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1득점을 올리며, 선취점을 가져가면서 1회 말이 끝난 뒤, 다시 2회 초. 다시 마운드로 걸어 나오는 아들의 모습에 왠지 묘한 감정이 생겼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이네. 저렇게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은.’
항상 생각이 많았지.
본격적으로 야구를 꿈으로 삼기 시작한 고등학생 때부터, 마운드 위에서 아들은 언제나 생각이 많았다.
지레 겁먹었다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그럴 녀석이 아니지. 그저 최선의 방법을 갈구하고, 끈질기게 던졌을 뿐.
‘좋은 어깨 못 가지게 해줘서 미안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그렇기에 미안했다.
워낙 타고난 풍채가 좋아서, 어릴 적부터 장군감이었지만.
조금 더, 아주 조금 더 좋은 몸을 가졌다면, 더 강력한 어깨를 가졌다면.
그래서 150키로도 뻥뻥 찍히는 강속구도 던지고, 포수 글러브를 터트릴 법한 단단한 돌직구도 던질 수 있었다면.
직접 야구장에서 보았던 수많은 투수, 흔히 말하는 에이스들처럼, 아들도 당당하고 후련하게 던질 수 있었을 텐데.
치열하고 끈질기게, 악바리처럼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화려하고 시원스럽게 말이다.
‘이젠 아니지.’
여전히 생각은 많겠지.
애초에 무식하게 공만 던져서는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성적을 기록 중이니까.
허나 지금 마운드 위에 선 아들의 모습은 그때보다 훨씬 찬란했고, 당당했다. 가슴을 쭉 피고서,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내려볼 정도로.
“Suck! 삼진 바로바로 가자!”
“이제 열세 개 남았어! 이번 이닝에 깔끔하게 세 개 더 올리자고!”
그리고 그런 모습을 사람들은, 팬들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그러한 풍경이 가슴 속 깊이 박혔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이닝.
선두타자가 올라온다.
“멜키 카브레라. 이렇게 읽는 거 맞아?”
“잘 읽네. 정확해.”
“잘하는 타자야? 4번타자가 최고잖아.”
타자의 이름을 읽은 아내는 4번타자라는 것이 못내 불안한 것 같았다.
야구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4번타자, 클린업하면 뭔가 다르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야구선수를 아들로 둔 어머니이니, 오히려 어설프게 알고 있는 지식 때문에 더욱더 불안할 수도 있고.
“요즘 미국은 3번이나 2번이 제일 잘해. 별거 없어.”
그런 아내를 달래듯 피식 웃으며 말한 뒤,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확언했다.
“그리고 우리 유석이는 저런 놈한테 절대로 안 맞아.”
“그래? 뭐, 나보다는 당신이 더 잘 아니까. 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래, 멜키 카브레라.
너, 약쟁이였지?
메이저리그보다는 한국 프로야구 쪽이 더 취향이긴 하지만. 그 당시에 막 아들이 미국으로 건너갔었기에.
자연스럽게 메이저리그에도 관심이 생겨서 찾아본 것 때문에 똑똑히 기억에 남았다.
저 자식이 약쟁이라는 것이.
그리고···
“스트라이크 아웃!”
내 아들은 그런 약쟁이들을 정말 더럽게 싫어한다는 것이.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정말 옴팡지게 욕을 했었지. 자긴 마이너에서 끈질기게 살아남고 있는데. 슈퍼스타라는 놈들은 약이나 처먹고 있다고 말이야.
‘아직도 많이 싫은가 보네.’
그 분노는 화려하게 날아오른 지금도 여전한 건지. 요즘 들어 이름이 날리는 슬러브(너클 커브)로 4구만에 시원스럽게 삼진을 잡았다.
“You Suck!”
“You Suuuuuuck! 이 로이더 새끼야!”
“그래가지고 되겠냐! 약 좀 더 빨아봐! 그래야 Suck 공에 스칠 수라도 있을 테니까!”
역시나 다들 소리친다.
삼진 잡을 때마다 저러더라니. 아마도 구호 중 하나겠지.
