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슬슬 시간 됐네.”
아들의 말처럼, 신혼여행을 보내듯 시간을 즐겼다. 오래간만에 휴가였으니까.
구단에서 붙여줬다는 통역사 덕분에 다행히 문제가 생기거나, 일이 있지는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드디어 15일이 밝았다.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늦은 오후쯤.
에이전트가 찾아왔다.
과거, 미국으로 떠날 적, 자신만 믿고 맡기라고 했던 사기꾼 같은 작자보단 훨씬 멀끔한 인상이 만족스러운 남자는 그렇게 말했고.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뜻은 알아들을 수 있었기에, 두 사람은 떨리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두 분 덕분에 저도 좋은 좌석에서 고유석 선수 경기를 다 보네요.”
“그간 저희 잘 도와주셨는데, 그 정도는 해드려야죠.”
마찬가지로 들뜬 통역사와 함께, 차에 올라, 긴장된 마음으로 경기장으로 향했을 때.
뜻밖의 것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저거 유석이 얼굴 아니야?”
“플랜카드 같은데?”
경기장으로 가는 길, 곳곳에 내걸린 플랜카드와 걸개 같은 것들은 종종 아들의 얼굴에 박혀 있었다.
잠깐 ‘유석이가 나 몰래 시장 출마라도 했나?’하고 착각할 정도로. 선거철에 흔히 볼 수 있는 풍경과 흡사한 분위기에 헛웃음마저 나왔다.
구단에서도 큰 이벤트라고 하더니, 그것을 홍보하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했을 무렵.
함께 차에 올랐던 통역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팬 커뮤니티가 좀 이상하다 싶더라니···”
“혹시 무슨 안 좋은 단어라도···?”
팬 커뮤니티? 팬들이 조금 이상하다니, 사랑받고 있는 것 같아서, 걱정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건가? 인종차별적인 단어라도 있는가 싶어 물어보니. 통역사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부 다, 두 분을 환영하는 말들이에요. 고유석 선수를 칭찬하는 단어들이고요. 아무래도··· 애슬레틱스 팬덤 쪽에서 준비한 것 같네요.”
“팬들이··· 저걸?”
그 말을 듣는 순간, 새삼 다르게 보였다.
지금까지 지나온 길들에도 계속해서 걸려 있었는데. 그 모든 걸 팬들이 준비했다니, 두 사람은 조금 황당한 마음마저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걸 다?”
“그 정도거든요. 애슬레틱스에서 고유석이란 선수는. 최소한 애슬레틱스 팬들은 모두 다 안 좋아할 수가 없죠.”
“네, 그런 것 같네요.”
그런 황당한 행동을 직접 실행시킬 정도의 선수라는 거겠지. 이 팀의 팬들에게 아들은, 고유석은.
“허, 애슬레틱스가 제대로 준비했군.”
브라이언이라고 했던 에이전트 역시 이런 건 예상치 못했던 건지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묘하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렇게 행렬은 마치 레드카펫처럼 경기장까지 쭉 이어졌다.
경기장 가는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 같은 느낌도 들었고 말이다.
그 정성에서, 조금 위험한 도시이긴 하지만. 자신들은 고유석이란 선수를 정말로 좋아하고 있다는 게 절절하게 드러나서. 왠지 뿌듯해짐과 동시에.
마치 상대방 부모에게 잘 보이려는 아가씨 같은 느낌이 들어, 피식 웃음도 나왔다.
“오늘 유석이 정말로 잘해야겠네. 이렇게나 반겨줬는데.”
“잘해야지, 그럭저럭하는 정도론 안 되겠어.”
아무래도 아들의 어깨에 부담감이 조금 더 올라갈 것 같았지만. 그건 이제 괜찮았다.
최소한 지금까지 봐온 아들의 모습은 부담감 따윈 우습게 들어 올렸으니까.
오늘도 마찬가지이리라고 생각하며. 조용히 경기장에 입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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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오늘 잘해야겠네?”
“그럼그럼, 유석이 너 엄청 잘해야 돼. 어중간한 정도론 어림도 없겠더라.”
“잘해야지, 엄마랑 아빠가 보고 있는데.”
경기장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마중을 나가니, 부모님은 갑자기 부담감을 팍팍 주셨다.
몸만 성하라고 할 때는 언제고, 오늘은 왜 이러시나 몰라?
묘하게 흐뭇한 미소가 감돌았는데, 아마 오다가 좋은 거라도 봤나 보다.
