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저걸 잡네.”
“맷, 쟤가 루키치고는 좀 심하게 수비를 잘하는 편이잖아?”
“우리 팀 루키들은 왜 다 이런 건지··· 진짜 때가 된 건가?”
“제대로 맞은 것 같았는데. 하여튼··· 오늘이 날이긴 날이네.”
멋진 호수비에 경기장이 요동쳤을 때. 벤치에 남은 선수들은 헛웃음마저 흘렸다.
팬들도 그렇겠지만. 우리들, 선수들 역시 오늘 이런 걸 보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정말로 그 순간인 건가?
지금 같은 슈퍼 플레이가 나올 만큼, 하늘이 내려준 날인 건가?
벤치에 남은 선수라고 해봤자, 백업 야수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투수이기에, 부러움이 덧씌워진 눈빛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Suck···’
맷 채프먼에게 아낌없이 엄지를 추켜 보이며, 눈에 띄게 기뻐하는 투수.
다른 것도 아닌, 무려 ‘퍼펙트’ 중인 투수라고 보기엔, 굉장히 가벼운 모습이다.
한편으론 그렇기에 참 잘 어울렸고. 쓸데없이 무게 잡는 것보다는, 감정이 솔직한 게 매력인 녀석이니까.
어차피 타자가 타석에 올라오는 순간, 그 누구보다도 무거워지니, 조금 가벼워도 상관없고.
“다시 조용해졌네.”
잠깐의 폭풍이 지나간 뒤.
다시 콜리시엄은 조용해졌다.
기쁘게 웃던 Suck도 후속타자를 보며 다시 싸늘한 눈초리를 했고.
그 광경을 보니, 왠지 며칠 전의 일이 떠올랐다.
며칠 전 난 구단의 연락을 받았다. ‘소니, 바깥소식은 신경쓰지 마. 우린 자네와 함께할 생각이니까.’라고 했지.
그건 이번 시즌, 날 트레이드 하지 않을 거란 뜻이었다.
‘말이 많이 나왔으니까. 프랭크도 종종 소식을 전해줬고.’
나에 대한 트레이드 소문은 숱하게 흘러나왔다. 몇몇 기자들은 거의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였지. 그게 애슬레틱스의 방식이니까.
심지어 에이전트인 프랭크도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을 정도라면, 말 다한 거다.
‘소니 정말로 가는 건 아니지?’
‘Go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소니 너도 여전히 최고야. 난 네가 월드시리즈 우승하는 장면을 보고 싶다고!’
그 소문에 제법 많은 팬들이 흔들렸다. 두려움에 휩싸였고. 이게 사실이지는 않을지. 항상 불안함에 떨었다.
비록 나를 대체할 새로운 에이스, 아니, 대체라고 말하는 것도 우스운 수준의 최고의 투수가 생겼다고는 하지만.
그들에게 소니 그레이라는 이름은 그런 존재였으니까.
‘트레이드는 없다.’
그런 팬들을 반응을 의식한 건지. 아니면 팬들과 여론이 흔들릴 자신을 걱정한 건지. 구단은 미리 통보해줬다.
너의 트레이드는 없다.
우린 계속 함께할 거다.
비록 지금은 에이스에서 밀렸다곤 하지만. 프랜차이즈 스타인 만큼 구단에서 나름 예우를 갖춰준 셈이다.
아무리 프런트라고 할지라도, 그들 자신을 마음대로 갈아치우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해준 거고.
‘프랭크는 좀 아쉬워했었지.’
그 소식에 에이전트는 많이 아쉬워했다. 그는 애슬레틱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트레이드가 된다면, 최소한 오클랜드보다는 더 좋은 도시, 애슬레틱스보다는 더 좋은 환경에서 야구를 할 수 있을 테니, 그는 아쉬워했다.
루키에게 에이스 자리를 빼앗겼다는 것에 분노하기도 했고. 뭐, 나는 별로 상관없지만.
‘내 트레이드가 없다는 건. 선택을 내렸다는 뜻이지.’
나를 트레이드 하지 않는 것에서,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구단이 무엇을 선택했는지를.
균형적인 리빌딩, 팜 키우기를 원했다면, 선발투수인 만큼 값어치가 제법 나가는 자신을 파는 게 가장 베스트니까.
‘도전.’
그래, 도전이다.
안정적인 미래를 원했다면.
기존의 방식대로, 자신을 팔고 유망주를 받아왔겠지.
