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경기가 끝난 뒤, 부모님은 조금 더 머무시다가, 로열스 시리즈가 끝난 뒤, 휴식일에 한국으로 돌아가셨다.
마지막은 그래도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다행이네.
“잘 살고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우리 아들이 얼마나 팬이 많은지도 잘 봤고. 그래도 항상 건강이 최고인 거 알지?”
떠나기 전, 엄마와 아빠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보였다. 아들내미가 잘나가는 걸 두 눈으로 제대로 본 덕분이겠지.
‘뿌듯하네.’
나도 나름대로, 두 분께 좋은 구경시켜 드릴 수 있어서 기쁘고. 300삼진 못했으면 얼마나 아쉬웠겠어?
“원정 간다며? 우리 이제 들어가야 하니까, 너도 슬슬 가봐. 그러다 비행기 놓칠라.”
“나 정도쯤 되면 놓고 가다가도 다시 태우러 유턴하니까, 걱정 하지 마.”
“말은 잘해.”
그렇게 두 분을 배웅한 뒤, 나는 다시 콜리시엄으로 돌아갔다.
300삼진도 했고, 부모님 앞에서 멋진 모습도 보여줬지만. 아직 시즌은 한참 더 남았으니까.
이미 차고 넘치는 성적을 올렸더라도, 만족하게 멈추는 게 아니라,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지.
그렇게 부모님을 배웅한 뒤, 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 휴스턴 행 비행기에 올랐다.
“부모님은 잘 배웅해드렸어?”
“어, 웃는 얼굴로 보내고 왔지. 잘 하는 거 보니까, 마음이 놓이신 것 같더라.”
“다행이네. 가족이 멀리 있으면 참 힘들단 말이야. 나도 부모님은 앨리버마에 계신데, South Korea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멀어서 뵐 때마다 힘들어.”
왠지 마음에 적적했는데, 브루스는 그걸 딱 캐치한 건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앨리버마라. 오클랜드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긴 하네.
미국은 워낙 땅덩이가 넓어서, 같은 나라 안이더라도, 거리가 상당하니, 자주 보기 힘들기는 하겠어.
“근데 너 독일인 아니었냐? 국적이 그렇던데, 부모님이 앨리버마에 계서? 가족 다 같이 이민 온 거야?”
“어? 이민? 내가? 그게 무슨- 아~ 그거?”
내 말에 브루스는 뭔 개소리냐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군인이셨거든, 독일 미군기지에 주둔하셨을 때 엄마도 같이 갔는데, 거기서 태어났어. 복무기간 마친 뒤에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고. 근데 Suck 너 설마 지금까지 몰랐어?”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니가 말해준 것도 아닌데. 그냥 영어 좀 잘하는 독일인이구나, 생각했지.”
어쩐지. 메이저리그에 독일인이 있어서 좀 신기하다 했다. 거기 땅만 잠깐 밟은 미국놈이었구만. 동료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았군.
“배터리라는 녀석이 이렇게 관심이 없어야··· 공 잡아준 보람이 없네.”
그 동료는 설마 그것도 몰랐냐며 황당한 웃음을 짓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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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텍사스.
상상만 해도 지옥이다.
특히 휴스턴은 바다와 가깝기에 습도까지 제법 있어서, 아주 죽여주지.
오클랜드의 경우 캘리포니아 이긴 하지만, 여름에도 적당한 기후를 자랑하는 곳이기에. 체감이 더 심하네.
“이번에 따라잡아야지? 세 게임차만 줄여도 금방이야.”
“격차가 좀 나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몰라! 한 달 반이나 남았는데. 얘 등판일은 일단 승리 보장이니까. 앞에 두 경기만 잘 잡자!”
그토록 무더운 휴스턴에 도착한 뒤, 안 그래도 더운데, 선수들은 의지까지 불태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제법 중요한 시리즈거든.
이번 시리즈 상대인 휴스턴 애스트로스는 현재 서부지구 1위를 달리고 있다. 우리는 바로 뒤의 2위지.
‘1,2위라곤 해도, 게임차가 좀 나지만. 아예 못 따라잡을 정도는 아니지.’
지금 딱 열 게임차가 나니, 조금 버겁기는 하겠지만, 만약 이번 3연전에서 바짝 쫓아간다면, 막판 역전의 가능성이 생긴다.
