싸였던 미닛메이드 파크가 조금 조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