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퍼펙트게임 다음날,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견된 Go?>
결국 들켰네.
어쩐지 롤렉스 살 때 뒤통수가 따갑더라니. 알아본 사람들의 눈빛이었구만.
하긴, 내가 여기 베이 에이리어에선 워낙 유명인이잖아? 강 건너라고 해도, 못 알아볼 수가 없지.
우스갯소리로, 내가 등판한 다음날에는 지역 뉴스의 첫 인사가 ‘어젯밤 Go가···’로 시작할 정도니까.
“넌 진짜 좀 또라이야. 그걸 거기서 살 생각을 하냐?”
“안 맞아죽은 게 다행이지···”
“욕이 그냥··· Suck 너 밥 안 먹어도 배부르겠다.”
“난 Suck 때문에 SNS 잠깐 닫았어. 롤렉스라서 좋기는 한데. 그걸 왜 거기서 사··· 괜히 선물 받은 거 사진 찍어서 올렸다가 욕만 먹고 있네.”
자이언츠 팬들이 난리가 났나보다. 나야 SNS를 안 하고, 인터넷도 뉴스를 제외하면 우리 팬 커뮤니티 정도만 둘러보기에 잘 모르지만.
그 자이언츠 팬들에게 참으로 치욕스러운 롤렉스의 주인공인 브루스는 나 때문에 자기한테도 욕이 쏟아진다면서 징징거리는데···
“꼬우면 롤렉스 반납하던가?”
“그래서 기쁘다는 뜻이지. 라이벌에게 듣는 욕만큼 완벽한 칭찬이 어디 있겠어? 아, 너무 행복하다.”
그래, 그래야지.
팔면 멋진 신차 하나 뽑을 수 있는 시계를 받았는데. 당연히 욕 정도는 감수해야지.
설마 내가 진짜로 뺏어갈까 싶었던 건지, 브루스는 아예 테이블 밑으로 손목을 숨겼다.
땀띠나 인마, 안 그래도 한여름이라 더워 죽겠는데, 그걸 꾸역꾸역 차고 있네. 기내라서 좀 춥기는 하지만.
“그나저나, 트라웃, 돌아온 뒤에도 엄청 잘하고 있던데. 이번에도 신묘한 방법 있어?”
뭐, 해프닝은 해프닝이고.
중요한 건 다가올 경기겠지.
크리스 데이비스는 마치 지난번처럼 내가 이번에도 입을 털어서 트라웃을 긁을지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말이 좀 많이 나왔었잖아? 투수버전 브라이스 하퍼다, 어린놈이 입만 털 줄 안다. 선배 선수와 상대팀에 대한 존중이 없다.
별말이 나왔었지.
뭐, 우리 팬들은 좋아했지만. 사실 이 팬들이야 내가 마운드 위에서 똥을 싸더라도 멋진 행위예술이라며 박수칠 사람들이니까.
“뭐가 있겠어요. 저번처럼 입이라도 털라고요? 그런 것도 한 두 번이지. 이젠 안 통해요.”
솔직히 지금 생각해보면 좀 쪽팔려. 그거 트라웃 하나 잡는 게 뭐라고. 그런 쌩쇼까지 하다니.
이젠 나도 ‘품격’이라는 게 있고, ‘클래스’가 있는 사람인데. 그런 건 자제해야지.
리그 최고의 투수인데 말이야. 원래 강자는 묵묵한 법. 앞으로는 묵직한 카리스마의 고묵직이 되어야겠지.
뭔가 어감이 이상하네.
아무튼 난 커트 실링이 되고 싶지 않다. 그 커리어는 존중하지만. 입 조심 해야지.
나도 언제 훅 갈지 모르잖아?
“그나마 에인절스는 좀 쉬운 편 아니야? 트라웃 빼면 다 고만고만하잖아?”
“그렇긴 하지. 거의 트라웃 왕자님과 여덟 난쟁이 수준이던데.”
부상 복귀 이후 미쳐 날뛰고 있는 트라웃의 존재감은 대단히 위협적이지만.
사실 그걸 제외하면, 에인절스는 그리 까다로운 상대는 아니다.