그러니 의지를 불태울 수밖에. 포스트시즌 티켓으로는 와일드카드도 있지만, 기왕이면 지구우승이 더 안전하잖아?
‘저쪽 입장에서도 지구우승을 확실하게 굳히고 싶다면, 이번 시리즈를 무조건 잡아야 할 거고.’
마찬가지로 애스트로스 입장에서도 우리의 추격을 완전히 떼어놓을 적기인 만큼, 꽤나 중요하게 보고 있고 말이다.
“오클랜드 정도는 가볍게 찍어 눌러버려야지”
“이번 기회에 지구우승 못을 박자!”
홈팬들 역시 그걸 잘 알기에 미닛메이드 파크에는 제법 열기가 감돌았다. 그리고 이어진 1차전.
“나이스~~”
“뛰어! 홈까지 쭉 뛰어!”
“그렇지! 오클랜드는 우리 상대가 아니다 이거야! 오늘도 무난하게 이기자!”
게임차를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 무색하게도, 깔끔하게 패배했다.
“아··· 오늘 이상하게 잘 맞네.”
“올해 쟤들 타격감이 좋긴 하잖아?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뭔가 좀··· 하아.”
선발투수로 나갔던 션 마네아가 휴스턴 타선에 털리며 무너졌고, 타자들은 역전해내지 못했다.
그리고 이어진 2차전 또한 그리 분위기가 다르지는 않았고 말이다.
“또 맞네.”
“쟤들 진짜 삼진 더럽게 안 당한다. 어떻게든 공을 때리네.”
“한창 잘 나가고 있잖아. 타격감 좋으니까, 자신감 있게 휘두르는 거지.”
2차전 선발투수로 나간 켄달 그레이브맨 역시 휴스턴의 난타에 무너졌고, 1차전과 마찬가지로 스무스하게 패배했다.
‘사실상 끝이네. 휴스턴이 제발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 이상은.’
시리즈 2패, 루징 시리즈가 확정되면서, 지구우승 경쟁은 사실상 끝났다.
우리가 갑자기 엄청나게 연승을 달리고, 휴스턴이 몇 경기 망치지 않는 이상, 역전은 불가능할 테니까.
“오늘만 이겼어도, 위닝 시리즈는 됐을 텐데···”
“우리도 올해는 느낌이 괜찮은 거 같은데. 하필 쟤들이 같이 미쳐서···”
“슬슬 와일드카드도 좀 간당간당하지 않나?”
의지를 불태운 것이 무색하게도, 가볍게 패배해서 그런지, 선수들은 축 늘어졌다.
‘지난 시리즈 마지막에도 졌으니까, 이제 3연패.’
별로 좋은 징조는 아니야. 연패 중인데, 지구우승 가능성이 꺾이면서 선수단의 사기마저 떨어졌으니까.
자칫 이대로 연패가 쭉 이어질 수도 있겠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한번 분위기를 타기 시작하면, 그 흐름은 쉽게 깨지지 않으니까.
“마지막에는 Suck 얘가 나오는 게 그나마 다행이네.”
“Suck, 쟤들 기가 너무 살았는데, 내일 니가 아주 반쯤 죽여 버려.”
그나마 우리 팀에 다행인 게 있다면, 시리즈 마지막 경기에 내가 나간다는 것. 다만···
‘묘~하게 잘 친단 말이야. 다른 사람들 말처럼 삼진도 잘 안 당하고.’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타격이었다.
대량실점까지는 아니지만, 션 마네아와 켄달 그레이브맨이 허무하게 털렸다. 너무나도 손쉽게.
이번 시즌 가장 잘나가는 팀이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니 타격감이 좋은 거야 당연하겠지만···
‘우리 홈에서 붙었을 때랑 살짝 느낌이 달라. 왠지 조금 묘하단 말이야.’
분명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확실한 건 마운드에 올라, 직접 상대해 봐야 알 수 있겠지만, 별로 촉이 좋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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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스볼~”
다음날, 위밍업 후 불펜피칭에서 최대한 집중을 올렸다.
연패를 끊고, 안 좋은 흐름을 잘라내야 했으니까.
“Go 아무래도 저쪽에서 분석을 제대로 한 것 같으니까, 오늘은 저번처럼 삼진을 노리기보다는, 조심해서 피칭해.”