‘미국은 조용하게 야구 본다더니. 또 막상 그렇지도 않네.’
수만 명이 다함께 소리치는 걸 보면 말이다. 뭐, 어쩌면 아들이 그런 반응을 끌어낸 걸 수도 있고.
‘그나저나··· 저건 유석이 이름을 외치는 거야, 아니면 욕을 하는 거야?’
중계로 볼 때도 종종 들렸고, 중계방송에서도 은근히 언급하기도 했는데. 직접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돌아가신 부친께서 장손을 위해 지어주신 이름인데. 왠지 상대를 조롱하기 위한 욕설로 사용되는 것 같았으니까.
“You Su···ck, 흠흠.”
주변의 팬들도 신나게 외치다가, 이쪽 눈치를 보는 것을 보면, 역시 이름을 외치는 게 아니라···
‘그래도 나쁜 일에 쓰는 것도 아니고, 장손 잘한다고 칭찬해주는 건데. 아버지도 하늘 위에서 기쁘게 여기고 있으시겠지.’
아무튼 그럴 거다.
어쨌든 기분 좋은 시작.
그다음 타자는 마이크 무스타카스. 일단은 5번타자인데. 실질적인 타선의 중심이다.
하위타선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기도 하고. 아들 경기라서 상대 타자들 성적 정도는 찾아봤지.
‘저 녀석만 잘 넘기면 되는 건데··· 뭐, 유석이가 어련히 잘할까.’
약간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할 것이라며 믿었다. 훨씬 더 잘하는 타자들도 손쉽게 잡은 아들이니까.
“스트라이크!”
“체인지업인가?”
“체인지업이 그거 맞지? 유석이가 제일 잘 던진다는 거.”
“그렇긴 한데. 지금 건 조금 다르네.”
초구는 스트라이크.
구속을 보아 체인지업이다.
다만 대충 봐서는 아들이 자랑하는 서클 체인지업이 아니라, 그냥 체인지업인 것 같고.
‘무슨 뜻이라도 있는 건가?’
지난 스물네 경기, 아들의 등판은 모두 다 봤기에 잘 안다. 아들이 어떻게 피칭하고, 어떤 공을 언제 던지는지.
보통은 밋밋한 체인지업은 경기 중반, 한 5~6이닝부터 꺼내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꺼내다니. 무슨 노림수라도 있나?
그런 생각이 들었을 무렵, 2구가 날아갔고.
“스트라이크!”
이번에도 체인지업이었다.
다만 가만히 쳐다만 봤던 전과 달리, 지금 타자는 큼직하게 헛스윙했다.
두 번 연속 똑같은 구종.
심지어 가장 위험하다고 할 수 있는 밋밋한 공을 던졌다.
그리고 마지막 3구.
“스트라이크 아웃!”
이번에도 체인지업.
또 똑같은 녀석. 코스도 거의 같다. 가장 강력한 타자라고 평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타자는 똑같이 날아온 가장 밋밋한 공 세 개에 물러났다.
“You Suck!”
여지없이 조롱이 나왔고.
그것을 보니 허탈한 웃음마저 나왔다. 아들의 아버지가 아니라, 한 명의 야구팬으로서, 어처구니가 없었으니까.
“내 아들이지만, 진짜 간도 크네.”
“왜? 방금 위험했어?”
“아니, 전혀. 그냥··· 좀 용감하네.”
이상한 말에, 아내는 살짝 곁눈질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정확한 말이었다.
위험성은 없겠지. 전혀.
타자가 저렇게 행동할 거라는 것을 이미 다 예상하고 던진 거일 테니까. 무조건 통한다는 생각으로.
그러니 위험할 리가 있나.
삼진은 이미 정해진 것을.
내 아들이지만, 정말 지독한 투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식으로 잡히면. 머리가 새하얘져버리겠지.
“스트라~이크 아웃!”
그리고 마지막 6번타자.
브랜든 모스. 여기서부턴 걱정이 없다. 절벽 수준으로 확 격차가 나니까.