그게 애슬레틱스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팀이니까.
허나 그러지 않았다는 건.
다시 한번 도전을 하겠다는 뜻이다. 그것도 꽤나 이른 시일 내에.
절묘한 타이밍일 수도 있다.
지혜롭지 못한 한탕주의가 될 수도 있고. 그건 결국 결과가 가르겠지.
허나 가장 확실한 결과를 낼 수 있는 선수가 저기, 저곳, 마운드 위에 있었다.
“아웃!”
Go, 보통 Suck이라고 불리지.
미련을 품으면서도. 기꺼이 에이스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던 선수가 저곳에 있다.
그 선수가 꿈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 역시 다시 한 번 꿈이 피어났다.
포스트시즌. 오클랜드와 애슬레틱스와 함께. 한 번 더.
이번엔 중간에 멈추지 말고. 좌절한 채 울지 말고. 한번 끝까지 가보는 거다. 이번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테니까.
‘그때의 소니 그레이보다. 훨씬 더 믿음직한 투수가 저기 있으니까.’
“스트라잌~ 아웃!”
우렁찬 주심의 목소리.
8회 초를 끝내는 삼진이 올라갔다. 이것으로 남은 이닝은 9회. 탈삼진은 열여섯.
경기장은 조용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오클랜드 최고의 슈퍼스타가 무대의 위에 있는데도, 사람들은 침묵을 유지했다.
허나 보였다. 그들의 눈동자에 씌워진 기대감, 그리고 새롭게 꾸기 시작한 꿈이.
이젠 그들의 마음을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어째서 Suck, 저 녀석을 그토록 사랑하는 건지. 열광하는 건지.
‘희망의 상징.’
에이스의 팬들이 종종 부르던 그 별명이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래, 희망이 저곳에 있다.
8회는 끝났고. 꿈같은 순간까지 남은 거리는 단 한 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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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정숙해주시기 바랍니다.
8회 말의 공격은 심심하게 끝났다. 아니, 심심하게 끝냈다.
이번에도 타자들은 그저 적절하게 시간을 조절했으니까.
그렇게 8회 말이 끝나고, 공수교대가 시작될 때쯤. 스피커에서 나온 목소리는 관중들에게 정숙을 요청했다.
사실 굳이 그럴 이유가 있는가는 조금 의문이다. 8회 초에 맷 채프먼 덕분에 조금 시끄러워진 걸 제외하면.
콜리시엄은 내내 조용했으니까. 그것도 한참 전부터 말이야.
‘긴장들 빡 하셨네.’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여기도 꿀꺽, 저기도 꿀꺽.
그만큼 긴장된다는 거겠지.
이제 그냥 대놓고 말한다.
퍼펙트까지 남은 건 단 한 이닝이다. 9회만 남아 있지.
마지막 발도장만 찍으면 되는 건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거든.
9회에 망한 퍼펙트게임이나 노히터가 얼마나 많은데.
‘체력이지. 결국에는.’
뭐, 종종 언론에선 그런 말을 한다. 다 끝났다는 생각에 방심해서 그렇다, 기록에 눈이 멀어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자만심 때문이다, 등등.
아주 별소리를 다 하는데. 솔직히 그냥 개소리지. 퍼펙트게임을 목전에 두고 자만하는 또라이가 어딨어. 그냥 체력문제지.
퍼펙트게임은 오히려 일반적인 완봉보다 투구수가 적은 경우가 종종 있다. 안타나, 볼넷이 없는 만큼. 오히려 투구수가 적은 거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9회를 풀로 던지는데. 지치지 않을 투수는 아마 없을 거다.
‘그러니까 위험하지.’
나도 마찬가지고.
버스터 포지라는 마지막 관문은 넘었지만, 위기가 끝난 건 아니지.
아무리 컨디션이 좋은 날이라고 해도, 지금 몸 상태가 말이 아닐 테니까. 잘 느껴지지는 않지만.
‘내일 좀 힘들겠네.’
정말로 하든 못하든. 내일은 죽은 듯이 엎어져 있어야겠어. 안 그러면 뒤질 테니까.
내가 멍하니 그라운드를 보고 있을 때.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난 동료들은 나를 보고 있었다.
마치 출동 명령을 내려달라는 것 같은 눈빛이네. 대장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썩 나쁘지 않구만.
