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남은 삼진 다섯 개. 이제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기록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니들 알지? 눈치 챙겨라!”
“Go! 더 끌지 말고 바로 가자! 시원하게 잡아버려!”
경기장은 시끄러웠다.
흥분을 참지 못한 홈 관중들이, 뜨거운 혈기를 토해내며, 경기장 전체를 달궜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제물로 지목된 희생양의 심정은 어떨까? 간단하다.
“X같네.”
아주 X같지.
타석으로 나가기 전.
알렉스 고든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다른 선수들은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무언으로 동의했다.
오늘이 첫 만남이다.
애슬레틱스야, 시즌 초반에 한번 맞붙었지만, 저 투수는 이번 경기가 처음이지.
저 미친놈에게 대준 놈들은 따로 있건만. 그런데 정작 300삼진을 당하는 건, 그걸 채워주는 건 우리라니.
조금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그래도 슬슬 하나씩 맞고 있잖아? 초반부터 무리해서, 슬슬 체력이 떨어지는 거야.”
그런 타자들을 위로하듯.
타격코치는 애써 긍정적으로 말했고, 그것이 그저 위로라는 것을 알면서도, 타자들은 애써 정신을 놓지 않았다.
비록 주축이 많이 빠졌다고는 하나. 당장 재작년 월드시리즈를 차지한 만큼. 로열스에는 아직 위닝 멘털리티가 남아 있었으니까.
“커맨드가 약간씩 어긋나던데. 공을 보면서 길게 가보자.”
“삼진에 집착하느라 막 던지던데. 투구수는 적어도, 어깨는 좀 부담될걸?”
“까짓거 삼진 좀 먹으면 어때? 우리도 한방 먹여주자고!”
그렇게 외치면서, 로열스는 다시금 공격에 나섰다.
6회 초, 선두타자는 8번 알렉스 고든. 요란한 분위기에 욕설을 뱉었던 그는 다시금 타석을 향해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아직 멀쩡하네.’
슬슬 지치고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 깨끗한 얼굴의 투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자신감 가득한 표정으로.
‘힘들겠구만. 그래도 일단 길게 보자.’
그는 저런 표정의 선수를 숱하게 봐왔다. 2년 전, 챔피언의 자리에 올라섰던 시절의 로열스 선수단에서 흔하게 볼 수 있던 모습이니까. 당장 알렉스 고든 그 자신도 그랬었고.
그렇기에 잘 알았다.
저런 모습을 한 선수가, 선수들이, 어떤 일을 만드는지. 무엇을 이뤄내는지.
스스로 정한 목표가 있다면, 기필코 그걸 해내지. 남들이 고개를 젓고, 우습게 여기는 일조차 말이야.
‘그래도 한번 해봐야지.’
그런 적을 상대하는 건, 정말이지 더럽게 힘든 일이겠지만, 어쩌겠는가? 한번 달려들어 보는 수밖에.
비록 타격에서 구단에 심한 민폐가 될 정도로 못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예 죽은 건 아니니까.
“볼!”
초구는 패스트볼.
묵직하게 날아온 것을 보아 포심이다. 몸쪽으로 깊숙이 넣었지만, 너무 깊었다.
‘약간의 미스. 원래는 의도적으로 버린 거겠지만. 지금은 조금 더 틈이 벌어졌어.’
오늘 정말로 완전무결하다시피 로열스를 때려잡은 투수지만. 딱 하나 빈틈이 있다면 커맨드다.
조금씩 어긋났지.
핀포인트라고 해도 무방한 괴악한 컨트롤을 자랑하는 투수치고는 말이야.
‘의도적으로 조절하는 거야.’
이유는 알고 있다.
만약 모든 타자들에게 그랬더라면, 문제가 있는 거겠지만.
고든 자신을 비롯한, 파워가 약한 타자들에게만 그렇게 던지고 있지.
‘어차피 힘이 없으니. 차라리 커맨드를 조금 내려놓더라도. 힘으로 찍어 누르겠다는 건데.’
