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에인절스전이 끝난 뒤.
하루의 휴식일이 주어지면서, 선발 로테이션은 다시 재정비했고. 난 다시 1선발 자리를 되찾았다. 2선발이 편했는데 아쉽네.
‘책임 없는 쾌락도 끝이구만.’
2선발 자리가 은근 꿀이야.
에이스이지만, 1선발의 부담감은 없어서, 의무 없는 권리, 책임 없는 쾌락이 주어지거든.
아무튼 되찾은 1선발의 첫 상대는 이미 말했듯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그리 행복한 시즌을 보내고 있지는 못한 팀이다.
AL 동부지구 4위로, 토론토와 치열한 동부지구 꼴찌경쟁 중이니까.
‘그래도 타선의 파워는 진퉁이지.’
다만 지구 꼴등 경쟁을 할 만큼 아쉬운 팀 성적에 비해 타선 자체는 제법 강력하다.
오히려 타선 자체는 트라웃이 있는 에인절스보다 살짝 낫다고 봐도 무방하지.
파워가 준수한 타자들이 타선 곳곳에 배치되어 있으니까. 그러니 단순히 거쳐 가는 경기로 여겨서는 안 되겠지.
‘까딱하면 하나 맞을 테니까. 아무리 우리 홈이라고 해도.’
그래도 나도 상태가 나쁘지는 않았다. 무실점이 끝나면서, 흐름이 끊겼으니, 살짝 사이클이 내려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멀쩡하네?
‘약간 허무하긴 해도. 부모님 덕분에 다시 집중이 빡 돼서 그런가?’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기록은 끝났지만, 다다음 경기에 부모님이 날 보러 오신다고 하니. 정신이 확 들었다. 가족 버프 확실하네.
“저 혹시···”
“아, 네. 오시겠대요. 일정에 맞춰서.”
“아, 정말 감사합니다! 번거로우셨을 텐테···”
“번거롭기는요. 그냥 전화 한 통 한 건데.”
프런트 직원, 정확하게는 마케팅 팀 직원에게 알려주니, 참 좋아하더라. 몸 둘 바를 몰라 하던데. 부담스러워 죽겠어.
종종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오클랜드의 왕, 콜리시엄의 왕이라고 지칭하기도 하는데.
무슨 진짜 왕처럼 대접하네.
아무튼 부모님 초청 건은 그렇게 마무리됐고. 본격적으로 경기를 준비하는데. 이상한 말이 나왔다.
<규정이닝을 채운 Go, 시즌 조기종료?>
<이미 사이 영 수상은 확정! 지금 당장 시즌을 끝내더라도 MVP를 노려볼 만해···>
지난 에인절스전으로 163이닝이 되면서, 규정이닝인 162이닝을 채웠거든.
즉 이제부터 내 성적은 모두 다 정식 기록으로 인정받는다는 뜻이지.
그러니 몇몇 언론과 그거에 휘둘린 팬들은 내 시즌을 조기 종료시켜야 한다며 이야기하기도 했다.
어차피 루키 선수이니, 너무 과하게 혹사하는 것도 조금 그렇고. 이제 규정이닝도 채웠으니. 이대로 시즌을 마감한다면. 0.55라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ERA가 정식적으로 기록되는 거잖아?
이참에 아예 불멸의 기록을 남기자는 거지.
“어떻게 생각해?”
“터무니없는 개소리지. 누구 맘대로 내 시즌을 끝내?”
“왜, 나였으면 솔직히 혹했을 것 같은데. 0.55라니··· 야구라는 스포츠가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영원히 1위로 기록될 정도잖아?”
우스운 건 브루스를 비롯한 동료 선수들 몇몇은 의외로 그 이상한 말을 그럴듯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그렇지.
이미 규정이닝은 채웠으니.
딱히 안 될 것도 없잖아?
정식 기록이기도 하고.
‘이해는 가. 왜 이런 말이 나오는지.’
