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일단 첫 스타트는 잘 끊었다.
삼진은 아니지만, 어쨌든 트라웃 잡았잖아?
상대가 에인절스라면, 그것만으로 이미 반은 먹고 들어간 셈이지. 이 경우도 시작이 반인 셈인가?
“그나저나, 나 진짜 싫어하긴 하나 보네.”
시작부터 반이나 먹고 들어가서 그런지, 홈팬들이 아주 원망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봤다.
심지어 덕아웃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쪽 수비잖수. 투수나 그라운드를 봐야지, 왜 상대팀 덕아웃을 보고 있어.
부촌인 오렌지 카운티의 고매한 부르주아 젠틀맨 나으리라서 그런지, 대놓고 욕은 안 하는데. 칼만 주면 일단 찌르고 볼 것처럼 노려보네.
“솔직히 네 팬들 빼면 누가 너 좋아하겠어. 자기 팀 잡아 족치는 X같은 놈인데.”
“그래,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잘 알겠다.”
브루스 이 새끼, 날 평소에 X같은 놈이라고 생각했었구만.
요즘 괜찮게 하고 있어서 내 마음속의 평가가 많이 올라갔는데, 다시 감점이다, 이 새끼야.
포수라는 놈이 파트너, 영혼의 단짝, 상전, 주인님인 선발투수를 그렇게 생각한다니.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군.
“그나저나··· 어디 뭐 불편한 곳은 없지? 퍼펙트 한 거 때문에 아직 힘들다거나.”
브루스는 내 반응에 뒤늦게 수습하려는 건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건 왜. 혹시 점수를 따려는 거라면, 이미 늦었어.”
“그런 거 아니야. 사람이 다 Suck 너처럼 생각하는 줄 알아?”
알아, 뭐 때문인지.
사실 다른 선수들도 내색은 안 하고 있지만, 날 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역대 순위가 바뀌는 건 아니지만. 제법 그럴듯한 기록에 도전 중이거든. 한 이닝 남았지.
‘이제 49이닝이니까.’
이제부턴 앞자리 수가 바뀐다는 뜻이다. 수십 년동안 없었던 일이니, 궁금할 수밖에.
“멀쩡하니까, 걱정하지 마라. 그리고 너 슬슬 조심해야 하지 않냐? 성적 요새 많이 박더만. 빠따 좀 쳐라.”
“그게 내 마음대로 되나··· 그래도 난 네가 있으니까. 괜찮아. 우린 영혼의 파트너잖아?”
웃기고 자빠졌네.
어디서 나한테 묻어가려고.
내가 무슨 너클볼 투수도 아니고, 전담포수가 왜 필요해? 알아서 살아남아라.
“근데 너 타격 준비 안 하냐? 슬슬 네 차롄데.”
“아니, 나까지 안 와.”
9번타자이긴 해도, 안타 몇 개면 곧 나가야 할 텐데. 여유로운 게 이상해서 물어보니. 아주 확신에 차 있다.
“딱 보면 알지. 오늘은 안타 막 나오는 날이 아니야.”
“타자의 감이 절절하게 담긴 말 잘 들었다.”
투수로서 억장이 무너지는 말이구만. 뭐, 이젠 몇 번 겪다 보니까, 아무래도 좋았지만.
“아웃!”
그렇게 브루스랑 만담을 나누는 사이, 그의 확언처럼 2회 초는 그의 타석이 돌아오지 않은 채로 끝났다.
딱 코앞에서 끊기네.
대기타석으로 나가던 브루스는 머쓱한 표정으로 금방 돌아왔고.
그래, 어째 처음부터 점수를 낸다고 했다. 사실 기대도 안 했어.
‘퍼펙트 때 몰아치지 말고, 좀 나눠서 쳐라, 나눠서.’
주섬주섬 글러브를 끼면서, 마찬가지로 수비를 준비하던 타자들을 싸늘한 눈으로 쳐다보니, 다들 시선을 돌렸다.
“Suck, 참고로 난 돈 값 했다? 내가 볼넷 얻은 것 덕분에 상대 투수 흔들린 거 알지? 내 덕분에 크리스가 한방 친 거라고. 난 무죄야.”
어제, 기내의 승자가 됐던 것이 아직도 좋은 건지, 제드 라우리는 씨익 웃으며 그렇게 항변했다.
예, 참 좋으시겠습니다.
기왕 어린 루키의 밀머니를 드셨으면, 볼넷이 아니라 홈런을 하나 쳐주셨으면 참 감사하겠는데 말이죠.
