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오늘은 진짜 좀 내긴 내네.”
6회 초. 우린 다시 2득점이 추가했다. 이제 5대0. 그래도 오늘은 적당히 내긴 했네.
“Suck, 5점이면 충분하지?”
“1점이라도 충분하다니까. 얘 ERA가 얼만데. 5점은 너무 과한 거야.”
“우리가 할 때는 한다고. 저번 경기도 엄청 내줬잖아? 퍼펙트라서 1점만 내도 충분하긴 했지만.”
타자들은 간만에 아주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예, 아주 잘나셨습니다. 무려 5점씩이나 내주시다니.
그래, 득점지원 딱 이 정도만 해줘도 나도 더 안 바라지. 물론 다음 경기는 또 미친 듯이 선풍기질을 할 수도 있다는 게 문제지만.
“이번 이닝이 마지막인 건 알고 있지?”
그렇게 공격이 끝난 뒤.
주섬주섬 준비하고 있을 때, 스콧 에머슨은 슬쩍 이번이 마지막임을 주지시켰다.
저번 경기에 퍼펙트했잖아.
다르게 말하면 완봉인데.
6이닝으로 만족해야지.
“네, 뭐. 아쉽긴 한데. 오늘은 이해해야죠.”
“그래, 괜히 욕심 안 부리니까 얼마나 좋아. 하··· 평소에도 좀 이랬으면 소원이 없겠네.”
내 대답에 스콧 에머슨은 만족한 듯 미소를 짓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가 또 평소엔 뭘 어쨌다고 그러십니까.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좀 오해하겠네.
무울론, 내가 쪼오끔 의욕이 과하고, 야구를 너무 사랑해서 한 이닝만 더를 밥 먹듯이 외치기는 하지만.
그거야 뭐랄까, 프로 야구 선수로서의 의지, 워크에씩, 뭐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지.
그리고 과거가 무슨 상관이야? 현재와 미래가 가장 중요하지. 사람은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법이니까.
“오늘은 말 잘 듣잖아요? 그럼 된 거죠.”
“말이나 못하면··· 그럼 조심해서 잘 던지고 와.”
골치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휘휘 손을 젓는 스콧 에머슨에게 씨익 웃어준 뒤 오늘 마지막 마운드로 향했다.
‘이제 53이닝이던가? 그럼 공동 4위네. 같이 4위인 양반도 애슬레틱스로 기억하는데.’
뭐, 기록이 욕심나서 찾아본 건 아니다. 난 그렇게 막 기록에 연연하고 그런 사람 아니야. 그냥 기사로 봤어, 기사로. 진짜야.
아무튼 현재 공동 4위일 텐데. 이번이 마지막 이닝이니, 55.2이닝의 3위까지 올라가는 건 불가능이고.
오늘은 그냥저냥 단독 4위에만 올라서야겠지. 마침 공동 기록자가 애슬레틱스 출신선수이니, 뭔가, 옛 시대를 대체하는 뉴제너레이션 같아서 멋있겠네.
그렇게 의지를 불태웠지만. 사실 가장 어려운 순간이었다. 이번 이닝은.
‘9번 1번 2번. 트라웃 보는 건 확정이네.’
뭘 해도 마지막 타자는 무조건 마이크 트라웃이네. 참고로 이건 투수 입장에서 정말로 개X같은 상황이다.
기분 좋게 내려가고 싶은데. 마지막에 떡하니 타석에 트라웃이 있다고 생각해봐.
‘저번 이닝에 공을 잘 골라내던데. 확실히 읽은 거겠지.’
심지어 세 번째 타석에, 직전 타석에 볼넷을 얻어내면서 감도 어느 정도 잡고, 타이밍도 거의 적응했을 트라웃이 말이야.
‘역시, 필살기를 꺼낼 시간인가?’
다행히 그를 저지할 확실한 방법은 있다. 투수가 가장 X같은 타자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필살기지.