모든 기록이 깨지는 건 후반기다. 새로 갱신하면서 깨지기도 하고. 현재 진행 중이던 기록이 끝나기도 하지.
혹독한 여름을 보내면서 체력이 훅 떨어지기에, 결국 시즌의 막바지를 못 버티고 나가떨어지는 거다.
특히나 루키 선수들은 풀시즌 운영을 잘 못 하는 경우가 많기에, 초반에 막 스퍼트를 내다가 그대로 고꾸라지기도 하고.
그러니 걱정스러울 수밖에.
103년 만에 만들어진 0점대 ERA도 그렇게 무너질 수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규정이닝도 넘겼겠다, 그냥 보존하자는 거다. 또한 내가 트라웃에게 홈런을 맞은 것도 껄끄럽고.
<드디어 시작된 Go의 체력 저하? 빅리그의 여름은 루키에게 가혹하다!>
<트라웃에게 빼앗긴 홈런은 우연이 아니다! 몰락의 징조가 시작되고 있어···>
그래, 슬슬 나올 때가 됐지.
요즘 따라 조용하다 했다.
심지어 여름인데, 당연히 체력 얘기가 나와야지.
처음이야 내가 가진 멋진 스포츠맨쉽(?)이 부각되면서, 훈훈한 분위기가 흘렀지만.
그것이 조금 옅어지니.
여지없이 이런 예측들이 슬금슬금 다시 고개를 들었다.
지금까지야 내가 완봉과 퍼펙트를 기록하며, 무실점을 이어왔으니. 자기들이 생각해도 너무 개소리 같기에 닥치고 있었지만.
이젠 무실점도 깨졌고. 심지어 홈런도 맞았겠다, 슬그머니 꺼내 본 건데, 그게 팬들을 불안하게 만든 것 같다.
“날 너무 못 믿으시네.”
솔직히 이쯤 보여줬으면, 이제 저런 얘기가 안 나올 만도 하지 않나?
설사 누군가 개소리를 하더라도, 팬들이 안 흔들려야 하고.
지금 내 시즌을 조기종료 시키자는 건, 결국 내가 시즌 막바지에 훅 주저앉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기 때문인데.
데뷔하자마자 너무 파격적으로 잘 나가서 그런가. 계속 증명해야 하는구만.
‘그리고 사이 영 확정은 무슨. 어린놈이 스탯 관리했다고, 괘씸죄로 투표도 안 해줄 거면서.’
참고로 저거에 혹해서 시즌 끝내는 순간 MVP는 확실하게 날아가고, 확정이나 다름없던 사이 영도 불안해진다.
사이 영과 MVP라는 게 결국은 선정된 기자들의 투표로 결정되는 건데.
만약 정말로 나랑 구단이 영원불멸의 기록에 혹해서 지금 내 시즌을 끝내버린다면. 이걸 권유했던 기자들조차 막상 투표인단이 되면 등을 돌릴 거다.
말 그대로 0점대 ERA, 역대 최고의 ERA라는 기록만 남을 텐데. 하물며 그 기록마저도 두고두고 꺼내서 씹어대겠지.
기록을 위한 기록이라면서. 제대로 된 기록으로 쳐주지도 않을걸?
마치 날 위하는 척하면서 독이 든 술잔을 권하는 셈인데.
저런 거에 혹하면 바보다.
이제 좀 조용해졌다 싶었는데. 계속 귀찮게 구시는구만.
이게 슈퍼스타의 비애인가?
‘어쩔 수 있나. 계속 보여주는 수밖에. 아예 입을 콱 다물 때까지.’
그나마 중간중간 이런 개소리들을 닥치게 만들 실력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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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스볼~ 컨디션 괜찮나 보네?”
“뭐, 그럭저럭?”
경기 당일.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불펜포수의 리액션을 보아, 그럭저럭 무난한 것 같구만.
불펜포수의 리액션은 보통 네 단계로 나뉜다.