체력이 떨어지긴 했나보다.
이제 와서 위협구를 던질 리는 없으니, 이번의 볼은 투수의 통제를 조금 벗어났다는 뜻이다. 조금 더 틈이 열린 거지.
컨택이 떨어진 탓에 좋은 타구를 만들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아직 눈은 자신 있다.
“스트라이크!”
2구는 스트라이크.
이번엔 확실하게 넣었다.
살짝 낮기는 하지만.
‘시늉이라도 하자. 칠 것처럼. 안달 난 것처럼.’
첫 타석에서 확실하게 깨달았다. 지금 나는 저 투수에게 타격으로는 좋은 결과를 낼 수 없다는 것을. 기껏해야 땅볼 정도겠지.
하지만 아예 손을 놓아버린다면, 투수는 아주 손쉽게 삼진을 만들려고 할 거다. 그러니 뉘앙스라도 풍겨야지.
불같이 타격할 것이라고. 네가 바라는 삼진을 절대로 당하지 않고, 어떻게든 때려 맞추기라도 할 거라고, 녀석에게 어필하기 위해서.
“볼!”
3구는 다시 바깥쪽.
들어온 건지, 아닌 지는 중요하지 않다. 알렉스 고든은 스윙했지만, 진짜 타격을 위한 건 아니었다.
간신히 코스를 읽고 멈추는 것처럼, 중간에 멈췄고, 돌지 않았다고 판단한 주심은 살짝 나간 공에 볼을 선언했다.
“스트라이크!”
헛스윙이라며 어필할 만한데도. 포수는 그저 투수에게 공을 던져줬다. 그보다는 흐름을 끊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거겠지.
녀석은 곧이어 4구를 던졌고, 이번엔 시원하게 헛스윙했다. 서클 체인지업인가? 상관없다. 어차피 스윙이 목적이니까. 이제 투 앤 투.
‘참자, 참자. 5구까지 끌었으면, 삼진이라도 괜찮으니까. 꾹 참아!’
알렉스 고든은 몇 번이고 그렇게 되뇌며, 자신을 통제했고.
“볼!”
곧 날아온, 마지막일 것 같았던 5구는 타자라면 누구나 몸이 저절로 반응하는 코스였다.
이걸 정확하게 맞출 수만 있다면,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 경험을 통해 학습되니까.
하이 패스트볼.
컨택만 잘한다면 가볍게 밀어치는 것만으로 장타를 만들 수 있는 코스. 그럼에도 그는 극도의 절제력을 발휘하며 스윙을 참았다.
그것으로 투 스트라이크 쓰리볼. 판은 깔렸다. 이제 남은 건 투수의 의중뿐.
‘무조건 잡으려고 할 거야. 무조건. 이건 확실해.’
질질 끌지는 않겠지.
솔직하게 말하면. 알렉스 고든은 그렇게까지 긴 시간을 들여서 잡을 만큼 까다로운 상대가 아니니까.
그러니 이번에 무조건 승부를 내려고 할 거다. 그렇기에 관건은 딱 하나.
‘삼진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이, 그냥 안쪽으로 넣어서 잡으려고 할 건지···’
6구가 날아왔다.
특유의 디셉션 탓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거의 한복판이었다. 안타를 원한다면 당연히 스윙할 정도로.
앞서 하이 패스트볼보다 훨씬 더 먹음직스러운 곳이지.
그러나 아직은 모른다.
저 녀석의 주력구들은 하나 같이 무브먼트가 괴이하니까.
이렇게 확실하게 들어온 것 같더라도···
‘아니면 이번에도 내 헛스윙을 유도하고 삼진을 잡으려고 할 건지.’
지금처럼 나가기도 하지.
너클 커브. 거의 한복판으로 들어오던 공은 강하게 꺾였다. 살짝은 미묘한 코스.
어쩌면 간파하고 존안으로 넣으려고 했을 지도 모르지만, 공은 애매하게 나갔다.