됐다, 내가 뭘 바라냐.
그냥 공이나 던지자.
####
“쟨 못 보던 새에 더 미쳤네.”
다시 마운드로 올라온 투수를 바라보며, 배팅장갑을 착용하던 안드렐톤 시몬스는 징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미친놈이지, 미친 게 아닌 이상 어떻게 저런 성적을 찍겠어?”
“ERA만 보면 무슨 불펜투수 같더라.”
“불펜투수도 저 성적이면 사이 영 가져다 줄걸?”
그게 기폭제가 된 건지.
봇물이 터진 것처럼, 다른 타자들 역시 동참하며 투덜거렸고. 특히 좌타자들은 아까 전 덕아웃에서 보았던 너클 커브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클 커브 그건 대체 뭐야? 저쪽 투수코치 실력이 그렇게 좋나? 무슨 구종이···”
“그렉 매덕스한테 배운 거 아니야?”
“매덕스가 커브도 던졌던가?”
“뭐, 생각해보면 오클랜드가 은근히 선발투수는 잘 나오잖아. 코칭 시스템이 좋은 거겠지.”
“코칭 시스템이고 나발이고, 오늘은 딱 하나라도 좀 치고 싶다···”
타자들은 그렇게 한탄하면서도 눈빛마저 꺾이지는 않았다.
비록 이번 시즌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고, 팬들에게 여전히 실망을 안겨주고 있다고는 하나.
상대가 그 어떤 투수더라도, 그 투수를 두들기는 것이 그들의 일이었으니까.
‘하나 쳐야 하는데···’
그중 가장 처음으로 타석에 오른 콜 칼훈은 터져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참아냈다.
최근 그의 성적은 그리 좋지는 않았다. 아니, 그냥 나쁘다. 그것도 아주 심각하게.
시즌 성적도 그리 좋지는 않으나. 최근 10경기 동안 34타수 6안타, 1할대의 타율에 머물었으니까.
팬들은 슬슬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는 것 같았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트라웃과 함께 믿을 만한 중심타자로 찬양받았지만. 올해는 알버트 푸홀스와 함꼐 묶이는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지.
물론 푸홀스는 현대야구에서 가장 위대한 타자 중 한 명이지만, 에인절스에서 푸홀스라는 단어는 그리 좋은 뜻은 아니다.
‘어떻게든 중간에 끊어야지. 이거 계속되면···’
단순히 그런 팬들의 반응뿐만이 아니더라도, 부진을 한 차례 끊어줄 필요가 있기도 하고.
제법 연륜이 쌓였기에 잘 알고 있다. 지금처럼 부진을 계속하다가, 감을 완전히 잃으면. 그땐 정말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비록 눈앞의 투수가 힘든 상대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적절했다.
저런 투수에게 얻어낸 안타 하나의 값어치는, 단순히 팀의 사기를 넘어, 선수 개인에게도 꽤나 큰 영향을 주니까.
“오래간만에 봅니다.”
“그래, 참 오랜만이네. 영영 안 만났으면 더 좋았을 것을.”
“뭐, 한번 사무국에 건의해봐요. 디비전 이동이나, 리그 이동 같은 거.”
“NL로 가려고?”
“못하는 쪽이 가야죠.”
애송이 포수마저 이젠 그를 무시하는 걸까? 타석에 오르자마자 능글거리며 맞이한 포수에 괜스레 기분이 나빴다.
그래, 메이저리그 물을 좀 먹긴 했겠지. 잘난 투수한테 기대어서 말이야.
‘같잖네.’
이번 시즌 오클랜드 투수진, 그중 선발진이 예상 외의 호성적을 찍고 있기는 하나.
그것에 포수들의 비중이 크다고 여기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특히나 저 투수, Go, 아니, Suck의 경기에서는.
직접 볼배합을 하고, 혼자 다 한다는 건 이미 유명했으니까.
기껏해야 공 받는 기계 주제에 마치 진짜 메이저리거가 된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꼴이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차라리 스티븐 보그트나, 조시 페글리처럼 익숙한 베테랑들이었다면 이해라도 하지.
‘Suck 저 녀석도 그렇고, 얘도 그렇고. 오클랜드 루키들은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빌어먹을 Jerry-2차대전 시기, 독일군을 지칭하는 은어-새끼.
그렇게 한 차례 포수를 씹은 뒤, 콜 칼훈은 온전히 투수에게 집중했다.