우리의 위대한 리빙레전드 푸홀스는 여전히 푸홀스하고 있는 중이고. 나머지 타자들도 그리 신통하지는 않지.
브루스의 말마따나, 트라웃과 여덟 난쟁이 수준인데. 그렇기에 팬들이 기대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가, 팬들 진짜 난리도 아니더라. Suck 얘보고 다음 경기도 완봉해서, 57이닝 연속 무실점 찍으라고 하던데?”
“Suck 얘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가능하긴 뭐가 가능해요. 두 경기 연속 완봉이라니, 팔 박살나겠네.”
아무래도 우리 팬들은 날 별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아.
에인절스는 만만하다. Go는 X나게 강하다. 그러니 이번에도 완봉이다. 이런 논리를 펼치면서, 내 혹사를 지지하는 걸 보면 말이야.
두 경기 연속 완봉이라니.
거의 저주 수준이네.
진지하게 잠깐 쉬는 게 아니라, 한 달은 앓아누워야 하겠는데? 어쩌면 어깨가 박살날 수도 있고.
다만 이해는 된다.
다시 말하지만, 트라웃 빼면 할 만하거든. 문제는···
“트라웃이 지금 여전히 Crazy Mod 잖아요. 그게 문제죠.”
“그래, 걔도 좀 문제가 있어. 부상 회복하고 돌아오자마자 성적이 왜 그 모양이야?”
“부상 없었으면 성적 어땠을지, 상상도 안 되네.”
후반기에 다시 복귀한 트라웃은 진짜··· 미친놈 같았다.
17경기 나와서 22안타 5홈런 13타점 13볼넷. 타율 0.344 출루율 0.455 장타율 0.594로 OPS가 1.048을 기록 중이니까.
‘놀라운 건 이게 그나마 폼이 떨어진 상태라는 거지.’
부상 전까지 합치면, 지금 OPS가 1.160이거든. 그전에는 1.203을 기록 중이었고. 나도 나지만, 진짜 이 양반도 정상은 아니야.
‘트라웃만 잘 넘기면 되는 건데··· 그게 쉽지가 않겠네.’
결국 에인절스와의 매치업의 관건은 이번에도 똑같았다.
어떻게 트라웃을 넘기는가?
결국 그게 관건이지.
“다이.”
“갑자기? 크리스, 너 너무 치킨이 된 거 아니야? 예전엔 팍팍 잘 달리더니. 천하의 크리스 데이비스가 언제 이렇게 됐어?”
“Suck 쟤 지금 웃고 있잖아. 분명히 뭐 들고 있는 거야. 너도 빨리 죽어라. 또 원정에서 굶기 싫으면.”
“아니! 저번에는 웃으면서 블러핑 했잖아?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내 눈은 못 속이지. Suck 얘 지금 페어도 안 될걸?”
LA, 정확하게는 애너하임으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열린 포커판은 이전과 달리 조금은 지지부진했다.
원정 왔다갔다, 하는 동안 밀머니 다 쓸어서 시계값 채우려고 했더니. 나한테 하도 털려서 그런가, 이제 다들 잘 안 따라오네.
크리스 데이비스는 내 표정을 보고는 후련하게 손을 털었지만. 어디나 호구는 있는 법이지.
“난 올인. 내 패 궁금하면 Suck 너도 받던가. 뭐, 어차피 블러핑이겠지만.”
“음··· 오케이 콜.”
“어우, 여기 판 쎄네. 난 다이. 가난한 루키라 밥이라도 잘 먹어야 돼서.”
“오케이, 그럼 콜 먼저 까봐.”
제드 라우리, 이 양반은 거의 원정마다 자기 사비로 해결해놓고 배우는 게 없네.
자기도 롤렉스 사달라며 징징거리더니, 이젠 대상을 바꿔서, 내 밀머니를 노리는 것 같다.
“A풀하우스. 어때?”
아마도 패가 좋긴 하겠지.
날 블러핑으로 몰더니. 일부러 살살 긁어서 판돈을 키우려고 하는 걸 보면. 하지만 나도 만만찮게 좋아서 말이야.
“제드 또 털렸네.”
“아, 에이스 한 장이 꾸역꾸역 안 나오더니. 저기 다 있었네.”