“볼! 베이스 온 볼!”
그것에 주심은 볼을 선언했다. 지금까지 대부분 그렇게 콜했으니, 논쟁의 여지는 없지.
그제야 가쁜 숨을 내쉬며, 알렉스 고든은 배트를 내려놓았다. 다행히, 행운이 이번에는 그의 손을 들어줬으니까.
“우우우우우우!”
“그게 어떻게 볼이야!”
“공 제대로 안 보냐! 스트라이크잖아, 스트라이크!”
격노하는 관중들을 뒤로한 채, 1루 베이스를 밟은 알렉스 고든은 덕아웃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리드 좀 늘릴 게요.”
허나 아직 끝난 건 아니다.
워낙 공이 묵직한 녀석이라. 먹힌 타구가 자주 나오기에. 자칫 저번 이닝처럼, 병살타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
그렇기에 알렉스 고든은 타석에서보다 더욱더 집중하며, 주루에 신경을 썼고.
곧이어 9번타자, 드류 부테라는 기습적으로 초구를 노렸을 때,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2루로 내달렸다.
‘무조건 땅볼이야. 무조건. 어떻게든 나라도 살아야 한다.’
아주 오만 지랄을 다 떨어가며, 기껏 볼넷을 만들었는데. 더블플레이라도 당한다면, 너무 억울하잖은가?
그렇기에 재빨리 2루로 쇄도했고, 그런 집중력이 그를 살렸다.
“아웃!”
타구를 잡은 3루수는 이미 늦었다고 판단한 듯, 더블플레이 대신, 안전한 1루 송구를 택했으니까.
‘됐다.’
그렇게 2루에 안착. 그 순간 알렉스 고든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됐어···!”
이제부터 다시 상위타선.
그럭저럭 파워도 있고, 컨택도 좋다. 거기다 이제 세 번째 타석이니 타격감도 조금은 올라왔겠지. 투수에게 적응도 했을 테고.
또한 투수 역시 이제는 슬슬 체력이 떨어졌으니. 잘만 한다면, 한방을 먹여줄 수 있다.
자신이 그 발판을 만든 거고.
그렇기에 입술을 꽉 깨물며 기뻐한 알렉스 고든이었지만, 곧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뒤흔들었다.
“뭐 하러 그렇게 기를 써서 달려. 다 늙어빠진 녀석이.”
제드 라우리.
오클랜드의 2루수.
녀석의 말에 알렉스 고든은 피식 웃었다. 괜히 심술이라도 부리는 건가?
같은 해에 태어나, 생일도 두 달 차이인 주제에 나이타령이라니. 조금 우스웠다.
“제드, 너는 늙었을지 모르지만. 난 아직 쌩쌩해서 말이야.”
“그러니까, 그 쌩쌩한 힘 다른 곳에 쓰지, 그러냐. 괜한 기대 하지 말고.”
“뭐?”
그냥 트래시 토크로 속이나 긁으려는 줄 알았는데. 조금 뉘앙스가 이상했다.
그 순간, 정면에 보이던 투수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짧게 고개를 끄덕인 투수는.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파울!”
“스트라이크 아웃!”
곧 미친 듯이 몰아쳤다. 두 번의 실수는 범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투구 속도에는 더욱더 가속이 붙으며, 마지막에 이르러선 거의 즉각적으로 공을 던지다시피 했고.
그런 파상공세 앞에서 3할에 미세하게 못 미치는 타율을 가졌던 위트 메리필드는 이번에도 삼진으로 물러났다.
그것으로 투아웃. 그리고 열한 번째 삼진.
“You Suck!”
“Four!”
카운트다운은 재개됐다.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아웃!”
“You Suck!”
“Three!”
눈 깜짝할 사이, 셋까지 내려왔고 말이다. 12K. 6회 초가 끝났다.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을 보며, 알렉스 고든은 깨달았다. 자신의 볼넷이 괴물을 자극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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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고든의 볼넷은 나에게 중요한 교훈을 줬다.