“네, 안 그래도 켄달이랑 션도 비슷하게 말하더라고요. 잘 노리고 친다고. 최대한 신중하게 던져 볼게요.”
지난 경기에서 허무하게 패배한 것 때문인지, 스콧 에머슨은 신신당부를 했다.
아닌 말로, 지난 로열스전처럼, 집요하게 삼진만 노리다가는 별로 좋은 꼴을 못 보겠지.
“그래도 두 경기 망쳤으면, 타자들도 힘을 낼 때가 됐으니까. 오늘 깔끔하게 20승 올리자. 솔직히 이건 별거 아니잖아? 지금까지 Go 네가 한 거에 비하면.”
곧 등판할 투수에게 너무 긴장만 줬다고 생각한 건지, 스콧 에머슨은 그렇게 너스레를 떨었다.
20승이라. 벌써 그렇게 됐던가? 20승, 스콧 에머슨의 말처럼 솔직히 이제까지 내가 해온 것과 비교하면 대단한 기록은 아니다.
300탈삼진에, 0점대 ERA에, 53.1이닝 연속 무실점 등등.
역사적인 기록들과 비교하면, 그보다는 조금 흔하니까.
그래도 의미가 없지는 않지. 세이버메트릭스의 대두로 예전보다 승수의 가치가 많이 떨어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기록이니까.
“뭐, 타자들이 못하더라도, 1점만 내주면 20승이야 쉽기는 하죠. 완봉하면 되니까.”
“꿈도 꾸지마.”
“조크, 조크. 저스트 조크.”
이 사람은 농담을 모르네. 완봉하겠다고 하니, 바로 정색하는 것 좀 봐.
그런 소리는 농담으로라도 하지 말라는 듯이 노려보는 투수코치의 시선을 피해 다시 공을 던졌다.
“나이스볼~ 오늘 좋은데?”
적당히 무난하다는 뜻이다.
오늘 컨디션은 그냥저냥 딱 평범하게 좋은 정도. 사실 이 정도만 유지돼도 감지덕지지.
지난 경기, 삼진 잡느라고 조금 빡세게 던졌는데, 다행히 크게 오버페이스한 건 아닌가보다.
“오~ 오늘은 진짜 좀 힘을 내나 본데?”
“말이 씨가 된다더니. 코치 말처럼 두 경기 망치니까, 그래도 좀 점수를 내네요.”
그렇게 불펜피칭이 한창일 때, 1회 초, 우리가 먼저 선취점을 올렸다. 이후 추가득점까지 성공하며 2득점. 졸지에 스콧 에머슨의 예언이 적중해버렸구만.
‘스윕 당하기는 싫나보네.’
화면으로도 전해질 만큼, 아주 필사적인 의지가 감돌았는데. 스윕패 만큼은 어떻게든 면하겠다는 결심이 절절하게 전해졌다.
다들 저렇게나 간절한데, 나도 잘 던져줘야 맞겠지.
“가죠.”
그 이상의 득점은 내지 못한 채, 2대0의 점수로 1회 초가 마무리 됐다. 이제 내 시간이 왔다는 뜻이지.
“슬슬 좀 터지는 것 같으니까, 무리하지 말고, 무난하게 가자, 무난하게.”
스콧 에머슨의 마지막 당부를 끝으로 불펜의 문이 열렸고, 나는 천천히 마운드로 향하며, 상대팀 덕아웃을 훑었다.
‘확실히 느낌이 좀 이상해.’
마찬가지로 흘끔흘끔, 아니면 그냥 대놓고 나를 보는 애스트로스 타자들.
그들의 표정은 꽤나 당당했다. 자신감이 넘쳤고. 약간의 의욕도 느껴지네.
압도적인 지구 1위를 달리고 있으니, 그 자신감이 오죽할까 싶기도 하지만, 조금 묘하긴 했다.
‘긴장감이 적어.’
솔직히 지금 나는 상대하는 입장에서 긴장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는 선수다.
그렇잖아? 300탈삼진에 0점대 ERA에. 괴물도 이런 괴물이 없지.
하지만 지금 애스트로스 타자들은 긴장감보다는 자신감이 조금 더 느껴졌다. 이건 절대로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다.
‘저 자신감에 근거가 있다면··· 오늘은 좀 빡세겠어.’