나 응원해주는 팬들이라거나 그런 거. 참고로 오늘은 레이더스도 좀 얌전하더라.
얼굴이 눈에 익어서 딱 알아보긴 했지만, 그럭저럭 일반 팬 같긴 하던데.
“그럼 가볼게. 아들이 얼마나 잘하는지, 관람석에서 똑똑히 보슈. 경기 끝나고 식사 합시다.”
씨익 웃어준 뒤, 다시 클럽하우스로 돌아오니, 동료들도 왠지 조금 미묘한 눈빛을 보냈다.
부럽다는 것 같기도 하고. 입을 삐죽 내민 것이 삐진 것 같기도 하고. 다 큰 사내새끼들이 어디서 귀여운 척이야.
볼 꼴 못 볼 꼴 다 본 놈들이 저러니까, 진지하게 좀 토가 쏠렸다. 좋은 날에 괜히 화가 나기도 하고. 한 대 때리고 싶네.
“Suck 쟤는 진짜 다르긴 다르네. 뭐 이 정도로까지···”
“우리 팬들 가만보면 편애가 좀 심해. 나도 좀 잘하고 있는데···”
“솔직히 쟨 언터쳐블이지. 내가 팬들이었어도, X나게 이쁘게 보일걸. 심지어 최저연봉이잖아? 완벽하네.”
“갑자기 뭔데? 다들 왜 그런 식으로 보고 지랄이야?”
고개를 갸웃거리니, 제드 라우리가 슬쩍 휴대폰을 내밀었다. 또 SNS네.
또 누가 날 도발이라도 한 건가 싶어서 슬쩍 보니, 이번엔 우리 팬들 SNS였다.
“플랜카드?”
도시 곳곳에 플랜카드가 쫙 깔렸다는 내용인데. 문구는 대충 Go의 부모님의 콜리시엄 입성을 환영합니다? 고유석 최고? 그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이래서 그런 거였구만.’
알 것 같았다. 부모님이 왜 그렇게 부담을 팍팍 안겨주신 건지. 그리고 왜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건지 말이다.
아이 참, 뭐 그런 걸 다하고 그래. 우리 사이에, 괜히 사람 뭉클해지게.
종종 팬 커뮤니티를 훑어보는 편이라,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건 어느 정도 짐작이 갔지만.
설마하니 이런 걸 준비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기껏해야 경기장에서 뭐 좀 흔들거나. 구호 외치거나 그럴 줄 알았지.
‘오늘 진짜 잘하긴 해야겠네.’
부모님을 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한테 어필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들이 날 이렇게나 사랑하고 있다고 말이야.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그냥저냥 평범하게 던지면 조금 그렇긴 하겠지.
목표는 어차피 정해져 있다.
다 같이 기뻐하기에, 딱 알맞은 게 하나 있지.
‘285였지.’
발 치수 아니다.
이거 보다 훨씬 커.
내 키가 얼만데. 285도 작지.
별거 아니고, 그냥 삼진이다.
이번 시즌 내가 잡은 삼진이 285개지. 이 정도면 탈삼진 타이틀도 먹을 수 있기에, 별거 맞기는 한데.
‘오늘 15개만 더 추가하면 되겠네.’
여기에 열다섯 개를 더 추가하면, 진짜로 좀 특별해진다.
300K, 전설들이 줄줄이 은퇴한 이후. 근래에 잘 보이지 않았던 기록이 달성되니까.
내가 기억하기로 클레이튼 커쇼가 그나마 2년 전에 했었지.
거긴 내셔널리그니까, 아메리칸리그에선 진짜 오랜만이겠네.
‘퍼펙트나 노히터도 아니고,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지.’
사실 내 삼진 페이스가 워낙 괴악해서. 내가 300탈삼진을 달성한다는 거야, 이미 두 달도 전부터 확정되기는 했다.
허나 기왕이면 좋은 날에 기록까지 올리는 게 더 멋있잖아. 오늘이 좋은 날이고.
“가죠, 대니얼. 최선을 다해서 워밍업을 해봅시다.”
“예, 그래야죠. 컨디션은 좋다고 하셨죠?”
“예, 그럭저럭 좋았는데. 지금인 최고에요.”
클럽하우스를 나와, 슬쩍 주변을 훑으니, 점점 관중석을 채우고 있는 팬들이 보였다.