그걸 꺼낼 시간이 온 건가?
딱히 거부감은 없지만···
‘그래도 일단은 잘 던지다가, 그때 가서 판단을 내려야겠지.’
만나기도 전부터 이런 생각을 하는 건 그리 현명한 행동은 아닐 거다.
마운드에 오를 때는 항상 잡념을 먼저 깔끔하게 털어내야 하니까.
부정적인 생각과 걱정을 지운 뒤 마운드 위에 우뚝 서자, 반대로 이번엔 타자가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로 배터박스에 섰다.
9번타자 칼렙 코와트.
7월 말에 콜업한 선수로.
메이저랑 마이너를 수시로 왔다갔다하는 유망주인데. 콜업 이후 11경기 동안 4할 타율을 유지하며 꽤나 성적이 준수하나.
오늘은 그리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브레이킹볼에 대한 대처가 별로였지. 잘 따라가지도 못하는 것 같고.
그리 눈이 좋은 타입은 아니다. 파워도 갭파워가 조금 있는 걸 제외하면 별로고.
“스트라이크!”
그러니 그냥 조지면 되는 거지. 어차피 이번 이닝에 다 털어 넣어야 하니. 그냥 머리 비우고 때려잡자.
먼저 초구로는 서클 체인지업. 몸쪽으로 들어오는 코스에 스윙했지만, 배트는 헛돌았다. 꽤나 당황한 모습.
‘눈앞에서 사라진다고 했던가?’
난 타자가 아니라서 모르지만. 종종 내 서클 체인지업, V1과 V2 모두 처음 본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눈앞에서 사라진다고.
눈치를 보아, 칼렙 코와트 역시 같은 감상을 느낀 것 같다.
‘그러게 왜 우타석에 들어와. 그냥 아까처럼 좌타로 나오지.’
스위치 히터라서, 저번 타석엔 좌타석에 섰다가. 이번엔 우타석에 섰는데. 이유야 뻔하다. 너클 커브지, 너클 커브.
직접 보니 칠 자신이 없었던 거겠지. 그래서 우타석으로 들어온 거고. 하지만···
“스트라이크!”
완성도 높은 좋은 구종은 딱히 방향을 가지지 않는다.
2구로 너클 커브.
바깥쪽에서 들어오는 궤적에 이번에도 헛스윙이 나왔다.
“뭐하는 거야! 붕붕 휘두르기만 하냐?”
“잘하더만 오늘은 왜 이래! 좀 정신 차려!”
“이래서 주전 하겠어?”
이미 심기가 불편했던 에인절스 팬들은 붕붕 연이어 헛스윙하는 게 못마땅했던 건지 타자를 질책했다.
안쪽, 바깥쪽 완전히 농락당하고 있으니. 충분히 불만스러울만 하지만.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 타자에게 부담감을 추가로 얹어주면 쓰나.
“스트라이크 아웃!”
몸쪽 포심 패스트볼.
순간적으로 투구 속도를 조금 더 높이며 재빠르게 던진 공을 타자는 넋 놓고 바라만 봤다. 아마 딴생각 하는 동안 타이밍을 놓친 모양이네.
‘일단 원아웃.’
이걸로 53.1이닝 연속 무실점이니, 일단 단독 4등은 됐다.
음, 아주 기쁘군. 내 기록도 한 100년쯤 갔으면 좋겠네.
‘소수점은 너무 없어 보이잖아. 기왕이면 꽉 채워야지.’
이제 다시 타순은 1번.
시무룩한 모습으로 내려간 칼렙 코와트를 뒤이어 유넬 에스코바가 올라왔다.
그는 앞서 칼렙 코와트와는 달리 베테랑답게 차분한 표정으로 타석에 올라왔다.
‘슬슬 서클을 때리기는 하던데.’
이미 몇 번이고 만나서 그런가. 생각보다 많이 적응한 것 같았다.