스콧 에머슨의 당부를 단단히 되새긴 채, 마운드에 올랐다.
“브루스, 오늘은 좀 까다롭게 가자. 바깥쪽 위주로.”
“그래? 하긴. 어제도, 그제도. 진짜 잘 때리던데. 아무리 Suck 너라도 좀 조심해야 하긴 하지. 오케이, 잘 잡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오늘도 파트너는 브루스 맥스웰. 포수이기에 가장 가까운 곳에서 먼저 상대해 본 만큼, 녀석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브루스를 내려보낸 뒤, 천천히 영점을 잡았고, 마지막 점검까지 끝났을 때.
“플레이볼!”
경기는 시작됐다.
1번타자는 조지 스프링어.
3할 타율 28홈런 OPS 9할.
더 말할 것도 없는 성적을 올리고 있다.
MVP급 성적을 올리고 있는 호세 알투베와 함께 막강한 애스트로스 타선의 중심을 담당하고 있고.
배트를 흐느적거리며 타석에 들어온 그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타격폼을 취했다.
던지는 순간 무조건 날릴 거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컨택이 좋은데다가, 파워도 준수해서, 잘못 맞으면 골로 가겠지.’
그러니 일단은 간을 보자.
“볼!”
초구 포심 패스트볼.
바깥쪽으로 하나쯤 걸치도록 던졌지만, 주심은 볼을 선언했다. 저것보다 더 안쪽으로 던져야 한다니. 존이 좀 짜구만. 안 그래도 상대팀 타격감이 좋은데 말이야.
“스트라이크!”
2구는 다시 포심 패스트볼.
초구보다는 낮게, 그리고 조금 더 안으로 던졌다. 이번엔 스트라이크.
‘그래도 아래는 좀 더 후하게 쳐주네.’
바깥쪽이 짠 대신, 밑으로는 좀 더 길다. 그나마 다행이구만. 좁은데 길이마저 짧았다면 진짜 X같았을 테니까.
‘그나저나··· 제대로 골랐어.’
선구안이 제법 좋은 타자인데. 미동조차 않고 공을 골라냈다. 뭔가 노리는 게 있는 건가? 한번 스윙이 나올 타이밍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곧바로 3구. 이번에도 바깥쪽이었지만, 전보다는 조금 더 넣었다. 한번 휘두를 만한 코스지.
“볼!”
허나 이번에도 조지 스프링어는 참았고, 서클 체인지업은 유려하게 꺾이며 존 밖으로 나갔다. 거참 까다롭게 구시네.
‘확실하게 노리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 건가? 아니면 투구수를 끌어보려고? 리드오프로서.’
어느 쪽이든 제대로 확인해보자. 4구 다시 포심 패스트볼. 이번엔 몸쪽. 과감하게 넣었다.
그러자 언제 미동도 없었냐는 듯, 조지 스프링어 역시 곧바로 배트를 휘둘렀다.
패스트볼 타이밍을 정확하게 맞춘 스윙. 따악-하는 소리를 내며 타구가 날아갔다.
“세이프.”
“나이스샷! 조지 오늘 좋네!”
“Go 저 새끼, 오늘은 제대로 조져보자고!”
유격수를 넘기는 깔끔한 안타. 몸쪽 공을 노리고 있었던 건가?
그래도 체인지업 뒤에 바로 던졌고, 또 갑자기 몸쪽이었으니, 제법 까다로울만 할 텐데도, 아주 정확하게 공략했다.
‘시작부터 좀 짜증나게 됐네.’
단타로 끝난 게 다행이긴 하지만, 별로 좋지는 않았다.
주자를 둔 채로 상대하기에는 별로 좋지 않은 타자들이 뒤로 줄줄이 있었으니까.
먼저 2번타자 알렉스 브레그먼. 2할 7푼의 타율에 8할 4푼의 OPS를 기록 중이다.
그럭저럭 준수한 성적이지.
‘얜 어떻게든 잡아야 돼.’
일단 무조건 잡아야 한다.
안 그러면 조금 많이 빡셀 테니까. 다음에 나올 양반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서 말이야.
“스트라이크!”
그러니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잡아야겠지. 초구는 포심 패스트볼. 이번엔 처음부터 몸쪽으로 넣었다. 최대한의 힘을 담아서.