‘길게 끌수록 삼진은 힘들다. 확실하게 끝내야 돼.’
5회가 끝났을 때. 투구수는 넉넉했다. 잘만 조절하면 완투도 가능할 정도로.
그러니 조금 느긋하게 마음을 먹더라도, 삼진 다섯 개 정도는 충분히 올리고도 남겠지.
하지만 알렉스 고든의 볼넷으로 드러났다.
‘어쭙잖게 여유를 부르다가,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X되니까.’
오늘 컨디션이 좋기는 하지만, 최고라고 보기는 어렵지.
그러니 어느 정도 한계선을 넘은 뒤부터는 공의 위력이 훅 떨어질 텐데.
그땐 타자들이 작정하고 삼진을 피하려고 한다면, 조금 상황이 난감해지지.
그럴 바엔 차라리 멀쩡할 때 죄다 때려 붓는 게 낫겠지.
알렉스 고든, 먹튀라고 조금 만만하게 봤는데.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
“아웃!”
교훈을 곱씹는 사이, 6회 말 공격은 막을 내렸다. 추가득점은 없구만.
뭐, 상관없지. 이미 적당히 득점지원을 받기도 했고, 또 오늘은 그다지 승수가 중요하진 않았으니까.
“아쉽겠네, 잘 맞았는데, 이야~ 저걸 잡아?”
“그치? Suck 네가 봐도 잘 맞았지?”
“어, 라인드라이브였는데 살짝 낮아서 딱 잡혔네. 내가 대신 복수해줄 게. 삼진으로 잡자.”
“에이, 삼진은 어차피 당연한 거고. 기왕이면 아주 꼴사납게 헛스윙으로 잡아줘.”
3루수 직선타로 아웃당하고 돌아온 브루스는 내 말에 한 술을 더 떴다.
긴장했을까 싶어서 일부러 위로해줬더니. 다행히 멀쩡하구만. 아니, 오히려 약간 흥분한 것 같기도.
‘약빨이 생각보다 더 잘 먹힌 건가?’
역사에 남을 거라고 사발을 풀었던 게, 어쩌면 제대로 통한 것 같다. 이런 쪽으로 욕심이 있었구만.
잠시 기다린 뒤, 포수 장비를 모두 착용한 브루스와 함께 다시 덕아웃 문턱에 섰다.
‘말이 없으시네.’
잠깐 스콧 에머슨, 투수코치를 보니, 그 또한 나를 보면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6이닝 채우면, 은근슬쩍 교체를 제안하고는 하는데, 오늘은 차마 그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순간이잖아. 얼마나 맥 빠지겠어? 지금 교체되면. 기껏 12개나 채웠고, 목표까지 단 세 개만을 남겨놓고 있는데.
‘다음으로 미뤄서는 안 되지. 절대로.’
부모님 때문도 있지만, 다음 경기가 원정이라는 것도 이유다. 기왕이면 홈에서 하는 게 더 보기 좋잖아.
홈팬들이 보는 앞에서, 그리고 부모님이 보는 앞에서.
‘강판이라면 모를까. 내 발로 교체될 수는 없지.’
카운트다운은 여기서 끝낸다.
그 목표를 품은 채, 조용하게 그라운드로 나섰다.
경기장은 소란스럽다.
기록이긴 하지만, 퍼펙트 게임 같은 종류가 아니잖아?
“세 개! 세 개 남았어, 세 개!”
“이번 이닝에 끝내버리자!”
관중들은 거리낌 없이 목 놓아 소리쳤다. 남은 세 개를 채우라고.
부담스럽지는 않다.
이제 와서 뭐가 부담스럽겠어? 이미 다 왔는데.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거지.
‘타선은 좀 안 좋네.’
3-4-5.
타선은 클린업 트리오로 이어진다. 3번과 5번은 오늘 경기 안타를 기록했지.