마음 같아서는 오만한 포수를 조금 더 씹어주고 싶지만. 눈앞의 투수는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까.
조금이라도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있는 것이 들키면, 바로 목을 물어뜯겠지.
“스트라이크!”
사실 단단히 준비하고 있더라도, 언제나 목덜미를 노리고 달려드는 Mad Dog이긴 하지만.
바깥쪽 포심 패스트볼.
역시나 공이 빠르다.
이게 어딜 봐서 80마일대야?
서클 체인지업으로 인해, 좌투수인데도 우타자에게 조금 더 강한 듯한 면모를 보여주는 Suck이지만.
좌타자들에게도 고충이 있었다. 서클 체인지업이야 우타자보다 낫다 뿐이지, 좌타자들에게 충분히 괴물 같은 구종이고. 또한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디셉션이 지저분한 투구폼이니까. 큰 체구를 이용해서 공을 끝까지 숨기지.
같은 손인데 궤적까지 잘 안 보이니, 공은 더 빠르게 느껴진다. 리그 최고수준의 수직 무브먼트까지 합쳐지면 그야말로 최악.
거기다 이제는···
‘Dammit, 그건 대체 뭐냐고.’
방금 전 덕아웃에서 들었던 동료들의 한탄이 떠올랐다.
만약 카운트가 투 스트라이크까지 몰리면. 이번 타석은 그걸로 끝이다.
“파울!”
그런 조급한 마음에 스윙이 나갔다. 이번에도 바깥쪽. 서클 체인지업. 떨어지는 공을 억지로 배트 끝으로 맞췄으나. 딱 그 정도에 그쳤다.
그토록 엄금했던 투 스트라이크. 이제 그것의 차례다. 세상 참 X같다며, 그렉 매덕스와 오클랜드 투수코치, 그리고 코칭 시스템을 욕했던 그것.
“스트라이크 아웃!”
너클 커브.
저것이 등장한 순간.
리그 최고의 서클 체인지업에 그나마 피해가 덜하다는 좌타자의 장점은 사라졌다.
몸을 맞출 듯 날아오다, 급격하게 꺾이는 궤도에 저도 모르게 내민 배트가 헛돌았다.
삼구삼진.
“You Suck!”
“크하하하하하하! 이런 놈이 4번 타자야? 야! 니 덕분에 좀 시원하다!”
빌어먹을.
콜 칼훈은 욕지거리를 애써 씹어 삼켰다. 못 보던 새에 바뀐 건 저 투수만이 아니었다.
저 망할 놈의 열성팬들은 웬 X같은 구호로 타자들을 놀리기 시작했으니까.
AL 타자들 사이에선 제법 유명한 이야기다. Suck에게 삼진을 당하면, 다방면에서 멘탈이 털린다는 건.
“살펴 가세요.”
그에 동조라도 하는 건지, 피식 웃으며 자신을 배웅하는 포수에 그저 입술을 씹으며 콜 칼훈은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곧이어 5번타자 안드렐톤 시몬스. 그는 나름대로 확실한 전략을 세우고서 타석에 들어왔다.
‘그냥 휘두르자. 몸쪽인 거 예상하고.’
원래도 승부를 질질 끄는 편은 아니지만, 이번엔 더욱더 그럴 생각이었다.
‘마이크를 제외하면, 그나마 내가 타격감이 괜찮지. Suck 저 녀석이라면, 한번 기를 눌러두려고 할 거야.’
성적이 좋은 타자에게 더욱더 강력하게 달려들어, 감을 눌러놓는 성향의 투수니까.
“와아아아아아아!”
“그렇지! 이거지!”
“니가 최고다! 마이크를 제외하면 니가 최고야!”
예상은 적중했다.
몸쪽 포심 패스트볼.
과감한 코스에 그는 즉시 스윙을 가져갔다. 좌중간을 깔끔하게 가르는 안타.
땅볼이지만, 워낙 빨랐기에 3루수와 유격수의 사이를 절묘하게 꿰뚫었다.
오늘 경기 첫 안타가 나오자 홈팬들은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지난번, 퍼펙트를 했다고 하던데. 줄줄이 털리는 타자들에, 설마 우리도 그런 X같은 꼴을 보지는 않을까, 조금 걱정스러웠으니까.
일단 퍼펙트도, 노히터도 깨졌기에 그것만으로 안심하기는 충분했다.
“하위타선의 힘을 보여주자!”
“하나만 날려 하나만!”