먼저 죽은 이들은 감탄했다. 웬만해선 절대 안 지는 패니까. 특히 뭔가를 노렸던 건지, 에이스를 갈망하던 브루스는 아쉬운 탄식을 뱉었고.
나는 씨익 웃으며 밀머니 봉투를 챙길 준비 했다. 척하면 척이지. 아마 스트레이트 정도 들고 있겠네.
“2 포카드. 내가 먹었네.”
“와, 에이스 안 떠서 다행이네. 풀하우스에 포카드. 스트레이트론 어림도 없네.”
“일곱 번 털리더니, 결국 한 번은 갚아주네.”
“흐흐흐, 이제부터 역전 시작이지.”
하지만 패자는 나였다.
포카드? 어쩐지 너무 긁더니.
저런 걸 쥐고 있었구만.
제드 라우리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테이블의 봉투를 챙겼다. 음, 잘 따놓고 막판에 망했네. 제드, 자기도 롤렉스 사달라며 노래를 부르더니. 꿩 대신 닭이구만.
이것으로 제 8회 애슬레틱스배 밀머니빵 원정 전세기 포커 대회는 아쉽게도 내 8연승이 저지되면서 막을 내렸다.
“으아아아아!”
“제드 갑자기 왜 저래?”
“드디어 Suck을 올인시켰거든. 충분히 저럴 만하지.”
“아~ 나도 꼈어야 하는 건데. 다음에는 나도 껴.”
통로를 지나가던 마커스 시미언은 환호하는 제드 라우리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크리스의 설명에 부러운 눈빛을 했다.
별걸 다 부러워하네. 아니지, 얘도 다섯 번이나 털렸으니까. 부러운 게 당연하겠어.
-잠시 뒤 애너하임 존 웨인 공항에 착륙하니, 모든 승객 여러분께선 안전벨트를 착용하시고···
판을 깨고 자리로 돌아온 순간,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벌써 도착했네.
‘느낌이 안 좋네.’
처음으로 밀머니를 털리고 애니하임을 밟다니. 별로 기분 좋은 시작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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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웃과 난쟁이들이라며 폄하됐던 게 무색할 정도로.
1차전은 타선 전체가 골고루 득점에 성공하며, 6대7로 아슬아슬하게 패배했다.
선발투수로 나갔던 소니는 6이닝 3실점의 퀄리티 스타트를 했지만, 막판에 불펜이 터지면서 역전패했다.
다만 다른 놈들도 잘했다는 거지, 독보적인 건 트라웃이지만.
‘4타수 3안타. 역시 타격감이 살아 있네.’
안타 세 개와 볼넷 하나를 얻어내며, 부상 복귀 이후에도 자신이 여전히 건제하다는 걸 다시금 보여줬으니까. 무섭다, 무서워.
‘어제보다 사람이 좀 없네?’
다만 그런 승리에도, 다음날, 내 등판일에는 사람이 오히려 좀 줄었다. 뭐야, 1차전 잘 이겨놓고 왜 줄었어?
어제보다 확실히 한산한 에인절 스타디움. 물론 소음은 더 크다.
“크하하하, Suck! 오늘도 잘할 수 있지?”
“애너하임 X밥들은 원래 네 밥이잖아? 저번에 했던 경기처럼 가볍게 발라줘.”
“트라웃인지 뭐 시긴지. 어제 지랄발광을 하던데. 한번 더 제대로 교육해버려.”
“아, 예예. 혹시 사인 해드려요?”
“딱히? 우리 중에 니 사인 없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존슨, 너 사인 없냐?”
“나? 사인 볼이랑 유니폼, 글러브, 배트. 다 있는데? 애들 것도 다 있어.”
“들었지? 사인은 됐으니까, 괜히 손 피곤하게 하지 말고, 스마일, 미소나 지어. 사진이나 찍게.”
“아, 예.”
아니나 다를까, 레이더스가 바글거리네. 계속 보니까 좀 친해졌단 말이야.
매번 원정 경기마다 찾아와주는 양반들이라. 얼굴이 많이 익숙하네.