“저거 Suck 아니야? 오, 우리한테 인사하려는 건가? 보고 있는데?”
“에이, 우리 사이에 뭘 인사까지. Go 부모님이면 우리 부모님이나 다름없는데. 아니, 좀 더 나을지도?”
“이 쓰레기야.”
좌석에 앉던 이들은 내가 자신들을 보고 있다는 걸 뒤늦게서야 깨달은 건지, 씨익 웃거나 내 이름을 외쳤다.
이쁜 짓을 해놓고 티를 안 내네. 평소에는 소리 버럭버럭 잘만 지르는 양반들이.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거야 뻔하다. 내가 X나게 잘하는 것. 그거 하나면 되겠지.
거기에 그럴듯한 기록까지 끼얹는다면, 가장 좋은 선물이 될 거고.
‘딱 보고 있으쇼. 원하는 모습 그대로 보여줄 테니까.’
그들에게 선언하듯 고개를 시원스럽게 끄덕인 뒤, 본격적인 워밍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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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자스시티 로열스.
재작년 우승팀이자.
스몰마켓의 정석을 보여줬다고도 할 수 있는 팀.
허나 스몰마켓답게. 그들의 사이클은 꽤나 빠르게 막을 내리고 있다.
주전급들은 FA로 풀리고, 그중 몇 명 잡지도 못했고. 근데 또 다른 주전급 FA는 다가오고, 정말 눈물겨운 상황이지.
자금력이 떨어지는 스몰마켓의 비애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건데. 아마 우리 팬들에겐 그리 낯선 풍경은 아닐 거다.
‘그래도 아직 포기하지는 않은 건지, 제법 보강하긴 했지만···’
다만 윈나우를 조금 더 달리려는 듯. 올해도 제법 선수단을 보강했었다. 트레이드 데드라인 전에 데려오기도 했고.
듣기로 올해가 끝나면, 주전급들은 다시 FA로 대거 풀리는데, 중계권 계약도 예정되어 있다고 하니. 어쩔 수가 없겠지.
최대한 몸값을 높이기 위해서, 좋은 성적을 올리는 게 최우선일 테니까.
‘그래서 그런지, 타선이 제법 막강해.’
사이클이 끝나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 포스트시즌을 노려볼 만한 팀답게. 타선의 완성도 자체는 제법 그럴듯하다.
핵심 타자라고 할 수 있는 에릭 호스머와, 강력한 한방이 있는 마이크 무스타커스.
그리고 트레이드로 데려온 약쟁이, 멜키 카브레라까지, 중심타선이 꽤나 강력하다.
1번부터 5번까지, 상위타선 전체의 타율도 훌륭하고.
‘거기다가 중요한 경기니까. 더욱더 열심히 하겠지.’
그리고 오늘은 좀 중요했다. 부모님이나, 팬들을 제외하더라도, 와일드카드 경쟁자끼리의 맞대결이거든.
우리가 2순위고, 로열스가 4순위지. 1.5게임차지. 어제 1차전에서 로열스가 이기면서 살짝 따라잡혔다.
‘까다로운 상대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청나게 빡센 건 아니야.’
어쨌든 정점을 찍고 내려오는 팀이라기엔, 상당히 준수한 라인업을 갖추고 있지만.
오늘 내가 잡은 목표를 못 이룰 정도는 아니다. 조금만 열심히 하면, 충분히 가능하지.
생각 정리를 마친 뒤. 불펜을 나섰다. 시간이 됐으니까.
“Suuuuuuck!”
“부모님도 오셨는데! 퍼펙트 가자!”
“큰 거 안 바래! 딱 삼진 15개만 잡아! 그거 보려고 콜리시엄 온 거니까!”
언제나 그렇듯 환호성이 뒤따랐다. 평소보다 사람이 많네. 하긴, 할인 행사까지 했으니까.
4만명까지는 안 될 것 같지만. 그래도 관중석에는 빈자리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제법 빽빽하게 들어왔네.
‘특별 기념품이라더니··· 저게 뭐야···’
종종 야구모자 정중앙에 태극기가 그려린 것을 쓰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종종 태극기 들고 찾아오는 관중들이 있었지만, 그걸 왜 모자에다가 달아···
한국에서 야구장 가면 자주 보던,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붙을 때도 한번 봤던 막대풍선 같은 것도 보였다.
기념품 말만 들었지, 제대로 보지는 못했는데, 진짜 별걸 다 준비했네. Korean Night라는 건 확실하게 알 것 같구만.