안 좋을 때는 더욱더 과장하고, 무난할 때는 적당하게 립서비스한다. 자신감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
반대로 좋을 때는 말수가 적어지고. 최고일 때는 아예 입을 콱 다물지.
최대한 집중해서 포구해야 하기에, 립서비스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지거든.
오늘은 반응을 보아, 포수가 보기에도 적당히 무난하구만.
나이스볼만 계속 외치는 걸 보면, 그냥저냥 평범한가봐.
대니얼과 워밍업하며 스스로 파악한 컨디션도 딱 그 정도였기에, 딱히 감흥은 없다.
“Go, 이번 경기는 적당히 상황 보다가 6이닝으로 끊는 게 어때?”
그대로 서서히 출력을 높이며 확실하게 어깨를 달아 올릴 때쯤, 옆에서 불펜투구를 보고 있던 스콧 에머슨이 슬쩍 그렇게 말했다.
“저번 경기도 그랬잖아요?”
“그니까, 오늘도 그러자고. 듣기로 더 중요한 경기가 있다면서?”
더 중요한 경기라.
이 양반도 들었나 보구만.
부모님 오시는 거 말이야.
그걸 명분으로 삼아, 오늘은 적당히 체력 아끼고, 부모님 앞에서 멋지게 던지라는 식으로 내 이닝을 줄여보겠다는 건데.
“7이닝으로 하죠. 그 정도는 던져야죠, 아무리 그래도 홈인데.”
어림도 없지!
어딜 내 이닝을 깎으려고.
이 고유석님께선 단단한 합금으로 만들어진 어깨를 가졌다 이거야. 아주 거뜬하다고.
내 반응에 스콧 에머슨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묘하게 불쾌하네. 마치 기대도 안 했다는 것 같잖아.
‘뭐, 틀린 말은 아니지. 다음 경기, 로열스전은 정말 최선을 다해서 던질 생각이니까.’
그가 뭘 걱정하는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부모님 앞에서 공을 던지는 만큼. 무조건 열심히 할 텐데. 괜히 오늘도 무리해서. 두 경기를 연달아 오버페이스를 하는 게 아닐까, 조금 걱정되는 거겠지.
특히나 투수코치로서, 전반기 막바지에 오버페이스 이후 폼이 떨어진 내가 남들 몰래 얼마나 고생했는지 잘 알고 있기에, 더더욱 염려되는 거고.
“더 중요한 경기는 없어요.”
“···그래, 그렇지.”
하지만 안 된다.
부모님 앞에서 던지는 거?
물론 중요하지.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이야?
용돈이나 받아 쓰던 마이너리거 아들내미가, 이젠 메이저리거로서 당당하게 상대 타자들 조지는 걸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인데. 무조건 열심히, 무조건 최고의 결과를 보여드려야지.
허나 그건 내 개인적인 사정일 뿐, 팬들에겐 아니다.
“밖에 한 3만 명쯤 되죠?”
“···어, 무실점이 끝났는데도 여전히 많이 오네. 무슨 베이브 루스도 아니고.”
“뭐, 그런 거죠.”
오늘 내 경기를 직접 보기 위해 콜리시엄을 찾은 사람은 약 3만 명 정도.
TV나 인터넷으로 중계를 시청할 사람들은 그보다도 훨씬 많다. 그러니 더 중요한 경기가 있을 리가 있나.
“그래, 내가 잘못 말했네. 이번은 내 미스야. 그래도 체력조절 잘해. 끝까지 던져야지, 중간에 나가떨어지긴 싫잖아?”
“그거야 당연하죠. 코치 심정은 이해하니까, 너무 그러지 마세요. 아, 슬슬 시작하겠네. 나가죠.”
팬들이 지켜보는 모든 경기를 다 중요하게 여기고, 전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던져야지.
이번엔 내가 옳다는 듯, 피식 웃은 스콧 에머슨은 자신의 실수를 시원스럽게 인정했다.