그래서 그런가, 이젠 사인도 필요없단다. 해준다고 해도 거절하네. 하긴, 웬만하면 다 받았겠지.
확실히 그··· 이상한 복장 위에 덧입은 우리 유니폼을 보면, 죄다 내 사인이 적혀 있긴 했다. 언제 이렇게 많이 해줬대.
아무튼 이 양반들 때문에 시끄럽기는 어제보다 훨씬 시끄럽긴 한데. 사람 자체는 확 줄어든 게 눈에 보였다.
“대니얼 혹시 오늘 무슨 일 있어요?”
“네? 아뇨, 딱히 없는 걸로 아는데. 혹시 Go 컨디션 안 좋아요?”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좀 사람이 적어서요.”
대충 사진 찍어주고 클럽하우스에서 환복한 뒤, 워밍업하며 대니얼에게 슬쩍 물었는데, 그는 알만 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아직은 알 수 없지만. 평소보다 적긴 할 겁니다. 인터넷을 보면, 서부지구 팀의 팬들이 Go의 경기를 별로 반기지 않거든요.”
“저요? 내가 뭘 어쨌다고?”
억울하네. 내가 뭐 나쁜 짓이라도 했어? 왜 사람을 막 그렇게 싫어하고 그러나 몰라.
심지어 자기네팀 경기까지 안 보러 올 정도로. 날 미워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안 좋네.
“별로 좋은 꼴을 못 봤잖아요? 애스트로스 정도를 제외하면.”
“최근에는 다른 지구 팀들을 더 많이 팬 것 같은데.”
“글쎄요··· 제 기억이 맞다면 Go가 지금 애스트로스 제외하면, 서부지구 팀들 상대로 무실점이거든요.”
아, 그럼 인정이지.
그러고 보면, 애스트로스한테 6월에 2실점 한 걸 제외하면, 죄다 두들겨 패긴 했어.
시즌 초반에 몰아서 만나긴 했지만, 다들 많이 얻어맞았지.
생각해보니 6월에 애스트로스전 제외하면 전승이지 않나? 이럼 나한테 치가 떨리긴 하겠네.
쉽게 말해서, 어차피 험한 꼴을 볼 것 같으니. 그냥 꼴도 보기 싫은 놈, 경기도 안 보러 온다는 거구만.
‘기대에 부응해주고 싶은데···’
다르게 보면 나를 향한 믿음(?)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거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내가 자기네들을 확실하게 팰 거라고 생각하는 거잖아?
그렇다면야 그 믿음에 보답하고 싶지만. 처음 비행기가 착륙했을 때도 그렇듯, 그리 느낌이 좋진 않았다.
원래 퍼펙트나 노히터 뒤에는 털리는 게 비공식적인 룰이니까.
‘뭐, 징키스야 깨부수면 그만이긴 하지만.’
“잡생각 마시고, 자세 바로 하십시오. 퍼펙트는 어제 내린 눈일 뿐입니다. 오늘 잘해야죠.”
“아, 네.”
멋진 말이군. 누가 한 거지?
기억해둬야겠어. 언젠가 멋진 척하면서 써먹을 날이 오겠지.
그렇게 워밍업을 마친 뒤, 불펜으로 향했을 때. 조금씩 사람이 들어오는 관중석이 눈에 들어왔다.
빨간색과 하얀색.
에인절스의 유니폼을 차려입은 이들은 저마다 자기 자리를 찾아가더니. 이내 나를 발견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살인 예고인지. 엄지 손가락으로 자기 목을 긋기도 했고.
한 60대쯤 되신 어르신인데.
이상하게 어르신들이 나 싫어하더라. 락하운즈 때도 그랬어. 유독 싫어하던 영감님이 있었지. 나중에는 결국 나한테 푹 빠지셨지만.
아마 본인이 직접 죽이겠다는 건 아니고, 트라웃이 날 죽일 거라는 뜻이겠지.
‘글쎄··· 그런 기대가 맞아떨어진 적이 한 번도 없어서.’
그런 의미에서 어르신에게 살짝 윙크해준 뒤 불펜에 들어갔다.
“이런 개-”
멀리서부터 아련하게 욕설이 날아오는데. 아무튼 못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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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절스 팬들이 바라보는 애슬레틱스는 조금 미묘했다.