뭔가 묘하게 B급 감성이 나는 것이, 우리 팀이랑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해서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어줬다.
“이거 봐! 이거 사니까, 바로 우리 보잖아! 사기 잘했지?”
“오~ 효과가 좀 있는데? Suck! 난 이것도 샀다! 잘 보이냐! 간식이야, 간식! 뱃속까지 Korean이라고! 크하하핳.”
오늘 한 짓을 들어서 그런가, 왠지 평소보다 더 예뻐 보여서 슬쩍 따봉까지 날려주니, 아주 좋아서 죽는다.
경기 끝나고 나가는 길에 기념품 한 아름 더 사겠군.
기껏 열심히 준비한 프런트, 마케팅 팀을 위해, 나도 발품 파는 거지. 가난한 팀인데, 저런 수입이라도 있어야 하잖아?
“브루스, 오늘은 시작부터 조금 빡세게 갈 거니까, 단단히 준비하고 잡아.”
그렇게 관중들과 약간의 소통을 가진 뒤, 마운드에 오른 직후, 나는 브루스에게 통보했다. 오늘은 좀 힘들 거다.
“어? 어어?”
“제구가 평소보다 살짝씩 나갈 수도 있으니까, 포구 잘하라고. 안 그러면 놓친다. 손바닥 깨지거나.”
“어어··· 어, 그래··· 쓰읍···”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조금 불쌍하지는 않다.
포수가 공 잘 잡는 거야 당연한 일인데 뭐가 불쌍해? 이제까지 그냥 갖다 대기만 하면 쏙 들어가던 것이 호사였던 거지.
그래도 축 늘어진 게 신경 쓰여서, 등짝을 팍 때려주니, 얘도 좋아서 죽었다.
“아! 이젠 폭행까지 하냐? 내가 고소할 거야 이거. 손자국 남겠네.”
“인상 풀어. 오늘 끝나면 브루스 니가 17년 만의 포수니까.”
“17년?”
“한 시즌 삼백 번째 삼진을 잡은 포수 말이야. 듣기로 아메리칸 리그에선 17년 만이던데. 너도 같이 역사에 남는 거지. 원래 투수의 기록은 포수도 같이 묶이니까.”
“삼백 번째··· 삼진··· 역사에 남아? 어, 어어! 최선을 다할 게! 뭐든지 던져!”
그 말에 기합이 바짝 들어갔다. 아주 사명감이 느껴지는군. 그래, 그래야지. 다루기 쉬운 녀석이란 말이야.
눈이 초롱초롱해진 녀석을 홈 플레이트로 내려보낸 뒤, 가볍게 마지막 점검 시간을 가졌다.
‘이제 시작이네.’
7시 6분. 경기시작 1분전.
정확하게 시간에 맞췃 올라오는 타자를 흘끔 본 뒤, 곧 슬쩍 관중석을 훑었다.
가족이라서 그런가, 바로 눈에 들어오네. 옆에 브라이언도 같이 있고. 손을 흔들어줄까, 싶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축배를 드는 건, 경기가 끝난 뒤에,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온 뒤에 해도 늦지 않다.
혹시라도 경기를 망치거나 했을 때. 가족 때문에 집중이 흐트러져서 그런 것이라는 소리가 나오게 하고 싶지 않거든.
그러니 인사는 그저···
“플레이볼!”
“파울!”
이걸로 대신해야지.
초구는 몸쪽 포심 패스트볼. 언제나 이렇지.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르다.
제구를 약간 포기하고, 오직 힘을 가득 담아 던졌으니까.
살짝 좀 깊이 들어간 것 같은데, 타자가 스윙을 했다.
머리 뒤로 날아가는 파울.
타자의 배트는 제법 시간이 지난 뒤에야 진동을 멈췄지만, 1번타자, 위트 메리필드는 여전히 몸이 떨렸다.
초구에서 오늘의 무게감을 느낀 걸까? 아니면 그저 압도된 걸까? 그는 석고상처럼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반대로 브루스 이 자식은 오히려 파울이 나온 것에 안도하는 것 같고. 지가 안 잡아서 다행이라는 거지.
‘죽이지?’
기선은 제압됐다.
한번 통증을 맛봤으니.
타자는 소극적으로 되고.
나는 그걸-
“스트라이크!”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거지.
2구는 다시 포심 패스트볼.
하지만 이번에는 대놓고 스트라이크였다. 거의 실투성이나 다름없는 코스.