물론 무출루로 틀어막혀 있기는 한데. 단단히 집중한 것 같으니 좀 까다롭겠어.
‘일단 차분하게 하나.’
칼롭 코와트와는 달리, 그래도 어느 정도는 신경을 써서 잡아야 하는 타자다. 뒤에 있는 놈이 무섭기도 하고.
어떻게든 투아웃을 만들어 둬야 그나마 나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초구는 조심스럽게 바깥쪽으로 투심을 던졌다. 나가도 좋고. 혹시 상대가 건드린다면 땅볼이 될 테니까.
3루수가 믿을만한 녀석이니. 땅볼로 유도하면 잡을 가능성이 높지.
“스트라이크!”
근데 이걸 잡아주네.
스윙을 꾹 참은 타자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주심을 흘겨봤다. 이건 솔직히 나도 인정.
‘갑자기 존이 늘어났네.’
브루스도 딱히 프레이밍 안 했고. 나도 나간 줄 알았는데, 이걸 스트라이크로 잡아줘?
‘감사합니다! 쌩큐!’
뭐, 나야 땡큐지.
볼 감안하고 던졌는데. 공짜로 카운트 벌었네. 아주 좋아.
흘끔 주심을 곁눈질하던 유넬 에스코바는 다시 시선을 정면에 고정했다. 나야 땡큐지만. 타자는 진짜 X같을 텐데도 금방 털어내는 것을 보면. 그만큼 경기감각이 올라왔다는 뜻.
‘낮게 하나 가자.’
어차피 스트라이크 하나 공짜로 얻었으니까. 한 번 더 빼도 괜찮지.
바깥쪽으로 낮게. 쭉 깔아서 던졌다. 서클 체인지업 V1.
떨어지는 것까지 감안하면 완전히 뺀 거나 다름없는데.
‘이걸 쳐?’
타자는 거의 배트를 일직선으로 세우다시피 하며, 떨어지는 서클에 가져다 댔다.
그대로 쭉 미는 스윙.
타구는 3유간으로 빠르게 굴렀다. 노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타구는 3루수 맷 채프먼과 유격수 마커스 시미언의 중간지점으로 절묘하게 흘렀다.
“세이프!”
간신히 마커스 시미언이 잡기는 했으나, 결과는 세이프.
아슬아슬하게 송구가 늦었다.
이러면···
‘X됐는데?’
원 아웃 주자 1루.
“마이크! 마이크!”
“하나 날려줘! 부탁이야!”
“홈런이나, 3루타. 둘 중 하나만 날려줘! 마이크 너라면 가능하잖아!”
올라오는 타자는 2번타자 마이크 트라웃. 그는 최소한 지금까지 내가 직접 본 것 중 가장 날이 선 모습으로 타석에 올라왔다.
이건 예감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무조건 한 방 맞을 것 같았으니까.
‘필살기··· 쓸까?’
그 모습을 보니, 애써 눌러뒀던 필살기가 떠올랐다. 그게 뭐냐고? 딱 보면 몰라. 고의사구지.
솔직히 고민된다.
만약 기록을 더 이어가고 싶다면, 그냥 거르는 편이 더 쉬울 테니까.
그다음 타자로 있는 에인절스의 묵은 변비 같은 양반 덕분에 말이야.
‘하지만 그것도 좀 위험하지. 푸홀스가 지금 맛이 갔다고는 해도. 파워는 아직 좋은 편이니까.’
투아웃이었다면 망설임 없이 걸렀을 텐데. 지금은 이미 주자가 한 명이 더 있지 않은가?
‘그리고··· 설사 잘 맞아떨어져서, 이번 이닝 잘 막는다고 해도. 그리 보기 좋지는 않겠지.’
기록을 위해서 승부를 피한다는 건, 별로 좋은 이미지는 아니다.
물론 고의사구 또한 야구의 일부분이니, 전략적이고, 이성적이라며 칭찬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어쨌든 대다수는 별로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볼 거다.