그걸 감안하면, 조금 빡세다고 할 수도 있지만. 걱정은 없었다.
“공 받으면 그냥 바로 넘겨줘. 주심이 공 줄 때도 받자마자 던져주고. 그리고 바로 포구 준비해. 최대한 빠르게 간다.”
“롸져댓. 컨베이어 벨트처럼 움직입죠.”
당부를 남기고 홈 플레이트에 브루스를 남겨둔 뒤, 다시 마운드 위에 올랐다.
앞에 투수가 지 마음대로 더럽혀놨네. 기분 나쁘게. 여긴 우리 집인데, 손님이면 깨끗하게 쓸 것이지 말이야.
로열스 투수가 헤집어 놓은 마운드를 다시 차분하게 정돈한 뒤 자세를 잡자. 타자가 올라왔다.
‘기합이 빡 들어갔어.’
에릭 호스머, 오늘 세 번째 상대라서 그런가, 이제 좀 친숙해진 녀석은 딱딱한 얼굴을 했다.
아마도 지난 이닝에서 내가 갑자기 버닝하는 걸 보고 긴장감이 생겨난 거겠지.
그것이 안타를 치면서 생겨난 자신감을 어느 정도 억눌렀다.
딱 좋은 상태라고 할 수 있지만, 괜찮다.
“스트라이크!”
그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오히려 좀 차분하네. 뒷목이 후끈후끈하기는 한데. 나쁘지는 않아.
초구는 포심 패스트볼. 타자의 긴장감이 조금 더 짙어졌다. 아직도 쌩쌩한 거 보니까, 징글징글하지?
‘밸런스가 잡혔다 싶더라니, 바로 깨졌네.’
적당하게 유지된 정신에 약간의 긴장이 더해지니, 균형이 무너졌다.
“스트라이크!”
2구는 슬라이더.
바깥쪽 보더라인에 박힌 공.
제구에 집중해서 던졌는데. 타자는 이번에도 스윙을 내지 않았다.
초구는 신중하게 접근한 것이지만, 2구는 아니다. 차라리 커트라도 노렸어야지. 미묘하게 더해진 긴장을 떨치기 위해서.
가만히 멈춘 순간 몸은 굳기 시작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스트라이크 아웃!”
타이밍의 붕괴로 이어진다.
내 말을 잘 들으며 브루스가 곧바로 던져준 공을 다시 쏘아보냈다.
3구. 쓰리핑거 체인지업. 거의 한복판이었는데도 타자는 스윙하지 못했다. 그대로 얼어서 가만히 지켜봤을 뿐.
“Two!”
열세 번째 삼진.
관중들은 드디어 의견이 통일된 건지. 그놈의 유썩유썩 대신 카운트다운만 외쳤다.
“X신새끼! 고맙다!”
“그래, 그렇게 얌전히 공이나 보고 꺼지면 돼!”
그렇다고 해서 상대 타자를 조롱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유썩만 안 하지, 나머진 다 하네.
‘미겔 카브레라.’
그다음은 4번타자 미겔 카브레라. 이놈의 약쟁이들, 언젠가는 메이저리그에서 싹 다 추방시켜야 하는 건데.
“스트라이크 아웃!”
로이더에게 줄 안타 따윈 없으니, 냉큼 꺼지도록.
투 스트라이크 원 볼에서 던진 4구째, 서클 체인지업에 헛스윙하며, 미겔 카브레라는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One!”
이제 남은 건 단 하나.
마지막 하나를 남겨둔 상황에서 마이크 무스타카스가 올라왔다. 자신은 절대로 마지막 주인공이 되지 않겠다는 듯 아주 비장한 표정으로.
가장 힘든 타자다. 지금 로열스에서 제일 잘 치는 놈이니까. 앞서 말했듯 오늘도 안타 하나 날렸고.
‘10구, 아니, 20구를 던져서라도 잡는다.’
하지만 괜찮다. 녀석에게 퍼부어줄 총알은 많았으니까.