똑같은 구종이 전보다 훨씬 좋은 위치로 날아왔는데도, 타자는 오히려 아무런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쉽게 말해서, 고무줄 같은 거다. 한껏 늘린 고무줄에 탁 맞으면, 나중에는 살짝 늘리기만 해도 엄청 무섭잖아?
빗맞은 공의 힘이 배트를 타고 손까지 올라왔을 때, 그것이 얼마나 아픈지 이미 한 차례 느꼈으니. 자기도 모르게 몸이 말을 안 듣는 거지.
그러다 정신 차리고, 다시 집중해보지만 이미 투 스트라이크. 조급해진 마음에 스윙을 내는 순간-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그걸로 수싸움은 끝난다. 뭐든지 조급해지기 시작하면, 그걸로 끝이지.
멋지게 잡을 필요도 없다.
그냥 오프스피드 아무거나 하나 던지면 끝이니까.
뭐, 내 오프스피드는 좀 심하게 좋기는 하지만. 3구째 바깥쪽 서클 체인지업.
배트가 크게 헛돌았다.
‘이제 14개 남았네.’
이렇게 차근차근 하나씩 올리다 보면, 14개 금방이지.
다음 타자는 2번타자 로렌조 케인. 주전 중견수인데, 수비가 진짜 일품이다.
꽤 자주 수비 하이라이트 동영상에 나오고는 하지. 저런 중견수 하나 뒤에 있으면, 투수 입장에선 진짜 든든한데 말이야.
올해 시즌 끝나면 FA로 아는데, 우리 팀 올리는 없겠지. 우린 오클랜드니까. 아쉽네.
수비도 수비지만, 타격도 그럭저럭 준수하다. 적당히 갭파워도 있고, 컨택도 준수하지.
14,15년에는 2년 연속 타율이 3할을 넘겼으니까. 못해도 2할 8푼은 찍고. 평균이상은 되는 건데.
‘그렇다고 해서 어려운 상대도 아니지. 삼진을 안 당하는 편도 아니니까.’
딱 그 정도다.
조금 까다롭긴 하겠지만. 대단히 위협적인 타자는 아니지. 특히나 오늘처럼 확실하게 마음을 먹은 날이라면. 더더욱 그렇고.
“···스트라이크!”
초구는 바깥쪽 컷 패스트볼.
아슬아슬하게 보더라인에 찍히는 코스. 음, 주심의 반응을 보아 저기가 딱 마지노선이구만. 그냥저냥 평범하네.
‘나쁘지 않아. 빡빡하긴 하지만, 엄청 좁은 건 아니니까.’
로렌조 케인은 앞서 당한 동료를 의식한 건지. 쉽게 스윙을 내지는 않았다.
공을 한번 고른 것 같다.
패스트볼의 타이밍을 읽어본 거겠지. 미안하지만 커터로는 내 패스트볼을 알지 못한다.
아아, 그 녀석은 패스트볼 삼형제 중 최약체다. 가장 약한 녀석이지.
“볼!”
얘가 제일 쎈 놈이고.
다시 한 번 더 바깥쪽.
비슷한 코스에 이번에도 타자는 스윙을 참았다. 살짝 제구가 나갔네. 씁.
볼이 되긴 했지만, 위력은 좋다. 오늘 포심이 좀 잘 긁히는 것 같은데?
언론이나 몇몇 전문가들은 라이징 패스트볼이라는 조금 낯간지러운 말로 지칭하기도 하는데. 확실히 위력은 좋아.
비록 스트라이크가 되지는 않았지만, 공을 지켜본 타자는 한 차례 침을 꿀꺽 삼켰다. 조금 더 긴장하기도 했고.
상상이상이라는 뜻이겠지.
90마일도 안 나오는 건데, 좋아봤자 얼마나 좋겠어? 그렇게 생각했는데. 직접 보니까 좀 당황스럽지?
솔직히 던지는 나도 그래.
내 포심이 이렇게 좋다니. 여전히 적응 안 된단 말이야. 그리고···
“스트라이크!”
서클 체인지업이 리그 최고의 마구로 손꼽힌다는 것 역시도 여전히 좀 어색하고.
3구는 서클 체인지업.
뚝 떨어지는 녀석이다. V1이지. 사실 나는 얘가 조금 더 정이 간다. 그나마 내가 예전부터 던졌던 것과 비슷하거든.