그러자 시원스럽게 헛도는 배트. 노리고 있던 코스가 아닌 건가?
“볼.”
2구는 너클 커브. 바깥쪽에서 날아와, 살짝 스트라이크존을 긁으면서 뚝 떨어졌는데. 딱 골라냈다.
“파울!”
3구는 투심 패스트볼.
한번 땅볼을 유도해보려고 했는데, 파울라인 밖으로 쳐냈다. 이제 투 스트라이크.
“아웃!”
마지막 4구는 서클 체인지업.
다시금 스윙이 나왔지만, 조금 더 꺾인 공이 빗맞으면서 뜬공이 됐다.
‘일단 아웃 하나.’
추가 출루는 막았다. 아쉽게도 병살유도는 실패했지만···
‘저 양반 앞에 주자 더 안 쌓은 게 어디야?’
아쉬운 듯 혀를 날름거리며 물러난 알렉스 브레그먼을 뒤이어 올라온 타자.
3번타자 호세 알투베.
말했다시피, 올해 MVP도 한번 노려볼 만한 성적을 기록 중이다. 물론 내가 없었다면.
나는 투수고, 저 양반은 타자라 저쪽이 더 유리하긴 하지만, 나 같은 성적 찍으면 그것도 무의미하지.
‘눈빛이 대단하시네.’
그는 아주 극도로 집중한 듯, 사나운 눈빛을 했다. 어떻게든 나한테 한방 먹여주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무섭다 무서워.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애스트로스 정도면 나한테 많이 당하지도 않았구만. 너무하네.
“파울!”
타격감 역시 그런 의지만큼이나 좋은 걸까? 초구로 너클 커브를 던졌는데도, 빠르게 스윙하며 커트했다.
“볼.”
곧이어 2구. 서클 체인지업은 미동도 없이 가만히 지켜봤다. 뚝 떨어졌는데, 저걸 그냥 보네.
‘뭔가 좀···’
쎄하단 말이야.
왠지 모를 감각이 뒷목을 스쳤지만, 애써 털어냈다. 집중하자, 집중.
‘일단 잡고 나서 생각한다.’
3구째 포심 패스트볼.
호세 알투베의 턱과 거의 비슷한 높이로 공이 쏘아졌다. 하이 패스트볼.
위치를 확인한 즉시 그는 타격 동작을 가져갔고-
‘아, X발.’
스윗스팟에 맞은 건지, 툭 밀어쳤는데도 타구는 직선으로 쭉 뻗으며, 욱익수를 넘어, 펜스까지 날아갔다. 큼직한 한방.
“뛰어! 뛰어!”
미닛메이드 파크는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껄끄러운 투수놈에게 시작부터 한방 먹일 기회였으니까.
우익수 채드 핀더가 황급히 뛰어가며, 타구를 잡았지만, 그때 조지 스프링어는 이미 2루를 훌쩍 지나쳤다.
주루 센스가 아쉽다는 평이 많은 조지 스프링어지만. 지금은 그저 달리기만 하면 되는 찬스였기에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쭉 달렸고.
“세이프!”
채드 핀드의 송구보다 조금 더 빠르게 홈 베이스를 밟았다. 1타점 적시 2루타. 한방 제대로 맞았네.
“이예에에에에에!”
“이거지! Suck? 별거 아니야! 우린 미래의 우승팀이라고!”
“300삼진 잡으면 뭐하냐! 우리한텐 얻어터질 텐데!”
아주 시원한 함성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를 향한 조롱도 들려왔고. 아주 좋아 죽네, 좋아 죽어.
“한점 더 내자!”
“쟤 루키치고 너무 혹사당하던데, 오늘은 바로 내려보내 주자고!”
거기다 원아웃에 주자 2루로, 찬스가 계속되고 있었으니. 이대로 동점까지 만들기를 바랐지만.
“아웃!”
“아웃!”
아쉽겠지만, 그건 안 돼지. 한 경기 당 1점도 잘 안 주는 투수한테 한 이닝만에 점수 땄으면 그걸로 만족하슈.
뒤이어 4번타자 조시 레딕과 5번타자 마윈 곤잘레스를 범타로 처리하며, 위기를 넘겼지만.
‘역시 느낌이 이상해. 뭔가가 있어, 분명히.’