같은 캘리포니아 주이긴 하나. 남부와 북부의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았으니까.
실제로 북부에선 종종 따로 떨어져 나가, 새로운 주를 걸립하겠다는 미친놈들이 나오기도 했고.
이런 지역감정은 당연하게도 스포츠에 은근하게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당장 다저스와 자이언츠, 각각 LA와 샌프란시스코라는 캘리포니아 남북의 대표적인 도시를 연고지로 한 두 팀의 관계만 보더라도 알 수 있지.
“애슬레틱스는··· 솔직히 좀 우습지.”
“오클랜드랑 우리랑 동급 취급하면 좀 억울해.”
다만 애슬레틱스와 에인절스의 사이는 그 정도까진 아니다. 둘 다 일단 대도시(LA&샌프란시스코)의 광역권(오클랜드&애너하임)이기는 하나.
솔직하게 말하면 두 도시의 차이는 조금 많이 났으니까.
물론 야구로 따진다면, 애슬레틱스는 감히 에인절스가 범접할 수조차 없는 명문팀이다.
고작 월드시리즈 1회 우승밖에 없는 에인절스와 달리, 애슬레틱스는 무려 9회에 빛나는 명문 중의 명문이니까.
거지구단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잘 부각되진 않지만.
그렇기에 약간의 감정 정도를 제외하면, 애슬레틱스와 에인절스의 관계는 크게 라이벌이라고까지 표현할 정도는 아니고.
또한 오클랜드가 가난에 시달리는 사이, 에인절스의 경우 구단주의 화끈한 투자를 바탕으로 한 우월한 자금력으로, 거의 준빅마켓에 올라섰기에.
솔직하게 말하자면, 역사를 제외한 두 구단의 체급차가 극심했기에, 굳이 애슬레틱스와 어울리기보다는, 비슷한 규모인 레인저스와 다투는 게 잦았다.
“페이롤 차이가 몇 배는 될 텐데 대체 왜···”
“저 X같은 새끼는 더 X같아져서 돌아왔네. 한동안 쭉 안 봐서 좀 좋더라니.”
다만 이번 시즌은 조금 미묘했다. 큼직한 투자에도 에인절스가 바닥에 뒹구는 반면.
애슬레틱스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반등을 이뤄내며, 당당히 와일드카드 경쟁에 나섰으니까.
두 구단의 압도적인 페이롤 차이가 무색한 관계 역전이 에인절스 팬들에게 묘하게 꺼림칙했다. 또한 지난 시리즈들에서 별로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두기도 했고.
부쩍 껄끄러워진 애슬레틱스.
그 선봉장이 오늘 마운드에 오른다. 이번이 세 번째지.
“Suck, 쟤 부모님은 이름 참 잘 지었네. Suck같은 놈.”
“S를 F로 바꿨으면, 더 완벽했겠지.”
“저 새낀 부상 좀 안 당하나? 아니, 저렇게 혹사를 당하는데 대체 왜 멀쩡해?”
“너클 커븐지 뭔지 또 장착했다고 하던데··· X같네.”
Go You-Suck.
솔직하게 말하면. 에인절스 팬들 중 이 녀석을 좋아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진짜 에인절스의 팬이라면 말이다.
뜬금없이 개막전에 나와 우리를 짓밟으며 데뷔하더니. 그다음에는 트라웃을 상대로 입까지 털어대면서 다시금 호성적을 거뒀다.
그리고 애슬레틱스의 반등의 선봉장으로서, 리그 전체를 휩쓸었고. 그것이 주는 박탈감이 상당했다.
“이번엔 입 안 털었던데.”
“이제 와서 이미지라도 챙기려는 건가? 까고 있네. 하퍼 같은 놈인 거 다 아는구만.”
“우릴 X으로 보는 거지. 그렇게나 좋아하는 도발도 안 하는 걸 보면.”
오클랜드의 몇 배는 되는 돈을 투자하고, 페이롤을 지불하는데도, 어째서 저런 투수는 애슬레틱스에서 나온 걸까?