한발 더 나아가, 찬스를 이어가길 기원하며, 열심히 소리치기도 했으나.
1루 베이스를 밟은 안드렐톤 시몬스를 보며 살짝 눈썹만 씰룩인 투수는 이내 씨익 웃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마치 그런 기대가 우습다고 말하는 것처럼. 1루에 딱 붙어 마운드를 지켜본 안드렐톤 시몬스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 이게 문제지.
‘하나를 쳐도, 그다음이 잡히니···’
저 투수에게 연달아 안타를 만들어내는 건, 정말이지 더럽게 어려운 일이니까.
누구 하나가 어떻게든 출룰 하더라도, 그게 점수로 이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
당장 이번 시즌 여덟 개밖에 되지 않는 실점과 자책점만 봐도 알 수 있고.
[Go, 50이닝 연속 무실점!]
그렇게 2회 말이 끝났고. 이닝이 끝난 순간, 전광판에는 이런 글자가 떠올랐다.
비록 에인절스의 선수는 아니지만, 워낙 역사적인 기록익기에, 조촐하게나마 축하는 해주는 것이지.
50이닝 연속 무실점을 기록한 건, 88년 오렐 허샤이져 이후, 무려 29년만의 일이니까.
아메리칸 리그로 한정한다면, 무려 1913년의 월터 존슨 이후로 처음이니, 100년 하고도 4년만의 일이고. 즉, 라이브볼 시대 최초의 기록이다.
그러니 축하는 해줄 수밖에.
“X같네.”
“저런 개같은 기록을 왜 우리 홈에서 하고 지랄이야.”
“오클랜드 냅두고 애너하임에서 난리네.”
물론 기분은 굉장히 개 같다.
홈팬들은 물론 선수들도 불편한 눈으로 전광판을 봤다.
왜? 아주 폭죽까지 터트려주지? 경기장 안내방송도 해주고. 에인절스가 역사에 남을 거라고 말이다.
Go You-Suck에게 50이닝 연속 무실점을 만들어주며, 기록에 공헌했다면서.
“쟨 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
“안드렐톤이 나가서 좀 기대했더니, 어림도 없네.”
다만 선수들은 그런 자존심보단, 당장의 위협이 더 걱정이긴 했다. 안타를 맞으며, 좀 빈틈을 보이나 싶더니.
다시 냉큼 틀어막는 모습은 정말, 징그럽게 느껴졌으니까.
하긴, 저런 놈이니까 50이닝이나 연속으로 무실점을 한 거겠지.
과연 이번 경기가 끝나기 전에, 자신들이 저지할 수 있을까? 그것이 궁금하기도 했고.
“알버트, 혹시 뭐 방법 없어요? 비법 같은 거라거나.”
“그런 게 있으면 내가 쓰겠지.”
몇몇은 알버트 푸홀스를 보기도 했다. 비록 지금은 에인절스의 큰 똥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하나.
그 역시 당당히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을 레전드다. 무수한 괴물들과 싸워본 영웅이고.
그렇기에 혹시 그라면 무언가 방법이라도 있지는 않을까, 궁금했으나. 사실 그 역시 상대전적에서 전패를 기록하고 있기에, 조금 우스운 질문이기는 했다.
허나 놀랍게도, 그는 방법을 알았다. 다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뿐.
‘괴물은 같은 괴물로 잡아야지.’
메이저리거는 모두 천재다.
세계에서 가장 야구를 잘하는 사람들만 모인 것이니까.
야구 천재들이지.
허나 푸홀스는 잘 알았다.
저런 종류의 괴물은 그저 평범하기만한 천재들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을.
특히나 투수의 경우 어느 정도 선을 넘어가는 순간, 절대적인 권력자가 되고.
‘7년 전이었다면··· 한 방 정도는 가능하지.’
자신도 그런 괴물이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말이다.
역사에 남을 만한 괴물이었지. 그렇기에 괴물 대 괴물으로서 숱한 다른 괴물들을 박살 내봤고.
허나 이제는 아니다.
그의 자존심은 여전히 스스로가 최고라고 말했지만. 이성은 어느 정도는 인정하고 있다. 그의 시간은 거의 저물었다.
그러니 저런 괴물에겐, 그저 맛 좋은 한입거리 수준이리라. 실제로··· 조금 불쾌하나, 저 투수는 알버트 푸홀스 자신이 타석에 오를 때마다 꽤나 반가운 눈치이고.
‘그러니 믿을 만한 다른 괴물에게 의지해야지.’