그렇게 된다면. 괜히 지금까지 쌓아올린 기록 자체가 폄하되거나, 똥칠이 될 수도 있고.
‘남은 선택지는 결국 승부뿐이네.’
막판에 X같이 걸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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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마이크 집중 제대로 했는데? 하나 제대로 치겠네.”
“솔직히 쟤가 루키 주제에 너무 나대기는 하잖아. 아무리 마이크가 성격 좋다고 해도. 자존심이 안상하겠어?”
“딱히 그래서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아니야.”
별로 저 투수, Go에게 불쾌한 건 아니다. 사실 그럴 이유는 없지 않은가?
저번처럼 자신을 대놓고 도발한 것도 아니고. 오늘 경기에서 비웃는다거나, 무슨 세리머니를 한다거나 한 것도 아니지.
다만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한 건 사실이다. 그 이유가 그저 스스로에게 있었을 뿐.
‘별로 좋은 일은 아니야. 같은 지구팀 투수를 상대로 부진한다는 건.’
동료들에게 미안하지만.
트라웃은 자신이 에인절스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았다.
팀의 성적의 30%는 그 자신의 성적에 달렸다는 것 역시도.
그토록 중요한 핵심 선수가 하필이면 같은 리그, 같은 지구 겸쟁팀의 투수에게 일명 ‘호구’를 잡힌다는 건. 대단히 나쁜 일이지.
‘그리고··· 한 번쯤 제대로 후련하게 날려보고 싶기도 하고.’
앞서 언급한 이유가 팀을 위핸 생각이라면. 이건 개인적인 욕심이다.
좋은 투수, 아니, 최고의 투수를 보면, 한 번쯤은 시원하게 날려보고 싶은 게 타자의 욕망이니까.
솔직히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고. 앞선 두 번의 승부 모두 팀의 패배를 구하지 못했으니까. 루키 투수에게 막혀서.
오늘은 그걸 깨보고 싶었다.
그렇기에 더욱더 집중했고, 감각을 가다듬었다. 딱 한 번. 모든 감각이 최고조로 달했을 때. 딱 한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면. 놓치지 않기 위해서.
그 기회가 왔다.
‘설마··· 고의사구는 아니겠지?’
타석에 올라서는 순간, 투수의 눈에서 번민이 느껴졌다.
무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듯한 표정에 트라웃은 자연스럽게 고의사구가 떠올랐다.
저 투수는 그런 걸 별로 개의치 않아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드디어 잡은 완벽한 기회.
부디 이걸 허무하게 날려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알버트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자신만이 가능하니까.
이전 타석들과는 달리 조금 오랫동안 생각이 이어졌고. 결국 결심을 내린 건지.
투수는 자세를 잡았다.
그래, 그렇지. 그래야지.
트라웃은 기꺼이 승부를 택해준 투수에게 씨익 미소를 날리며 배터박스를 가득 채웠다.
“볼!”
초구는 포심 패스트볼.
아슬아슬하게 보더라인에 들어온 코스였지만, 살짝 밖으로 나갔다.
“스트라이크!”
2구는 낮게 찍힌 체인지업.
역회전하거나, 뚝 떨어지는 대신, 공은 편안하게 존 아랫부분에 걸쳤다. 쓰리핑거 체인지업. 꽤나 과감한 판단이다.
‘역시 강심장이야.’
모를 리가 없을 거다.
지금 마이크 트라웃 자신이 얼마 만큼이나 준비됐는지.
이런 밋밋한 체인지업 정도는 굳이 정타가 아니더라도 담장을 넘길 수 있겠지.
그런데도 투수는 패기롭게 던졌고, 카운트를 잡았다. 이제 원 앤 원.
“볼!”
“스트라이크!”
“파울!”
“파울!”
그 뒤로도 투수는 차례차례, 하지만 굉장히 빠른 간격으로 공을 던졌다. 마치 개싸움을 유도하는 것처럼.