“파울!”
타격감이 좋은 것을 자랑하듯. 초구를 커트했다. 과괌하게 너클 커브 던져봤는데 이걸 커트하네.
괜찮아, 그래도 스트라이크니까. 그러면 된 거지.
“볼!”
“볼!”
2구와 3구는 살짝 뺐다.
심판이 하나쯤 잡아주거나, 타자가 한 번 헛치거나 하길 원했는데, 아쉽구만.
괜히 투구수를 소모한 셈이지만, 어차피 얘한테 다 던지기로 했으니, 상관없지.
“파울!”
4구는 과감하게 몸쪽. 거의 머리를 맞출 듯이 던진 하이 패스트볼. 조금 타이밍이 어긋났는데도, 마이크 무스타카스는 끝까지 커트했다.
너도 참 징하네. 그걸 따라가? 타격감이 좋기는 한가봐.
‘투 스트라이크. 이러면 됐어.’
이제 투 앤 투. 여기까지 왔으면 끝났다. 비장의 필살기가 남아 있거든.
‘니 뒤에 있는 애가 부탁하더라.’
새 공을 받은 브루스가 잽싸게 공을 던져줬다. 본인 입으로 말했던 컨베이어 벨트처럼.
그것을 받은 뒤, 차분하게 숨을 고르며 자세를 잡았고, 타자 역시 팔뚝을 부풀리며 배트를 꽈악 쥐었다.
그것을 두 눈 가득 담고서, 디딤발을 쭉 뻗어, 땅을 꾸욱 누른 뒤, 마지막 한 구를 살포시 놓았다.
‘너 헛스윙으로 잡아달라고. 그래도 배터리인데. 부탁 정도는 최대한 들어줘야지. 히번 시원하게 돌려봐.’
공은 날아간다. 유유히. 바람에 실려 둥실둥실 날아가는 깃털처럼. 실제로 무게감도 깃털처럼 가볍지.
“스트라~~~~이크 아웃!”
타자는 스윙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미 글렀다는 것을 깨달은 것처럼.
공은 배트가 지나가고 한참 뒤에야 들어갔고, 주심의 콜은 공의 체공시간처럼 대단히 길었다.
커브. 너클 커브 아니다. 그냥 커브다. 굳이 수식어를 붙인다면, 베리슬로우커브라고 할 수 있겠지.
말했잖아, 필살기라고. 꺼냈다 하면 모조리 죽어버리는 최고의 공이지.
‘끝이네.’
“ZeeeeeeeeeeeRo!”
이제 남은 카운트다운은 제로. 카운트다운은 끝났다.
‘아주 제대로 준비했네. 무슨 미군 기지라도 털었나?’
밤하늘이 폭죽으로 가득했다.
이 정도 화약이면, 웬만한 전쟁통 수준이겠네.
더 놀라운 건 그토록 수많은 폭죽의 소음마저 우리 팬들의 목소리가 눌러버렸다는 거겠지만.
‘어때, 나 엄청 잘하지?’
잠시 하늘을 올려보다, 이내 시선을 돌려 아까 전에 보았던 엄마 아빠의 좌석을 봤다.
이제 다 끝났잖아? 할 일 마쳤는데, 부모님 얼굴 봐야지.
“뭘 울고 그러시나 몰라. 이게 뭐라고.”
멀리 떨어져 있지만, 눈시울이 붉어진 게 똑똑히 보이네.
좋은 날에 그러는 게 보기 싫어서, 활짝 웃어줬다. 티끌 한 점 없이, 아주 깨끗하게.
####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9 : 3 캔자스 시티 로열스>
<애슬레틱스, 로열스의 추격을 뿌리치며, 와일드카드 순위 방어!>
축제는 끝났다.
고유석이 내려간 뒤, 애슬레틱스는 막판에 3실점을 내주며, 불펜의 부실함을 보였지만.
대신 타자들도 갑자기 몰아치면서, 한방이 있는 모습 또한 선보이며, 승리를 챙겨갔다.