아니나 다를까, 아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삼진을 잡으면서, 지난 이닝, 아쉽게 하지 못했던 세 타자 연속 삼진을 달성했다.
“You Suck!”
“Hell Yeah! 이게 Suck이지!”
“부모님도 오셨겠다! 오늘 한번 제대로 놀아보자!”
“X나게 잘했다! 계속 이렇게만 해! 앞으로 10번만 더!”
그에 사람들은 아들이 내려가고, 마운드가 비워진 뒤에도 연신 그 단어를 외쳤다.
“유썩? 삼진 할 때마다 이러는데, 이거 유석이 이름 부르는 거 맞지?”
“어··· 그럴 거야. 아마도. 그렇겠지, 다른 뜻일 수도 있고···”
“하하···”
삼진을 잡을 때마다, 수만 명의 사람이 이름을 목놓아 외치는 모습에 뭉클해진 건지, 아내가 그렇게 물었지만··· 진실은 묻어뒀다.
“290. 저거 삼진 맞지? K가 삼진이잖아?”
“삼진 맞아.”
그렇게 오늘만 벌써 다섯 번째 You Suck을 터트리며, 아들이 이닝을 마치고 내려갔을 때.
전광판에 문득 290이라는 숫자가 나타났다. 그러자 경기장이 다시금 웅성거렸고.
아들의 성적이야 매일, 하루에 세 번씩은 찾아보기에, 이미 빠삭하게 알고 있지만.
그래도 볼 때마다 신기했다.
“200개만 잡아도 대단한 건데 말이야···”
300개를 코앞이라니. 도무지 믿기지 않을 지경이다.
그 무수한 삼진을 올린 아들은 대단히 강렬한 모습을 보이며,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 확고한 의지마저 느껴졌기에 잘 알았다.
딱 보면 알지. 지금 어떤 상태인지. 뭘 노리고 있는 건지. 오늘 녀석이 정한 목표가 무엇인지.
내 자식인데 모를 리가 있나.
“유석이 쟤, 우리가 보고 있다고, 아주 제대로 하려나 보네.”
“제대로? 괜히 우리 때문에 무리하는 건 아니지?”
“열심히 하는 거지. 무리가 아니라. 보면 알아, 보면. 당신 아들, 지금 엄청난 일에 도전하고 있거든.”
흡족한 미소가 자연스럽게 입가에 감돌았다.
내 자식이 메이저리거가 됐다. 거기에 1선발, 에이스이기도 하다.
24경기에 나와서, 18승을 올렸고, 170이닝을 던졌으며, 0점대의 방어율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290개의 삼진을 잡았다. 300탈삼진까지 단 10개만을 남겨두고 있지.
그것이 주는 감정은 단순히 흐뭇하거나 뿌듯한 정도가 아니다. 심지어 그 순간을···
‘이렇게 직접 경기장에서 두 눈에 똑똑히 담을 수가 있다는 건.’
더욱더 기쁜 일이고.
의심은 없었다. 걱정도 없었고. 야구를 좋아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한평생 야구를 좋아하며, 직접 보고 느꼈던 모든 투수를 통틀어도, 지금 내 아들이 가장 잘한다는 것을.
‘이제 열 개 남았구만.’
남은 삼진은 열 개.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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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ck의 부모님도 보고 계신데. 우리가 아들을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지. 한번 보여드리자고!”
타석으로 나가기 전.
타자들은 그렇게 외치며 으쌰으쌰거렸다. 우리 엄마 아빠가 보고 있는데, 왜 니들이 힘을 내. 누가 보면 그쪽이 자식인 줄 알겠어.
약간 어이가 없긴 했지만. 그래도 그런 다짐이 효과를 본 건지. 2회 말. 타자들은 한 점을 더 냈다. 잘하고 있네, 계속 이렇게만 해라.
“우리가 승리 꿀떡 먹여줄 테니까, 공만 잘 던져! 알았지?”
“예, 거참 감사합니다.”
2점 내놓고 말이 많군.