이래서 이 사람이 좋아.
괜히 권위의식에 찌들어서 고집부리는 스타일이 아니거든. 루키 치고 너무 과도하게 이닝을 소화하는 것 때문에 종종 쪼아대긴 하지만. 그거야 코치의 업무고.
“아니다, 있긴 하겠네.”
“응?”
“더 중요한 경기요. 포스트시즌, 월드시리즈. 그건 조금 더 중요하긴 하겠네요.”
“아, 그건 그렇지.”
그렇게 불펜을 나가니.
오늘도 수만 쌍의 눈동자가 나한테 집중된 것이 느껴졌다. 박수소리도, 환호성도.
“Suck! 가자! 홈으로 돌아왔으니까, 다시 시작해야지!”
“역시 집이 최고지? 찾아보니까, 그 에인절 스타디움인지, 데빌 스타디움인지. 너무 투수한테 불리하더라. 아주 X같은 곳이야. 역시 야구장은 콜리시엄 같아야지!”
“오늘 그냥 300K 채우자! 어제 홈런도 맞았겠다, 삼진 스물다섯 개 잡아버려!”
아주 괴상망측한 말들도 들려왔고. 에인절 스타디움이 투수한테 불리하다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나도 양심이란 게 있는 사람인데. 에인절 스타디움이 투수친화적이라는 말은 못 하겠다.
아무튼 그런 말들 속에서, 나는 씨익 웃으며 천천히 마운드로 걸어갔다. 오늘도 그들에게 최고의 경기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게 내 업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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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고~ 죽겠다. 뭔 놈의 사람이 아침부터 이렇게 많은지··· 오늘따라 더 많네. 무슨 날인가?”
“당신은, 감사할 줄 알아야지. 손님이 많이 찾아왔으면.”
아침부터 사람이 들어찼던 가게는 한순간 한산해졌고, 약간의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일종의 브레이크타임이지.
“사장님! 사장님, 시작해요!”
“어? 어어, 김군아! 정리 끝내고 갈 테니까, 너 먼저 보고 있어.”
사실 손님이 있었더라도, 지금은 무조건 휴식 시간이지만.
“우리 아들 효자네, 자기 엄마랑 아빠 딱 쉬는 시간에 경기하고.”
“효자지~ 나도 우리 어머니한테 잘했잖아? 다 나 닮은 거야.”
“웃기고 있네. 어머님 돌아가시기 전에 나 붙잡고 하신 말이 있는데. 당신이 자기 가슴에 대못을-”
“자자, 그만그만. 그 뭐, 철없을 때 흔히 하는 일을 왜 매번 우려먹나 몰라. 엄마는 이 사람한테 뭐 그런 얘기를 해가지고···”
저녁경기는 시간이 딱 좋다.
시차 덕분에 지금처럼 쉬는 시간에 딱 경기가 시작하니까.
사실 미국 기준으로 낮 경기, 12시쯤 경기가 있으면, 그땐 더 좋다.
비록 남들은 다 잠든 새벽녘이지만, 비몽사몽 영업 준비하며, 재료를 다듬거나, 오늘 막 받아온 고기를 살펴보면서 느긋하게 경기를 볼 수 있으니까. 딱 아침영업 시작할 때쯤 경기가 끝나지.
일반적인 회사원이었다면, 조금은 힘들었겠지만. 한평생 가게장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맞춰진 신체의 시계는 의외로 아들 경기를 보기에는 딱 좋았다.
“이런 걸 보면 미국 보내기 참 잘했어. 한국이었으면 가게 때문에 바빠서 못 보는 경기가 많았을 텐데.”
“지금처럼 잘 풀려서 다행이지. 난 예전 생각하면 아직도 걱정이야.”
“에이, 지금 잘 되면 됐잖아? 우리 아들이 다른 것도 아니고 메이저리거, 그것도 제일 잘하는 투수가 됐는데. 결과적으로 잘 선택한 거지.”