그것이 부럽기도 했지만, 미운 마음이 더 컸기에, 지난번과는 달리 별다른 반응도 없는데도 괜히 밉게만 느껴졌다.
“저 X새끼가 지금 윙크를 해? 우릴 얼마나 X으로 보는 거야?”
아, 정정한다. 별다른 행동을 하긴 했다. 그냥 가만히 불펜에 들어가면 될 것을. 꼭 그 와중에 윙크질을 했으니까.
신사적인(?) 에인절스 팬들에게 그런 까불까불한 모습은 그리 달갑게 여기지지 않았다.
“몇 대 얻어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저런 놈은.”
“트라웃이 제대로 혼쭐을 내줘야 하는 건데···”
미운 짓까지 하는 미운 놈의 모습에 정말이지 꿀밤 한 대가 너무나도 간절했으나. 사실 전날 보다 조금 빈 관중석에서 드러나듯.
단순히 미운 감정을 넘어,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럴 만한 성적을 올리기도 했고.
“지금 ERA가 얼마냐?”
“여전히 0점대야. 한참 아래지.”
“삼진 300개 잡겠지?”
“남은 경기 감안하면, 경기 당 세 개씩만 잡아도 가능하지.”
“퍼펙트게임에 완봉에. 요즘 아주 기세등등하던데···”
“뭐 저런 놈이 나와서···”
“48이닝 연속 무실점이라던데.”
“오죽하면 다저스 팬인 내 친구가 에인절스 응원하더라니까? 제발 기록 저지해달라고.”
거기다 최근에는 퍼펙트게임까지 했단다. 자이언츠를 상대로. 최다 탈삼진까지 갈아치웠지.
심지어 48이닝 연속 무실점 중이다. 미친 기록이지. 역대 5위니까.
기세가 대단하기에, 순위가 더욱더 올라갈지도 모르지.
오죽하면 다저스 팬들이 자신들의 레전드들의 기록을 지키기 위해 에인절스를 못내 응원하기도 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일개 투수가 그런 믿지 못할 우스운 광경을 만들어낸 거다.
그렇기에 욕지거리를 토해내면서도, 홈팬들은 그가 사라진 불펜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봤고, 잠시 뒤 경기가 시작됐다.
“아···”
“왜 시작부터 맞고 난리야. 괜히 불안하게···”
“점수가··· 났네.”
시작부터 별로 안 좋았다.
1회 초부터 1실점이라니.
심지어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자식이 상대 투수인데.
괜히 선발투수 타일러 스캑스를 원망스럽게 바라본 이들은 1회 초가 끝나자, 조금 아주 조금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Go You-Suck]
전광판에 떠오른 글자.
그래, 그 녀석이 나온다.
이번 시즌 최고의 투수이자, 최악의 투수가 불펜에서 걸어나왔다.
아까 전, 장난스럽게 윙크하던 것과는 달리, 대단히 집중한 표정으로.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차라리 계속 장난스러웠다면, 혀라도 끌끌 찼으련만. 아무래도 단단히 준비한 거겠지.
“마이크!”
“오늘은 하나 날리자!”
“홈런 하나 가야지? 첫 번째는 아쉽게 놓쳤지만. 두 번째라도 날려!”
마운드에 올라, 가볍게 컨디션을 점검하는 투수를 떨리는 눈으로 보던 이들은 곧 대기타석으로 나온 두 타자 중 한명을 보며 진정했다.
마이크 트라웃. 그래, 이젠 에인절스의 굳은 믿음이 되어버린 선수, 우리한테는 그가 있다.
그리고 시작된 1회 말.
“스트라이크 아웃!”
스타트는 역시나 안 좋다.
저 투수의 특징이지.
리드오프 유넬 에스코바는 최근 유명세를 끄는 그 너클 커브에 크게 헛스윙하며 삼진으로 물러났다.
홈플레이트의 바로 뒤쪽에 있는 관중석에 앉은 이들은 그것을 보며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아니, 그보다는 탄식에 가까우리라.
“미친···”
“저런 건 또 언제 배워서···”
“서클 체인지업도 X같은데. 무슨 슬러브까지.”
조금 거리가 멀기는 해도, 타자와 거의 비슷한 위치였기에, 그 급격한 변화가 더욱더 잘 와닿았다.