날려먹은 승리랑 내가 강제로 떠먹인 승리 생각하면, 아직 본전까진 한참 멀었는데 말이야.
‘그래도 점수가 나서 좋긴 하네.’
엄마 아빠 왔는데. 기왕이면 승리도 챙겨야지.
“수비에서도 좀 잘해 주라.”
“그건 걱정하지 마. 발목이 나가는 한이 있어도 어떻게든 뛰어서 잡을 테니까.”
마커스 시미언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만 믿으라는 듯이 글러브를 툭툭 쳤고. 다른 선수들 또한 그렇게 굴었다.
거참 믿음직하네.
‘수비는 걱정 없겠어.’
최소한 저렇게들 정신이 빡 잡혀 있는데. 어처구니없는 실수는 안 나오겠지.
가장 좋은 건, 아예 그런 수비 상황 자체가 나오지 않는 거겠지만. 내 목표를 위해서는 말이야.
‘이제 남은 건 열 개.’
마운드로 걸어 나갈 때. 판넬이 눈에 들어왔다. 큼직한 K, 삼진을 뜻하는 거지.
이제 다섯 개.
전반기처럼 카운트다운을 해주는 건 아닌 것 같구만. 그거 제법 멋졌는데, 좀 아쉽네.
‘7이닝까지 던진다고 치면, 이닝당 2개씩 잡으면 딱 떨어지네.’
쉽네. 별거 아니잖아?
‘내리막 제대로네.’
이미 말했듯이, 캔자스시티 로열스는 상위타선과 하위타선이 아주 극명하게 갈린다.
엄청나게 가파른 내리막이지.
‘알시데스 에스코바르. 컨택, 선구안, 파워, 다 안 좋아.’
가장 먼저 7번타자 알시데스 에스코바르. 유격수인데. 수비형이다. 수비를 참 잘하지.
대신 빠따는 좀 심각하고.
현재 타율이 2할 3푼에 OPS가 5할 7푼이다. 홈런은 세 개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팀에 민폐인 수준.
하긴, 수비력이 좋은 유격수가 빠따까지 좋았으면, 왜 로열스에 있어. 훨씬 부유한 팀으로 갔겠지.
‘다만 그렇기에 오히려 삼진 잡는 게 좀 어려워.’
상당히 처참한 타격. 그렇기에 아무거나 막 치는 탓에 오히려 삼진이 조금 적다.
탕장 타율과 출루율이 2푼밖에 차이 나지 않는 것만 보더라도. 마구잡이로 치는 걸 알 수 있지.
“아웃!”
아니나 다를까.
초구로 던진 바깥쪽 너클 커브를 때린 뒤, 1구만에 아웃으로 물러났다.
대놓고 나간 코스였는데. 이걸 꾸역꾸역 치내. 삼진 먹기 싫어서 일부러 그러는 건가?
“아 X발놈아! 땅볼 말고 삼진당하라고!”
영양가 없이(?) 물러난 그가 짜증스러웠던 건지, 한 홈팬은 욕설을 토해냈다.
에헤이, 그러지 마십쇼. 투구수 아껴주는 고마운 녀석인데. 감사히 여겨야지.
아무튼 원아웃.
그다음 8번타자는 알렉스 고든으로,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로열스의 핵심 코어이자, 든든한 기둥으로서 팀의 월드시리즈 우승에 큰 역할을 했던 선수지만.
‘완벽한 먹튀가 됐네.’
없는 살림에 두둑하게 챙겨줬더니. 똥물을 끼얹고 있구만.
골드글러브에 빛나는 수비력은 여전히 좋긴 하나. 지금은 타석에 있지.
‘그리고 삼진 잡기 좋아.’
공을 지켜보는 타입이니까.
지금은 8번에 있지만, 과거 좋았던 시절에는 주로 리드오프를 담당했을 정도로.
폭망한 지금도 그건 여전한 건지, 여전히 출루율이 타율보다 훨씬 높은데. 그만큼···
“스트라이크!”