3,4,5,6구가 거의 줄지어서 들어왔으나, 그런 파상공세에도 트라웃은 침착하게 공을 골랐다.
나간 건 무시하고.
애매한 코스는 쳐내고.
“볼!”
그리고 7구.
바깥쪽으로 던져진 너클 커브고, 스트라이크존의 귀퉁이를 뭉퉁 자르며 뚝 떨어졌다.
잘하면 걸칠 수도 있는 절묘한 코스. 허나 트라웃은 꾹 참았고, 결국 풀카운트가 완성됐다.
설마 이러다가 내보내려는 건가? 고의사구가 아닌 것처럼.
그런 의심이 불쑥 들기도 했지만, 진지한 투수의 얼굴에 다시 지워버렸다.
‘만약 승부를 한다면.’
볼넷은 필요없다.
차라리 삼진을 당할지라도.
시원하게 휘둘러야지.
그래야 그나마 조금이라도 만족스러울 테니까.
그는 차분하게 투수의 공을 예측했다. 만약 그가 자신을 잡으려고 든다면. 피하지 않고 승부를 끝내려고 한다면.
과연 어디로 던질까?
선택은 금방 내렸다.
애초에 길게 고민할 여유도 없고. 거의 공을 받는 즉시 즉각적으로 공을 던져대니까.
마지막 7구.
또렷하게 공을 지켜보며, 트라웃은 배트를 휘둘렀다.
몸쪽으로 과감한 코스.
예상은 적중했다.
쭉 들어오는 공은 분명-
‘떨어지겠지.’
서클 체인지업이다.
뚝 떨어지는 구질이겠지.
마치 멋지게 포심 패스트볼인 척하면서. 마지막에 속이기 위해. 아니나 다를까 공은 떨어졌고.
트라웃은 몸을 역동적으로 비틀며, 몸쪽 낮은 코스라는 굉장히 까다로운 위치로 날아온 공을 골프공처럼, 배트가 드라이버라도 되는 것처럼 퍼 올렸다.
“후우···”
“하아···”
날아가는 타구를 보며, 트라웃과 포수는 똑같이 한숨을 뱉었다. 서로 의미는 달랐지만.
“으아아아아아아아!”
“이거지! 이래야지!”
“X발 마이크! X발 마이크가 진자로 쳤어!”
“하하하하하하하하! 잘난 척은 다 하더니 꼴 좋네!”
평소 만원이라도 조용한 편인 에인절 스타디움은 시끌시끌해졌다. 어린 꼬마아이도, 노년의 노신사도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배트 던져! 던져버려!”
그를 신사적이고, 프로답다며 칭찬하던 이들조차 이번엔 후련한 배트 플립을 바라는 것 같다. 그만큼 많이 쌓였다는 거겠지.
허나 그럴 수야 없지. 투수에 대한 예우가 아니니까.
솔직히 그 역시 그 어느 때보다도, 그 어떤 홈런보다도 지금이 가장 후련했기에, 마음 같아서는 멋지게 던지고 싶지만···.
‘그래도 피하지 않고 싸워줬는데. 그러면 안 되지.’
솔직하게 말해서. 기록을 원했다면 트라웃 자신을 걸렀어도 됐다.
결국 남는 건 기록이지. 그게 어떻게 만들어졌는지가 아니니까.
그런데도 끝까지 싸워줬으니.
최대한 예의를 갖춰야겠지.
그렇기에 배트를 살포시 내려놓은 뒤 최대한 빠르게 베이스를 돌던 트라웃은 이내 피식 웃었다.
‘안 하길 잘했네.’
3루를 지나 홈 플레이트로 향할 대. 투수 역시 그를 봤다.
그리고 말없이 엄지를 추켜 보였다. 마치 멋진 홈런이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만약 저런 녀석에게 배트 플립이나, 타구 감상 같은 걸 했다면, 아마 스스로가 부끄러워서 못 견뎠을 거다.