역회전이 강한 놈은, 제대로 던지기 시작하면서, 구위가 좋아진 덕분에 갑작스럽게 생겨난 친구니까.
야구 시작한 이후로 내내 똥볼로 살았는데, 갑자기 요 1년 사이 만에 너무 많은 것들이 바뀌었단 말이야.
내가 메이저리그에 있는 것이나. X나게 잘하고 있는 것이나. 그래서 부모님까지 경기장에 초청한 것이나.
“스트라이크 아웃.”
빅리그 타자를 손쉽게 삼진으로 잡는 것이나. 정말이지 달라도 너무 많이 달라졌어.
4구는 하이 패스트볼.
레이저처럼 직선으로 쭉 뻗은 공을 브루스는 간신히 잡았다. 아픈 건지 입술을 깨물면서.
뭐, 타자는 크게 헛돌았고.
아예 근처도 못 갔네. 라이징 패스트볼 맞긴 맞나봐. 내 입으로 말하니까 조금 민망하지만.
“You Suck!”
“You Suck!”
이것도 달라지긴 했네.
수만 명의 사람들이 함께 입을 모아 내 이름(?)을 외치는 것 말이야.
부모님 왔다고 조신한 척하더니, 이건 여전하구만. 부디 엄마랑 아빠도 그냥 이름으로 알아들으셨으면 좋겠다. 조금 과하게 ‘써억’이기는 하지만.
‘이제 13개.’
마지막으로 3번타자 에릭 호스머. 로열스 타선의 핵심이다. 3할 타율에 OPS .865, 홈런이 19개지.
골드글러브도 세 개나 받았는데. 마찬가지로 엄청나게 강력한 타자라고 보기는 뭐하다. 당장 OPS만 봐도 엄청 높은 편은 아니잖아?
‘다만 컨택이 좋긴 하지. 특히 이번 시즌은 더더욱 그렇고.’
다만 로열스에서 까다로운 타자 중 하나이긴 하기에,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니 선택을 내려야지.
‘마음 같아서는 삼진 잡고 싶지만···’
얼마나 멋있어? 엄마 아빠 보는 앞에서 첫 이닝부터 세 타자 연속 삼진! 캬~ 죽여준다, 죽여줘.
‘굳이?’
허나 삼진은 억지로 잡으면 안 된다. 오늘 목표가 삼진이라고는 하나. 거기에 집착하는 순간 망하지.
컨택이 좋은 타자이니, 어거지로 쑤셔 넣다가는, 괜히 한 방 맞을지도 모르고. 최소한 투구수는 좀 소모해야 할 거다.
뒤에 하위타선만 가도, 훨씬 쉬운 타자들 있는데 굳이 얘한테 그래야겠어? 어떻게든 빡세게 잡아야만 하는 타자라고 할 수도 없는데. 그러니···
“아웃!”
그냥 빠르게 잡고, 투구수를 아끼는 게 이득이지. 열세 개나 남았으니. 짧게 끝날 일이 아니니까. 못해도 7이닝은 던져야지. 어쩌면 더 걸릴 수도 있고.
3구째 몸쪽으로 박힌 투심을 빗맞추며, 에릭 호스머는 가볍게 아웃으로 물러났다.
“아, 그냥 삼진 잡혀 X신아!”
“어차피 뒤질 거, 왜 치고 지랄이야!”
“우우우우우우!”
“Suck 부모님도 직접 오셨는데, 왜 분위기를 망쳐!”
“괜히 찌질하게 굴지 말고 삼진이나 처먹어 쓰레기들아!”
타자가 아웃당했으면 그걸로 만족하면 될 텐데. 삼진이 아니라는 게 마음에 안 들었던 건지. 홈팬들은 덕아웃으로 돌아가던 타자를 한껏 욕했다.
특히 레이더스, 오늘은 비교적 얌전한 모습으로 온 그들이었지만. 눈빛은 살아 있었다. 입도 여전히 거칠고.
음, 그래. 오늘 좀 과하게 착하게 군다 싶더라. 이래야 우리 콜리시엄이지. 내숭 안 떠니까 얼마나 좋아.
그 모습이 마음에 들어 살짝 따봉을 날려주니, 소음은 더욱더 커졌다.
‘이제 두 개. 조금 빠듯하긴 하지만. 충분히 가능하지.’
첫 이닝을 마치니, 대충 견적이 잡혔다. 삼진 15개. 엄청나게 어렵지는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