“가죠. 다들 쫄지 말고. 그냥 평소처럼 해요. 뭐, 대단한 거 한다고. 역대 최초도 아닌데.”
“캬~ 역시, 우리 에이스는 배포가 다르다니까? Suck 니가 진짜 자이언츠네. 자이언츠답게 아주 Big Ball이야.”
“그래, 너 같은 괴물한테 이게 뭐 대단한 거겠어. 앞으로 몇 번은 더 할 텐데.”
“자이언츠 새끼들 불쌍하니까, 금방 끝내주자. 얼마나 쪽팔리겠어?”
괜히 너스레를 떠니. 분위기는 한결 나아졌다. 그래, 너무 긴장했더라. 누누이 말하지만 그러면 안 좋아.
차라리 그냥 설렁~설렁 스무스하게 공 잡는 게 낫지. 뻣뻣하면 될 것도 안 되니까.
슬그머니 길을 터준 선수들은 나를 선두로, 다시 그라운드로 들어섰고. 모두 그 자리 그대로 남아 있던 우리 팬들 역시 나를 봤다.
‘뭐야, 꼬맹이 너 그러면 안 돼. 사람이 일관성이 있어야지. 내가 아무리 멋있다고 해도.’
흘끔 아까 전에 봤던 곳을 훑었다. 억장이 무너지고, 멘탈이 터졌던 꼬마 자이언츠와 그 가족들.
부모들은 굉장히 착잡한 눈빛을 하고 있었는데. 정작 그들이 달래줬던 꼬맹이는 오히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또렷이 쳐다봤다.
자이언츠의 열성팬인 줄 알았더니. 이거이거, 어린녀석이 철새였네. 그럼 또 못 참지. 팀이 스몰마켓인데, 명색이 에이스로서 팬을 늘려야줘야하지 않겠어?
씨익 웃으며 윙크하니, 화들짝 놀란 꼬마는 이내 양 옆의 부모를 두들기며 자랑하듯 조잘거렸다.
너무 멀어서 잘 안들리지만. 아마 자랑하는 거겠지. 자기한테 윙크해줬다고. 이것으로 애슬레틱스의 팬이 하나 더 늘었다.
‘다음에는 우리 팀 유니폼 입고 와라.’
자, 이렇게 멋진 척까지 했는데. 이젠 낙장불입이다. 이래놓고 못 하면, 애가 날 얼마나 X신처럼 보겠어.
생각해보니, 윙크하는 거 카메라에도 잡혔을 텐데. 퍼펙트 못하면, 온갖 말이 다 나오겠네.
자만심 때문에 망쳤다는 둥. 루키 주제에 오만하다는 둥. 어우, 생각만 해도 보기 싫다.
“브루스, 지금까지 잘 받아줬어. 마지막만 잘 마무리하자. 그럼 내가 롤렉스 사줄게.”
“혹시 파텍 필립은 안 돼? Suck 너 스폰서 계약으로 돈 많이 벌었다며.”
“또라이냐? 내 연봉보다 비싸겠네.”
미친놈이 누구 재산을 거덜 내려고. 그냥 롤렉스로 만족해라.
그래도 농담을 하는 것을 보아, 긴장은 좀 가신 것 같다. 공 놓치진 않겠어. 얘한테도, 나한테도 참 다행이구만.
이런 날 공 하나 놓치고, 그거 때문에 퍼펙트 깨지는 순간, 천하의 죽일 놈 되는 거 한순간이니까.
아니지, 여긴 오클랜드잖아, 죽일 놈이 아니라 죽‘은’ 놈이 될지도···
‘7,8,9. 딱 좋네.’
타순은 7,8,9번으로 이어진다. 퍼펙트니까,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지.
제일 못하는 놈들이잖아. 물론 자이언츠에서 대타를 낼 수도 있겠지만.
‘그래 준다면 오히려 땡큐지.’
내 서클이랑 너클 커브를.
대타로 들어와서, 아예 모르는 상태로 상대한다고? 좀 자랑이기는 한데. 타자들 입장에선 진짜 최악일 거다.
물론 다른 놈들보다 쌩쌩하니, 힘이야 더 좋겠지만. 그것도 일단 타격할 수 있어야 효과가 있는 거지.
‘패스트볼은 좀 떨어졌을 것 같은데.’
지난 이닝까진 괜찮았지만.
지금은 또 모른다. 원래 구위라는 게 훅훅 떨어지거든. 차근차근 완만하게 내려가는 게 아니라.