자신의 기록이, 역사에 길이 남을 기록이 깨졌는데도 투수는 시원스럽게 상대를 인정할 줄 알았다.
‘Trout Gae Sae Ki? Ah Sibal Geunyang Gureul Gul? JotGatDa Sibal?’
아마도 모국어인 건지.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얼핏얼핏 들리기는 했지만, Korean은 잘 모르기에. 알아들을 수는 없으나. 의미는 전달됐다.
선수 대 선수로서 싸운 상대에 대한 인정 혹은 다음을 기약하는 말이겠지.
자신 역시 같은 생각이라는 것처럼 트라웃은 비웃음이 아닌, 진심으로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홈 플레이트를 밟은 뒤, 먼저 들어간 유넬 에스코바와 하이파이브 하느라, 투수, 고유석의 얼굴이 기괴하게 변한 것을 미처 보지 못한 채.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그 뒤, 고유석은 울분을 토해내듯 연이어 삼진을 잡은 뒤,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그 위에, 53.1이닝 연속 무실점이란 기록을 내려놓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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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슬레틱스 에인절스에게 5대2 승리, 허나 그럼에도 지우지 못한 아쉬움···>
<마이크 트라웃, Go에게 두 번째 피홈런을 선사하다!>
<트라웃에 무너진 고유석, 드디어 두자릿수 실점&자책점!>
경기는 애슬레틱스의 승리로 끝났고, 고유석이 승리를 더 추가하며, 17승까지 올라섰지만, 그런 것에 집중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기대했던 기록이 마지막 순간, 홈런에 무너지며, 결국 종지부가 찍혔으니까.
53.1이닝 연속 무실점.
충분히 위대한 기록이고, 역사에 길이 남을 순간이었지만. 애슬레틱스 팬들 중에서 그것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었다.
충분히 더 이어질 수 있었던 기록이었으니까.
[#A’s]
[트라웃 X새끼 트라웃 X새끼 트라웃 X새끼 트라웃 X새끼]
└아름다운 명문이야. 나도 동감한다.
└트라웃 이 X새끼는 리그 흥행에 도움이 안 되네. 이걸 초를 쳐?
└그 새낀 지가 무슨 짓을 한지 알고 있을까? 100년은 넘게 이어질 기록을 막은 거야.
└아, 하필이면 왜 또 홈런이야··· 언론에서 또 개지랄하겠네. 체력저하라느니 뭐니 하면서.
당연하게도 그 모든 걸 망쳐버린 트라웃을 향해 애슬레틱스 팬들은 거의 원수에 가까운 적개심을 표출했고.
[#A’s]
[밥 멜빈 X신아! Go를 5회에 내렸어야지! 왜 꾸역꾸역 더 던지게 해서 괜히 기록을 망쳐!]
└직전 경기에서 퍼펙트 했는데 왜 6회나 던지게 해! 어깨 보호 안 하냐!
└트라웃 딱 봐도 감 좋아보이던데. 이건 벤치에서 바로 고의사구를 해야 했어.
└아, 진짜 하루의 마지막이 X같이 끝났어.
심지어 몇몇 이들은 과도한 충격을 버티지 못한 채. 조금 황당한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Dodgers]
[역시 트라웃님이 최고시다. 어딜 갓 데뷔한 루키 새끼가 레전드들 기록을 넘보려고.]
└이래서 트라웃이 최고의 선수인 거지. 에인절스는 X신이지만, 트라웃은 인정한다.
└그는 리그의 전통을 존중할 줄 아는 모범생이야. 이번에도 전통을 지켜줬네.
└오클랜드 놈들, 이미 달성했다면서 아주 노래를 부르던데. 진짜 쪽팔리겠네.
반대로 점점 자신들의 레전드의 기록에 근접하는 고유석을 보며 약간 쫄렸던 다저스 팬들은 라이벌 에인절스와 트라웃을 치하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일어났고 말이다.