삼진도 잘 당한다. 삼진을 노리는 입장에선 앞서 알시데스보다 훨씬 좋지.
초구로 바깥쪽 슬라이더.
아슬아슬하게 꽂히는 코스에 그의 배트는 얌전히 멈췄다.
“볼!”
2구는 비슷한 코스로 포심 패스트볼. 하지만 살짝 나간 걸 읽은 건지, 여전히 배트는 미동도 없었다. 그래도 아직 가닥이 남아 있네.
“스트라이크!”
이번엔 과감하게 몸쪽으로 꽂았다. 타자의 머리를 노린 듯, 위협적인 코스. 너클 커브라는 걸 알면서도, 처음 봤을 때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러뜨리지.
‘이걸로 끝내자.’
마지막 4구.
이번에도 몸쪽, 허나 낮다.
코스를 읽는 건지, 짧게 고민한 타자는 배트를 냈다. 아마 들어온다고 판단했겠지.
살짝 커트 정도만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스트라이크 아웃!”
좌타자 몸쪽을 파고드는 과감한 서클 체인지업에 배트가 헛돌았다. 삼진아웃.
이제 여섯 개네.
“You Suck!”
“Nine! Nine!”
카운트다운은 시작됐다.
아홉 개 남았다는 걸 동네방네 알리고 있네. 아주 좋아.
이제 마지막. 9번타자, 드류 부테라. 원래는 백업 포수인데, 오늘은 선발출장했네.
9번이지만, 오히려 성적 자체는 하위타선에서 가장 뛰어난 축에 든다. 체력부담이 심한 포지션인 만큼, 일부러 뒤에 배치시킨 거겠지.
물론 로열스 하위타선에서 그나마 잘 친다는 거지. 마찬가지로 별로 좋다고는 보기 힘들겠지만.
‘파워는 없다고 봐도 돼.’
51경기 동안 홈런이 고작 두 개. 장타율은 3할. 이 정도면 파워가 거세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중장거리 타구를 날릴 갭파워도 없지.
‘패스트볼로 잡자.’
허나 제법 적극적으로 타격을 하는 만큼, 확실하게 찍어 눌러서. 미리 호구를 잡아둬야. 두고두고 편할 거다.
최소한 오늘은 하위타선 전체가 삼진의 텃밭이 되어줘야 했으니까.
“스트라이크!”
몸쪽 포심 패스트볼.
제구를 살짝 버리고 던졌다.
크게 헛도는 스윙.
초구만에 마음을 고쳐먹은 건지, 드류 부테라는 배트를 조금 짧게 고쳐잡았다.
막상 직접 보니까, 큰 건 어림도 없으니, 그냥 짧게라도 하나치겠다는 뜻.
그 의지는 가상하나.
“스트라이크!”
배트 좀 짧게 잡는다고 다 칠 수 있으면, 내가 왜 이렇게 탈삼진을 많이 올렸겠어.
어떻게 300에 도전하고 있고.
그렇지 않으니까, 그런 거지.
2구 역시 포심 패스트볼. 하지만 높게 하이로 찍었다.
허나 타자는 하이 패스트볼에 속지 않으며, 꿋꿋하게 스윙을 참았으나.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슬그머니 공을 아래로 빨아 당긴 브루스의 미트질 덕분에 스트라이크가 선언됐다. 오, 프레이밍 도움을 다 보네.
“스트라이크 아웃!”
억울한 표정인데.
어쩌겠어, 이것도 경기인데.
프레이밍은 포수의 소양 중 하나인데, 꼬우면 커트라도 하던가.
마지막은 바깥쪽 서클 체인지업. 뚝 떨어지는 공에 앞서 참은 것이 무색하게도 그는 너무나도 쉽사리 스윙했다.
꾹 참았더니, 스트라이크가 선언되는 것에 멘탈이 나간 거겠지.
다시 한번 더 삼진아웃.
이제 여덟 개 남았구만.
“You Suck!”
“Eight!”
관중들은 이제 둘로 나뉘었다. 카운트다운을 하는 사람과 꿋꿋하게 유썩유썩하는 사람으로.