“사장님!”
“어, 간다, 가! 벌써 시작했어?”
“네! 이제 딱 시작해요.”
그래도 늘 지금처럼 좋지만은 않았다. 작년만 하더라도,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으니까.
물론 야구가 아니더라도, 끝내 실패하고 포기하더라도, 먹고 살 수는 있겠지.
당장 이 가게가 다 누구한테 가겠는가? 자식이라곤 외동아들 하나밖에 없는데.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해도, 뺀질거리긴 하지만 은근히 성실한 녀석이니, 어떻게든 먹고는 살 거다.
그래도 부모 된 마음에 얼굴도 잘 못 보는 아들이 걱정스러웠다. 차라리 바로 미국 보내는 게 아니라, 대학을 보냈어야 했나, 싶기도 했고.
“아, 딱 시작하네.”
“오늘 유석이 표정이 좋은데? 크~ 저번 경기는 진짜 아쉬워서 밤낮을 샜더만. 오늘은 좋나보네.”
“어련히 잘할까. 당신 말대로 세계에서 제일 잘하는 야구선수인데.”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렇게 얼굴도 보지 않은가?
무려 TV 중계방송으로.
경기 중계가 아니더라도, 뉴스나 각종 기사, 프로그램에서 수시로 언급되고 있고.
거기다··· 곧 직접 보겠지.
-스트라이크!
“저거 봐, 저거 봐. 딱 몸에 넣었지? 저거 유석이 컨디션 좋은 날에 저러잖아. 오늘 느낌이 좋다니까?”
다만 직접 중계를 볼 수 있게 되면서 조금 안 좋은 게 있다면. 공 하나에 일희일비한다는 거다.
마이너리그에 있을 때는 아들이 전해주는 정보 외엔 전무했기에, 마음을 졸이면서도, 그냥 믿고 지켜보기만 했는데.
이젠 모든 걸 다 볼수 있게 됐으니, 하나하나가 신경이 쓰이는 거지.
-볼!
“아~ 저거 심판 저거. 한국도 한국이지만. 메이저리그도 심판들 좀 이상하단 말이야. 저게 어떻게 볼이야? 저번에 에인절스 때도 판정 이상하게 해서 볼 만들더니. 이거 동양인이라고 무시하는-”
“아 당신은 좀 조용히 좀 하면서 봐! 옆에서 시끄러워 죽겠네.”
“···김군아 넌 어떻게 생각하냐?”
“사모님이랑 같습니다.”
“그래.”
조금이라도 아쉬운 날이면, 온종일, 아니, 다음 경기까지 기분이 나빠지고.
또 저번처럼 퍼펙트게임이나, 노히트노런, 완봉 같은 걸 하는 날이면 한동안 뭐 엄한 약이라도 먹은 사람처럼 내내 기분이 둥실거린다.
다행스러운 건, 전자보다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 정도. 쓸데없이 웃기는 하지만, 울거나 찌푸리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이게 그나마 유일한 단점이겠지. 물론 이런 단점 따위, 경기를 보고, 응원할 수 있는 것에 비하면 아무렇지도 않지만.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아웃!
“그렇지! 바로 잡아버리지. 우리 아들도 나 닮아서 불의를 보면 못 참지. 팀 베컴. 쟤 잘하는 녀석인가? 이름은 진짜 잘하게 생겼는데.”
“네, 적당히 잘해요. OPS가 8할이던가? 그래도 너클 커브에 그냥 바로 속네요. 저게 좌타자도 좌타지만. 우타자 입장에선 전혀 들어오지 않는 궤도로 들어오거든요.”
“그럼그럼. 저거 마구야, 마구.”
그래도 요즘은 좀 괜찮다.
손님이 적은 아침에만 일하는 새로운 종업원, 흔히 ‘김군’이라고 불리는 녀석이 있었으니까.