부디 그러지 않기를 깊이 바라며, 마운드 위에 홀로 섰다.
완투의 기분은 참 좋다.
이 마운드의 주인이 오직 나뿐이라는 게 꽤 마음에 들거든.
상대 투수들도 있기는 한데.
여긴 우리 홈이잖아.
걔들은 손님이지, 손님.
주인은 나고.
9회 내내 오른 덕분에 마운드 깊이 찍힌 내 발자국에 맞춰 서니, 감각이 올라왔고. 멍한 머리가 조금 맑아졌다.
이제야 좀 실감 난다.
지금 내가 어떤 순간에 서 있는지. 내 눈앞의 마지막 결승선을 넘으면, 무엇이 달성되는지가.
퍼펙트게임. 투수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영광. 몇 개의 사이 영을 타고, 전설처럼 남은 투수들조차 못해본 이들이 수두룩한 기록.
그것이 지금 내 앞에 있는 거다. 거기까지 단 세 명의 타자, 세 개의 아웃카운트만이 남은 것이고.
‘못 먹어도 Go지. 어깨가 박살나는 한이 있더라도.’
곧은 자세로 기다렸다.
내 마지막을 장식할 상대들을.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 때, 타자는 드디어 올라왔다.
7번타자, 카를로스 몬크리프.
세 번째 타석을 맞이한 그는 꽤나··· 복잡해 보였다.
날 때려죽이고 싶으면서도.
그게 불가능할 거라는 걸, 스스로 너무나도 잘 아는 듣한 눈빛이지.
“스트라이크!”
그렇다면 얘는 괜찮다.
최소한 내 길에 똥물이라도 뿌리겠다는, 더러운 집착 정도는 있어야 하는데. 스스로 제대로 결단조차 내리지 못했다면. 더 말할 것도 없지.
초구는 몸쪽으로 낮게. 포심 패스트볼 하나. 번뇌가 계속되는 이상, 어차피 스윙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과감하게 넣었다.
역시나 스트라이크.
구속은 86마일. 확 줄었네.
전력으로 던진 건데.
그래도 평소보단 빠르지만.
평소에는 9회까지 던지면 86마일이 아니라, 82~3마일까지 훅 떨어지거든. 구위도 그럭저럭 아직은 괜찮고.
‘오. 정신 차렸네.’
과감한 코스가 그를 일깨워 준 걸까? 정신이 번쩍 든 건지, 카를로스 몬크리프는 눈을 번뜩이며 스윙했다.
바깥쪽 코스. 배트를 쭉 내밀며 가져다 맞춘 그였지만. 공은 틱-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아웃!”
이걸 치네. 하지만 역시나 힘이 약하다. 파워툴이 없는 수준이라니까.
2루수 방면으로 향한 타구는 타자의 집념이 담긴 건지, 제법 빠르긴 했지만. 집념은 우리 쪽도 만만찮게 커서 말이야.
제드 라우리는 평소 실없는 사람 같은 모습 대신, 극도로 집중한 얼굴로 부드럽게 타구를 잡아 정확한 송구를 1루수, 욘더 알론소의 글러브 속에 꽂아 넣었다.
‘이걸로 원아웃.’
싸게 막았네. 2구 만에 아웃당한 카를로스 몬크리프는 한없이 절망하며 비틀비틀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만약 팀을 퍼펙트에서 구해냈으면. 루키로서 꽤나 큰 인상을 남길 수 있었을 텐데. 그 기회를 날렸구만.
다음은 8번타자 닉 헌들리.
앞서 말했듯 포수다.
지명타자로 나온 버스터 포지 대신이지. 물론 타격실력은···
“스트라이크!”
그보다 훨씬 못하고.
그랬다면 백업이 아니라, 이미 밀어냈겠지. 그는 바깥쪽으로 던져진 초구에 재빠르게 스윙했다.
퍼펙트게임을 앞두고 있으니.
내가 굳이 질질 승부를 끌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하지만 쭉- 빨려 나가는 역회전에 공은 야속하리만치 배트에게서 멀어졌다. 헛스윙 스트라이크.
‘역회전이 좀 줄었어. 손가락 힘이 좀 떨어진 거야.’
다만 나도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다. 서클 V2가 좀 약해졌으니까. 힘이 떨어진 거겠지.
확실히 훅훅 떨어지고 있구만. 그나마 9회라서 다행이네.
“볼!”