의심은 조금 더 덩치를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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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
“아웃!”
시작부터 얻어맞은 1회 말과 달리, 2회 말은 비교적 수월하게 마무리했다.
“세이프!”
“아웃!”
8번타자, 후안 센테노에게 다시금 안타를 허용하긴 했지만. 타자들은 꽤나 적극적으로 타격한 것이 무색하게도 범타로 물러났다.
“Suck 오늘 컨디션이 좀 안 좋아?”
“아니, 그냥저냥 평범한데. 이상하게 좀 맞네.”
삼자범퇴가 아니긴 해도, 그럭저럭 잘 막기는 했는데. 느낌은 여전히 별로 좋지 않았다.
‘삼진을 안 당한다고 하더니. 무슨 느낌인지 알겠네. 타자들이 기를 쓰고 치고 있어.’
1위팀 다운 공격적인 타격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잘 노린다고 해야 하나? 분석을 제대로 한 것 같다고 하더니···’
“브루스, 오늘은 타석에서도 좀 잘해주라. 타격지원이 좀 필요하겠어.”
“그 정도야? 일단은 알았어. 내가 힘 좀 내볼게.”
아무래도 실점 하나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아, 그렇게 부탁했지만,
“아웃!”
3회 초의 공격은 깔끔하게 끝났다. 그래, 어째 처음부터 점수를 낸다 했다. 그 뒤로 줄줄이 잡히고 있네.
‘믿을 놈을 믿어야지.’
역시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바라면 안 된다. 내 스스로 해내야지. 믿을 건 왼팔 뿐이구만.
그렇게 다시 3회 말.
한 타순이 돌아 다시 1번타자부터다.
‘자신감이 만땅이시구만.’
안 그래도 좋았는데, 지난 타석에서 안타를 치고, 득점까지 했으니, 오죽하겠어?
조지 스프링어는 개선장군 같은 걸음걸이로 타석에 들어왔다.
‘조금 테스트를 해봐야겠어.’
그를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지금 내 몸을 사로잡은 찝찝한 감각부터 해치워야겠지.
“볼!”
초구는 서클 체인지업. 바깥쪽으로 뺐는데, 조지 스프링어는 얌전히 지켜보기만 했다.
“볼!”
“스트라이크!”
곧바로 연달아서 몸쪽으로 훅 들어가는 포심과 그리고 바깥쪽으로 낮은 커터를 던졌는데. 역시나 이번에도 가만히 지켜만 봤다.
“파울!”
4구는 다시 바깥쪽으로 포심. 조금 더 들어온 코스에 배트가 벼락처럼 휘둘러졌지만, 결과는 파울. 이제 다시 투 앤 투.
“스트라이크 아웃!”
마지막 5구를 타자는 가만히 지켜만 봤다. 백도어성 슬라이더. 마지막 아슬아슬하게 보더라인에 걸치면서, 루킹 삼진을 만들었다.
3이닝 만에 간신히 삼진 하나 잡았네. 이미 300개나 잡았는데 말이야.
‘대충 감이 오네.’
겨우 삼진 하나이지만, 그 덕에 감은 잡혔다. 확실한 것까진 아니지만. 대충 뭔지는 알겠어.
“세이프!”
곧이어 2번타자 알렉스 브레그먼. 그는 초구로 던진 서클 체인지업을 정확하게 쳐내며 안타를 만들었다.
“베이스 온 볼!”
이후 3번타자 호세 알투베는 볼넷을 골라내며, 주자 1,2루를 만들었고.
“한방 가자!”
“레딕! 친정팀이라고 봐주지 말고, 홈런 시원하게 날려버려!”
다시금 먹음직스러운 찬스가 만들어지자, 홈팬들은 힘껏 응원하며 소리쳤고.
“Suck 뭐하냐!”
“부모님 만났다고 정신이 해이해진 건 아니지? 제대로 해!”
“삼진으로 조져, 삼진으로! 오늘 갑자기 왜 이래!”
반대로 오늘도 나를 따라왔던 우리 레이더스들은 아주 신명나게 질책했다. 거, 한 경기 좀 얻어맞는다고 너무들 하시네.
삼진을 극도로 좋아하는 양반들이니, 얻어맞는 것도 모자라, 삼진도 못 잡는 것이 짜증스러웠던 것 같은데.