그는 흘끔 덕아웃 한쪽을 봤다. 모두가 전광판을 보며 탄식하는데도 관심이 없다는 듯 글러브만 끼고 있는 녀석.
정말이지 야구밖에 모르는 녀석인데. 그렇기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괴물이지.
‘트라웃, 얘가 하나 해줘야겠네.’
지금의 무덤덤함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정말로 많이 자존심이 상했다는 것을.
야구를 사랑하는 만큼, 상대의 기록에도 기꺼이 박수쳐줄 줄 아는 멋진 녀석인데. 아예 관심조차 없다는 건.
‘어떻게든 파티 테이블을 엎을 생각이라는 뜻이지.’
부담을 주기 싫었기에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도 결국 에인절스의 대처 방법은 마이크 트라웃, 그것뿐이었다.
####
이닝 하나에 역사가 바뀐다.
그것에 흥분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을까?
최소한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하다못해 고유석을 싫어하는 사람조차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즐거운 일이 아닌가?
자신들이 역사의 한 공간에 있다는 것이.
<아메리칸 리그 역사상 최고의 업적!>
그 역사가 시작됐다.
50이닝에 올라섰으니까.
모두가 예상하던 일이었지.
고유석이 2이닝조차 막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으니까.
-스트라이크 아웃! 고유석! 삼자범퇴! 3회 말마저 무실점을 기록하면서! 본인의 연속 이닝 무실점 기록을 51이닝까지 늘립니다!
역사는 계속해서 전진했다.
조금씩, 조금씩. 야금야금.
3회 말은 금방 끝났다.
애초에 8,9번타자로 이어지는 하위타선 스타트이고. 1번타자인 유넬 에스코바도 그리 훌륭한 타자라고는 말 못 하니까.
[#A’s]
[이대로 3위까지 올라가자! 몇 이닝 안 남았어!]
└Go가 월터 존슨의 위에 올라선다니. 상상만해도 행복하네.
└이젠 그가 아니라, Suck이야 말로 진짜 역사상 최고의 투수라는 뜻이지.
└그건 너무 갔고. 이제 첫 시즌인데.
└너 에인절스 첩자냐? 닥치고 고개나 끄덕거려.
뭐, 오클랜드 팬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만족스러운 경기가 아닌가?
삼진도 잘 잡고 있고.
무실점도 이어지고 있다.
기쁘게 지켜봐야지.
물론 2경기 연속 퍼펙트라는 위대한 대업(?)을 기대한 이들은 조기 종결된 가능성에 아쉬워했지만.
[#A’s]
[다음 이닝 첫 타자 트라웃이네. 좀 느낌이 안 좋아.]
└그딴 개소리 할 거면 그냥 꺼져라. 넌 에이스 팬이 될 자격이 없어.
└트라웃이 뭐가 무섭냐? Go한테 맨날 털리는 놈인데.
└걔가 느낌이 안 좋으면 뭐? 또 기껏해야 땅볼이나 치면서 빌빌대겠지.
그런 축제의 위기는 딱 하나였다. 언제나 트라웃이지.
물론 대다수 팬은 걱정하지 않았다. 같은 지구이기에 마이크 트라웃이 얼마나 괴물인지 잘 알고 있지만.
그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Suck’은 그런 괴물을 몇 번이고 잡아냈으니까. 그것도 아주 멋들어지게.
역대 최고를 노리는 시점에서, 트라웃조차 이제는 상대가 아니라며 믿었고.
4회 초 추가 2득점을 올리며, 더욱더 분위기가 올라갔으나.
-6구, 바깥쪽- 볼입니다. 볼넷이군요. 4회 말, 선두타자 마이크 트라웃이 볼넷으로 출루합니다.
-잡아줄 만한 코스였던 것 같은데, 주심이 조금 빡빡하네요.
트라웃은 트라웃이었다.
4회 말 선두타자로 나온 그는 차분하게 공을 지켜보며 출루했다.
[#A’s]
[아, 주심 뭐야. 에인절스한테 돈 받아처먹었냐? 그게 어떻게 볼인데?]
└기록 도전 중이면 좀 여유롭게 콜을 해야지. 융통성이 없어.
└저 레이시스트 새끼. 분명 Go가 동양인이라서 그러는 거야. 확실해. 아마 앨리버마나 조지아 출신이겠지.
└멍청한 주심 때문에 X밥한테 괜히 볼넷 하나만 내줬네.