와일드카드 경쟁자에게 거둔 기분 좋은 승리이나, 당연하게도 사람들에게 중요한 건 애슬레틱스의 성적이 아니었다.
<300K를 달성하며, 진정한 ‘Dr.K’로 올라선 Go!>
Korean Night.
고유석이 혹시나 했던 15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사실상 본인을 위한, 본인의 얼굴을 내건 축제를 완성시켰으니까.
행사는 구단이 준비했던 기념품이 모두 동날 정도로 성황리에 끝마쳤고. 막이 내려간 뒤에도, 여운은 가시지 않았다.
[#A’s]
[Korean Flag 모자, 이거 평생 간직한다. 계속 보니까 마음에 드네. 역사적 물품이 될 거야.]
└한 100년 뒤에는 100만 달러에 팔릴 지도 모르지.
└베이브 루스랑 관련된 것들이 보통 그 정도 하는데. 혹시 알아? Go도 그렇게 될지.
└운이 좋네. 나는 결국 못 샀는데. 대체 누가 다 쓸어간 거야?
└팬심이 없어서 그런 거지. 그러게 경기 전에 진작 샀으면 됐잖아? 넌 Suck을 안 믿은 거야.
[#A’s]
[아직도 정신이 멍해··· 페드로 마르티네즈나 랜디 존슨 같은 괴물들이나 가능한 걸 Go가 했다고? 정말로? 우리 선수가?]
└그런 투수들 보면서 손가락 쪽쪽 빨고 부러워했었는데. 이젠 우리가 그 입장이 됐네.
└막판에 싹쓸이하는 거 보고 솔직히 좀 지렸어. 볼넷 하나 주더니, 갑자기 막 화내는 것처럼 타자들을 조지는데- 어우···
[#A’s]
[난 오늘 손 안 씻을 거야. Go의 부모님이랑 악수했거든. 저런 선수를 낳아주셔서 정말로 감사하다고. 헤헤, 이 감촉, 평생 간직해야지.]
└그 손, 내가 살 테니까 계좌불러라. 직접 잘라가마.
└이 부러운 부르주아 자식, 난 멀리서나마 간신히 얼굴만 뵈었는데···
└오늘처럼 내 지갑이 원망스러운 적이 없었어. 나도 좋은 좌석에 앉았으면, 직접 두 눈으로 영접했을 것을.
└성부와 성모이시다. 정확하게 명칭을 붙여. 불경스럽게 지칭하지 말고.
└두 분 계속 오시면 안 되나? 그럼 Go가 500K 600K도 할 것 같은데.
팬 커뮤니티에서는 마치 수련회라도 되는 것처럼, 오늘 경기에 대한 간증이 이어졌다.
자신의 신앙심을 자랑하듯, 구매에 성공(?)한 기념품 사진을 올리거나. 고유석의 부모님에 했던 감사기도(?)가 쏟아졌고 말이다.
거기에 고유석의 적절한 인터뷰가 곁들여지면서, 분위기는 더 말할 것도 없이 타올랐고 말이다.
특히 열심히 준비했던 플랜카드를 직접 언급하고, 감사를 표한 것에 찐한 감동하기도 했다.
[#A’s]
[우리 점수 좀 딴 거 맞지? 나중에 FA 될 때 홈 디스카운트 가능할까?]
└지금 기세면 홈 디스카운트를 해도 3억, 아니 4억은 기본으로 깔고 갈 거 같은데······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아. 그냥 Go가 오클랜드에 조금 더 애정을 가지게 된 걸로 충분해.
└좋았어, 나중에 명예의 전당 가면, 우리 모자 쓰고 가겠네. 그럼 된 거지.
최소한 환심을 샀으니, 그가 언젠가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다면. 애슬레틱스의 모자를 쓸 것이라는, 조금 많이 이른 예상을 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렇게 축제는 모두가 바라던 결과를 이루며, 웃음 속에서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