“스트라이크 아웃!”
그런 팬들을 달래주기 위해서, 일단 조시 레딕을 제물로 삼아 잠시 분위기를 잠재웠다.
묵직한 하이 패스트볼에 그는 아슬아슬하게 헛치면서 삼진을 기록했고.
“간다! 간다!”
“넘어가! 넘어가버려!”
곧이어 마윈 곤잘레스가 쓰리핑거 체인지업을 정확하게 타격하며 큼직한 장타를 만들었지만, 펜스 앞에서 잡혔다.
그것으로 3회 말 종료.
‘식겁했네. 까딱하면 넘어갔겠어.’
그래도 그 덕분에 확실하게 알게 됐다. 오늘 경기 휴스턴 애스트로스가 숨기고 있는 비밀병기를.
오늘 그들은 단순히 타격감이 좋은 수준이 아니었다. 뭘 던질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는 것 같았으니까.
‘구질을 정확하게 구분하고 있어. 패스트볼, 브레이킹볼, 오프스피드. 셋 다.’
투수란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는 직업이다. 100마일의 강속구를 던질 수 있어도. 나처럼 엄청난 브레이킹볼이 있어도. 결구 그게 본질이지.
그러니 이 정도만 구분하고, 파악할 수 있더라도, 승부는 타자에게 극도로 유리해진다.
그런데 오늘 애스트로스 타자들은 그걸 실천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높은 성공률로.
심지어 기습적으로 던진 쓰리핑거 같은 것도 정확하게 골라보며 맞출 정도지.
‘대충 짐작은 가네.’
마지막 확인을 위해. 함께 덕아웃으로 돌아와, 끙끙거리면서 포수 장비를 벗던 브루스에게 다가갔다.
“브루스, 혹시 나 습관 같은 거라도 있냐?”
“습관?”
“잘 생각해봐. 이상한 행동이라거나 표정이라거나 그런 것들 전부 다.”
수싸움 이외에 투수의 구종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보통 둘 중 하나다.
첫 번째는 습관. 한국에서는 종종 쿠세라고 부르기도 한다.
구종마다 글러브 벌리는 게 다르다거나. 어떤 구종을 던질 때 어떠한 행동을 취한다거나. 알게 모르게 하는 행동을 뜻하는 건데.
조금 심한 경우에는 표정에서 훤히 드러나기도 하지.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던가. 입을 삐죽거린다던가.
‘혹시 모르지, 나한테도 숨겨진 쿠세 같은 게 있고, 그걸 애스트로스가 알아챘을 지도.’
전략분석에 가장 적극적인 팀 중 하나이니, 나도 모르던 습관을 발견한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구종이 워낙 많다 보니, 쿠세가 생기기 쉽기도 하니까.
만약 나한테 습관이 있다면, 직접 공을 받는 포수도 뭔가 집히는 게 있을 터.
그런 의미에서 묻자, 내 진지한 표정에 단순히 농담 정도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듯, 브루스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어. 전혀. 집히는 것도 없고, 딱히 행동하는 것도 없고. 그냥 다 똑같아. 뭘 던지던지. 코치도 똑같이 말할걸?”
그래, 그렇겠지.
우리 전력분석팀이나 스카우트팀도 놀고 있지는 않을 거고. 투수코치 스콧 에머슨도 무능한 사람은 아니니. 분명 무언가 확실한 습관이 있었다면, 이미 알아차렸을 거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하나.
“저 새끼들, 야구 참 재밌게 하네.”
“응? 갑자기 뭔 소리야?”
뜬금없는 말에 브루스는 눈썹을 씰룩거렸다. 이해가 안 된다는 것처럼.
물론 쟤들이 게스히팅을 쩔어주게 잘 하는 걸 수도 있지.
뭐, 좋은 일을 했다거나, 거금을 기부했다거나 해서, 행운의 여신이 가호를 내렸다면 말이야.
혹은 정말 아무도 모를 수밖에 없는 습관을 찾아낸 걸 수도 있다.
집요하게 내 피칭을 분석해서, 정말 미세하기 그지없는 습관을 찾아내고. 그걸 또 타자들이 능숙하게 이용한 거지.
허나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야···
“브루스, 쟤들 사인 훔친다.”
사인 훔치기.
이거밖에 안 떠오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