대체 저 자식은 뭐가 어떻게 되먹은 놈인 걸까? 저런 것까지 장착을 해버렸다고?
그들과 잠시 만나지 못한 동안 미친 듯이 리그를 휩쓴 투수는 한층 더 괴물이 되어 애너하임으로 돌아왔다.
“마이크! 마이크!”
“어제처럼 가뿐하게 몰아치자!”
그리고 2번타자.
마이크 트라웃.
그토록 믿음직한 선수가 나왔는데도, 기대감은 처음보다 조금 줄었다.
저 투수가 더 X같아 졌다는 것이 드러났으니까. 난이도가 올라간 거지. 그런 기대와 긴장감 속에서 시작된 승부.
“스트라이크!”
역시나 초구는 몸쪽이다.
깔끔한 포심 패스트볼.
트라웃을 상대로도 변함없는 공격적인 피칭. 물론 트라웃이 초구를 잘 거른다는 건 유명한 일이기에, 대부분 스트라이크를 잡긴 하지만.
아예 대놓고 과감하게 몸쪽으로 던졌고. 압도적인 자신감마저 느껴지는 그 모습이 관중들에겐 못 마땅했다.
지난번에는 그래도 조금 긴장한 것 같더니. 이젠 그마저도 없었으니까. 마치 트라웃마저 이제 자신에겐 안 된다는 것처럼.
“볼!”
2구는 낮은 서클 체인지업.
살짝 움찔거렸지만, 구종을 읽은 건지, 트라웃은 스윙을 참았다.
여지없이 떨어진 공.
두 가지 서클 체인지업 중 그나마 약한 놈이지만, 저것에 삼진 당한 타자들이 수두룩하지. 하지만 이번엔 볼이 됐다.
“파울!”
3구째엔 스윙이 나갔다.
바깥쪽으로 살짝 걸친 코스의 포심 패스트볼. 비록 파울이 되어 투 스트라이크가 됐지만. 타이밍을 읽는 듯한 모습에 홈팬들은 기대했다.
저 X같은 투수는 최근 기세가 최고조에 달하기는 했지만, 트라웃도 타격감이 좋은 건 마찬가지다.
거기다 퍼펙트게임까지 했으니. 징크스가 발휘될지도 모르지. 피로가 누적됐을 수도 있고.
그러니 어쩌면 큰 거 한방은 몰라도, 어제처럼, 호쾌한 타격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제발, 제발 하나만.”
“하나만 날려, 하나만. 저 새끼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줘.”
팬들의 간절한 기도.
4구가 날아갔다.
이번에도 바깥쪽. 살짝 먼 코스였기에 선택지는 두 가지, 아니 세 가지였다.
너클 커브와 슬라이더의 횡 무브먼트를 이용한 백도어 혹은 그냥 아예 쭉 뺀 유인구.
워낙 구종이 다양한 투수기에, 겨우 투구 하나에도 수많은 갈림길이 존재했다.
그중에서 트라웃은 다시금 하나를 선택했고, 시원스럽게 배트를 돌렸다. 그리고-
“아웃!”
배트를 스친 공은 바닥을 굴렀다. 결과는 컷 패스트볼.
애초에 범타를 유도하려고 했었던 건지, 투수는 거의 스윙과 동시에 움직였다.
자신의 앞으로 굴러온 타구를 낚아채어 1루에 송구하는 것으로, 그는 다시금 에인절스의 기대감을 짓뭉갰다.
“아웃!”
그 뒤는 더 볼 것도 없었다.
알버트 푸홀스, 한때 역대를 논하던 최고의 타자는 이미 에인절스 팬들의 가장 큰 적이 된 지 오래였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쭉 당긴 스윙이 다시 한번 땅볼을 만들었고,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아웃이 선언됐다.
그것으로 1회 말 종료.
삼자범퇴가 참 좋았던 건지, 집중하던 표정을 집어치우고, 싱글벙글 내려가는 투수를 바라보며. 에인절스 팬들은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한 대만, 딱 한 대만 때리게 해달라고. 속이 후련할 정도로 시원스러운 한방을 때리고 싶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