얼핏 보면 자기들끼리 신경전 하는 것 같네. 같은 편끼리 사이좋게 지냅시다.
“Suck, 너 오늘 미쳤네. 무리하는 건 아니지? 공에 아주 영혼이 담겨 있는데.”
이닝이 끝나고,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갈 때. 브루스는 아주 호들갑을 떨어댔다.
뭐, 평소처럼 하는 거 가지고.
이 정도야 그냥 껌이지.
“난 언제나 영혼을 담아. 지금까지는 브루스 니가 하도 허접해서 오히려 못 느낀 거고.”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자꾸 그렇게 속 긁으면 나도 모르게 공 흘릴지도 몰라. 조심해.”
괜히 농담하니까, 입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이젠 협박도 하네. 나중엔 멱살도 잡겠구만.
“어디 한번 해봐라. 살아남을 자신 있으면.”
그래도 슬쩍 오늘은 조금 평범하게 나타난 레이더스를 엄지로 가리키니, 금방 진압됐다.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타자들 체크 잘하고. 앞으로 계속 수고 좀 해줘. 지금처럼만 해.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아까 프레이밍 좋았다. 이제 제법 태가 나는데?”
“흐흐, 그거야 기본이지. 나도 슬슬 늘긴 느나봐. 네 공에 적응한 건지, 이제야 내 실력이 나오네. 믿고 던지기만 해. 뭐든지 스트라이크로 만들어줄 테니까!”
채찍질 했으니, 당근도 먹여야지. 칭찬 좀 해주니까, 헤벌쭉 웃네. 단순한 녀석.
‘그래도 이번엔 진짜 도움을 봤으니까. 덕분에 삼진 쉽게 잡았고.’
잘한 건 칭찬 해줘야, 계속 말을 잘 듣는 법이지.
‘이대로만 유지하자.’
그렇게 지금의 좋은 분위기를 머릿속에 새기며,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Eight! 이제 여덟 개 남았다!”
“길게 끌 거 뭐 있어? 딱 7이닝에 끝내고 내려가! 부모님도 오셨는데, 조기퇴근 해야지!”
흥에 취한 홈팬들을 잠시 뒤에 남겨두고서.
####
<고유석 3이닝 7K, 300삼진까지 단 여덟!>
<부모님의 앞에서 호투를 선보인 고유석! 코리안 데이의 끝은?>
<태극기가 흩날리는 오클랜드 콜리시엄! 평소처럼 흐르는 You Suck!>
카운트다운은 경기장 밖에서도 이어졌다. 300탈삼진. 절대로 보통 일은 아니니까.
사실 경기 전부터 이번 경기에서 고유석이 달성할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지만. 주류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한 경기에서 열다섯 개나 삼진을 잡는다는 건, 대단히 힘든 일이니까.
엄청난 삼진 페이스를 자랑하는 고유석이지만, 그 역시 15삼진을 넘긴 건, 단 세 경기밖에 없을 정도로.
그렇기에 한국의 경우 불확실한 300탈삼진보다는, 고유석을 위한 행사라고 봐도 무방한 Korean Night와 곳곳에 흩날리는 태극기에 포커싱을 맞췄지만.
곧 경기가 시작되고, 미친 듯이 삼진을 잡는 고유석의 모습에 포커싱은 다시금 돌아갔다.
-스트라이크 아웃! 고유석! 위트 메리필드에게 다시금 삼진을 잡아냅니다!
-아, 오늘 정말 느낌이 있는데요? 평소 제구에 심혈을 기울이던 것과는 다르게. 힘으로 밀어붙이고 있네요.
-벌써 여덟 개 째! 300삼진까지 남은 건 단 일곱!
4회 초에도 삼진은 이어졌다.
한 타순이 돌아, 두 번째 타석을 맞이한 위트 메리필드에게 시원스럽게 삼진을 잡았으니까.
[갓유석 오늘 300K 가나?]
-엄빠 버프 미쳤네. 평소보다 더 독하게 잡는다.