2구는 다시 한 번 바깥쪽. 하지만 낮게. 너클 커브로 살짝 스트라이크존을 스치며 헛스윙을 유도하려고 했는데. 타자는 인내심을 가지고 골라냈다.
까다롭게 구는구만. 그냥 얌전히 내려가 주시지. 끈질기시네.
“파울!”
그럼 다시 기선을 잡아야지.
3구는 높게 찍었다. 하이 패스트볼. 낮게 하나, 위에 하나는 원래 정석 중의 정석이지만.
바로 꺼낼 줄은 몰랐던 건지, 타자는 조금 조급한 자세로 타격했고, 빗맞은 타구는 라인을 넘었다.
‘치긴 쳤네. 구속이랑 무브먼트가 많이 떨어지긴 했어.’
그래도 이제 투 스트라이크.
주도권도 다시 잡아왔다.
‘빠르게 가자.’
한 구를 뺄 수도 있겠지만. 던질수록 점점 더 떨어지는 폼이 마음에 걸렸다. 이거, 길게 가면 X된다.
그런 의미에서 4구는 다시 한번 더 과감하게 몸쪽, 그리고 높은 코스. 타자의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설마? 싶었겠지.
침을 꿀꺽 삼킨 그는 이내 결정을 내린 듯 배트를 휘둘렀고. 스윙은 살짝 아래를 노렸다.
서클 체인지업 혹은 너클 커브. 브레이킹볼 계열이라고 생각한 거겠지. 연이어 하이 패스트볼인 척하면서. 헛스윙을 유도하는 거라고.
“아웃!”
맞는 말이다. 포심은 아니니까. 하지만 하이 패스트볼은 하이 패스트볼이지.
커터, 구속도 포심이나 투심보다 좀 느리기에, 변화구로 착각할 만도 하네.
살짝 하강 무브먼트를 보인 공은 아래로 휘둘러진 배트의 윗부분을 툭 스쳤고.
홈 플레이트 위로 떠오른 공을 브루스는 조심스럽게 포구했다.
‘멀쩡한 것 같더니. 엄청 쫄았네.’
그거 뭐, 힘든 플레이라고. 아주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는데. 덩치가 아깝구나, 이 쫄보야.
‘다 왔네.’
이제 투아웃.
남은 타자는 단 한 명.
콜리시엄은 신성한 성지라도 되는 것처럼, 엄숙한 분위기가 흘렀다. 약간 도서관 같기도? 일생을 통틀어 도서관에 가본 적이 없긴 하지만.
‘역시 대타인가.’
마지막 한 명이 남은 상황에서. 자이언츠 감독은 자신의 선수를 믿지 못했다.
아니, 그보다는 욕이 안 먹는 선 안의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나를 흔들고 싶은 거겠지. 흐름을 끊으려는 거고.
‘미구엘 고메즈. 누구였더라.’
대타로 나온 건 미구엘 고메즈. 잘 기억은 안 난다. 분명히 분석 자료에 있었는데.
원래 체력이 빠지면, 기억력도 같이 줄어들거든. 아무튼 그렇다.
‘최소한 슬러거는 아니야.’
몸만 봐도 6피트도 안 돼 보이니, 절대 슬러거가 아니긴 한데. 그것 외에도 만약 파워가 인상적이었다면. 분명 내가 기억했겠지.
다른 건 몰라도, 나한테 위험한 타자에 대한 자료는 절대로 까먹지 않으니까.
‘좌타자인가?’
대타로 나온 타자는 좌타석으로 들어왔다. 좌타자이거나, 내 서클이 두려웠던 스위치 히터거나. 둘 중 하나겠지.
‘스트라이크존이 좀 짧아지겠네.’
타석에 서니 대충 눈대중으로 키가 보인다. 한 5.8~5.9피트 정도. 미국에서 살다보니까, 피트가 더 익숙하단 말이야.
미터로 전환하면 한 178~180쯤 되겠네. 아니다, 180은 안 되겠네.
아무튼 키가 작다보니, 스트라이크존은 자연스럽게 짧아졌다. 막판에 와서 존을 다시 재설정한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아프네.
어쩌면 상대팀 감독이 이걸 노린 걸지도. 나한테 정신적인 타격을 줘서, 흔들려는 거지.
‘일단 간부터 보자.’
파워는 인상적이지 않을 것 같지만. 컨택이나 선구는 어떨지 모르니, 일단 한번 쑤셔 봐야지.