팬들은 주심을 욕했으나.
사실 그들도 알았다.
그냥 잘 골라냈다는 것을.
그것을 잘 알고 있으나, 언제나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한 식으로 생각하는 법.
팬들은 한순간 주심을 인종차별자로 몰아넣으며 욕했고.
-2루에서 세이프! 마이크 트라웃이 도루에 성공합니다.
-정말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주력이네요. 상당히 발이 빨라요.
-네, 트라웃의 주된 툴 중 하나이죠.
불합리한(?) 볼넷을 받은 주제에 도루까지 하는 트라웃은 더욱더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양심(?)도 없는 건가?
운 좋게 볼넷으로 나갔으면, 1루에 딱 붙어 있을 것이지.
열심히 트라웃을 씹은 팬들이었지만, 곧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온화해졌다.
-3루수 맷 채프먼이 잡아서 1루로~ 아웃!
-첫 타석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내야땅볼이네요.
-네, 이전의 도루가 아니었다면, 더블플레이도 가능했을 텐데. 에인절스로선 그나마 다행입니다.
알버트 푸홀스는 1회에 이어 다시금 땅볼 귀신으로 아웃을 당했고.
-5구, 쳤습니다. 높이 뜬 타구, 중견수가 잡는군요. 마이크 트라웃은 여전히 2루에 머무릅니다.
콜 칼훈 또한 외야 플라이볼에 그치며 물러났다.
-5구, 높은 속구! 헛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지난 이닝 안타를 쳤던 안드렐톤 시몬스인데, 이번엔 삼진이군요!
-전매특허죠. 낮은 변화구 이후 하이 패스트볼. 고유석 선수의 스터디셀러 중 하나인데, 역시나 잘 통하네요.
마지막으로 지난 이닝 안타를 치며, 에인절스의 사기를 올렸던 안드렐톤 시몬스는 삼진으로 잡히면서 4회 말 역시 무실점으로 막을 내렸다.
안타 하나면 득점이었기에,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은 에인절스 팬들은 다시 조용히 고유석을 노려봤다.
<필라델피아에서 오클랜드로, Go는 애슬레틱스의 새 시대를 열 수 있을까?>
무실점은 이제 52이닝으로 늘어났고. 이제부턴 진짜 기록이 목전이었다.
연속 이닝 무실점 기록의 역대 4위 잭 쿰스의 기록은 53이닝이었으니까. 또한 단순히 기록 외의 상징성도 있었다.
오클랜드로 연고지를 이전하기 전,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시절의 기록이었으니까.
마치 팀의 새 시대를 여는 듯한 스토리였기에, 최소한 기자들에겐 크게 어필됐다.
특히 오클랜드의 연고지라고 할 수 있는, 베이 에어리어 지역 언론은 더 말할 것도 없었고.
그것을 미처 모르고 있던 팬들 또한 과거를 조명하는 언론에 조금 더 기대를 품으며 이닝을 지켜봤다.
5회 초의 공격이 무산된 뒤.
다시 돌아온 고유석의 마운드. 5회 말 마운드 위에 우뚝 선 고유석은 마치 팬들의 마음을 다 안다고 말하는 것처럼. 여유롭게 웃으며 공을 던졌다.
-스트라이크 아웃!
6번타자 루이스 발부에나는 지난 이닝에 이어 다시금 삼진으로 물러났다.
-아웃!
7번타자 벤 르비어는 5구째에 던진 투심을 빗맞히며 홈 플레이트 위로 둥실 떠 오르는 맥없는 뜬공을 만들었고.
-스트라이크 아웃!
9번타자 마틴 말도나도는 존에 딱 걸치는 서클 체인지업을 멍하니 지켜만 보며 루킹삼진을 기록했다.
그것으로 이닝 종료.
또 하나 더 올라간 이닝은 이젠 역대 공동 4위로 올라섰고, 팬들은 고유석의 이름을 외치면서도 그다음을 지켜봤다.
[#A's]
[이제 딱 아웃카운트 하나면 Go가 애슬레틱스 역대 최고가 되는 거네.]
└이미 역대 최고지.
└아니지, 한 3이닝 더 던져서 월터 존슨도 넘겨야지!
└에이, 퍼펙트도 했는데. 그건 좀 그렇지.
└다음 경기에 몰아서 하는 것도 멋지겠어.
└딱 7이닝만 던지고 55이닝까지 만들어서. 다음 경기에 싹 넘기면 되겠네.
그의 기록이 겨우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