└솔직히 쌉가능임
└한국인이 메이저리그에서 300삼진 올리는 걸 다 보네. 오래 살긴 했나보다.
└고유석 보면 ㅈㄴ 신기함 저 구속으로 어떻게 저렇게 삼진을 잘 잡냐?
└변화구가 미쳤잖아 구위도 개쩔고.
└쓸데없이 볼 질 안하고 ㅈㄴ 공격적인 거도 크지 개상남자임
화끈한 삼진쇼에 당연히 콜리시엄 밖에서도 흥분이 이어졌고, 개중 소수의 이들은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기도 했다.
-아웃! 로렌조 케인, 투심 패스트볼에 땅볼로 물러납니다.
-비록 삼진은 아닙니다만. 오늘 아주 제대로 공이 살아 있습니다. 지금 투심 무브먼트를 보시면···
[오늘 퍼펙 페이스 아님?]
-300삼진이 문제가 아니라 퍼펙트 한번 더 하는 거 아니냐?
└이제 4회인데. 너무 설레발임
└이제 니가 말해서 못한다ㅅㄱ
└퍼펙트 깨지면 다 너 때문임ㅇㅇ 일부러 언급 안 했더니 그걸 말하네.
여전히 출루를 허용하지 않았으니까. 그 모습에 혹시 퍼펙트까지 하는 것이 아니냐며, 기대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아아, 안타! 에릭 호스머, 이번 경기 팀의 첫 안타를 때려냈습니다!
-이건 잘 끊었네요. 지금 기세가 계속 이어졌다면, 로열스에게는 상당히 위험했을 겁니다.
-네, 그렇죠, 지금 리그에서 가장 노히터와 퍼펙트에 익숙한 선수가 우리 고유석 선수거든요? 흐름을 타기 전에 잘 끊어냈네요.
아쉽게도 언제나 설레발은 일을 망쳤다. 퍼펙트가 깨진 순간, 그것을 언급했던 이들은 욕을 먹기도 했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멜키 카브레라! 지난 이닝과 마찬가지로 손도 못쓰고 삼진을 당했습니다!
-상당히 노련한 타자인데. 지금 보시면 지난 타석과 거의 같은 코스에 당했단 말이죠? 그만큼 고유석 선수의 구질이 파악하기 힘든···
다행히 다시금 올라간 삼진에 분위기는 조금 잔잔해졌다.
-세이프! 마이크 무스타카스! 3구째에 커터를 잘 공략했습니다.
-선두타자에게 안타를 내주기는 했지만. 이제부터 하위타선인 게 중요합니다.
곧이어 5회 초, 선두타자 마이크 무스타카스에게 안타를 내주긴 했으나.
-쳤습니다! 3루! 2루에서 아웃! 1루에서 아웃! 더블 플레이!
-이렇게 되죠. 워낙 구위가 훌륭한 선수이기에, 내야땅볼이 자주 나오는데. 이번에도 제대로 유도했네요.
침착하게 후속타자, 브랜든 모스에게 병살타를 유도하며, 순식간에 투아웃을 올렸고.
-스트라이크 아웃! 알시데스 에스코바르! 완전히 바닥에 박히는 공에 헛스윙을 합니다!
-아하, 이건 너무 조급했습니다. 상당히 낮은 코스였는데, 저걸 참지 못하네요.
마지막 알시데스 에스코바르에겐 아예 칠 수도 없을 만큼 낮은 너클 커브를 던지며, 이번 경기 열 번째 삼진을 올렸다.
-고유석이 더블 플레이와 삼진으로 이닝을 끝마쳤습니다, 외계인, 페드로 마르티네즈가 은퇴하고 17년! 아메리칸 리그에서의 17년 만의 기록까지, 남은 삼진은 이제 다섯입니다!
그렇게 끝난 5회 초.
당당하게 선언하는 캐스터와, 전광판, 그리고 중계방송 화면의 하단에 떠오른 295라는 숫자를 보며, 사람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300. 그 장엄한 숫자가 이제 코앞까지 다가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