아들보다 한 살 어린 녀석인데, 복학하기 전에 등록금 모은다고 하는 게 기특하게 여겼더니.
뜻밖에도 야구를 잘 아는 건지, 척척 설명해주며, 마음을 달래줬다. 못하는 날은 어쩔 수 없는 이유를 말해주고. 잘하는 날은 당연히 그런 것이라며 찬양했다.
“저거, 지금 저거. 저거만 봐도 그래요. 저게 타자 입장에선 진까 끝까지 공이 안 보이거든요. 마지막까지 팔 각도를 이용해서 몸 뒤에 공을 숨기고 저렇게 던지면-”
사실 요즘은 슬슬 의심스럽다. 진짜 등록금 때문 맞나?
-아웃!
-세이프!
“아이고, 이게 맞네. 저걸 쳐?”
“조나단 스쿱이라고. 최근 볼티모어에서 제일 잘하는 타자에요. 정타 같았는데, 힘에서 밀려서 짧게 끊어졌어요. 그래서 시프트에 오히려 안 걸렸거요.”
“운이 나빴다, 이거구만.”
“오히려 구위가 너무 좋아서, 생긴 문제죠.”
가끔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하게 팬심이 넘치기에. 어쩌면 우리가 부모님인 걸 알고 가게에 들어온 건 아닌지 약간은 의심됐다.
슬그머니 얼굴을 보니, 역시나 잔뜩 상기되어 있다. 그것을 잠시 뜨뜻미지근하게 봤을 때. 가게 문에 달아둔 종이 울렸다.
“네~”
“아, 혹시 영업해요?”
어색한 듯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는 사람. 혹시나 해서 문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저 인간이 또 브레이크타임 붙여두는 거 깜빡했네.’
자기 잘못을 모르는 건지, 여전히 김군과 죽이 척척 맞으며 이야기하는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사장이 이런 정신머리인데 대체 어떻게 가게가 지금까지 유지되는 건지. 가끔은 신기할 지경이었다.
“정말 죄송하지만 지금은 브레이크 타임이라서요. 손님은 받지 않고 있고. 영업 시작은 11시 30분부터입니다.”
“아, 브레이크 타임···”
“아들 경기를 봐야 해서요.”
-스트라이크 아웃!
“그렇지! 바로 잡아버리지!”
“고유석 선수가 주자를 잘 안 내보내서 그렇지, 주자가 루상에 있는 상황에서도 위기 극복 능력이 뛰어나서, 가장 득점을 얻어내기 힘든-”
또 삼진을 잡았나보다.
예전에 고등학생 때만 하더라도 삼진 하나 잡을 때마다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는데. 요즘은 너무 많이 들어서 식상할 정도.
죄송스럽게 손님을 돌려보낸 뒤, 대신 브레이크타임을 붙여두고 다시 돌아오니. 여전히 만담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 유석이가-”
“네, 고유석 선수가 그게···”
“당신 또 깜빡했더라?”
“어? 아아, 그거. 어우, 내 정신 좀 봐. 아침부터 바빠서 그런가, 깜빡했네.”
“됐어, 이미 붙여뒀으니까. 이러다 미국 갈 때도 그냥 가겠네.”
“에이, 그건 안 까먹지.”
너스레를 떠는 모습에 한숨을 픽 내쉬니,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미국 간다고 말하자마자, 내내 미국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저런 눈빛이지.
“저···”
“그래, 유석이 한테 네 사인꼭 받아다 줄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별거 있겠는가. 사인하나 받아다 달라는 거지. 귀찮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쁜 일이지.
그만큼 잘하고 있다는 거니까.
기대에 찬 김군을 잘 달래준 뒤 다시 자리에 앉아, 티비 화면에 집중했다.
며칠 뒤에는 직접, 야구장에서 보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의 경기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니까.
모두 눈에 담아둬야겠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볼 수 있으니까.
아들의 경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