이렇듯 한순간 끝나버린 무실점 기록에 충격과 공포, 그리고 환희가 휘몰아쳤을 때.
몇몇 언론에선 마지막 장면에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스포츠맨쉽이 잘 드러났으니까.
<상대를 인정할 줄 아는 진정한 ‘Major’ Go, 홈런을 날린 트라웃에게 엄지를 추켜세웠다.>
<최고의 투수와 최고의 타자, 리그를 이끌어나갈 두 선수의 멋진 스포츠맨쉽!>
<트라웃, ‘기록을 망친 것 같아 미안하다’ ‘기꺼이 축하해준 Go에게 감사’ ‘장난스러움에 가려졌으나, 그는 생각보다 훨씬 멋진 선수’ ‘다음에도 멋지게 승부해보고 싶다’며 고유석을 극찬!>
어떻게 보더라도 멋진 장면이었으니까. 비록 1위에는 올라서지 못했지만. 어찌 됐든 역사에 남을 기록을 올린 투수.
그리고 그런 투수의 기록을 홈런으로서 직접 마감시켜버린 타자.
그 두 사람이 서로에게 엄지를 추켜주고,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은 마치 야구영화 속의 장면 같았으니까.
[#Angels]
[난 조금 놀랐어. Suck 얘 생각보다 멋진 구석도 있네. 후련하게 인정할 줄도 알고.]
└그냥 또라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이크한테 엄지 세우는 거 보고 좀 다시 보이더라.
└같은지구 경쟁팀 투수인 게 껄끄럽긴 하지만. 마이크랑 함께 메이저리그를 이끌어 나갈 선수라는 건 확실하지.
└멋진 홈런이었으니, 본인도 후련하게 털어낸 거지. 여전히 싫은 녀석이지만, 진짜 프로네.
늘 장난스럽고, 감정 표현에 솔직하며, 조금 상대팀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듯한 모습을 보여줬던 고유석이기에.
그것은 마치 사람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트라웃의 말처럼 생각보다 멋진 선수 같았으니까.
거기에 고유석의 적절한 인터뷰까지 겹치면서. 역대급 기록이 깨졌음에도 생각보다 훈훈한 모습이 생겨났고.
분노했던 애슬레틱스 팬들 역시 조금 감정을 누그러뜨렸지만. 태평양 건너 어느 나라의 인터넷에선 웃음잔치가 열렸다.
[할 말은 한다, 고카콜라!]
-(Gif.)트라웃 개새기 아 X발 그냥 거를 걸 X같다 X발ㅋㅋㅋㅋ 유석아 너무 대놓고 욕하는 거 아니냐? 글러브로 입이라도 좀 가리고 해라ㅋㅋㅋㅋㅋㅋㅋ
└빼박아님?
└이거 말고 다른 거라고 하기에는 입모양이 너무 완벽함 거의 교과서 수준
└입모양 봐서는 발음도 존나 아나운서처럼 정확했을 듯
└손은 따봉하면서 입으론 쌍욕하네ㅋㅋㅋ
└고유석 솔직히 ㅈㄴ호감임 투수치고 감정에 너무 솔직함ㅋㅋㅋ
└이거 양키들도 지들끼리 추측하던데. 트라웃 인정하는 거다. 다음을 기약하는 거다. 멋진 홈런이라는 뜻이다, 의견 ㅈㄴ 분분함
└현실은 트라웃 개새기ㅋㅋ
└미국에선 멋지다고 좋아하는 분위기던데. 그냥 우리끼리 묻어두자.
└ㅇㅇ 원래 모르는 게 약이지
아는 자들에겐 너무나도 잘 보였으니까. 고유석이 참지 못하고 내뱉은 진짜 속마음이.
다만 현지에서는 고유석에게 호의적인 분위기로 이어졌기에,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우리끼리의 비밀로 묻어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