포심 패스트볼.
바깥쪽으로 낮게.
겸사겸사 스트라이크존도 확인하기 위한 코스인데.
“스트라이크!”
오케이, 일단 생각보다 많이 짧지는 않네. 하긴, 지금 내가 퍼펙트 중이잖아.
주심으로서도 조금이라도 말 나올 것 같은 일은 최대한 기피하겠지.
혹시라도 퍼펙트 말아먹었는데, 내가 막 인터뷰로 ‘스트라이크존이 마지막에 바뀌었다. 그거 때문에 실패했다. 주심 X새끼.’ 이런 얘기 하면 얼마나 곤란하겠어?
거기다 하나 더. 타자의 선구안이 별로 좋지는 않다. 공을 고른 게 아니라. 아예 나간 것처럼 취급했으니까.
‘애매하긴 했어도. 아슬아슬한 코스였는데, 아예 저렇게 무시했다는 건. 그냥 선구 자체를 못 했다는 뜻이지.’
거기에 스트라이크까지 잡았으니, 일석삼조구만. 조금 안도감이 느껴졌으나, 마지막까지 마음을 붙잡았다.
혹시 알아. 저것까지 연기일지. 내 퍼펙트를 망치려고 자이언츠가 몰래 키운 비밀병기일지도 몰라.
약간 호리호리한 저 몸 안에는 헤라클레스나 헐크처럼 우락부락한 근육이 가득 차 있는 거지. 어쩌면 말린스의 고릴라, 스탠튼 같을 수도 있고.
워낙 믿을 수 없는 기록을 눈앞에 두고 있어서 그런가, 별의별 피해망상이 다 떠오르네.
‘잡생각 하지 말자. 유석아. 그러다 나중에 피눈물 흘린다.’
마음 같아선 뺨을 한 대 치고 싶지만. 그러면 진짜 미친놈 취급받을 테니까, 참자.
다시 집중해서, 타자를 보니, 목울대가 움직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음, 아주 탐스러운 목젖을 가지고 있군. 긴장하셨나봐?
“파울!”
다시 바깥쪽으로 하나 더.
이번엔 슬라이더로.
그래도 아까 전의 코스에서 교훈을 얻은 건지, 이번엔 배트를 냈다. 빗맞아서 파울라인을 넘긴 했지만.
이것으로 투 스트라이크.
타자는 한 차례 더 침을 삼켰고. 그것을 보니.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대략 예상이 됐다.
9회말 투아웃 투 스트라이크.
퍼펙트게임까지 남은 카운트는 단 하나. 그리고 타석에 있는 건 좌타자.
그거밖에 없지.
타자가 보기에도 말이야.
벤치에서나마 위력을 잘 봤을 테니, 긴장스러울 수밖에.
그와 잠깐 눈을 맞췄다.
그래, 선구안이 별로 안 좋았지. 눈이 좋은 타입은 아니야.
그렇다면, 확실하게 가자.
‘이걸로···’
와인드업. 이번 경기 마지막 동작일 거다. 그렇게 바라고, 그렇게 믿었다.
길게 다리를 뻗으며, 오늘 경기, 백번이 조금 안 되게 밟았던 지점을 발바닥으로 꾸욱 눌렀다.
그대로 하체를 기둥 삼아 상체를 끌어오며 팔을 휘두른다. 다리에서 엉덩이로, 엉덩이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어깨로. 팔꿈치, 손목을 지나.
마침내 손가락까지 다다른 힘을. 최선을 다해, 사력을 다해 쏘아 보낸다.
‘끝이다.’
타자는 배트를 휘둘렀다.
더 물러설 곳도 없으니까.
바깥쪽으로 낮게 휘두른 스윙. 그는 마치 묘한 확신마저 있는 것 같았다.
스윙만 봐도 알 수 있다.
그가 노린 구종이 무엇인지.
내 너클 커브를 잡아보시겠다? 꿈도 야무지구만. 브라이스 하퍼나 애런 저지도 처음 봤을 땐 기겁했던 공인데 말이야.
하지만 만약이라는 것이 있으니. 나는 조금 더 안정을 추구했다. 만에 하나, 저 미구엘 고메즈가 너클 커브, 슬러브 공략에 특화된 스페셜리스트 일 수도 있잖아?
마지막 순간 대타로 나온 만큼,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그렇기에 내가 던진 건.
“스트~~~~라잌 아웃!”
그냥 슬라이더다.
궤적은 비슷했지만, 공은 너클 커브처럼 크게 하강하지 않았다. 그저 횡으로 꺾으며 포수 글러브 안으로 들어갔을 뿐.
주심은 큰 소리를 토해냈다.
마치 평생 이 순간 만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물론.
“으아아아아아아!”
“Suuuuuuuuuuuuuck!”
했어! 진짜 했어! 썩이 진짜 해버렸어! 퍼펙트다 퍼펙트!“
“X발 퍼펙트다아아아악!”
그래봤자 우리 팬들에 비하면 발톱의 때 정도겠지만 말이야.
귀가 멀어버릴 것만 같다.
중간에 조금 새어나오긴 했지만. 내내 꾹 참아왔기에, 더욱더 열정적이게, 더욱더 큰 목소리로, 더욱더 우렁차게 소리쳤다.
이 정도면 유리도 깨지 않을까? 아니, 유리가 문제가 아니라, 콜리시엄이 무너질 거 같은데? 살짝 흔들린 것 같기도?
마치 SF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음파병기처럼, 수만 명 사람들이 다 함께 내지른 소리는 거대한 야구장이 조금 흔들릴 만큼 강력했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지.’
무려 퍼펙트게임인데, 솔직히 이 정도도 안 되면 던진 보람이 있겠어?
9이닝 17탈삼진. 무피안타 무볼넷 무사사구 무실점. 퍼펙트. 오늘 내 성적이었다.
“꺼져! 꺼져! 손대지 마! 자, 착하지? 흥분한 건 이해하는데, 다 떨어져. 어, 어어- 왜 들어올려-”
그 뒤는 또렷하게 기억난다.
과도한 흥분이 각성을 일으킨 건지. 아주 생생하게 기억나지.
동료들이 나한테 달려든 것도. 알아듣지 못하는 굉음을 내머 환호하던 것도. 결국 자기들 흥에 못 이겨 날 공중부양 시킨 것도.
피로가 한꺼번에 찾아온 건지. 정신은 또렷한데 몸은 축 늘어져서, 그런 망할 놈들의 거친 손길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한 것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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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삼진, 최후의 아웃카운트가 올라가고. 메이저리그 역사상 스물네 번째 퍼펙트게임이 탄생했을 때.
기자들은 마치 그것이 발사 카운트다운이라도 되는 것처럼, 일제히 엔터를 눌렀다.
모두가 기다렸던 순간이니까.
<댈러스 브레이든에 이어, 애슬레틱스 역사상 3번째 퍼펙트!>
수많은 기록이 탄생했고. 딱히 무언가를 더 만들거나, 보탤 필요 없는 스토리가 흘러넘쳤다. 퍼펙트게임. 그것 하나만으로 충분했으니까.
<킹 펠릭스 이후, 5년 만의 쾌거! Go, 새로운 King에 올라서다!>
퍼펙트게임 최다 탈삼진 갱신했다. 심지어 맷 케인 본인이 보는 앞에서, 그의 선발투수 맞상대로서.
지난 6월, 양키스에게 노히터를 기록했기에, 그것 역시 최초의 기록이었다.
한 페넌트레이트 동안 퍼펙트게임과 노히트노런, 두 가지를 모두 다 달성한 선수는 여태까지 없었으니까.
2010년, 로이 할러데이가 퍼펙트게임을 달성하고, 포스트시즌에서 노히트를 기록하긴 했지만.
물론 퍼펙트게임 역시 노히트노런으로 간주되기에, 다소 미묘한 기록이긴 하나, 역대 최초라는 것은 변함없었다.
<11만 2천 달러짜리 퍼펙트게임.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잭팟이 터졌다?>
<4승 0패 37이닝 자책점,실점 ‘Zero’ 65탈삼진. 2완봉승 1퍼펙트게임. 고유석, 역사에 남을 한 달을 보냈다.>
<고유석, 48이닝 연속 무실점, 본인 기록 갱신! 목표는 오렐 허샤이저?>
그것으로 고유석의 7월은 완성됐다. 두 번의 완봉, 그중 하나는 퍼펙트. 거기에 무실점과 48이닝 연속 무실점까지.
수많은 기록이 쏟아졌고.
11만 2천 달러짜리 선수가 미국을 건너 온 뒤, 단 6년 뒤에 해낸 일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기꺼이 경의를 표했다.